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팔양

North Korea Humanities

김지수(PNU2024)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6월 13일 (목) 16:26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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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팔양(朴八陽)
박팔양.jpg
출처 : 전라매일 2023년 06월 07일자 기사
 
한글명 박팔양 한자명 朴八陽 영문명 Bak Pal-Yang 가나명 김니콜라이 이칭 김려수, 여수, 여수산인
성별 남성 생년 1905년 몰년 1988년 출신지 경기도 수원 전공 법학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시인. 평론가. 신문기자. 1905년 수원에서 태어나서 제동공립보통학교기관배재고등보통학교기관에서 수학한 후, 경성법학전문학교기관를 졸업하였다. 조선일보기관 사회부 기자로 근무하다 중외일보기관, 조선중앙일보기관의 사회부장을 지냈다. 만주로 건너가 친일신문인 만선일보기관의 사회부장 및 학예부장을 지내다 해방 이후 귀국했다. 귀국 이후, 각종 기관지 편집국장과 위원 및 의원, 김일성종합대학기관 어문학부 신문학과 강좌장 등으로도 역임했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당과 수령에 대한 높은 충실성을 지녔으며, 주로 전원을 칭송하는 자연시와 사회적 현실에 대한 관심을 노래한 경향시 등을 발표한 시인이다.


생애


배재고등보통학교 수학

박팔양은 1905년 08월 02일 지금의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곡반정동에서 태어났다. 1912년 8세 때, 제동공립보통학교기관에 입학해 1916년 졸업하고, 같은 해 4월 1일 배재고등보통학교기관에 입학했다. 배재고등보통학교기관에서 카프의 주도 세력이 되는 박영희(朴英熙)인물, 김기진(金基鎭)인물, 김복진(金復鎭)인물[1] 등을 동급생으로 만나게 되고 송무현(宋武鉉)인물[2] , 박세영(朴世永)인물, 나도향(羅稻香)인물[3] 등과도 교류했다. 이때의 영향으로 훗날 카프에 가입하고 프로문학[4]을 지향하게 됐다.


경성법학전문학교 입학 이후

박팔양은 1920년 배재고등보통학교기관를 졸업하고, 1922년 경성법학전문학교기관에 입학했다. 이후 박팔양은 동인지 <요람>을 발간하면서 사회주의 사상을 담은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때 정지용(鄭芝溶)인물, 김화산(金華山)인물[5]과 교류하게 되면서 정지용(鄭芝溶)인물의 모더니즘적 경향과 김화산(金華山)인물의 다다이즘적 경향을 섭렵하며 다양한 문학적 경향을 보이게 됐다.


카프의 일원

박팔양은 1924년 4월 경성법학전문학교기관를 졸업하고 1925년 6월까지 동아일보기관 사회부 기자로 지냈다.1925년 8월 23일 사회주의 단체인 서울청년회기관의 일원으로 카프기관[6]에 가입했다. 카프기관는 예술을 무기로 하여 조선민족의 계급적 해방을 목적으로 하여 활동을 했으며, 1926년 1월에 <문예운동>을 발간, 1927년 일본 도쿄에서 <예술운동>을 발간, 그해 9월 전국 맹원총회를 열어 대규모의 문학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박팔양의 카프기관탈퇴 시기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이에 대해 두 가지 대표적인 가설이 존재하는데 1927년 제1차 방향 전환 직전이라는 주장과 1930년 제2차 방향 전환 직후라는 주장이 존재한다.[7]


신문기자

1931년 11월 중외일보기관중앙일보기관로 재창간될 때, 창간사원으로 참여해 사회부장을 맡고 1937년 폐간까지 재직했다. 이때 중앙일보기관 학예부장으로는 박영희(朴英熙)인물[8]가 재직했고, 1933년 조선중앙일보기관로 개제된 후에는 이규태(李奎泰)인물[9]가 학예부장을 맡았다. 박팔양은 이규태(李奎泰)인물정지용(鄭芝溶)인물과의 교류를 통해 순수문학을 지향하며 반카프적 성향을 지닌 구인회기관에 가입했다. 이후 1936년 구인회기관에서 탈퇴하고 1937년 만주로 이동하여 만선일보기관에 입사했다. 1939년에는 만선일보기관의 간도 지사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1940년 박팔양의 해방 전 유일한 시집인 <여수 시초>[10]를 발간했다.


광복 이후

1945년 해방 직후 월북하였다. 월북 이후 조선공산당에 입당하고 평안북도 당위원회 기관지인 바른말 신문사기관 편집국장을 역임하였다. 정로기관의 편집부장을 지내다 1947년 정로기관로동신문기관으로 재창간된 이후 부주필을 맡았다. 1949년 김일성종합대학기관 강좌장으로 입명되었고 6.25 전쟁 때는 종군작가로 참전하였다. 전후에 조선문학기관 편집위원으로 지냈으며 이외에도 각종 위원과 서기장, 대의원, 교수 등 여러 단체에서 다양한 활동을 했다. 이후 1966년 한설야(韓雪野)인물가 숙청당한 후 반당 종파 분자로 몰려 숙청되어 이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는다.[11]





연구


경향시

경향시를 통해 사회적 현실에 대한 관심을 드러냈다. 카프에 참가하며 보여준 참여적 성향의 모습이 녹아있으며 당시 조선의 현실을 진단했다. 어두운 조선의 현실 속에서 무기력한 본인을 자책하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문학을 목적으로 사용하던 카프의 프롤레타리아 방향과는 다르게 계급적 이념적 주제의 시에 다다이즘을 가미한 도시적인 서정이 특징이다. 그러나 당시의 작품은 지식계급으로서의 인식에 국한되고 있다는 한계[12]를 가지고 있다.


자연시

자연시로 전원을 예찬하는 작품을 남겼다. 우울이 깃든 도시문명의 현상을 극복하는 공간으로 자연[13]을 사용했다. 문학작품에 예술성이 포함되어야 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던 박팔양은 시인의 감정이나 정신상태가 작품과 일치해야 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카프를 탈퇴한 이후, 도시 문명에 대한 관심을 집중적으로 다뤘다. 도시문명의 참담함을 대비하는 자연을 활용하여 자연의 신비함, 평안함, 자연에 대한 외경을 다뤘다.


예술성과 서정성

카프에 소속되었을 때 주로 다뤘던 경향시, 카프에서 나온 이후 구인회를 가입했을 당시에 주로 집필된 자연시 모두에서 발견할 수 있는 특징은 예술성과 서정성[14]이다. 박팔양은 시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서정성이라는 생각을 작품을 통해 비췄다. 예술성은 작품의 표현 형식에 있어 주제나 묘사, 하모니를 통해 형태를 갖추는 것으로 나타냈다.





데이터


TripleData

Source (A) Target (B) Relationship
Person: 박팔양 Institution: 제동공립보통학교 A graduates B
Person: 박팔양 Institution: 배재고등보통학교 A graduates B
Person: 박팔양 Institution: 경성법학전문학교 A graduates B
Person: 박팔양 Group: 카프 A isMemberOf B
Person: 박팔양 Group: 구인회 A isMemberOf B
Person: 박팔양 Institution: 조선일보 A worksAt B
Person: 박팔양 Institution: 조선중앙일보 A worksAt B
Person: 박팔양 Institution: 만선일보 A worksAt B
Person: 박팔양 Institution: 동아일보 A worksAt B
Person: 박팔양 Institution: 바른말 신문사 A worksAt B
Person: 박팔양 Institution: 로동신문 A worksAt B
Person: 박팔양 Institution: 북조선문학예술총동 A worksAt B
Person: 박팔양 Institution: 김일성종합대학 A worksAt B
Person: 박팔양 Institution: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 A worksAt B
Person: 박팔양 Institution: 평양문학대학 A worksAt B
Person: 박팔양 Institution: 조소친선협회 A worksAt B



Timeline


[1]

Network Graph






참고자원


  • 조성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오태호』, 『20세기북한예술문화사』online, NK.AC.KR.
  • 틀,"시인 박팔양(朴八陽)", 『네이버 블로그 - 재봉틀의 국어방』online, 작성일: 2007년 10월 01일.
  • "예스24", 『예스24 작가파일』online, 예스이십사(주).





주석


  1. 소설가인 김기진과 조각가인 김복진은 형제 관계이다.
  2. 본명은 송무현이나, 송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3. 본명은 나경손이며, 의사 나성연의 맏아들이다.
  4.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지칭하는 말로 마르크스주의 사상에 입각해 프롤레타리아의 해방을 목적으로 하는 문학이다.
  5. 김화산도 법학전문학교를 졸업하였으며 카프가 결성될 때 동맹원이 되어 활동을 같이했다. 그러나 결국 프로문학에 대한 의견의 차이로 인해 카프에서 제명되었다.
  6. 카프는 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의 약칭이다.(Korea Artista Proleta Federacio)
  7. 박팔양의 작품이 1930년 이후에 프로문학과는 거리를 보인다는 점을 근거로 두 번째 가설이 유력하다고 주목 받고 있다. 게다가 박팔양은 문학이 단순한 도구에서 그치지 않고 예술성을 갖춘 작품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두 번째 가설이 더 유력하다고 생각한다.
  8. 카프에 소속했던 인물로 카프 창립부터 지도적인 위치를 맡았다.
  9. 카프의 목적문학에 반대하였고 구인회를 결성한 인물로 이태준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졌다.
  10. 여수시초를 간행하면서 김여수라는 필명을 사용했다.
  11. 숙청되어 행적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1981년에 복권되어 활동한 것으로 보이며 1988년 10월 4일에 사망했다.
  12. 작품 속에 등장하는 우울과 가난, 도시문명의 어두움은 경험이 바탕이 되지 않은 추상적인 표현에 불과했다는 평가가 있다. 또한, 이러한 어두움을 극복하는 새로운 세기가 도래한다는 낙관주의를 드러내기도 했다.
  13. 자연이 목숨을 소유하고 어머니의 품 같기도 하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14. <구월(九月)의 시단(詩壇)>에서 직감과 인상을 존중하는 가운데 감정을 승화시켜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