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가의 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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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민석 (토론 | 기여)님의 2023년 11월 26일 (일) 18:16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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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가의 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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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원제목 朝鮮 詩歌의 胎生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진단학보1 발행기관 진단학회
저자 조윤제 역자 집필일자 게재연월 193411
시작쪽 056쪽 종료쪽 085쪽 전체쪽 030쪽 연재여부 범주 논문 분야 문학



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내용을 입력합니다.@




목차







본문


본문1: 서언


향가는 오늘에 유존(遺存)한 조선의 최고(最古) 시가라 하여도 과언이라 할 수 없다. 그러나 그 향가란 것은 잘 고찰하여 보면 비록 몇 수 되지 못하지마는, 형식이 아주 정제되어 있어 이를 후세의 시가와도 비교하여 볼 때, 한 규율에 정리되어 있는 정형시 같이도 보인다. 세계 일반 문학사상의 시가 발달의 경로를 볼 때, 소훈 정형시까지에 발달함에는 장구한 역사의 배경을 가지는 듯하니, 일로 보면 향가는 조선의 최고 유존 시가라고는 할 수 있을지언정, 조선의 최초 시가라고는 할 수 없다. 문헌에도 그 내용은 전하지 못하지만은, 이름만이라도 향가 이전에 도솔가(兜率歌), 사뇌가(詞腦歌) 등의 가명(歌名)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니까, 더욱이 말할 것도 없다.
쪽수▶P56-1鄕歌는 오늘에 遺存한 朝鮮의 最古 詩歌라 하여도 過言이라 할 수 없다. 그러나 그 鄕歌란 것은 잘 考察하여 보면 비록 몇 首 되지 못하지마는, 形式이 아주 整齊되어 있어 이를 後世의 詩歌와도 比較하여볼 때, 한 規律에 整理되어 있는 定型詩 같이도 보인다. 世界 一般 文學史上의 詩歌 發達의 經路를 볼 때, 所訓 定型詩까지에 發達함에는 長久한 歷史의 背景을 가지는 듯하니, 일로 보면 鄕歌는 朝鮮의 最古 遺存 詩歌라고는 할 수 있을지언정,▶P57朝鮮의 最初 詩歌라고는 할 수 없다. 文獻에도 그 內容은 傳하지 못하지마는, 이름만이라도 鄕歌 以前에 兜率歌 詞腦歌 等의 歌名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니까, 더욱이 말할 것도 없다.
또 도솔가(兜率歌), 사뇌가(詞腦歌)라 할지라도, 이것이 최초의 시가라고는 아직 할 수 없다. 왜 그러냐 하면 시가의 정말 최초는 극단이 말하면 거의 인간사의 최초와도 동일히 논하지 않으면 안 되겠지만은, 그렇지 안다 하더라도 시가는 자연인의 호소에 벌서 시작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기원적 발달은 극히 요원한 것이 되어 도솔가(兜率歌), 사뇌가(詞腦歌) 등은 그에 비하면 훨씬 후대의 산품이라 하여야 될 것이다. 원체 시가에 대하야 이름이 붙는 것만도 한 가지 후산(後產)의 증거가 되는 것이니, 아무 형식적 규정이 없었다 한다면 다른 것과 구별할 이름은 불필요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와 같은 것은 지금 이 연구에는 직접 관계가 되지 않은만치 훨씬 발달한 시가고, 그보다는 차라리 더 소박한 원시 시가가 연구의 대상이 될 것이다. 막연히 원시 시가라 할지라도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극히 추상적 그 기원에까지 소상(遡上)하는 것도 또한 무의미한 것이니까, 다소는 시대가 늘어지는 혐이 있다 하드라도 구체적으로 사실을 잡을 수 있을 만한 정도에 이르지 않으면 연구의 가치가 되지 않을 것이다.
쪽수▶P57-2또 兜率歌, 詞腦歌라 할지라도, 이것이 最初의 詩歌라고는 아직 할 수 없다. 왜 그러냐 하면 詩歌의 정말 最初는 極端이 말하면 거의 人間史의 最初와도 同一히 論하지 않으면 안 되겠지마는, 그렇지 안다 하더라도 詩歌는 自然人의 呼訴에 벌서 始作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起源的 發達은 極히 遙遠한 것이 되어 兜率歌、詞惱歌 等은 그에 比하면 헐신 後代의 產品이라 하여야 될 것이다. 元體 詩歌에 對하야 이름이 붙는 것만도 한 가지 後產의 證據가 되는 것이니, 아무 形式的 規定이 없었다 한다면 다른 것과 區別할 이름은 不必要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와 같은 것은 지금 이 硏究에는 直接 關係가 되지 않은만치 훨신 발달한 詩歌고, 그보다는 차라리 더 素樸한 原始 詩歌가 硏究의 對象이 될 것이다. 漠然히 原始 詩歌라 할지라도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極히 抽象的 그 起源에까지 遡上하는 것도 또한 無意味한 것이니까, 多少는 時代가 늘어지는 嫌이 있다 하드라도 具體的으로 事實을 잡을 수 있을 만한 程度에 이르지 않으면 研究의 價値가 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말할 것도 실로 거기서부터라야 될 것이다. 여기에 내가 조선 시가의 기원이라 하지 아니하고 「조선시가의 태생」이라 한 것도 즉 그러한 의미에서 나온 것이니 나는 이 소론으로 조선 시가의 부터 발달해 온 바의 연원을 보살필까 한다.
쪽수▶P57-3여기서 말할 것도 實로 거기서부터라야 될 것이다. 여기에 내가 朝鮮 詩歌의 起源이라 하지 아니하고 「朝鮮詩歌의 胎生」이라 한 것도 卽 그러한 意味에서 나온 것이니 나는 이 小論으로 朝鮮 詩歌의 부터 發達해온 바의 淵源을 보살필가 한다.




































본문2: 원시 시가의 내포


시가는 자연의 호소에 그 맹아를 트고 있으나, 이것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기는 원시 민요인 Ballad dance다. 소위 Ballad dance라는 사실은 원시적인 음악, 시가, 무용의 결합을 의미하는 것이니, 시가의 원천은 여기 있다고 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다. 이 삼자에 대하여서는 그 어느 것이 더 기원적인가를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 논란이 있어, 혹은 시가를 다른 이자보다 최초의 것이라 하는 이도 있고, 혹은 무용을 그라 하는 이도 있지만은, 일반은 이상 삼자의 결합체인 Ballad dance가 가장 원시적이라 하는 듯하다.
쪽수▶P58-1詩歌는 自然의 呼訴에 그 萠芽를 트고 있으나, 이것이 具體的으로 들어나기는 原始 民謠인 Ballad dance다. 所謂 Ballad dance라는 事實은 原始的인 音樂、詩歌、舞踊의 結合을 意味하는 것이니, 詩歌의 源泉은 여기 있다고 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다. 이 三者에 對하여서는 그 어느 것이 더 起源的인가를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 論難이 있어, 彧은 詩歌를 다른 二者보다 最初 것이라 하는 이도 있고, 彧은 舞踊을 그라 하는 이도 있지마는, 一般은 以上 三者의 結合體인 Ballad dance가 가장 原始的이라 하는 듯하다.
즉 원시 시가는 아직 분화하지 않은 음악, 무용과의 결합 예술로서, 일일의 작품에는 다 음악적, 무용적 요소를 구유하고 있다. 그로오제도 원문주1▶「원시 민족의 무용, 시가 급 음악은 자연히는 일치되어 있고, 다만 인위적 추상적으로 볼 때에만 분리할 수 있다. 따라서 만약 우리가 이들 원시적 예술의 각개 상세와 효과를 정확히 이해하고 평가하려면, 우리는 그들이 각각 독립하여 있들 않고 극히 밀접한 유기적 결합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늘 유의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다」[1]라고 말하였다. 그러면 삼자 즉 시가, 음악, 무용은 원시시대에 있어서 여하한 관계와 결합 정도에 있는가. 그로오제는 다시 시와 음악과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모든 원시적 서정시인이 동시에 작곡자일 것, 모든 원시적 시는 다만 그것이 시적 작품이 될 뿐 아니라, 또한 음악적 작품일 것은 우리들이 말해 온 바다. 시인에 대하여는 시가의 문구가 그 자체의 의미를 가지고 있겠지만은, 그러나 다른 사람에 있어서는 흔히 문구는 단순한 선율의 지지자 됨에 지나지 못한다. 사실 우리도 역시 시가의 형식 때문에 그 내용을 거침없이 희생하여 버리는 일이 있다. 아이야아는 「많은 오오스토리아인은 그 자신의 향토에서 부르는 제다의 시가 의미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그와 같이 그들이 붙이는 설명이 극히 불완전하다는 것은 시가의 내용보다 철음(綴音)의 장단에 일층 중요시한 결과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하였다. 또 다른 저자는 원문주2▶「모든 코로보리의 시가에 있어서 리듬을 변경하고 또 보전하기 위하야 분명히 무의미한 것을 부르는 만큼 그들은 어구를 반복하고 또 환치한다」라 기술하였다. 형식에 한 흥미가 민콤비에서도 이에 미치지 않을만치 중요한 것이 된다. …중략…… 이와 같이 우리는 최저급의 문명에 있는 서정시는 주로 음악적 성질을 가지고 있고, 시적 의미는 다만 제이차적으로 가짐에 불과한다는 결론에 달하지 않을 수 없다」[2]라고. 즉 원시시대의 시가와 음악은 이를 최저급 문화민족의 예를 볼 때, 온전히 분리할 수 없음을 설파하였다.
쪽수▶P58-2即 原始 詩歌는 아직 分化하지 않은 音樂、舞踊과의 結合 藝術로서, 一一의 作品에는 다 音樂的、舞踊的 要素를 具有하고 있다. 그로오제도 원문주1▶「原始 民族의 舞踊, 詩歌 及 音樂은 自然히는 一致되어 있고, 다만 人爲的 抽象的으로 볼 때에만 分離할 수 있다. 따라서 萬若 우리가 이들 原始的 藝術의 各個 狀勢와 效果를 正確히 理解하고 評價하려면, 우리는 그들이 各各 獨立하여있들 않고 極히 密接한 有機的 結合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늘 留意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다」[3]라고 말하였다. 그러면 三者 即 詩歌, 音樂, 舞踊은 原始時代에 있어서 如何한 關係와 結合 程度에 있는가. 그로오제는 다시 詩와 音樂과의 關係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모든 原始的 敍情詩人이 同時에 作曲者일 것, 모든 原始的 詩는 다만 그것이 詩的 作品이 될 뿐 아니라, 또한 音樂的 作品일 것은 우리들이 말해 온 바다. 詩人에 對하여는 詩歌의 文句가 그 自體의 意味를 가지고 있겠지마는, 그러나 다른 사람▶P59에 있어서는 흔히 文句는 單純한 旋律의 支持者 됨에 지나지 못한다. 事實 우리도 亦是 詩歌의 形式때문에 그 內容을 거침없이 犧牲하여 버리는 일이 있다. 아이야아는 「많은 오오스토리아人은 그 自身의 鄕土에서 부르는 諸多의 詩歌 意味를 充分히 說明하지 못한다. 그와 같이 그들이 붙이는 說明이 極히 不完全하다는 것은 詩歌의 內容보다 綴音의 長短에 一層 重要視한 結果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하였다. 또 다른 著者는 원문주2▶「모든 코로 보리의 詩歌에 있어서 리듬을 變更하고 또 保全하기 爲하야 分明히 無意味한 것을 부르는 만큼 그들은 語句를 反覆하고 또 換置한다」라 記述하였다. 形式에 한 興味가 민콤비에서도 이에 미치지 않을만치 重要한 것이 된다. …中略… 이와 같이 우리는 最低級의 文明에 있는 敍情詩는 主로 音樂的 性質을 가지고 있고, 詩的 意味는 다만 第二次的으로 가짐에 不過한다는 結論에 達하지 않을 수 없다」[4]라고. 即 原始時代의 詩歌와 音樂은 이를 最低級 文化民族의 例를 볼 때, 온전히 分離할 수 없음을 說破하였다.
다음은 무용과의 관계를 생각하여 보자. 무용은 원시인 생활의 중요한 표현이 되는 것이니, 그들은 잘 노래 부름과 동시에 잘 무용한다 할 것이다. 오늘의 미개인에서 예를 들어볼지라도, 그들은 실로 무용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한다. 그들의 무용으로서 유명한 것은 오스토라리아人의 코로보리다. 이것은 과실의 성숙, 모려(牡蠣)를 채로(採撈)할 때, 청년의 입사식, 우족과의 회합, 전투에 진발할 때, 많은 수렵을 하였을 때, 거행되는 것인데, 오주(墺洲) 전토에 퍼져 있어, 여러 사람의 여행사에 기술되어 있으나, 대개는 유사한 것이니까, 일일이 열거하기를 폐하고, 여기서는 그들 여러 가지를 종합하여 소개한 역시 그로오제의 글을 일부분 인용하여 시가와 무용과의 관계를 보기로 하겠다. 그로오제는 먼저 대강 이 무용의 시작될 때까지의 준비를 말하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원문주3▶「그리하야 코로보리는 시작되었다. 박자가 정확히 보유됨은 놀랄 만하다. 노래와 운동이 다 같이 불리고 또 된다. 무용자들은 가장 잘 훈련된 바레에 일좌와 같이 몰려서 움직인다. 그들은 때로는 옆으로 뛰고, 때로는 전진하며, 일이보를 퇴각도 하야 모든 있을 만한 숱한 태도를 다하여 운동한다. 또 그들은 팔을 돌리기도 하고, 그 발을 구르면서 몸을 폈다가 꾸부리었다가 한다. 지도자도 역시 쉬지 않고 활동한다. 즉 그는 그의 몽둥이로 박자를 짚음과 동시에 일보 앞으로 일보 뒤로 움직이면서 소리 높이 혹은 고요히 늘 독특한 비음의 노래를 노래 부른다. 또 그는 잠시도 한 곳에서 있지 않는다. 혹은 무용자를 향하기도 하고, 혹은 전력을 다하여 소리치는 여자 편을 향하기도 한다. 무용자들은 점점 더 흥분하여진다. 박자목은 더 빨라지고, 운동은 더 빨라지며, 또 활발하여진다. 무용자들은 그 몸을 의심스러울만치 높이 지상을 뛰며 최후의 날카로운 고함을 마치 한입에서 나온 듯이 일제히 외친다. 조금 뒤에는 그들이 나오듯이 돌연히 숲속으로 숨어 들어가고 장소는 잠시간 공허한 체로 되어 있다. (하략)」[5]. 이상과 같은 무용이 하룻밤에 수차를 계속한다. 그리고 이것은 야간, 흔히 월야에 시행되는데, 사람이 많은 때에는 일단 삼사백 명이 된 때도 있다 한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것을 종교적 제의로 보는 이도 있는 듯하나, 그는 여하튼 이로 인하여 그들이 얼마나 무용을 좋아하며 또 시가와 병행되는 것을 앎에 족할 듯하다.
쪽수▶P59-2다음은 舞踊과의 關係를 생각하여 보자. 舞踊은 原始人 生活의 重要한 表現이 되는 것이니, 그들은 잘 노래 부름과 同時에 잘 舞踊한다 할 것이다. 오늘의 未開人에서 例를 들어볼지라도, 그들은 實로 舞踊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한다. 그들의 舞踊으로서 有名한 것은 오스토라리아人의 코로보리다. 이것은 果實의 成熟, 牡蠣을 採撈하럴 때, 靑年의 入社式, 友族과의 會合, 戰鬪에 進發할 때, 많은 狩獵을 하였을 때, 舉行되는 것인데, 墺洲 全土에 퍼저 있어, 여러 사람의 旅行社에 記述되어 있으나, 大概는 類似한 것이니까, 一一이 列舉하기를 廢하고, 여기서는 그들 여러 가지를 綜合하야 紹介한 亦是 그로오제의 글을 一部分 引用하야 詩歌와 舞踊과의 關係를 보기로 하겠▶P60다. 그로오제는 먼저 大綱 이 舞踊의 始作될 때까지의 準備를 말하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원문주3▶「그리하야 코로보리는 始作되었다. 拍子가 正確히 保有됨은 놀랄 만하다. 노래와 運動이 다 같이 불리고 또 된다. 舞踊者들은 가장 잘 訓練된 바레에 一座와 같이 몰려서 움즉인다. 그들은 때로는 옆으로 뛰고, 때로는 前進하며, 一二步를 退却도 하야 모든 있을 만한 수탄 態度를 다하야 運動한다. 또 그들은 팔을 돌리기도 하고, 그 발을 굴르면서 몸을 폈다가 꾸부리었다가 한다. 指導者도 亦是 쉬지 않고 活動한다. 即 그는 그의 몽둥이로 拍子를 짚음과 同時에 一步 앞으로 一步 뒤로 움즉이면서 소리 높이 或은 고요히 늘 獨特한 鼻音의 노래를 노래 부른다. 또 그는 暫時도 한 곳에서 있지 않는다. 或은 舞踊者를 向하기도 하고, 或은 全力을 다하야 소리치는 女子 편을 向하기도 한다. 舞踊者들은 漸漸 더 興奮하여진다. 拍子木은 더 빨라지고, 運動은 더 빨라지며, 또 活潑하여진다. 舞踊者들은 그 몸을 疑心시러울만치 높이 地上을 뛰며 最後의 날카로운 高喊을 마치 한입에서 나온 듯이 一齊히 외친다. 조금 뒤에는 그들이 나오듯이 突然히 숲속으로 숨어 들어가고 場所는 暫時間 空虛한 체로 되어 있다. (下略)」[6]. 以上과 같은 舞踊이 하룻밤에 數次를 繼續한다. 그리고 이것은 夜間, 흔히 月夜에 施行되는데, 사람이 많은 때에는 一團 三四百名이 된 때도 있다 한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것을 宗敎的 祭儀로 보는 이도 있는 듯하나, 그는 여하튼 이로 因하야 그들이 얼마나 舞踊을 좋아하며 또 詩歌와 並行되는 것을 앎에 足할 듯하다.
이상은 미개인간에서 아직 행하고 있는 실례로 시가, 음악, 무용 삼자의 호상적 관계를 본 것이니, 일부러 멀리 그들에 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러한 관계는 가까이 우리들의 일상 생활 중에서도 얻어볼 수 있는 것이다. 첫째 현재의 우리들에 심중의 감정이 격되면 격 될수록, 이상 삼자의 분화한 발표를 만족하지 않고, 가끔 원시적인 전신적 발현을 하게 되는 것은 누구나 다 경험하고 있는 바이거니와, 그 외에 시가를 표시하는 언어 중에서도 원시시대에는 삼자가 불가분리의 상태에 있었음을 말하여주는 것이 있는 듯하니, 조선은 시가를 표시하는 데 한어 계통어를 빼고는 실로 「노래」라는 한 말로 써 나왔다. 「노래」라는 말은 이를 어원적으로 쓰면 「놀애」라 되어 애는 날애, 돌애, 막애, 갈애 등에 보이는 바와 같이 동사가 명사격으로 변할 때 받는 접미어이고, 그 기본 관념은 「놀」에 있는 것이나, 「놀」의 관념은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으니, 첫째 우리들의 머리에 가장 민속(敏速)히 연상되는 것은 유흥, 희락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놀애」는 「놀이」, 「놀음」이라는 말과도 직접 관계가 있게 된다. 즉 「놀애」, 「놀이」, 「놀음」은 다 「놀」 일어의 발전인데 추상적 성질적 표시어가 되어서는 「놀애」가 되고, 「놀」의 구체적 행동적 표시어가 되어서는 「놀이」 혹은 「놀음」으로 된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놀애」라는 말의 근본 관념을 적확히 파악하려면 그 구체적 표어인 「놀이」, 「놀음」의 관념을 밝힘이 가장 속시(速試)일까 한다.
쪽수▶P60-2以上은 未開人間에서 아직 行하고 있는 實例로 詩歌, 音樂, 舞踊 三者의 互相的 關係를 본 것이니, 일부러 멀▶P61리 그들에 求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러한 關係는 가직히 우리들의 日常 生活中에서도 얻어볼 수 있는 것이다. 첫재 現在의 우리들에 心中의 感情이 激되면 激 될수록, 以上 三者의 分化한 發表를 滿足하지 않고, 가끔 原始的인 全身的 發現을 하게 되는 것은 누구나 다 經驗하고 있는 바이거니와, 그 外에 詩歌를 表示하는 言語中에서도 原始時代에는 三者가 不可分離의 狀態에 있었음을 말하여주는 것이 있는 듯하니, 朝鮮는 詩歌를 表示하는 대 漢語 系統語를 빼고는 實로 「노래」라는 한 말로 써 나왔다. 「노래」라는 말은 이를 語原的으로 쓰면 「놀애」라 되어 애는 날애, 돌애, 막애, 갈애 等에 보이는 바와 같이 動詞가 名詞格으로 變할 때 받는 接尾語이고, 그 基本 觀念은 「놀」에 있는 것이나, 「놀」의 觀念은 여러 가지로 解釋할 수 있으니, 첫재 우리들의 머리에 가장 敏速히 聯想되는 것은 遊興, 戱樂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놀애」는 「놀이」, 「놀음」이라는 말과도 直接 關係가 있게 된다. 即 「놀애」、「놀이」、「놀음」은 다 「놀」 一語의 發展인데 抽象的 性質的 表示語가 되어서는 「놀애」가 되고, 「놀」의 具體的 行動的 表示語가 되어서는 「놀이」 惑은 「놀음」으로 된 것을 斟酌할 수 있다. 그러므로 「놀애」라는 말의 根本 觀念을 的確히 把握할려면 그 具體的 表語인 「놀이」, 「놀음」의 觀念을 밝힘이 가장 速試일가 한다.
「놀이」, 「놀음」은 유흥, 희락, 연향 등을 의미한 말인데 산두(山臺)놀이, 대감놀이, 단오놀이, 추석놀이, 꽃놀이, 뱃놀이, 홍동지놀음, 원놀음, 풍년놀음 등 이들 실례를 보면 잘 그 내용을 알듯이 일종의 음악이라면 음악이라 할 수 있고, 일종의 무용이라면 무용이라 할 수 있고, 또 일종의 가요라면 가요라 할 수 있으며, 이들을 종합한 일종 연극이라면 연극이라도 할 수 있어, 그들 어떤 것에는 충분히 내용을 분화할 수 없을, 마치 코로보리를 대하는 감이 있다. 즉 시가, 음악, 무용이 분화되지 못한 원시시대 시가 상태를 여기에서 볼 수 없는가 하는 감을 얻는다. 그러면 이들 구체적 행동의 명사 「놀이」, 「놀음」에 대한 추상적 성질의 명사 「놀애」 역시 그와 같은 내용를 포함하고 있을 것은 용이히 진단이 될 바와 같이 「노래」는 아직 음악, 무용과 분화하지 않은 시대의 시가에 기여한 명칭이 오늘에 남아온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쪽수▶P61-2「놀이」, 「놀음」은 遊興、戱樂、宴饗 等을 意味한 말인데 산두(山臺)놀이, 대감놀이, 端午놀이, 秋夕놀이, 꽃놀이, 뱃놀이, 紅同知놀음、員놀음, 豊年놀음 等 이들 實例를 보면 잘 그 內容을 알듯이 一種의 音樂이라면 音樂이라 할 수 있고, 一種의 舞踊이라면 舞踊이라 할 수 있고, 또 一種의 歌謠라면 歌謠라 할 수 있으며, 이들을 綜合한 一種 演劇이라면 演劇이라도 할 수 있어, 그들 어떤 것에는 充分히 內容을 分化할 수 없을, 마치 코로보리를▶P62 對하는 感이 있다. 即 詩歌, 音樂, 舞踊이 分化되지 못한 原始時代 詩歌 狀態를 여기에서 볼 수 없는가 하는 感을 얻는다. 그러면 이들 具體的 行動의 名詞 「놀이」, 「놀음」에 對한 抽象的 性質의 名詞 「놀애」 亦是 그와 같은 內容를 包含하고 있을 것은 容易히 進斷이 될 바와 같이 「노래」는 아직 音樂、舞踊과 分化하지 않은 時代의 詩歌에 寄與한 名稱이 오늘에 남아온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상으로 원시 시가의 형태는 거의 천명이 되었을 바와 같이 오늘날의 최저급 문화를 소유하고 있는 민족 사이의 행사, 혹은 현재 우리의 일면적 표현형식으로 보든지, 또는 지금 아직 사용하여 오는 시가 표시어 어원적 해석으로 보든지, 모두 시가, 음악, 무용 삼자가 극히 밀접한 관계에 융합되어 그로오제의 결론을 연역적으로 설명할 수 있었는 듯한데, 시경 대서에는 이 삼자의 관계를 이론적으로 설명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쪽수▶P62-2以上으로 原始詩歌의 形態는 거의 闡明이 되었을 바와 같이 오늘날의 最低級 文化를 所有하고 있는 民族 사이의 行事, 或은 現在 우리의 一面的 表現形式으로 보든지, 또는 지금 아직 使用하여 오는 詩歌 表示語 語源的 解釋으로 보든지, 모두 詩歌, 音樂, 舞踊 三者가 極히 密接한 關係에 融合되어 그로오제의 結論을 演繹的으로 說明할 수 있었는 듯한데, 詩經 大序에는 이 三者의 關係를 理論的으로 說明하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詩者、志之所之也、在心爲志、發言爲詩、情動於中、而形於言、言之不足、故嗟歎之、嗟歎之不足、故永歌之、永歌之不足、不知手之舞之足之蹈之也
쪽수▶P62-3詩者、志之所之也、在心爲志、發言爲詩、情動於中、而形於言、言之不足、故嗟歎之、嗟歎之不足、故永歌之、永歌之不足、不知手之舞之足之蹈之也
토거(土居) 교수는 이 글을 평하여 원문주4▶「전신적 표정에 음악과 시가의 합체한 것이 분리하고, 그것이 각각 독립하여 다시 언어에서 사상이 독립하게 된 과정을 거꾸로 내다본 것이 아닌가」[7] 한 것은 다소 현대적 설명의 색채를 띤 것이나, 요컨대 시경의 설명은 원시시대의 시가 형태를 심리적으로 설명한 데 대하여 주목의 가치가 있을 듯하다.
쪽수▶P62-4土居敎授는 이 글을 評하야 원문주4▶「全身的 表情에 音樂과 詩歌의 合體한 것이 分離하고, 그것이 각각 獨立하야 다시 言語에서 思想이 獨立하게 된 過程을 꺼꾸루 내다본 것이 아닌가」[8] 한 것은 多少 現代的 說明의 色彩를 띤 것이나, 要컨대 詩經의 說明은 原始時代의 詩歌 形態를 心理的으로 說明한대 對하야 注目의 價値가 있을 듯하다.
그러면 우리는 원시 시가에 대하여 자연 다음과 같은 태도를 취하게 될 것이다. 즉 시가를 음악, 무용과 분리할 수 없고, 무악도 시가 동양으로 취급하게 될 것이니, 결국은 이 삼자의 종합적 연구를 하게 되어, 문제는 그중에서 여하히 시가라는 것을 독립적으로 내다본다 하는 것이나, 이것은 다른 이자와 분화되지 않은 이상, 온전히 불가능한 일이고, 다만 추상적으로만이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또 원시 시가에는 그까지 구체적으로 분리하려 할 필요도 없다. 왜 그러냐 하면, 분화하지 않은 이전의 상태 그것이 우리들 목적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론에 있어서도 실로 그러한 태도로서 논술을 진전시키려 한다.
쪽수▶P62-5그러면 우리는 原始 詩歌에 對하야 自然 다음과 같은 態度를 取하게 될 것이다. 即 詩歌를 音樂、舞踊과 分離할 수 없고, 舞樂도 詩歌 同樣으로 取扱하게 될 것이니, 結局은 이 三者의 綜合的 硏究를 하게 되어, 問題는 그中▶P63-1에서 如何히 詩歌라는 것을 獨立的으로 내다본다 하는 것이나, 이것은 다른 二者와 分化되지 않은 以上, 온전히 不可能한 일이고, 다만 抽象的으로만이 認識할 수 있는 것이다. 또 原始 詩歌에는 그까지 具體的으로 分離하러 할 必要도 없다. 왜 그러냐 하면, 分化하지 않은 以前의 狀態 그것이 우리들 目的의 對象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本論에 있어서도 實로 그러한 態度로서 論述을 進展시키려 한다.



































본문3: 조선 원시 시가에 관한 문헌


조선 원시 시가에 관한 조선편의 불행히 많이 전(傳)을 못 하였고, 겨우 인방 지나(支那)편에서 얼마끔 얻어볼 수 있는 것은 일종 기적이라 할 수 있겠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에
쪽수▶P63-2朝鮮 原始 詩歌에 關한 朝鮮편의 不幸히 많이 傳를 못 하였고, 겨우 隣邦 支那편에서 얼마끔 얻어볼 수 있는 것은 一種 奇蹟이라 할 수 있겠다. 後漢書 東夷傳에
夏后氏太康失德、夷人始畔、自少康己後、世服王化、家賓於王門、獻其樂舞
쪽수▶P63-3夏后氏太康失德、夷人始畔、自少康己後、世服王化、家賓於王門、獻其樂舞
라 한 것이 글자대로 보아서는 지나에 알리게 된 동방 악무의 최초일 것 같으나, 첫째 시대에 있어 신용하기 어렵고, 또 그 소위 「이인(夷人)」의 지칭도 좀 막연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동전(同傳) 중에 「東夷率皆土署, 喜飮酒歌舞」라 한 것은 동이인의 무악을 호(好)하는 특성에 대하여 주의한 고래 지나인의 전평(傳評)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 동이라 하는 것은 반듯이 조선만을 지시한 것은 아니다. 널리 말하면 오늘에 만주, 일본이 다 이 칭호에 쓸어갈 것이니까, 이로써 조선에 당한 것이라 할 수는 없지마는, 「희가무(喜歌舞)」란 말은 뒤에 보아도 알 바와 같이 거의 상습적으로 지나인이 조선에 대하여 쓰는 문자이니까, 감히 조선을 말한 것이리라 하여도 가할 듯한데, 위지(魏志)를 위시하야 여러 사료 문헌에 조선 방면의 기록이 산재하여 있으나, 이것을 사료별로 하면 도리어 번잡한 듯하니, 이하 지방별로 이를 정리하여 보자.
쪽수▶P63-4라 한 것이 글자대로 보아서는 支那에 알리게 된 東方樂舞의 最初일 것 같으나, 첫재 時代에 있어 信用하기 어렵고, 또 그 所謂 「夷人」의 指稱도 좀 漠然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同傳中에 「東夷率皆土署, 喜飮酒歌舞」라 한 것은 東夷人의 舞樂을 好하는 特性에 對하야 注意한 古來 支那人의 傳評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 東夷라 하는 것은 반듯이 朝鮮▶P64만을 指示한 것은 아니다. 널리 말하면 오늘에 滿洲, 日本이 다 이 稱號에 쓸어갈 것이니까, 이로서 朝鮮에 當한 것이라 할 수는 없지마는, 「喜歌舞」란 말은 뒤에 보아도 알 바와 같이 거의 常習的으로 支那人이 朝鮮에 對하야 쓰는 文字이니까, 敢히 朝鮮을 말한 것이리라 하여도 可할 듯한데, 魏志를 爲始하야 여러 史料 文獻에 朝鮮 方面의 記錄이 散在하여 있으나, 이것을 史料別로 하면 도리어 繁雜한 듯하니, 以下 地方別로 이를 整理하여 보자.
부여. 부여는 지금 만주의 신경, 길림 지방에 있던 민족으로 직접 우리 조선과는 관계가 멀지 모르겠지만은, 후세 북부 조선의 패권을 잡은 고구려가 그 일부족이라고도 생각되니까, 간접으로 조선 내지 문화에 영향한 바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문화사상 조선 내에 편입하야 설명의 편의를 얻고자 하나,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에는 그들에 시가 생활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쪽수▶P64-2夫餘. 夫餘는 지금 滿洲의 新京, 吉林地方에 있던 民族으로 直接 우리 朝鮮과는 關係가 멀지 모르겠지마는, 後世 北部朝鮮의 覇權을 잡은 高句麗가 그 一部族이라고도 생각되니까, 間接으로 朝鮮內地 文化에 影響한 바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文化史上 朝鮮內에 編入하야 說明의 便宜를 얻고저 하나, 魏志 東夷傳에는 그들에 詩歌 生活를 다음과 같이 記錄하였다.
以殷正月祭天, 國中大會, 連日飮食歌舞, 名日迎鼓, 是時斷形獄, 解囚徒, ……(中略)……有軍事亦祭天, 殺生觀蹄, 以占其告凶
쪽수▶P64-3以殷正月祭天, 國中大會, 連日飮食歌舞, 名日迎鼓, 是時斷形獄, 解囚徒 ……(中略)……有軍事亦祭天, 殺生觀蹄, 以占其告凶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에도 은(殷) 정월(正月)이 납월(臘月)로 되어 있는 이외에는 대강 동양 의미의 것이 써 있는데, 이로써 부여의 시가 생활은 두 가지 다른 성질의 것이 있는 것을 알겠다. 즉 하나는 은(殷) 정월(납월(正月(臘月))에 국중 연례행사로서 제천의전(祭天儀典)에 행하게 되는 가무요 또 하나는 비상적 행사로서 군사가 있을 때에 가무를 연행하여 제천의 의를 올리는 것이다.
쪽수▶P64-4後漢書 東夷傳에도 殷 正月이 臘月로 되어있는 以外에는 大綱 同樣 意味읫 것이 씨어 있는데, 일로서 夫餘의 詩歌 生活은 두 가지 다른 性質의 것이 있는 것을 알겠다. 即 하나는 殷 正月(臘月)에 國中 例年行事로서 祭天儀典에 行하게 되는 歌舞요 또 하나는 非常的 行事로서 軍事가 있을 때에 歌舞를 演行하야 祭天의 儀를 올리는 것이다.
고구려. 고구려는 북부 조선에 지반을 가지고 있어, 지나와 직접 인접한 관계상 비교적 일부러 지나의 영향을 받았으리라 믿는다.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에 「漢時賜鼓吹技人」이라 하였고, 후한서(後漢書)에는 한무제(漢武帝) 시에 「賜鼓吹技人」이라 한 것으로 보면, 무슨 형식으로나마 지나악(支那樂)이 조선에 수입되어 본국 가락에 영향을 주었을 것도 노상 못 믿을 일은 아닐 것 같다. 이상 기록과 같이 국가 대 국가 관계에 가무음악이 유전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민간적으로 그러한 사실이 있었으리라는 것은 지리적 관계로 보아서 구태여 억측은 되지 않으리라 한다. 그러나 이 지나악(支那樂) 전래(傳來) 운운은 문화가 비교적 발달한 후대의 일이겠는데, 동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에는 그보다 더 원시적이고 또 고유의 시가적 생활을 기록한 듯한 것이 있으니 즉
쪽수▶P64-5高句麗. 高句麗는 北部朝鮮에 地盤을 가지고 있어, 支那와 直接 隣接한 關係上 比較的 일부러 支那의 影響▶P65을 받았으리라 믿는다. 魏志 東夷傳에 「漢時賜鼓吹技人」이라 하였고, 後漢書에는 漢武帝時에 「賜鼓吹技人」이라 한 것으로 보면, 무슨 形式으로나마 支那樂이 朝鮮에 輸入되어 本國 歌樂에 影響을 주었을 것도 노상 못 믿을 일은 아닐 것 같다. 以上 記錄과 같이 國家對國家 關係에 歌舞音樂이 流傳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民間的으로 그러한 事實이 있었으리라는 것은 地理的 關係로 보아서 구태여 臆測은 되지 않으리라 한다. 그러나 이 支那樂 傳來 云云은 文化가 比較的 發達한 後代의 일이겠는데, 同 後漢書 東夷傳에는 그보다 더 原始的이고 또 固有의 詩歌的 生活을 記錄한 듯한 것이 있으니 即
其俗淫, 皆潔淨自喜, 暮夜輒男女羣聚倡樂, 好祠鬼神社稷零星, 常十月祭天, 大會, 名曰東盟, 其國東有大穴, 號襚神, 亦常十月迎而祭之, 云云
쪽수▶P65-2其俗淫, 皆潔淨自喜, 暮夜輒男女羣聚倡樂, 好祠鬼神社稷零星, 常十月祭天, 大會, 名曰東盟, 其國東有大穴, 號襚神, 亦常十月迎而祭之, 云云
이다.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에서도 뜸뜸이 이상과 같은 기록을 주어모을 수 있다. 즉
쪽수▶P65-3이다. 魏志 東夷傳에서도 뜸뜸이 以上과 같은 記錄을 주어모을 수 있다. 即
北民喜歌舞, 國中邑落, 暮夜男女羣聚, 相就歌戱……中略……以十月祭天, 國中大會, 名曰東盟……中略……其國東有大穴, 名隧穴, 十月國中大會, 迎隧神, 還於國東上祭之, 置木隧神御坐
쪽수▶P65-4北民喜歌舞, 國中邑落, 暮夜男女羣聚, 相就歌戱……中略……以十月祭天, 國中大會, 名曰東盟……中略……其國東有大穴, 名隧穴, 十月國中大會, 迎隧神, 還於國東上祭之, 置木隧神御坐
라 한 것이다. 이는 요컨대 고구려에는 매년 10월에 동맹이라는 하늘에 받드는 제의와 국가지신인 수신(隧神)에 받드는 제의와 양대 제의가 있었는데, 이때에는 국중 대회가 열리어 모야(暮夜)에 남녀가 군취(羣聚)하여 (상취가희)相就歌戱를 하였으나, 이것이 전민족적 제의임에 따라 일이일에 마치는 것이 아니고 수일간에 긍하야 행하였으므로 기민(其民) 희가무(喜歌舞)라 이를 만큼 극히 성대하였었다는 것이 되겠다.
쪽수▶P65-5라 한 것이다. 이는 要컨대 高句麗에는 每年 十月에 東盟이라는 하늘에 받드는 祭儀와 國家之神인 隧神에 받드는 祭儀와 兩大 祭儀가 있었는데, 이때에는 國中 大會가 열리어 暮夜에 男女가 群聚하야 相就歌戱를 하였으나, 이것이 全民族的 祭儀임에 따라 一二日에 마치는 것이 아니고 數日間에 亘하야 行하였으므로 其民 喜歌舞라 이를 만큼 極히 盛大하였었다는 것이 되겠다.
고구려의 시가 생활에 대한 기록은 이상의 것 이외에 수서(隋書) 동이전(東夷傳)에 또 하나 있는 것을 보겠다. 즉
쪽수▶P66-1高句麗의 詩歌生活에 對한 記錄은 以上의 것 以外에 隋書 東夷傳에 또 하나 있는 것을 보겠다. 即
死者殯於屋內, 經三年, 擇吉日而葬, 居父母及夫之喪, 服皆三年, 兄弟三月, 初終哭泣, 葬則鼓舞作樂以送之, 埋訖, 悉取死者生時服翫車馬, 置於墓側, 會葬者, 爭取而去
쪽수▶P66-2死者殯於屋內, 經三年, 擇吉日而葬, 居父母及夫之喪, 服皆三年, 兄弟三月, 初終哭泣, 葬則鼓舞作樂以送之, 埋訖、悉取死者生時服翫車馬, 置於墓側, 會葬者, 爭取而去
라는 것이니, 송사지시(送死之時)에 고무작악(鼓舞作樂)을 한다는 것이다. 부모(父母) 급 부(夫)의 복(服)은 삼 년이고 형제지복(兄弟之服)은 2월 운은 지나(支那) 예(禮)의 영향을 입은 듯하지만은, 고무작악(鼓舞作樂)이란 것은 그러한 영향을 받지 않은 훨씬 이전의 유산이라 하겠다.
쪽수▶P66-3라는 것이니, 送死之時에 鼓舞作樂을 한다는 것이다. 父母 及 夫의 服은 三年이고 兄弟之服은 二月 云은 支那禮의 影響은 입은 듯하지마는、鼓舞作樂이란 것은 그러한 影響을 받지 않은 훨신 以前의 遺産이라 하겠다.
예(濊). 예(濊)는 지금 강원도 지방에 있어, 북은 고구려, 옥저, 남은 진한에 접하고, 동은 대해에 임하야 입국한 것인데, 소위 사적에 예맥(濊貊)이라 하는 것이다. 그의 시가적 생활을 기록한 것으로는 위지(魏志) 급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에
쪽수▶P66-4濊. 濊는 지금 江原道 地方에 있어, 北은 高句麗, 沃沮, 南은 辰韓에 接하고, 東은 大海에 臨하야 立國한 것인데, 所謂 史籍에 濊貊이라 하는 것이다. 그의 詩歌的 生活울 記錄한 것으로는 魏志 及 後漢書 東夷傳에
常用十月祭天, 晝夜飮酒歌儛, 名之儛天
쪽수▶P66-5常用十月祭天, 晝夜飮酒歌儛, 名之儛天
이라는 것이 있다. 간단한 기록이나 고구려의 동맹과 동양 성질의 것이란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쪽수▶P66-6이라는 것이 있다. 簡單한 記錄이나 高句麗의 東盟과 同樣 性質의 것이란 것은 쉽게 想像할 수 있다.
한(韓). 여기 한(韓)이라 한 것은 진한, 변한, 마한을 한데 부른 것인데, 부여, 고구려, 예 등의 북방 민족에 대하여 남방 민족이라고도 할 수 있다. 후세적 발전은 드디어 조선 반도를 통일하여 현 조선 민족의 중추가 될 민족이다. 따라서 그들의 문화 내지 시가적 생활도 직접 오늘에 미친 바 영향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진, 변, 마 삼한은 다 각기 경계를 지어 독립적 국가를 세웠으니까, 엄밀히 말하면 그들의 각각 생활은 또한 다를 점이 있었을지 모르지만은, 북방 대 남방과 같이 그다지 심한 차이가 없고, 대체에 있어 대동소이의 격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시가 방면에 대한 기록으로는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에
쪽수▶P66-7韓. 여기 韓이라 한 것은 辰韓, 弁韓, 馬韓을 한대 부른 것인데, 夫餘, 高句麗, 濊 等의 北方民族에 對하야 南方民族이라고도 할 수 있다. 後世的 發展은 드디어 朝鮮半島를 統一하야 現 朝鮮民族의 中樞가 될 民族이다. 따라서 그들의 文化 乃至 詩歌的 生活도 直接 오늘에 미친바 影響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辰, 弁, 馬 三韓은 다 各其 境界를 지어 獨立的 國家를 세웠으니까, 嚴密히 말하면 그들의 各各 生活은 또한 다를 點이 있었을지 모르지마는, 北方對南方과 같이 그다지 甚한 差異가 없고, 大體에 있어 大同小異의 格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詩歌 方面에 對한 記錄으로는 魏志 東夷傳에
常以五月下種訖, 祭鬼神, 群聚歌舞飮酒, 晝夜無休, 其舞數十人俱起相隨, 蹋地低昻, 手足相應, 節奏有似鐸舞, 十月農功畢, 亦復如之, 云云
쪽수▶P67-1常以五月下種訖, 祭鬼神, 群聚歌舞飮酒, 晝夜無休, 其舞數十人俱起相隨, 蹋地低昻, 手足相應, 節奏有似鐸舞, 十月農功畢, 亦復如之, 云云
이라 하였고,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에도 대강 동양의 것을 말하였다. 이것은 마한에 대한 기록으로 되어었지만은, 이 기록만으로 보면 농업에 관계한 가무라 볼 수 있는데, 남부 조선은 특히 마한이라 할 것 없이 전체적으로 농업이 발달하였으니까, 그러한 가무는 마한만이 가졌을 것이 아니고, 삼한이 공통히 가지었을 것인 듯하다. 즉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의 진한에 대한 기록
쪽수▶P67-2이라 하였고, 後漢書 東夷傳에도 大綱 同樣의 것을 말하였다. 이것은 馬韓에 對한 記錄으로 되어었지마는, 이 記錄만으로 보면 農業에 關係한 歌舞라 볼 수 있는데, 南部朝鮮은 特히 馬韓이라 할 것 없이 全體的으로 農業이 發達하였으니까, 그러한 歌舞는 馬韓만이 가젔을 것이 아니고, 三韓이 共通히 가지었을 것인 듯하다. 即 後漢書 東夷傳의 辰韓에 對한 記錄
俗喜歌舞飮酒鼓瑟
쪽수▶P67-3俗喜歌舞飮酒鼓瑟
이라 한 것도 구체적으로 펴 말하면, 역시 마한의 그것과 같은 사실을 말하는 것이 되지 않을까 한다. 대체로 삼한과 지나와의 교통을 생각하여 보면, 지리적 환경은 자연 마한이 앞서 열리고 진한과 변한은 그에 떨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후대의 기록으로 볼지라도 정립(鼎立)하야 각기 지나에 교섭하게 될 때 신라가 가장 뒤떨어져 백제의 소개에 의하여 견당사(遣唐使)를 보냈다. 따라서 훨씬 상대에 있어서야 마한보다 진, 변한에 피토인(彼土人)의 견문이 넉넉히 미치지 못하였을 것은 용이히 상상을 허락할 수 있으니, 마한의 가무에 대한 기록은 이것을 삼한 전체의 대표적 기록이라 보아두는 것도 과차(過差) 없으리라 믿는다.
쪽수▶P67-4이라 한 것도 具體的으로 펴어 말하면, 亦是 馬韓의 그것과 같은 事實을 말하는 것이 되지 않을가 한다. 大體로 三韓과 支那와의 交通을 생각하여 보면, 地理的 環境은 自然 馬韓이 앞서 열리고 辰韓과 弁韓은 그에 떨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後代의 記錄으로 볼지라도 鼎立하야 各其 支那에 交涉하게 될 때 新羅가 가장 뒤떨어져 百濟의 紹介에 依하야 遣唐使를 보냈다. 따라서 훨신 上代에 있어서야 馬韓보다 辰, 弁韓에 彼土人의 見聞이 넉넉히 미치지 못하였을 것은 容易히 想像을 許諾할 수 있으니、馬韓의 歌舞에 對한 記錄은 이것을 三韓 全體의 代表的 記錄이라 보아두는 것도 過差 없으리라 믿는다.
가락. 다음은 남부 조선의 일각에 있어 삼한 이외의 지역을 할거한 가락국의 문헌을 하나 들 수 있는데, 삼국유사(三國遺事) 가락국기(駕洛國記)에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기록을 볼 수 있다.
쪽수▶P67-5駕洛. 다음은 南部朝鮮의 一角에 있어 三韓 以外의 地域을 割據한 駕洛國의 文獻을 하나 들 수 있는데, 三國遺事 駕洛國記에 다음과 같은 滋味있는 記錄을 볼 수 있다.
屬後漢世祖光武帝建武十八年壬寅三月禊洛之日, 所居北龜旨, 有殊常聲氣呼喚, 衆庶二三百人集會於此, 有如人音, 隱其形而發其音曰, 此有人否, 九干等云, 吾徒在, 又日, 吾所在爲何, 對云龜旨也, 又曰, 皇天所以命我者, 御是處, 惟新家邦, 爲君后, 爲茲故降矣, 你等須掘峯頂撮土, 歌之云, 龜何龜何, 首其現也, 若不現也, 播灼而喫也, 以之蹈舞, 則是迎大王, 歡喜踴躍之也, 九干等如其言, 咸忻而歌舞, 未幾仰而觀之, 唯紫繩自天垂而着地, 尋繩之下, 乃見紅幅裏金合子, 開而視之, 有黃金卵六, 圓如日者, 衆人悉皆驚喜, 俱伸百拜, 云云
쪽수▶P68-1屬後漢世祖光武帝建武十八年壬寅三月禊洛之日, 所居北龜旨, 有殊常聲氣呼喚, 衆庶二三百人集會於此, 有如人音, 隱其形而發其音曰, 此有人否, 九干等云, 吾徒在, 又曰, 吾所在爲何, 對云龜旨也, 又曰, 皇天所以命我者, 御是處, 惟新家邦, 爲君后, 爲茲故降矣, 你等須掘峯頂撮土, 歌之云, 龜何龜何, 首其現也, 若不現也, 播灼而喫也, 以之蹈舞, 則是迎大王, 歡喜踴躍之也, 九干等如其言, 咸忻而歌舞, 未幾仰而觀之, 唯紫繩自天垂而着地, 尋繩之下, 乃見紅幅裏金合子, 開而視之, 有黃金卵六, 圓如日者, 衆人悉皆驚喜, 俱伸百拜, 云云
이것은 가락국 조창(肇創) 당시의 전설에 나오는 말이니, 원시시대인의 시가적 생활을 규찰(窺察)함에는 가장 중요한 문헌이라 하겠고, 또 시대는 다소 뒤떨어질지언정, 조선 내의 기록이란 점으로 보아 신(信)을 둘 만한 점이 충분히 있을 듯하다. 외인의 기록 더욱이 시가와 같은 내면적 생활의 기록이란 것은 흔히 피상적 기록에 마치고 그 내면까지 들어가 주관을 건드리기가 극히 곤란하다. 또 그들은 그만한 책임을 갖지 않는다. 다만 들은 바의 풍평(風評)이라든지, 혹은 보는 바의 그 상태를 기술하면 그들의 일을 마친다. 그러나 국내인의 기록은 그렇게 할 수 없다. 풍평이라 할지라도 비교적 확실한 것을 들을 수 있고, 보는 것도 내 자신에 소환하야 진실히 볼 수 있다. 따라서 그 기술은 어느 정도까지 내용적이라 할 수 있으니, 가락국기의 문헌은 옥중가옥(玉中佳玉)이라 하겠다.
쪽수▶P68-2이것은 駕洛國 肇創 當時의 傳說에 나오는 말이니, 原始時代人의 詩歌的 生活을 窺察함에는 가장 重要한 文獻이라 하겠고, 또 時代는 多少 뒤떨어질지언정, 朝鮮內의 記錄이란 點으로 보아 信을 둘 만한 點이 充分히 있을 듯하다. 外人의 記錄 더욱이 詩歌와 같은 內面的 生活의 記錄이란 것은 흔히 皮相的 記錄에 마치고 그 內面까지 들어가 主觀을 건드리기가 極히 困難하다. 또 그들은 그만한 責任을 갖지 않는다. 다만 들은 바의 風評이라든지, 或은 보는 바의 그 狀態를 記述하면 그들의 일을 마친다. 그러나 國內人의 記錄은 그렇케 할 수 없다. 風評 이라 할지라도 比較的 確實한 것을 들을 수 있고, 보는 것도 내 自身에 訴喚하야 眞實히 볼 수 있다. 따라서 그 記述은 어느 程度까지 內容的이라 할 수 있으니, 駕洛國記의 文獻은 玉中佳玉이라 하겠다.


































본문4: 그 문헌의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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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68-3以上으로 上古 朝鮮에 關한 詩歌生活 方面의 記錄은 大綱 涉取되었을 듯싶다. 그러나 이것은 있는 그대로의 記▶P69錄에 지나지 못하는, 말하자면 우리들 詩歌 硏究의 一 材料로서 單純한 事實을 羅列한대 지나지 못한다. 우리는 다시 이들 材料를 有機的으로 綜合하야 그中에 흐르는 精神을 把握하지 않으면 안 되겠으나, 于先 以上 亂雜한 事實的 記錄을 한군데 一括하야 본다면 結局은 左記 三個條에 몰아넣을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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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69-21, 定期 或은 非常時의 國民的 大祭天、祭神儀典에 行하는 歌舞(夫餘의 迎鼓, 高句麗의 東盟, 隧神祭、濊의 儛天, 三韓의 農業歌舞, 高句麗의 祝戰歌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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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69-32, 祈禱, 呪願에 行하는 歌舞, (駕洛의 迎王歌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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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69-43, 葬儀에 行하는 歌舞、(高句麗의 送死歌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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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69-5그런데 이 三個條란 것도 다시 한번 通覽하면, 그기는 實로 祭典 即 神의 觀念이 一貫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夫餘의 迎鼓와 祝戰、高句麗의 東臨, 濊의 儛天, 三韓의 農歌는 文字上에 나타난 事實이니까 말할 것도 없지마는, 駕洛의 祈願歌舞도 神을 奉事하는 觀念이 있고 高句麗의 葬儀歌舞란 것도 亡人의 靈魂 即 아니미슴의 思想이 있는 것이니, 異常하기도 그 思想觀念이 一貫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歌舞와 神과의 관계가 이와 같이도 깊은 것이 있다 한다면, 後日 우리 詩歌 硏究의 主觀點도 果然 어디 두어야 될 것도 얼마큼 想像이 될 듯싶다. 그러면 앞에 摘出한 文獻은 어떻게 解釋할 것인가. 以上 三個條를 各個別로 그 性質을 밝히어 우리 詩歌이 原始 形態를 덧보아 보자.












































본문5: 원시 종교와 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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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6: 결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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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


TripleData




Data Network






주석


  1. 안등홍(安藤弘) 역 「藝術の始原」 364頁.
  2. 동상(同上) 321-323頁.
  3. 安藤弘 譯 「藝術の始原」 三六四頁
  4. 同 上 三二一 - 三二三頁
  5. 동상(同上) 262-263頁.
  6. 同 上 二六二 - 二六三頁
  7. 토거광지(土居光知) 저 「문학서설」 제2판. 38頁.
  8. 土居光知 著 「文學序說」 第二版. 三八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