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재

North Korea Humanities

전정민(JBNU2024)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6월 10일 (월) 11:02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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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재(李允宰)
이윤재.jpg
출처 : 전통문화포털 이윤재 [1]
 
한글명 이윤재 한자명 李允宰 영문명 Yunjae Lee 가나명 이칭 환산(桓山),한뫼,한메
성별 남성 생년 1888년 몰년 1943년 출신지 경상도 김해도호부 우부면 답곡리 전공 역사학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국어학자, 역사학자
3·1 운동사건을 주동함과 동시에 우리 민족의 역사의식을 높이는 교육자였다.


생애


어린시절

1888년 12월 24일 경상도 김해도호부 우부면 답곡리[2]의 양반가에서 아버지 이용준인물과 어머니 경주 이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6살 무렵 서당에서 한문 공부를 시작하였는데, 총명하고 재능이 뛰어나서 인근 고을까지 소문이 났다고 한다.


3·1 운동에 참여하다

숭덕 학교기관 재직 중이던 1919년 3·1 운동사건이 일어나자 영변 지방의 만세 운동사건을 주도하였다. 이로 인해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직역 3년을 선고 받았다. 이에 공소했으나 공소가 기각 되었고, 이어 상고했으나 1919년 7월 31일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위 혐의에 대해 상고가 기각되어 결국 평양형무소에서 3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는 출옥 후 마산으로 돌아와 있다가 신채호 선생인물의 도움으로 1921년 6월 중국 베이징으로 망명하였고 베이징 대학기관 사학과에 입학했다.


한글과 이윤재

1927년 개명 개구락부 조선어사전 편찬위원단체으로 참가하였고, 민족정신의 보전·계승을 위한 잡지 『한빛』서적을 편집, 발행하였다. 1929년 조선어연구회단체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단체의 집행위원, 1930년 한글맞춤법통일안의 제정위원단체이 되어 국어통일운동의 중진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1931년부터 연희전문학교기관에서 강의를 맡았으며, 이때부터 4년간 매년 여름 지방을 순회하며 한글강습회를 열었다. 1932년에는 조선어학회단체의 기관지 『한글』서적의 편집 및 발행 책임을 맡았으며, 1934년에는 진단학회단체의 창립에 참여하였다. 1935년 감리교신학교기관에서 강의를 맡았으며, 조선어 표준어사정위원회단체의 사정위원이 되었고, 1936년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단체의 편찬전임집필위원이 되었다. 1940년 6월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 결정에 참여하여 조선어 사전 편찬에 필요한 준비 작업을 진행하였다. 1941년 기독 신문사기관 주필로 일하면서 한글 보급과 우리말 사전 편찬에 주력하였다


민족말살 정책과의 충돌

그러나 이윤재를 비롯한 한글학자들의 활동은 당시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사건과 충돌하였다. 결국 1942년 10월 사전 편찬 사업에 종사하던 이윤재를 비롯한 조선어 학회단체 회원들은 함경남도홍원 경찰서기관 형사들에게 피체되었다. 이른바 조선어 학회 사건사건이었다. 일제 당국은 이윤재를 비롯한 조선어 학회단체 회원들에게 "민족 운동의 한 가지 형태로서 소위 어문 운동은 민족 고유의 어문의 정리·통일·보급을 도모하는 하나의 민족 운동인 동시에 가장 심모원려(深謀遠慮)한 민족 독립운동의 점진 형태(漸進形態)이다."라고 하여 「치안 유지법」 제1조의 내란죄를 적용하였다. 이윤재는 함흥 형무소기관에서 복역하던 중인 1943년 12월 8일 새벽, 독방에서 55세의 나이로 옥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