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팔양

North Korea Humanities

김지수(PNU2024)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6월 13일 (목) 12:08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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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팔양(朴八陽)
박팔양.jpg
출처 : 전라매일 2023년 06월 07일자 기사
 
한글명 박팔양 한자명 朴八陽 영문명 Bak Pal-Yang 가나명 김니콜라이 이칭 김려수, 여수, 여수산인
성별 남성 생년 1905년 몰년 1988년 출신지 경기도 수원 전공 법학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시인. 평론가. 신문기자. 1905년 수원에서 태어나서 재동공립보통학교기관배재고등보통학교기관에서 수학한 후, 경성법학전문학교기관를 졸업하였다. 조선일보기관 사회부 기자로 근무하다 중외일보기관, 조선중앙일보기관의 사회부장을 지냈다. 만주로 건너가 친일신문인 만선일보기관의 사회부장 및 학예부장을 지내다 해방 이후 귀국했다. 귀국 이후, 각종 기관지 편집국장과 위원 및 의원, 김일성종합대학기관 어문학부 신문학과 강좌장 등으로도 역임했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당과 수령에 대한 높은 충실성을 지녔으며, 주로 전원을 칭송하는 자연시와 사회적 현실에 대한 관심을 노래한 경향시 등을 발표한 시인이다.


생애


배재고등보통학교 수학

박팔양은 1905년 08월 02일 지금의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곡반정동에서 태어났다. 1912년 8세 때, 재동공립보통학교기관에 입학해 1916년 졸업하고, 같은 해 4월 1일 배재고등보통학교기관에 입학했다. 배재고등보통학교기관에서 카프의 주도 세력이 되는 박영희(朴英熙)인물, 김기진(金基鎭)인물, 김복진(金復鎭)인물[1] 등을 동급생으로 만나게 되고 송무현(宋武鉉)인물[2] , 박세영(朴世永)인물, 나도향(羅稻香)인물[3] 등과도 교류했다. 이때의 영향으로 훗날 카프에 가입하고 프로문학[4]을 지향하게 됐다.


경성법학전문학교 입학 이후

박팔양은 1920년 배재고등보통학교기관를 졸업하고, 1922년 경성법학전문학교기관에 입학했다. 이후 박팔양은 동인지 요람을 발간하면서 사회주의 사상을 담은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때 정지용(鄭芝溶)인물, 김화산(金華山)인물[5]과 교류하게 되면서 정지용(鄭芝溶)인물의 모더니즘적 경향과 김화산(金華山)인물의 다다이즘적 경향을 섭렵하며 다양한 문학적 경향을 보이게 됐다.


카프 가입

박팔양은 1924년 4월 경성법학전문학교기관를 졸업하고 1925년 6월까지 동아일보기관 사회부 기자로 지냈다.1925년 8월 23일 사회주의 단체인 서울청년회의 일원으로 카프[6]에 가입했다. 카프는 예술을 무기로 하여 조선민족의 계급적 해방을 목적으로 하여 활동을 했으며, 1926년 1월에 문예운동을 발간, 1927년 일본 도쿄에서 예술운동을 발간, 그해 9월 전국 맹원총회를 열어 대규모의 문학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박팔양의 카프 탈퇴 시기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이에 대해 두 가지 대표적인 가설이 존재하는데 1927년 제1차 방향 전환 직전이라는 주장과 1930년 제2차 방향 전환 직후라는 주장이 존재한다.[7]


제목4


제목5





연구


제목1


제목2


제목3





데이터


TripleData

Source (A) Target (B) Relationship
Person: 홍길동 Institution: ○○고등보통학교 A graduates B
Person: 홍길동 Institution: ○○대학교 A worksAt B
Person: 홍길동 Group: ○○학회 A isMemberOf B



Time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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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원







주석


  1. 소설가인 김기진과 조각가인 김복진은 형제 관계이다.
  2. 본명은 송무현이나, 송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3. 본명은 나경손이며, 의사 나성연의 맏아들이다.
  4.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지칭하는 말로 마르크스주의 사상에 입각해 프롤레타리아의 해방을 목적으로 하는 문학이다.
  5. 김화산도 법학전문학교를 졸업하였으며 카프가 결성될 때 동맹원이 되어 활동을 같이했다. 그러나 결국 프로문학에 대한 의견의 차이로 인해 카프에서 제명되었다.
  6. 카프는 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의 약칭이다.(Korea Artista Proleta Federacio)
  7. 박팔양의 작품이 1930년 이후에 프로문학과는 거리를 보인다는 점을 근거로 두 번째 가설이 유력하다고 주목 받고 있다. 게다가 박팔양은 문학이 단순한 도구에서 그치지 않고 예술성을 갖춘 작품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두 번째 가설이 더 유력하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