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영"의 두 판 사이의 차이

North Korea Human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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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서는 서울대학교 "[[:분류:2025-2 BigData(SNU)|25-2 미디어위키를 활용한 역사 데이터 편찬]]" 수강생([[최여림(SNU2025)]])이 작성했습니다.'''</big></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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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center><big>'''👩🏻‍🏫본 문서는 서울대학교 "[[:분류:2025-2 BigData(SNU)|25-2 미디어위키를 활용한 역사 데이터 편찬]]" 수강생([[최여림(SNU2025)]])이 작성했습니다.'''</big></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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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정보 |사진= 김준영.jpg |사진출처= maniadb (http://www.maniadb.com/artist/102360) |대표명= 김준영(金駿泳) |한글명= 김준영 |한자명= 金駿泳 |영문명= Kim Jun-yeong |가나명= |이칭= 아사히나 노보루(朝比奈昇) |성별= 남 |생년= 1907 |몰년= 1961 |출신지= 황해도 옹진 |전공= 작곡 }} {{인물항목 |데이터={{FULLPAGENAME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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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내용= '''김준영'''(金駿泳, [[1907]]년 ~ [[1961]]년)은 [[Tag:HistoricalPeriod_일제강점기|일제강점기]]에 주로 활동한 [[대한민국]]의 [[Tag:Occupation_작곡가|작곡가]]이다.<ref name="kmdb">"[김준영]", <html><online style="color:purple">『KMDb -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sup>online</sup></online></html>, 한국영상자료원.</ref> 그는 [[황해도 옹진]]에서 태어나 [[배제고등보통학교]]와 일본 [[도쿄]]의 [[도요음악학교]]에서 수학하며 음악적 재능을 키웠다.<ref name="kmdb"/> 이후 [[조선중앙방송국]] 악단에서 활동하며 ''''처녀총각'''' 등 수많은 [[인기곡]]들을 작곡하여 대중음악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ref name="kmdb"/><ref name="donga_jang">[[장유정]], 「[https://www.donga.com/news/Opinion/article/all/20230330/118593457/1 [장유정의 음악 정류장] [74] '처녀총각'의 복잡한 심경]」, <html><online style="color:purple">『동아닷컴』<sup>online</sup></online></html>, 동아일보, 작성일: [[2023]]년 03월 30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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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 활동 시작 및 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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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1930년대_초]]부터 [[1940년대_초]]까지 '''김준영'''은 [[조선중앙방송국]] 악단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당시 대중음악계의 주요 인물로 부상했다.<ref name="dic_pop_arts">[[강옥희]] 외, 『[[식민지시대_대중예술인_사전]]』, [[소도]], [[2006]].</ref> 특히 [[1934]]년에는 [[강홍식]]이 부른 ''''처녀총각'''' (범오 작사)을 작곡하여 대중적인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이는 [[Tag:MusicalGenre_신민요|신민요]] [[Tag:MusicalMovement_신민요_열풍|장르]]의 열풍을 주도하는 계기가 되었다.<ref name="donga_jang"/> 이 곡은 발매 1년여 만에 [[3만_장]]의 음반이 팔릴 정도로 당시의 [[밀리언셀러]]에 해당하는 인기를 얻었으며, 이를 계기로 '''김준영'''은 작곡가로서 명성을 확고히 굳히게 되었다.<ref name="donga_jang"/><ref name="donga_1973">『[[동아일보]]』, [[1973]].03.19. 5면. (해당 기사는 [[김준영]] 인물 정보의 참고문헌으로 <html><online style="color:purple">『KMDb -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sup>online</sup></online></html>에서 확인됨)</ref> 이후에도 그는 '''개나리_고개''''', '''홍도야_울지_마라'''' 등 다수의 [[인기곡]]들을 연달아 작곡하며 대중가요계의 중요한 인물로 자리매김했다.<ref name="km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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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1930년대 초부터 1940년대 초까지 '''김준영'''은 {{TagInstitution|조선중앙방송국}} 악단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당시 대중음악계의 주요 인물로 부상했다.<ref name="dic_pop_arts">[[강옥희]] 외, 『[[식민지시대_대중예술인_사전]]』, [[소도]], 2006.</ref> 특히 1934년에는 {{TagPerson|강홍식}}이 부른 ''''처녀총각'''' (범오 작사)을 작곡하여 대중적인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ref name="donga_jang"/> 이는 {{TagMusicalGenre|신민요}} {{TagMusicalMovement|신민요 열풍}}을 주도하는 계기가 되었다.<ref name="donga_jang"/> 이 곡은 발매 1년여 만에 3만 장의 음반이 팔릴 정도로 당시의 밀리언셀러에 해당하는 인기를 얻었으며,<ref name="donga_jang"/><ref name="donga_1973">『동아일보』, 1973.03.19. 5면. (해당 기사는 김준영 인물 정보의 참고문헌으로 <html><online style="color:purple">『KMDb -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sup>online</sup></online></html>에서 확인됨)</ref> 이를 계기로 '''김준영'''은 작곡가로서 명성을 확고히 굳히게 되었다.<ref name="donga_jang"/> 이후에도 그는 '''개나리_고개''''', '''홍도야_울지_마라'''' 등 다수의 인기곡들을 연달아 작곡하며 대중가요계의 중요한 인물로 자리매김했다.<ref name="km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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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음악 활동 및 일제 협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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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1939]]년 영화 '''<사랑에_속고_돈에_울고>'''의 음악을 시작으로 '''김준영'''은 [[Tag:ArtForm_영화음악|영화 음악]] 작곡 분야에도 새롭게 참여하기 시작했다.<ref name="kmdb"/> 그는 이후 '''<집_없는_천사>''''', '''<지원병>''''', '''<반도의_봄>'''([[1941]]), 그리고 '''<병정님>'''([[1944]]) 등 여러 영화 작품의 음악을 담당하며 활동 영역을 넓혔다.<ref name="kmdb"/> 특히 [[1944]]년 영화 '''<병정님>'''에서는 주제가 '''<日本男兒>''' 등을 작곡했으며, 이 시기에는 '''아사히나 노보루'''(朝比奈昇)라는 [[필명]]을 사용하기도 했다.<ref name="ohmynews">[[이준희]],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888204 다국적 위문단, '황군(皇軍) 만들기'에 몸바쳤네 - 발굴 영화 <병정님(兵隊さん)> 엿보기]」, <html><online style="color:purple">『오마이뉴스』<sup>online</sup></online></html>, 오마이뉴스, 작성일: [[2008]]년 05월 14일.</ref> 또한, [[1943]]년에는 [[김태오]]가 작사한 [[Tag:MusicalGenre_군국가요|군국가요]] '''<승전가>'''의 작곡과 편곡을 맡아 발표하는 등 [[Tag:HistoricalPeriod_일제강점기|일제강점기]] [[Tag:ControversialConcept_전시체제_협력|전시체제]] 협력에 관여한 행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ref name="cctoday">[[최정복]], 「[https://www.c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20293 충남일보-광복 63년, 친일잔재를 말한다]」, <html><online style="color:purple">『충청투데이』<sup>online</sup></online></html>, 충청투데이, 작성일: [[2008]]년 08월 13일.</ref> 이러한 활동은 그의 음악적 업적과 더불어 논란의 여지를 남겼다.<ref name="cc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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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1939년 영화 '''<사랑에_속고_돈에_울고>'''의 음악을 시작으로 '''김준영'''은 {{TagArtForm|영화 음악}} 작곡 분야에도 새롭게 참여하기 시작했다.<ref name="kmdb"/> 그는 이후 '''<집_없는_천사>''''', '''<지원병>''''', '''<반도의_봄>'''(1941), 그리고 '''<병정님>'''(1944) 등 여러 영화 작품의 음악을 담당하며 활동 영역을 넓혔다.<ref name="kmdb"/> 특히 1944년 영화 '''<병정님>'''에서는 주제가 '''<日本男兒>''' 등을 작곡했으며,<ref name="ohmynews">[[이준희]],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888204 다국적 위문단, '황군(皇軍) 만들기'에 몸바쳤네 - 발굴 영화 <병정님(兵隊さん)> 엿보기]」, <html><online style="color:purple">『오마이뉴스』<sup>online</sup></online></html>, 오마이뉴스, 작성일: 2008년 05월 14일.</ref> 이 시기에는 '''아사히나 노보루'''(朝比奈昇)라는 필명을 사용하기도 했다.<ref name="ohmynews"/> 또한, 1943년에는 {{TagPerson|김태오}}가 작사한 {{TagMusicalGenre|군국가요}} '''<승전가>'''의 작곡과 편곡을 맡아 발표하는 등 {{TagHistoricalPeriod|일제강점기}} 말 전시체제 협력에 관여한 행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ref name="cctoday">[[최정복]], 「[https://www.c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20293 충남일보-광복 63년, 친일잔재를 말한다]」, <html><online style="color:purple">『충청투데이』<sup>online</sup></online></html>, 충청투데이, 작성일: 2008년 08월 13일.</ref> 이러한 활동은 그의 음악적 업적과 더불어 논란의 여지를 남겼다.<ref name="cc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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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활동 및 사망'''===
 
==='''해방 이후 활동 및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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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상자|
|내용= [[광복]] 이후 [[1947]]년 '''김준영'''은 [[도쿄]]로 건너가 '''아사히나 노보루'''라는 예명으로 활동하다가 [[1961]]년에 사망했다.<ref name="dic_pop_arts"/> 일본에서의 구체적인 활동 내용은 명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그의 대표곡 ''''처녀총각''''은 [[1940년대]] [[일본]]에서 ''''쓰키노한토''''('月の半島')라는 이름으로 소개될 만큼 높은 인지도를 가졌다.<ref name="donga_jang"/> 또한, [[광복]] 이후 [[북한]]에서는 ''''새봄을_노래하네''''로 개작되어 불리기도 했으며, [[1960년대]]에는 [[독일]]에서 ''''빈트 바이 나흐트''''('Wind_bei_Nacht')라는 제목으로 [[최정환]]에 의해 음반에 실려 [[유럽]]에 소개되는 등 국경을 넘어 그 [[Tag:CulturalInfluence_문화적_영향력|영향력]]을 보여주었다.<ref name="donga_j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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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광복 이후 1947년 '''김준영'''은 도쿄로 건너가 '''아사히나 노보루'''라는 예명으로 활동하다가 1961년에 사망했다.<ref name="dic_pop_arts">[[강옥희]] 외, 『[[식민지시대_대중예술인_사전]]』, [[소도]], 2006.</ref> 일본에서의 구체적인 활동 내용은 명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ref name="dic_pop_arts"/> 그의 대표곡 ''''처녀총각''''은 1940년대 일본에서 ''''쓰키노한토''''('月の半島')라는 이름으로 소개될 만큼 높은 인지도를 가졌다.<ref name="donga_jang">[[장유정]], 「[https://www.donga.com/news/Opinion/article/all/20230330/118593457/1 [장유정의 음악 정류장] [74] '처녀총각'의 복잡한 심경]」, <html><online style="color:purple">『동아닷컴』<sup>online</sup></online></html>, 동아일보, 작성일: 2023년 03월 30일.</ref> 또한, 광복 이후 북한에서는 ''''새봄을_노래하네''''로 개작되어 불리기도 했으며,<ref name="donga_jang"/> 1960년대에는 독일에서 ''''빈트 바이 나흐트''''('Wind_bei_Nacht')라는 제목으로 {{TagPerson|최정환}}에 의해 음반에 실려 유럽에 소개되는 등 국경을 넘어 그 {{TagCulturalInfluence|문화적 영향력}}을 보여주었다.<ref name="donga_j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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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총각'의 음악적 특징과 혼종성'''===
 
===''''처녀총각'의 음악적 특징과 혼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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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상자|
|내용= '''김준영'''이 작곡한 대표곡 ''''처녀총각''''은 [[Tag:MusicalCharacteristics_혼종성|혼종적]]인 음악적 특징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ref name="leesoyoung">[[이소영]], 「[https://www.earticle.net/Article/ArticleDetail/46487 일제강점기 신민요의 혼종성]」, 『낭만음악』19권 3호, 낭만음악사, [[2007]], 191-307쪽.</ref> 이 곡은 [[Tag:MusicalConcept_신반경토리|신반경토리]]로 분류되는데, 이는 전통적인 [[반경토리]]가 서양 단음계를 수용하며 [[양악화]]된 선법을 의미하는 독특한 음악적 접근 방식이다.<ref name="leesoyoung"/> 특히 ''''처녀총각''''의 선법은 La―do―re―mi―sol―la―si의 출현음을 가지지만, si음은 주로 [[옥타브]] 위에서 [[장식음]]으로만 사용되어 전체 선율 진행의 기본 골격인 la―mi/re―La의 완전4도 연접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특징을 지닌다.<ref name="leesoyoung"/><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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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김준영'''대표곡 ''''처녀총각''''은 전통적인 반경토리에 서양 단음계를 수용한 {{TagMusicalConcept|신반경토리}} 선법과 {{TagMusicalConcept|동살풀이}} 계열의 2소박 4박자 리듬을 결합한 {{TagMusicalCharacteristics|혼종적}} 특징을 보여준다.<ref name="leesoyoung">[[이소영]], 「[https://www.earticle.net/Article/ArticleDetail/46487 일제강점기 신민요의 혼종성]」, 『낭만음악』19권 3호, 낭만음악사, 2007, 191-307쪽.</ref> 이 곡은 전통적 요소와 서양 음악 요소의 성공적인 결합으로 {{TagMusicalGenre|신민요}}의 음악적 지평을 확장한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된다.<ref name="leesoyoung"/>
또한 ''''처녀총각''''의 리듬 구조는 [[Tag:MusicalConcept_동살풀이|동살풀이]] (혹은 [[Tag:MusicalConcept_폭스트로트|폭스트로트]]) 계열의 [[2소박_4박자]]이다.<ref name="leesoyoung"/> 이는 강약 주기 박자로는 2/4박자로 채보될 수 있으나, 장단 주기 박자로는 4/4박자의 구조를 가지며, 당시 [[신민요]]가 [[창가]]적 영향과 전통적 리듬이 결합된 혼종적 리듬 양식을 형성했음을 잘 보여준다.<ref name="leesoyoung"/> 이처럼 ''''처녀총각''''은 전통적 음악 요소와 서양 음악 요소의 성공적인 결합을 통해 [[신민요]]의 음악적 지평을 확장하는 데 기여한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된다.<ref name="leesoyo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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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 작품 '개나리 고개'와 '홍도야 울지 마라'의 의미'''===
 
==='''대표 작품 '개나리 고개'와 '홍도야 울지 마라'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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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김준영'''이 작곡한 ''''개나리_고개''''는 [[Tag:MusicalConcept_굿거리장단|굿거리장단]]에 해당하는 [[3소박_4박자]] 구조를 가지고 있다.<ref name="leesoyoung"/> 이 곡은 12/8박자나 6/8박자로 채보될 수 있는 전통적인 [[장단]] 형태를 띠고 있으며, 당시 [[신민요]] 중 굿거리장단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ref name="leesoyoung"/> 굿거리장단은 양적으로도 다양하고 폭넓은 리듬 변화를 포괄하여 신민요의 다채로운 음악성을 보여주는 데 기여했다.<ref name="leesoyoung"/><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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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김준영'''이 작곡한 ''''개나리_고개''''는 {{TagMusicalConcept|굿거리장단}}에 해당하는 3소박 4박자 구조를 가진 신민요의 중요한 예시이다.<ref name="leesoyoung"/> '홍도야 울지 마라' 역시 그의 대표곡으로 대중의 큰 사랑을 받으며 {{TagMusicalGenre|유행가}}로서 성공을 거두었다.<ref name="kmdb"/><ref name="donga_jang"/> 이러한 작품들을 통해 그는 한국 대중음악 초기 발전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ref name="kmdb"/>
'홍도야 울지 마라' 역시 '''김준영'''의 대표곡 중 하나로, 당시 대중의 큰 사랑을 받으며 [[Tag:MusicalGenre_유행가|유행가]]로서의 성공을 거두었다.<ref name="kmdb"/><ref name="donga_jang"/> 이 곡은 '처녀총각', '개나리 고개'와 함께 그의 작곡 능력을 대중에게 각인시킨 작품으로, 단순한 멜로디와 서정적인 가사로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었다.<ref name="kmdb"/><ref name="donga_jang"/> 이러한 작품들을 통해 '''김준영'''은 한국 대중음악의 초기 발전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다양한 음악적 시도를 이어나갔다.<ref name="km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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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음악사에 미친 영향과 친일 논란'''===
 
==='''대중음악사에 미친 영향과 친일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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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김준영'''은 [[1930년대_중반]] [[대한민국]] [[대중음악]]계에 불어닥친 '신민요' 열풍의 [[Tag:CulturalRole_선구자|선구자]]로 평가받는다.<ref name="donga_jang"/> 그의 대표곡인 ''''처녀총각''''은 우리 고유의 [[민요]] 선율에 기반하면서도 대중성을 확보하여 당시 큰 인기를 끌었다.<ref name="donga_jang"/> 이는 작사자나 작곡자가 명확한 '신민요'라는 새로운 [[Tag:MusicalGenre_장르|장르]]를 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기존 대중가요보다 '조선 냄새'가 강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당대 대중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ref name="donga_jang"/><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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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김준영'''은 ''''처녀총각''''을 통해 1930년대 중반 {{TagMusicalGenre|신민요}} 열풍의 {{TagCulturalRole|선구자}}로 평가받으며 대중음악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ref name="donga_jang"/> 그러나 {{TagHistoricalPeriod|일제강점기}}에는 영화 주제가와 {{TagMusicalGenre|군국가요}} 등을 작곡하며 전시체제 협력에 관여한 행적이 있어 {{TagControversy|친일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ref name="ohmynews"/><ref name="cctoday"/>
그러나 '''김준영'''의 활동은 [[Tag:HistoricalPeriod_일제강점기|일제강점기]]라는 특수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복잡한 그림자를 드리운다.<ref name="ohmynews">[[이준희]],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888204 다국적 위문단, '황군(皇軍) 만들기'에 몸바쳤네 - 발굴 영화 <병정님(兵隊さん)> 엿보기]」, <html><online style="color:purple">『오마이뉴스』<sup>online</sup></online></html>, 오마이뉴스, 작성일: [[2008]]년 05월 14일.</ref> 그는 ''''처녀총각''''과 같은 대중적인 신민요를 작곡하며 명성을 얻었지만, 한편으로는 영화 '''<병정님>'''의 주제가인 '''<日本男兒>'''와 '''<승전가>'''와 같은 [[Tag:MusicalGenre_군국가요|군국가요]]를 작곡·편곡하며 [[일제]]의 [[Tag:ControversialConcept_전시체제_협력|전시체제]] 협력에 관여한 이력이 존재한다.<ref name="ohmynews"/><ref name="cctoday">[[최정복]], 「[https://www.c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20293 충남일보-광복 63년, 친일잔재를 말한다]」, <html><online style="color:purple">『충청투데이』<sup>online</sup></online></html>, 충청투데이, 작성일: [[2008]]년 08월 13일.</ref> 이러한 행적은 해방 후 그의 음악적 업적과 함께 [[Tag:ControversialConcept_친일행위|친일행위]]로 비판받으며, [[Tag:Archive_친일인명사전|친일인명사전]] 등에서 그 이름이 언급되는 복합적인 평가를 낳고 있다.<ref name="ohmynews"/><ref name="cc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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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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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2월 10일 (수) 21:28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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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영(金駿泳)
김준영.jpg
출처 : , ManiaDB_김준영(작곡)online, maniadb.
 
한글명 김준영 한자명 金駿泳 영문명 Kim Jun-yeong 가나명 이칭 아사히나 노보루(朝比奈昇)
성별 생년 1907년 몰년 1961년 출신지 황해도 옹진 전공 작곡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김준영(金駿泳, 1907년 ~ 1961년)은 틀:TagHistoricalPeriod에 주로 활동한 틀:TagOccupation이다.[1] 그는 황해도 옹진에서 태어나 배제고등보통학교와 일본 도쿄의 도요음악학교에서 수학하며 음악적 재능을 키웠다.[1] 이후 조선중앙방송국기관 악단에서 활동하며 '처녀총각' 등 수많은 인기곡들을 작곡하여 대중음악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1][2]


생애


초년 및 교육

김준영은 1907년 황해도 옹진에서 태어났다.[1]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많지 않으나, 배제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여 학업에 매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 고등보통학교 졸업 후에는 일본 도쿄로 유학길에 올랐으며,[1] 그곳에서 도요음악학교기관에 입학하여 전문적인 음악 교육을 받으며 틀:TagOccupation로서의 기량을 닦고 역량을 키웠다.[1]


작곡 활동 시작 및 명성

1930년대 초부터 1940년대 초까지 김준영은 조선중앙방송국기관 악단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당시 대중음악계의 주요 인물로 부상했다.[3] 특히 1934년에는 강홍식인물이 부른 '처녀총각' (범오 작사)을 작곡하여 대중적인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2] 이는 틀:TagMusicalGenre 틀:TagMusicalMovement을 주도하는 계기가 되었다.[2] 이 곡은 발매 1년여 만에 3만 장의 음반이 팔릴 정도로 당시의 밀리언셀러에 해당하는 인기를 얻었으며,[2][4] 이를 계기로 김준영은 작곡가로서 명성을 확고히 굳히게 되었다.[2] 이후에도 그는 개나리_고개, 홍도야_울지_마라' 등 다수의 인기곡들을 연달아 작곡하며 대중가요계의 중요한 인물로 자리매김했다.[1]


영화 음악 활동 및 일제 협력

1939년 영화 <사랑에_속고_돈에_울고>의 음악을 시작으로 김준영틀:TagArtForm 작곡 분야에도 새롭게 참여하기 시작했다.[1] 그는 이후 <집_없는_천사>, <지원병>, <반도의_봄>(1941), 그리고 <병정님>(1944) 등 여러 영화 작품의 음악을 담당하며 활동 영역을 넓혔다.[1] 특히 1944년 영화 <병정님>에서는 주제가 <日本男兒> 등을 작곡했으며,[5] 이 시기에는 아사히나 노보루(朝比奈昇)라는 필명을 사용하기도 했다.[5] 또한, 1943년에는 김태오인물가 작사한 틀:TagMusicalGenre <승전가>의 작곡과 편곡을 맡아 발표하는 등 틀:TagHistoricalPeriod 말 전시체제 협력에 관여한 행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6] 이러한 활동은 그의 음악적 업적과 더불어 논란의 여지를 남겼다.[6]


해방 이후 활동 및 사망

광복 이후 1947년 김준영은 도쿄로 건너가 아사히나 노보루라는 예명으로 활동하다가 1961년에 사망했다.[3] 일본에서의 구체적인 활동 내용은 명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3] 그의 대표곡 '처녀총각'은 1940년대 일본에서 '쓰키노한토'('月の半島')라는 이름으로 소개될 만큼 높은 인지도를 가졌다.[2] 또한, 광복 이후 북한에서는 '새봄을_노래하네'로 개작되어 불리기도 했으며,[2] 1960년대에는 독일에서 '빈트 바이 나흐트'('Wind_bei_Nacht')라는 제목으로 최정환인물에 의해 음반에 실려 유럽에 소개되는 등 국경을 넘어 그 틀:TagCulturalInfluence을 보여주었다.[2]





연구


'처녀총각'의 음악적 특징과 혼종성

김준영의 대표곡 '처녀총각'은 전통적인 반경토리에 서양 단음계를 수용한 틀:TagMusicalConcept 선법과 틀:TagMusicalConcept 계열의 2소박 4박자 리듬을 결합한 틀:TagMusicalCharacteristics 특징을 보여준다.[7] 이 곡은 전통적 요소와 서양 음악 요소의 성공적인 결합으로 틀:TagMusicalGenre의 음악적 지평을 확장한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된다.[7]


대표 작품 '개나리 고개'와 '홍도야 울지 마라'의 의미

김준영이 작곡한 '개나리_고개'틀:TagMusicalConcept에 해당하는 3소박 4박자 구조를 가진 신민요의 중요한 예시이다.[7] '홍도야 울지 마라' 역시 그의 대표곡으로 대중의 큰 사랑을 받으며 틀:TagMusicalGenre로서 성공을 거두었다.[1][2] 이러한 작품들을 통해 그는 한국 대중음악 초기 발전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1]


대중음악사에 미친 영향과 친일 논란

김준영은 '처녀총각'을 통해 1930년대 중반 틀:TagMusicalGenre 열풍의 틀:TagCulturalRole로 평가받으며 대중음악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2] 그러나 틀:TagHistoricalPeriod에는 영화 주제가와 틀:TagMusicalGenre 등을 작곡하며 전시체제 협력에 관여한 행적이 있어 친일 논란논쟁이 제기되고 있다.[5][6]





데이터


TripleData

김준영 관련 트리플 데이터
Source (A) Target (B) Relationship
Person: 김준영 Date: 1907 bornIn
Person: 김준영 Location: 황해도_옹진 bornInLocation
Person: 김준영 Institution: 도요음악학교 studiedAt
Person: 김준영 Institution: 조선중앙방송국 workedAt
Person: 김준영 Work_Music: 처녀총각 composed
Work_Music: 처녀총각 Date: 1934 createdOn
Person: 강홍식 Work_Music: 처녀총각 performed
Person: 김준영 Work_Movie: 사랑에_속고_돈에_울고 composedMovieMusicFor
Work_Movie: 사랑에_속고_돈에_울고 Date: 1939 premieredOn
Person: 김준영 Pseudonym: 아사히나_노보루 usedAlias
Person: 김준영 Work_Music: 승전가 composed
Person: 김태오 Work_Music: 승전가 hasLyricist
Person: 김준영 Controversy: 친일행위 associatedWith
Controversy: 친일행위 Archive: 친일인명사전 documentedIn
Person: 김준영 MusicalGenre: 신민요 pioneered
Work_Music: 처녀총각 MusicalConcept: 신반경토리 isExampleOf
Work_Music: 처녀총각 MusicalConcept: 동살풀이 hasRhythm
Work_Music: 개나리_고개 MusicalConcept: 굿거리장단 hasRhythm
Work_Music: 홍도야_울지_마라 MusicalGenre: 유행가 isGenreOf
HistoricalPeriod: 일제강점기 Person: 김준영 activeDuring
Controversy: 전시체제_협력 Person: 김준영 involvedIn




Timeline


Network Graph






참고자원







주석


  1. 1.00 1.01 1.02 1.03 1.04 1.05 1.06 1.07 1.08 1.09 1.10 1.11 "[김준영]", 『KMDb -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online, 한국영상자료원.
  2.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장유정, 「[장유정의 음악 정류장 [74] '처녀총각'의 복잡한 심경]」, 『동아닷컴』online, 동아일보, 작성일: 2023년 03월 30일.
  3. 3.0 3.1 3.2 강옥희 외, 『식민지시대_대중예술인_사전』, 소도, 2006.
  4. 『동아일보』, 1973.03.19. 5면. (해당 기사는 김준영 인물 정보의 참고문헌으로 『KMDb -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online에서 확인됨)
  5. 5.0 5.1 5.2 이준희, 「다국적 위문단, '황군(皇軍) 만들기'에 몸바쳤네 - 발굴 영화 <병정님(兵隊さん)> 엿보기」, 『오마이뉴스』online, 오마이뉴스, 작성일: 2008년 05월 14일.
  6. 6.0 6.1 6.2 최정복, 「충남일보-광복 63년, 친일잔재를 말한다」, 『충청투데이』online, 충청투데이, 작성일: 2008년 08월 13일.
  7. 7.0 7.1 7.2 이소영, 「일제강점기 신민요의 혼종성」, 『낭만음악』19권 3호, 낭만음악사, 2007, 191-30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