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확

North Korea Humanities

이지원(JBNU2024)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6월 11일 (화) 20:27 판 (제목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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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확 (安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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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580066&cid=46623&categoryId=46623
 
한글명 안확 한자명 安廓 영문명 가나명 이칭 운문생(雲門生)
성별 생년 1886년 몰년 1947년 출신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 전공 국문학자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일제강점기 때, 조선국권회복단 마산지부장, 신천지 편집인 등을 역임하였고, 『조선문학사』 등을 저술하며 국어학, 국문학, 아악 등을 연구한 국학자 · 독립운동가이다.


생애


출생과 성장

1886년 2월 28일 한성부 우대마을에서 중인 출신으로 태어났다. 그는 1895년 수하동소학교에 입학하여 1899년에 심상과, 1901년에 고등과를 졸업했다. 그는 일찍부터 사회운동에 관심을 보였고 1897년 1월 독립문 낙성식에 참여했고 독립협회가 주관한 만민공동회에도 참석해 연설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소학교 교육이 매우 미흡했다고 여겼다. 그는 <조선문학사>에서 당시 수하동소학교의 몇몇 과목은 교재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마음과 행실을 바르게 닦아 수양하는 것을 목표로 삼은 '수신(修身)'이란 과목 만은 마음에 들었으며, 자신은 이때부터 체육에 관심이 많았다고 회고했다. 또한 1902년 3월에 경성관립중학교에 입학했지만 그 이후의 기록은 발견되지 않아서 그가 이 학교를 언제까지 다녔는지 알 수 없다. 그는 이 시기 서구 문명을 소개하는 책들을 보며 사상적 기반을 다졌다. 특히 유길준의 <서유견문(西遊見聞)>과 양계초(梁啓超)의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을 통해 서구 문물과 서양의 정치사상들에 대한 인식을 넓혔다. 또한 그가 <조선 문학사>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그는 이 시기 서북 지방을 주유했다고 한다. 이로 볼 때 그는 평안도에서 교육 계몽운동에 종사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교사로 부임

1907년 가을에 경남 진주의 안동학교 교사로 부임한 그는 1911년 3월에 경남 마산의 창신학교로 직장을 옮겼으며, 1917년 사직할 때까지 이 학교에서 근무했다. 그는 학생들에게 "당장 빨리 걷는 습관부터 가져라. 방안에서 책만 읽다가 나라를 잃어버렸으니, 이 어찌 피눈물 나는 선배들의 모습이 아니냐."며 체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또한 1914년 창신학교에 경남 최초의 축구부와 야구부를 신설했다. 당시 공이 없자 짚공을 만들어 사용했고, 정식 경기에는 선교사들이 구해준 가죽공을 사용했다. 창신학교는 당시 대구 계성학교와 자주 친선경기를 벌였고, 두 학교의 경기는 곧 이 지역의 명물로 자리잡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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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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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


TripleData

Source (A) Target (B) Relationship
Person: 홍길동 Institution: ○○고등보통학교 A graduates B
Person: 홍길동 Institution: ○○대학교 A worksAt B
Person: 홍길동 Group: ○○학회 A isMemberOf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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