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확

North Korea Humanities

이지원(JBNU2024)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6월 11일 (화) 21:01 판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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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확 (安廓)
안확.png
출처 :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580066&cid=46623&categoryId=46623
 
한글명 안확 한자명 安廓 영문명 가나명 이칭 운문생(雲門生)
성별 생년 1886년 몰년 1947년 출신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 전공 국문학자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일제강점기 때, 조선국권회복단 마산지부장, 신천지 편집인 등을 역임하였고, 『조선문학사』 등을 저술하며 국어학, 국문학, 아악 등을 연구한 국학자 · 독립운동가이다.


생애


출생과 성장

1886년 2월 28일 한성부 우대마을에서 중인 출신으로 태어났다. 그는 1895년 수하동소학교에 입학하여 1899년에 심상과, 1901년에 고등과를 졸업했다. 그는 일찍부터 사회운동에 관심을 보였고 1897년 1월 독립문 낙성식에 참여했고 독립협회가 주관한 만민공동회에도 참석해 연설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소학교 교육이 매우 미흡했다고 여겼다. 그는 <조선문학사>에서 당시 수하동소학교의 몇몇 과목은 교재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마음과 행실을 바르게 닦아 수양하는 것을 목표로 삼은 '수신(修身)'이란 과목 만은 마음에 들었으며, 자신은 이때부터 체육에 관심이 많았다고 회고했다. 또한 1902년 3월에 경성관립중학교에 입학했지만 그 이후의 기록은 발견되지 않아서 그가 이 학교를 언제까지 다녔는지 알 수 없다. 그는 이 시기 서구 문명을 소개하는 책들을 보며 사상적 기반을 다졌다. 특히 유길준의 <서유견문(西遊見聞)>과 양계초(梁啓超)의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을 통해 서구 문물과 서양의 정치사상들에 대한 인식을 넓혔다. 또한 그가 <조선 문학사>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그는 이 시기 서북 지방을 주유했다고 한다. 이로 볼 때 그는 평안도에서 교육 계몽운동에 종사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교사로 부임

1907년 가을에 경남 진주의 안동학교 교사로 부임한 그는 1911년 3월에 경남 마산의 창신학교로 직장을 옮겼으며, 1917년 사직할 때까지 이 학교에서 근무했다. 그는 학생들에게 "당장 빨리 걷는 습관부터 가져라. 방안에서 책만 읽다가 나라를 잃어버렸으니, 이 어찌 피눈물 나는 선배들의 모습이 아니냐."며 체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또한 1914년 창신학교에 경남 최초의 축구부와 야구부를 신설했다. 당시 공이 없자 짚공을 만들어 사용했고, 정식 경기에는 선교사들이 구해준 가죽공을 사용했다. 창신학교는 당시 대구 계성학교와 자주 친선경기를 벌였고, 두 학교의 경기는 곧 이 지역의 명물로 자리잡았다고 한다.


일본 유학

1914년 말에 유학생 자격으로 도쿄로 유학가서 1914년부터 1916년까지 일본의 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했다. 다만 그가 니혼대학을 졸업했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니혼대학에 이를 입증할 기록이 발견되지 않았고, 유학 기간 또한 니혼대학을 졸업하기엔 충분한 시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안확은 일본 유학 기간 동안 일본어와 근대 학문을 습득하고 이를 토대로 자신의 국학을 구성했다. 그는 <조선의 미술>에서 한국의 미술이 중국 및 인도 미술을 배낀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또한 <조선의 문학>에 한국의 문학은 서양보다 훨씬 앞서 '발달'을 이뤘으며, 국어는 일본어를 비롯한 다른 여러 언어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정도로 독자성을 갖췄다고 봤다. 그러나 국학을 탐구하는 이가 없고 새로운 풍조에만 빠져서 국학은 학문적으로 전혀 발달하지 못한 상태에 있다면서,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고 '배달혼'을 고양시키기 위해 한국 고유의 특성에 대한 연구, 즉 국학에 전념할 것을 요구했다.


조선국권회복단 결성

1916년 경북 달성군 수성면 소재 안일암에서 시회(詩會)를 가장하여 비밀결사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이 결성되었을 때 마산지부장에 선임되어 활동했다. 그는 이 단체의 일원으로서 1918년 이회영이 주도하고 이승훈, 오세창, 한용운 등이 참여한 고종 황제의 해외 망명 계획에 관여했다. 그리고 3.1 운동이 전국 각지에서 전개되자 마산에서도 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계획하고 4월 3일 마산에서 독립만세시위가 벌어지는 데 관여했다. 이후 1920년에 서울로 상경한 그는 1920년 6월 28일 오상근, 장덕수, 장도빈 등과 함께 조선청년회 연합기성회를 발기하고 지방부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아성>의 편집자

조선청년연합회를 결성한 뒤 기관지인 <아성(我聲)>의 편집 책임을 맡았다. 그러나 조선청년연합회는 사회주의 계열과 민족주의 계열간의 주도권 문제로 창립 당시부터 내분을 보이기 시작했다. 동아일보를 중심으로 모인 민족주의 계열은 조선청년연합회 내에서 사회주의 계열의 서울청년회에 비해 세력이 상대적으로 불리했다. 사회주의 계열의 서울청년회는 동아일보가 조선청년연합회를 자신들의 정치도구로 이용하려하자 민족주의계열과 대립했고, 이 대립은 안확이 <자각론>과 <개조론>을 조선청년연합회 명의로 발행하면서 심화되었다. 유자명은 안확이 개조론을 발표하는 자리에 참석했다가 그의 강연을 듣고 곧장 반박하는 내용의 <내적 개조론의 검토>를 발표했고, 안확은 거센 비판을 이기지 못하고 <아성>의 편집자 직책에서 물러났다.


국학 연구

1921년 5월 중국 여행을 다녀온 안확은 1922년 11월 <신천지> 신천지사에 입사하여 편집인과 경영진으로 참여하면서 여러 편의 글을 기고했다. 이후 그는 사회 활동보다는 국학 연구에 몰두했다. 1922년에 <조선문학사>를 발표했고, 1923년에는 <조선문명사>를 발표해 국학연구와 집필을 시작했다. 특히 <조선문명사>는 출판 기념회까지 열렸으며, 당시 동아일보 1923년 1월 11일자에 출판 기념회에 대한 기사가 실릴 정도였다. 그는 음악사에도 큰 관심을 보여 1926년부터 1930년까지 약 4년간 이왕직 아악부 촉탁을 자청하여 재직하면서 조선음악사를 연구했다. 이후 그는 사회 활동을 거의 하지 않고 국학 연구에 몰두했다. 안확을 다룬 여러 논문들은 그가 1933년 7월 이후 만주, 백두산, 압록강, 중국, 하와이, 대마도 등지를 유랑하며 국학 연구에 필요한 자료를 수집했다고 서술한다.


타계

1945년 8.15 해방을 맞이한 뒤 친구 이병두와 함께 정치 활동을 하기로 협의하고 정당을 세우려 했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급환에 걸려 1946년 11월 8일에 타계하였다.





연구


제목1


제목2


제목3





데이터


TripleData

Source (A) Target (B) Relationship
Person: 홍길동 Institution: ○○고등보통학교 A graduates B
Person: 홍길동 Institution: ○○대학교 A worksAt B
Person: 홍길동 Group: ○○학회 A isMemberOf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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