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석하

North Korea Humanities

김현우(SNU2024)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6월 13일 (목) 07:40 판 (활발한 사회적 교류를 통한 민속 연구의 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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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석하(宋錫夏)
송석하.jpg
출처 : "송석하(宋錫夏)",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글명 송석하 한자명 宋錫夏 영문명 Song Soek-ha 가나명 이칭 석남(石南)
성별 남성 생년 1904(고종 41)년 몰년 1948년 출신지 경상남도 울주 전공 일본 동경상과대학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송석하는 민속 연구 및 인류학의 확장에 기여한 선구자적 인물이다. 그는 조선민속학회단체를 창립하였으며 서울대학 인류학과기관를 개설하고 국립민족박물관기관을 설립하였다.


생애


유년기 및 청소년기

송석하는 당대 대부호 집안의 자제로 1904년 고종의 시종부경(侍從副卿)을 지낸 송태관(台觀)인물의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고향 양득리에서 10여리 거리의 언양공립보통학교기관를 다니다가 부친을 따라 반구동으로 이사를 가면서 부산공립상업학교기관로 전학하여 1916년에 보통학교를 졸업한다.[1] 이 무렵 부산에 있는 부친을 따라서 부산상업고등학교의 전신인 부산공립상업학교기관에 진학해 1920년 졸업한다.


일본 유학

1920년 부산공업학교(현 부산상업고등학교의 전신)를 졸업한 후 일본의 동경상과대학기관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그러나 약 2년 간의 유학 생활 동안 1923년 관동대지진사건에서 정신적 충격을 경험하고 가정 문제로 부친의 학비 지원을 받지 못하며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다.[2] 일본 생활에서 식민지 조국의 현실과 고통을 경험한 그는 귀국 후 우리 민속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전국을 돌면서 조사 연구에 몰두했는데, 이는 후에 그가 민속극과 민속오락의 연구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기게 된 배경이 되었다.[3]


조선민속학회 창립과 『조선민속』 창간

1930년대에 들어서며 송석하는 민속학 연구 분야를 사회적으로 확립, 확장하는데 주요한 기여를 이루었다. 그는 1932년 4월 민속 · 역사학자인 손진태인물, 작가 정인섭인물 등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민속학회인 조선민속학회를 창립하고 초대 회장을 맡았다. 이 조직은 일제강점기의 조선 민속을 수집, 연구하고 민속극의 가면 전람회 개최와 같은 사회 활동도 펼쳤으며 광복 직후까지 활동을 이어갔다.[4] 또 그는 1933년 1월 자택을 사무실로 삼고 사재를 들이며 민속학 동인연구지 『조선민속』학술지을 발행하기 시작했다.[5] 이는 한국의 민속 연구와 인류학이 활발한 학술 활동을 통해 체계적인 학문의 영역으로 자리 잡게 된 시초라고 볼 수 있다.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가는 민속자료를 보존하겠다는 그의 의지는 1954년에 발족한 한국민속학회, 1969년에 출범한 한국민속연구회 등을 거쳐 현재의 한국민속학자대회으로 승계되었다.[6]


해방 후

송석하는 해방 후 한국 민속 연구의 지평을 넓히고자 하는 의지를 더욱 적극적으로 실현하였다. 해방 직후인 1945년 11월 8일 그는 자신의 수장품을 중심으로 국립민족박물관기관으로 처음 창립하였고, 1966년 10월 4일에는 경복궁 내 수정전(修政殿)공간에 한국민속관을 열었다.[7] 1946년에 서울대학에 인류학과를 설치하고 강의를 맡았으며, 국립민족박물관의 영문명을 '인류학박물관(Museum of Anthropology)'으로 삼고, 1946년에 발족한 조선인류학회의 사무실을 민족박물관에 마련하는 등 민속학을 인류학으로까지 넓히려는 노력을 이어갔다.[8] 그러나 열성적인 학자이자 사회 활동가였던 그는 1948년 민속문화 보전의 의지를 다 펼치기 전에 오랜 지병인 고혈압으로 인해 44세의 이른 나이로 별세하였다.





연구


민속학 분야의 열정적인 활동가

송석하는 민속학 분야에서 정규과정을 밝은 적은 없으나, 1929년 26세의 나이에 「조선의 인형극」원고을 발표하면서 민속학으로 관심사를 확장하게 되었다. 이어 1932년 「조선의 민속극」원고을 발표하고 인형극, 가면극, 민속무용, 연극, 무속, 농촌오락 등 넓은 분야의 민속 문화로의 연구를 이어갔다.[9] 그 과정에서 현장답사, 민속자료 채집 등의 민속 연구의 인류학적 방법론을 구축하였다. 1932년에는 한국 민속학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조선민속학회를 손진태, 정인섭과 함께 창립하고 초대 회장을 맡았으며, 이어 1933년 1월에는 사비를 들여 『조선민속』이라는 학회지를 발행하면서 한국 민속학 분야의 개척자로서 발자취를 남겼다. 그는 학문적 연구에 그치지 않고 대중에게 민속을 더욱 알리고자 노력했는데, 오늘날의 한국민속예술축제와 유사한 조선민속예술경연대회를 기획하였고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수집한 많은 민속자료를 일간지와 잡지, 각종 매체에 기고하면서 민속 문화를 우리 일상에서 접할 수 있도록 힘썼다.[10] 이로부터 민속에 대한 그의 남다른 애정을 느낄 수 있으며 학문에 몰두하는 연구자보다는 문화운동에 적극성을 보인 그의 활동가적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활발한 사회적 교류를 통한 민속 연구의 확대

송석하는 민속연구의 다양한 전문가와 교류를 하였으며, 관련 단체와 기관 등을 설립하며 민속학의 범위를 넓혀간 인물이다. 그는 특히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철학과의 아카마츠 교수인물와 아끼바 교수인물와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고 있었다고 알려지며, 사회문화분야의 조사사업에 참여하던 무라야마인물와 이마무라 토모에인물와도 민속탐사 분야에서 특별한 관계를 유지했다.[11] 이와 같은 교류는 그가 전방위적인 현장답사(fieldwork)를 수행하는데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송석하는 자신이 수집한 민속자료와 조선민족미술관의 야나기인물가 수집한 민예품을 기반으로 1945년 국립민족박물관의 개관을 준비했고, 1946년에는 미군정 시기 한국으로 발령받은 뉴멕시코대학 인류학과 출신 유진 크네즈 대위인물가 송석하와 돈독한 유대 관계를 맺어 함께 조선인류학회를 창립하였다.[12] 다만 이러한 폭넓은 친교는 그가 일제의 정치권력과 밀접한 행보를 보였으며 식민지배정책에 협조하였으므로 문화민족주의자로 공인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13]






데이터


TripleData

Source (A) Target (B) Relationship
Person: 송태관 Person: 송석하 A hasSon B
Person: 송석하 Person: 김경옥 A hasSpouse B
Person: 송석하 Institution: 부산 제2상업학교 A graduates B
Person: 송석하 Institution: 일본 동경상과대학 A takesCourseAt B
Person: 송석하 Group: 조선민속학회 A isMemberOf B
Person: 송석하 Article: 「조선의 인형극」 A isWriterOf B
Person: 송석하 Article: 「조선의 민속극」 A isWriterOf B
Journal: 『조선민속』 Group: 조선민속학회 A publisher B



A publisher B

Timeline




Network Graph






참고자원








주석


  1. https://www.cha.go.kr/cop/bbs/selectBoardArticle.do?nttId=5768&bbsId=BBSMSTR_1008&nm=NS_01_10
  2. https://www.cha.go.kr/cop/bbs/selectBoardArticle.do?nttId=5768&bbsId=BBSMSTR_1008&nm=NS_01_10
  3. https://www.cha.go.kr/cop/bbs/selectBoardArticle.do?nttId=5768&bbsId=BBSMSTR_1008&nm=NS_01_10
  4.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2028
  5.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0871
  6.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2028
  7.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6221
  8.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0871
  9. 해당 문서에서는 특히 전국을 답사하며 다양한 사진 기록을 남기고 사진에 대한 정보를 꼼꼼하게 기록한 그를 한국최초의 영상민속학자라고 칭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은 향후 국립민족박물관의 기초적인 사료를 마련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https://www.cha.go.kr/cop/bbs/selectBoardArticle.do?nttId=5768&bbsId=BBSMSTR_1008&nm=NS_01_10.
  10. https://www.cha.go.kr/cop/bbs/selectBoardArticle.do?nttId=5768&bbsId=BBSMSTR_1008&nm=NS_01_10.
  11. 총독부 고고학 원로 아리미츠 교수는 송석하에 대한 질문의 첫 대답으로 "송석하는 아끼바의 제자였다"라고 회고한 증언도 있다. https://www.cha.go.kr/cop/bbs/selectBoardArticle.do?nttId=5768&bbsId=BBSMSTR_1008&nm=NS_01_10
  12. https://www.cha.go.kr/cop/bbs/selectBoardArticle.do?nttId=5768&bbsId=BBSMSTR_1008&nm=NS_01_10
  13. 그러나 이에 대해 "당시 민속자료 수집과 조사에 일본관공서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을 상황이었으리라 짐작되나 그 활동이 일본에 이득을 준 것은 없으며 이를 친일 매국노라고 한다면 당대 사회 활동을 한 인물은 모두 친일파여야 한다"는 옹호적 의견도 제기된다. https://www.iusm.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369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