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사량

North Korea Humanities

서준호(KNU2024)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6월 13일 (목) 19:03 판 (193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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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량(金史良)
김사량.jpg
출처 : https://munedong.com/7-12/
 
한글명 김사량 한자명 金史良 영문명 Kim Saryang 가나명 きむ さりゃん 이칭 김시창
성별 생년 1914년 몰년 1950년 출신지 북한 평양 직할시 전공 독일문학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김사량(金史良, 1914년 3월 3일 ~ 1950년)은 평양 출생의 소설가, 희곡 작가로 재일 한인 문학의 효시로 여겨지는 작가이다.[1]


생애


출생

본명은 김시창(金時昌). 평양 출생. 1931년 평양고등보통학교기관 5학년 재학 중 졸업을 불과 몇 달 앞두고 일본군 배속장교 배척운동을 벌이다 퇴교, 일본으로 건너가 사가고등학교기관를 거쳐 도쿄제국대학기관 독문학과를 졸업하였다.[2]


1930년대

1936년 동인지 『제방(堤防)』서적을 발간하여 이 잡지에 일본어로 쓴 그의 처녀작 「토성랑(土城廊)」서적을 발표하였고, 프롤레타리아문학운동에 가담하여 활동하던 중 사상불온으로 경찰에 검거되었다. 석방 후 『문예수도(文藝首都)』서적 동인이 되어 「기자림(箕子林)」서적·「산(山)의 신(神)들」서적 등의 일문소설(日文小說)을 통하여, 한국 농촌의 하층민생활을 생생히 그렸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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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대 해방 전

1940년 재일 조선인을 다룬 단편소설 <빛 속에>로 조선인 최초로 아쿠다가와 상 후보에 선정되었다. 여러 단편소설을 발표하며 일본 문단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다가 1941년 12월 9일 태평양 전쟁 발발 다음날 예방검속법에 의해 구금되었다. 도쿄 제국대학 문학부 독일문학과를 졸업하고 평양 대동공업전문학교 독어교사로 부임했다. 일제 학도병 위문단원으로 중국에 파견된 틈을 타 연안으로 탈출, 조선의용군에 입대하여 각종 희곡과 르포를 썼다. 이 때의 경험을 쓴 <노마만리>는 르포문학의 걸작이자 귀중한 사료로 꼽힌다.


1940년대 해방 후

1945년 8월 해방을 맞아 귀국한 다음 북한 문학조직 정치활동 및 대학 강의, 창작 등 활발한 활동을 벌이지만 비김일성계파이기에 작품집에 실을 작품이 누락되는 등 부침을 겪는다. 1947년 시인 구상의 데뷔 작품집인 시집 <응향> 검열위원으로 관여했다.


1950년

1950년 6.25 종군 작가로 남하하여 종군기를 집필한다. 같은 해 10월경 강원도 원주 문막 부근에서 심장병으로 낙오하여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연구


<빗 속에>


<노마만리>





데이터


TripleData

Source (A) Target (B) Relationship
Person: 김사량 Institution: 도쿄제국대학 A takesCourseAt B
Person: 김사량 Group: 6.25 종군 작가 A isMemberOf B
Person: 김사량 Group: 조선의용대 A isMemberOf B



Timeline


[1]



Network Graph






참고자원







주석


  1. 김사량online, 나무위키키.
  2. 김사량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3. 김사량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