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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Korea Human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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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6월 3일 (월) 16:50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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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희(趙明熙)
22P0GXGFGH 1.jpg
출처 : 서울경제 사외칼럼[1]
 
한글명 조명희 한자명 趙明熙 영문명 Cho Myeong-hee 가나명 이칭 포석(抱石)
성별 남성 생년 1894년 몰년 1938년 출신지 충청북도 진천군 전공 철학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충북 진천군에서 태어난 소비에트 연방의 작가, 서른 살 늦깎이 문학 청년, 3·1운동에 가담한 일제강점기의 저항 시인이다.


생애


방황하던 유년 시절

조명희는 충북 진천군 진천읍 벽암리에서 1894년 8월 10일에 4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6살 때 천자문을 떼고 다양한 한문서적들을 두루 읽으며 당시 진천 사람들로부터 신동이라 불리게 된다.[2] 1906년 민식과 결혼하였다. 1908년 진천에 세워진 첫사립학교인 문명소학교에 입학한다. [3] 결혼생활이 맞지 않아 가까운 청주나 충주의 학교를 그만두고 1910년 서울 중앙고보에 진학했다. 1914년 졸업반이었지만 중앙고보를 중퇴하고 베이징사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영웅 전기만을 들고 가출을 감행하여 평양까지 갔지만, 둘째 형인 조경희에게 잡혀?? 고향 진천으로 되돌아온다. 고향으로 와 국내외 소설을 읽으며 지냈고 레미제라블을 읽고 크게 감동하여 문학에 뜻을 품는다. 이후 문학을 위해 동경 유학을 계획하고 돈을 벌러 다니지만, 끝내 빈손으로 귀향하고 1919년 3·1운동에 참여하다가 경찰에 체포되어 몇 달 동안 구금 생활을 하였다. 석방 후, 국내 순회 연극단을 조직하여 계몽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도쿄 대학으로 유학가다.

1919년 가을, 친구 남준우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도쿄 도요대학 인도철학윤리학과에서 공부했다. 스스로 '일생을 좌우할 분기점'이라고 밝힐 정도였지만 동경 유학 생활은 그에게 매우 힘들었다. 일본에서 급진주의적 경향을 띤 무정부주의 계열의 흑도회에 가입하여 잠시 활동하였다. 웅변 대회에서 열정적인 언변을 함으로써 동경 유학생을 중심으로 전개된 학우회라는 모임의 연극 운동의 핵심 일원이 된다. 학우회에서 애국적 열정을 드러내어 군중들의 애국심을 고취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게 체포당하기도 한다. 이후 1920년 김우진 등과 함께 극예술협회를 조직하여 희곡을 창작하고 연극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되었다. 1921년 희곡 '김영일의 사'를 집필하였고, 이 희곡을 동우회 순회 연극단에서 공연하였다. 1923년 희곡 '파사'를 발표하고 한국 최초의 근대 희곡집 '김영일의 사'를 동양서원에서 출판하였고 이 해에 유학생활을 그만두고 귀국하였다.


문학인 조명희으로의 본격적인 활동

1924년 춘추각에서 시집'봄 잔디밭 위에'를 출간하였다.


연해주에서의 망명 생활


제목5





연구


제목1


제목2


제목3





데이터


TripleData

Source (A) Target (B) Relationship
Person: 홍길동 Institution: ○○고등보통학교 A graduates B
Person: 홍길동 Institution: ○○대학교 A worksAt B
Person: 홍길동 Group: ○○학회 A isMemberOf B



Time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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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원







주석


  1. https://www.sedaily.com/NewsView/22P0GXGFGH
  2. https://www.cbfc.or.kr/cc/sub.php?menukey=6547
  3. 이명재,『조명희 : 그들의 문학과 생애』(한길사, 2008.), 29~3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