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남철

North Korea Humanities

김지선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6월 17일 (월) 17:18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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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남철(申南徹)
사진-1-신남철1939.jpg
출처 : 신문 지면에 실린 신남철[1]
 
한글명 신남철 한자명 申南徹 영문명 가나명 이칭
성별 생년 1907년 몰년 ?년 출신지 대한제국 한성부 전공 철학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일제강점기 당시 사회주의 계열의 철학자로 활동하며 해방 이후 북한에서 김일성종합대학기관교수, 법제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자 학자.[2]


생애


출생과 진학

190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중앙고등보통학교기관를 졸업하고, 1926년 3월 경성제국대학기관예과를 거쳐 1928년 법문학부 철학과에 입학하였다. 1931년 졸업한 뒤에 경성제국대학 철학과 조수로 일하였는데, 이 무렵 조선사회사정연구회단체회원이 되었고,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미야케 시카노스케인물 교수의 지도를 받아 마르크스 철학을 연구하였다. 그 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학회지에 헤겔과 관련된 논문을 내기도 하였다.[3]


학술과 참여활동

1935년에는 문예비평에도 참여하였고 1937년에는 논문을 여러차례 기고했었던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학회지인 『신흥』에 「역사철학의 기초론」을 또다시 발표하였다. 기자생활을 하다가 일제 말 경성제국대학 조교수를 지냈으며, 그 뒤에 중앙고등보통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였다. 1945년 8월 해방이 된 후 조선학술원 서기국 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이때 민족문화연구소 연구원으로도 활동하였다. 같은 해 12월 조선독립동맹 환영준비위원회단체에 참여하여 선전부원이 되었다.[3]

보성전문학교 연구부에서 주최한 강연회에서 ‘최근 철학의 위기’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였다. 1934년에는 「실존철학의 의의」와 「조선연구의 방법론」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같은 해 4월에는 제2회 철학연구회 공개강연회에 참석하여 ‘현상학적 세계관’을 주제로 강연을 펼쳤다.[3]
1946년 2월 좌익단체의 통일조직인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대회에 참석하였고, 여기에서 중앙위원으로 임명되었다. 그 후 남조선신민당에 가입하였고, 학술원 기관지 『학술』에 논문 「역사의 발전과 개인의 실천」을 발표하였다. 이 무렵 개최된 문학자대회에서 ‘민주주의와 휴머니즘’이라는 특별보고를 하였고, 1947년 2월 조선과학자동맹 결성에 참여하여 ‘현하의 과학 정세와 과학자의 임무’를 발표하였다.[3]

1948년 총 3권으로 이루어진 '역사철학서적'을 출간하였다. 같은 해 4월에 있던 남북회담을 지지하는‘남북회담 지지 108인 성명’에 참여하였다. 같은 해 8월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 인민대표자대회에서는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57년에 다시 한 번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재선되었으며, 1957년 9월 법제위원회 위원에 선임되었다.[3]


철학의 형성과 확립

1926 신남철은 대학에 입학하여 처음으로 유물변증법을 접한다.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철학을 민족 해방의 투쟁을 위한 자신의 철학으로 선택하고 본격적으로 공부하며 시야를 넓혀간다. 신남철의 핵심사상인 신체의 변증법은 마르크스, 헤겔, 막스 라파엘이라는 철학적 스승들을 이해해 나가면서 형성된다.[4]

신남철은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하여 철학과 조수로 일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마르크스철학을 공부하고 학자의 길을간다. 그리고 신헤겔주의를 비판하면서 자신의 철학적 소양을 넓혀간다.[5]
1933 대학원을 마친 이후로 동아일보기관 학예부 기자로 근무하면서 신남철의 문적 행적은 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사상을 이해하면서 전통적인 철학적 원리에 대해 탐구하고 헤겔철학의 중심 개념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는다. 또한 철학적 원리에 대한 탐구와 더불어 번역 활동도 하며 다양한 사상가들을 공부하여 시야를 넓혀간다. 현실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문예이론, 조선학과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을 보인다. 그러나 당시의 모순을 직접 비판하지 못하고 독일이나 이탈리아 등 제국주의를 비판하면서 자신의 속내를 감춘다. 그리고 사진의 이론과 논리를 사회에 적용하면서 독자적으로 사상을 확립해간다.[6]
1935년부터 1937년까지 신남철은 자신의 주장을 점점 강력하게 피력하고 비평에 참여하며 세계시민적 시야를 넓혀가면서 '인식과 신체 그리고 역사서적'를 발표하여 자신의 철학을 확립한다. 현실문제에 대한 관심을 넓혀가던 신남철은 자기주장을 점점 더 강하게 해나가면서 논쟁에 참여하고 문예비평에도 가담한다. 이 시기는 신남철이 자신의 독자적 철학 사상을 확립하는 시기이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논쟁의 과전에서 문예이론에 자신만의 독자적인 방식으로 변증법을 적용하고, 랑케, 톨스토이, 괴테, 슈펭글러를 소개하면서 그 이론을 분석하고 비판한다. 그리고 이 전에 실존주의와 신헤겔주의를 학문적 입장에서 소극적으로 비판하는데서 더 나아가 대상을 확정하여 직접 파시즘을 강도 높게 비판하고 전쟁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의 입장에서 인식론을 정초한 막스 라파엘을 접하게 되었고 이를 현실에 적용하면서 신체의 변증법을 완성, 발표한다.[7]

신남철의 철학사상은 막스 라파엘의 영향을 받았다. 특히 신남철은 막스 라파엘로부터 인식론의 많은 부분을 차용한다. 인식론에 있어서 인식능력들 각각의 역할과 기능의 범위가 지식형성의 중요한 요소로 다루어져 왔다. 막스 라파엘에 따르면 이러한 각각의 능력들이 수용, 가공, 표현 단계를 거치면서 발전한다. 신남철은 인식능력들 각각이 세 단계의 과정을 거친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수용, 가공, 표현이라는 인식론적 개념들은 차용한다. 또한 역사적인 생산물에 의하여 시각의 작용범위가 역사적으로 확장 발전되었듯이 개개의 인식능력이 발전한다는 것도 차용한다. 신남철은 인식능력과 대상이 이중적 운동을 통해 역사적으로 발전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역사 속에서 과정을 이루는 인식능력이 발전하는 논리적 이론적 단계를 신남철은 수용, 가공, 표현의 단계를 거쳐서 신체화 되는 과정으로 그려낸다. 신남철은 이 과정에서 막스 라파엘의 신체화라는 개념을 빌려오고 그것으로부터 신체의 변증법이라는 용어를 착안하기에 이른다.[8]


타계

북한에서 대대적으로 일어나던 숙청과정에 휘말려 1956년 8월 전원회의 석상에서 들고 일어난 반김정일 세력들을 숙청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었던 1958년 3월에 열린 제1차 당대표자회에서 자유주의자로 비판을 받았다. 그 후 이로 인한 심적 고통으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3]





연구


마르크스주의와 스승 미야케 시카노스케인물

동아일보 1935년 8월 24일자 이재유 탈옥 및 은닉 사건 기사에 실린 미야케의 사진[9]
마르크스주의는 신남철 사유의 정체성을 구축하는 가장 중요한 기반이었고 이 무기를 평생 갈고 닦았던 것인데, 그에게 처음 이 무기를 손에 쥐어준 이는 경성제국대 교수였던 미야케 시카노스케인물(또는 미야케 로쿠지죠, 三宅鹿之助)라는 인물이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신남철은 반(反)‘제국’적 사유의 토대를 ‘제국’ 대학에서 처음 접한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미야케는 1928년 4월 18일부터 1934년까지 법학부에서 재정학 강좌를 담당했다. 하지만 미야케는 이 수업을 통해 주로 마르크스주의 강의를 했다고 전해진다. 미야케의 영향력은 적지 않아서 신남철은 물론 유진오를 비롯하여 이강국, 최용달, 박문규 등 해방정국의 굵직한 인사들이 모두 그의 수업을 들었으며, 경성트로이카의 핵심 인물 인 이재유와도 깊은 인연이 있었다. 조선공산당재건동맹 사건 당시 이재유가 탈옥했을 때 미야케는 그를 자신의 집에 숨겨주었다 발각되어 급기야 이 일로 파면된다.[10]


신체의 변증법

신남철의 인식은 주체로서의 의식이 현실적 감성계를 주체적으로 파악하면 이 의식의 활동을 대상적 활동으로 파악하는 활동이다. 이 활동을 신남철은 수용, 가공, 표현 그리고 신체화의 단계로 설명한다. 수용된 지각은 가공되고, 가공된 지각은 표현되게 된다. 표혀느이 단계는 신체화의 단계이고 여기에서 사유와 존재, 이론과 실천이 변증법적으로 통일되고 구체성을 획득하게 된다.
인간의 의식은 인식과정에서 통일되고 발전되어가기 때문에 변증법적이다. 육체의 모사가능성은 대상을 수용하고 오성은 그것을 가공하여 표현의 단계인 신체적인 인식에 도달한다. 대상과 육체는 통일되고 인식이 표현의 단계, 신체화의 단계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발전으이 과정을 신남철은 신체의 변증법이라고 한다.[11]





데이터


TripleData

Source (A) Target (B) Relationship
Person: 신남철 Institution: 중앙고등보통학교 A graduates B
Person: 신남철 Institution: 경성제국대학교 A graduates B
Person: 신남철 Institution: 경성제국대학교 A worksAt B
Person: 신남철 Institution: 동아일보 A worksAt B
Person: 신남철 Institution: 김일성종합대학교 A worksAt B
Person: 신남철 Group: 조선사회사정연구회 A isMemberOf B
Person: 신남철 Group: 조선독립동맹 환영준비위원회 A isMemberOf B
Person: 신남철 Person: 미야케 시카노스케 A hasMaster B
Book: 역사철학 Person: 신남철 A creator B
Book: 인식과 신체 그리고 역사 Person: 신남철 A creator B



Timeline




Network Graph






참고자원







주석


  1. 출처 "新建(신건)할 朝鮮文學(조선문학)의 性格(성격)’", 석간 17면 종합, 『동아디지털아카이브』online, 동아일보, 작성일: 1939년 1월 1일. 온라인 참조: 이병태, "붉은 얼굴의 경계인(境界人), 신남철 [길 위의 우리 철학 – 4]", 길위의 우리의 철학, 『시대와 철학』online,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 작성일: 2017년 7월 17일.
  2. 출처 "신남철", 북한의 철학자, 『나무위키』online, 나무위키.
  3. 3.0 3.1 3.2 3.3 3.4 3.5 출처 "신남철-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온라인 참조: "신남철-나무위키", 생애, 『나무위키』online, 나무위키.
  4. 학위논문: 봉기, 「신남철의 철학사상 연구」, 전남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9.2, 25쪽.
  5. 학위논문: 봉기, 「신남철의 철학사상 연구」, 전남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9.2, 29쪽.
  6. 학위논문: 봉기, 「신남철의 철학사상 연구」, 전남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9.2, 36~37쪽.
  7. 학위논문: 봉기, 「신남철의 철학사상 연구」, 전남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9.2, 42쪽.
  8. 학위논문: 봉기, 「신남철의 철학사상 연구」, 전남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9.2, 49~50쪽.
  9. 출처"脫走(탈주)한李載裕(리재유)의劇的活動(극적활동) 京城帝大硏究室官舍(경성제대연구실관사)가 今番(금번)、共產運動(공산운동)의總本營(총본영)", 호외 3면 사회, 『동아디지털아카이브』online, 동아일보, 작성일: 1935년 8월 24일.온라인 참조: 이병태, "붉은 얼굴의 경계인(境界人), 신남철 [길 위의 우리 철학 – 4]", 길위의 우리의 철학, 『시대와 철학』online,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 작성일: 2017년 7월 17일.
  10. 출처 온라인 참조: 이병태, "붉은 얼굴의 경계인(境界人), 신남철 [길 위의 우리 철학 – 4]", 길위의 우리의 철학, 『시대와 철학』online,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 작성일: 2017년 7월 17일.
  11. 학위논문: 봉기, 「신남철의 철학사상 연구」, 전남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9.2, 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