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빅씨에 답함 -附(부) 슬라빅씨 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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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한나 (토론 | 기여)님의 2023년 12월 1일 (금) 15:36 판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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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빅씨에 답함 -附(부) 슬라빅씨 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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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원제목 슬라빅氏에 答함 -附 슬라빅氏 論考-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진단학보2 발행기관 진단학회
저자 이병도 역자 집필일자 게재연월 1935년04월
시작쪽 150쪽 종료쪽 163쪽 전체쪽 013쪽 연재여부 범주 논문 분야 역사학



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이병도의 「슬라빅씨에 답함 - 附(부) 슬라빅씨 논고-」는 『진단학보』 1권(1934.11.)에 실린 글이다. 이 글은 오스트리아의 동양사학자 알렉산데르 슬라비크(Alexander Slawik)의 논평에 대한 답변이다. 도유호를 통해 손진태의 「패수고」(『청구학총』 13호)를 읽는 슬라비크는 자료해독, 위치비정, 고어발음 등의 쟁점을 중심으로 이병도의 글을 비판하는 글을 보냈으며, 이병도가 이에 대한 반론을 제시한 것이다. 정학모는 「『진단학보』를 읽고」(『동아일보』, 1935.5.8.~14.)에서 이 글을 조선의 학술이 서양에 알려지고 있다는 반가운 사례로 들었다.




본문


슬라빅인물(Alexander Slawik)씨는, 이미 한번 동아일보지 상에도 소개된 일이 있거니와, 현 오지리국(墺地利國)공간의 일(一) 청년사가(靑年史家)로서 동양학 특히 조선사학을 전공하고 있는 귀이(貴異)한 학자이다. 재((在)오지리국(墺地利國)공간 유학 중의 동포 도유호인물씨의 말을 들으면 슬라빅인물씨는 방금 조선 고대의 민족 이동에 관하여 긴 논문(학위논문)을 쓰고 있는데, 씨의 학식과 조선사에 대한 조예가 상당히 깊어, 그 논문에서 기대되는 바가 적지 않다고 한다. 씨는 한문과 일문을 능독할 뿐만 아니라, 선숙히 이를 쓰고 짓고 하며, 또 조선어에 관하여도 매우 유의하고 있다는 독공(篤工)의 사(士)이다.
쪽수▶P150-1슬라빅(Alexander Slawik)氏는, 이미 한번 東亞日報紙上에도 紹介된 일이 있거니와, 現 墺地利國의 一 靑年史家로서 東洋學 특히 朝鮮史學을 專攻하고 있는 貴異한 學者이다. 在墺國留學 중의 同胞 都宥浩氏의 말을 들으면 슬라빅氏는 方今 朝鮮古代의 民族移動에 관하여 긴 論文(學位論文)을 쓰고 있는데, 氏의 學識과 朝鮮史에 대한 造詣가 相當히 깊어, 그 論文에서 期待되는 바가 적지 않다고 한다. 氏는 漢文과 日文을 能讀할 뿐만 아니라, 善熟히 이를 쓰고 짓고 하며, 또 朝鮮語에 관하여도 매우 留意하고 있다는 篤工의 士이다.
필자가 앞서 청구학총학술지 13호권호「패수고(浿水考)」원고란 일(一) 소편(小篇)을 발표하였는데, 그것이 전기(前記) 도유호인물씨에게 일부 건너가게 되매, 굴러서 슬라빅인물씨에게까지 접목(接目) 일독되었던 모양이다. 씨는 졸고(拙稿)에 대하여 (대체(大體)는 찬동이지만) 약간 의아의 처(處), 이의의 부분이 있다고 하여, 일(一) 논고(부후(附後))를 일한문(日漢文)으로 초(草)하여, 도씨를 통하여 나에게 보냈다. 내가 이를 접수한 때는 객납(客臘) 염일(念日)경이었다. 해외 누만리(累萬里) 이역(異域)에서, 더구나 씨와 같은 독공(篤工) 동공(同攻)의 선(士)로부터, 이러한 귀중한 교평(敎評)을 몽혜(蒙惠)함에 대하여, 나는 크게 광영(光榮)으로 생각하는 동시에 또한 깊이 씨에게 감사하여 마지않는 바이다. 씨의 글월은 물론 씨의 자필에 계(係)한 것으로, 누구든지 보면 그 자획의 무르녹음이 서양인의 필(筆)이라고는 곧이 듣지 아니할 만큼 되었다. 오국(墺國) 인사 중에도 이렇게 조선사를 진지하게 연구하는 이가 있나 하는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우리는 먼 이역(異域)에 한 훌륭한 벗을 얻음을 기뻐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씨의 호의에 갑(보(報))기 위하여, 또 씨의 이견에 불복하는 점도 있어, 이에 졸문(拙文)을 초(草)하여 씨의 재교(再敎)를 앙(仰)하는 바이다.
쪽수▶P150-2筆者가 앞서 󰡔靑丘學叢󰡕 第13號에 「浿水考」란 一小篇을 發表하였는데, 그것이 前記 都宥浩氏에게 一部 건너가게 되매, (굴러서) 슬라빅氏에게까지 接目 一讀되었던 모양이다. 氏는 拙稿에 대하여 (大體는 贊同이지만) 若干 疑訝의 處, 異議의 部分이 있다고 하여, 一論考(附後)를 日漢文으로 草하여, 都氏를 통하여 나에게 보냈다. 내가 이를 接受한 때는 客臘 念日頃이었다. 海外 累萬里 異域에서, 더구나 氏와 같은 ▶P151-1篤工 同攻의 士로부터, 이러한 貴重한 敎評을 蒙惠함에 대하여, 나는 크게 光榮으로 생각하는 同時에 또한 깊이 氏에게 感謝하여 마지않는 바이다. 氏의 글월은 물론 氏의 自筆에 係한 것으로, 누구든지 보면 그 字劃의 무르녹음이 西洋人의 筆이라고는 곧이듣지 아니 할 만큼 되었다. 墺國人士 중에도 이렇게 朝鮮史를 眞摯하게 硏究하는이가 있나 하는 感嘆을 禁치 못하였다. 우리는 먼 異域에 한 훌륭한 벗을 얻음을 기뻐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氏의 好意에 갑(報)기 爲하여, 또 氏의 異見에 不服하는 點도 있어, 이에 拙文을 草하여 氏의 再敎를 仰하는 바이다.
슬라빅인물씨의 여(余)에게 치(致)한 서(書)의 제목은 즉 「이병도(李丙燾) 저 **패수고(浿水考)**를 읽고」」원고란 것이다. 이 서제(書題)만으로는 「패수고(浿水考)」원고 전체에 관한 평론같이 보일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씨의 논고를 통독하여 보면, 패수(浿水) 그것에 관하여는 하등의 평설과 이론을 보임이 없고, 또 도유호인물씨의 서신에 의하여도 씨의 말이 패수(浿水)에 관한 의견을 들어 보던 중 가장 만족한 해답을 나의 논문에서 처음 보았노라고-이는 물론 과찬이지만-하였다 함으로, 나의 「패수설(浿水說)」학설 의 주 요점에 대하여는 대체로 찬동의 뜻을 가져 이의가 없는 것 같고, 다만 졸고(拙稿) 중의 부분론(部分論) 지엽론(枝葉論)이라고 할 만한 **한서(漢書)서적 지리지(地理志) 현토군(玄菟郡) 서개마현조(西蓋馬縣條)의
쪽수▶P151-2슬라빅氏의 余에게 致한 書의 題目은 즉 「李丙燾 著 󰡔浿水考󰡕를 읽고」란 것이다. 이 書題만으로는 「浿水考」 全體에 관한 評論같이 보일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氏의 論考를 通讀하여 보면, 浿水 그것에 관하여는 何等의 評說과 異論을 보임이 없고, 또 都宥浩氏의 書信에 의하여도 氏의 말이 浿水에 관한 意見을 들어 보던 중 가장 滿足한 解答을 나의 論文에서 처음 보았노라고-이는 물론 過讚이지만-하였다 함으로, 나의 浿水說의 主要點에 대하여는 대체로 贊同의 뜻을 가져 異議가 없는 것 같고, 다만 拙稿 중의 部分論 枝葉論이라고 할 만한 󰡔漢書󰡕地理志 玄菟郡 西蓋馬縣條의
西蓋馬(馬訾水西北入鹽難水西南至西安平入海)
쪽수▶P151-3西蓋馬(馬訾水西北入鹽難水西南至西安平入海)
운운(云云)의 주구(註句)에 관한 해석과, 여기 보이는 마자수(馬訾水) 급(及) 서개마현(西蓋馬縣)의 위치에 취(就)하여 씨는 나와 견해를 달리한다는 것이며, 그리고 또 여기의 염난수(鹽難水)(즉 압록강의 염난(鹽難)과 소위 동명전설(東明傳說) 중에 나타나는 ‘대수(大水)’의 엄표(掩淲) 엄ima엄시(淹ima掩施) 엄체(掩滯) 엄리(奄利) 등 종종의 칭호가 고음(古音) 상 결국 동일하다는 것, 저‘읍루(挹婁)’의 고음(古音)도 이들과 유사하다는 것, 현토군(玄菟郡) 상은태현(上殷台縣)의 ‘은태(殷台)’의 고음(古音)도 또한 이들과 유사한 즉 상은태현(上殷台縣)의 위치는 염난수(鹽難水)의 중류 혹 상류에 있었다고 생각된다는 것이, 그의 부론(副論)이다.학설. (그러나 씨의 이들 신설(新說)이 어떠할지?)
쪽수▶P151-4云云의 註句에 관한 解釋과, 여기 보이는 馬訾水 及 西蓋馬縣의 位置에 就하여 氏는 나와 見解를 달리한다는 것이며, 그리고 또 여기의 鹽難水(즉 鴨綠江)의 鹽難과 소위 東明傳說 중에 나타나는 ‘大水’의 掩淲 淹 掩施 掩滯 奄利等 種種의 稱號가 古音上 結局 同一하다는 것, 저 ‘挹婁’의 古音도 이들과 類似하다는 것, 玄菟郡 上殷台縣의 ‘殷台’의 古音도 또한 이들과 類似한 즉 上殷台縣의 位置는 鹽難水의 中流 혹 上流에 있었다고 생각된다는 것이, 그의 副論이다. (그러나 氏의 이들 新說이 어떠할지?)
상기 **한서(漢書)서적** 문구에 대하여는, 나는 「패수고(浿水考)」원고보다 그 전에 사학잡지학술지** 제41편 제4호권호에 발표한 「현토군급임둔군고(玄菟郡及臨屯郡考)」」원고 중에 더 자세한 해석을 시(示)하였거니와, 우선 문제 중에 있는 「패수고(浿水考)」원고 중의 것을 원문대로 다시 들어 보이면
쪽수▶P151-5上記 󰡔漢志󰡕 文句에 대하여는, 나는 「浿水考」보다 그 前 ▶P152-1 에 󰡔史學雜誌󰡕(第41編 第4號)에 發表한 「玄菟郡及臨屯郡考」 중에 더 仔細한 解釋을 示하였거니와, 우선 問題 중에 있는 「浿水考」 중의 것을 原文대로 다시 들어 보이면
西蓋馬縣(佟佳江畔なる富爾江口と擬定す)下を流れる馬訾水を, 今の佟佳江と看做し, その川が縣治のあるとこるから, 一寸西北に屈折し, 更に(西南流して)鹽難水に入り又更に西南に流れて西安平に至りて海に入ると讀解した.......馬訾水が支流で鹽難水が本流であることは, 右に ‘馬訾水......入鹽難水云云’とあるので明かである.
쪽수▶P152-2西蓋馬縣(佟佳江畔なる富爾江口と擬定す)下を流れる馬訾水を, 今の佟佳江と看做し, その川が縣治のあるとこるから, 一寸西北に屈折し, 更に(西南流して)鹽難水に入り又更に西南に流れて西安平に至りて海に入ると讀解した.……馬訾水が支流で鹽難水が本流であることは, 右に ‘馬訾水……入鹽難水云云’とあるので明かである.
라고 하였다. 즉 마자수(馬訾水)는 금(今) 동가강(佟佳江)공간(일명 혼강(渾江)), 염난수(鹽難水)는 압록강공간 마자수(馬訾水)공간 유역의 서개마현치(西蓋馬縣治)는 금(今) 동가강(佟佳江)공간 반(畔)인 부이강구(富爾江口) 부근이리라고 함이, 졸고(拙稿) 「현토군고」원고 이래의 나의 정설이다. 여기 대한 슬라빅인물씨의 논평의 제1矢(실)은-단(但) 「염난즉압록설(鹽難卽鴨綠說)」학설에 있어서는 씨도 나와 동견(同見)이지만-상(上) 한서(漢書)서적 지리지(地理志)의 ‘서북’을 내가 ‘西北ヨリ’라고 독(讀)하였다는 것이다. 즉 그 ‘서북’은 ‘西北ニ流レテ’라고 읽을 것을 이병도인물는 ‘西北ヨリ’라고 오독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야말로 씨의 부당한 착오라고 하지 아니하면 아니 되겠다. 나는 어디에서나 (한번도) 그렇게 해독한 적은 없었다. 위에 보인 나의 해독, 한번 더 주의하여주기를 씨에게 바라는 바이어니와, 나는 마자수(馬訾水)공간가 (서개마현치(西蓋馬縣治)에서) 서북으로 조금 굴절한 후 염난수(鹽難水)에 들어간다고 해(解)하였으므로, 이는 즉 ‘서북류(西北流)하다가’ 혹은 ‘西北流してから’와 마찬가지의 말이라고 할지언정, 바로 ‘서북으로부터’(西北ヨリ)라고 독(讀)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나는 도리어 그렇게 읽는 것을 반대하는 파다. 그 ‘서북’을 ‘西北ヨリ’라고 독해한 것은 동경(東京)의 백조인물 박사의 설이요 나의 설은 아니다. 졸고(拙稿) 「현토군고」원고중에도 나는 백조인물씨의 독해에 반하여 분명히 ‘西北流してから’라고 석독하였던 터이다. 그러므로 슬라빅인물氏의 위의 책망은 씨의 무슨 기억의 착오로 인함인 듯하며, 혹 백조인물씨의 해독과 나의 그것을 서로 혼동하여 구별이 없는 양으로 보았던 것은 아닌가. 어떻든 씨의 무슨 착오임에는 틀림이 없으므로, 이에 대하여(구태여) 더 추구(追究)하려고 하지 아니한다. 그리고 보면, 씨가 지리지서적의 문구를 “馬訾水ハ西北ニ流レテ云云”이라고 독(讀)함과, 내가 그것을 “馬訾水は西北流してから”또는 “馬訾水は (縣治のあるところから) 西北に屈折し云云”이라고 해(解)함이, 독방(讀方)에 있어서는 그다지 큰 차이가 없을 것 같이 보일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씨는 그 ‘서북’을 마자수(馬訾水)공간 전체의 유향(流向)-다시 말하면 마자수(馬訾水)가 염난수(鹽難水)(압록강공간)에 합하기까지 줄곳 서북으로 흐른다고 보았고, 나는 단지 서개마현치(西蓋馬縣治)에서 마자수(馬訾水)가 조금 서북으로 흐르다가 (다시 서남류(西南流)하야) 염난수(鹽難水)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하였으므로, 해석에 있어서는 주관이 각각 다르다.
쪽수▶P152-3라고 하였다. 즉 馬訾水는 今 佟佳江(一名 渾江), 鹽難水는 鴨綠江 馬訾水流域의 西蓋馬縣治는 今佟佳江畔인 富爾江口 附近이리라고 함이, 拙稿 「玄菟郡考」 以來의 나의 定說이다. 여기 대한 슬라빅氏의 論評의 第一矢는-但 鹽難卽鴨綠說에 있어서는 氏도 나와 同見이지만-上 漢志의 ‘西北’을 내가 ‘西北ヨリ’라고 讀하였다는 것이다. 즉 그 ‘西北’은 ‘西北ニ流レテ’라고 읽을 것을 李丙燾는 ‘西北ヨリ’라고 誤讀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야말로 氏의 不當한 錯誤라고 하지 아니하면 아니 되겠다. 나는 어디에서나 (한번도) 그렇게 解讀한 적은 없었다. 위에 보인 나의 解讀, 한번 더 注意하여주기를 氏에게 바라는 바이어니와, 나는 馬訾水가(西蓋馬縣治에서) 西北으로 조금 屈折한 후 鹽難水에 들어간다고 解하였으므로, 이는 즉 ‘西北流하다가’ 혹은 ‘西北流してから’와 마찬가지의 말이라고 할지언정, 바로 ‘西北으로부터’(西北ヨリ)라고 讀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나는 도리어 그렇게 읽는 것을 反對하는 派다. 그 ‘西北’을 ‘西北ヨリ’라고 讀解한 것은 東京의 白鳥博士의 說이요 나의 說은 아니다. 拙稿 「玄菟郡考」중에도 나는 白鳥氏의 讀解에 反하여 分明히 ‘西北流してから’라고 釋讀하였던 터이다. 그러므로 슬라빅氏의 위의 責望은 氏의 ▶P153-1무슨 記憶의 錯誤로 인함인 듯하며, 혹 白鳥氏의 解讀과 나의 그것을 서로 混同하여 區別이 없는 양으로 보았던 것은 아닌가. 어떻든 氏의 무슨 錯誤임에는 틀림이 없으므로, 이에 대하여(구태여) 더 追究하려고 하지 아니한다. 그리고 보면, 氏가 地理志의 文句를 “馬訾水ハ西北ニ流レテ云云”이라고 讀함과, 내가 그것을 “馬訾水は西北流してから” 또는 “馬訾水は (縣治のあるところから) 西北に屈折し云云”이라고 解함이, 讀方에 있어서는 그다지 큰 差異가 없을 것 같이 보일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氏는 그 ‘西北’을 馬訾水 全體의 流向-다시 말하면 馬訾水가 鹽難水(鴨綠江)에 合하기까지 줄곳 西北으로 흐른다고 보았고, 나는 단지 西蓋馬縣治에서 馬訾水가 조금 西北으로 흐르다가 (다시 西南流하야) 鹽難水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하였으므로, 解釋에 있어서는 主觀이 各各 다르다.
슬라빅인물씨는 지리지서적의 문(文)을 위와 같이 해독한 결과로,마자수(馬訾水)공간의 위치는 실지에 있어 염난수(鹽難水)의 우(북)지류(右(北)支流)가 될 수 없고, 반드시 그의 좌(남)지류(左(南)支流)로서, 금(今) 압록강공간의 남지류(南支流)의 일(一)인 충만강(忠滿江)공간 혹은 그보다 일층(一層) 큰동래강(東來江)공간에 당(當)할 것이라 하고, 동시에 서개마현(西蓋馬縣)(현토군(玄菟郡)의 일속현(一屬縣))도 압록강공간과 낭림산맥(狼林山脈)과의 중간지역(中間地域)에 구하지 아니하면 아니 되겠다고 주장하였다. 갱(更)히 씨는 위 주장을 지지하기 위하여 위지서적 동이전(東夷傳) 동옥저조(東沃沮條)에 “東沃沮, 在高勾麗蓋馬大山之東 濱大海”라 한 개마대산(蓋馬大山)과 고려사서적 윤관전에 보이는 임언인물의 영주청벽기(英州廳壁記) 중에 “西北介于蓋馬山”이라 한 ‘개마산(蓋馬山)’은, 다 지금의 함경남도공간평안북도공간 사이에 개재(介在)한 낭림산맥(狼林山脈)공간의 일부인즉-동개마(東蓋馬)란 명칭은 사상(史上)에 나오지 아니하나 서개마(西蓋馬)의 칭(稱)이 있으므로 보아 이것도 있을 수 있은즉-이 산맥의 동쪽인 동옥저(東沃沮) 즉 금(今)의 함경남도공간 지방은 동개마(東蓋馬), 그 서쪽인 평안북도공간의 북부는 서개마(西蓋馬)의 지(地)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로써 씨의 마자수(馬訾水)공간 급(及) 서개마현(西蓋馬縣)의 재남설(在南說)을 일층 유력하게 하려고 하였다.
쪽수▶P153-2슬라빅氏는 地理志의 文을 위와 같이 解讀한 結果로, 馬訾水의 位置는 實地에 있어 鹽難水의 右(北)支流가 될 수 없고, 반드시 그의 左(南)支流로서, 今 鴨綠江의 南支流의 一인 忠滿江 혹은 그보다 一層 큰 東來江에 當할 것이라 하고, 同時에 西蓋馬縣(玄菟郡의 一屬縣)도 鴨綠江과 狼林山脈과의 中間地域에 求하지 아니하면 아니 되겠다고 主張하였다. 更히 氏는 위 主張을 支持하기 위하여 󰡔魏志󰡕 東夷傳 東沃沮條에 “東沃沮, 在高勾麗蓋馬大山之東 濱大海”라 한 蓋馬大山과 󰡔高麗史󰡕 尹瓘傳에 보이는 林彦의 英州廳壁記中에 “西北介于蓋馬山”이라 한 ‘蓋馬山’은, 다 지금의 咸鏡南道와 平安北道 사이에 介在한 狼林山脈의 一部인즉-東蓋馬란 名稱은 史上에 나오지 아니하나 西蓋馬의 稱이 있으므로 보아 이것도 있을 수 있은즉-이 山脈의 東쪽인 東沃沮 卽 今의 咸南地方은 東蓋馬, 그 西쪽인 平安北道의 北部는 西蓋馬의 地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로써 氏의 馬訾水及 西蓋馬縣의 在南說을 一層 有力하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씨의 위 주장에 대하여, 나는 여러 가지 쫓기 어려운 이유가 있음을 유감으로 여긴다. 첫째, 현토군(玄菟郡)의 영역 문제니, 만일 씨의 설대로 서개마현(西蓋馬縣) 및 그 마자수(馬訾水)를 압록강공간 남편(南便)에 구한다고 하면, 당시(전한말기(前漢末期)) 현토군(玄菟郡)의 영역도 압록강공간 이남에까지 미쳤다고 보아야 하겠다. 나의 고구(考究)한 바에 의하면(「현토군고(玄菟郡考)」에 의하면), 현토군(玄菟郡)은 한(漢) 소제(昭帝) 원봉(元鳳) 6년경(B.C. 75) 고구려(高句麗) 본토인의 침항(侵抗)에 의하여 압록강(鴨綠江) 유역에서 그 서북쪽으로 옮기어, 요산(遼山) (금(今) 흥경노성(興京老城) 부근) 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그 부근의 이삼현(二三縣)을 관할하게 되었던 터임으로, 이군(移郡) 이후의 현토(玄菟)의 영역이 이와 같이 광대하였다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아니한다. 더구나 현토(玄菟) 이군(移郡) 후 얼마 뒤 그 고지(故地)인 압록(鴨綠) 본유역(本流域)에서 (주몽(朱蒙))고구려국(高句麗國)의 흥기, 발전의 사실이 있음에 있어서랴. 단 주의할 것은 **한지(漢志)** 현토군(玄菟郡) 속현(屬縣) 중의 고구려현(高句驪縣)과 여기 이른바 고구려국(高句麗國)과의 구별이니, 전자는 현토(玄菟) 이군(移郡)(B.C. 75) 후의 모명(冒名)의 군치(郡治)로 그 위치가 금(今) 흥경노성(興京老城) 부근에 당(當)하며 후자는 이군(移郡) 후 약 반세기 미만에 고구려(高句麗) 본토인의 조직한 나라로서 금(今) 강계(江界) 월변(越便)인 동구(洞溝) 부근이 그 중심지였다. 한서서적 지리지(地理志)의 기사는 대개 전한(前漢) 말기의 조사에 기인한 것이므로 고구려국 흥기 이후의 상태인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이와 같이 당시 압록강(鴨綠江) 중류역(中流域)에 군현 외의 고구려국이 존재하였다면, 현토(玄菟) 속현(屬縣)의 일(一)인 서개마현(西蓋馬縣)의 위치와 및 그 현내(縣內)를 관류하는 마자수(馬訾水)의 위치를 압록강(鴨綠江)(중류) 남변에 구하는 것이 무리가 아닐까. 이것이 씨의 설에 좇기 어려운 둘째의 이유이다. 또 지리지서적에 의하면, 서개마현(西蓋馬縣)은 왕망(王莽) 시대에 현토정(玄菟亭)이라고 개칭한 일이 있었으니, 이는 마치 낙랑군(樂浪郡) (왕망(王莽) 시에 낙선군(樂鮮郡)이라 개(改)함)의 패수현(浿水縣)을, 역시 왕망(王莽) 시에 낙선정(樂鮮亭)이라고 고친 것과 일반(一般)인데, 패수현(浿水縣)(낙선정(樂鮮亭))이 요동군(遼東郡)과의 경계처에 있는 낙랑(樂浪)(낙선(樂鮮))의 일(一) 중요지이었던 것을 미루어 보면, 서개마현(西蓋馬縣)도 군외의 고구려(高句麗)와 접경한 곳에 있던 현토(玄菟)의 요로(要路)이기 때문에, 현토정(玄菟亭)이라고 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서개마현(西蓋馬縣)이 고구려의 중심지를 월(越)한 남변에 있었다고 할 수 없을 것은 재언(再言)을 불요한다. 단 ‘서개마(西蓋馬)’란 지명은, ‘서쪽의 개마(蓋馬)’를 의미한 것으로 거기에 대하여 ‘동개마(東蓋馬)’의 지(地)가 있었으리라 함은, 나도 이미 ‘현토군고(玄菟郡考)’중에 말한 바이지만, 근래 나의 수정된 설로 보면, 서개마(西蓋馬)나 동개마(東蓋馬)는 실상 그 중간에 본개마(本蓋馬)가 있어 그곳을 표준으로 하여, 그 서쪽의 것은 서개마(西蓋馬), 그 동쪽의 것은 동개마(東蓋馬)라고 하였던 것 같으니, 본개마(本蓋馬)의 지(地)는 어디냐 하면, 나는 맥족(貊族)의 근거지인 압록강(鴨綠江) 유역의 고구려(高句麗) (Proper) 지방이라고 한다. ‘맥(貊)’ 급(及) ‘고려(高麗)’(구려(句麗))를, 일본서는 고래(古來)로 ‘コマ’라고 훈독하여 왔거니와, 이 ‘コマ’야말로 개마(蓋馬)(Khai-ma, koi ba)의 대음(對音)에 틀림없을 것이며, 지나(支那)에서 소위 ‘맥(貊)’이니 하는 것도 실상 이 개마(蓋馬)에 대한 오랜 사음(寫音)의 약칭(畧稱)이 아닌가 한다. 이것이 용인된다 하면, 개마(蓋馬)는 곧 맥(貊)이요 고구려(高句麗)임을 더욱 확증할 수 있다. 이렇게 본개마(本蓋馬)를 압록강(鴨綠江) 중류의 고구려(高句麗)(Proper)지방이라고 하면, 그 서쪽인 동가강(佟佳江) 유역에 거(據)한 맥족(貊族)을 서개마(西蓋馬), 그 동남쪽인 동옥저 동예 등을 동개마(東蓋馬)라고 보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지 아니한가. 고구려에서 졸본부여(고구려 수도)를 중심으로 하여, 그 북의 것을 북부여(원 부여), 그 동의 것(옥저(沃沮), 동예(東濊))을 동부여(東夫餘)라고 함과, 부여의 일족인 백제(百濟) 왕실이 남으로 금(今) 부여(扶餘) 지방에 천도하였을 때 일시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라고 하였던 것을 참고하여 보면, 더욱 사과반(思過半)함이 있다. 부여는 역시 고구려(高句麗)와 같이 예맥족(濊貊族)에 속함으로, 북부여(北夫餘)는 즉 북개마(北蓋馬), 동부여(東夫餘)는 즉 동개마(東蓋馬), 남부여(南扶餘)는 즉 남개마(南蓋馬)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북개마(北蓋馬)니 동개마(東蓋馬)니 남개마(南蓋馬)니 하는 명칭은 사상(史上)에 나타나는 것이 하나도 없으므로, 실제에 꼭 그런 칭호가 있었다고는 물론 단언할 수 없고, 이론상 그와 같이 명명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개마(蓋馬)란 말은, 「현토군고」원고 중에도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원래 예맥족(濊貊族)의 어(語)로, 저 동명전설(東明傳說) 중의 해모수(解慕漱)와 고구려(高句麗) 지명 중의 개마(蓋馬)(대산), 개모(蓋牟)(성), 곤미(昆彌)(川(천)), 고목(高木)(성(城)), 공목(功木)(달(達)), 개백(皆伯)(현(縣)), 고구려(高句麗) 유장(遺將)의 겸모(鉗牟)(잠(岑)), 혹은 검모(釰牟)(잠(岑)), 마한(馬韓) 지명 중의 건마(乾馬)(국(國)), 웅천(熊川)(고마내), 고구려(高句麗) 호태왕(好太王) 비문에 나타나는 백제(百濟) 성명 중의 구모(句牟)(성(城)), 고모(古模)(야라성(耶羅城))와, 백제(百濟)의 웅진성(熊津城)(고마나루)인 고발(固拔)(성(城)) 고마(固麻)(성(城)), 구마(久麻)(노리성(怒利城)), 및 기타 백제(百濟) 지명 중의 고마(古馬)(미지현(彌知縣)) 고미(古彌)(현(縣)) 고마(古麻)(산(山)) 금마(金馬)(저군(渚郡)) 등의 어(語)와 공통한 의미의 어(語)일지며, 그 어의(語議)에 대하여는 신중히 고려하고 있는 중이나, 나의 지금까지의 천착으로는, 그것은 ‘상(上)’ ‘신(神)’ ‘신성(神聖)’을 의미하는 조선어의 감(Kam), 검(Kom), 금(Keum), 일본어의 カミ(Kami), カム(Kamu)에 해당한 것 같고, 어떠튼 예맥족(濊貊族)은 개마(蓋馬) 혹은 그와 유사한 발음의 어(語)로서 인명, 성읍, 명산, 대천의 명(名)을 삼기를 좋아한 것 같다. 즉 예맥족(濊貊族)은 그들 자신을 개마(蓋馬)(천강족(天降族) 혹은 신성족(神聖族)?)라고 할 뿐 아니라, 그 주지(住地) 인명 및 신성시하는 산천에까지 그렇게 부르기를 예사로 하였던 모양이다. 마치 고대 희랍인(希臘人)이 저들 자신을 Hellenes라 하고 그 거주하는 토지를 Hellas라고 함과 유사하다. 개마(蓋馬)에 관하여는 더 깊이 연구하려 하거니와, 여하간 맥족(貊族)의 원 주지(住地)는 압록(鴨綠) 동가(佟佳)의 양 유역의 지(地)로 압록강(鴨綠江) 유역에 거(據)한 자가 본개마(本蓋馬), 동가강(佟佳江) 유역에 거(據)한 자가 서개마(西蓋馬)이었던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자신한다. 위지서적 동이전 고구려조에 “又有小水貊, 句麗作國, 依大水而居, 西安平縣北, 有小水南流入海, 句麗別種, 依小水作國, 因名之爲小水貊云云”이라 한 대수(大水)는 즉 압록강(鴨綠江), 소수(小水)는 금(今) 동가강(佟佳江)의 위(謂)로, 대수(大水)에 거(居)한 대수맥(大水貊)과 소수(小水)에 거(居)한 소수맥(小水貊)은, 역시 본개마(本蓋馬) 서개마(西蓋馬)의 이개마(二蓋馬)를 지칭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하면, 서개마(西蓋馬)에 치(置)한 서개마현(西蓋馬縣)의 위치를 구태여 압록강(鴨綠江) 본류역(本流域)의 개마대산(蓋馬大山) 부근에 접이(接邇)시키려고 할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닌가. 이것이 씨의 설에 좇기 어려운 또 한 가지 이유이다.
쪽수▶P154그러나 氏의 위 主張에 대하여, 나는 여러 가지 쫓기 어려운 理由가 있음을 遺感으로 여긴다. 첫째, 玄菟郡의 領域問題니, 만일 氏의 설대로 西蓋馬縣 및 그馬訾水를 鴨綠江 南便에 구한다고 하면, 當時(前漢末期)玄菟郡의 領域도 鴨綠江以南에까지 미쳤다고 보아야 하겠다. 나의 考究한 바에 의하면(「玄菟郡考」에 의하면), 玄菟郡은 漢昭帝 元鳳 6년경(B.C. 75) 高句麗 本土人의 侵抗에 의하여 鴨綠江流域에서 그 西北쪽으로 옮기어, 遼山 (今 興京老城附近) 地方을 中心으로 하여 그 附近의 二三縣을 管轄하게 되었던 터임으로, 移郡以後의 玄菟의 領域이 이와 같이 廣大하였다고는 到底히 생각되지 아니한다. 더구나 玄菟 移郡後 얼마 뒤 그 故地인 鴨綠 本流域에서 (朱蒙)高句麗國의 興起 發展의 事實이 있음에 있어서랴. 단 注意할 것은 󰡔漢志󰡕 玄菟郡 屬縣 중의 高句驪縣과 여기 이른바 高句麗國과의 區別이니, 前者는 玄菟移郡(B.C. 75)後의 冒名의 郡治로 그 位置가 今 興京老城 附近에 當하며 後者는 移郡後 約 半世紀 未滿에 高句麗 本土人의 組織한 나라로서 今 江界越便인 洞溝附近이 그 中心地였다. 󰡔漢書󰡕 地理志의 記事는 대개 前漢末期의 調査에 基因한 것이므로 高句麗國 興起 以後의 狀態인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이와 같이 當時 鴨綠江 中流域에 郡縣外의 高句麗國이 存在하였다면, 玄菟屬縣의 一인 西蓋馬縣의 位置와 및 그 縣內를 貫流하는 馬訾水의 位置를 鴨綠江(中流)南便에 구하는 것이 無理가 아닐까. 이것이 氏의 설에 좇기 어려운 둘째의 理由이다. 또 地理志에 의하면, 西蓋馬縣은 王莽時代에 玄菟亭이라고 改稱한 일이 있었으니, 이는 마치 樂浪郡(王莽時에 樂鮮郡이라 改함)의 浿水縣을, 역시 王莽時에 樂鮮亭이라고 고친 것과 一般인데, 浿水縣(樂鮮亭)이 遼東郡과의 境界處에 있는 樂浪 (樂鮮)의 一重要地이었던 것을 미루어 보면, 西蓋馬縣도 郡外의 高句麗와 接境한 곳에 있던 玄菟의 要路이기 때문에, 玄菟亭이라고 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P155 西蓋馬縣이 高句麗의 中心地를 越한 南便에 있었다고 할 수 없을 것은 再言을 不要한다. 단 ‘西蓋馬’란 地名은, ‘西쪽의 蓋馬’를 意味한 것으로 거기에 대하여 ‘東蓋馬’의 地가 있었으리라 함은, 나도 이미 ‘玄菟郡考’중에 말한 바이지만, 近來 나의 修正된 說로 보면, 西蓋馬나 東蓋馬는 실상 그 中間에 本蓋馬가 있어 그곳을 標準으로 하여, 그 西쪽의 것은 西蓋馬, 그 東쪽의 것은 東蓋馬라고 하였던 것 같으니, 本蓋馬의 地는 어디냐 하면, 나는 貊族의 根據地인 鴨綠江流域의 高句麗 (Proper) 地方이라고 한다. ‘貊’及 ‘高麗’(句麗)를, 日本서는 古來로 ‘コマ’라고 訓讀하여 왔거니와, 이 ‘コマ’야말로 蓋馬(Khai-ma, koi ba)의 對音에 틀림없을 것이며, 支那에서 소위 ‘貊’이니 하는것도 실상 이 蓋馬에 대한 오랜 寫音의 畧稱이 아닌가 한다. 이것이 容忍된다 하면, 蓋馬는 곧 貊이요 高句麗임을 더욱 確證할 수 있다. 이렇게 本蓋馬를 鴨綠江中流의 高句麗(Proper)地方이라고 하면, 그 西쪽인 佟佳江流域에 據한 貊族을 西蓋馬, 그 東南쪽인 東沃沮 東濊等을 東蓋馬라고 보는 것이 훨씬 自然스럽지 아니한가. 高句麗에서 卒本夫餘(高句麗 首都)를 中心으로 하여, 그 北의 것을 北夫餘(원 夫餘), 그東의 것(沃沮․東濊)을 東夫餘라고 함과, 夫餘의 一族인 百濟王室이 南으로 今扶餘地方에 遷都하였을 때 一時 國號를 南扶餘라고 하였던 것을 參考하여 보면, 더욱 思過半함이 있다. 夫餘는 역시 高句麗와 같이 濊貊族에 屬함으로, 北夫餘는 卽 北蓋馬, 東夫餘는 卽 東蓋馬, 南扶餘는 卽 南蓋馬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北蓋馬니 東蓋馬니 南蓋馬니 하는 名稱은 史上에 나타나는 것이 하나도 없으므로, 實際에 꼭 그런 稱呼가 있었다고는 물론 斷言할 수 없고, 理論上 그와 같이 命名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蓋馬란 말은, 「玄菟郡考」 중에도 이미 말한 바와 같이 元來 濊貊族의 語로, 저 東明傳說 중의 解慕(漱)와 高句麗 地名 중의 蓋馬(大山), 蓋牟(城), 昆彌(川), 高木(城), 功木▶P156-1(達), 皆伯(縣), 高句麗遺將의 鉗牟(岑), 혹은 釰牟(岑), 馬韓地名 중의 乾馬(國), 熊川(고마내), 高句麗 好太王 碑文에 나타나는 百濟城名 중의 句牟(城), 古模(耶羅城)와, 百濟의 熊津城(고마나루)인 固拔(城) 固麻(城) 久麻(怒利城), 및 其他 百濟地名 중의 古馬(彌知縣) 古彌(縣) 古麻(山) 金馬(渚郡)等의 語와 共通한 意味의 語일지며, 그 語議에 대하여는 愼重히 考慮하고 있는 중이나, 나의 지금까지의 穿鑿으로는, 그것은 ‘上’ ‘神’ ‘神聖’을 意味하는 朝鮮語의 감(Kam), 검(Kom), 금(Keum), 日本語의 カミ(Kami), カム(Kamu)에 該當한 것 같고, 어떠튼 濊貊族은 蓋馬 혹은 그와 類似한 發音의 語로서 人名 城邑 名山 大川의 名을 삼기를 좋아한 것 같다. 卽 濊貊族은 그들 自身을 蓋馬(天降族 혹은 神聖族?)라고 할뿐아니라, 그 住地人名 및 神聖視하는 山川에까지 그렇게 부르기를 例事로 하였던 모양이다. 마치 古代 希臘人이 저들 自身을 Hellenes라 하고 그 居住하는 土地들 Hellas라고 함과 類似하다. 蓋馬에 관하여는 더 깊이 硏究하려하거니와, 如何間 貊族의 원 住地는 鴨綠 佟佳의 兩流域의 地로 鴨綠江流域에 據한 者가 本蓋馬, 佟佳江流域에 據한 者가 西蓋馬이었던 것은 의심할 수없는 事實이라고 自信한다. 󰡔魏志󰡕 東夷傳 高句麗條에 “又有小水貊, 句麗作國, 依大水而居, 西安平縣北, 有小水南流入海, 句麗別種, 依小水作國, 因名之爲小水貊云云”이라 한 大水는 卽 鴨綠江, 小水는 今佟佳江의 謂로, 大水에 居한 大水貊과 小水에 居한 小水貊은, 역시 本蓋馬 西蓋馬의 二蓋馬를 指稱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하면, 西蓋馬에 置한 西蓋馬縣의 位置를 구태여 鴨綠江本流域의 蓋馬大山 附近에 接邇시키려고 할 必要가 없는 것이 아닌가. 이것이 氏의 설에 좇기 어려운 또 한가지 理由이다.
그 다음, 마자수(馬訾水)의 명(名)에 취(就)하여 보더라도, ‘마자(馬訾)’와 근사한 음의 지명이 압록강(鴨綠江)(염난수(鹽難水)) 남(좌)지중류(南(左)支流中)에서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고, 도리어 그 북(우)지중류(北(右)支流中)에서 많이 발견하게 된다. 우선 북지중류(北支流中)의 대수(大水)로 꼽는-내가 마자수(馬訾水)로 잡는-동가강(佟佳江)(금(今) 혼강(渾江))이 명대(明代)에는 파저강(婆猪江), 파저강(婆豬江), 발저강(潑猪江), 박주강(泊珠江), 포주강(蒲洲江) 등의 자명(字名)으로 호칭되었으니, 파저(婆猪)(pa-chu) 파저(婆豬)(Pa-chu) 발저(潑猪)(Pwat-chu) 박주(泊珠)(Boh-tsu) 포주(蒲洲)(Po-chiu)의 자음이 ‘마저(馬訾)’(Ba tsi)와 얼마나 가까움을 짐작할 수 있고, 또 그 서남으로 금일(今日)의 소포석하(小蒲石河), 대포석하(大蒲石河)의 포석(蒲石)(Po-shih)이 (자음상) 이들과 유사할 뿐 아니라, 대포석하(大蒲石河) 하구이었으리라고 생각되는 고구려(高句麗)의 유명한 박작성(泊汋城), 발해(渤海) 국경의 박작구(泊汋口)와, 역시 그 부근이었으리라고 추측되는 금대(金代)의 파속부(婆速府), 원대(元代)의 파사부(婆娑府)와 같은 것-박작(泊汋)(Beh-tsu) 파속(婆速)(Pa-sok), 사파(裟婆)(Pa-so)-도, 저 ‘마자(馬訾)’ ‘파저(婆豬)’의 음과 유사함을 누구나 깨달을 수 있다. 박작(泊汋), 파속(婆速), 파사(婆娑)가 다 하명(河名)에서 얻은 이름인 것은 논할 것도 없거니와, 같은 이름의 수명(水名)이 시대를 따라, 서칭(書稱)을 달리하고 위치를 변하는 것은, 타에도 유례가 많다. 더욱 백조(白鳥) 박사의 설과 같이 ‘마자(馬訾)’ ‘파저(婆猪)’의 어(語)가 외(外)를 의미하는 조선어의 밧(Bas, bat), 만주어의 boso에 당(當)한 것이라 하여, 그것을 외강(外江) 혹은 산외하(山外河)의 의(義)로 인정한다 하면(사학잡지학술지 제25편 제5호권호 동씨(同氏) 논문 참조), 그런 이름이 압록강(鴨綠江) 북지류(北支流) 중에 많이 발견됨은 도리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대(漢代)의 마자수(馬訾水)는 저명한 강하(江河)로 지리지(地理志)에 특히 그 이수(里數)까지(물론 거기에는 염난(鹽難) 하류의 이수(里數)도 포함) “行二千一百里”라고 기입되었으므로, 그것은 물론 금일(今日)의 소포석하(小蒲石河), 대포석하(大蒲石河)에 비정할 내(천(川))가 아니요, 반드시 동가강(佟佳江)(파저강(婆猪江))과 같은 대수(大水)에 구하지 않으면 않될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즉 슬라빅인물씨의 마자수(馬訾水) 재남설(在南說)에는 더욱 긍종(肯從)하기 어려운 소이(所以)다. 물론 씨의 마자수설(馬訾水說)에는, 위에 말한 한지(漢志)의 “馬訾水西北入鹽難水云云”의 서북을 마자수(馬訾水) 전체의 유향(流向)-즉 마자수(馬訾水)가 염난수(鹽難水)에 들어가 합하는 곳까지 한결같이 서북류(西北流)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데 중요한 이유가 있으나, 그 ‘서북’운운을 나와 같이 서개마현치(西蓋馬縣治)(부이강구(富爾江口) 부근)에서 서북으로 굴절한 후(당시에는 유정(流程)이 지금보다 더 훨씬 서북으로 굴절되었는지 모르겠다) 염난수(鹽難水)에 入(입)한 것이라고 해석한다면, 마자수(馬訾水)가 반드시 염난수(鹽難水)의 남지류(南支流)에 당(當)하여야 되겠다는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고대의 지리를 논함에는 단지 그 ‘서북’ 이자(二字)의 해석에만 치중할 것이 아니라, 기(其) 외에 역사적 대세적 고찰과 언어상의 고찰도 요하는 것이니, (암만 원문일지라도) 왕왕 고립한 문자에 어떠한 착오가 있을는지도 모르는 소이(所以)다.
쪽수▶P156-2그 다음, 馬訾水의 名에 就하여 보더라도, ‘馬訾’와 近似한 音의 地名이 鴨綠江(鹽難水) 南(左)支流中에서▶P157 는 하나도 찾아 볼 수 없고, 도리어 그 北(右)支流中에서 많이 發見하게 된다. 于先 北支流中의 大水로 꼽는-내가 馬訾水로 잡는-佟佳江(今渾江)이 明代에는 婆猪江․婆豬江․潑猪江․泊珠江․蒲洲江 等의 字名으로 呼稱되였으니, 婆猪(pa-chu) 婆豬(Pa-chu) 潑猪(Pwat-chu) 泊珠(Boh-tsu) 蒲洲(Po-chiu)의 字音이 ‘馬訾’(Ba tsi)와 얼마나 가까움을 짐작할 수 있고, 또 그 西南으로 今日의 小蒲石河 大蒲石河의 蒲石(Po-shih)이 (字音上) 이들과 類似할 뿐 아니라, 大蒲石河 河口이었으리라고 생각되는 高句麗의 有名한 泊汋城, 渤海國境의 泊汋口와, 역시 그 附近이었으리라고 推測되는 金代의 婆速府 元代의 婆娑府와 같은 것-泊汋(Beh-tsu) 婆速(Pa-sok) 裟婆(Pa-so)-도, 저 ‘馬訾’ ‘婆豬’의 音과 類似함을 누구나 깨달을 수 있다. 泊汋 婆速 婆娑가 다 河名에서 얻은 이름인 것은 論할 것도 없거니와, 같은 이름의 水名이 時代를 따라, 書稱을 달리하고 位置를 變하는 것은, 他에도 類例가 많다. 더욱 白鳥博士의 說과 같이 ‘馬訾’ ‘婆猪’의 語가 外를 意味하는 朝鮮語의 밧(Bas, bat), 滿洲語의 boso에 當한 것이라 하여, 그것을 外江 혹은 山外河의 義로 認定한다 하면(󰡔史學雜誌󰡕 第25篇 第5號 同氏 論文 參照), 그런 이름이 鴨綠江北支流 중에 많이 發見됨은 도리어 當然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漢代의 馬訾水는 著名한 江河로 地理志에 특히 그 里數까지(물론 거기에는 鹽難下流의 里數도 包含) “行二千一百里”라고 記入되었으므로, 그것은 물론 今日의 小蒲石河 大蒲石河에 比定할 내(川)가 아니요, 반드시 佟佳江(婆猪江)과 같은 大水에 求하지 않으면 않될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즉 슬라빅氏의 馬訾水 在南說에는 더욱 肯從하기 어려운 所以다. 물론 氏의 馬訾水說에는, 위에 말한 漢志의 “馬訾水西北入鹽難水云云”의 西北을 馬訾水全體의 流向-즉 馬訾水가 鹽難水에 들어가 합하는 곳까지 한결같이 西北流하는 것-으로 解釋하는 데 重要한 理由가 있으▶P158-1나, 그 ‘西北’云云을 나와 같이 西蓋馬縣治(富爾江口 附近)에서 西北으로 屈折한 후(當時에는 流程이 지금보다 더 훨씬 西北으로 屈折되었는지 모르겠다) 鹽難水에 入한 것이라고 解釋한다면, 馬訾水가 반드시 鹽難水의 南支流에 當하여야 되겠다는 理由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古代의 地理를 논함에는 단지 그 ‘西北’二字의 解釋에만 置重할 것이 아니라, 其外에 歷史的 大勢的 考察과 言語上의 考察도 要하는 것이니, (암만 原文일지라도) 往往孤立한 文字에 어떠한 錯誤가 있을는지도 모르는 所以다.
씨의 부론(副論)인 염난(鹽難), 엄표(掩淲) 등의 고음일치설(古音一致說)에 취(就)하여는 나는 매우 흥미를 느끼었다. 나도 일찍이 씨와 같은 의견을 가졌었다. 즉 왕충(王充) **논형(論衡)**의 엄표수(掩淲水)와 **후한서(後漢書)**의 엄표수(淹淲水)(씨는 전한서서적에 있다고 하였으나, 이는 후한서서적 의 오(誤)인듯)와, **위략(魏畧)**의 엄시수(掩施水)(원문에는 엄시수(施掩水)라 하였으나, 이는 씨와 같이 엄시(掩施)로 볼 것)와 **양서(梁書)** **북사(北史)**의 엄체수(淹滯水)와, 삼국사기서적의 엄ima수(淹ima水)는, 다 광개토왕(廣開土王)비문 중에 나타나는 엄리대수(奄利大水) 그것으로, 더욱 엄리(奄利)의 음이 엄난(盬難)과 근사하여, 결국 동명(東明) 전설 중에 보이는 대수(大水)는 금(今) 압록강(鴨綠江)을 가리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이미 졸고(拙稿) 「현토군고」원고를 초(草)할 때부터 가져왔었다. 그러나 나는 우리 엄표(掩淲), 엄ima(淹ima), 엄시(掩施), 엄체(淹滯)가 서(書)를 따라 또는 시대를 따라 달라지는 것과, 실제, 엄ima(淲ima), 시(施), 체(滯)의 음이 엄리(奄利), 염난(鹽難)의 음과 부합치 아니함을 이유로 삼아, 이렇게 생각하여 본 일도 있었다. 즉 엄표(掩淲), 엄ima(淹ima)는 바로 엄니(掩泥) 혹 엄니(淹泥)의 와전된 것이 아닌가-환언하면 엄니(掩泥) 엄니(淹泥)가 일와(一訛)하여 엄표(掩淲), 엄ima(淹ima)가 되고, 또 엄표(掩淲), 엄ima(淹ima)가 재화(再訛)하여 엄시(掩施), 엄체(淹滯)가 된 것이 아닌가, (특히 엄체(淹滯)의 체(滯)는 호(虎), 사(虒)의 속자(俗字)에서 전와(轉訛)된 것이 아닌가) 하는 억측을 일으켜 보기도 하였다. 실상 니자(泥字)와 표자(淲字) ima자(ima字)는 자양(字樣)이 근사하여 서로 와전되기 쉬운 가능성을 가졌다. 그리하여 엄니(掩泥)와 엄리(奄利)와 염난(鹽難)과의 자음적 일치를 구하여 본 일도 있었지마는, 엄니(掩泥), 엄리(奄利)가 실제에 있어 곧 염난수(鹽難水)(압록강(鴨綠江))이라 함에는 일개의 주저가 없지 않았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추모(鄒牟) 즉 주몽(朱蒙)(동명(東明))이 북부여(北夫餘)에서 도망하여 동남으로 엄리대수(奄利大水)를 건너 홀본(忽本)(졸본(卒本))에 이르러 나라를 세웠다는 전설 그것이다. 홀본(忽本) 즉 졸본(卒本)은, 지나(支那) 측의 사서 특히 위서서적 고구려전에는 흘승골성(紇升(本?)骨城)으로 되어 있거니와, 여하간 그곳은 고구려(高句麗) 시조 주몽(朱蒙)의 건도처(建都處)로 후일의 국내성(國內城)(동구성(洞溝城))과 불원(不遠)한 거리에 있는 압록(鴨綠) 우안(右岸)의 지(地)(나는 금일(今日) 호태왕비(好太王碑)가 서 있는 동강(東崗)을 홀본(忽本) 즉 졸본(卒本)으로 인정하니, 비문에 홀본동강(忽本東崗)의 어(語)가 보임으로써다. 후일 「졸본고(卒本考)」 중에 상론(詳論)하려함)인즉, 홀본(忽本)(졸본(卒本))과 북부여(北夫餘) 사이에 있는 엄리(奄利)(엄니(掩泥))대수(大水)를 바로 압록강(鴨綠江)(염난수(鹽難水)) 본류에 비정한다는 것이 사리에 있어 불능한 소이(所以)다. 그리하여 나는 이 모순을 피하기 위하여, 추모(鄒牟) 전설에 나타나는 엄리대수(奄利大水)의 실제적 위치는 금일(今日)의 동가강(佟佳江)(마자수(馬訾水))으로 잡고, 단 그 엄리(奄利)란 이름만은 본류(本流)의 염난(鹽難)과 혼동한 것으로 보기까지 하였으나, 너무도 천착에 기울기 때문에, 후일 더 숙고하기로 하고 아직 발표하지 아니하였던 것이다. 어떠튼 씨의 엄표(掩淲), 엄리(奄利), 염난(鹽難) 동일설은, 나의 생각과 공통되는 점이 있을뿐더러, 실제 흥미를 느끼어 줌이 적지 않다.
쪽수▶P158-2氏의 副論인 鹽難․掩淲等의 古音一致說에 就하여는 나는 매우 興味를 느끼었다. 나도 일찍이 氏와 같은 意見을 가졌었다. 즉 王充 󰡔論衡󰡕의 掩淲水와 󰡔後漢書󰡕의 淹淲水(氏는 前漢書에 있다고 하였으나, 이는 後漢書의 誤인듯)와, 󰡔魏畧󰡕의 掩施水(原文에는 施掩水라 하였으나, 이는 氏와 같이 掩施로 볼 것)와 󰡔梁書󰡕 󰡔北史󰡕의 淹滯水와, 󰡔三國史記󰡕의 淹水는, 다 廣開土王碑文 중에 나타나는 奄利大水 그것으로, 더욱 奄利의 音이 盬難과 近似하여, 結局 東明 傳說 중에 보이는 大水는 今 鴨綠江을 가리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이미 拙稿 「玄菟郡考」를 草할 때부터 가져 왔었다. 그러나 나는 우리 掩淲․淹․掩施,․淹滯가 書를 따라 또는 時代를 따라 달라지는 것과, 實際, 淲․施․滯의 音이 奄利 鹽難의 音과 符合치 아니함을 理由로 삼아, 이렇게 생각하여 본 일도 있었다. 즉 掩淲 淹는 바로 掩泥 혹 淹泥의 訛轉된 것이 아닌가-換言하면 掩泥 淹泥가 一訛하여 掩淲 淹가 되고, 또 掩淲 淹가 再訛하여 掩施 淹滯가 된 것이 아닌가, (특히 淹滯의 滯는 虎․虒의 俗字에서 轉訛된 것이 아닌가) 하는 臆測을 일으켜 보기도 하였다. 실상 泥字와 淲字 字는 字樣이 近似하여 서로 訛轉되기 쉬운 可能性을 가졌다. 그리하여 掩泥와 奄利와 鹽難과의 字音的 一致를 求하여 본 일도 있었지마는, 掩泥 奄利가 實▶P159-1際에 있어 곧 鹽難水(鴨綠江)이라 함에는 一個의 躊躇가 없지 않았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鄒牟 卽朱蒙(東明)이 北夫餘에서 逃亡하여 東南으로 奄利大水를 건너 忽本(卒本)에 이르러 나라를 세웠다는 傳說 그것이다. 忽本 卽卒本은, 支那側의 史書 특히 󰡔魏書󰡕高句麗傳에는 紇升(本?)骨城으로 되어 있거니와, 如何間 그곳은 高句麗 始祖 朱蒙의 建都處로 後日의 國內城(洞溝城)과 不遠한 距里에 있는 鴨綠 右岸의 地(나는 今日 好太王碑가 서 있는 東崗을 忽本 卽卒本으로 認定하니, 碑文에 忽本東崗의 語가 보임으로써다. 後日 「卒本考」 중에 詳論하려함)인즉, 忽本(卒本)과 北夫餘 사이에 있는 奄利(掩泥)大水를 바로 鴨綠江(鹽難水)本流에 比定한다는 것이 事理에 있어 不能한 所以다. 그리하여 나는 이 矛盾을 피하기 위하여, 鄒牟傳說에 나타나는 奄利大水의 實際的 位置는 今日의 佟佳江(馬訾水)으로 잡고, 但 그 奄利란 이름만은 本流의 鹽難과 混同한 것으로 보기까지 하였으나, 너무도 穿鑿에 기울기 때문에, 後日 더 熟考하기로 하고 아직 發表하지 아니하였던 것이다. 어떠튼 氏의 掩淲․奄利․鹽難 同一說은, 나의 생각과 共通되는 點이 있을뿐더러, 實際 興味를 느끼어 줌이 적지 않다.
끝으로 씨의 읍루(挹婁), 압록(鴨綠) 고음비정설(古音比定說)은, 단지 그 자음의 유사한 것만 보고 한 말이므로, 씨의 다른 자세한 설명을 듣기 전에는 무엇이라고 말하기 어렵고, 또 상은태현(上殷台縣)의 ‘은태(殷台)’의 음이 엄리(奄利), 염난(鹽難)과 유사하다 함과, 따라 동현(同縣)의 위치가 염난수(鹽難水) 중류 혹 상류에 있었으리라 하는 설은, 너무도 근거가 박약할 뿐더러, 현토군(玄菟郡) 급(及) 군외(郡外) 고구려(高句麗) 간의 세력 소장(消長) 관계를 몰각(沒却) 혹은 무시하는 폐가 많이 있다. 이는 마치 위에 서개마현(西蓋馬縣)의 위치를 현토군(玄菟郡) 세력지대 이외(以外)에 구함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지리지(地理志)의 현토군치(玄菟郡治)인 고구려현(高句麗縣)과 군외(郡外)의 고구려국(高句麗國)과는, 위에 말한 바와 같이 엄별(嚴別)하지 아니하면 아니된다.
쪽수▶P159-2 끝으로 氏의 挹婁․鴨綠 古音比定說은, 단지 그 字音의 類似한 것만 보고 한 말이므로, 氏의 다른 仔細한 說明을 듣기 전에는 무엇이라고 말하기 어렵고, 또 上殷台縣의 ‘殷台’의 音이 奄利 鹽難과 類似하다 함과, 따라 同縣의 位置가 鹽難水 中流 或 上流에 있었으리라 하는 說은, 너무도 根據가 薄弱할 뿐더러, 玄菟郡 及 郡外 高句麗間의 勢力 消長關係를 沒却 或은 無視하는 弊가 많이 있다. 이는 마치 위에 西蓋馬縣의 位置를 玄菟郡 勢力地帶 以外에 求함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地理志의 玄菟郡治인 高句麗縣과 郡外의 高句麗國과는, 위에 말한 바와 같이 嚴別하지 아니하면 아니된다.
이것으로써 슬라빅인물씨의 고평(高評)에 보답하는 동시에 그 호의를 거듭 감사하는 바이다.
쪽수▶P159-3 이것으로써 슬라빅氏의 高評에 報答하는 同時에 그 ▶P160-1 好意를 거듭 感謝하는 바이다.
「이병도 저 「패수고」를 읽다」원고 (Alexander Slawik씨로부터)
쪽수▶P160-2 李丙燾 著 「패수고」를 읽다 (Alexander Slawik氏로부터)
이씨(李氏)는 전한서서적 ** 지리지(地理志) 현토군(玄菟郡) 서개마현조(西蓋馬縣條)의 “馬訾水西北入鹽難水西南至西安平入海云云”라는 문구를 “마자수(馬訾水)는 서북으로부터 염난수(鹽難水)로 들어가고, 염난수(鹽難水)는 서남으로 흘러 서안평(西安平)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라고 해석하고, 마자수(馬訾水)를 염난수(鹽難水)의 우지류(右支流)로 염난수(鹽難水)는 지금의 압록강, 마자수(馬訾水)는 동가강(佟佳江)이라고 주장하였다. 게다가 서개마현(西蓋馬縣)은 동가강 유역에 있고, 그 현치(縣治)는 지금의 부이강구(富爾江口)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설에 관한 의문이 많다. 본 문제의 중대한 점은 다음의 두 개다.
쪽수▶P160-3 李氏는 󰡔前漢書󰡕 地理志 玄菟郡 西蓋馬縣條의 “馬訾水西北入鹽難水西南至西安平入海云云”라는 문구를 “馬訾水는 西北으로부터 鹽難水로 들어가고, 鹽難水는 西南으로 흘러 西安平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라고 해석하고, 馬訾水를 鹽難水의 右支流로 鹽難水는 지금의 압록강, 馬訾水는 佟佳江이라고 주장하였다. 게다가 西蓋馬縣은 동가강유역에 있고, 그 縣治는 지금의 富爾江口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설에 관한 의문이 많다. 본 문제의 중대한 점은 다음의 두 개다.
제1, 상기 지리지(地理志)의 ‘서북’은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
쪽수▶P160-4 第一, 上記 地理志의 ‘西北’은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
제2, 상기 서개마현(西蓋馬縣)에 있어서 하천은 어떤 것이 지류이고 어떤 것이 본류인가.
쪽수▶P160-5 第二, 上記 西蓋馬縣에 있어서 河川은 어떤 것이 支流이고 어떤 것이 本流인가.
제1의 문제에 대해서는 이씨(李氏)도 다른 학자와 마찬가지로 ‘서북’을 ‘서북으로부터’라고 읽고 있다. 제2의 문제는, 어떤 학자는 지나(支那) 및 조선(朝鮮)의 고주(古注)에 따라 마자수(馬訾水)를 본류로 하고, 이에 반하여 이씨(李氏)는 상기와 같이 염난수(鹽難水)를 본류라고 하였다.
쪽수▶P160-6 第一의 문제에 대해서는 李氏도 다른 학자와 마찬가지로 ‘西北’을 ‘西北으로부터’라고 읽고 있다. 第二의 문제는, 어떤 학자는 支那 및 朝鮮의 古注에 따라 馬訾水를 本流로 하고, 이에 반하여 李氏는 上記와 같이 鹽難水를 本流라고 하였다.
여(余)는 상기의 지리지(地理志)의 문구를 “마자수(馬訾水)는 서북으로 흘러 염난수(鹽難水)로 들어가고, 염난수(鹽難水)는 서남으로 흘러 서안평(西安平)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읽는다. 즉 아래의 그림과 같이 마자수(馬訾水)는 염난수(鹽難水)의 좌(남)지류(左(南)支流)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마자수(馬訾水)는 압록강(鴨綠江)의 남지류(南支流)인 충만강(忠滿江) 혹은 오히려 더 큰 동래강(東來江)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쪽수▶P160-7 余는 上記의 地理志의 문구를 “馬訾水는 西北으로 흘러 鹽難水로 들어가고, 鹽難水는 西南으로 흘러 西安平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읽는다. 즉 아래의 그림과 같이 馬訾水는 鹽難水의 左(南)支流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馬訾水는 鴨綠江의 南支流인 忠滿江 혹은 오히려 더 큰 東來江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이런 여(余)의 설명을 지지하기 위해 다시 다른 자료를 보탠다.
쪽수▶P160-8 이런 余의 설명을 지지하기 위해 다시 다른 자료를 보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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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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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상기의 지리지(地理志)에 의해 마자수(馬訾水)는 서개마(西蓋馬)에 있다. ‘서개마(西蓋馬)’라는 지명은 ‘서쪽의 개마(蓋馬)’를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이 ‘서쪽의 개마(蓋馬)’의 지명으로써 ‘동개마(東蓋馬)’도 있었다고 가정할 수 있을 터인데, 문헌에서 이 지명을 찾을 수 없다. 다만 **위지(魏志)** 권30 동옥저전(東沃沮傳)의 “東沃沮 在高句麗蓋馬大山之東濱大海”라는 기사에 의해 당시 ‘개마대산(蓋馬大山)’이라는 지명이 있었음을 알 수 있고, 일반적인 설에 따라 동옥저(東沃沮)라고 칭한 지역은 적어도 지금의 함경남도에 해당한다. 더욱이 동옥저 이외에 북옥저라는 영역도 한위대(漢魏代)의 문헌에 출현하지만, ‘서옥저(西沃沮)’나 ‘동개마(東蓋馬)’라고 하는 지명은 아직 찾을 수 없었다. 요컨대 여(余)는 다음의 가정을 세우려고 한다.
쪽수▶P161-2 즉 上記의 地理志에 의해 馬訾水는 西蓋馬에 있다. ‘西蓋馬’라는 지명은 ‘서쪽의 蓋馬’를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이 ‘서쪽의 蓋馬’의 지명으로써 ‘東蓋馬’도 있었다고 가정할 수 있을 터인데, 문헌에서 이 지명을 찾을 수 없다. 다만 󰡔魏志󰡕卷30 東沃沮傳의 “東沃沮 在高句麗蓋馬大山之東濱大海”라는 기사에 의해 당시 ‘蓋馬大山’이라는 지명이 있었음을 알 수 있고, 일반적인 설에 따라 東沃沮라고 칭한 지역은 적어도 지금의 함경남도에 해당한다. 더욱이 동옥저 이외에 북옥저라는 영역도 漢魏代의 문헌에 출현하지만, ‘西沃沮’나 ‘東蓋馬’라고 하는 지명은 아직 찾을 수 없었다. 요컨대 余는 다음의 가정을 세우려고 한다.
서개마(西蓋馬)=서옥저(西沃沮) 동개마(東蓋馬)=동옥저(東沃沮)
쪽수▶P161-3 西蓋馬=西沃沮 東蓋馬=東沃沮
상기의 소위 개마대산(蓋馬大山)은 어디에 있었을까. 고문헌에서는 이 문제에 관한 자료가 거의 없다. 다만 **고려사(高麗史)** 윤관전(尹瓘傳)에 의해 이 개마산(蓋馬山)은 영주성(英州城)의 서북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여하튼 ‘개마대산(蓋馬大山)’은 동옥저 즉 함경남도이고, 서개마(西蓋馬) 즉 평안북도의 경계인 대산맥이다. 그렇다면 이 개마대산(蓋馬大山)은 아마도 지금의 낭림산맥(狼林山脈)의 일부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만약 이 설이 확실하다고 한다면 서개마현(西蓋馬縣)은 적어도 낭림산맥(狼林山脈)과 압록강(鴨綠江)의 중간지역 즉 평안북도의 북부와 일치할 터이다. 게다가 이 지역에 상기와 같이 마자수(馬訾水) 즉 동래강(東來江)도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쪽수▶P161-4上記의 소위 蓋馬大山은 어디에 있었을까. 고문헌에서는 이 문제에 관한 자료가 거의 없다. 다만 󰡔高麗史󰡕 尹瓘傳에 의해 이 蓋馬山은 英州城의 西北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여하튼 ‘蓋馬大山’은 동옥저 즉 함경남도이고, 西蓋馬 즉 평안북도의 경계인 대산맥이다. 그렇다면 이 蓋馬大山은 아마도 지금의 狼林山脈의 일부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만약 이 說이 확실하다고 한다면 西蓋馬縣은 적어도 狼林山脈과 鴨綠江의 중간지역 즉 평안북도의 북부와 일치할 터이다. 게다가 이 지역에 上記와 같이 馬訾水 즉 東來江도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제2의 문제에 대하여 종래 학자들이 지리적 방면에서 마자수(鹽難水)를 압록강이라고 하였다. 여(余)는 이 설을 지지하기 위해 언어적 자료를 증거로써 더한다. 즉 염난(鹽難)의 고음(古音)(당대(唐代))은 *Iam(<-g)-nan 혹은 ※Iam-lan이었다. 이 고음(古音)은 소위 동명전설(東明傳說)에 있어서 ‘대수(大水)’의 명칭의 고음(古音)과 유사하고 이 하명(河名)의 다양한 형식은 다음과 같다.
쪽수▶P161-5第二의 문제에 대하여 종래 학자들이 지리적 방면에서 鹽難水를 압록강이라고 하였다. 余는 이 설을▶P162-1 지지하기 위해 언어적 자료를 증거로써 더한다. 즉 鹽難의 古音(唐代)은 *Iam(<-g)-nan 혹은 ※Iam-lan이었다. 이 古音은 소위 東明傳說에 있어서 ‘大水’의 명칭의 古音과 유사하고 이 河名의 다양한 형식은 다음과 같다.
엄체(掩遞) *Iam sei, *Iam dici, sinc-jap: *Ensi, Ansi, Onsi, Fpusi(전한서(前漢書))
쪽수▶P162-2 掩遞 *Iam sei, *Iam dici, sinc-jap: *Ensi, Ansi, Onsi, Fpusi(前漢書)
엄표(淹淲) *Iam-sie(?)ai o jap: *Ens, Onsi, Epusi, Opusi(삼국사기(三國史記) 권13)
쪽수▶P162-3 淹淲 *Iam-sie(?)ai o jap: *Ens, Onsi, Epusi, Opusi(三國史記 卷十三)
엄시(掩施) *Iam-sie, sin-jap: *Ensi, Ansi, Onsi, Opusi(위지(魏志))
쪽수▶P162-4 掩施 *Iam-sie, sin-jap: *Ensi, Ansi, Onsi, Opusi(魏志)
엄체(淹滯) *Iam-diia(<(d-d) Sino-jap. *Entei, Ontai, Epusei' Opusei(양서(梁書))
쪽수▶P162-5 淹滯 *Iam-diia(<(d-d) Sino-jap. *Entei, Ontai, Epusei' Opusei(梁書)
엄리(奄利) *Iam Lji, Sino jap: Inri(호태왕비(好太王碑))
쪽수▶P162-6 奄利 *Iam Lji, Sino jap: Inri(好太王碑)
이들의 다양한 명칭은 물론 동일한 하천의 이름이지만, 더욱이 압록강의 고음(古音) *Aplmk 및 읍루(挹婁)의 고음(古音) *Iap-leu ※Iep-lui에 아주 유사하다.
쪽수▶P162-7 이들의 다양한 명칭은 물론 동일한 하천의 이름이지만, 더욱이 압록강의 古音*Aplmk 및 挹婁의 古音*Iap-leu ※Iep-lui에 아주 유사하다.
이들 명칭, 특히 *Iam-diai 및 ※Iam-diei, 현토군(玄菟郡) 상은대(上殷臺)의 ‘은대(殷臺)’의 고음(古音) *Ien-J(<d-) ※Ien-tai와도 유사하다. 그렇다면 상은대현(上殷臺縣)은 염난수(鹽難水) 중류 혹은 상류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고구려현(高句麗縣)에 대하여 한마디를 덧붙인다. 이 현은 지리지에 의해 요수(遼水)의 출소(出所)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요수(遼水)는 지금의 혼하(渾河)임이 의심할 여지가 없기 때문에 상기의 고구려는 아마도 혼하(渾河) 및 동가강(佟佳江) 유역을 포함하고 있었을 것이다.
쪽수▶P162-8 이들 명칭, 특히 *Iam-diai 및 ※Iam-diei, 玄菟郡 上殷臺의 ‘殷臺’의 古音 *Ien-J(<d-) ※Ien-tai와도 유사하다. 그렇다면 上殷臺縣은 鹽難水中流 혹은 上流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高句麗縣에 대하여 한마디를 덧붙인다. 이 縣은 지리지에 의해 遼水의 出所였음을 알 수 있다. 이 遼水는 지금의 渾河임이 의심할 여지가 없기 때문에 上記의 고구려는 아마도 渾河 및 佟佳江 유역을 포함하고 있었을 것이다.
물론, 위의 단순한 설명을 가지고 현토군의 지리적 영역에 관한 문제를 다 할 수는 없지만, 상기의 이삼(二三)의 연구 결과에 의해 서개마현(西蓋馬縣) 및 마자수(馬訾水)의 위치를 명확히 했다고 생각한다.
쪽수▶P162-9 물론, 위의 단순한 설명을 가지고 현토군의 지리적 영역에 관한 문제를 다 할 수는 없지만, 上記의 二三의 연구결과에 의해 西蓋馬縣 및 馬訾水의 위치를 명확히 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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