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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Korea Human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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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경성 제2공립고등보통학교를 거쳐 경성제대 법학부를 졸업하였다. 대학 재학시에 『문학타임즈』를 발행하여 문학 활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대학 졸업 후 화신연쇄점 직물부에 취직하기도 했으나, 문필 활동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여 시와 소설, 평론 등을 발표하였다. 1931년 8월 소설 「건식(健植)의 길」과 10월에 시 「구고를 사르며」 등을 『조선일보』에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소설 「구인몽(蚯蚓夢)」(1932), 「농군」(1933), 「처녀촌(處女村)」(1933), 「파종」(1935), 「취직과 양(羊)」(1937) 등을 통해 사회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다양한 시각으로 서사화했다. 1938년 이문당에서 첫 시집 『향수』를 간행했다.<ref>https://terms.naver.com/entry.naver?cid=41708&docId=333919&categoryId=41737 한국현대문학대사전, 권영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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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경성 제2공립고등보통학교를 거쳐 경성제대 법학부를 졸업하였다. 대학 재학시에 『문학타임즈』를 발행하여 문학 활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대학 졸업 후 화신연쇄점 직물부에 취직하기도 했으나, 문필 활동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여 시와 소설, 평론 등을 발표하였다. 1931년 8월 소설 「건식(健植)의 길」과 10월에 시 「구고를 사르며」 등을 『조선일보』에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1938년 월북 전 이문당에서 첫 시집 『향수』를 간행했다.<ref>https://terms.naver.com/entry.naver?cid=41708&docId=333919&categoryId=41737 한국현대문학대사전, 권영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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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에 그는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회(회장 홍명희) 위원 겸 시 부문(위원장 김기림)의 위원으로 활동한 바 있다. 그 후 1948년 월북하여 6ㆍ25 전쟁이 끝날 무렵 평양문학대학의 초대 부학장, 1956년에는 작가동맹 편집부장과 《조선문학》 주필도 역임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1957년 초에 북한에서 행해졌던 리태준 계열의 숙청 때 과거 9인회 시절의 관계가 문제가 되어 집필 금지령을 받고 협동농장으로 추방됐다. 그러다 1959년에 재기하여 이후 문학가동맹의 부위원장을 지냈고, 1961년에는 북한 몽고 친선협회 부위원장과 평양문학대학장 등으로 활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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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전에는 주로 소설을 썼으며 리태준과 함께 9인회의 동인으로 활동했다. 당시의 소설에서는 거의 일제하의 비참한 지식인의 현실을 그렸으며 대표작으로는 「농군」, 「취직과 양」, 「처녀촌」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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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평론으로도 활약한 바 있는데 「김안서씨의 정형시론에 대하여」(《조선일보》, 1933.1), 「탄식하는 시신(詩神)」(《조선일보》, 1933.10), 「대담한 나파륜(奈巴崙)의 길」, 「창작방법 리알리즘 작가」(《조선중앙일보》, 1935.7), 「문단 부패성과 고독성」(《동아일보》, 1935.5) 등을 썼다. 또한 1947년에는 막심 고리끼의 『문학론』을 번역 간행하기도 했다. 또한 일찍이 조벽암은 『향수』, 『지열(地熱)』 등의 시집을 냈으며, 이 시들은 당시의 황막하고도 불만족스러운 정황 속의 대상을 관조적으로 응시하는 특질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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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직후인 1945년 말엽부터는 여러 문학가동맹 기관지들에 전과는 또 다른 성향의 시편들을 잇달아 발표하였다. 「고토(故土)」(《건설》, 창간호), 「초석(礎石)」(《예술운동》, 창간호), 「환희(歡喜)의 날」(《건설》, 창간호), 「해방의 정(情)」(《시인춘추》, 속간호) 등이 그것이다. 조벽암은 이런 시에서 해방의 환희와 미래에 대한 각고의 삶을 영탄적 목소리로 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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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조벽암이 1948년 말엽에 월북한 이후로는 6ㆍ25 전쟁이 끝날 때까지 「싸우는 제주도」, 「떼비둘기 날을 때까지」, 「동궁 앞에서」, 「진격의 노래」, 「영원한 형제」 등을 발표했다. 1957년에는 조선작가동맹출판사에서 『벽암시선』을 펴내기도 했다. 특히 대표작인 「눈자국」, 「발자국 소리」 등은 김일성의 항일 빨치산 투쟁을 소재로 한 혁명전통 주제물인 것이다. 이런 활동을 벌였던 조벽암은 1985년 11월 24일에 7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ref>https://terms.naver.com/entry.naver?cid=60594&docId=1692254&categoryId=60594 북한문학사전, 이명재</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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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6월 13일 (목) 22:15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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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벽암 (趙碧巖)
조벽암.jpeg
출처 : 위키백과-조벽암
 
한글명 조벽암 한자명 趙碧巖 영문명 가나명 이칭 중흡 (重洽)
성별 남성 생년 1908년 몰년 1985년 출신지 충청북도 진천 전공 법학부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본명은 조중흡(趙重洽)으로, 일제강점기 「건식의 길」, 「파종」, 「파행기」 등을 저술한 소설가이자 시인이다.


생애


출생 및 성장

1908년 충청북도 진천에서 출생했다. 본명은 중흡(重洽)이고 본관은 양주(楊州)이다. 아버지는 조태희(趙兌熙), 어머니는 평산 신씨(平山申氏)이며 1920년대의 대표 작가인 포석(抱石) 조명희(趙明熙)의 조카다. 경성 제2공립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1]


학력 및 데뷔

경성 제2공립고등보통학교를 거쳐 경성제대 법학부를 졸업하였다. 대학 재학시에 『문학타임즈』를 발행하여 문학 활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대학 졸업 후 화신연쇄점 직물부에 취직하기도 했으나, 문필 활동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여 시와 소설, 평론 등을 발표하였다. 1931년 8월 소설 「건식(健植)의 길」과 10월에 시 「구고를 사르며」 등을 『조선일보』에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1938년 월북 전 이문당에서 첫 시집 『향수』를 간행했다.[2]


활동사항

조벽암의 작품활동은 1930년대 초에 시작되었는데 시와 소설을 거의 동시에 병행하면서 발표하였다. 시작품으로 「새 아침」(『신동아』, 1933.1)·「만추사경(晩秋四景)」(『동아일보』, 1933.12.6∼7)·「새 설계도(設計圖)」(『동아일보』, 1934.2.10)·「봄」(『신동아』, 1934.2) 등을 발표하였다. 시집으로는 『향수(鄕愁)』(이문당서점, 1938)와 『지열(地熱)』(이문각, 1948)을 간행하였으나 시집 『지열(地熱)』은 발매 금지를 당했었다. 조벽암의 시는 지식인의 비참한 현실과, 지식인이 현실에서 느끼는 우수와 권태와 비통함과 증오의 감상을 서사적·설명적으로 표현하고 있다.[3]


1946년에 그는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회(회장 홍명희) 위원 겸 시 부문(위원장 김기림)의 위원으로 활동한 바 있다. 그 후 1948년 월북하여 6ㆍ25 전쟁이 끝날 무렵 평양문학대학의 초대 부학장, 1956년에는 작가동맹 편집부장과 《조선문학》 주필도 역임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1957년 초에 북한에서 행해졌던 리태준 계열의 숙청 때 과거 9인회 시절의 관계가 문제가 되어 집필 금지령을 받고 협동농장으로 추방됐다. 그러다 1959년에 재기하여 이후 문학가동맹의 부위원장을 지냈고, 1961년에는 북한 몽고 친선협회 부위원장과 평양문학대학장 등으로 활약했다.

해방 전에는 주로 소설을 썼으며 리태준과 함께 9인회의 동인으로 활동했다. 당시의 소설에서는 거의 일제하의 비참한 지식인의 현실을 그렸으며 대표작으로는 「농군」, 「취직과 양」, 「처녀촌」을 남겼다. 그는 평론으로도 활약한 바 있는데 「김안서씨의 정형시론에 대하여」(《조선일보》, 1933.1), 「탄식하는 시신(詩神)」(《조선일보》, 1933.10), 「대담한 나파륜(奈巴崙)의 길」, 「창작방법 리알리즘 작가」(《조선중앙일보》, 1935.7), 「문단 부패성과 고독성」(《동아일보》, 1935.5) 등을 썼다. 또한 1947년에는 막심 고리끼의 『문학론』을 번역 간행하기도 했다. 또한 일찍이 조벽암은 『향수』, 『지열(地熱)』 등의 시집을 냈으며, 이 시들은 당시의 황막하고도 불만족스러운 정황 속의 대상을 관조적으로 응시하는 특질을 지니고 있다.

해방 직후인 1945년 말엽부터는 여러 문학가동맹 기관지들에 전과는 또 다른 성향의 시편들을 잇달아 발표하였다. 「고토(故土)」(《건설》, 창간호), 「초석(礎石)」(《예술운동》, 창간호), 「환희(歡喜)의 날」(《건설》, 창간호), 「해방의 정(情)」(《시인춘추》, 속간호) 등이 그것이다. 조벽암은 이런 시에서 해방의 환희와 미래에 대한 각고의 삶을 영탄적 목소리로 읊고 있다.

그러던 조벽암이 1948년 말엽에 월북한 이후로는 6ㆍ25 전쟁이 끝날 때까지 「싸우는 제주도」, 「떼비둘기 날을 때까지」, 「동궁 앞에서」, 「진격의 노래」, 「영원한 형제」 등을 발표했다. 1957년에는 조선작가동맹출판사에서 『벽암시선』을 펴내기도 했다. 특히 대표작인 「눈자국」, 「발자국 소리」 등은 김일성의 항일 빨치산 투쟁을 소재로 한 혁명전통 주제물인 것이다. 이런 활동을 벌였던 조벽암은 1985년 11월 24일에 7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4]





연구


제목1


제목2


제목3





데이터


TripleData

Source (A)  Target (B)  Relationship
Person: 조벽암 Institution: ○○고등보통학교 A graduates B
Person: 조벽암 Institution: ○○대학교 A worksAt B
Person: 조벽암 Group: ○○학회 A isMemberOf B



Time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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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원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