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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Korea Human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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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1902년 8월 1일 충청북도 진천에서 태어난 김주경(金周經, 1902년 8월 1일~ 1981년 4월 1일)은 경성제일고보 시절인 1923년 고려미술원에서 이제창의 지도를 받았다. 이 과정에서 오지호, 김용준 등과 함께 그림수업을 받았으며, 1923년과 1924년 고려미술원 전람회에 참여하였다. 1925년 경성 제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 도쿄로 유학하여 1928년 도쿄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 도화사범과를 졸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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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광복 직후인 1945년 조직된 조선미술건설본부의 서양화부 위원장을 역임하였고, 이듬해 2월 23일에는 조선미술가동맹을 결성하여 위원장을 지냈고 1949년부터 10년간 위원을 역임했다. 1947년 월북하여 평양미술학교 창설에 참여, 초대 교장이 되었고, 1949년 평양미술학교가 대학으로 승격하면서 1958년까지 초대 학장을 역임하였다. 1958년 학장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강원도 평강국영농장에서 농민들과 생활하며 현역미술가로 활동하였다. 북한에서 창작한 작품으로는 월북 직후의 「김일성장군 전적」(1947년), 「만경대」(1960년대) 등의 정치적 작품 외에 「묘향산」(1955년) 같은 순수 풍경화가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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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1월 30일 (일) 18:13 판


👩🏻‍🏫본 문서는 서울대학교 "25-2 미디어위키를 활용한 역사 데이터 편찬" 수강생(황인수(JBNU2025))이 작성했습니다.




김주경(金周經)
김주경.jpg
출처 :
 
한글명 김주경 한자명 金周經 영문명 Kim Ju-kyung 가나명 이칭
성별 남성 생년 1902년년 몰년 1981년년 출신지 충청북도 진천 전공 도화사범과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김주경은 해방 이후 북한에서 「만경대」·「묘향산」 등의 작품을 그린 화가이다. 1928년 일본 도쿄미술학교 도화 사범과를 졸업하였다. 초기에는 서정적 사실주의 경향의 작품을 그렸다. 1935년 무렵부터는 프랑스 인상주의 미학을 수용한 작품세계를 펼쳤다. 1945년 조직된 조선미술건설본부의 서양화부 위원장을, 1946년에는 조선미술가동맹의 위원장을 지냈다. 1947년 월북하여 평양미술학교 창설에 참여 초대 교장이 되었다. 월북 이후 「김일성장군 전적」(1947), 「만경대」(1960년대) 등의 정치적 작품과 「묘향산」(1955) 등의 순수 풍경화가 알려져 있다.


생애


출생 및 학창시절

1902년 8월 1일 충청북도 진천에서 태어난 김주경(金周經, 1902년 8월 1일~ 1981년 4월 1일)은 경성제일고보 시절인 1923년 고려미술원에서 이제창의 지도를 받았다. 이 과정에서 오지호, 김용준 등과 함께 그림수업을 받았으며, 1923년과 1924년 고려미술원 전람회에 참여하였다. 1925년 경성 제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 도쿄로 유학하여 1928년 도쿄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 도화사범과를 졸업하였다.


1920년대 활동

1927년부터 1929년에는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연속으로 3회 특선을 하였다. 하지만 선전이 일제의 어용전람회라고 생각한 뒤로는 참여하지 않았다. 1928년 서울에서 박광진, 심영섭, 장석표와 함께 양화운동 그룹인 녹향회를 조직하였다. 그 후,1929년 5월 24일 천도교 기념관에서 녹향회 창립전을 개최하였다.


1930년대 활동

1929년에 천도교 기념관에서 녹향회 창립전을 개최한 이듬해 오지호가 가담한 2회전에는 민중회화를 출품하였다. 이때부터 녹향회를 민중적, 계몽적, 민족적 성격으로 전개시켜 나아갔다. 1932년 3회전을 계획하였으나 일제의 간섭으로 좌절되었다. 1938년 10월 23일 오지호와 김주경 두사람의 작품 각 10점, 그리고 오지호의「순수회화론」과 김주경의 「미와 예술」이라는 논문이 실린 『오지호 · 김주경 이인화집』을 발간하였다. 자비로 발간한 이 화집은 한국 최초의 원색 호화판 화집이다


1940년대 이후의 활동

광복 직후인 1945년 조직된 조선미술건설본부의 서양화부 위원장을 역임하였고다. 이듬해 2월 23일에는 조선미술가동맹을 결성하여 위원장을 지냈고 1949년부터 10년간 위원을 역임했다. 1947년 월북하여 평양미술학교 창설에 참여, 초대 교장이 되었고, 1949년 평양미술학교가 대학으로 승격하면서 1958년까지 초대 학장을 역임하였다. 1958년 학장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강원도 평강국영농장에서 농민들과 생활하며 현역미술가로 활동하였다. 북한에서 창작한 작품으로는 월북 직후의 「김일성장군 전적」(1947년), 「만경대」(1960년대) 등의 정치적 작품 외에 「묘향산」(1955년) 같은 순수 풍경화가 알려져 있다.





연구


제목1


제목2


제목3





데이터


TripleData

Source (A) Target (B) Relationship
Person: 홍길동 Person: 홍아무개 A hasSon B
Person: 홍길동 Institution: ○○고등보통학교 A graduates B
Person: 홍길동 Institution: ○○대학교 A worksAt B
Person: 홍길동 Group: ○○학회 A isMemberOf B
Book: ○○○ Person: 홍길동 A creator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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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