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문종왕과 장원정 창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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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민석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9월 21일 (토) 00:02 판 (본문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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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문종왕과 장원정 창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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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원제목 高麗 文宗王과 長源亭 創構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6 발행기관 진단학회
저자 이병도 역자 집필일자 게재연월 1936년11월
시작쪽 148쪽 종료쪽 156쪽 전체쪽 009쪽 연재여부 단독 범주 논문 분야 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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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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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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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1: 1


고려의 문종인물(제11대)은 제6대 성종인물과 한가지, 아니 그 이상으로 태조의 유업을 수성한 영민하고 총명한 임금으로서, 재위 37년간 안으로 민정에 힘쓰고 관제를 혁정(革整)하고 인재를 등용하고 유불을 숭장하여 치적이 크게 늘어나고, 또한 바깥으로 송(宋), 요(遼) 각국과의 교통도 빈삭(頻數)하여 제반 문물에 있어 진보 발달을 이룬―말하자면 고려의 문화는 이때 이르러 최고의 수준에 이른 관(觀)이 있거니와, 동시대의 사상 및 신앙의 일 특징을 지어가지고 있던 지리도참의 설도 일반 문운(文運)의 진전과 보조를 같이하여 이때 상당한 걸음을 걷고 있었으며 따라 종종의 비기 도서를 이용 혹은 조작하는 이 방면의 전문가들이 나타나 각각 기이한 언설로 신총(宸聰)을 어지럽게 한 일이 있었다. 최자(崔滋)의 보한집(補閑集)서적(상권)을 보면 문종조의 유신 이의(李顗)에 관한 기사에 初顗在諫垣 時 陰陽者流 各執圖讖 互言裨補 上間之 顗封曰 陰陽本乎大易 易不言地理裨補 後世詭誕者曲論之 以至成 文字 惑衆人 況圖讚荒虛怖妄 一無可取 上心然之”라고 한 것이 있다. 의(顗)는 곧 문종의 왕후 아버지인 이자연(李子淵)인물의 세 번째 아들이요 예종조의 유명한 청평산인(淸平山人) 이자현(李資玄)인물의 아버지로 유불에 겸통한 학자였고 문종 23년에 그가 춘주(지금의 춘천) 도(道) 감창사(監倉使)로 있었을 때에 같은 주 청평산의 승경(勝境)을 사랑하여 보현원(普賢院)공간(훗날 그 아들 새현(賽玄)이 그곳에 은거하여 문주원(文殊院)이라 개칭함)이란 사원을 둔 일도 있거니와금석총람 상, 춘주 문주원 중조비(重條碑) 위 기사에 보이는 사실은 물론 문종 시대에 속한 것일지며 동시에 ‘상(上)’이라 한 것은 문종을 지칭한 말일 것이니, 이는 그때의 음양도참가들의 활약이 어떠하였던 것과 또 그들에 대한―이의와 같은―유자(儒者)들의 태도가 어떠하였던 것을 보여주는 자못 귀중한 사료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단 거기 이의의 지리도참 탄망설(誕妄說)에 대하여 “上心然之”라고 한 것은 왕의 그 당시의(일시적) 기분과 태도를 표현한 말에 불과한 것이요 결코 왕의 종시일관한 심리의 표시는 아니다. 문종은 사상 신앙의 사람으로 태조 및 다른 왕과 같이 부도음양 지리도참의 설을 혹신함이 심상치 아니하였던 까닭이다. 예종조의 명신(名臣) 오연총(吳延寵)인물의 예종을 간(諫)하는 말 가운데 “以文宗明睿猶惑術數”라고(여사(麗史)서적 오연총전) 함과 같이, 문종은 영명의 주로서 비과학적 비실리적 술수(지리도참)사상의 지배를 받는 임금의 하나이다(문종의 법력 지력에 대한 신념은 태조 이래의 전통적 사상이라고 할 수 있지만, 또한 당시 부도음양가의 설에 자극 영향된 바도 많았던 것이다) 법력에 의하여 국가의 복리를 증진하려 하여 같은 왕 10년에 성남 덕수현(德水縣)의 땅지금의 개풍군 진봉면 흥왕리를 복(卜)하여 흥왕사(興王寺)란 대가람(大伽藍)을 창기한 것은 저명한 사실이지만, 또한 일방으로(도참설에 의하여) 왕성한 지력을 빌어 국가의 기업(基業)을 연장하려 하여 곳곳에 땅을 상복(相卜)하여 신이경(新離京), 신이궁(新離宮)을 경영하고 때를 따라 순주(巡住)를 행한 일이 있었다. 이 글에서 말하려는 병악(餅岳)의 장원정(長源亭)공간을 비롯하여 남경(지금의 경성)의 설치 및 그 신궁, 서경(지금의 평양)의 서경기(西京畿) 설치 및 그 좌우 궐(闕)은 다 문종왕 때에 된 연기경궐(延基京闕)로서 이후 역대 모든 왕의 이 방면에의 건궐(建闕)·순주(巡住)·기타 시설의 선구를 지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문종의 남경궁 서경기 및 서경 좌우 궐에 대하여는 이미 다른 글에 상술한 바가 있으므로 여기에는 다시 논의하지 아니하고 오직 장원정에 대하여 창구의 사정 및 그 지리 유지(遺址) 등에 대하여 조사 고찰한 바를 논술하려 한다.
쪽수▶P148-1高麗의 文宗(第十日代)은 第六代 成宗과 한가지, 아니 그 以上으로 太祖의 遣業을 守成한 英明의 主로서, 在位 三十七年間 內로 民政에 힘쓰고 官制를 革整하고 人才를 登用하고 儒佛을 崇獎하야 治績이 크게 늘어나고, 또한 外로 宋遼各國과의 交通도 頻數하야 諸般 文物에 있어 進步 發達을 致한―말하자면 高麗의 文化는 이때에 이르러 最高의 域에 達한 觀이 있거니와, 同時代의 思想 及 信仰의 一特徵을 지어가지고 있든 地理圖讖의 說도 一般 文運의 進展과 步調를 같이하여 이때에 相當한 거름을 것고 있었으며 따라 種種의 秘記 圖書를 利用 혹은 造作하는 이 方面의 專門家들이 出하야 各各 奇異한 言說로 宸聰을 어지럽게 한 일이 있었다. 崔滋의 補閑集(卷上)을 보면 文宗朝의 儒臣 李顗에 關한 記事에 「初顗在諫垣 時 陰陽者流 各執圖讖 互言裨補 上間之 顗封曰 陰陽本乎大易 易不言地理裨補 後世詭誕者曲論之 以至成 文字 惑衆人 況圖讚荒虛怖妄 一無可取 上心然之」라고 한 것이 있다. 顗는 곧 文宗의 后父인 李子淵의 第三子요 睿宗朝의 有名한 淸平山人 李資玄의 父로 儒佛에 兼通한 學者이었고 文宗 二十三年에 그가 春州(今春川) 道監倉使로 있었을 때에 同州 淸平山의 勝境을 사랑하여 普賢院(後에 其子 賽玄이 그곳에 隱居하야 文殊院이라 改稱함)이란 寺院을 둔 일도 있거니와(金石總覽上, 春川文殊院重條碑) 右記事에 보이는 事實은 勿論 文宗 時代에 屬한 것일지며 同▶P149-1時에 「上」이라 한 것은 文宗을 指稱한 말일 것이니, 이는 그때의 陰陽圖讖家들의 活躍이 어떠하였든 거와 또 그들에 對한―李顗와 같은―儒者들의 態度가 어떠하였든 것을 보여주는 자못 貴重한 史料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但 거기 李顗의 地理圖讖誕妄說에 對하야 「上心然之」라고 한 것은 王의 그 當時의(一時的) 氣分과 態度를 表現한 말에 不過한 것이요 決코 王의 終始一貫한 心理의 表示는 아니다. 文宗은 思想 信仰의 人으로 太祖 및 其他의 王과 같이 浮屠陰陽地理圖讚의 說을 惑信함이 尋常치 아니하였든 所以다. 睿宗朝의 名臣 吳延寵의 睿宗을 諫하는 말 가운데 「以文宗明睿猶惑術數」라고 (麗史 吳延寵傳)함과 같이, 文宗은 英明의 主로써 非科學的 非實利的 術數(地理圖讖)思想의 支配를 받는 님금의 하나이다(文宗의 法力 地力에 對한 信念은 太祖 以來의 傳統的 思想이라고 할 수 있지만, 또한 當時 浮屠陰陽家의 說에 刺戟 影響된 바도 만헛든 것이다) 法力에 依하야 國家의 福利를 增進하려 하야 同王 十年에 城南 德水縣의 地(今開豐郡 進鳳面 興旺里)를 卜하야 興王寺란 大伽藍을 創起한 것은 著名한 事實이지만, 또한 一方으로(圖讖說에 依하야) 旺盛한 地力을 빌어 國家의 基業을 延長하려 하야 處處에 地를 相卜하야 新離京 新離宮을 經營하고 때를 따라 巡住를 行한 일이 있었다. 本稿에 말하려는 餅岳의 長源亭을 비롯하야 南京(今京城)의 設置 及 其新宮, 西京(今平壤)의 西京畿 設置 및 그 左右闕은 다 文宗王 時에 된 延基京闕로서 以後 歷代 諸王의 이 方面에의 建闕·巡住·其他 施設의 先驅를 지었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文宗의 南京宮 西京畿 及 西京 左右闕에 就하여는 이미 他稿에 詳述한 바가 있음으로 여기에는 再論치 아니하고 오즉 長源亭에 就하야 創構의 事情 및 그 地理 遺址 等에 對하야 調査 考察한 바를 論述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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