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운

North Korea Humanities

김지선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7월 19일 (금) 23:17 판
(차이) ← 이전 판 | 최신판 (차이) | 다음 판 → (차이)

👩🏻‍🏫본 문서는 서울대학교 " 24-1 미디어위키를 활용한 역사 데이터 편찬" 수강생 구연우(KNU2024)가 작성했습니다.


인물(Person) 목록으로 이동하기



조운(曺雲)
조운.jpg
출처 : https://www.siminsori.com/news/articleView.html?idxno=56454
 
한글명 조운 한자명 曺雲 영문명 Cho Un 가나명 이칭 주현(柱鉉)
성별 남성 생년 1898년 몰년 미상년 출신지 전라남도 영광 전공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시인이다. 대표작으로는 「불살너주오」, 「초승달이 재넘을 때 」 등이 있다.




생애


출생과 학창시절

1900년 6월 26일 전라남도 영광군 영광면 도동리 136번지에서 본관이 창녕인 아버지 조희섭(曺喜燮)인물과 어머니 광산 김씨의 6남매 중 넷째이자, 외아들로 출생하였다.[1] 영광보통학교기관를 거쳐 목포상업학교기관를 졸업하였다.


독립운동의 시작과 망명

그의 독립운동은 1919년 영광 삼일만세운동사건에서 시작되었다. 영광의 삼일만세운동은 조병현인물, 조철현(曺喆鉉)인물, 위계후(魏啓厚)인물, 김형모인물 등, 그의 형제와 가족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한 독립운동으로 1919년 1919년 3월 10일, 3월 14일에 1, 2차에 걸쳐 전개되었다. 조운도 삼일만세운동에 참가한 덕분에 일경에 쫓기게 되었다. 그래서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1919년 6월 17일 경성 덕흥태에 모여 위계후, 고경진인물, 유성기인물, 김형모 등과 중국으로 가는 길을 모색하고, 위계후, 조철현, 노준인물 등과 만주 망명길에 올랐으나 신의주에서 국경의 삼엄한 경비를 뚫지 못하고 돌아왔다. 하지만 1920년 다시 시도한 끝에 망명에 성공하였다. 이 때 위계후 등이 모금한 독립자금을 형 조철현과 함께 신한촌 이동휘(李東輝)인물 군대에 전달한 전달책을 수행하였다.[2]


본격적인 문학활동과 재혼

망명의 소임을 마치고 귀국 후 1922년 4월 5일 동아일보기관에 자유시 「불살라 주오」를 발표하면서 시인의 길로 들어섰고 여러 지면으로 확장해서 작품을 발표했다. 1929년에 보통학교 교사인 노함풍(魯咸豊)인물과 재혼하였다. 1925년 장성공립보통학교기관를 시작으로 영광보통학교기관법성보통학교기관 등을 거쳐 영광 관내의 보통학교 교사였던 노함풍은 결혼 전에 이미 일제의 감시대상인물이었다. 그들은 부부이자 동지가 되어 영광 한글회 선전부단체 임원으로 매월 선전인쇄물을 살포하고 선전강연 음악회와 선전동요동학회를 여는 등 지역사회의 변혁운동에 함께 하였다.[3]


1920년대의 지역문화운동

조운은 민족운동에 진력하는 만큼 지역문화운동에도 전념하였다. 1922년 전남지역 최초의 문학서클인 자유예원(自由藝園)단체을 형성하였고 같은 해, 10월에 추인회단체라는 시조 동호회를 창립하였다. 그는 문예창작지도를 하며 본격적인 문단활동을 시작했고 시조창작 활동과 문맹퇴치, 물산장려, 왜화배척 등 계몽운동에 참여해 각종 강연회를 주최했다.


1930년대의 지역문화운동

1934년 2월 항일 민족 자각운동의 일환인 독서회 갑술구락부단체를 결성하여 각종 문화 운동 주도하였다. 또한, 4월 체육으로 민족 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영광체육단단체을 조직하였다. 영광체육단이 점점 영향력이 커지자 이를 경계한 일본 경찰은 1937년 9월 19일 '동방 약소 민족 옹호'와 '대한 독립 만세'라는 전단을 붙였다고 날조하여 영광의 지도층 인사들 400여명을 잡아들였고 고문하여 허위로 자백을 받아 사건을 날조하였다. 이 사건으로 조운은 1년 7개월의 옥고를 치른다. 이를 영광체육단 사건사건이라 한다.1945년 9월 1일 정주연학회단체의 회장이 되어 영광민립중학 설립추진위원회단체를 결성하고 영광민립남녀중학교기관를 개교한다.


월북

1949년 가족들과 함께 월북한다. 북한에서는 최고인민회단체의 상임위원을 지냈다. 1956년 이태준(李泰俊)인물 계열 숙청 이후 몰락했다가 구제된 것으로 전해진다.


월북 문인 해금 조치로 인한 재평가

월북 이후 월북 문인이라는 이유로 그 이름이 잊혀졌다. 그러나 1988년 월북 문인 해금 조치가 발표되었고 이로 인해 학계에서 재평가를 받게 되었다. 그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2000년 7월 22일에는 조운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기관의 주도로 《조운시조집서적》을 복간하였으며 그의 고향인 전라남도 영광군 교육청 부지에서 시비 건립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교육청 측의 방해로 제막식은 같은 해 9월에 열리게 되었다.




연구


구룡폭포(九龍瀑布)

이 시조는 조운인물삼일운동사건에 가담한 후 만주공간로 망명했다가 돌아와 1921년 금강산공간을 둘러본 다음 3년 후에 발표한 작품이다. 이 시조는 불교의 윤회사상과 동양적 원형이미지가 강조된 상선약수가 바탕을 이룬다. 이 시의 외연은 장엄한 구룡폭포를 향한 예찬이지만 내포는 시인의 꿈과 역사인식으로 확대된다. 폭포는 서정적 주체의 욕망을 환기 하는 매질이며. 흔적도 없이 사라질 이슬의 이미지와 도도한 역사를 이루는 바다의 이미지 사이를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정서적 흐름으로 그 매질의 질량을 증폭시키고 있다. 이때의 걱정의 감격은 조국의 광복으로, 혁명으로, 윤회나 우주적 순리로 다양한 변주가 가능하다. 구슬구슬 맺힌 작은 물방울들이 물이 되고, 수정령이 되고 폭포에 휩쓸리어 소멸할 이슬은 그러나 폭포보다 간절하고 힘없고 순수한 민중적 의지의 결정체다. 폭포로 형상화된 정서의 분출은 모든 그리움의 총합인 것이다. 이처럼 조운의 역사인식은 이슬이 폭포와 만나 더 큰 폭포를 이루는 역사의 자연스런 흐름 위에 있는 것이다.[4]


석류(石榴)

「석류(石榴)」는 조운인물 시조의 특성이 유감없이 드러난 조운의 대표작품이다. 이 시의 놀라움은 그의 시 세계가 보여 주는 시적 이미지의 생생함과 언어의 참신성에 있다. 시조 형식이라는 봉제 장치가 서정적 주체의 정서적 흐름을 통 제하는 가운데에서도, 아슬아슬하게 뼈져나온 감정의 한 자락이 읽히는 점에 서 시조의 전형성으로서 석류의 위치를 확보한다. 억지로 꾸민 흔적 없는 자연스러움과 소박하고 아름다운 민중적 삶의 영근 꿈을 '빠개젖'히는 듯한 긴장으로 마무리되고 있다. 있다. 그의 다른 작품인 「구룡폭포(九龍瀑布)」에서는 풀 끝에 구슬구슬 맺혔던 이슬이 「석류」에서는 '알알이 붉은' 석류알로 익어 있다. 폭포와 같은 격정적 감격 속으로 휩쓸리고 싶던 그 이슬이 임을 향해 '빠개젖'히는 '알알이 붉은 뜻'으로 쏟아지려 하는 것이다. 조국의 광복을 기다려온 시간의 시위가 마침내 광복을 맞이해 화살을 당기는 폭발력이 시조 전편에 흐른다.[5]




데이터


TripleData

Source (A) Target (B) Relationship
Person: 조운 Person: 노함풍 A isSpouseOf B
Person: 조운 Person: 조철현 A hasBrother B
Person: 조운 Institution: 영광보통학교 A graduates B
Person: 조운 Institution: 목포상업학교 A graduates B
Person: 조운 Group: 영광 한글회 선전부 A isMemberOf B
Person: 조운 Person: 조희섭 B hasSon A
Person: 조희섭 Person: 조철현 A hasSon B



Timeline




Network Graph






참고자원


  • 이동순, 「시인 조운과 가족들의 민족운동과 의미」, 한국문화융합학회, 『문화와 융합』 40(3), 2018.
  • 최호진, 「시조시인 조운의 문예운동과 현실의식」,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호남학』 59, 2016.
  • 이동순, 「조운과 1920년대 현대시조의 형성」,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한국민족문화』 40, 2011.






주석


  1. 이동순, 「시인 조운과 가족들의 민족운동과 의미」, 한국문화융합학회, 『문화와 융합』 40(3), 2018, p.403.
  2. 이동순, 위의 글, p.408.
  3. 이동순, 위의 글, pp.409-410.
  4. 최호진, 「시조시인 조운의 문예운동과 현실의식」,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호남학』 59, 2016, pp.107-108.
  5. 최호진, 위의 글, pp.11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