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장환

North Korea Humanities

이용재(CNU2024)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6월 2일 (일) 15:23 판 (방랑 그리고 귀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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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장환(吳章煥)
오장환.jpg.png
출처 : http://nks.ac.kr/Word/View.aspx?id=955
 
한글명 오장환 한자명 吳章煥 영문명 Oh Jang-hwan 가나명 이칭
성별 남성 생년 1918년 몰년 1951년 출신지 충청북도 보은군 전공 문예학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모더니즘, 서정성, 계급의식 등을 작품에 담았던 한국의 시인으로 서정주, 이용악과 함께 1930년대 시단의 3대 천재, 또는 삼재(三才)로 불렸다. 일제강점기 때 『성벽』, 『헌사』, 『나 사는 곳』 등을 저술 하였으며, 해방 이후 급격한 변화를 보이면서 현실 참여적인 시들을 창작하던 중 월북했다.


생애


어린시절

1918년 5월 5일 충청북도 보은군 회인면 중앙리에서 아버지 오학근(吳學根)인물과 어머니 한학수(韓學洙)인물사이의 4남 4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나이에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 하였고, 7살이 되던 1924년, 오장환은 회인공립보통학교기관를 다녔으며 1927년 경기도 안성군 읍내면 서리로 이주하면서 안성공립보통학교기관로 전학하였다. 1930년에 졸업한 그는 이어서 중동학교 속성과에 입학하여 수료한 뒤 14살이 되던 1931년 4월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는데, 1933년 학교문예지 『휘문』 임시호에 시와 소설을 발표하면서 <목욕간>을 발표하며 문단에 등단하였다.


일본으로 유학

1935년 그는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자퇴하고, 일본으로 유학하여 치야마중학교에 전학한 후 1936년 수료하였다. 본격적으로 《낭만》과 《시인부락》 동인으로 참여하였고, 여러 동인들과 교류하며 동인지 제작을 주도 하면서 시작 활동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1937년에는 메이지대학교기관전문부 문예과 별과에 입학했으나 이듬해인 1938년 아버지가 별세하자 급하게 메이지대학을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방랑 그리고 귀국

귀국 후에는 아버지의 유산으로 경기도 경성부 관훈정에 남만서방기관이라는 출판사 겸 서점을 개업하고 여러 문인들과 교류하기 시작했다. 1940년 중국 일대를 방랑하다가 경성부로 돌아와 돈암정으로 이주하여 살기도 했으며, 그해 다시 도쿄로 돌아가 1941년까지 사자업에 종사하며 가난한 생활을 지냈고 평소 술을 좋아하던 성품 탓에 신장이 늘 좋지 않았으며, 그 와중에 황달, 두통, 늑막염, 신장병 등의 질병을 얻게 되었다. 그 뒤 투병생활 끝에 병상에서 8.15 광복사건을 맞았고, 곧 귀국하였다.


광복 이후의 활동

귀국 후에는 1945년 10월 22일 인천에서 신예술가협회단체를 조직하였고, 1946년 임화, 김남천과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하여 활동하던 중 1946년 5월 동향사에서 번역시집인 《예세닌 시집》을, 같은 해 7월 정음사에서 세 번째 시집인 《병든 서울》을 발간하였다. 1946년 12월 19일 장정인(張正仁)인물과 결혼 하였으며 1947년 1월 아문각에서 6편의 시를 추가한 《성벽》의 개정 증보판을, 같은 해 6월 헌문사에서 네 번째 시집 《나 사는 곳》을 출간하였다. 이후 그는 좌익 계통에서 사회 참여적인 활동을 지속하였다. 1947년 10월에서 1948년 2월 월북하여 남포병원에 입원했으며, 치료를 위해 소련 모스크바로 가서 볼킨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1949년 귀국한 그는 계속 투병생활을 이어나가다가 1951년 한국 전쟁 발발 이후 잠시 서울로 와 이전에 만났던 문인들과 교류 하였으며, 지병인 신장 결핵으로 끝내 별세하였다.





연구


변절하지 않은 시인

일제강점기 동안 많은 시인들이 절필하거나 친일 활동에 가담했다. 대표적으로 서정주, 이은상, 노천명 등 다수의 시인이 친일 행위를 했으나, 오장환은 이들과는 달리 절필하지도, 친일적인 작품활동을 하지도 않았다. 특히 오장환과 서정주는 시를 주고받으며 깊은 우정을 나누었고, 오장환은 자신의 서점에서 자신의 시집을 수수하게 만들면서도 서정주의 첫 시집을 호화판으로 출간할 정도로 절친한 사이였다. 그러나 서정주가 친일 행위로 변절한 이후, 오장환은 그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평생 다시 만나지 않았다. 이 일화를 통해 오장환의 신념과 일관성을 엿볼 수 있다. 1945년 광복을 맞은 지 한 달 정도 된 시점에서 지은 그의 대표적인 시 '병든 서울'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는데 이 작품은 해방의 기쁨과 혼란 속에서 느끼는 분노와 좌절,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지 즉, 일제로부터 해방된 감정을 서술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해방을 병실에서 맞이하고 울었는데 이때 그의 울음은 병실에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해서 터트린 개인적인 울음이다. 그리고 그 울음은 다음날 해방된 서울 거리를 돌아보면서 울분과 한탄으로 바뀐다. 그것은 자신이 기대하였던 “싱싱한 사람, 굳건한 청년, 씩씩한 웃음”이나 “인민의 힘으로 되는 새 나라”의 비전 대신 장사치와 기회주의적인 정치꾼들만 거리를 활보하고 다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의 제목 ‘병든 서울’은 바로 이런 부정적인 현실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적 화자는 “큰물이 지나간 서울”의 “맑게 개인 하늘”을 기대하며 미래 지향적인 자세로 이 시련을 극복해나갈 것을 다짐하고 있다.[1]






데이터


TripleData

Source (A) Target (B) Relationship
Person: 홍길동 Institution: ○○고등보통학교 A graduates B
Person: 홍길동 Institution: ○○대학교 A worksAt B
Person: 홍길동 Group: ○○학회 A isMemberOf B



Time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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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원







주석


  1. 출처: 『병든서울』 네이버 지식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821727&cid=46645&categoryId=466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