삼한문제의 신고찰(4) -진국 및 삼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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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한나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10월 10일 (목) 00:00 판 (본문1: 5. 마한 및 진한 문제 (승전(承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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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문제의 신고찰(4) -진국 및 삼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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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원제목 三韓問題의 新考察(四) -辰國 及 三韓考-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진단학보 5 발행기관 진단학회
저자 이병도 역자 집필일자 게재연월 1936년07월
시작쪽 092쪽 종료쪽 118쪽 전체쪽 027쪽 연재여부 연재 범주 논문 분야 역사학



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내용을 입력합니다.@




목차







본문


본문1: 5. 마한 및 진한 문제 (승전(承前))


(을) 위지동이전 진한조 기사의 검토와 진한의 기원 및 실체
쪽수▶P92-1 (乙) 魏志東夷傳辰韓條記事의 檢討와 辰韓의 起源及實體
마한 문제-특히 그 강역 및 진한과의 관계-는 진한 문제의 고찰을 따라 더 구명될 것이 있으므로, 차회(此回)에 있어서는 오로지 진한 문제 에 대하여 논난(論難)하려고 하거니와, 이(진한) 문제를 해석함에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기(下記)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 진한조(辰韓條) 기사에 대한 심각한 검토가 있어야 될 것이다.
쪽수▶P92-2 馬韓問題-특히 그 疆域 及 辰韓과의 關係-는 辰韓問題의 考察을 따라 더 究明될 것이 있으므로, 此回에 있어서는 오로지 辰韓 問題에 대하야 論難하려고 하거니와, 이(辰韓 )問題를 解釋함에는 무엇보다도 먼저 下記 󰡔魏志󰡕 (東夷傳) 辰韓條 記事에 대한 深刻한 檢討가 있어야 될 것이다.
辰韓 在馬韓之東 其耆老傅世自言 古之亡人 避秦役 來適韓國 馬韓割其東界地 與之 有城柵 其言語 不與馬韓同 名國爲邦 弓爲弧 賊爲寇 行酒爲行觴 相呼皆爲徒 有似秦人 非但燕齊之名物也 名樂浪人爲阿殘 東方人名我爲阿 謂樂浪人本其殘餘人 今有名之爲秦韓者 始有六國 稍分爲十二國
쪽수▶P92-3

辰韓 在馬韓之東 其耆老傅世自言 古之亡人 避秦役 來適韓國 馬韓割其東界地 與之 有城柵 其言語 不與馬韓同 名國爲邦 弓爲弧 賊爲寇 行酒爲行觴 相呼皆爲徒 有似秦人 非但燕齊之名物也 名樂浪人爲阿殘 東方人名我爲阿 謂樂浪人本其殘餘人 今有名之爲秦韓者 始有六國 稍分爲十二國

위 기사를 다시 알기 쉽게 분해하면
쪽수▶P93-1 위 記事를 다시 알기 쉽게 分解하면
(1) 진한은 그 위치가 마한의 동쪽에 있다는 것
쪽수▶P93-2 (一) 辰韓은 그 位置가 馬韓의 東쪽에 있다는 것
(2) 진한 기로(耆老)의 전설에 (이르되), 옛적의 망인(亡人, 망명인)이 진역(秦役)을 피하여 한국에 왔더니, 마한이 그 동계의 땅을 베어 주었다는 것 (그리고 마한과 달리 성책이 있다는 것)
쪽수▶P93-3 (二) 辰韓 耆老의 傳說에 (이르되), 옛적의 亡人(亡命人)이 秦役을 避하야 韓國에 왔더니, 馬韓이 그 東界의 地를 베어 주었다는 것 (그리고 馬韓과 달리 城柵이 있다는 것)
(3) 또 진한의 언어는 마한과 같지 아니하여 국(國)을 방(邦)이라 하고 궁(弓)을 호(弧)라 하고 적(賊)을 구(寇)라 하고 행주(行酒)를 행상(行觴)이라 하고 서로 불러 주(徒)라 하여, 진인(秦人)과 유사함이 있고 비단 연제(燕齊)의 명호물색(名號物色)뿐만 아니라는 것
쪽수▶P93-4 (三) 또 辰韓의 言語는 馬韓과 같지 아니하야 國을 邦이라 하고 弓을 弧라 하고 賊을 寇라 하고 行酒를 行觴이라 하고 서루 불러 徒라 하야, 秦人과 類似함이 있고 非但 燕齊의 名號物色뿐만 아니라는 것
(4) 진한인이 낙랑인을 지칭하여 ‘아잔(阿殘)’이라고 하니, 아(阿)는 동방어에 아(我)란 말로 ‘낙랑인은 본래 그들(진한인)의 잔여인이라’는 뜻에 불과하다는 것
쪽수▶P93-5 (四) 辰韓人이 樂浪人을 指稱하야 「阿殘」이라고 하니, 阿는 東方語에 我란 語로 「樂浪人은 본래 그들(辰韓人)의 殘餘人이라」는 뜻에 不過하다는 것
(5) 찬자 시대에 진한을 진한(秦韓)이라고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쪽수▶P93-6 (五) 撰者時代에 辰韓을 秦韓이라고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6) 진한은 처음에 6국이더니 뒤에 조금 나누어져서 12국이 되었다는 것
쪽수▶P93-7 (六) 辰韓은 처음에 六國이더니 후에 조곰 나누어져서 十二國이 되었다는 것
이다. 그런데 위 기재 중에는 찬자 혹은 원기자의 선인견에 의한 부회와 억해가 섞여 있음으므로 이를 그대로 승인하여서는 아니될 것이요, 불가불 분석 비판을 요한다. 첫째 진한의 내력을 말하는 제2단 기재 중에 「古之亡人 避秦役來適韓國」이라 한 진역(秦役) 2자가 일대 의문의 글자이니, 이것이 과연 진한 기로의 설을 그대로 틀림없이 옮겨 놓은 것인지? 혹은 기자의 어떠한 주관적 오해에서 부회 변작(變作)된 것인지 생각해 볼 문제이다. 위지보다 뒤에 된 후한서(後漢書)에는 위의 구절을 한층 더 개필하여 「秦之亡人 避苦役 適韓國云云」이라 하고 또 위의 (위지 기사의) 3단과 5단과를 직접 연락시키어 「有似秦語 故或名之爲秦韓」이라고까지 명언하였다. 진서(晋書) 동이전 진한조에도(후한서의 것을 승습(承襲)하여) 이와 같은 기사를 보여준다. 그리하여 종래의 사가는 진한이라면 의례히 이를 진(秦) 망인의 후예로 관념하게 되었다. 위지에는 이와 같이 명시하지는 아니하였지만, 그래도 그러한 의미의 어취(語趣)가 없는 것은 아니다. 진한을 진한(秦韓)이라고 한 것은 물론 사실이나, 그것이 진한의 언어가 진인(秦人)과 같다는 이유에서 된 것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진(辰)과 진(秦)이 음(音) 상동(相同)하여 진한을 혹 진한(秦韓)이라고도 하였다 하면 몰라도, 진인(秦人) 혹은 진어(秦語)와 유사함이 있어서 그와 같이 이름하였다고 함은 너무도-글자에 구니(拘泥)된 억설(臆說)로-곧이 들리지 않는 견강부회라고 하지 아니하면 아니되겠다. 이로써 미루어 보면 위지의 ‘진역(秦役)’ 2자도 실상 그것이 진한 기로의 설 그대로라고 하는 것보다, 차라리 기자 혹은 수사자(修史者)가 「진한의 언어가 진인(秦人)과 근사(近似)하고 또 진한을 진한(秦韓)이라고도 한 즉 진한은 진(秦)의 고역 혹은 가역(苛役)을 피하여 동래(東來)한 중국인의 부락이리라」는 그릇된 선입적 논리에서 이를 변작한 것이라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 아닌가. (후한서 진서 등의 기사는 이 위지의 것을 승와(承訛) 전와(轉訛)한 제2차, 3차의 사료이므로 더구나 문제 거리가 되지 않는다.) 즉 진한기로의 전설은-추측이지만-본시 “고지망인(古之亡人)이 난(難)(혹은 난(亂))을 피하여 한국에 왔었다 운운”한 데 불과한 것을 수사자가 이상의 선입견을 가지고 그와 같이 부회한 것이 아니었던가 한다. 만일 위지의 진역(秦役) 2자를 살리어 후한서와 같이 해석하여 진한을 진망인(秦亡人)의 후라고 한다 하면, 그 언어 및 기타는-바로 진한인(秦漢人) 그대로일 것이니-진인(秦人)과 유사하다고 말할 배가 아닐 것이며, “有似秦人”이니 “有似秦語”니 한 것은 대단히 약한 말이라고 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더구나 그 (진인(秦人)과) 유사하다고 열거한 진한어(辰韓語)가-국(國)을 방(邦)이라하고 궁(弓)을 호(弧), 적(賊)을 구(寇), 행주(行酒)를 행상(行觴)이라 하고 상호(相呼)하여 도(徒)라고 한다는 그 말들이-다 과연 진한인의 본래의 국어이냐 아니냐 하는 것이 또한 문제 거리다. 중국인 혹은 그 유이민의 후예가 아니라도, 중국과의 정치, 문화, 경제 상의 구원한 교섭이 있던 주위 민족에 있어 특히 한학의 교양을 가진 지식 계급의 일상용어 중에, 허다한 유의 한어가 사용된 예는 무엇보다도 금일의 조선어나 일본어 중의 그것을 보아 더 잘 알겠지만, 고대 반도 북부 지방에 한(내지 위진(魏晋))의 군현이 개치(開置)되어 있었을 때에-그 군현 내의 토민은 물론이요-그 주위에 접근한 여러 민족의 언어습속상에 끼친 중국문화의 영향이 어떠하였을 것은 넉넉히 상상할 수 있다 (위지 동이전 한조에 “其北方近郡(樂浪帶方) 諸國 差曉禮俗云云”이라 한 것도 중국 예속의 영향을 말한 것이다). 진한과 역사지리상으로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고 생각되는 백제의 언어풍속에 관한 양서(梁書) 동이전(백제전(百濟條))의 기사를 보면, “今言語服章 略與高驪同………帽曰冠 曰復衫 袴曰褌 其言參諸夏 亦秦韓之遺俗云”이라 하여, 이 역시 진한(秦韓, 辰韓)의 유속(遺俗)이라 한다 하고 또 “其言參諸夏”라고 하였지만, 관(冠)이니 복삼(複衫)이니 곤(褌)이니 하는 말들은 본래의 고유 한어가 아니요 즉 외래 한어의 영향이라고 보지 아니하면 아니되며, 또 계림유사(鷄林類事)에 실린 고려방언(高麗方言) 중에 천왈천(千曰千)이라 하고 만왈만(萬曰萬)이라 하고 해왈해(海曰海) 강왈강(江曰江) 계왈계(溪曰溪)라 하고 인왈인(人曰人) 주왈주(主曰主) 병왈군(兵曰軍)이라 하고 복두왈복두(幞頭曰幞頭) 모자왈모(帽子曰帽) 포왈포(袍曰袍) 대왈요대(帶曰腰帶)라 하고 청왈청(靑曰靑) 흑왈흑(黑曰黑) 적왈적(赤曰赤) 홍왈진홍(紅曰眞紅) 비왈비(緋曰緋)라 하고 인왈인(印曰印) 차왈차(車曰車) 탁자왈식상(卓子曰食床) 임왈임(林曰林)이라 하고 묵왈묵(墨曰墨) 비왈비(轡曰轡) 기왈기(旗曰旗) 일왈장도(釰曰長刀)라 한다(기타 생략)는 것도 다 외래어임은 물론이거니와, 외래어 중에도 상용하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가 있는 것은 또한 사실이니 이상 제어 중에도 그러한 것이 있을 줄로 안다. 중국의 문화를 여지 없이 흠모할 시대에, 중국인과의 공적 혹은 사적 교제에 있어 자아의 이속을 될수록 감추려 하던 지식계급의 태도로는 불상용의 외래어(한어)라도 상용의 것처럼 표시한 일도 있었을 것이므로, 이러한 것을 특히 고려치 아니하고 기사 그대로 신용하려 하여서는 안된다. 그리고 보면 진한어에 국(國)을 방(邦)이라 하고 궁(弓)을 호(弧), 적(賊)을 구(寇), 행주(行酒)를 행상(行觴)이라 하고 상호하여 다 도(徒)라고 한다는 그 말들은, 실상 진한의 고유국어가 아니라 이러한 외래의 한어류로 그 중에는 역시 실제에 상용하지 않는 자도 있었으리라고 생각된다. 동시에 “其言語不與馬韓同”이란 것은 실상 이러한 어류를 보고 내린 말이므로 거기에도 작량할 필요가 있다. 진한이 북방에서 유이해 온 족속의 사회인 만큼, 그 언어가 마한과 다소의 이동은 있었을지언정 전혀 별계통의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필자는 일찍이 이 문제에 관하여 자산(自山) 안확(安廓)씨와도 (좌담적으로) 토론한 적이 있었는데, 자산의 설은 “궁위호(弓爲弧)의 호(弧)는 조선어 활(弓)의 사음(寫音)이요 적위구(賊爲寇)의 구(寇)는 ‘괴’의 사음이 아닌가, ‘괴’란 말은 지금에는 고양이(猫)의 일명이 되고 말았지만 속(俗)에 도적을 쫓을 때에 ‘괴’라고 하는 것을 보아 고대 조선어에 그러한 말이 있었을 것 같다”고 한다. 이 말을 들을 때 나는 매우 흥미를 느끼어 “그러면 상호개위도(相呼皆爲徒)란 도(徒)도 조선어 들(等)의 이름이 아닌가”하는 말을 한 일도 있었지만 이를 다시 생각하여 볼 때 너무도 천착에 기운 감이 있을뿐더러 다른 ‘방(邦)’과 ‘행상(行觴)’에 관하여는 그런 유의 해석이나마 허하지 아니하므로 결국은 도로(徒勞)에 돌아가고 말았다. 그리하여 지금 와서는 나는 이러한 천착적 해석보다도 차라리 이를 상기 양서의 백제어례(百濟語例)라던지 계림유사의 고려방언(高麗方言) 중 위에서 인용한 제 어례와 유를 같이 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편이 온당하다고 생각되는 동시에, 그 열거한 어례 중에는 불상용의 것이 혼재하였으리라고 중언한다. 어떻든 진한인은 나의 소견으로는 진한인(秦漢人)과는 전혀 계통을 달리한 별족이지만, 그 유이 이전 이후를 막론하고 중국문화의 영향을 비교적 심각히 받아 지식계급에는 일찍부터 중국식의 예속도 다소 알게 되고 또 한자의 사용, 한어류의 명호가 상당히 행하였던 것은 의심없는 사실이다. 위지의 “有似秦人”이니 “非但燕齊之名物”이니 한 것을 보아도 그 얼마나 중국문화에 물들었던가를 상상하여 남음이있다. 단 위지(내지 그 이후 사서)에 진한에 관하여 이와 같이 “有似秦人” 또는 “避秦役”이니 하여 진(秦)자를 연해 쓴것은, 진한을 진(秦) 망인의 부락으로 그릇 관념한데 기인한 바이며, 또 이렇게 그릇 관념하게 된 까닭은 전술한 바와 같이 진한을 진한(秦韓)이라고도 서칭한 데서 말미암은 듯하나, 진한을 진한(秦韓)이라고도 한 것은 진한(辰秦) 2자의 음이 상통하므로 인한 이외에는 다른 이유를 발견할 수 없다. 동시에 진한인을 진인(秦人)의 여류(餘流)나 한인의 파류(派流)로 볼 이유도 없는 것이다.
쪽수▶P93-8 이다. 그런데 위 記載 중에는 撰者 혹은 原記者의 先人見에 의한 附會와 臆解가 서끼어 있음으므로 이를 그대로 承認하여서는 아니될 것이요, 不可不 分析批判을 요한다. 첫째 辰韓의 來歷을 말하는 第二段記載 중에 「古之亡人 避秦役來適韓國」이라 한 秦役二字가 一大疑問의 글짜이니, 이것이 果然 辰韓耆老의 說을 그대로 틀림없이 옮기어 논 것인지? 혹은 記者의 어떠한 主觀的 誤解에서 附會 變作된 것인지 생각해 볼 問題이다. 魏志보다 후에 된 後漢書에는 위의 句節을 한층 더 改筆하야 「秦之亡人 避苦役 適韓國云云」이라 하고 또 위의 (魏志記事의) 三段과 五段과를 直接 連絡시키어 「有似秦語 故或名之爲秦韓」이라고까지 明言하였다. 晋書東夷傳辰韓條에도(後漢書의 것을 承襲하야) 이와 같은 ▶P941 記事를 보여준다. 그리하야 從來의 史家는 辰韓이라면 依例히 이를 秦 亡人의 後裔로 觀念하게 되였다. 魏志에는 이와 같이 明示하지는 아니하였지만, 그래도 그러한 意味의 語趣가 없는 것은 아니다. 辰韓을 或云 秦韓이라고 한 것은 물론 事實이나, 그것이 辰韓의 言語가 秦人과 같다는 理由에서 된 것이라고 생각되지는 안는다. 辰과 秦이 音相同하야 辰韓을 혹 秦韓이라고도 하였다하면 몰라도, 秦人 或은 秦語와 相似함이 있어서 그와 같이 이름하였다고 함은 너무도-글짜에 拘泥된 臆說로-고지 들리지 안는 牽强附會라고 하지 아니하면 아니되겠다. 이로써 미루어 보면 魏志의 「秦役」 二字도 실상 그것이 辰韓耆老의 說 그대로라고 하는 것보다, 차랄이 記者 或은 修史者가 「辰韓의 言語가 秦人과 近似하고 또 辰韓을 秦韓이라고도 한 即 辰韓은 秦의 苦役 或은 苛役을 避하야 東來한 中國人의 部落이리라」는 그릇된 先入的 論理에서 이를 變作한것이라고 보는 편이 妥當할 것이 아닌가. (後漢書 晋書等의 記事는 이 魏志의 것을 承訛轉訛한 第二次 三次의 史料이므로 더구나 問題거리가 되지 안는다) 即 辰韓故老의 傳說은-推測이지만-본시 「古之亡人이 難(或은亂)을 避하야 韓國에 왔었다 云云」한데 不過한 것을 修史者가 如上의 先入見을 가지고 그와 같이 附會한 것이 아니었든가 한다. 만일 魏志의 秦役二字를 살리어 後漢書와같이 解釋하야 辰韓을 秦亡人의 後라고 한다 하면, 그 言語 및 其他는-바루 秦漢人 그대로일 것이니-秦人과 類似하다고 말할 배가 아닐 것이며, 「有似秦人」이니 「有似秦語」니 한 것은 대단히 弱한 말이라고 하지 안으면 아니된다. 더구나 그 (秦人과) 類似하다고 列擧한 辰韓語가-國을 邦이라하고 弓을 弧, 賊을 寇, 行酒를 行觴이라 하고 相呼하야 徒라고 한다는 그 말들이-다 果然 辰韓人의 本來의 國語이냐 아니냐 하는 것이 또한 問題거리다. 中國人 或은 그 流移民의 後裔가아니라도, 中國과의 政治 文化 經濟上의 久遠한 交涉이 있던 周圍民族에 있어 특히 漢學의 敎養을 가진 知識階級의 日常用語 中에, 許多▶P95한 類의 漢語가 使用된 예는 무엇보다도 今日의 朝鮮語나 日本語 中의 그것을 보아 더 잘 알겠지만, 古代 半島北部地方에 漢(乃至 魏晋)의 郡縣이 開置되어 있었을 때에-그 郡縣 內의 土民은 물론이요-그 周圍에 接近한 諸民族의 言語習俗上에 끼친 中國文化의 影響이 어떠하였을 것은 넉넉이 想像할 수 있다 (魏志東夷傳韓條에 「其北方近郡(樂浪帶方) 諸國 差曉禮俗云云」이라 한 것도 中國禮俗의 影響을 말한 것이다). 辰韓과 歷史地理上으로 密接한 關係를 가젓다고 생각되는 百濟의 言語風俗에 關한 梁書東夷傳(百濟條)의 記事를 보면, 「今言語服章 略與高驪同………帽曰冠 曰復衫 袴曰褌 其言參諸夏 亦秦韓之遺俗云」이라 하야, 이 역시 秦韓(辰韓)의 遺俗이라 한다 하고 또 「其言參諸夏」라고 하였지만, 冠이니 複衫이니 褌이니 하는 말들은 本來의 固有韓語가 아니요 即 外來漢語의 影響이라고 보지 아니하면 아니되며, 또 鷄林類事에 실린 高麗方言 中에 千曰千이라 하고 萬曰萬이라 하고 海曰海 江曰江 溪曰溪라 하고 人曰人 主曰主 兵曰軍이라 하고 幞頭曰幞頭 帽子曰帽 袍曰袍 帶曰腰帶라 하고 靑曰靑 黑曰黑 赤曰赤 紅曰眞紅 緋曰緋라 하고 印曰印 車曰車 卓子曰食床 林曰林이라 하고 墨曰墨 轡曰轡 旗曰旗 釰曰長刀라 한다(其餘省略)는 것도 다 外來語임은 물론이어니와, 外來語 中에도 常用하는 者와 그러치 못한 者가 있는 것은 또한 事實이니 以上 諸語 中에도 그러한 것이 있을 줄로 안다. 中國의 文化를 餘地 없이 欽慕할 時代에, 中國人과의 公的 或은 私的 交際에 있어 自我의 夷俗을 될수록 감추려하든 知識階級의 態度로는 不常用의 外來語(漢語)라도 常用의 것처럼 表示한 일도 있었을 것이므로, 이러한 것을 특히 考慮치 아니하고 記事 그대로 信用하려 하야서는 아니된다. 그리고 보면 辰韓語에 國을 邦이라 하고 弓을 弧, 賊을 寇, 行酒를 行觴이라 하고 相呼하야 다 徒라고 한다는 그 말들은, 실상 辰韓의 固有國語가 아니라 이러한 外來의 漢語類로 其中에는 역시 實際에 常用하지 안는 者도 있었으리라고 생각된다. 同時에 「其言語不與馬韓同」이란 것은 실상이 ▶P96 러한 語類를 보고 내린 말이므로 거기에도 酌量할 必要가 있다. 辰韓이 北方에서 流移해온 族屬의 社會인만치, 그 言語가 馬韓과 多少의 異同은 있었을지언정 全혀 別系統의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안는다. 筆者는 일즉이 이 問題에 관하야 自山安廓氏와도 (坐談的으로) 討論한적이 있었는데, 自山의 說은 「弓爲弧의 弧는 朝鮮語 활(弓)의 寫音이요 賊爲寇의 寇는 「괴」의 寫音이 아닌가, 「괴」란 말은 지금에는 고양이(猫)의 一名이 되고 말았지만 俗에 盜賊을 쫓을 때에 「괴」라고 하는 것을 보아 古代 朝鮮語에 그러한 말이 있었을 것같다」고한다. 이 말을 들을때 나는 매우 興味를 늣기어 「그러면 相呼皆爲徒란 徒도 朝鮮語 들(等)의 謂가 아닌가」하는 말을 한 일도 있었지만 이를 다시 생각하여 볼 때 너무도 穿鑿에 기운 感이 있을뿐더러 다른 「邦」과 「行觴」에 關하여는 그런 類의 解釋이나마 許하지 아니하므로 結局은 徒勞에 도라가고 말았다. 그리하야 지금와서는 나는 이러한 穿鑿的解釋보다도 차랄이 이를 上記 梁書의 百濟語例라든지 鷄林類事의 高麗方言 中 上引의 諸語例와 類를같이 하는 것으로 解釋하는 편이 穩當하다고 생각되는 同時에, 그 列擧한 語例 中에는 不常用의 것이 混在하였으리라고 重言한다. 어떠튼 辰韓人은 나의 所見으로는 秦漢人과는 全혀 系統을 달리한 別族이지만, 그 流移 以前 以後를 莫論하고 中國文化의 影響을 比較的 深刻히 받어 知識階級에는 일즉부터 中國式의 禮俗도 多少 알게 되고 또 漢字의 使用, 漢語流의 名號가 相當히 행하였든 것은 의심없는 事實이다. 魏志의「有似秦人」이니 「非但燕齊之名物」이니 한 것을 보아도 그 얼마나 中國文化에 물들었든가를 想像하야 남음이있다. 但 魏志(乃至 그 以後 史書)에 辰韓에 관하야 이와 같이 「有似秦人」 또는 「避秦役」이니 하야 秦字를 연해 쓴것은, 辰韓을 秦亡人의 部落으로 그릇 觀念한데 基因한 바이며, 또 이러케 그릇 觀念하게 된 所以는 前述한 바와 같이 辰韓을 秦韓이라고도 書稱한 데서 말미암은 듯하나, 辰韓을 一云秦韓이라고 한 것은 辰秦二字의 音이 相通함으로 因한 以外에는 다른 ▶P97-1理由를 發見할 수 없다. 同時에 辰韓人을 秦人의 餘流나 漢人의 派流로 볼 理由도 없는 것이다.
그러면 다음의 “名樂浪人爲阿殘”이란 아잔(阿殘)은 어떠한 뜻을 가지고 있는 말로 해석할 것인가. 위지 찬자(혹은 그 이전 기사자)의 해석으로는 “東方人名我爲阿 謂樂浪人本其殘餘人”이라고 하였으나, 이 역시 기자의 주관적 억해에서 나온 말인 듯 하므로 도저히 그대로 신용하기는 어렵다. 첫째 막연하게 동방인이라 한 것도 우습지만-이는 눌러보아 진한인을 말한 것이라고 할지라도-아(阿)가 동방어에 아(我)의 뜻이라는 것이 암만해도 의심을 자아낸다. 阿(아)가 我의 이름일 것 같으면 한자를 빌릴 때에 왜 동음동훈인 아(我)자를 빌리지 아니하고 부자연하게 이훈인 아(阿)자를 취하였느냐 하는 것이 一의문인 동시에 위의 해석을 곤란케 하는 까닭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또 아잔의 잔(殘)을 단순히 잔여의 뜻으로만 해석한 것이 나는 부당한 양으로 안다. (설명 견후) 살피건대 수사자는 진한인을 어디까지라도 진한인(秦漢人)과 동족시하려는 선입견이 있을뿐더러, 진(辰)과 진(秦)이 진한(辰韓)에 대하여 통용됨과 한가지, 아(阿)와 아(我)도 음 상동하여 혼용된 걸로 관념함이 있어, 드디어 (막연하게) “東方人名我爲阿”란 (그릇된) 명제 하에 아잔을 “아(我)의 잔여인”이란 뜻으로 그릇 추단한 것이 아닌가 한다. 선유(선유) 성해응(成海應)(호 연경재(硏經齋))과 같은 이는 아잔에 대하여 일설을 세우되 “今俗 卑殘人 呼以羅殘 盖阿與羅相似而訛傳也”라 하여, 硏經齋全集(成海應著) 故事類(少華鳳俗攷) 조선어의 「나즌」(비천)이란 말로써 아잔의 뜻을 풀려고 하였다. 즉 아잔은 羅殘(나)의 와전이리라는 설인데, 물론 이 설에는 곧 찬종하기 어려우나 저 위지 기사의 설을 승인하지 아니한 점에 있어서는 보통 선유와 동일에 말할 이가 아니다. 나의 과문으로는 선유 중에 성 연경재 외에 아잔에 대하여 별로 이러한 사설을 내린 이도 없으므로써다. 그러면 아잔은 결국 어떠한 의미의 말일까. 나로써 이를 살피면 아잔이란 말이 기위 진한인의 대낙랑인(對樂浪人)의 칭인즉, 적어도 아(阿)는 낙랑의 음의 일을 취한 것이라고 보는 편이 훨씬 자연스럽지 아니한가. 즉 아(阿)는 낙랑의 낙(樂)에 대한 음으로, 낙(樂)은 라 행음이 아니라 아 행음이었던가 한다. 낙랑은 ‘낙랑(樂良)’ 後魏書地形志, 樂良郡條.
혹은 ‘낙라(樂羅)’ 硏經齋集卷5 「記樂羅王墓」條를 보면(年代의 표시는 없으나)鳳山郡 南十里  南川上 古墳중에서 「故樂羅王墓」라고 쓴 字畵古拙의 石刻이 보이였다한다. 그石刻은 지금 얻어볼 수 없지만, 樂羅는 卽樂浪의 同音異寫일것이다.

라고도 한곳이 있지만, 그것은 낭(浪)과 랑(良)과 라(羅)가 음 상통함에 기인된 바이거니와 사견으로는 낙랑(良)은 곧 阿良(아라 혹은 알라) 혹은 아라(阿羅)에 대한 아어적(雅語的) 음역이라고 본다. ‘아랑(阿良)’, ‘아라(阿羅)’가 동방어에 무엇을 의미한 말인가는 신중히 고려할 필요가 있지만 이는 필경 변진(弁辰)의 안사국(安邪國) 아나(阿那)⦁안라(安羅)⦁阿尸良(알라), 신라 상성군(商城郡)의 1정(停)인 관아랑(官阿良)을 북아랑(北阿良)이라고도 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말로 「고마」와 같이 고대에 흔히 있던 지명인 듯하다. 중국서는 일찍부터 낙랑의 낙을 낙(洛)음과 같이 발음하여온 일파가 있었던 모양인 듯하여 당의 안사고(顔師古)도 “樂音洛浪音狼”이라고 하였지만 漢書卷28, 地理志 樂浪郡條註.

원래 낙의 음이 「락」 외에 「악」또는 「요」라고 하는 음도 있는즉, 낙랑의 원음이 반드시 「락랑」이었으리라고는 보증하기 어렵다. 조선서는 종래 낙랑을 역시 「락랑」이라고 하는 이도 있지만, 또한 「악랑」이라고 음하는 이도 있으니, (필자가 유년시에 서당에서 동몽선습(童蒙先習)을 수업했을 때에 낙랑을 역시 그런 음으로 배운 기억이 난다) 이는 마치 같은 한사군중의 하나인 현토(玄菟)의 토(菟)를 「도」 혹은 「토」로, 고구려 말기의 영웅 개소문(蓋蘇文)의 개(蓋)를 「개」 혹은 「합」으로, 또 후백제의 주인 견훤(甄萱)의 견(甄)을 「견」 혹은 「진」으로 발음하는 이가 있는 거와 마찬가지어니와, 낙랑을 「악랑」이라고 읽는 것이 결코 무식하거나 무리한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고, 도리어 그렇게 읽는 것이 나는 가한 양으로 안다.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씨도 일찍이 이러한 설을 취하여 낙랑의 고음(古音)은 「악랑」 「아리양」 혹은 「알랑」이었으리라고 朝鮮學報 제1권 第1號 「古朝鮮に於ける政治規範」(崔南善 논문) 하였는데, 낙을 아 행음의 차자(借字)로 인(認)하는데는 절대 찬성이다. 어떻든 낙랑은 아랑(阿良)의 대음(對音)으로, 阿良(아라)는 저 변진 20여국 중의 하나인 안아(安邪)(阿那(아나)⦁安羅(안라)⦁阿尸良(아시랑))와 동일한 어음일 것이니, 이를 「아냐」 「안야」 「아나」 「알라」 등으로도 발음한 듯하며, 실제 「라」음은 「나」 「냐」 「야」의 제음과 통용되는 예가 옛날에 많다. 서라벌(徐羅伐)을 서나벌(徐那伐) 혹은 서야벌(徐耶伐)이라 함과, 가라(加羅)(가락(駕洛)⦁가랑(加良))를 구사(狗邪) 혹은 가야(伽耶)라 함과 같음은 그것의 저명한 예이다. 고대 일본인이 한의 훈을 「アヤ」 한인을 「アヤヒト」, 한직(漢織)을 「アヤハトリ」 혹은 (혈직(穴織)이라 쓰고) 「アナハトリ」라고도 한 것은 또한 저명한 사실이거니와, 이 「アヤ」 「アナ」야 말로 ‘낙랑’의 고음에 관하여 중요한 결정적 암시를 주는 자로 인식되나니 속히 말하면 이는-나의 소견으로는-본시 한 본토의 이름이 아니라 한의 동방 군현의 중추인 낙랑(아랑)의 지칭인 것이 거의 의심없는 까닭이다. 즉 「アヤ」 「アナ」는 워낙은 낙랑(아랑)에 대한 칭호이던 것이 뒤에 점점 확대되어 (광의화하여) 낙랑 한인의 본국인 한까지도 그렇게 훈칭(訓稱)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점패방지진(鮎貝房之進) 씨는 「アヤ」 「アナ」를 변진의 일국인 안사(安邪) 즉 지금의 경상남도 함안(咸安)의 고명에 대한 지칭이라고 주장하였는데, 雜攷 第2輯 上, 66面 (鮎貝房之進 著). 그 지리적 방위에 있어서는 나의 설과 큰 경정(逕庭)이 있지만 어음적 설명에 있어서는 피차에 공통됨이 많으니 그것은 상술함과 같이 낙랑과 안사가 어음 상으로는 일치되는 까닭이다). 이에 의하여 ‘낙랑’의 고음의 본색은 더욱 명료하게 들어나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즉 아잔의 아는 분명히 낙랑(아랑)의 낙(아)에 대한 음인 것을 잘 알 수 있거니와, 다음의 잔(殘)의 뜻은 또 무엇이냐 하면, 이는 해석하기에 별로 큰 곤란을 느끼지 아니한다. 잔은 곧 한자 그대로의 뜻을 가진 것이니, 잔의 한자 뜻은 잔여 잔얼(殘孼)의 뜻 외에 적, 잔해, 잔흉, 잔악, 쇠잔 등의 뜻이 있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고 보면 아잔은 ‘아랑잔적(阿良殘賊)’의 약칭 즉 ‘낙랑적‘낙'랑놈’의 뜻으로 진한인이 낙랑 한인을 적개시하여 불렀던 것이라고 볼 수 밖게 없다. 이는 마치 고구려 호태왕(好太王)(광개토왕(廣開土王))비에 백제를 ‘백잔(百殘)’ 또는 ‘이잔(利殘)’이라고 서칭한 예와 같으니, 백잔은 단지 백제의 동음이사(同音異寫)로만 볼 것이 아니라 역시 ‘백제잔적(百濟殘賊)’ ‘백제놈’의 뜻을 함유한 것으로 보지 아니하면 아니되며, 이잔은 백제가 특히 아리수(阿利水)(한강의 원명) 유역을 중심으로 삼았기 때문에 ‘아리수의 적’이란 뜻으로 그렇게 별명한 것도 같고 또는 아리수 외에 고리성(古利城), 오리성(奧利城), 간궁리성(幹弓利城), 어리성(於利城), 야리성(也利城), 탁지리성(柝支利城) 등의 리(利)자가 붙은 백제지명(호태왕 비문에 보임)이 많았기 때문에 그렇게 일컬었던가도 싶다. 아잔 백잔 이잔 등은 다 동일한 유의 어법으로 각기 적국에 대한 악의의 칭호이었던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로 자신되며, 이에 의하여 진한과 낙랑 한인과의 관계가 적대관계로 있었던 것을 또한 잘 알 수 있다. 그런즉 아잔에 대한 위지 찬자의 해설과 나의 그것과의 사이에는 큰 경정(逕庭)이 있게 되었다.
▶P97-1 그러면 다음의 「名樂浪人爲阿殘」이란 阿殘은 어떠한 뜻을 가지고 있는 말로 解釋할 것인가. 魏志撰者(或은 그 以前 記事者)의 解釋으로는 「東方人名我爲阿 謂樂浪人本其殘餘人」이라고 하였으나, 이 역시 記者의 主觀的 臆解에서 나온 말인 듯 함으로 到底히 그대로 信用하기는 어렵다. 첫재 漠然하게 東方人이라 한 것도 우습지만-이는 눌러보아 辰韓人을 말한 것이라고 할지라도-阿가 東方語에 我의 義라는것이 암만해도 疑心을 자아낸다. 阿(아)가 我의 謂일 것 같으면 漢字를 借할 때에 왜 同音同訓인 我字를 借치 아니하고 不自然하게 異訓인 阿字를 取하였느냐 하는 것이 一疑問인 同時에 위의 解釋을 困難케 하는 所以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또 阿殘의 殘을 單純히 殘餘의 義로만 解釋한 것이 나는 不當한 양으로 안다. (說明見後) 按컨대 修史者는 辰韓人을 어데까지라도 秦漢人과 同族視하려는 先入見이 있을뿐더러, 辰과 秦이 辰韓에 對하야 通用됨과 한가지, 阿와 我도 音相同하야 混用된걸로 觀念함이 있어, 드듸어 (漠然하게) 「東方人名我爲阿」란 (그릇된) 命題下에 阿殘을 「我의 殘餘人」이란 뜻으로 그릇 推斷한 것이 아닌가 한다. 先儒 成海應(號硏經齋)과 같은 이는 阿殘에 對하야 一說을 세우되 원문주1▶「今俗 卑殘人 呼以羅殘 盖阿與羅相似而訛傳也」라 하야,[1] 朝鮮語의 「나즌」(卑賤)이란 말로써 阿殘의 뜻을 풀려고 하였다. 即 阿殘(아잔)은 羅殘(나)의 訛傳이리라는 說인데, 물론 이 설에는 곧 贊從하기 어려우나 저 魏志 記事의 설을 承認하지 아니한 點에 있어서는 普通先儒와 同日에 語할 이가 아니다. 나의 寡聞으로는 先儒 中에 成硏經齋 外에 阿殘에 對하야 別로 이러한 私說을 내린 이도 없으므로써다. 그러면 阿殘은 結局 어떠한 意味의 말일까. 나로써 이를 按하면 阿殘이란 語가 旣爲 辰韓人의 對樂浪人의 稱인즉, 적어도 阿는 樂浪의 音의 一을 取한 것이라고 보는 편이 훨신 自然스럽지 아니한가. 即 阿는 樂浪의 樂에 대한 音으 ▶P98로, 樂은 라 行音이 아니라 아 行音이었든가 한다. 원문주2▶樂浪은 「樂良」[2] 원문주3▶或은 「樂羅」[3]라고도 한곳이 있지만, 그것은 浪과 良과 羅가 音相通함에 基因된 바이어니와 私見으로는 樂浪(良)은 곧 阿良(아라 或은 알라) 혹은 阿羅에 對한 雅語的 音譯이라고 본다. 「阿良」 「阿羅」가 東方語에 무엇을 意味한 말인가는 愼重히 考慮할 必要가 있지만 이는 畢竟 弁辰의 安邪國 一云阿那⦁安羅⦁阿尸良(알라), 新羅商城郡의 一停인 官阿良 一云北阿良과 마찬가지의 말로 「고마」와 같이 古代에 흔히 있던 地名인 듯하다. 中國서는 일즉부터 樂浪의 樂을 洛音과 같이 發音하야온 一派가 있었든 모양인 듯하야 원문주4▶唐의 顔師古도 「樂音洛浪音狼」이라고 하였지만[4] 元來 樂의 音이 「락」 外에 「악」또는 「요」라고 하는 音도 있는즉, 樂浪의 原音이 반듯이 「락랑」이었으리라고는 保證하기 어렵다. 朝鮮서는 從來 樂浪을 역시 「락랑」이라고 하는 이도 있지만, 또한 「악랑」이라고 音하는 이도 있으니, (筆者가 幼年時에 書堂에서 童蒙先習을 受業햇슬 때에 樂浪을 역시 그런 音으로 배운 記憶이 난다) 이는 마치 같은 漢四郡中의 一인 玄菟의 菟를 「도」 或은 「토」로, 高句麗 末期의 英雄 蓋蘇文의 蓋를 「개」 或은 「합」으로, 또 後百濟의 主인 甄萱의 甄을 「견」 或은 「진」으로 發音하는 이가 있는 거와 마찬가지어니와, 樂浪을 「악랑」이라고 읽는 것이 결코 無識하거나 無理한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안코, 도리어 그러케 읽는 것이 나는 可한 양으로 안다. 원문주5▶六堂 崔南善氏도 일즉이 이러한 설을 取하야 樂浪의 古音은 「악랑」 「아리양」 或은 「알랑」이었으리라고[5] 하였는데, 樂을 아 行音의 借字로 認하는데는 絶對 贊成이다. 어떠튼 樂浪은 阿良의 對音으로, 阿良(아라)는 저 弁辰 二十餘國中의 一인 安邪(阿那⦁安羅⦁阿尸良)와 同一한 語音일 것이니, 이를 「아냐」 「안야」 「아나」 「알라」 等으로도 發音한 듯하며, 실제 「라」音은 「나」 「냐」 「야」의 諸音과 通用되는 例가 옛날에 많다. 徐羅伐을 徐那伐 혹은 徐耶伐이라 함과, 加羅(駕洛⦁加良)를 狗邪 或은 伽耶라 함과 같음은 그것의 著名한 예이다. 古代 日本人이 漢의 訓을 「アヤ」 ▶P99漢人을 「アヤヒト」, 漢織을 「アヤハトリ」 혹은 (穴織이라 書하고) 「アナハトリ」라고도 한 것은 또한 著名한 事實이어니와, 이 「アヤ」 「アナ」야 말로 「樂浪」의 古音에 關하야 重要한 決定的 暗示를 주는 者로 認識되나니 速히 말하면 이는-나의 所見으로는-本是 漢 本土의 謂가 아니라 漢의 東方郡縣의 中𨋀인 樂浪(阿良)의 指稱인것이 거의 疑心없는 所以다. 即 「アヤ」 「アナ」는 원악은 樂浪(阿良)에 對한 稱呼이던 것이 後에 점점 擴大되어 (廣義化하야) 樂浪 漢人의 本國인 漢까지도 그러케 訓稱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원문주6▶(鮎貝房之進氏는 「アヤ」 「アナ」를 弁辰의 一國인 安邪 卽今의 慶尙南 道咸安의 古名에 對한 指稱이라고 主張하였는데,[6] 그 地理的 方位에 있어서는 나의 說과 큰 逕庭이 있지만 語音的 說明에 있어서는 彼此에 共通됨이 많으니 그것은 上述함과같이 樂浪과 安邪가 語音上으로는 一致되는 까닭이다). 이에 依하야 「樂浪」의 古音의 本色은 더욱 明瞭하게 들어나진다고 할 수 있다. 然則 阿殘의 阿는 分明히 樂浪(阿良)의 樂(阿)에 對한 音인 것을 잘 알 수 있거니와, 다음의 殘의 義는 또 무엇이냐 하면, 이는 解釋하기에 별로 큰 困難을 늣기지 아니한다. 殘은 곧 漢字 그대로의 뜻을 가진 것이니, 殘의 漢字義는 殘餘 殘孼의 뜻 外에 賊 殘害 殘凶 殘惡 衰殘 等의 義가 있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된다. 그러고 보면 阿殘은 「阿良殘賊」의 略稱 卽 「樂浪賊」 「樂浪놈」의 義로 辰韓人이 樂浪漢人을 敵愾視하야 불렀든 것이라고 볼 수 밖게 없다. 이는 마치 高句麗 好太王(廣開土王)碑에 百濟를 「百殘」 또는 「利殘」이라고 書稱한 例와 같으니, 百殘은 단지 「百濟」의 同音異寫로만 볼것이 아니라 역시 「百濟殘賊」 「百濟놈」의 義를 含有한 것으로 보지 아니하면 아니되며, 利殘은 百濟가 特히 阿利水(漢江의 原名) 流域을 中心으로 삼었기 때문에 「阿利水의 賊」이란 뜻으로 그러케 別名한 것도 같고 또는 阿利水 外에 古利城 奧利城 幹弓利城 於利城 也利城 柝支利城 等의 利字가 붙은 百濟地名(好太王碑文에 보임)이 많엇기 때문에 그러케 일컬었든가도 싶다. 阿殘 百殘 ▶P100-1利殘 等은 다 同一한 類의 語法으로 각기 敵國에 대한 惡義의 稱呼이었든 것은 움직일수없는 事實로 自信되며, 이에 依하야 辰韓과 樂浪漢人과의 關係가 敵對關係로 있었든 것을 또한 잘 알수있다. 그런즉 阿殘에 對한 魏志撰者의 解說과 나의 그것과의 사이에는 큰 逕庭이 있게 되였다.
1 다음에 또 논난할 것은 위의 위지 기사의 말단에 “始有六國 稍分爲十二國”이란 12국 3자에 대하여다. 이 기재가 진한인 부락의 발전 과정을 의미한 것임은 의심 없으나, “稍分爲十二國”에 대하여는 의심이 없을 수 없으니-진한 초기에 있어서 부락은 위 기사와 같이 6국에 불과하였는지 모르지만-후한말 삼국초 한예(韓濊)가 한참 강성하여 (뒤에서 보임) 낙랑 대방과 충돌을 만들던 시대에는 진한인 부락의 수는 12국에만 그치지 아니하였던 까닭이다. 위의 정시(正始) 연간에 한(진한) 위(낙랑, 대방) 충돌의 결과, 한의 나해(那奚) 등 수십 국이 위에 항복한 사실이 있었다 함은 앞서도 말한 바이지만, 소위 나해 등 수십 국이란 대개 진한인 소속의 부락들이므로, 이것을 보더래도 “稍分爲十二國”이라 함은 부당한 설이다. 적어도 “稍分爲數十國”이라고 하지 아니하면 안된다. 그러면 수사자는 어떠한 소견으로 12국이란 분명한 수효를 거시하였는가 하는 의문이 또 일어난다. 그릇된 기사에도 (말미암은바) 그렇게 된 까닭은 있을 것이다. 동서 변진조에 “弁辰亦十二國”이라 하고 그 아래에 변진자를 붙인 국읍명 12<<동명 첩출자를 제하고>>와 변진자를 붙이지 아니한 국읍명<<동명 첩출자를 제하고>> 12를 혼합 열거한 후 “弁辰韓合二十四國………其十二國屬辰王”이라 한 것을 보면-물론 여기의 “其十二國”은 변진자를 붙이지 아니한 12국의 지칭이니, 찬자는 즉 변진 20여 국 중 진왕(마한왕)에 종속된 사로(경주) 등 12국(기저국(己柢國)⦁불사국(不斯國)⦁근기국(勤耆國)⦁난미리미동국(難彌離彌凍國)⦁염해국(冉奚國)⦁군미국(軍彌國)⦁여담국(如湛國)⦁호로국(戶路國)⦁주선국(州鮮國)⦁마연국(馬延國)⦁사로국(斯盧國)⦁우중국(優中國))을 진한 소속의 것으로 오해하였던 모양이다. 진왕은 진한의 뜻도 아니요 진한왕의 뜻도 아니요 진국(마한)왕의 뜻이라 함과, 또 진한은 진국(마한)의 일우를 점거한 북방유이부족의 사회로 독립의 주를 가지지 못하던 것이라 함은 앞서 누설(屢說)한 바이지만, 수사자는 진왕을 진한왕의 뜻으로 오해하고 또 변진의 칭을-일개 독립적 고유명사로 처리하면서 일방으로는 자면(字面)에 끌리어 변한, 진한의 합칭으로 관념하여 드디어 위와 같은 위필(僞筆)을 농(弄)하였을뿐더러, 일보를 나아가(변진조에) “弁辰與辰韓雜居”라는 대망언을 발하기까지 하였다. 이 위필과 망발로 인하여 진한의 지리적 방위가 종래 어떻게(어림없이) 오인되어 왔는가는 뒤에 장차 말하려 하거니와, 오래된 기록이라고 반드시 죄다 신빙할 가치가 있는 것도 아니요 또 오랫동안 믿어 오던 설이라 하여 그대로 쫒을 필요도 없는 것이다. 당시의 대세와 사정을 두루 살피고 우리의 (밝은) 이성과 (풍부한) 상식에 소(訴)하여 가히 신종(信從)할만 한 것이면 어디까지라도 신종하여야 하고, 그러하지 못한 것이면 또한 어디까지라도 냉정하고 엄숙한 태도를 취하여야한다.
▶P100-2一다음에 또 論難할것은 우의 魏志 記事의 末段에 「始有六國 稍分爲十二國」이란 十二國 三字에 對하여다. 이 記載가 辰韓人 部落의 發展 過程을 意味한 것임은 無疑하나, 「稍分爲十二國」에 對하여는 疑心이없을 수 없으니-辰韓 初期에 있어서의 部落은 右 記事와 같이 六國에 不過하였는지 모르지만-後漢末 三國初 韓濊가 한참 强盛하야 (見後文) 樂浪 帶方과 衝突을 生하든 時代에는 辰韓人 部落의 數는 十二國에만 끄치지 아니하였든 까닭이다. 魏의 正始 年間에 韓(辰韓) 魏(樂浪帶方) 衝突의 結果, 韓의 那奚 等 數十國이 魏에 降服한 事實이 있었다 함은 앞서도 말한 바이지만, 所謂 那奚等 數十國이란 대개 辰韓人 所屬의 部落들이므로, 이것을 보더래도 「稍分爲十二國」이라 함은 不當한 설이다. 적어도 「稍分爲數十國」이라고 하지 아니하면 아니된다. 그러면 修史者는 어떠한 所見으로 十二國이란 分明한 數爻를 擧示하였는가 하는 疑問이 또 이러난다. 그릇된 記事에도 (말미암은바) 所以然은 있을 것이다. 同書 弁辰條에 「弁辰亦十二國」이라 하고 그 아래에 弁辰字를 붙인 國邑名 十二同名 疊出者를 除하고와 弁辰字를 붗이지 아니한 國邑名同名 疊出者를 除하고 十二를 混合 列擧한후 「弁辰韓合二十四國………其十二國屬辰王」이라 한 것을 보면-勿論 여긔의 「其十二國」은 弁辰字를 붗이지 아니한 十二國의 指稱이니, 撰者는 즉 弁辰二十餘國中 辰王(馬韓王)에 從屬된 斯盧(慶州)等 十二國(己柢國⦁不斯國⦁勤耆國⦁難彌離彌凍國⦁冉奚國⦁軍彌國⦁如湛國⦁戶路國⦁州鮮國⦁馬延國⦁斯盧國⦁優中國)을 辰韓 所屬의것으로 誤解하였든 모양이다. 辰王은 辰韓의 義도 아니요 辰韓王의 義도 아니요 辰國(馬韓)王의 義라 함과, 또▶P100-2辰韓은 辰國(馬韓)의 一隅를 占居한 北方流離部族의 社會로 獨立의 主를 가지지 못하든 것이라 함은 앞서 屢說한 바이지만, 修史者는 辰王을 辰韓王의 義로 誤解하고 또 弁辰의 稱을-一個獨立的固有名詞로 處理하면서 一方으로는 字面에 끌리어 弁韓 辰韓의 合稱으로 觀念하야 드듸어 右와 같은 僞筆을 弄하였을뿐더러, 一步를 進하야(弁辰條에) 「弁辰與辰韓雜居」라는 大妄言을 發하기까지 하였다. 이 僞筆과 妄發로 因하야 辰韓의 地理的 方位가 從來 어떠케(어림없이) 誤認되어 왔는가는 後에 장차 말하려 하거니와, 오래된 記錄이라고 반듯이 죄다 信憑할 價値가 있는 것도 아니요 또 오래동안 믿어 오든 說이라 하야 그대로 좇을 必要도 없는 것이다. 當時의 大勢와 私情을 周察하고 우리의 (밝은) 理性과 (豊富한) 常識에 訴하야 可히 信從할만 한 것이면 어디까지라도 信從하야야 하고, 그러하지 못한 것이면 또한 어디까지라도 冷靜하고 嚴肅한 態度를 取하야야한다.
이상은 주로 위지 진한조 기사 중 신용하기 어려운 부분에 대하여 축조(逐條) 비판을 가한 바이지만, 기타 정말 사실(史實)로 인(認)할 만한 부분의 기재라야 너무도 소략에 지나쳐, 그것만으로는 진한족의 유래 그 지리적 위치 등 중요 문제가 의연히 막연한 가운데 있게 되므로 나는 불가불 다른 기사와 전설을 참고하여 이를 설명하지 않으면 아니 되겠거니와, 여기에 제일 먼저 설명을 요할 중요한 기사는 전기(前記) 진한 기로의 전설에 관한 것이다.
▶P101-2 以上은 主로 魏志 辰韓條 記事 중 信用하기 어려운 部分에 就하야 逐條 批判을 加한 바이지만, 其他 정말 史實로 認할 만한 部分의 記載라야 너무도 踈略에 지나쳐, 그것만으로는 辰韓族의 由來 그 地理的位置 等 重要 問題가 依然히 漠然한 가운데 있게 되므로 吾人은 不可不 다른 記事와 傳說을 參考하야 이를 說明하지 안으면 아니 되겠거니와, 여긔에 第一 먼저 說明을 요할 重要한 記事는 前記 辰韓 耆老의 傳說에 關한 것이다.
진한 기로의 전설이라고 적은 위지의 “古之亡人 避秦役 來適韓國 馬韓割其東界地與之”의 일절은, 진한족의 유래를 말하는 중요한 기사임에 불구하고, 진역 2자의 수사자의 위필로 인하여 종래 사가의 오해를 일으키었지만, 그 두 글자가 수사자의 위필임을 깨달은 나는 거기에 조금도 집착할 필요는 없는 것이며, 나는 전술한 바와 같이 피진역(避秦役)을 단지 히 피난(혹은 난)」에 대한 개필로 보는 동시에, 고지망인(古之亡人)을 진한인(秦漢人)과는 전연 계통을 달리한 족속으로 보거니와, 그러하다고 하면 위의 진한 기로의 전설은 대체 어느 시대의 어떠한 사실을 가리켜 이름인가? 이것이 일로부터의 논제이다. 이 전설은 북방에서 남방 즉 진국 방면(후일 소위 마한)에 피난한 사상의 어떤 저명한 망인의 사실을 말한 것임은 물론이거니와, 이 방면에의 망인에 관한 사실로 저명한 자를 들면 대개 셋이 있다. 즉 그 하나는 위지에 “淮(準)……爲燕亡人衛滿所攻奪 將其左右宮人 走入海 居韓地 自號韓王云云”이라고 전하는 조선왕(朝鮮王) 준(準)의 남천(南遷) 사실이요, 그 둘은 위략(魏略)에 “初右渠未破時 朝鮮相歷谿卿 以諫右渠不用 東之辰國 時民隨出居者二千餘戶云云”이라 한 조선왕 우거(右渠)의 신(臣) 역계경(歷谿卿) 이하 2,000여 호의 진국 이주 사실이요, 그 셋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전하는 백제의 시조 온조(溫祚)에 관한 전설이라고 할 수 있다. 삼자의 각각이 서로 시대를 달리하고 또 그 중의 전 이자(二者)는 동일한 조선 방면의 망인으로 순연히 종족을 같이 함에 반하여 후자는 부여족의 일파로 전 이자와는 다소 종락을 달리한 자이지만, 삼자가 진한이란 유이족의 사회를 구성함에 있어서는 다 같이 중요한 요소를 이루었던 것이라 함은, 나의 주장하는 신견해의 하나로 더욱 ‘한’이란 명칭이 조선왕 준의 교거부락-즉 자호한왕(自號韓王)이라고 한 사실-에서 기원하였다 함과 준의 본성이 기씨(箕氏)가 아니라 한씨(韓氏)였다고 함은, 앞서 제3권에 상론하였던 터이거니와, 진한 기로의 전설은 곧 이 준왕의 남래 사실을 가리켜 말한 것이 아닌가 한다.-물론 그중의 (내적 한국의) ‘한국’ 또는 ‘마한’의 칭은 후일의 것으로 추칭(追稱)한 것일지니-다시 말하면 진한 기로의 고지망인 운운은 조선왕 (한)준이 위만(燕人(연인)이라고 하나, 본래는 遼東(요동)의 토인인듯?)에게 공탈(攻奪)되어 좌우의 궁인들을 이끌고 남으로 해중(海中) 즉 진국에 달아와 진(辰)의 용허를 받아 그 동계(동북계)의 땅을 점거하였던 사실의 이름이 아닌가 한다. “馬韓割其東界地與之”는 망인의 거주지역으로 동계를 획정하여 주었다는 것일지요 정치상으로 영히 할여하였다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리하여 진한의 유래와 기원을 이 준왕의 망명 부락에 구하는 창견(創見)을 주장하게 되었다. 단 후한서(後漢書)(동이전 마한조)에 이 준왕에 관하여 “初朝鮮王準 爲衛滿所破 乃將其餘衆數千人 走入海 攻馬韓破之 自立爲韓王 準後滅絶 馬韓人復自立爲辰王”이라 한 것은 기술한 바와 같이 위지의 기사를 윤색 개필한 것이며, 준의 남분 후 조선의 유민들이 그 뒤를 이어 진국에 망래한 자가 많았을 것은 혹 상상할 수 있는 사실이지만, 준이-일패도지(一敗塗地)의 세로 창황히-남분할 때에 여중수천인(餘衆數千人)이나 되는 수효를 이끌고 와서 더구나 마한(진국)과 같은 대국을 공파하여 진왕에 대신하여 자왕(自王)하였다 함은 대세 상으로 보아 또는 상식에 소(訴)하여 도저히 믿기 어려운 사실이다. 종래 동방의 사가들은 이 후한서의 개필에 의하여 준의 입거 땅을 진왕의 치부인 월지국(月支國)으로 인정함이 보통이었고 또 월지(月支)의 위치를 마한 후기의 수부인 금 익산(益山)(건마국(乾馬國))에 비정하기를 예사로 하였으나, 이는 더욱 이와증와(以訛增訛)의 무가치한 설로 돌려보낼 수밖에 없다. 준이 진의 일변지(一邊地)에 입거하여 자칭한왕 혹은 자립 위왕(爲王)한 것이라면 몰라도, 진의 중심지나 전국토를 탈거하여 왕이 되었다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준왕의 망명이 창황하였던 일사로써 넉넉히 추리할 수있는 일이며, 또 그 망명이 어떻게 창황하였던가는 위만의 준왕에 대한 습격이 불의 창졸(倉卒)에 출(出)한 일사로도 三國志 魏志 東夷傳韓條, 裴松之註 所引 魏略文 참조. 짐작되지만, 그것보다도 준의 자(子)와 기타 친속이 미처 왕을 따라오지 못하고 고국(조선)에 남아있게 된 그 사실이 雜攷 第二輯上, 六六頁 (鮎貝房之進著). 이를 웅변으로 말하고 있다. 위지의 ‘기후절멸(其後絶滅)’이니 후한서의 ‘준후멸절(準後滅絶)’이니 한 것도, 왕자 및 친속이 고국에 유재(留在)하여 그 뒤를 계승할 인물이 없었던 까닭이니, 준(한씨) 왕실의 명맥은 준왕의 죽음과 함께 끊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종래 학자의 대개는 준왕 사후에도 얼마 동안의 전세(傳世)와 역년(歷年)이 있었던 양으로 여겨-심지어 기씨족보(奇氏族譜)에는 9세 202년이란 역수와 왕호까지 분명히 들어 놓았지만 그것은 비판할 거리도 되지 못하며, ‘기후절멸’이라 ‘준후멸절’이라하면 준왕의 후사가 곧 끊어졌다는 말로 해석하지 아니하면 안된다. 선유중에도 정약용(丁若鏞) 한진서(韓鎭書)와 같은 이는 역시 이러한 해석을 내려 “準之爲馬韓王止於本身 未嘗傳世而歷久也”라 我邦疆域考 「馬韓考」(丁若鏞 著)及海東繹史續卷3, 馬韓條(韓鎭書 著)하였으나, 준을 마한의 왕으로 보는 전통적 유견(謬見)에는 또한 벗어나지를 못하였다.
▶P101-3 辰韓 耆老의 傳說이라고 적은 魏志의 「古之亡人 避秦役 來適韓國 馬韓割其東界地與之」의 一節은, 辰韓族의 由來를 말하는 重要한 記事임에 不拘하고, 「秦役」 二字의 修史者의 僞筆로 因하야 從來 史家의 誤解를 이르키었지만, 그 두 글짜가 修史者의 僞筆임을 깨다른 吾人은 거긔에 조금도 執着할 必要는 없는 것이며, 나는 前述한 바와 같이 「避秦役」을 單▶P102히 「避難(혹은亂)」에 대한 改筆로 보는 同時에, 「古之亡人」을 秦漢人과는 全然 系統을 달리한 族屬으로 보거니와, 그러하다고 하면 우의 辰韓耆老의 傳說은 대체 어느 時代의 어떠한 史實을 가르처 이름인가? 이것이 일로부터의 論題이다. 이 傳說은 北方에서 南方 卽 辰國方面(後日 所謂 馬韓)에 避難한 史上의 어떤 著名한 亡人의 史實을 말한 것임은 勿論이어니와, 이 方面에의 亡人에 關한 史實로 著名한 者를 들면 대개 셋이 있다. 即 其一은 魏志에 「淮(準)……爲燕亡人衛滿所攻奪 將其左右宮人 走入海 居韓地 自號韓王云云」이라고 傳하는 朝鮮王 準의 南遷 事實이요, 其二는 魏略에 「初右渠未破時 朝鮮相歷谿卿 以諫右渠不用 東之辰國 時民隨出居者二千餘戶云云」이라한 朝鮮王 右渠의 臣 歷谿卿 以下 二千餘戶의 辰國 移住 事實이요, 其三은 三國史記에 傳하는 百濟의 始祖 溫祚에 關한 傳說이라고 할 수 있다. 三者의 各各이 서로 時代를 달리하고 또 그 중의 前二者는 同一한 朝鮮 方面의 亡人으로 純然히 種族을 같이 함에 反하야 後者는 夫餘族의 一派로 前二者와는 多少 種落을 달리한 者이지만, 三者가 辰韓이란 流移族의 社會를 構成함에 있어서는 다같이 重要한 要素를 이루었든 것이라 함은, 나의 主張하는 新見解의 하나로 더욱 「韓」이란 名稱이 朝鮮王 準의 僑居部落-即 自號韓王이라고한 事實-에서 起源하였다함과 準의 本姓이 箕氏가 아니라 韓氏였다고 함은, 앞서 第三卷에 詳論하였든 터이어니와, 辰韓 耆老의 傳說은 곧 이 準王의 南來 事實을 가리처 말한 것이 아닌가한다.-勿論 그중의 (來適韓國의) 「韓國」 또는 「馬韓」의 稱은 後日의 것으로 追稱한 것일지니-다시 말하면 辰韓者老의 「古之亡人」云云은 朝鮮王 (韓)準이 衛滿(燕人이라고 하나, 本來는 遼東의 土人인듯?)에게 攻奪되여 左右의 宮人들을 익글고 南으로 海中 即 辰國에 다라와 辰의 容許를 받아 그 東界(東北界)의 地를 占居하였든 事實의 謂가 아닌가 한다. 「馬韓割其東界地與之」는 亡人의 居住地域으로 東界를 劃定하야 주었다는 것일지요 政治上으로 永히 割與하였다는 것은 아▶P102닐 것이다. 그리하야 辰韓의 由來와 起源을 이 準王의 亡命部落에 求하는 創見을 主張하게되였다. 但 後漢書(東夷傳馬韓條)에 이 準王에 關하야 「初朝鮮王準 爲衛滿所破 乃將其餘衆數千人 走入海 攻馬韓破之 自立爲韓王 準後滅絶 馬韓人復自立爲辰王」이라한 것은 旣述한 바와 같이 魏志의 記事를 潤色改筆한 것이며, 準의 南奔後 朝鮮의 遺民들이 그 뒤를 이어 辰國에 亡來한 者가 만헛슬 것은 혹 想像할 수 있는 事實이지만, 準이-一敗塗地의 勢로 蒼黃히-南奔할 때에 餘衆數千人이나 되는 數爻를 익글고 와서 더구나 馬韓(辰國)과 같은 大國을 攻破하야 辰王에 대신하야 自王하였다 함은 大勢上으로 보아 또는 常識에 訴하야 到底히 믿기 어려운 事實이다. 從來 東方의 史家들은 이 後漢書의 改筆에 依하야 準의 入居地를 辰王의 治府인 月支國으로 認定함이 普通이었고 또 月支의 位置를 馬韓後期의 首府인 今益山(乾馬國)에 比定하기를 例事로 하였으나, 이는 더욱 以訛增訛의 無價値한 說로 돌려 보낼 수밖에 없다. 準이 辰의 一邊地에 入居하야 自稱韓王 혹은 自立爲王한 것이라면 몰라도, 辰의 中心地나 全國土를 奪居하야 王이 되였다고는 想像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準王의 亡命이 蒼黃하였든 一事로써 넉넉이 推理할 수있는 일이며, 원문주7▶또 그 亡命이 어떠케 蒼黃하였든가는 衛滿의 準王에 대한 襲擊이 不意倉卒에 出한 一事로도[7] 짐작되지만, 원문주8▶그것 보담도 準의 子와 其他 親屬이 미처 王을 따라오지 못하고 故國(朝鮮)에 남아있게 된 그 事實이[8] 이를 雄辯으로 말하고 있다. 魏志의 「其後絶滅」이니 後漢書의 「準後滅絶」이니 한 것도, 王子 及 親屬이 故國에 留在하야 그 뒤를 繼承할 人物이 없었든 까닭이니, 準(韓氏)王室의 命脈은 準王의 死와 함께 끈어지고 말았든 것이다. 從來 學者의 대개는 準王 死後에도 얼마 동안의 傳世와 歷年이 있었든 양으로 역이어-심지어 奇氏族譜에는 九世 二百二年이란 曆數와 王號까지 分明히 들어 노았지만 그것은 批判할거리도 되지못하며, 「其後絶滅」이라 「準後滅絶」이라하면 準王의 後嗣가 곧 끈어졌다는 말▶P103-1로 解釋하지아니하면 아니된다.원문주9▶先儒中에도 丁若鏞 韓鎭書와 같은 이는 역시 이러한 解釋을 내리어 「準之爲馬韓王止於本身 未嘗傳世而歷久也」라[9] 하였으나, 準을 馬韓의 王으로보는 傳統的謬見에는 또한 버서나지를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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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 硏經齋全集(成海應著) 故事類(少華鳳俗攷).
  2. 後魏書地形志, 樂良郡條.
  3. 硏經齋集卷五 「記樂羅王墓」條를 보면(年代의 表示는 없으나)鳳山郡 南十里 南川上 古墳 中에서 「故樂羅王墓」라고 쓴 字畵古拙의 石刻이 보이였다 한다. 그 石刻은 지금 얻어 볼 수 없지만, 樂羅는 卽樂浪의 同音異寫일 것이다.
  4. 漢書卷二十八, 地理志 樂浪郡條註.
  5. 朝鮮學報 第一卷 第一號 「古朝鮮に於ける政治規範」(崔南善 論文).
  6. 雜攷 第二輯 上, 六十六面 (鮎貝房之進 著).
  7. 三國志 魏志 東夷傳韓條, 裴松之註 所引 魏略文 參照.
  8. 雜攷 第二輯上, 六六頁 (鮎貝房之進著).
  9. 我邦疆域考 「馬韓考」(丁若鏞 著)及海東繹史續卷三, 馬韓條(韓鎭書 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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