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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내용=<center><big>'''👩🏻🏫본 문서는 서울대학교 "[[:분류:2025-2 BigData(SNU)|25-2 미디어위키를 활용한 역사 데이터 편찬]]" 수강생([[최임호(KNU2025)]])이 작성했습니다.'''</big></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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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인물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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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사진= 유강열.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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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사진출처= https://www.moneys.co.kr/article/2020101411218012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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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대표명= 유강열(劉康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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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한글명=유강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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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한자명=劉康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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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영문명=You Kang Ye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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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가나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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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이칭=우정(愚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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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성별=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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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생년=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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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몰년=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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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출신지=함경북도 북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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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전공=공예도안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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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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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글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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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내용= 유강열(劉康烈,1920년~1976년)는 해방 이후 한국 현대 공예와 판화의 기틀을 닦은 염색공예가이자 판화가이며, 교육자이자 전시 기획자였다.<ref>『[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4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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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유강열(劉康烈)]』 <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 호는 우정(愚楨)으로, 일제 강점기 일본 도쿄에서 공예도안을 전공한 뒤 귀국 후 전통 민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납염·납방염 작품과 목판 판화 작업을 선보였다.<ref>『[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4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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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해풍(海風)]』 <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 1950년대에는 염색공예, 1960년대 이후에는 판화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국전과 각종 국제전에서 작품을 발표했고, 프랑스대사관·국립중앙박물관·국회의사당 등 주요 공공건축물의 실내디자인과 벽화 제작에도 참여하였다.<ref>『[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4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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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유강열(劉康烈)]』 <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 특히 홍익대학교 공예과에서 후학을 양성하며 한국 섬유미술과 현대공예의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인물로 평가된다.<ref>『[https://www.mmca.go.kr/exhibitions/exhibitionsDetail.do?exhId=20200109000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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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유강열과 친구들: 공예의 재구성]』 <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국립현대미술관.</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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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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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출생 및 학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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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글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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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내용=유강열은 1920년 8월 2일 함경남도 북청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강릉이다.<ref>『[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4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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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유강열(劉康烈)]』 <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 13세가 되던 해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아시후중학교(麻布中學校)에서 수학한 뒤, 1938년에는 일본 조치대학(上智大學) 건축과에 입학하였다.<ref>『[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4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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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유강열(劉康烈)]』 <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 그러나 건축보다 미술과 공예에 더 큰 흥미를 느끼면서 1940년 도쿄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 공예도안과로 진로를 바꾸어 1944년에 졸업하였고, 재학 시절부터 일본공예가협회전 등에 염색 작품을 출품하며 작가로서의 경력을 쌓기 시작하였다.<ref>『[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4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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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유강열(劉康烈)]』 <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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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활동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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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글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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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내용= 도쿄미술학교 재학 중인 1941년 일본공예가협회전에 염색 작품을 출품하여 입선한 후, 도쿄의 사이토 공예연구소에서 도제식으로 염색 교육을 받으며 납염·납방염 등의 기법을 체계적으로 익혔다.<ref>『[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4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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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유강열(劉康烈)]』 <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 귀국 후에는 {{TagPerson|이중섭}}, {{TagPerson|한묵}} 등 화가들과 교류하며 작품 활동을 이어가다가 6·25 전쟁 발발 후 월남하여 부산으로 내려갔다.<ref>『[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4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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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유강열(劉康烈)]』 <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 1951년 부산에서 수출공예품전을 기획·심사하며 공예산업 육성에 힘을 기울였고, 경상남도 도청을 설득해 통영에 2년제 {{TagInstitution|도립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를 설립한 뒤 주임강사로 재직하며 {{TagInstitution|통영}} 지역 나전칠기 전통의 현대적 계승에 기여하였다.<ref>『[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4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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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유강열(劉康烈)]』 <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 이 시기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이중섭을 물심양면으로 도우며 작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ref>『[https://sperantia.tistory.com/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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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유강열]』 <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Exploitation and Exploration」 블로그, 2023.04.26.</ref> 1954년 상경 후에는 {{TagInstitution|국립중앙박물관}} 부설 한국조형문화연구소 연구원으로서 판화·염색 강습회를 운영하고, {{TagInstitution|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과 {{TagInstitution|서울대학교}} 공과대학 등에 출강하며 교육 활동을 펼쳤다.<ref>『[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4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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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유강열(劉康烈)]』 <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 1958년에는 미국 록펠러 재단의 초청으로 도미하여 뉴욕대학교(New York University)와 프랫 컨템퍼러리 그래픽 아트 센터(Prat Contemporary Graphic-Art Center)에서 현대 판화를 수학한 뒤, 귀국 후 {{TagInstitution|홍익대학교}}에 재직하면서 공예학부장·2부대학장·산업미술대학원장을 역임하였다.<ref>『[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4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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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유강열(劉康烈)]』 <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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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상훈과 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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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글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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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내용= 유강열은 활발한 작품 활동과 공예·판화 분야에 대한 공헌으로 여러 차례 포상을 받았다. 1962년 서울특별시 문화상을 수상하였고, 1970년에는 {{TagInstitution|국립중앙박물관}} 건설 상임위원으로 활동한 공로를 인정받아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ref>『[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4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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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유강열(劉康烈)]』 <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 1973년에는 {{TagInstitution|어린이대공원}} 건설위원 및 디자인 자문을 맡은 데 대한 감사장을 서울특별시장으로부터 받았다.<ref>『[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4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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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유강열(劉康烈)]』 <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 1976년 11월 7일 심장마비로 별세한 후, 그의 작품과 자료는 제자 신영옥과 유족들에 의해 정리되어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연구센터에 「유강열 컬렉션」이라는 이름으로 기증되었으며, 탄생 100주년을 맞은 2020년에는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기념 전시 「유강열과 친구들: 공예의 재구성」이 개최되었다.<ref>『[https://www.mmca.go.kr/research/archiveSpInfo.do?archiveFlag=S&collect_id=10000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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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유강열 컬렉션]』 <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연구센터.</ref><ref>『[https://www.mmca.go.kr/exhibitions/exhibitionsDetail.do?exhId=20200109000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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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유강열과 친구들: 공예의 재구성]』 <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국립현대미술관.</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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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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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염색공예와 납염 기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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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내용= 유강열은 일본 유학 시기에 익힌 납염·납방염·크랙염 등의 기법을 바탕으로, 전통 민화의 호랑이·어해·화조 등 모티프를 현대적으로 단순화한 대형 납염 작품을 제작하였다.<ref>『[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4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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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해풍(海風)]』 <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 1952년 부산 국무원 전시에 출품된 납염 작품 「호랑이」를 비롯해, 제2회 국전에 제출한 「가을」, 제3회 국전의 「향문도(香紋圖)」 등은 전통 문양을 과감한 색면과 균열선(crack line)으로 처리한 작품으로 평가받으며 문교부장관상과 국무총리상 등을 수상하였다.<ref>『[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4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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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유강열(劉康烈)]』 <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 이후 「만추」, 「계절」, 「바다와 나비」, 「해풍」 등 연작에서 전통 소재를 추상화하고 화면 전체에 자잘한 크랙 라인을 분포시키는 독자적인 납염 양식을 확립하여, 1950~60년대 국전 염색공예 부문과 국내 섬유미술의 전개에 큰 영향을 주었다.<ref>『[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4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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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해풍(海風)]』 <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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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판화와 국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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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글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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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내용= 1958년 미국 유학 이후 유강열은 목판·동판·실크스크린 등 다양한 판화 기법을 본격적으로 연구하여 국내에 소개하였다.<ref>『[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4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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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유강열(劉康烈)]』 <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 1959년에는 미국 현대판화가 100인전에 동양인 최초로 초대되어 「작품」 등을 출품하였고, 이때의 작품들은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뉴욕현대미술관·보스턴미술관·록펠러재단 등에 소장되었다.<ref>『[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4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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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유강열(劉康烈)]』 <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 1964년 제7회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작품A」·「작품B」·「작품C」를 출품하고, 1970년에는 {{TagEvent|서울국제판화비엔날레}}를 주도하는 한편, {{TagPerson|이상욱}}과 함께 한국현대판화가협회를 결성하여 한국 판화계의 국제화를 이끌었다.<ref>『[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4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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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유강열(劉康烈)]』 <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 그의 판화는 민화의 상징과 단순화된 형상을 목판의 거친 질감과 결합시키는 방식으로, 전통 이미지와 현대 추상 양식을 접목한 것으로 평가된다.<ref>『[https://www.mmca.go.kr/exhibitions/exhibitionsDetail.do?exhId=20200109000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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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유강열과 친구들: 공예의 재구성]』 <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국립현대미술관.</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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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공예·디자인 교육과 현대 공예사적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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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내용= 유강열은 {{TagInstitution|홍익대학교}} 공예과의 교수로 재직하며 공예학부장·산업미술대학원장 등을 맡아 교육과정을 정비하고, 염색·판화·실내디자인을 아우르는 통합적 공예 교육을 지향하였다.<ref>『[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4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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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유강열(劉康烈)]』 <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 한편 프랑스대사관·워커힐미술관·국립극장·자유센터·{{TagInstitution|국립중앙박물관}}·{{TagInstitution|국회의사당}} 등의 실내디자인과 세라믹 벽화 제작에 참여하여, 공예와 건축·환경디자인을 결합한 작업을 선보였다.<ref>『[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4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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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유강열(劉康烈)]』 <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 국립현대미술관의 「유강열과 친구들: 공예의 재구성」 전시는 그를 한국 전통 미감과 현대 조형언어를 연결한 1세대 공예가로 자리매김하며, 1950~70년대 한국 현대공예의 전개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인물로 조명하고 있다.<ref>『[https://www.mmca.go.kr/exhibitions/exhibitionsDetail.do?exhId=20200109000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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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유강열과 친구들: 공예의 재구성]』 <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국립현대미술관.</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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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4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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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유강열(劉康烈)]』 <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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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4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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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해풍(海風)]』 <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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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https://www.mmca.go.kr/exhibitions/exhibitionsDetail.do?exhId=20200109000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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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유강열과 친구들: 공예의 재구성]』 <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국립현대미술관,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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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https://www.mmca.go.kr/research/archiveSpInfo.do?archiveFlag=S&collect_id=10000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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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유강열 컬렉션]』 <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연구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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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https://www.hongik.ac.kr/en/about/wa-u-artworks.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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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와우작품(Three-legged Crow)]』 <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홍익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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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https://www.s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33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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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950~1970년대 한국 공예 어땠나…국현, ‘유강열展’]」, 『서울문화투데이』, 2020.10.19. <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서울문화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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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https://www.newsfreezone.co.kr/news/articleView.html?idxno=521527
| |
| − | 한국 1세대 판화가 유강열과 통영 나전칠기기술원 양성소를 회상한다]」, 『뉴스프리존』, 2023.08.05. <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뉴스프리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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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Keyword/%EB%82%A9%EC%97%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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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납염 – 유강열]』 <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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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분류:Person-SNU추가]][[분류:2025-2 BigData(SN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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