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준

North Korea Humanities

김지선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6월 17일 (월) 17:21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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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명(한자명)
이태준.jpg
출처 : 위키백과, 우리모두의 백과사전
 
한글명 이태준[1] 한자명 李奎泰 영문명 가나명 이칭 상허(尙虛), 상허당주인(尙虛堂主人),조선의 모파상
성별 남성 생년 1904년 몰년 1978[2] 출신지 강원도 철원 전공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대한민국의 소설가이자 완성도 높은 소설로 '조선의 모파상'이라는 별명이 있다. 또한 '한국 근대 단편 소설의 완성자'라고 불린다. 소설 뿐만아니라 문장가로서도 유명하고 이태준의 소설은 문장과 구성이 뛰어나다.[3]


생애


출생과 성장

1904년 11월 4일 강원도 철원군 묘장면 산명리공간에서 아버지인 이창하인물와 어머니 순흥공간 안시인물의 1남 2녀 중 장남으로 출생.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블라디보스토크공간에 갔다가 아버지 사망 후 고향에 돌아와 철원봉명학교기관 졸업하고, 1921년 휘문고보기관에 입학했으나 1924년 동맹휴교 주모자로 퇴학당했다. 1927년 도쿄조치대학(上智大學)기관 예과에 입학했다가 1928년 중퇴했다. 1933년 구인회단체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1939년에는 『문장』을 주관하기도 했다. 1941년 제2회 조선예술상을 수상했다. [4]


등단에서 광복

1925년 일본에서 단편소설 〈오몽녀〉를 《조선문단》에 투고하여 문단에 처음으로 나섰다. 1927년 4월 도쿄 조치대학에 입학하지만 어려운 고학생활을 이겨내지 못하여 동년 가을 자퇴하였다. 귀국하여 모교와 여러 신문사 등에 자리를 알아보았으나 실패하고 한동안 방황하였다. 1929년 개벽사에 입사하여 《학생》이나 《신생》 등의 편집에 관여하는 한편 《어린이》에 많은 동화를 발표하였다.

1930년 5월 이화여전 음악과를 갓 졸업한 이순옥과 결혼하여 가정을 꾸렸다. 작가로서의 본격적인 활동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1931년 《중외일보》 기자로 입사했으며 이후 신문폐간과 함께 이름을 뜯어고친 《조선중앙일보》의 학예부장이 되었고 이화여전·이보·경보 등에 작문교사로 출강하였다. 이 시기를 이태준 문학의 전성기로 보고 있다. 이태준의 대표작의 대부분이 이때에 쓰여졌으며 구인회 구성에도 앞장서는 등 사회적 위상도 드높아졌다. 1933년에서 1937년까지의 작품을 통해 이태준은 '비경향문학이 낳은 최대의 작가'라는 평가를 받기 이르렀다. 그러나 1937년에 접어들어 시국이 급변하면서 이태준은 지금까지의 자신의 작품을 몽땅 습작이라 낮추어보면서 새로운 경향의 작품의 창작을 다짐하였다.

1939년 《문장》의 창간에 관여하고 책임편집을 맡으면서 식민지 말기 조선문학을 지키는 데 남다른 공헌을 했다. 이 잡지를 중심으로 이태준은 이병기의 주도 아래 고전부흥에 진력하며 의고주의적 취향을 표출하기도 하였다.

1940년대에 접어들면 이태준도 몇몇 친일적 글을 발표한다. 1943년 고향인 철원 근처로 소개하였다 그곳에서 해방을 맞이하였다.[5]


광복

광복 후에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의 경향파 문학과는 거리를 두었던 이전까지의 경향과는 달리 조선문학가동맹과 민주주의민족전선 등 좌파 계열에서 활동했으며, 한국 전쟁 이전인 1946년경에 월북하였기에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의 행적이나 세상을 떠난 시기가 분명히 알려지지 않았다.

그곳에서 이태준은 김일성을 영웅화하라는 노동당의 지시를 정면으로 비판, 거부했다는 이유로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1956년 숙청되어 함흥으로 추방, 함흥노동자신문 교정원으로 배치되었으며, 이후 다시 함흥콘크리트블록공장의 파고철 수집 노동자로 배치되었다. 1964년 조선노동당 중앙당 문화부 창작실 전속작가로 복귀하였으나, 몇 년 후 강원도 장동탄광 노동자지구로 추방, 그 곳에서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사망 시기도 1968년경을 비롯한 196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까지 다양한 주장이 있었으나, 현재는 1970년경이 가장 유력한 사망 시기로 추정되고 있다. 2000년대 들어 탈북 작가인 최진이가 이태준의 딸들이 쓴 일기를 보았다며, 이들의 가족사를 증언한 바 있다. 지금까지 대한민국에 알려진 그의 마지막 행적은 66살이던 1969년 강원도 장동탄광 노동자 지구에서 사회보장으로 부부가 함께 살고 있는 모습만이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생가는 전쟁으로 소실되었고, 현재 생가는 철원읍 율이리 용담마을에 밭으로 이용 중이나 생가터임을 알리는 작은 팻말이 서 있다. 서울에서 거주하던 성북구의 자택은 서울시 민속자료 제11호로 지정되어 있다. 지금은 1999년 외종손녀 조상명이 1933년 이태준이 지은 당호인 수연산방을 내걸고 찻집을 열었다.[6]





연구


소설의 대가

이태준에 대한 문학적 평가는 단편문학의 대가라는 말로 수렴된다. 민충환은 "김동인이 주춧돌을 놓고 현진건이 갈고 닦은 한국현대 단편소설을 완성한 대가"라고 하였다. 소설의 기교에 관하여 김기림은 이태준을 "우리들이 가진 가장 우수한 스타일리스트"로 평하였으며, 최재서는 "인간상을 묘출하는 데 ... 명확한 수완을 가진 작가"라 칭하며 "스케치적 필치로 그 인물의 말이나 행동을 점점이 터치하여 가는 동안에 어언간 선명한 인간상이 드러난다"고 하였다. 박태원은 "벌써 막연히 일가를 이룬 그 자신의 독특한 예술혼을 가진 극히 존중을 받아 마땅한 작가"라고 평한 바 있다. 역사적 현실을 세련된 문학적 기법과 잘 어울려서 완성도 높은 예술작품으로 만들었다고 평가된다. 초기 소설들은 정갈한 외장이나 서정적 분위기 속에서 궁핍한 시대의 단면을 예민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태준의 예술적 성취는 미적기교가 완숙기에 접어드는 1930년대 후반 작품에서 그 진가를 한껏 발휘한다. 특히 1930년대 말 발표된 〈까마귀〉, 〈복덕방〉, 〈밤길〉 등 작품은 한국 소설문학의 가치를 드높이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월북 후의 작품은 하나같이 남한측의 잔학성을 고발하는 한편, 이를 통해 적극적인 투쟁의지를 고취하는 내용이다. 한국전쟁기의 작품에는 반미적 성향이 특히 강하게 나타나 있다. 북한체제에 부응하는 것 외에도 이태준 자신이 평소 가지고 있던 서양인에 대한 부정적 견해가 작용되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이 소설들은 북한에서 적극 수용되지 못하였고, 이태준의 숙청과 더불어 북한 문학사에서 사라져버렸다.[7]





데이터


TripleData

Source (A) Target (B) Relationship
Person: 이창하 Person: 순흥 안시 A hasSpouse B
Person: 이창하 Person: 이태준 A hasSon B
Person: 이태준 Institution: 철원봉명학교 A gradutes B
Person: 이태준 Institution: 휘문고보 A takesCourseAt B
Person: 이태준 Institution: 도쿄조치대 A takesCourseAt B
Person: 이태준 Group: 구인회 A isMemberOf B
Person: 이태준 Person: 이순옥 A hasSpouse B



Timeline



Network Graph






참고자원






주석


  1. 본명은 이규태
  2. 정확하지 않은 예상
  3. 나무위키 이태준
  4. [네이버 지식백과] 이태준 [李泰俊] (한국현대문학대사전, 2004. 2. 25., 권영민)
  5. 위키백과
  6. 위키백과
  7.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