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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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선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7월 19일 (금) 23:26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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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李光洙)
Lee Kwang-su.jpg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
 
한글명 이광수 한자명 李光洙 영문명 Yi Gwangsu 가나명 카야마 미츠로 (香山光郎かやまみつろう) 이칭 춘원(春園)
성별 남성 생년 1892년 몰년 1950년 출신지 평안북도 정주군 전공 철학,법문학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일제 강점기의 소설가이자, 시인, 평론가, 언론인이다. 독립 운동가이기도 했으나 친일파로 변절하였다.


생애


어린시절

이광수는 1892년 3월 4일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신리 940번지 익성동에서 아버지는 전주이씨 안원대군의 후손인 이종원인물과 어머니 충주 김씨의 4남 2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5세에는 천자문을 깨우치고 소학과 명심보감까지 읽어내려갔으며 외할머니에게 《덜걱전》, 《소대성전》, 《장풍운전》 등을 읽어드릴 정도로 명석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가정 형편으로 좋은 학교를 보낼수 없어 8세경에는 동리의 글방에서 《사략》, 《대학》, 《중용》, 《맹자》, 《고문진보》 등을 배웠으며 한시와 부(賦)를 지었다. 그위 위로 형이 세 명 있었으나 모두 태어난지 얼마 안되어 3세를 넘기지 못하고 요절하였다. 그의 부모는 이광수가 11세가 되던 해(1902년 8월)에 전염병 콜레라로 별세했다. 고아가 된 후 그는 경성부 근처에서 육체노동과 상점의 종업원 등을 전전하였고 그를 딱하게 여긴 어느 천도교의 호의에 깊이 감명받은 그는 천도교에 입교를 결심한다. 그 뒤 이광수는 우연히 문필과 관련이 되는 직업에 종사하였으며, 1903년 천도교에 입교하여 박찬명 대령의 집에 기숙하면서 도쿄와 한성부에서 오는 문서를 베끼고 배포하는 일을 했다. 그 뒤 재능을 인정받아 천도교의 서기일을 맡아 보기도 했다. 이후 천도교에 대한 탄압에 의해 1904년에 수도 한성부로 상경하였다.


일본 유학 시절

상경한 직후, 친일파 송병준이 이광수의 문학적인 재능을 알아보고 자신이 운영하던 친일단체 일진회에 이광수를 추천, 이광수는 일진회의 후원으로 1905년 일본으로 유학, 다이세이(大成)중학교를 거쳐 메이지 학원으로 편입하였다. 타이세이 중학교 재학 중 그는 학비 곤란으로 1906년 11월 귀국하였고, 1907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학원[明治學院] 중학부 3학년에 편입하였다. 홍명희, 문일평, 안재홍 등과 친하게 지내면서 1908년 소년회(少年會)단체를 조직하고 1908년 11월 1일 회람지 <소년>을 발행하면서 시, 소설, 문학론, 논설 등을 쓰기 시작하였다. 소년지와 소년회가 1911년 일제의 압력으로 폐간될 때까지 그는 유학생활 틈틈이 작품과 논설을 발표하곤 했다. 1909년 11월 7일에는 소설 〈노예 (奴隷)〉를 발표하였다.1909년 11월 18일에 일본어로 된 소설작품 〈사랑인가〉를 발표한 뒤, 며칠을 밤새워서 또 다른 작품을 써서 11월 24일에는 소설 〈호 虎〉를 발표하였다. 1909년 12월에는 〈정육론 情育論〉을 지어 한국 국내의 《황성신문》에 송고, 발표하였다. 그의 일본어 시 사랑의 노래는 일본 잡지 '부의 일본'에 게재되어 일본 유학생간에 그의 문명은 점차 높아갔다. 1910년 3월, 메이지 학원 5학년을 졸업한 뒤 할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귀국하였다.


오산학교

1910년 3월 다시 출국하려 했으나 남강 이승훈의 추천으로 정주 오산학교단체의 교원이 되었다. 그가 오산학교의 교사로 있을 때 김소월인물 등의 담임을 맡기도 했다. 교사 활동을 하며 순 한글체 문장으로 된 단편소설 《무정》서적을 《대한흥학보》에 발표하였다. 소설 《무정》은 예상하지 않았던 히트를 쳐서 그의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1910년 10월 이광수는 한일합방에 좌절하여 모든것을 포기하고 산에 들어가려고 오산학교 교사직을 사퇴하려 하였으나, 학생을 길러내어 국가의 대계에 보탬이 되어야 한다는 이승훈의 만류로 남아 있었다. 1911년 '105인 사건'으로 이승훈이 구속되자 오산학교 학감(교감)으로 취임하여 임시 교장으로 온 로버트 목사와 함께 오산학교의 실질적인 책임자가 되었다. 이어 김기홍 등과 함께, 조선총독부가 불태운 오산학교 교사를 재건하여 학교를 부활시킨다. 이후 1913년 11월 세계여행을 결심하고 오산학교를 그만두고 상하이에서 홍명희, 문일평, 조소앙, 송상순 등과 함께 지냈다. 1914년 미국에서 발간되던 『신한민보(新韓民報)』의 주필로 내정되었으나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미국에 가지 못하고 귀국하였다.


와세다 대학 재학 시절

1915년 9월 김성수의 후원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고등예과에 편입하였다. 1917년 신한청년당단체에 가입한 이광수는 신한 청년당 활동 자금을 모으기 위해 최초의 장편소설인 무정을 총독부의 기관지 매일신보에 연재했다. <무정>은 다음해 단행본을 내어 1만 부가 팔렸다. [2] 1917년 두 번째 장편 「개척자」를 『매일신보』에 연재하기 시작해 청년층으로부터 호평을 받았으나 1918년 폐병이 재발하였다. 병상에서 허영숙인물의 간호가 인연이 되어 결혼을 약속하고, 1918년 10월 허영숙과 베이징으로 떠났다. 이 시기 전통적인 가부장 제도를 비판하고, 자유로운 결혼생활을 등을 주장한 「신생활론」 · 「자녀중심론」등의 글을 발표해 당시 사회에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독립 운동과 사회계몽 활동

1918년 12월부터 그는 2·8 독립 선언사건을 치밀하게 준비, 주도하였다. 상하이와 도쿄에 있던 유학생, 청년 독립운동가들과 2·8 독립운동 사건을 모의하면서 연락차 상하이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가담하였고, 여운형을 당수로 삼아 조직된 신한청년당에도 관여하였다. 도산 안창호인물선생의 민족주의 운동에 감화를 받아 일본 와세다 대학교를 중퇴하고 상하이로 떠나 1919년 1월 백관수, 김상덕, 최팔용, 김도연, 송계백 등과 재일 조선 청년 독립단(在日朝鮮靑年獨立團)을 조직하였다. 또한 여러 선전 홍보물 등을 발간, 인쇄하여 양심적인 지식인 계층의 각성과 협력, 참여를 적극 호소하였다. 1919년 1월 신한청년당 당원으로 일본에 파견, 상하이를 출발하여 베이징을 거쳐서 일본 도쿄에 도착했다. 도쿄에서 재일본 한국유학생들을 만나고 2월 8일 2·8 독립 선언의 선언문을 기초 하였다.그는 도쿄에서 조선유학생들과 독립운동 거사에 관한 모의를 하고 스스로 도쿄의 조선유학생들이 발표한 독립선언문을 작성한다. 2월 8일 도쿄의 조선인 유학생인 신익희, 최팔용, 김도연, 김준연, 안재홍, 윤치영, 나혜석, 김상덕 등과 함께 2·8 독립 선언을 발표한다. [3] 3월 1일 국내에서 3·1 만세 운동이 벌어지자, 은신해 있다가 변장을 하고 중국인을 가장하여 상하이로 되돌아왔다. 1919년 4월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설립에 참여하였고, 또한 신한청년당 기관지 《신한청년》 주필로도 활동하였다. 1919년 5월 안창호가 상하이로 오자, 다시 안창호를 만나 그의 민족운동에 크게 공명하여 안창호를 보좌하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기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의 창립 발기인이 되고, 독립신문의 사장 겸 편집국장, 주필에 취임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 활동을 하면서 상하이에 있을 때 그는 실력양성을 부르짖으며 “독립국민의 자격자를 키우라.”라는 안창호의 권고에 감화하여, 이광수는 1920년 흥사단에 가입하고 문학 활동과 저술을 통한 국민계몽을 하기도 했다.


귀국 이후

그러나 자금난으로 압박받고 과로로 육신이 피폐해진 이광수는안창호의 강력한 반대[4]에도 불구하고 1921년 4월 허영숙을 따라서 귀국을 택했다. 상하이항을 떠나 배편으로 개성으로 귀국, 열차를 타고 가던 중 평안북도 선천군에서 검문검속을 하던 일본인 경찰에게 체포되었으나 혐의가 없어 곧 풀려났다. 그가 불기소 처분을 받고 풀려나자 이때부터 시중에는 그가 변절자라는 의혹이 나타나게 되었다.[5] 이해 4월 허영숙과 정식으로 혼인하였다. 귀국 직후 일제나 총독부의 식민 통치에 별반 저항없이 살아가는 민중들의 모습에 그는 환멸감을 느끼게 되었다. 귀국 이후 그는 동아일보나 조선일보 등에 기사를 쓰거나 칼럼과 논설과 소설을 송고하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하였으며 1922년 초부터 경신학교의 교사로 출강하며 영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1922년 잡지 《개벽》 5월호에 민족개조론원고을 발표하여 '자치운동론'을 내세워 이때부터 차츰 총독부로부터 타협적인 태도를 보이게 되었다. 이 글을 통해서 이광수는 '삼일운동이 독립을 쟁취하지 못한 채 실패로 끝난 이후, 우리 민족이 추구해야 할 방도는 일제에 대항하는 독립투쟁이 아니고 독립을 쟁취하고 유지할 만한 실력을 먼저 기르는 민족개조운동, 자치운동론'이라고 주장했다. 〈민족개조론〉의 타협적인 내용은 곧 민족진영 인사들의 감정을 자극, 논란을 일으키면서 문필권에서 소외당하였다. 그러나 이광수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고, 그의 〈민족개조론〉은 실력 양성론자들에게 영향을 주어 식민지통치를 인정하는 범위내에서 자치를 얻자는 자치운동의 이론적인 뒷받침이 되었다. 1923년 동아일보 편집국장이 되었으나 1924년 1월 2일부터 6일까지 사설 〈민족적 경륜〉원고을 발표하였으며 이로 인해 물의를 일으켜 동아일보에서 스스로 퇴사했다. 그러나 김성수와 송진우의 배려로 1924년 2월 동아일보의 기자로 다시 복귀했고 동아일보에 〈허생전〉을 연재하다가, 같은 해 11월부터 장편소설 〈재생〉을 동아일보에 연재하기 시작했다. 이후 1927년 「마의태자」, 1928년 「단종애사」, 1930년 「혁명가의 아내」, 1931년 「이순신」, 1932년 「흙」 등을 연재하였다. 1932년 7월 조선문필가협회 발기인 및 집행위원을 맡았고, 1933년 8월 조선일보사 부사장에 취임해 1934년 5월까지 활동하였다. 1926년 3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에 입학하였다. 와세다 대학 철학과에서 수학하고 중퇴한 학력을 인정받아 무시험 전형으로 입학했다. 그러나 일본 유학 시절 얻은 폐병 때문에 1926년 9월부터 1928년 3월 31일까지 네 차례 휴학했고, 결국 1930년 1월 학칙에 의해 제적됐다.


투옥과 변절

1937년 6월 수양동우회 사건사건으로 안창호(安昌浩)와 함께 투옥되었다가 6개월 후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며 이후 이광수는 본격적으로 친일 행위를 하기 시작하였다. 1938년 11월 3일 병보석 상태에서 수양동우회 사건의 예심을 받던 중 전향을 선언했다. 이후 1939년에는 친일어용단체인 조선문인협회(朝鮮文人協會) 회장으로 되었으며 같은 달 20일 조선문인협회 회장으로 협회 주체 전선(戰線) 병사 위문대·위문문 보내기 행사를 주도하였다. 1940년 2월 15일자 《매일신보》에 〈국민문학의 의의〉를 게재하고 황민화운동을 지지하였으며, 2월 20일자 《매일신보》의 〈창씨(創氏)와 나〉에서는 일제의 창씨개명 정책을 지지하기도 하였다. 1941년 일본어 산문집 『동포에 부침』이 박문서관(博文書館)에서 간행되었다. 8월 임전대책협의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1941년 9월 3∼5일자 『매일신보』에 「반도민중의 애국운동」을 게재해 일본의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을 지지하였다. 12월 조선임전보국단 전시생활부장으로, 영미타도대강연회에서 ‘사상 함께 영미를 격멸하라’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기도 하였다. 1942년 5월 조선임전보국단이 주최한 징병제도 연설회에서는 ‘획기적 대선물’이라는 제목으로 연설하였으며, 『신시대』 1942년 4월호 「징병과 여성」을 게재해 징병제 실시를 환영하는 입장을 보였다. 6월 조선문인협회 주최의 ‘일본 군인이 되는 마음가짐’을 듣는 좌담회, 11월 도쿄에서 열린 제1회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참가하였다. 1943년 4월 조선문인보국회 이사로 선출되었고, 11월 임시특별지원병제도 경성익찬회 종로위원회 실행위원과 연사로 활동하였다. 같은 달 최남선 등과 함께 일본 내 한국인 유학생들의 입대를 권유하는 ‘선배 격려대’에 참여하였다. 1944년 6월 조선문인보국회 평의원, 결전태세즉응(決戰態勢卽應) 재선(在鮮) 문학자 총궐기대회 의장을 맡았다. 8월 적국항복 문인대강연회에서 ‘전쟁과 문학’이란 제목으로 강연을하였으며, 11월 제3회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참석하였다. 1945년 2월 대화동맹 준비위원 겸 이사, 6월 조선언론보국회 명예회원과 대의당(大義黨) 위원이 되었다.


해방 이후

해방 후, 1946년 9월부터 광동중학교에서 영어와 작문을 가르쳤다. 1947년 1월 도산 안창호기념사업회의 의뢰로 집필을 시작해 5월 『도산 안창호』를 출간하였으며, 6월 『꿈』을 출간하였다. 1949년 12월에는 일제강점기 자신의 행적에 대한 경위와 맥락을 밝힌 『나의 고백』을 출간하기도 하였다.1949년 2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3월 병보석 되었고, 8월 불기소 처분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인해 7월 납북되었다가 이동되던 도중 지병인 폐결핵에 동상까지 겹쳐 10월 25일 5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연구


문학가로서의 활동

이광수의 등장은 통상적으로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2002년 계간 <문학인>과 한국문예창작학회가 진행한 20세기 한국 문학사 10대 사건 및 100대 소설 선정 투표에서 이광수는 전 부문에 이름을 올렸으며, 특히 논쟁 사조 분야에서는 "이광수의 등장" 자체가 10대 사건 중 하나로 뽑혔다. 소설가 김원일은 “일제 말기에 그가 보인 친일행각은 따지더라도 그의 문학은 우리의 자산으로 존중을 받아야 한다”면서 “인간의 흑백논리로 단칼에 재단해서는 안된다”고 평하였다.

-대표작-

소설

《어린 희생》
소설 《무정》
《재생》
《소년의 비애》
《개척자》
《무명》
《꿈》
《나》
《윤광호》
소설 《흙》
《마의태자
《원효대사》
《춘향》
소설 《단종애사》(1929)
소설 《유정》
《사랑》(1938)
소설 《세조대왕》
《혁명가의 아내》
《무명》
《애욕의 피안》
《할멈》
《가실 (嘉實)》
자서전 《나의 고백》

기타 불교 소설로 《원효대사》, 《이차돈의 사》, 《마의태자》 등도 썼다.

전기
《이순신》
 전기 《안창호》
《사랑의 동명왕》 (1965)
설산과 나
시집
춘원시가집 (春園詩歌集)
기행문
금강산유기
수필
'오동'(1936)
우덕송(牛德頌)
돌베개
번역서
《검둥이의 설움》 해리엇 비처 스토 원작
논문
《정육론 情育論》
《신생활론》
《공화국의 멸망》
《자녀중심론》
논설 《어린 벗에게》
논설 《민족개조론 (民族改造論)》
《민족적 경륜》
사료취선 (史要聚選) 4권


독립운동 및 계몽운동

1910년 오산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계몽단체 광문회(光文會)의 회원의 한사람으로 참여하였다. 1916년 와세다 대학에 입학한 후에도 계몽적 논설을 국내에 보내 《매일신보》에 연재하기도 하였고 1919년 1월 일본에서 조선청년독립단에 가담해 「2·8독립선언서」를 작성한 뒤 상하이로 넘어가 신한청년당에 가담하였다. 이후 3.1 독립선언서의 제1보를 기사화하여 보토케 하였고, 7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료편찬위원회 주임을 맡았고, 8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발행한 『독립신문』의 사장 겸 편집국장이 되었으며 잡지《독립》지를 발행하였다. 1920년 4월 흥사단에 입단하였으며 1922년 수양동우회의 모태인 수양동맹회 등을 결성하였다. 1925년 봄부터 안창호의 지시에 따라 수양동맹회와 동우구락부를 통합하여 통합조직을 결성하기 위해 노력, 수양동우회로 발족시키는데 힘을 쏟은 끝에 1926년 1월 8일 수양동우회를 탄생시켰다.


친일파로서의 활동

1922년 잡지 《개벽》 5월호에 조선 민족에 대한 전면적 개조의 필요성을 강조한 「민족개조론」을 발표하여 '자치운동론'을 내세워 이때부터 차츰 총독부로부터 타협적인 태도를 보이게 되었다. 1924년 1월 2일부터 6일까지 《동아일보》에 사설 〈민족적 경륜〉을 발표하였는데, 이것이 기폭제가 되어 이광수 주도의 타협적인 자치주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으며 사회적 논란을 일으켜 동아일보에서 스스로 퇴사했다. 1937년 6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안창호와 함께 투옥되었다가 6개월 후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며, 1938년 11월 수양동우회 사건의 예심을 받던 중 전향을 선언하였다. 1939년 친일 어용 단체인 조선 문인 협회 회장을 맡으며 스스로 '가야마 미쓰로'라는 이름으로 창씨개명을 하였고 1940년 2월 15일자 《매일신보》에 〈국민문학의 의의〉를 게재하고 황민화운동을 지지하였으며, 2월 20일자 《매일신보》의 〈창씨(創氏)와 나〉에서는 일제의 창씨개명 정책을 지지하기도 하였다. 1941년 일본어 산문집 『동포에 부침』이 박문서관(博文書館)에서 간행되었다. 8월 임전대책협의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1941년 9월 3∼5일자 『매일신보』에 「반도민중의 애국운동」을 게재해 일본의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을 지지하였다. 1942년 5월 조선임전보국단이 주최한 징병제도 연설회에서는 ‘획기적 대선물’이라는 제목으로 연설하였으며, 『신시대』 1942년 4월호 「징병과 여성」을 게재해 징병제 실시를 환영하는 입장을 보였고 1943년 일본 내 한국인 유학생들의 입대를 권유하는 ‘선배 격려대’에 참여하였다.





데이터


TripleData

Source (A) Target (B) Relationship
Person: 이광수 Person: 안창호 A hasMaster B
Person: 이광수 Group: 신한청년당 A isMemberOf B
Person: 이광수 Institution: 대한민국 임시정부 A worksAt B
Person: 이광수 Article: 민족개조론 A isWriterOf B
Book: 무정 Person: 이광수 A creator B
Event: 수양동우회 사건 Person: 이광수 A isRelatedTo B



Timeline




Network Graph






참고자원






주석


  1.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3688
  2. 이는 당시로 엄청났다. 당시 경성부는 1920년대 말에야 25만명의 인구였고, 거의 70~80% 이상이 문맹이었다. 즉 글을 읽을 줄 아는 5~8만 명 가운데 1만 부가 팔렸다는 얘기다.
  3. 1. 본단은 일한합병이 오족의 자유의사에 출치 아니하고 오족의 생존발전을 위협하고 동양의 평화를 요란케 하는 원인이 된다는 이유로 독립을 주장함. 2. 본단은 일본의회 및 정부에 조선민족대회를 소집하야 대회의 결의로 오족의 운명을 결할 기회를 여하기를 요구함. 3. 본단은 만국평화회의에 민족자결주의를 오족에게 적용하기를 요구함. 우 목적을 전달하기 위하야 일본에 주재한 각국대사에게 본단의 의사를 각해정부에 전달하기를 요구하고 동시에 위원 3인을 만국평화회의에 파견함. 우위원은 기히 파견된 오족의 위원과 일치행동을 취함. 4. 전제항의 요구가 실패될 시에는 일본에 대하야 영원히 혈전을 선함. 차로써 발생하는 참화는 오족이 기책을 임치 아니함. ” — 2·8 독립 선언문
  4. 이광수·허영숙군을 방문하다. 2인이 같이 본국으로 갈 뜻을 말하는지라 내 이르기를 지금 압록강을 건너는 것은 적에게 항서(降書)를 제납(提納)함이니 절대 불까요 군(君) 등 양 개인의 앞길에 대화(大禍)를 만드는 것이라 속단적으로 행치 말고 냉정한 태도로 양심의 지배를 받아 행하라 하다. -1921년 2월 13일자 안창호 일기
  5. 이에 대해 이광수가 상하이에 가기 전부터 총독부와 모종의 합의가 있었다는 의견과 이광수와 상해 임시정부를 이간질하려는 총독부의 책략이라는 의견이 있다-임종국 (1991년 2월 1일). 《실록 친일파》.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 서울: 돌베개. 99~10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