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확

North Korea Humanities

이지원(JBNU2024)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6월 13일 (목) 16:15 판 (Triple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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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확 (安廓)
안확.png
출처 :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580066&cid=46623&categoryId=46623
 
한글명 안확 한자명 安廓 영문명 가나명 이칭 운문생(雲門生)
성별 생년 1886년 몰년 1947년 출신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 전공 국문학자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일제강점기 때, 조선국권회복단 마산지부장, 신천지 편집인 등을 역임하였고, 『조선문학사』 등을 저술하며 국어학, 국문학, 아악 등을 연구한 국학자 · 독립운동가이다. [1]


생애


출생과 성장

1886년 2월 28일 한성부 우대마을에서 중인 출신으로 태어났다. 그는 1895년 수하동소학교기관에 입학하여 1899년에 심상과, 1901년에 고등과를 졸업했다. 그는 일찍부터 사회운동에 관심을 보였고 1897년 1월 독립문 낙성식에 참여했고 독립협회단체가 주관한 만민공동회단체에도 참석해 연설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소학교 교육이 매우 미흡했다고 여겼다. 그는 <조선문학사>에서 당시 수하동소학교기관의 몇몇 과목은 교재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마음과 행실을 바르게 닦아 수양하는 것을 목표로 삼은 '수신(修身)'이란 과목 만은 마음에 들었으며, 자신은 이때부터 체육에 관심이 많았다고 회고했다. 또한 1902년 3월에 경성관립중학교기관에 입학했지만 그 이후의 기록은 발견되지 않아서 그가 이 학교를 언제까지 다녔는지 알 수 없다. 그는 이 시기 서구 문명을 소개하는 책들을 보며 사상적 기반을 다졌다. 특히 유길준인물의 <서유견문(西遊見聞)>과 양계초(梁啓超)의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을 통해 서구 문물과 서양의 정치사상들에 대한 인식을 넓혔다. 또한 그가 <조선 문학사>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그는 이 시기 서북 지방을 주유했다고 한다. 이로 볼 때 그는 평안도에서 교육 계몽운동에 종사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2]


교사로 부임

1907년 가을에 경남 진주의 안동학교기관 교사로 부임한 그는 1911년 3월에 경남 마산의 창신학교기관로 직장을 옮겼으며, 1917년 사직할 때까지 이 학교에서 근무했다. 그는 학생들에게 "당장 빨리 걷는 습관부터 가져라. 방안에서 책만 읽다가 나라를 잃어버렸으니, 이 어찌 피눈물 나는 선배들의 모습이 아니냐."며 체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또한 1914년 창신학교에 경남 최초의 축구부와 야구부를 신설했다. 당시 공이 없자 짚공을 만들어 사용했고, 정식 경기에는 선교사들이 구해준 가죽공을 사용했다. 창신학교기관는 당시 대구 계성학교와 자주 친선경기를 벌였고, 두 학교의 경기는 곧 이 지역의 명물로 자리잡았다고 한다. [3]


일본 유학

1914년경에 신학문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위해 일본에 유학, 니혼대학기관에서 정치학을 수학하였다. [4] 안확은 일본 유학 기간 동안 일본어와 근대 학문을 습득하고 이를 토대로 자신의 국학을 구성했다. 그는 <조선의 미술>에서 한국의 미술이 중국 및 인도 미술을 배낀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또한 <조선의 문학>에 한국의 문학은 서양보다 훨씬 앞서 '발달'을 이뤘으며, 국어는 일본어를 비롯한 다른 여러 언어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정도로 독자성을 갖췄다고 봤다. 그러나 국학을 탐구하는 이가 없고 새로운 풍조에만 빠져서 국학은 학문적으로 전혀 발달하지 못한 상태에 있다면서,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고 '배달혼'을 고양시키기 위해 한국 고유의 특성에 대한 연구, 즉 국학에 전념할 것을 요구했다. [5]


조선국권회복단 결성

1916년 경북 달성군 수성면 소재 안일암에서 시회(詩會)를 가장하여 비밀결사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단체이 결성되었을 때 마산지부장에 선임되어 활동했다. 그는 이 단체의 일원으로서 1918년 이회영인물이 주도하고 이승훈인물, 오세창인물, 한용운인물 등이 참여한 고종 황제의 해외 망명 계획에 관여했다.
그리고 3.1 운동사건이 전국 각지에서 전개되자 마산에서도 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계획하고 4월 3일 마산에서 독립만세시위가 벌어지는 데 관여했다. 이후 1920년에 서울로 상경한 그는 1920년 6월 28일 오상근인물, 장덕수인물, 장도빈인물 등과 함께 조선청년회단체를 발기하고 지방부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6]


<아성>의 편집자

조선청년연합회단체를 결성한 뒤 기관지인 <아성(我聲)>의 편집 책임을 맡았다. 그러나 이 단체는 사회주의 계열과 민족주의 계열간의 주도권 문제로 창립 당시부터 내분을 보이기 시작했다. 동아일보를 중심으로 모인 민족주의 계열은 조선청년연합회단체 내에서 사회주의 계열의 서울청년회단체에 비해 세력이 상대적으로 불리했다. 사회주의 계열의 서울청년회단체는 동아일보가 조선청년연합회단체를 자신들의 정치도구로 이용하려하자 민족주의계열과 대립했고, 이 대립은 안확이 <자각론>과 <개조론>을 조선청년연합회단체 명의로 발행하면서 심화되었다. 유자명인물은 안확이 개조론을 발표하는 자리에 참석했다가 그의 강연을 듣고 곧장 반박하는 내용의 <내적 개조론의 검토>를 발표했고, 안확은 거센 비판을 이기지 못하고 <아성>의 편집자 직책에서 물러났다. [7]


국학 연구

1921년 5월 중국 여행을 다녀온 안확은 1922년 11월 <신천지> 신천지사에 입사하여 편집인과 경영진으로 참여하면서 여러 편의 글을 기고했다. 이후 그는 사회 활동보다는 국학 연구에 몰두했다. 1922년에 <조선문학사>를 발표했고, 1923년에는 <조선문명사>를 발표해 국학연구와 집필을 시작했다. 특히 <조선문명사>는 출판 기념회까지 열렸으며, 당시 동아일보 1923년 1월 11일자에 출판 기념회에 대한 기사가 실릴 정도였다. 그는 음악사에도 큰 관심을 보여 1926년부터 1930년까지 약 4년간 이왕직 아악부 촉탁을 자청하여 재직하면서 조선음악사를 연구했다. 이후 그는 사회 활동을 거의 하지 않고 국학 연구에 몰두했다. 안확을 다룬 여러 논문들은 그가 1933년 7월 이후 만주, 백두산, 압록강, 중국, 하와이, 대마도 등지를 유랑하며 국학 연구에 필요한 자료를 수집했다고 서술한다. [8]


타계

'광복절'사건을 맞이한 뒤 친구 이병두인물와 함께 정치 활동을 하기로 협의하고 정당을 세우려 했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급환에 걸려 1946년 11월 8일에 타계하였다. [9]





연구


국어학 연구

국어학 연구에 있어서 안확은 한글을 우리 민족의 조직적 정신의 결정으로 보고 기록용 문자인 한문에 대해 민중들이 사용하던 말, 즉 구어(口語)를 적기 위해 만들었다는 뜻에서 언문(諺文)이라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한글의 제자원리가 세종 초년의 음악 정리에 기초를 둔 것이라고 하는 악리기원설(樂理起源說)을 제시, 일인 관학자들이 악의적으로 주장한 범자(梵字) 모방설이나 몽고자 모방설 등을 부정하였다. 안확은 국어의 본질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국어와 다른 언어를 비교하고 국어의 계통과 역사를 연구하였다.

또한, 주시경(周時經)인물의 제자들이 한글에서 한자를 완전히 배제하자고 주장하자, 그것은 언어와 문자를 혼동하는 태도라고 비판하면서 언한문(諺漢文) 혼용을 주장하고, 외래어를 무조건 배척하는 태도를 비난하였다. 맞춤법 문제에 있어서는 민중을 위해 편리한 방법을 택하자고 주장하면서 전통적인 맞춤법을 큰 수정 없이 쓰자고 주장하였다. [10]


국사학 연구

국사학 분야에서의 업적은 1923년에 간행된 『조선문명사』서적가 대표격인데, 원래 이 책은 안확이 계획한 『조선문명사』서적 8권 중의 「조선정치사」에 해당되는 것이다. 문명진보론의 관점에 입각, 민족의 생활사를 대변하는 정치사의 발전 과정을 정치 체제의 변화라는 기준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의식은 시대 구분에 반영되어, 상고의 소분립정치시대로부터 중고의 대분립정치시대로, 그리고 다시 근고의 귀족정치시대로부터 근세의 군주독재정치시대로 발전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이해의 배경에는, 민족의 역사는 꾸준히 개선, 진화되는 것이라는 인식이 전제되어 있다. 또, 안확은 이러한 정치체제의 변화는 지배층이 아니라, 절대 다수인 일반 민중의 정치에의 참여 정도인 자치제의 발달이란 기준에서 추구하고 있다. 곧 자치제의 발달과 정치체제의 변화를 관련시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가장 주목된 것은 향촌사회에서 일반민의 의사가 결정되는 촌회였다. 민중을 기준으로 한 역사발전의 이해는, 당시의 애국계몽운동기에 추구된 자유민주주의의 근대적 민중관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이해될 수 있다. [11]


아악에 대한 연구

궁중음악의 악기·악곡 등을 정리하고 외국 음악과의 관계를 연구하였으며, 민중음악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정리하였다. 그리고 음악 연구를 바탕으로 문학사상에 존재한 가시(歌詩)들을 검토, 가시를 삼대목체(三大目體)·정읍체(井邑體)·첩성체(疊聲體)·경기체(景幾體)·장편(長篇)·시조(時調) 등으로 분류, 최초의 시조연구서인 『시조시학(時調詩學)』서적을 내기도 하였다. [12]





데이터


TripleData

Source (A) Target (B) Relationship
Person: 안확 Institution: 수하동소학교 A graduates B
Person: 안확 Institution: 경성관립중학교 A graduates B
Person: 안확 Institution: 니혼대학 A graduates B
Person: 안확 Institution: 안동학교 A worksAt B
Person: 안확 Institution: 창신학교 A worksAt B
Person: 안확 Institution: 경성대학 A worksAt B
Person: 안확 Institution: 김일성대학 A worksAt B
Person: 안확 group: 일본수학물리학회 A isMemberOf B



Time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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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원


1. 이태진, "안확 (安廓)"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 "안확 (1886년)" 『나무위키』, 2020.05.29.






주석


  1. 이태진, "안확(安廓)"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 "안확 (1886년)" 『나무위키』,2020.05.29.
  3. "안확 (1886년)" 『나무위키』,2020.05.29.
  4. 이태진, "안확(安廓)"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5. "안확 (1886년)" 『나무위키』,2020.05.29.
  6. "안확 (1886년)" 『나무위키』,2020.05.29.
  7. "안확 (1886년)" 『나무위키』,2020.05.29.
  8. "안확 (1886년)" 『나무위키』,2020.05.29.
  9. "안확 (1886년)" 『나무위키』,2020.05.29.
  10. 이태진, "안확(安廓)"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11. 이태진, "안확(安廓)"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12. 이태진, "안확(安廓)"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