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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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한나 (토론 | 기여)님의 2023년 11월 30일 (목) 13:54 판 (본문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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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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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원제목 浿水考 학술지 청구학총 수록권호 청구학총13 발행기관
저자 이병도 역자 집필일자 게재연월 1933년x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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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내용을 입력합니다.






목차







본문


본문1: (1)


조선의 하천으로 일찍부터 支那人(지나인)에게 알려진 것은 즉 浿水(패수).列(洌)水(열(렬)수)의 二水(이수)이다. 浿水(패수)의 이름은 **史記(사기)** 朝鮮傳(조선전)에 처음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이어 **漢書(한서)** 朝鮮傳(조선전) 및 同地理志(동지리지)에 나오고 있는데(**한서** 조선전은 대개 **사기** 조선전의 轉載(전재)이고), 그 지리지에는 水名(수명)으로서의 浿水(패수) 이외에 또한 낙랑군의 속현으로써의 그것도 보인다. 縣名(현명)인 ‘浿水(패수)’는 말할 것도 없이 水名(수명) 그 자체를 답습한 것이다. 다음의 列水(열수)는 水名(수명)보다도 그 水名(수명)으로 인해 생겼다고 여겨지는 ‘列陽(열양)’ ‘列口(열구)’등의 지명이 한층 오래된 문헌에 나오고 있고 또한 저명하다. 즉 열수의 이름은 **한서** 지리지 및 楊子(양자) **方言(방언)** 등에 나타나는 데 반하여 ‘列陽(열양)’은 先秦(선진)시대의 저서라고 하는 **山海經(산해경)**에 보이고, ‘列口(열구)’는 **사기** 조선전에 이미 보이고 있다(**한서** 지리지에 列口(열구)는 낙랑군의 一縣名(일현명)으로 되어 있다). 列陽(열양). 列口(열구)에 관해서는 後節에서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列水(열수)의 이름이 지나인에게 알려지게 된 것은 꽤 오래전부터일 것으로 여겨진다.
쪽수▶P110-1조선의 하천으로 일찍부터 支那人에게 알려진 것은 즉 浿水․列(洌)水의 二水이다. 浿水의 이름은 󰡔史記󰡕 朝鮮傳에 처음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이어 󰡔漢書󰡕 朝鮮傳 및 同地理志에 나오고 있는데(󰡔한서󰡕 조선전은 대개 󰡔사기󰡕 조선전의 轉載이고), 그 지리지에는 水名으로서의 浿水이외에 또한 낙랑군의 속현으로써의 그것도 보인다. 縣名인 ‘浿水’는 말할 것도 없이 水名 그 자체를 답습한 것이다. 다음의 列水는 水名보다도 그 水名으로 인해 생겼다고 여겨지는 ‘列陽’ ‘列口’등의 지명이 한층 오래된 문헌에 나오고 있고 또한 저명하다. 즉 열수의 이름은 󰡔한서󰡕 지리지 및 楊子 󰡔方言󰡕 등에 나타나는 데 반하여 ‘列陽’은 先秦시대의 저서라고 하는 󰡔山海經󰡕에 보이고, ‘列口’는 󰡔사기󰡕 조선전에 이미 보이고 있다(󰡔한서󰡕 지리지에 列口는 낙랑군의 一縣名으로 되어 있다). 列陽․列口에 관해서는 後節에서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列水의 이름이 지나인에게 알려지게 된 것은 꽤 오래전부터일 것으로 여겨진다.
패수와 열수는 마치 兄弟川(형제천) 혹은 姉妹川(자매천)으로 일컬을 만한 관계에 있고, 전자는 특히 漢初(한초)의 조선 내지 낙랑군의 북경을 흐르는 國境河(국경하) 또는 郡境河(군경하)로써, 후자는 그 國中(국중)을 관류하는 國中河(국중하) 혹은 國內河(국내하)로써 각각 著聞(저문)되었고, 吾人(오인)이 그 중 하나를 이야기 하면 반드시 다른 것을 떠올렸다고 할 정도이다. 그 중에서도 패수는 國境河(국경하)였던 만큼, 그와 관련한 역사적 사실이 著大(저대)하였기 때문에 고금을 통해 학자들의 주의를 끈 하천이 되었다. 그리고 두 하천의 위치는 조선 낙랑의 강역을 생각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관계를 맺고 있는데, 이들이 지금의 무슨 무슨 川(천)에 해당하는가는 불명료하기 때문에 그 위치에 관하여 일찍부터 학자들 사이에 상당히 다양한 의논이 있었고 난문제의 하나로 여겨졌다. 지금까지 학계의 주목을 끈 주요한 학설을 들어 보면, 패수에는 大同江說(대동강설) ᆞ鴨綠江說(압록강설) ᆞ淸川江說(청천강설) 등이 있고, 열수에는 마찬가지로 대동강설 ᆞ한강설 ᆞ임진강설 등이 있다. 더욱이 이외에 양 하천을 마음대로 요동 방면의 어떤 하천으로 비정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은 일설로 들 필요도 없다.
쪽수▶P110-2 패수와 열수는 마치 兄弟川 혹은 姉妹川으로 일컬을 만한 관계에 있고, 전자는 특히 漢初의 조선 내지 낙랑군의 북▶P111-1경을 흐르는 國境河 또는 郡境河로써, 후자는 그 國中을 貫流하는 國中河 혹은 國內河로써 각각 著聞되었고, 吾人이 그 중 하나를 이야기 하면 반드시 다른 것을 떠올렸다고 할 정도이다. 그 중에서도 패수는 國境河였던 만큼, 그와 관련한 역사적 사실이 著大하였기 때문에 고금을 통해 학자들의 주의를 끈 하천이 되었다. 그리고 두 하천의 위치는 조선 낙랑의 강역을 생각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관계를 맺고 있는데, 이들이 지금의 무슨 무슨 川에 해당하는 가는 불명료하기 때문에 그 위치에 관하여 일찍부터 학자들 사이에 상당히 다양한 議論이 있었고 難問題의 하나로 여겨졌다. 지금까지 학계의 주목을 끈 주요한 학설을 들어 보면, 패수에는 大同江說ㆍ鴨綠江說ㆍ淸川江說 등이 있고, 열수에는 마찬가지로 대동강설ㆍ한강설ㆍ임진강설 등이 있다. 더욱이 이외에 兩河川을 마음대로 요동방면의 어떤 하천으로 비정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은 一說로 들 필요도 없다.
그런데 근래 대동강 유역에 있어서 낙랑군 시대의 유적유물의 발굴 발견에 의해 조선 낙랑의 중심 지역은 점점 확실성을 얻고 있으며, 특히 대동강하 유역인 龍岡郡(용강군)(海雲面(해운면) 雲坪洞(운평동))에서 故(고) 今西(금서) 박사가 발견한 한대1)의 秥蟬縣神祠碑(점제현신사비)는 이 주변이-그중에서도 군 서쪽의 漢瓦(한와)가 나온 於乙洞古城(어을동고성)이-**한서** 지리지에 보이는 낙랑군 점제현치의 소재지였음을 입증하는 유력한 자료가 되었고, 따라서 오랜 기간 학자들 사이에 문제가 되어 왔던 열수의 위치에 최후의 결정을 부여하였던 것이다. 열수는 **한서** 지리지, 樂浪郡(낙랑군) 呑列縣條(탄열현조)에 “分黎山, 列水所出, 西至秥蟬入海, 行八百二十里”라고 하였기 때문에 그것은 지금의 龍岡郡(용강군)(즉 秥蟬(점제))에 이르러 黃海(황해)로 들어가는 대동강임이 틀림없음이 판명되었다. 더욱이 이에 대해서는 故(고) 今西(금서) 박사의 「洌水考(열수고)」2)라는 상세한 논문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보는 것이 좋으나, 여하튼 구래의 列水(열수) 大同江說(대동강설)은 저 古碑(고비)의 발견에 의해 이제는 의심할 여지가 없어졌다. 단지 학자들 사이에 의연히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한대의 패수로 당시의 패수가 지금의 대동강이 아니었다는 것만은 앞의 사실로 명확하게 되었지만, 그렇다면 그것은 지금의 압록강이냐 청천강이냐가 의문이다. 그러나 패수 문제도 조만간 결정되어야 할 운명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되지만 현 학계는 이 문제에 대해 지나치게 침묵을 지키고 있다. 余(여)는 일찍이 「眞番郡考(진번군고)」3)를 草稿(초고)할 때 이 패수 문제를 언급하면서 약간 한마디를 덧붙인 적이 있고, 그리고 그에 관한 충분한 고증을 타일로 기약하였는데, 이번에는 조금 상세하게 卑見(비견)을 진술하여 삼가 제현의 교정을 바라고자 한다.
쪽수▶P111-2그런데 근래 대동강유역에 있어서 낙랑군시대의 유적유물의 발굴발견에 의해 조선 낙랑의 중심지역은 점점 확실성을 얻고 있으며, 특히 대동강하유역인 龍岡郡(海雲面 雲坪洞)에서 故 今西박사가 발견한 원문주1▶한대[1]의 秥蟬縣神祠碑는 이 주변이-그중에서도 郡 서쪽의 漢瓦가 나온 於乙洞古城이-󰡔한서󰡕 지리지에 보이는 낙랑군 점제현치의 소재지였음을 입증하는 유력한 자료가 되었고, 따라서 오랜 기간 학자들 사이에 문제가 되어 왔던 열수의 위치에 최후의 결정을 부여하였던 것이다. 열수는 󰡔한서󰡕 지리지, 樂浪郡 呑列縣條에 “分黎山, 列水所出, 西至秥蟬入海, 行八百二十里”라고 하였기 때문에 그것은 지금의 龍岡郡(즉 秥蟬)에 이르러 黃海로 들어가는 대동강임이 틀림없음이 판명되었다. 원문주2▶더욱이 이에 대해서는 故今西 박사의 「洌水考」[2] 라는 상세한 논문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보는 것이 좋으나, 여하튼 구래의 列水 大同江說은 저 古碑의 발견에 의해 이제는 의심할 여지가 없어졌다. 단지 학자들 사이에 의연히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한대의 패수로 당시의 패수가 지금의 대동강이 아니었다는 것만은 앞의 사실로 명확하게 되었지만, 그렇다면 그것은 지금의 압록강이냐 청천강이냐가 의문이다. 그러나 패수문제도 조만간 결정되어야 할 운명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되지만 현 학계는 이 문제에 대해 지나치게 침묵을 지키고 있다. 余는 일찍이 「眞番郡考」 󰡔史學雜誌󰡕 第40編 第5號. 를 草稿할 때 이 패수 문제를 언급하면서 약간 한마디를 덧붙인 적이 있고, 그리고 그에 관한 충분한 고증을 他日로 기약하였는데, 이번에는 조금 상세하게 卑見을 진술하여 삼가 諸賢의 敎正을 바라고자 한다.




































본문2: (2)


그러면 패수문제를 해결하려 함에 있어서 제일 먼저 학자의 주의를 야기하고 해석을 요하는 곳은 **사기** 조선전의 다음 기사이다.
쪽수▶P112-2그러면 패수문제를 해결하려 함에 있어서 제일 먼저 학자의 주의를 야기하고 해석을 요하는 곳은 󰡔사기󰡕 조선전의 다음 기사이다.
(A)自始全燕時, 嘗略屬眞番朝鮮, 爲置吏築鄣塞, (B)秦滅燕, 屬遼東外徼, (C)漢興, 爲其遠難守, 復修遼東故塞, 至浿水爲界, 屬燕, (D)燕王盧綰反入匈奴, 滿亡命聚黨千餘人, 魋結蠻夷服而東走出塞, 渡浿水, 居秦故空地上下鄣, 稍役屬眞番朝鮮蠻夷及故燕齊亡命者, 王之, 都王險
쪽수▶P112-3(A)自始全燕時, 嘗略屬眞番朝鮮, 爲置吏築鄣塞, (B)秦滅燕, 屬遼東外徼, (C)漢興, 爲其遠難守, 復修遼東故塞, 至浿水爲界, 屬燕, (D)燕王盧綰反入匈奴, 滿亡命聚黨千餘人, 魋結蠻夷服而東走出塞, 渡浿水, 居秦故空地上下鄣, 稍役屬眞番朝鮮蠻夷及故燕齊亡命者, 王之, 都王險
위에서 余(여)가 부호를 매긴 것과 같이 이를 네 단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즉 A단은 戰國時代(전국시대)의 大燕(대연)이 일찍이 조선과 진번을 略屬(약속)하였고 그곳에 관리를 두어 鄣塞(장새)를 쌓았다고 하는 것, B단은 秦(진)이 燕(연)을 멸하고 그 영토를 점유하고 나서 진번과 조선을 요동의 외요에 직속시켰다고 하는 것, C단은 漢(한)이 秦(진)을 대신하여 일어나자 그곳(진번조선)이 멀고 지키기 어렵다는 이유로 다시 요동고새를 수리하고 물러나서 패수를 경계로 하였으며, 그 이남의 조선진번도 (명의상) 燕(연)에 속하게 하였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 D절은 漢(한)의 燕侯(연후) 盧綰(노관)이 漢(한)을 배반하고 흉노로 도망가자 燕人(연인) 滿(만)(**魏略(위략)**에는 衛滿(위만)으로 보인다)이라고 하는 자가 또한 망명하여 도당 천여인을 모아 蠻夷人(만이인)(조선인)의 풍모를 하고 東走(동주)하여 塞(새)를 나와 浿水(패수)를 건넜으며, 秦(진)의 故空地(고공지)였던 上鄣下鄣(상장하장)에 거하였고 그곳에서 진번조선인과 옛날 燕齊(연제)방면에서 망명해 온 자들을 점점 役屬(역속)하여 마침내 왕이 되어 王險(왕험)에 도읍하였다는 것이다.
쪽수▶P112-4위에서 余가 부호를 매긴 것과 같이 이를 네 단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즉 A단은 戰國時代의 大燕이 일찍이 조선과 ▶P113-1 진번을 略屬하였고 그곳에 관리를 두어 鄣塞를 쌓았다고 하는 것, B단은 秦이 燕을 멸하고 그 영토를 점유하고 나서 진번과 조선을 요동의 외요에 직속시켰다고 하는 것, C단은 漢이 秦을 대신하여 일어나자 그곳(진번조선)이 멀고 지키기 어렵다는 이유로 다시 요동고새를 수리하고 물러나서 패수를 경계로 하였으며, 그 이남의 조선진번도 (명의상)燕에 속하게 하였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 D절은 漢의 燕侯 盧綰이 漢을 배반하고 흉노로 도망가자 燕人 滿(󰡔魏略󰡕에는 衛滿으로 보인다)이라고 하는 자가 또한 망명하여 도당 천여인을 모아 蠻夷人(조선인)의 풍모를 하고 東走하여 塞를 나와 浿水를 건넜으며, 秦의 故空地였던 上鄣下鄣에 거하였고 그곳에서 진번조선인과 옛날 燕齊방면에서 망명해 온 자들을 점점 役屬하여 마침내 왕이 되어 王險에 도읍하였다는 것이다.
이들 **사기**의 기사는 즉 진번조선과 燕(연), 秦(진), 漢(한) 삼대의 역사지리적 관계와 위만조선의 입국 유래를 서술한 것이지만, 이곳에 이미 패수의 명칭이 나오고 있다. 패수가 요동과 조선(낙랑)의 경계가 되게 된 것은 漢初(한초)부터이고, 그보다 이전의 燕秦(연진) 시대에는 패수를 넘어 그 이남의 어떤 지점에서 조선과 경계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상기 C절에 “漢興, 爲其遠難守...至浿水爲界”라고 하였고, 또한 다음 D절중에 “滿...東走出塞, 渡浿水, 居秦故空地上下鄣云云”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추측할 수 있다. 이 秦(진)의 ‘故空地上下鄣’이라고 하는 것은 물론 패수 유역에서 그 이남의 어떤 지점에 이르는 사이에 두어졌던 상하 두 곳의 鄣塞(장새)로 해석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 그곳은 실로 燕(연)이 앞서 진번조선을 略屬(약속)하여 관리를 두어 鄣塞(장새)를 쌓았다고 하는 그 鄣塞(장새)임이 틀림없고, 秦代(진대)의 소위 遼東外徼(요동외요)(설명, 밑에 보인다)라는 것도 즉 그것을 가리키는 것일 것이다. 上下鄣(상하장) 사이를 특히 “故空地(고공지)”라고 한 것은 그곳이 원래 일종의 완충지대로 사람을 거주시키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外徼(외요)란 즉 外界(외계) 혹은 外塞(외새)의 뜻으로 故(고) 今西(금서) 박사는 이에 대하여 **史記(사기)** 司馬相如傳(사마상여전)의 “南至䍧牱江爲徼”라는 곳의 索隱注(색은주)에 “張揖云徼塞也, 以木柵水爲蠻夷界”라고 하는 것을 인용하여4) “外徼(외요)란 郡(군) 밖으로 나가 蠻夷(만이)와의 사이에 목책을 만들고 병사를 주둔시켜 蠻夷(만이)를 鎭撫(진무)하며 그 侵寇(침구)를 차단하는 塞(새)이다. 후대의 鳳凰城(봉황성)과 같이 이것과 비슷한 것일 것이다”고 해석하였는데, 매우 좋은 견해라고 생각한다. 여하튼 燕秦(연진)시대에 요동군과 조선국(箕氏(기씨)의 사이에는 일종의 완충지대(실은 조선의 침구를 차단하기 위한 방어지대)를 설치하여 그 일부분을 요동군의 內界(내계)로 하고 다른 한쪽을 外界(외계)로 한 것 같다. 이처럼 요동군과 조선군의 사이에 내외 二界(이계)가 있었다고 한다면, 그 내외 이계는 어디였을까? 이는 패수 문제를 해결함에 매우 중요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쪽수▶P113-2 이들 󰡔사기󰡕의 기사는 즉 진번․조선과 燕․秦․漢 三代의 역사지리적 관계와 위만조선의 立國由來를 서술한 것이지만, 이곳에 이미 패수의 명칭이 나오고 있다. 패수가 요동과 조선(낙랑)의 경계가 되게 된 것은 漢初부터이고, 그보다 이전의 燕秦時代에는 패수를 넘어 그 이남의 어떤 지점에서 조선과 경계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상기 C절에 “漢興, 爲其遠難守…至浿水爲界”라고 하였고, 또한 다음 D절중에 “滿…東走出塞, 渡浿水, 居秦故空地上下鄣云云”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추측할 수 있다. 이 秦의 ‘故空地上下鄣’이라고 하는 것은 물론 패수유역에서 그 이남의 어떤 지점에 이르는 사이에 두어졌던 상하 두 곳의 鄣塞로 해석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 그곳은 실로 燕이 앞서 진번조선을 略屬하여 관리를 두어 鄣塞를 쌓았다고 하는 그 鄣塞임이 틀림없고, 秦代의 소위 遼東外徼(설명, 밑에 보인다)라는 것도 즉 그것을 가리키는 것일 것이다. 上下鄣 사이를 특히 “故空地”라고 한 것은 그곳이 원래 일종의 완충지대로 사람을 거주시키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外徼란 즉 外界 혹은 外塞의 뜻으로 故今西박사는 이에 대하여 󰡔史記󰡕 司馬相如傳의 “南至䍧牱江爲徼”라는 곳의 索隱注에 “張揖云徼塞也, 以木柵水爲蠻夷界”라고 하는 것을 인용하여 「洌水考」(註152와 같음) “外徼란 郡 밖으로 나가 蠻夷와의 사이에 목책을 만들고 병사를 주둔시켜 蠻夷를 鎭撫하며 그 侵寇를 차단하는 塞이다. 후대의 鳳凰城과 같이 이것과 비슷한 것일 것이다”고 해석하였는데, 매우 좋은 견해라고 생각한다. 여하튼 燕秦時代에 요동군과 조선국(箕氏)의 사이에는 일종의 완충지대(실은 조선의 침구를 차단하기 위한 방어지대)를 설치하여 그 일부분을 요동군의 內界로 하고 다른 한쪽을 外界로 한 것 같다. 이처럼 요동군과 조선군의 사이에 內外 二界가 있었다고 한다면, 그 내외이계는 어디였을까? 이는 패수문제를 해결함에 매우 중요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본문3: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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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3(생략) 되지 못한다-그러나 稷山 舊邑에서 直北 約 8~9里 되는 곳에 ‘都下里’(혹은 都監里ㆍ忠南 天安郡 成歡面)란 里名과 都下里에서 西北 약 6里되는 곳 즉 安城川 合流處에 ‘安宮▶P14-1里’(或云宮里ㆍ同上)란 里名과 其外 同川 流域인 振威郡 芙蓉面의 ‘坪宮里’(一云 上宮里) ‘新宮里’(一云 下宮里) 등의 里名이 있는 것은 크게 注意할 必要가 있다. 이들 洞里에서 아직 그럴듯한 遺跡과 遺物은 發見하지 못하였지만, 그 里名은 必然 尋常하지 않은 久遠한 由來와 歷史를 가지고 있는 듯하니, 속히 말하면, 稷山 舊邑의 北 安城川 流域은 이 等地를 國都로 삼던 어느 時代 즉 辰國時代 내지 그 正統인 馬韓時代의 宮闕都市가 있던 곳이 아닌가.
이병도 삼한-1.png
쪽수▶P14-2
이병도 삼한-1.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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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4-3그리하여 그러한(都字 宮字 붙은) 里名이 傳稱되어 오는 것이 아닌가, 최근 物故한 中樞院 囑託 大原利武氏도 일찍이 이 地名에 注意를 拂하여 同 地域을 馬韓時代의 都邑 所在地로 推定한 일이 있는데, 이 점에 있어서는 그의 意見과 전혀 一致하며, 오직 나는 馬韓時代뿐만 아니라, 그 以前 辰國時代로부터의▶P15-1都闕 소재지로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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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4: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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辰國은 저 朝鮮(樂浪) 眞番 臨屯의 諸部族과 한 가지 古代 半島內의
테스트입니다
一國으로 일찍이 中國에 알려진 著名한 나라이어니와, 辰國의 名이 文獻
테스트입니다
上에 나타나기는 이미 󰡔史記󰡕, 󰡔漢書󰡕의 朝鮮傳에서부터이다. 󰡔漢
테스트입니다
書󰡕 朝鮮傳은 말할 것도 없이 󰡔史記󰡕 朝鮮傳을 거의 그대로 轉載하다시피한
테스트입니다
것이지만, (간혹 거기에 修辭上의 異同과 添削이 있음은 別問題로 삼고

















본문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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辰國은 저 朝鮮(樂浪) 眞番 臨屯의 諸部族과 한 가지 古代 半島內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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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國으로 일찍이 中國에 알려진 著名한 나라이어니와, 辰國의 名이 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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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에 나타나기는 이미 󰡔史記󰡕, 󰡔漢書󰡕의 朝鮮傳에서부터이다. 󰡔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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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 朝鮮傳은 말할 것도 없이 󰡔史記󰡕 朝鮮傳을 거의 그대로 轉載하다시피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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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지만, (간혹 거기에 修辭上의 異同과 添削이 있음은 別問題로 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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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 秥蟬縣 古碑 발견의 전말 및 비문에 관해서는 昭和 2년(1927) 3월 朝鮮總督府 발행의 古蹟調査特別報告第4 冊󰡔樂浪郡時代の遺蹟󰡕 本文을 참고하길 바란다.
  2. 京城帝國大學 法文學會 第2部 論文集 朝鮮支那文化の研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