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오

North Korea Humanities

정동은(JBNU2024)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6월 12일 (수) 20:40 판 (제목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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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오 (兪鎭午)
유진오.jpg
출처 : 유진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글명 유진오 한자명 兪鎭午 영문명 가나명 이칭 현민(玄民)
성별 남성 생년 1906년 몰년 1987년 출신지 서울 전공 법학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대한민국 해방 이후의 법학자, 소설가, 교육자, 초대 법제처장,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대한민국 제헌 헌법의 초안을 기초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생애


어린시절

1906년 5월 13일 서울특별시 구로구[1]에서 출생했으며 아버지는 궁내부 제도국 참사관 유치형(兪致衡)이다. 본관은 기계(杞溪), 호는 현민(玄民)이다. 서울 재동공립보통학교와 경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24년 경성제국대학기관 예과에 수석으로 입학한 후 경성제국대학 조선학생 모임인 문우회(文友會)를 조직했다. 1926년 4월 동대학 법문학부에 입학한 후 1931년까지 좌익 모임인 경제연구회를 조직해서 활동했다. 1927년경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 1927년 5월 단편소설 「스리」를 『조선지광』에 발표하며 등단했다.


졸업 후

1929년 3월 경성제국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후 1929년 4월부터 1933년 3월까지 동대학 법문학부 조수로 있으면서 예과에 강사로 나갔다. 1929년 조선졸업생 모임인 낙산구락부를 조직하여 『신흥』을 발간했다. 1930년 만주를 여행한 후 「마적」, 「귀향」, 「송군 남매와 나」 등을 발표했다. 1931년 9월 경제연구회 구성원을 중심으로 조선사회사정연구소를 설립했다.
1932년부터 보성전문학교에 법과 강사로 출강하였으며, 이후 국제법과 국제정치에 관한 논문을 여러 편 발표했다. 같은 해 5월을 전후하여 근로대중의 이익을 표방하는 극단 메가폰을 결성했다. 1933년 4월부터 보성전문학교 전임강사가 되었고, 1937년 교수가 되었다. 1933년 10월부터 『동아일보』 객원기자로 활동하면서 「김강사와 T교수」, 「창랑정기(滄浪亭記)」와 같은 단편소설을 발표했고, 1939년 『유진오 단편집』을 간행했다.


친일활동에 가담

1939년 7월 중일전쟁을 선전하는 「신질서 건설과 문학」(『삼천리』1939.7.)을 발표하면서 친일활동에 가담했으며, 10월 조선실업구락부에 입회했다. 같은 달 조선문인협회 발기인 간사로 참여해서, 11월 3일 조선문인협회가 주최한 ‘전선에 위문문, 위문대 보내기 행사’를 주도했다. 1940년 10월 12일 조선문인협회가 주최한 문사부대(文士部隊) 육군지원병훈련소 1일 입소에 참여한 후, 그 소감을 「일사분란의 그 훈련」(『삼천리』1940.12.)으로 실어 지원병훈련소를 선전했다. 같은 해 11월부터 12월까지 조선문인협회가 주최하는 시국강연회 연사로 평안도에 파견되어 ‘신체제와 국어보급’이라는 연제로 순회강연을 했고, 12월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와 선전부 위원에 선임되었다.

1941년 2월 제1회 조선예술상 문학부문 심의위원, 7월 조선문인협회가 주최한 용산 호국신사 어조영지(護國神社御造營地) 근로봉사, 10월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11월 국민총력조선연맹 주최 지원병 독려연설을 하였으며, 12월 경성방송국 제2방송(조선어방송)에서 시국작품을 낭독했다. 1942년 11월 도쿄에서 열린 제1회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참가했으며, 1944년까지 해마다 참석했다.
1943년 2월 국민총력조선연맹 선전부가 주도한 국어문예작품 총독상 전형위원, 4월 조선문인보국회 상무이사로 위촉되었다. 같은 해 8월 1일에는 국민총력조선연맹이 주최한 징병제 실시 감사기념 ‘문예와 미술전’에서 육군특별지원병을 소재로 한 소설을 출품했고, 같은 달 4일에도 징병제 실시 감사 결의 선양 ‘낭독과 연극의 밤’에 참석했다. 1944년 1월 조선문인보국회에서 여는 출진학도 입영 환송에 참여했고, 6월 조선문인보국회 소설부 회장으로 선임되었으며, 8월 동단체가 주최한 문인대강연회에서 ‘우리가 반드시 이긴다’라는 연제로 강연했다.

1945년 1월 대화동맹(大和同盟)의 처우감사총궐기 재성유지회동협회(在城有志會同協會) 운동준비원을 맡았으며, 3월 경성척식경제전문학교(구 보성전문학교)를 그만두고, 6월 조선언론보국회 평의원, 8월 조선문인보국회 평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거대한 융화」(『문학보국』1943.9.10.), 「병역은 곧 힘이다」(『매일신보』1943.11.18.), 「우리가 반드시 이긴다」(『신시대』1944.9.) 등 다수의 글을 통해 징병제와 지원병을 독려하는 글을 발표하고 좌담 · 대담 · 강연 등 다양한 형태로 일제의 식민정책을 옹호하고 침략전쟁을 미화하는 활동을 했다.


해방 이후

해방 직후 1945년 8월 16일 임화의 부탁으로 문인들의 회합에 나갔다가 이태준 등의 항의로 쫓겨난 후 작가의 길을 접고, 교육자 · 법학자 · 정치가의 길로 나섰다. 경성대학 법문학부 교수와 보성전문학교 교수를 겸직하다가 고려대학교에 남아 법정대학장(1946∼1949) · 대학원장(1949∼1952) · 총장(1952∼1965)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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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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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


TripleData

Source (A) Target (B) Relationship
Person: 홍길동 Institution: ○○고등보통학교 A graduates B
Person: 홍길동 Institution: ○○대학교 A worksAt B
Person: 홍길동 Group: ○○학회 A isMemberOf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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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원







주석


  1. 대한제국 한성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