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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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욱 (토론 | 기여)님의 2023년 12월 1일 (금) 15:07 판 (논저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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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도
이병도.jpg
출처 : 위키피디아
 
한글명 이병도 한자명 李丙燾 영문명 Lee Byeong-do 가나명 이칭 두계 斗溪 杜溪
성별 남성 생년 1896년 몰년 1989년 출신지 경기도 용인 전공 한국사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역사학자. 교육행정가. 보성전문학교에서 배운 뒤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 사학급사회학과를 졸업했다. 중앙학교 교원, 조선사편수회 수사관보 등을 지내면서 한국사 관련 논문을 발표했다. 1934년 진단학회를 세우고 우리말로 된 학술지 진단학보를 발행했다. 해방 후 서울대 사학과 교수를 지내며 수많은 한국사학자를 길러냈다. 학술원 원장, 문교부 장관 등을 지냈다.


생애

이하 이병도의 생애에 대해서는 민현구, 이병도: 순수 학구적 자세로 한국사학의 토대를 쌓다, 한국사 시민강좌 제43집, 2008과 동, 두계(斗溪) 이병도(李丙燾)의 수학(修學)과정과 초기 학술활동(學術活動), 진단학보 116, 2012를 참조했다.


출생과 한학 공부

이병도는 1896년 경기도 용인에서 태어났다. 이병도의 집은 상당한 재력을 가진 양반가였다. 부친 이봉구(李봉구)는 충청도 수군절도사를 지낸 전직 무관이었다. 이병도는 6세부터 집안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다. 천자문에서 시작하여 8세에 "통감"을 배우고 한시 습작도 익혀 주위를 놀라게 했다. 이병도의 집은 1907년에 서울로 이사했다. 이병도는 14살인 1910년에 상투 틀고 관을 쓴 모습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한학 수업은 1911년까지 이어졌다. 9년 동안의 수업으로 이병도는 높은 한학 실력을 갖출 수 있었다. 이조판서와 병조판서을 지낸 농재 이익(1629~1690)이 10대조였고, 이익의 손자로 저명한 성리학자인 도암 이재(1680~1746)는 방팔대조였다. 이병도는 10대조의 친필본 "농재일기"와 도암의 유학 관련 저술인 "주형"(10책)을 가장 소중한 애장품으로 소개한 바 있다. 이병도 학문의 가학적 배경을 시사한다.[1]


신식 교육과 보성전문학교

이병도는 서울에 온 해에 어른들 몰래 초등학교 수준의 보광학교에서 1년 남짓 배웠다. 13살 때에는 봉명학교라는 야간 강습소를 역시 어른들 몰래 1년간 다니면서 일어, 한어, 수학 등을 공부했다. 그러다가 15살이 된 결혼 이듬해인 1911년에는 떳떳하게 불교고등학원 예비과에 입학했다. 불교고등학원은 일본인 승려들이 포교 수단을 설치한 사립학교로 영어, 지리, 역사, 수학, 물리, 화학 및 불전을 가르치는 중등학교였다. 이병도는 불교고등학원에서 1년간 배웠는데 교사가 모두 일본인 승려라 일본어 실력을 향상 시킬 수 있었다.
1912년 3월에 보성전문학교 법률학교에 입학했다. 이병도는 '딱딱하고 무미건조한 법률'에는 매력을 느낄 수 없었지만 국제법 특히 역사적 케이스가 있는 국제공법에 흥미를 느꼈다고 회고했다. 졸업 1년 전부터 와세다대학 교외강의록을 주문해 입시준비를 했다. 1915년 봄에 보성전문학교 졸업과 동시에 와세다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와세다대학 예과 시절

이병도는 1915년 4월 와세다대학 고등예과 제3부에 입학했다. 집안에 말하지 않고 일본 유학을 결정했지만, 사과의 편지를 올려 용서를 받고 매달 학비를 지원 받았다. 와세다대학 캠퍼스에는 식민지 조선 사회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자유의 기운이 넘쳤다. 고등예과 제3부(문학부)는 문학, 사학, 철학을 전공할 예과생 집단이었다. 이병도는 문학개론, 철학개론, 논리학, 영어, 일본 고문, 한문, 서양문화사 등 여러 과목을 수강했다. 영어 공부에 어려움을 느꼈지만, 그 덕분에 인문학의 소양을 높이고 서구의 학술과 문화에 다가설 기초를 다졌다.

와세다대학에서는 많은 한국인 친구를 사귀었다. 4년 연상의 이광수는 예과 동기동창이었다. 이광수가 철학과로 진학한 후에도 같이 수업을 듣고 방학 때는 함께 귀국하기도 했다. 1년 선배인 현상윤(사학급사회학과), 김여제(영문과), 2년 선배인 최두선(철학과), 신익희(정경과), 3년 선배인 장덕수(정경과) 등을 비롯해 백남훈, 최팔용, 김명식, 송계백, 김종철 등과도 교류가 있었다. 당시 와세다대학에는 20명이 넘은 한국 학생이 동창회를 조직해 매달 모여 친목을 도모했다. 이병도는 1916년 7월에 고등예과를 수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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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세다대학 시절 이병도와 한국인 유학생
출처 : 이병도, 한 장의 이 사진, 수상 잡필, 376쪽.〕


와세다대학 사학급사회학과 시절

예과를 마친 이병도는 1916년 9월에 사학급사회학과로 진입했다. 본과에서는 서양사를 전공하고 지리학을 부전공으로 할 생각이었다. 다만 동양사의 시미즈 다이지(清水泰次) 강사를 비롯하여 여러 교원이 한국사 연구를 권했다. 특히 일본사의 요시다 도고 교수는 이병도가 한국사 연구를 택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대일본지명사전"을 편찬한 역사지리학의 대가였던 요시다 교수는 한국사에도 정통하여 "일한고사단"을 저술하였다. 이병도가 본과 1학년 때 요시다는 최두선, 현상윤, 김여제, 이광수 그리고 이병도 등 한국 학생 5명을 자택으로 초청하여 저녁을 대접하기도 했다. 이병도는 이 자리를 평생 기억했고 "나의 생애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준 분이 요시다 박사"라고 회고했다.[2]

2학년 때 요시다 교수가 별세했지만, 3학년 때는 쓰다 소키치가 강사로 출강하여 지도를 했다. 쓰다는 고사기와 일본서기를 비판적으로 검토한 일본 고대사의 대가였는데, 한국사에도 관심이 컸다. 또한 강사 시미즈의 소개로 도쿄대 이케우치 히로시 교수를 알게 되었다. 쓰다와 이케우치는 이병도가 귀국한 후에도 지도와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병도는 와세다대학 졸업논문으로 "고구려의 대 수당 전쟁에 대한 연구"를 제출했다.

서양사 전공 주임교수인 게무야마 센타로(煙山専太郎)도 한국 학생을 각별히 사랑했다. 1919년 9월 이병도가 졸업하자 도쿄의 중학교 교원 자리를 알선했고 이병도가 이를 사양하고 귀국하자 도쿄역까지 전송을 나왔다.[3]


중앙학교 교원 시절

1919년 9월 와세다대학을 졸업한 이병도는 10월에 중앙학교 교원으로 취직했다. 1년 선배인 현상윤이 3.1운동으로 투옥되자 그 후임으로 발탁된 셈이다. 당시 중앙학교의 교주는 김성수, 교장은 최두선이었다. 중앙학교에서는 일본사, 외국사뿐만 아니라 일본지리, 세계지리에 영어까지 담당했다. 1920년에는 퇴근 후 영어강습소에 출강하고 중동학교(야간)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1921년 4월에는 경신학교에 지리-역사 강사로 출강하기도 했다.

그 무렵 문예지 "폐허"에도 동인으로 참여했다. 또한 바이올린에 취미를 느껴 교습을 받았다. 1921년경 사진에는 부인과 2남1녀를 둔 단란한 가정의 모습이 나타난다. 중앙학교 교원으로 부임한 후 3, 4년간 안정된 가정생활을 하면서 다른 학교에 출강하여 바쁘게 활동하는 동시에 문예와 취미를 익히는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중앙학교에서는 일본사를 가르치면서 배당된 주 2시간 가운데 1시간은 한국사에 할애했다. 이병도의 한국사 공부와 그 체계화를 위한 노력은 1923년 9월부터 약 6개월에 거쳐 동아일보 지상에 "한국사 개강" 연재로 드러났다. 1923년 경부터 이병도는 본격적으로 한국사 연구에 전념했다. 1922년 조선총독부는 조선반도사 편찬을 위해 조선사편찬위원회를 설치했다. 1923년 조선총독부 후원 아래 조선사학회가 세워졌다. 이러한 움직임이 이병도를 자극하여 한국사 연구에 전념하도록 했다고 보인다.[4]
이병도는 1925년 8월에 중앙학교를 사직했지만, 실제 근무는 1923년 말까지였다. 이병도는 후일 "역사와 지리를 담당하는 교사생활을 계속하는 동안에는 실제로 연구다운 연구를 할 만한 겨를을 갖지 못하였다"고 회고했다.[5]


조선사편수회 근무

이병도는 1925년 8월 조선사편수회 수사관보에 임명되었다. 1925년 6월에 설치된 조선사편수회는 13년간 활동하며 편년체 사서인 "조선사"(37권), 사료집인 "조선사료총간"(22권)과 "조선사료집진"(3집)을 편찬 간행했다. 이병도의 조선사편수회 취직은 이케우치 히로시의 권유와 추천에 따른 것이었다.

조선사편수회에서 이병도는 "조선사" 제1편(신라통일 이전), 제2편(통일신라), 제3편(고려시대) 등 앞 쪽을 이마니시 류(1875~1932)를 주임으로 모시고 2인 1조가 되어 담당했다. 이마니시는 교토제국대학 교수로서 경성제국대학 교수를 겸임하면서 조선사 편수회 촉탁을 맡았다. 이병도는 이마니시로부터 학문적 성장에 큰 도움을 받았다. 그밖에 이병도는, 수석 편수관으로 조선사편수회의 실질적 책임자였던 이나바 이와키치(1876~1940), 도쿄애 교수로서 조선사편수회 고문을 맡은 쿠로이타 가쓰미(1874~1946), 조선사편수회 수사관으로 나중에 경성제국대학 교수가 되는 후지타 료사쿠(1892~1960) 등과 교류할 기회를 얻었다. 이병도는 조선사편수회에 들어간 다음 해인 1926년부터 논문을 발표했다. 1927년에는 일본의 권위지인 "사학잡지"와 "동양학보"에 각각 논문을 발표했다.
한국인으로는 수사관으로 사료 수집 책임을 맡은 홍희가 있었다. 홍희는 전우의 제자인 유학자였다. 총독부 사무관으로 조선사편수회 위원을 맡은 이능화도 있었다. 이능화는 홍희와 마찬가지로 이병도와 나이 차가 꽤 났지만 이병도와 각별하게 지내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병도는 1927년 5월에 조선사편수회 수사관보 직을 사임했다. 이병도의 사임은 도쿄대 출신 중촌영효, 역시 도쿄대 출신인 스에마쓰 야스히로 등 일본인 후배에게 조직 내 인사에서 뒤로 밀리는 정황 탓이었다고 판단된다.[6] 이병도는 수사관보 직에서 물러났지만 무급 촉탁으로 발령 받아 관계를 유지하면서 자료 이용의 이점은 누렸다.

이병도는 조선사편수회 시절부터 선배 격인 한국사 연구자와 동호회 비슷한 모임을 만들어 어울렸다. 이능화, 이중화, 안확, 황의돈, 권덕규, 문일평, 그리고 이병도 일곱 사람이 이른바 '7인 그룹'을 만들어 어울렸다. 1934년 이병도가 진단학회를 만들었을 때 이들은 모두 찬조회원이 되어 협력했다.


진단학회와 진단학보

이병도의 진단학회 활동에 대해서는 민현구, 이병도와 진단학회, 애산학보 50, 2023을 참조했다.

1934년 5월 7일 경성의 푸라다아느 다방에서 진단학회 발기식 겸 창립총회가 열렸다. 총회에서는 이병도가 제안한 진단학회라는 학회 명칭이 확정되고, '朝鮮及隣近文化의 硏究를 目的' 으로 하고 '雜誌의 刊行' 등의 사업을 한다는 내용의 회칙을 통과시켰다. 회무(會務)를 담당할 상무위원(常務委員)으로 김태준(金台俊), 이병도, 이윤재, 이희승(李熙昇), 손진태, 조윤제 등 6인을 선출했다. 사무소는 임시로 '李丙燾氏家'에 두기로 했다. 6개월 뒤인 11월에 진단학보 제1권이 발행되었다. 편집 겸 발행인은 이병도였다.

이병도는 중앙불교전문학교(中央佛敎專門學校)에 시간강사로 출강했을 뿐, 실질적으로 진단학회 일에 몰두했다. 진단학보는 곧 재정난에 부딪혔다. 인쇄 비용을 전담키로 약속했던 한성도서주식회사가 진단학보 창간호 판매가 부진하여 수지가 맞지 않자 지원을 중단했다. 이병도는 "내 私財를 좀 털고, 또 注文으로 팔린 약간의 대금으로 2호를 더 내게 되었고, 어떻게 해서든지 3호만 넘기면 계속되는 수가 있다는 관례가 있기 때문에 기를 쓰고 3호를 넘기게 되었”다고 회고했다.[7] 이런 노력에 힘입어 제2권은 1935년 4월에, 제3권은 9월에 나왔다. 이 무렵 이병도가 집을 저당 잡히고 집을 줄여 이사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실제로 학보 제3권과 제4권의 휘보에 의하면, 학회 사무소가 1935년 9월의 '京城府桂洞九十八番地 李丙燾家'로부터 1936년 4월의 '京畿道崇仁面城北里一三二 李丙燾家'로 변경되었다.
이후 김성수와 윤치호를 비롯한 여러 찬조회원의 도움으로 진단학보는 1941년까지 14권을 낼 수 있었다. 이병도는 제1호부터 제11호까지 모두 17편의 논문을 실었다. 두 번째로 많이 실은 이가 김상기로 모두 7편이었다. 학회 운영 뿐만 아니라 연구 면에서도 이병도가 차지하는 비중을 엿볼 수 있다.

이병도는 진단학회 창설 이후 일본어 논문을 발표한 흔적이 확인되지 않는다. 오로지 진단학보에 한국어 논문을 발표한 것이 전부로 많을 때는 1권에 3편을 싣기도 했다. 예외적으로 1938년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 환갑 기념 논문집에 성해응(成海應, 1760~1839)을 고찰한 논문을 실었는데, 한문으로 쓴 논문이었다. 한글 논문을 보낼 수는 없는 상황에서 나온 고육책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8]


해방 후 한국사 학계의 태두

1945년 8월 16일 진단학회는 총회를 개최하여 재건되었다. 학회 운영은 송석하(위원장)와 조윤제(총무)가 담당하고, 이병도는 위원으로서 일선에서 비켜선 채 많은 일을 하였다. 해방 직후 백남운(白南雲) 주도로 건설된 조선학술원이 출범하였다. 이병도는 역사와 철학 부문의 대표로 참여했다. 1945년 11월 미군정은 신교육의 방향 설정과 제도 정비를 도모하면서 미국으로부터의 원조 문제를 적절히 심사 처결하기 위해 '미국교육원조 한국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이병도는 위원으로 참여하여 백남운, 윤일선, 조백현, 유진오 등 교육계의 지도급 인사와 함께 일하였다.

1945년 9월에 미군정청은 백낙준을 경성대학 법문학부장으로 임명하였다. 법문학부 교수진 구성은 백낙준 부장을 중심으로 이병도, 조윤제, 유진오, 백남운 등 5명이 주도했다. 어문학과 사학 방면은 자연히 진단학회 측 인사들로 충원되었다. 경성대학은 1946년 9월에 국립서울대학교로 확대·개편되었고, 이병도는 문리과대학 사학과 주임교수가 되었다. 사학과 교수진은 한국사 이병도, 손진태, 이인영에 뒤에 유홍렬괤洪烈과 강대량姜大良이 추가되었고, 동양사는 김상기와 나중에 합세한 김종무金鍾武, 김성칠金聖七, 김일출金一出이 담당했고, 서양사 분야는 뒤에 김재룡金在龍이 발탁되었다.

이병도는 1954년 5월에 서울대학교 대학원장에 오르고, 1960년에는 대한민국 학술원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1989년 8월에 93세로 별세하기까지 10여 권의 저서와 100편에 가까운 논문을 남겼다. 4·19 직후에는 3개월간 문교부장관을 맡기도 했다.


연구


조선사 개강

이병도는 1923년 9월부터 약 6개월에 걸쳐 동아일보 지상에 "조선사 개강"을 연재했다. "조선사 개강"은 모두 87회에 걸쳐 연재했는데 전체로는 원고지 650매 정도의 분량이었다. 서론에 이어 '상고사'와 '중고사'까지 다루었다. 고려까지 다룬 셈인데 '근세사'는 사정이 허락하면 다시 다루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내용을 보면 무엇보다 한국사의 출발점을 '고조선 시조 전설'로 잡았다. 이병도는 "근래 일본학자 간에도 역시 이를 무가치한 전설로 돌리어 조선사 서술 상에 전혀 말제하는 경향이 생하였다"고 지적하고 "여하간 나는 결코 단군을 부인하거나 고조선의 역사가 오래되지 못하였다고 단언하는 자는 아니다"라고 밝혔다.[9]
고조선을 출발점으로 삼은 뒤 부여, 삼한을 북남 제족의 국가 사회로 다룬 다음에 기자, 위만 조선을 한인(중국인) 국가로 규정하고 한사군을 간략히 서술했다. 삼국시대 문화에 대해서는 경주 태종무열왕릉 앞 석비 귀부를 높이 평가한 세키노 데이의 말을 인용하면서 삼국의 문화, 예술의 우수성을 강조했다.

이른바 임나일본부설도 비판하였다. 스승인 요시다 도고도 "일한고사단"에서 "일본서기"를 인용하며 임나의 존재와 역할을 강조한 바 있었다. 이병도는 "가야는 일본 고사에 따르면 임나라 칭하야 고대 일본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어 일본은 심지어 이 땅(김해)에 일본부란 정청을 두고 이 나라를 보호 감독하였다 한다. 그러나 우리 동방 고사에는 이러한 사실은 추호도 발견하기 어렵고 다만 임나란 이름이 한두 곳에 보일 뿐이다"[10]라고 비판했다.


식민지 시기의 연구

閔賢九, 「역사가로서의 斗溪 李丙燾先生」(1999), 『歷史家의 遺香』, 479〜482쪽, 참조. 이병도의 논저 일람은 「斗溪先生 論著目錄」, 같은 책, 501〜517쪽, 참조.

첫째, 고대사 방면에서는 1929년에 「眞番郡考」(『史學雜誌』 40-5)를 발표한 이래, 한 군현의 위치 비정과 관련된 일련의 연구 성과를 발표했다. 1934년에는 『震檀學報』 창간과 동시에 「三韓問題의 新考察」을 연재했다. 이병도의 고대사 연구는 ‘철저한 문헌 고증과 합리적인 해석’이 강점이었다. 일련의 연구는 『韓國古代史硏究』(1976)로 종합되었다.

둘째, 지리도참에 대해서는 1926년 「陰陽地理說と高麗歷代の遷都論」(『朝鮮史學』 1-2·1-3)을 비롯하여 고려의 삼소(三蘇)를 다루는 등 사상과 시대 환경의 관련을 규명하는 연구를 발표했다. 도참사상에 관한 10여 편의 논문은 『高麗時代의 硏究』(1948)로 묶였다.

셋째, 유학사에 대한 관심은 학술지에 발표한 첫 논문이 「李栗谷‘入山’の動機に就て」였다는 데서 드러난다. 이병도는 1930년대 규장각에 출입하면서 수천 권의 조선시대 문집을 열람 검토하여 관계 자료를 정리하였다. 이러한 성과는 『韓國儒學史』(1987)로 열매를 맺었다. 후일 이병도는 자신의 연구를 돌아보며 고대사 방면, 고려를 중심으로 하는 지리도참, 조선 유학사를 ‘三面作業’이라고 부른 바 있다.[11]


데이터


TripleData





참고자원




주석




  1. 이병도, 나의 애장품, 수상잡필, 212~213쪽.
  2. 이병도, 화려한 우정 50년, 수상잡필, 382~382쪽.
  3. 이병도, 나의 회고록, 국사와 지도이념, 467쪽.
  4. 민현구, 위 논문, 285쪽.
  5. 이병도, 나의 연구생활의 회고, 국사와 지도이념, 435쪽.
  6. 민현구, 위 논문, 289쪽.
  7. 진단학회 편, 歷史家의 遺香(두계이병도전집 16), 한국학술정보, 2012, 397면.
  8. 홍종욱, 「실증사학의 '이념': 식민지 조선에 온 역사주의」, 인문논총 76-3, 2019, 305쪽.
  9. 이병도, 조선사개강 3, 동아일보 1923.10.1.
  10. 이병도, 조선사개강 10, 동아일보 1923.10.10.
  11. 李丙燾, 「自序」,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