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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Korea Humanities

(문학에 표현된 가난과 어려움 속에 살아가는 소시민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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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광복기 개성 의역 내 활동 가운데 중요한 것은 광복이 되자마자 만든 개성문화건설협의회다. 개성인민위원회와 짝을 이루는 중도 좌파 계열 문인의 결집이었다. 여기서 김소엽이 위원장을 맡았다.이들은 “해방조선문화 건설을 위하야 정진”한다는 것과“구질서의 문화와 반동적 문화에 투쟁을 전개하야 진정 노동자 농민 해방을 위한 첨병”이 되겠다는 강령을 내세웠다. 위원장 김소엽은 1946년 개성의 종합적 학술 연구를 목표로 송도학술연구회(위원장 마해송)를 만들었을 때는예술분야를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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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전문 소설가로 나서지 않았다. 오히려 엄흥섭․이기영․이무영․채만식과 같은 역외 작가가 개성 매체나 개성 문인과 맺은 연고 활동을 빌려 개성 지역 소설을 가꾸었다. 광복기에 이상춘은 국어학자로 자리를 굳혔고, 임영빈은 목회자 걸음을 따른 가벼운 기행 수필에 그쳤다. 그런 까닭에 광복기 개성 소설은 김소엽 홀로 도맡은 모습이다.<ref>박태일,「광복기 개성 지역문학의 좌표 -북한 지역문학사 연구 2」,『현대문학이론연구』 제 51권 51호, 현대문학이론학회, 2012, 225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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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6월 10일 (월) 18:00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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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엽(金沼葉)
김소엽 사진.png
출처 : 네이버 블로그 재봉틀의 국어[1]
 
한글명 김소엽 한자명 金沼葉 영문명 Kim So-Yop 가나명 이칭
성별 남자 생년 1912년 몰년 출신지 경기도 개성 전공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시인. 소설가. 본명은 김병국(金炳國)이다. 개성상업학교 4년을 수료하고 중국 상해 신광외국어학교 영문과 2년을 중퇴하였다.1946년 조선문학가동맹( 광복기에 활동한 문학 단체의 하나. 1946년 2월 조선 문학 건설 총본부와 조선 프롤레타리아 문학 동맹이 함께 전국 문학가 대회를 개최하면서 발족하였다. 홍명희를 비롯한 이병기, 이태준, 김남천 등이 활동하였고, 1946년부터 1948년까지 기관지 ≪문학≫을 발행하였으나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회원들의 전향과 월북 따위로 사실상 해산되었다.-https://ko.dict.naver.com/#/entry/koko/1f2f93101dcf49fcb4eff171f7b524b7)에 가담한 뒤 월북하였다.


생애


제목1

개성상업학교를 수료한 뒤 1930년 중국 상하이의 신광외국어학교 영문과를 중퇴했다.


제목2

1946년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한 후 월북하였다. 1930년 『동광』에 시 「배우에게」, 「흙 한 줌 쥐고」을 발표하여 시인으로 등단한 이후, 1934년 『조선중앙일보』에 단편 「도야지와 신문」이 2등으로 당선되면서 소설가로 등단하였다. 시보다는 소설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며, 대표작으로 「폐촌」(1935), 「고요한 정원」(1935), 「가물치」(1935), 「딱한 자식」(1936), 「양(楊)서방」(1937), 「초라한 풍경」(1939), 「갈매기」(1940), 「청춘」(1946), 「세월」(1949) 등을 꼽을 수 있다. 1942년 소설집 『갈매기』를 간행했다. 김소엽은 식민지 농촌의 수탈상을 고발하는 소설을 지속적으로 발표하였다. 농촌 사회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일상적인 차원의 문제에서 출발해 당대 사회상에 접근하고 있기에 현실성을 확보한 장점이 있으나 구조적인 차원으로 발전시키지 못했다는 점이 한계로 지적된다.(http://xn--zb0b2hu97a1ya31wlzk6ku.org/?mod=document&uid=467&page_id=30)


시인이 된 김소엽

1930년『동광』에 시 「배우에게」·「흙 한 줌 쥐고」를 발표하여 시인으로 등단한 이후, 1934년 『조선중앙일보』에 단편 「도야지와 신문」이 2등으로 당선되면서 소설가로 등단하였다.(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9533)


위원장으로서의 김소엽

광복기 개성 의역 내 활동 가운데 중요한 것은 광복이 되자마자 만든 개성문화건설협의회다. 개성인민위원회와 짝을 이루는 중도 좌파 계열 문인의 결집이었다. 여기서 김소엽이 위원장을 맡았다.이들은 “해방조선문화 건설을 위하야 정진”한다는 것과“구질서의 문화와 반동적 문화에 투쟁을 전개하야 진정 노동자 농민 해방을 위한 첨병”이 되겠다는 강령을 내세웠다. 위원장 김소엽은 1946년 개성의 종합적 학술 연구를 목표로 송도학술연구회(위원장 마해송)를 만들었을 때는예술분야를맡았다. 광복 뒤 8월, 전국 규모 예술문화 단체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에 이름을 올린 개성 문인은 이선근․임영빈․민병휘․김광균․김소엽․현동염이었다. 이어서 1946년 3월 우파 중심의 전조선문필가협회에는 이선근․김광균․현동염․김소엽이 들었다. [2]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뒤, 정세 변화에 따라 김소엽과현동염은 전향해 국민 보도 연맹에 가입하였다. 1980년대까지 북한문학사 속에서 개성 지역 문학의 자취를 지킨 몇 되지 않은 문인으로 살아남을 걸음길을 분명히 한 셈이다.[3] 1949년 12월 대한민국 수립 뒤 "일반 무소속 작가 및 전향 문학인을 포함한 전문단인 총결속” 단체로 나아가고자 했던 한국 문학가 협회에 이름을 올린 개성 문인은 임영빈․구자균․김광균․김소엽․현동염이었다. [4]





연구


황진이 무덤 참배와 손질

광복을 맞은 뒤, 모춘기 의 일행은 약속대로 다시 황진이 무덤을 찾았다.거기다 준비해 온 빗돌을 무덤 둘레를 손질한 것이다. 1946년 봄 일이었다. 다만 그때는 지난 번 함께 갔던 자영이 빠지고 김소엽과 극작가 이수령, 화가 김태형 세 사람이 걸음을 같이했다. 검정색 빗돌 앞뒤에 글을 새기는 일은 이전 약속에 따라 이수령이 맡았다. 앞면에는 ‘절기 황진이지묘'라 썼고, 뒤에는 대표 시조 한 수를 넣었다.70) 청춘 은 바로 그러한 실경험을 바탕으로 쓴 작품이다.개성 문화재에 대한 남다른 관심은 광복기 김소엽을 비롯한 지역 청년의 문화실천 활동에 대한 의욕과 자부심을 드러내는 한 방식이었던 셈이다.(출처 논문p.227)


제목2

1934년 『조선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지주와 관의 수탈에 저항하는 농민의 모습을 그린 <도야지와 신문>이 당선된 이후 소설가로 활동했다.(http://nks.ac.kr/Word/View.aspx?id=1229)


개성 문학을 지키기 위한 김소엽의 노력

나라 잃은 시대 개성 소설을 대표한 이는 이상춘․ 임영빈․ 김소엽이었다. 물론 이선근이나 공진항과 같은 이의 청년 소설 활동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전문 소설가로 나서지 않았다. 오히려 엄흥섭․이기영․이무영․채만식과 같은 역외 작가가 개성 매체나 개성 문인과 맺은 연고 활동을 빌려 개성 지역 소설을 가꾸었다. 광복기에 이상춘은 국어학자로 자리를 굳혔고, 임영빈은 목회자 걸음을 따른 가벼운 기행 수필에 그쳤다. 그런 까닭에 광복기 개성 소설은 김소엽 홀로 도맡은 모습이다.[5]


문학에 표현된 가난과 어려움 속에 살아가는 소시민의 삶

김소엽은 광복 이전 이미 소설․시․어린이문학․줄글에 이르기까지 마흔[6] 편을 넘는 작품을 내놓았다. 거기다 소설집 『갈매기』까지 더하며 개성 지역 문학의 자부심을 드높인 작가다. 광복을 맞자 발빠르게 개성문화건설협의회 회장으로서 문화계 앞자리에 나섰던 사실은 앞에서 짚은 바와 같다. 그런데 광복기 동안 그의 본령이라 할 소설 발표는 많지 않았다. 거기다 『갈매기』(평문사, 1949) 복간이 더했으니 활발했다 하기 어렵다. 그의 광복기 작품은 앞선 시기와 비슷하게 가난과 어려움 속에 떠밀리며 살아가는 소시민의삶을 자전적 경험을 중심으로 그려나가는 틀을 거듭했다. 그런 가운데 『청춘』은 개성의 문화계 현장에 있었던 자신의 모습을 암시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무어든 일을 한다는 것, 더구나 그것이 하고 싶던 일인 때처럼 사람의 생활에 있어 소중하고 보람있는 것을없을가싶다.”로 시작하는『청춘』은 오래도록 개성의 표상 가운데 한 사람인 황진이의 묘를 글감으로 삼았다. [7]


작품 속에서 언급된 '황진이 묘"를 통해 알아보는 개성 문화를 보호하고자 했던 시도

지역문화 활동에 앞장섰던 김소엽과 일[8]행의 자부심 넘치는 마음자리를 읽는 데는 어려움이 없다. 그들 활동 가운데 하나가 고도 개성의 문화재를 가꾸고 보호하는 일이었다. 청춘은 당대 지역 청년의 그러한 활동 가운데 하나를 글감으로 삼은 셈이다. 굳이 작품 제목에‘청춘’이라 붙인 뜻은 자신들 일에 대한 자부심을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작품이 광복 이전 작품모춘기(暮春記)의 후속작이라는 점이다.[9] 소설집 『까마귀』(1942) 맨 뒤에 실려 있는 모춘기는‘황진이 무덤을 찾어서’라는 부제를 달았다. 어느 해 봄 김소엽과 벗 자영, 수령 세 사람은 장단군 진서면 까치동 입우물 위쪽에 있는 황진이 무덤을 촌로의 도움을 받아 찾았다, 거기서 그들은 이미 30여 년 전에 도굴을 당하여 “구렁텅이 모양으로 한 길이 나 움푹 패여 달아나” 있던 무덤을 만났다. 게다가세워져있는‘절세명기황진이지묘’라는 표목도 세월을 이기기 힘들어 보였다. 그들에 앞서 문일평․이상춘과 같은 개성인사가 다녀가면서 세운 것이다. 그 자리서 일행은 뒷날 기회를 보아 돌비를 세우기로 약속하고, 비명 새기는 일까지 의논을 마친 뒤 돌아왔다. 모춘기는 그런 과정을 담은 작품이다.[10] 광복을 맞은 뒤,모춘기의 일행은 약속대로 다시 황진이 무덤을 찾았다.거기다 준비해 온빗돌을 무덤둘레를 손질한 것이다. 1946년 봄 일이었다. 다만 그때는 지난번 함께 갔던 자영이 빠지고 김소엽과 극작가 이수령, 화가 김태형 세 사람이 걸음을 같이 했다. 검정색 빗돌 앞뒤에 글을 새기는 일은 이전 약속에 따라 이수령이 맡았다. 앞면에는‘절기황진이지묘'라썼고, 뒤에는 대표 시조 한 수를 넣었다. 『청춘』은 바로 그러한 실경험을 바탕으로 쓴 작품이다.황진이 무덤 참배와 손질이 뜻하는 개성 문화재에 대한 남다른 관심은 광복기 김소엽을 비롯한 지역 청년의 문화 실천 활동에 대한 의욕과 자부심을 드러내는 한 방식이었던 셈이다.[11]


제목3

대표작으로는 1935년 『조선문단』에 발표한 <폐촌>을 꼽을 수 있다. 일제의 어민 수탈이 심해지자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떠나야 하는 어민들의 사정을 그린 이 작품은 자연스러운 필치로 그려낸 리얼리즘의 전형적인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은 바 있다.(http://nks.ac.kr/Word/View.aspx?id=1229)

점순은 부지런하고 심지가 곧은 한 갯마을의 처녀이다. 아버지는 어부였으나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실종되었고 지금은 홀어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다.

어업을 생계의 주요 수단으로 삼고 있던 그 마을은 일본의 수산회사가 들어서면서 당국이 개인적인 조업 행위를 금지한 이후 날로 퇴락하고 만다. 일부 어민들은 고용어부가 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소작농으로 전업한다. 최저 수준의 생계마저 유지하기 어려운 그들은 부업으로 돼지를 키우기도 하는데 그 먹이를 대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

그런 중에도 점순은 비교적 쉽게 먹이를 구하는데 그 이유는 술공장의 작은 주인이 그녀에게 호감을 느끼고 모주를 우선적으로 배급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작은 주인은 어느 날 그녀를 겁탈하려는 몰염치한 행위를 자행하지만 그녀는 완강히 저항하여 위기를 모면한다. 보릿고개 철이 되어 돼지는 물론 사람조차도 먹을 것이 부족하게 되자 돼지는 날로 여위어갔으므로 농민들은 보다 못하여 헐값에 팔아 넘긴다.

보리가 채 익기도 전에 보릿대를 반나마 잘라 먹던 농민들은 하나씩 둘씩 마을을 뜨게 된다. 누구는 간도로, 또 누구는 강원도로 이주를 하는가 하면 심지어 서울의 홍등가로 팔려 가는 처녀조차 있다. 마침내 견디다 못한 점순도 정미소 공원이 되기 위하여 마을을 뜨는 것으로 작품은 끝난다. [네이버 지식백과] 폐촌 [廢村]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그리고 「서울」(조선문학 속간 3∼4, 1936.8.∼9.)·「누님」(조선문단 속간 6, 1936.11.)·「성열이 부처」(풍림 1, 1936.12.)·「양서방」·(조광 19, 1937.5.)·「함정」(조선문학 재속간 14, 1937.8.)·「그늘 밑에서」(조광 31, 1938.5.) 등을 발표하였다. 이 무렵의 중요 작품은 황폐한 농촌의 삶과 인간미의 소멸과정을 밀도있게 그려낸 「폐촌」과 「가물치」를 들 수 있다.(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9533)


제목4

1930년 말기에는 「바다는 얼어 붙고」(조선문학 19, 1939.6.)·「파탄(破綻)」(문장 임시증간 7, 1939.7.)·「초라한 풍경」(조광 45, 1939.7.)·「수류탄」(조광 47, 1939.9.)·「갈매기」(조광 54∼55, 1940.4∼5.)·「한교기(閑郊記)」(문장 23, 1941.2.)·「산성」(춘추 26, 1943.3.) 등을 발표하였다. 농촌의 현실을 배경으로 하여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일상적인 삶이 소설의 주제를 이루고 있다.(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9533)





데이터


TripleData

Source (A) Target (B) Relationship
Person: 홍길동 Institution: ○○고등보통학교 A graduates B
Person: 홍길동 Institution: ○○대학교 A worksAt B
Person: 홍길동 Group: ○○학회 A isMemberOf B



Time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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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원







주석


  1. 유일하게 사진이 올라와있는 자료이다.
  2. 박태일,「광복기 개성 지역문학의 좌표 -북한 지역문학사 연구 2」,『현대문학이론연구』 제 51권 51호, 현대문학이론학회, 2012, 207쪽.
  3. Ibid., 208쪽.
  4. Ibid., 207쪽.
  5. 박태일,「광복기 개성 지역문학의 좌표 -북한 지역문학사 연구 2」,『현대문학이론연구』 제 51권 51호, 현대문학이론학회, 2012, 225쪽.
  6. 박태일,「광복기 개성 지역문학의 좌표 -북한 지역문학사 연구 2」,『현대문학이론연구』 제 51권 51호, 현대문학이론학회, 2012, 226쪽.
  7. Ibid., 227쪽.
  8. Ibid., 226쪽.
  9. Ibid., 226쪽.
  10. Ibid., 227쪽.
  11. Ibid., 22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