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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Korea Human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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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원시사회의 생산과 소유
 
2) 원시사회의 생산과 소유
한흥수는 원시사회에서의 소유는 공동적이며, 생산은 개별적으로 되어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한흥수, 「原始社會史硏究에 關한 覺書」, 『력사제문제』 2, 117-132, 1948, 평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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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흥수는 원시사회에서 소유는 공동적이며, 생산은 개별적이라고 주장하였다.<ref>한흥수, 「原始社會史硏究에 關한 覺書」, 『력사제문제』 2, 1948, 117-132쪽.</ref> 그에 반에 도유호는 생산의 사회성은 생산수단을 공유하는 생산관계, 곧 사회적인 생산관계를 초래하였기 때문에 원시인의 사회적 생산을 개별적인 생산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ref>도유호,  「先史學의 唯物史觀的 考察을 爲한 몇개의 基本問題(下)」, 『력사제문제』 16, 1950, 22-45쪽.</ref>
그에 반에 도유호는 생산의 사회성은 생산수단을 공유하는 생산관계, 곧 사회적인 생산관계를 초래하였기 때문에 원시인의 사회적 생산을 개별적인 생산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하였다. 도유호,  「先史學의 唯物史觀的 考察을 爲한 몇개의 基本問題(下)」, 『력사제문제』 16, 22-45, 1950, 평양.
 
  
 
3) 원시사회의 산아율과 분업
 
3) 원시사회의 산아율과 분업
한흥수는 원시사회의 산아율과 분업에 대해 자연법칙적인 산아율의 제약으로 집단노동이 마무리 되었고, 이를 계기로 개인적인 분업이 점점 사회화되었다고 보았다. 또한 산아라는 비사회적 본성으로 야기된 씨족과 집단생활 사이의 대립과 통일을 거쳐 인간 생활은 더 향상된 사회 형태로 발전할 수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한흥수, 「原始社會史硏究에 關한 覺書」, 『력사제문제』 2, 117-132, 1948, 평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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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흥수는 원시사회의 산아율과 분업에 대해 자연법칙적인 산아율 제약으로 집단노동이 마무리 되었고, 이를 계기로 개인적인 분업이 점점 사회화되었다고 보았다. 또한 산아라는 비사회적 본성으로 야기된 씨족과 집단생활 사이의 대립과 통일을 거쳐 인간 생활은 더 향상된 사회 형태로 발전할 수 있었다고 주장하였다.<ref>한흥수, 「原始社會史硏究에 關한 覺書」, 『력사제문제』 2, 1948, 117-132쪽.</ref> 반면 도유호는 원시사회가 붕괴된 원인은 집단 사이에 균등하지 않았던 산아율에 있는 것이 아니며 원인은 공동노동에 따른 분업 발생에서 찾아야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맬서스와 같은 부르주아 학자의 학설에 의지하여 원시사회의 인구 문제를 자연법칙으로 논하는 것은 출발부터가 잘못되었다고 주장하였다.<ref>도유호, 「先史學의 唯物史觀的 考察을 爲한 몇개의 基本問題(下)」, 『력사제문제』 16, 1950, 22-45쪽.</ref>
반면 도유호는 원시사회가 붕괴된 원인은 집단 사이에 균등하지 않았던 산아율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며 원인을 공동노동에 따른 분업의 발생에서 찾아야 한다고 보았다. 때문에 맬서스와 같은 부르주아 학자의 학설에 의지하여 원시사회의 인구 문제를 자연법칙으로 논하는 것은 출발부터가 잘못되었다고 하였다. 도유호, 「先史學의 唯物史觀的 考察을 爲한 몇개의 基本問題(下)」, 『력사제문제』 16, 22-45, 1950, 평양.
 
  
 
4) 혈족과 생산관계
 
4) 혈족과 생산관계
한흥수는 혈족은 원시사회의 생산관계를 성립시키는 유일한 기본단위였고, 생산에서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이라고 보았다. 한흥수, 「原始社會史硏究에 關한 覺書」, 『력사제문제』 2, 117-132, 1948, 평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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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흥수는 혈족은 원시사회의 생산관계를 성립시키는 유일한 기본단위이자 생산에서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이라고 보았다.<ref>한흥수, 「原始社會史硏究에 關한 覺書」, 『력사제문제』 2, 1948, 117-132쪽.</ref> 하지만 도유호는 생산형태의 변화로 인하여 모권 또는 부권과 같은 혈연관계가 유발되었다고 보았다.<ref>도유호, 「先史學의 唯物史觀的 考察을 爲한 몇개의 基本問題(上)」, 『력사제문제』 15, 1950, 56-103쪽.</ref>
하지만 도유호는 생산형태의 변화로 인하여 모권 또는 부권과 같은 혈연관계가 유발되었다고 보았다. 도유호, 「先史學의 唯物史觀的 考察을 爲한 몇개의 基本問題(上)」, 『력사제문제』 15, 56-103, 1950, 평양.
 
  
 
5) 혈족과 상부구조
 
5) 혈족과 상부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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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문화권설
 
6) 문화권설
한흥수는 문화권설은 모든 제국주의적 침략 정책에 역사적 근거와 이론적 원조를 제공하는 반동 학설이며, 역사의 발전 과정 중에 나타난 현상을 나열 분류하는 데 만족하고 있는 ‘문화형’ 또는 ‘문화권’이라는 규범은 사회 발전의 발생학적 법칙을 무시하고 있다고 보았다. 반면, 도유호는 문화권설이 반동적 학설이라는 점을 인정하지만, 문화권설을 유물사관적인 관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그 예로 발상지가 서로 다른 지역의 문화권에 형성된 모권문화와 부권분화의 기원을 경제적 원인에서 찾으려고 한 그레브너의 사례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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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흥수는 문화권설은 모든 제국주의적 침략 정책에 역사적 근거와 이론적 원조를 제공하는 반동 학설이라고 비판했다. 역사의 발전 과정 중에 나타난 현상을 나열 분류하는 데 만족하는 ‘문화형’ 또는 ‘문화권’이라는 개념은 사회 발전의 발생학적 법칙을 무시한다고 비판했다. 반면, 도유호는 문화권설이 반동적 학설이라는 점을 인정하지만, 문화권설을 유물사관적인 관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 예로 발상지가 서로 다른 지역의 문화권에 형성된 모권 문화와 부권 문화의 기원을 경제적 원인에서 찾으려고 한 그레브너의 사례를 들었다.
  
 
7) 문화 계통과 교류
 
7) 문화 계통과 교류
한흥수는 민족과 문화는 역사적 과정을 통하여 형성된 산물이기 때문에, 어느 한 민족에 본래부터 고유한 문화의 순수성이 변함없이 그대로 남아 있다고 볼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문화의 순수성을 부르짖는 사람들은 소위 문화의 계통만을 찾으려고 하며, 그들은 인류 사회의 발전 법칙을 무시하고, 모든 문화가 처음부터 서로 다른 계통에서 출발하여 발달했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도유호는 인류의 발달사를 유물사관적 방법론으로 해석하더라도, 전기 구석기시대부터 서로 다른 계통의 문화가 존재했으며, 문화 교류에 의한 외적 영향이 인류의 사회 발전에 긍정적인 역할을 하였던 점을 인정해야 한다고 보았다. 또한 분화 계통의 차이가 그것의 필연적인 분화 과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며, 천편일률적으로 발전만을 논하는 것은 올바른 접근 방법이 아니라고 보았다. 도유호, 「先史學의 唯物史觀的 考察을 爲한 몇개의 基本問題(上)」, 『력사제문제』 15, 56-103, 1950, 평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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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흥수는 민족과 문화는 역사적 과정을 통하여 형성된 산물이기 때문에, 어느 한 민족에 본래부터 고유한 문화의 순수성이 변함없이 그대로 남아 있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문화의 순수성을 부르짖는 사람들은 소위 문화의 계통만을 찾으려고 하며, 인류 사회의 발전 법칙을 무시하고 모든 문화가 처음부터 서로 다른 계통에서 출발한 것으로 본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도유호는 인류의 발달사를 유물사관적 방법론으로 해석하더라도, 전기 구석기시대부터 서로 다른 계통의 문화가 존재했으며, 문화 교류에 의한 외적 영향이 인류 사회 발전에 긍정적인 역할을 점을 인정해야 한다고 보았다. 또한 문화 계통의 차이와 그 필연적인 분화 과정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 천편일률적으로 발전만을 논하는 것은 올바른 접근 방법이 아니라고 보았다.<ref>도유호, 「先史學의 唯物史觀的 考察을 爲한 몇개의 基本問題(上)」, 『력사제문제』 15, 1950, 56-103쪽.</ref>
  
 
8) 유물 형태와 종족 문제
 
8) 유물 형태와 종족 문제
한흥수는 특정 유물의 형태적 특성을 임의의 종족과 결부시켜 나열 분류하는 방법은 사회의 발전과 진화의 법칙을 무시하는 것이라 보았다. 한흥수, 「朝鮮原始史硏究에 關한 考古學上諸問題」, 『력사제문제』 15, 4-55, 150, 평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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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흥수는 특정 유물의 형태적 특성을 임의의 종족과 결부시켜 나열 분류하는 방법은 사회의 발전과 진화의 법칙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보았다.<ref>한흥수, 「朝鮮原始史硏究에 關한 考古學上諸問題」, 『력사제문제』 15, 1950, 4-55쪽.</ref> 하지만 도유호는 충분한 과학적 근거에 입각하여 유물의 시대적 및 종족적 차이를 논할 수 있고, 그것을 통해서 그 사회의 속성을 파악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ref>도유호, 「先史學의 唯物史觀的 考察을 爲한 몇개의 基本問題(上)」, 『력사제문제』 15, 1950, 56-103쪽.</ref>
하지만 도유호는 충분한 과학적 근거에 입각하여 유물의 시대적 및 종족적 차이를 논할 수 있고, 그것을 통해서 그 사회의 속성을 파악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도유호, 「先史學의 唯物史觀的 考察을 爲한 몇개의 基本問題(上)」, 『력사제문제』 15, 56-103, 1950, 평양.
 
  
 
9) 예술품
 
9) 예술품
한흥수는 고고학은 인류사회의 발전법칙을 이해하는 데 직접 이바지했던 생산기구의 형태학적 연구에 중점을 두어야 하며, 장식품이나 토우 등은 경제사적으로 주요한 연구 대상이 아니라고 언급하였다. 한흥수, 「朝鮮原始史硏究에 關한 考古學上諸問題」, 『력사제문제』 15, 4-55, 1950, 평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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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흥수는 고고학은 인류사회의 발전법칙을 이해하는 데 직접 이바지했던 생산기구의 형태학적 연구에 중점을 두어야 하며, 장식품이나 토우 등은 경제사적으로 주요한 연구 대상이 아니라고 언급하였다.<ref>한흥수, 「朝鮮原始史硏究에 關한 考古學上諸問題」, 『력사제문제』 15, 1950, 4-55쪽.</ref> 반면 도유호는, 멩힌이 후기 구석기시대 미술 작품은 마법(魔法)을 행하는 과정에서 제작되었는데 마법은 생산행위이고 따라서 시술의 기원은 생산이라고 설명한 것을 과학적인 견해라고 높이 평가하였다.<ref>도유호, 「先史學의 唯物史觀的 考察을 爲한 몇개의 基本問題(上)」, 『력사제문제』 15, 1950, 56-103쪽.</ref>
반면 도유호는 후기 구석기시대 미술 작품이 마법(魔法)을 행하는 과정에서 제작되었고, 마법을 생산 행위로 간주하면서 미술의 기원을 생산에서 찾으려 했던 멩힌의 설명은 과학적인 견해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도유호, 「先史學의 唯物史觀的 考察을 爲한 몇개의 基本問題(上)」, 『력사제문제』 15, 56-103, 1950, 평양.
 
  
 
10) 원시공동체 사회의 분해
 
10) 원시공동체 사회의 분해
한흥수는 국가의 형성 과정을 고찰하는데 있어, 전쟁을 노예소유제 사회의 특징으로 인정할 수 없으며, 노예가 있다고 해서 노예소유제 사회인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한흥수, 「朝鮮原始史硏究에 關한 考古學上諸問題」, 『력사제문제』 15, 4-55, 평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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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흥수는 국가의 형성 과정을 고찰하면서, 전쟁을 노예소유제 사회의 특징으로 인정할 수 없고 노예가 있다고 해서 노예소유제 사회인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ref>한흥수, 「朝鮮原始史硏究에 關한 考古學上諸問題」, 『력사제문제』 15, 4-55.</ref> 하지만, 도유호는 종족적 대립이 계급 대립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노예와 노예소유자라는 최초의 사회계급이 분화되었고, 이 계급 분화의 발생으로 노예 소유제 국가라는 정치 형태가 출현하였다고 보았다.<ref>도유호, 「先史學의 唯物史觀的 考察을 爲한 몇개의 基本問題(下)」, 『력사제문제』 16, 1950, 22-45쪽.</ref>
하지만, 도유호는 종족적 대립이 계급 대립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노예와 노예소유자라는 최초의 사회계급이 분화되었고, 이 계급 분화의 발생으로 노예 소유제 국가라는 정치 형태가 출현하였다고 보았다. 도유호, 「先史學의 唯物史觀的 考察을 爲한 몇개의 基本問題(下)」, 『력사제문제』 16, 22-45, 1950, 평양.
 
  
 
===2. 토론과 논쟁의 시대: 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 초기===
 
===2. 토론과 논쟁의 시대: 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 초기===

2021년 11월 20일 (토) 16:14 판

도유호(都宥浩)
DoYu-Ho.jpg
출처 : 1966년 9월호 <새조선>[1]
 
한글명 도유호 한자명 都宥浩 영문명 Do Yu-ho 가나명 이칭 도정호(都定浩)
성별 남성 생년 1905년 몰년 1982?년 출신지 함경북도 함흥 전공 고고학


개요

한국 최초의 고고학자. 북한 고고학자. 1905년에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났다. 1935년 오스트리아 빈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독일 여성과 결혼한 후 귀국하였다. 1946년에 월북하여 1947년 김일성종합대학 교수가 되었다. 1960년대 초반 최고인민회의 의장을 맡는 등 정계에서도 활약하였다. 굴포리, 지탑리, 궁산리 등의 북한 고고학 유적 발굴을 주도하였다. 그의 1960년 논문 ‘조선원시고고학’은 1960년대부터 1990년대에 걸쳐 북한에서 고고학 연구의 기초 논문이 되었다. 또한 황기덕과 공동으로 ‘지탑리 원시유적 발굴보고’를 작성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63년 『조선원시고고학』에서 문화의 전파이론을 채용한 것은 변증법적 유물론에 위배되는 반동적 이론이라하여 호된 비판을 받았다. 1965년 이후 북한학계에서 사라진 그에 대해 여러 추측이 있지만, 일설에 의하면 백두산 부근의 중학교로 쫓겨났다가 그곳에서 죽었다고도 한다.[2]

생애

출생과 성장

금전은악마의무긔란우리의슬로간

1905년 5월 29일(양력 7월 1일)에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났다. 성주도씨(星州都氏) 사정공파(司正公派) 27세손(世孫)이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함흥에서 비교적 유복한 가정이었다. 「학적부」(휘문고등학교 소장)에 그의 본명은 도정호(都定浩), 그리고 부친 이름은 도진오(都鎭五, 1874~1939)로 기록되어 있다. 그의 큰형은 도용호(都容浩, 1895~?), 작은형은 도관호(都寬浩, 1900~?)이다. 이 두 사람은 식민지 시기에 사회주의자로서 항일운동을 하였다.[3] 함흥 영신학교와 함흥 영생학교 4년을 마치고 1922년 서울의 휘문고등보통학교 5학년에 편입해 1923년 졸업하였다.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도유호는 1923년 5월 초, 동아일보에서 1천호 발간 기념에 즈음하여 실시한 현상 문예에 응모하였다. 그는 도정호(都定浩)라는 이름으로 ‘가을 저녁’이라는 작품을 출품하여 시 부문에 당선되었다.[4] 같은 해 신흥공립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24년 짧은 교직 생활을 마치고, 1924년 4월 경성고등상업학교에 진학하였다. 3학년으로 진급할 무렵 병으로 인하여 1년간 휴학하고 금강산에 들어가 휴양을 하였다. 1928년 3월에 졸업하였다.[5]
경성고등상업학교를 졸업한 그 해, 도유호는 일본으로 가서 고베상업대학(神戶商業大學) 입학시험에 합격하였다. 그렇지만 상업대학에는 뜻이 없어 등록을 하지 않았다.[6] 자신이 원하는 학업을 닦기 위하여 일본이 아닌 중국 유학을 선택하였다. 도유호는 베이징 옌칭대학(燕京大學) 문학원에 편입하여 1928년 9월부터 1930년 정월까지 3학기 동안 학적을 두었던 것으로 추정된다.[7] 조선에 귀국한 그는 1930년 4월 경성을 떠나 유럽 유학 길에 오른다. 1930년 6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한 후 여행기(「구주행 인도양 건너서서」)를 23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연재하였다. 지금 본명처럼 굳어진 ‘도유호(都宥浩)’라는 필명은 이때부터 사용하였다.[8]

유럽 유학

도유호는 1931년 10월 프랑크푸르트대학(Goethe University Frankfurt am Main)에 입학하였다. 입학 당시 민족 문제에 대한 관심을 크게 가졌다. 지도 교수는 지식사회학의 선구자로 알려진 만하임(Karl Mannheim, 1893~1947)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ref>도유호, 「民族問題에 關하야」, 『동광』 30, 1932.1., 102쪽.</ref> 1933년 초 정권을 잡은 나치스는 만하임의 교수직을 박탈하였고,[9] 만하임은 1933년 봄 영국으로 망명하였다. 김일성대학 교원 임용과 관련하여 작성된 도유호의 「이력서」(『金大, 敎員履歷書, 文學部』 1946)에 따르면, 당시 그는 히틀러 정권에 의하여 투옥되기도 하였는데, 이 사건은 만하임 교수 문제와 연루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10]
1933년 봄 독일에서 추방된 도유호는 오스트리아 비엔나대학(UniversitätWien, University of Vienna) 철학부 사학과로 전학하였고다. 1935년 비엔나대학에서 Probleme der koreanischen Geschichte in kulturellem Zusammenhang (문화적 맥락에서 본 조선사의 문제)라는 논문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논문의 주심사원은 유럽 중세사와 경제사에 관하여 업적을 남긴 도프슈(Alfons Dopsch, 1868~1953) 교수였다. [11] 학위논문에서는 고대(단군신화와 기자, 민족의 기원, 삼국의 경제와 사회 등), 중세(통일신라, 고려, 봉건제도 등), 근세(조선, 정체성 문제, 이념적–정치적 전개 과정 등)에 이르기까지 한국 역사와 문화에 관한 내용을 다뤘다.[12]
비엔나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나서 그는 곧바로 귀국하지 않았다. 1930년대 독일-오스트리아 민속학의 중요한 학맥을 형성한 인물들, 이른바 비엔나학파의 일원이었던 슈미트(Wilhelm Schmidt, 1868~1954), 코퍼스(WilhelmKoppers, 1886~1961), 하이네겔데른(Robert von Heine-Geldern, 1885~1968),멩힌(Oswald Menghin, 1888~1973) 등을 학문적인 스승으로 삼아 민속학과 선사학에 대한 이해를 넓혀나갔다.[13] 또한 1934년 베를린에서 사망한 그레브너(Fritz Graebner, 1877~1934)도 도유호가 오스트리아에서 학업을 쌓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1938년 봄,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병합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일을 계기로 슈미트와 코퍼스는 스위스 프리부르(Fribourg)로 피신하였고, 하이네겔데른은 미국으로 망명하였으며, 멩힌은 병합 내각의 문화교육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도유호가 스승으로 삼았던 인물들이 모두 그의 곁을 떠나게 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말미암아 도유호는 더 이상 비엔나에 머물 수 없는 형편이 되었다. 비엔나를 떠난 도유호는 1940년 1월 27일 경성역에 도착하였다.[14]
박사학위를 받은 후 도유호는 「支那社會史上으로 본 孔子와 老子(獨文)」(『진단학보』 8, 1937), “Proto-Schang und chinesische Zivilisation(原商族과 중국 문명)”(1938)을 집필하였다.[15]. 또한 그는 비엔나에서 동쪽으로 약 50km 떨어진 카르눈툼(Carnuntum)의 로마시대 유적 발굴 등에 참여하기도 하였다.[16]

유럽 유학 이후

귀국 이후 식민지 시기에 도유호가 발표한 논문은 모두 네 편으로 보인다. 그 가운데 「중국도시문화의 기원」이라는 글의 초고는 1939년 여름 비엔나에서 집필했으며, 귀국 후 『진단학보』 12~14권(1940~1941)에 발표했다.[17] 이 글은 그레브너, 슈미트, 코퍼스, 하이네겔데른, 멩힌 등의 주장을 자신의 견지에서 정리하고, 중국 도시문화의 기원에 대한 성격과 특징을 논했다. 그리고 역사의 진보적 발전법칙에 관한 헤르더(Johann Gottfried Herder, 1744~1803)의 인식을 토대로 하여 중국의 선사시대 및 고대사회 연구에서 제기되는 문제를 이른바 변증법적인 발전사관</ref>도유호, 「中國都市文化의 起源(一)」, 『진단학보』 12, 1941</ref>에 의하여 해명하고자 하였다. 오늘날 중국 고고학과 고대사 연구에서 이루어진 학문적 성과와 비교할 때, 당시 도유호가 전개한 논증 과정과 그 결과는 상당한 범위에서 유효성을 잃었다. 그러나 20세기 초 독일-오스트리아의 민속학을 대표하는 비엔나학파의 문화권설을 적용하여 중국 고대사를 해석하고자 시도한 점은 한국 고고학의 학사적 측면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력서」에 따르면 귀국 후 도유호는 일제 당국으로부터 심한 감시를 받았다고 한다. 아울러 당시 도유호는 국내 국학자들과 관계도 원만하지 못하였다.[18] 여러 사정으로 국내에서 일자리를 얻지 못한 도유호는 만주국 신경 박물관(현재의 길림성박물관)에 취직한 바 있으며,[19] 1942년 3월에는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 체류 중에는 인류학, 선사학, 고고학에 관한 독일어 서적을 일본어로 번역하며 생활비를 충당하였다. 그가 번역에 참여한 책으로 『石器時代の世界史(석기시대의 세계사)』(岡 正雄 譯, 1943)가 국내에 소개된 바 있다.[20]
1945년 2월 일본에서 귀국한 도유호는 함흥에서 해방을 맞이하였다. 해방 다음날 도유호는 진단학회 상임위원으로 선출되었고,[21]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초청장 발송 명단에 이름이 올랐다.[22] 다만 도유호는 서울에 오지 않고 함흥에 그대로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함흥에서는 함흥시립도서관장과 의과대학 강사로 임명을 받았다. 1946년 3월 서울에 온 도유호는 민주주의민족전선(民主主義民族戰線, 이하 ‘민전’으로 약칭) 에 가입하고, 조선인민당 당원으로 활동하며, 조선과학자동맹 위원장을 겸하였다. 같은 해 4월에는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였다. 도유호는 자신이 가입한 정당에서 담임 공작이 ‘인민당 푸락치’였다고 「이력서」에 기재하였다. 인민당과 조선공산당에 당적을 걸고 있었던 도유호는 ‘인민당 내의 공산당 프랙션’으로서 활동한 것이다.[23]
1946월 9월 초 미군정청은 조선공산당 주요 당원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이를 계기로 도유호는 10월 16일 삼팔선을 넘어 월북하였다. 1946년 10월 20일 도유호를 김일성종합대학 교원으로 채용하는 결정이 내려졌다.[24] 김일성종합대학 교원으로 임명된 이후, 1947년에 이루어진 대동강 연안의 석암리유적 발굴에 참여하였고,[25] 조선물질문화유물조사보존위원회 상무위원 및 조선력사편찬위원회 원시분과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었다.[26] 1949년에는 조선물질문화유물조사보존위원회(위원장: 한흥수)와 중앙역사박물관(관장: 황욱)이 주축이 되어 이루어진 황해남도 안악 제1호 무덤, 제2호(함박뫼) 무덤, 제3호(하무덤) 무덤의 발굴에 참여하였다.[27] 도유호는 1950년 당시 조선물질문화유물조사보존위원회 고고학 부장을 맡고 있었다.[28]
전쟁 중인 1952년 10월 북한에 과학원이 창설되었다. 당시 도유호는 통역장교로 근무하면서 과학원 후보 원사(고고학) 및 과학원 산하기구인 물질문화사 연구소의 소장으로 임명을 받았다.[29] 물질문화사연구소는 1956년 고고학 및 민속학 연구소로 개편되었는데, 도유호는 이 연구소 소장을 맡아 북한 지역 유적 발굴과 고고학 연구를 주도했다. 월북 이후 한국전쟁 이전까지 학술지에 발표된 도유호의 글은 모두 다섯 편 확인된다. 그 가운데 두 편은 황해도 안악의 고구려 무덤, 한 편은 고려 초기로 추정되는 강원도 철원의 봉선사지(奉先寺址), 나머지 두 편은 선사학의 유물사관적 고찰과 관련된 내용을 다뤘다.

연구

1. 도유호와 한흥수의 논쟁 : 1948~1950

북한에서 도유호는 한흥수와 원시시대, 고고학 민속 등에 대한 관심을 공유하면서 활동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상반된 주장과 접근 방법을 표명하며 원시사회의 성격, 생산관계, 혈연관계 등을 둘러싸고 여러 차례 학술 논쟁을 벌였다. 그들의 논쟁은 한국 고고학사의 측면에서 판단할 때, 두 가지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첫째, 사회주의적 분위기가 고조된 초기 북한 고고학계의 학문적인 동향을 반영한다. 둘째, 해방 이후 한국전쟁 이전까지 한국 고고학사의 빈틈을 채워주는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30]

1) 원시사회의 생산과 문제 한흥수는 원시사회의 생산 문제에 대해 “인류사회의 특성은 노동뿐이다”라는 직관적 유물론자의 주장에 찬성할 수 없으며, 원시사회에서 사회화된 생산은 거의 없었다고 주장하였다.[31] 이러한 의견에 도유호는 채취경제가 생산경제로 전화되는 원시사회에는 이미 재배와 목축이라는 생산형태가 지역적으로 분화되기 시작하였으며, 상호 교류에 의하여 문화가 질적으로 변화하고 생산력이 성장했다고 반박하였다.[32]

2) 원시사회의 생산과 소유 한흥수는 원시사회에서 소유는 공동적이며, 생산은 개별적이라고 주장하였다.[33] 그에 반에 도유호는 생산의 사회성은 생산수단을 공유하는 생산관계, 곧 사회적인 생산관계를 초래하였기 때문에 원시인의 사회적 생산을 개별적인 생산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34]

3) 원시사회의 산아율과 분업 한흥수는 원시사회의 산아율과 분업에 대해 자연법칙적인 산아율 제약으로 집단노동이 마무리 되었고, 이를 계기로 개인적인 분업이 점점 사회화되었다고 보았다. 또한 산아라는 비사회적 본성으로 야기된 씨족과 집단생활 사이의 대립과 통일을 거쳐 인간 생활은 더 향상된 사회 형태로 발전할 수 있었다고 주장하였다.[35] 반면 도유호는 원시사회가 붕괴된 원인은 집단 사이에 균등하지 않았던 산아율에 있는 것이 아니며 그 원인은 공동노동에 따른 분업 발생에서 찾아야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맬서스와 같은 부르주아 학자의 학설에 의지하여 원시사회의 인구 문제를 자연법칙으로 논하는 것은 출발부터가 잘못되었다고 주장하였다.[36]

4) 혈족과 생산관계 한흥수는 혈족은 원시사회의 생산관계를 성립시키는 유일한 기본단위이자 생산에서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이라고 보았다.[37] 하지만 도유호는 생산형태의 변화로 인하여 모권 또는 부권과 같은 혈연관계가 유발되었다고 보았다.[38]

5) 혈족과 상부구조 한흥수는 혈연관계는 원시사회의 물질적 생산의 기본단위이자 전제조건이었기 때문에 혈연은 상부구조의 범주에 속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도유호는 모권 또는 부권과 같은 혈연관계는 경제적인 생산형태의 변화에서 비롯하는 것이기 때문에 상부구조의 범주에 속한다고 보았다.

6) 문화권설 한흥수는 문화권설은 모든 제국주의적 침략 정책에 역사적 근거와 이론적 원조를 제공하는 반동 학설이라고 비판했다. 역사의 발전 과정 중에 나타난 현상을 나열 분류하는 데 만족하는 ‘문화형’ 또는 ‘문화권’이라는 개념은 사회 발전의 발생학적 법칙을 무시한다고 비판했다. 반면, 도유호는 문화권설이 반동적 학설이라는 점을 인정하지만, 문화권설을 유물사관적인 관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 예로 발상지가 서로 다른 지역의 문화권에 형성된 모권 문화와 부권 문화의 기원을 경제적 원인에서 찾으려고 한 그레브너의 사례를 들었다.

7) 문화 계통과 교류 한흥수는 민족과 문화는 역사적 과정을 통하여 형성된 산물이기 때문에, 어느 한 민족에 본래부터 고유한 문화의 순수성이 변함없이 그대로 남아 있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문화의 순수성을 부르짖는 사람들은 소위 문화의 계통만을 찾으려고 하며, 인류 사회의 발전 법칙을 무시하고 모든 문화가 처음부터 서로 다른 계통에서 출발한 것으로 본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도유호는 인류의 발달사를 유물사관적 방법론으로 해석하더라도, 전기 구석기시대부터 서로 다른 계통의 문화가 존재했으며, 문화 교류에 의한 외적 영향이 인류 사회 발전에 긍정적인 역할을 한 점을 인정해야 한다고 보았다. 또한 문화 계통의 차이와 그 필연적인 분화 과정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 천편일률적으로 발전만을 논하는 것은 올바른 접근 방법이 아니라고 보았다.[39]

8) 유물 형태와 종족 문제 한흥수는 특정 유물의 형태적 특성을 임의의 종족과 결부시켜 나열 분류하는 방법은 사회의 발전과 진화의 법칙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보았다.[40] 하지만 도유호는 충분한 과학적 근거에 입각하여 유물의 시대적 및 종족적 차이를 논할 수 있고, 그것을 통해서 그 사회의 속성을 파악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41]

9) 예술품 한흥수는 고고학은 인류사회의 발전법칙을 이해하는 데 직접 이바지했던 생산기구의 형태학적 연구에 중점을 두어야 하며, 장식품이나 토우 등은 경제사적으로 주요한 연구 대상이 아니라고 언급하였다.[42] 반면 도유호는, 멩힌이 후기 구석기시대 미술 작품은 마법(魔法)을 행하는 과정에서 제작되었는데 이 마법은 생산행위이고 따라서 시술의 기원은 생산이라고 설명한 것을 과학적인 견해라고 높이 평가하였다.[43]

10) 원시공동체 사회의 분해 한흥수는 국가의 형성 과정을 고찰하면서, 전쟁을 노예소유제 사회의 특징으로 인정할 수 없고 노예가 있다고 해서 노예소유제 사회인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44] 하지만, 도유호는 종족적 대립이 계급 대립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노예와 노예소유자라는 최초의 사회계급이 분화되었고, 이 계급 분화의 발생으로 노예 소유제 국가라는 정치 형태가 출현하였다고 보았다.[45]

2. 토론과 논쟁의 시대: 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 초기

북한에서 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 초기는 역사학과 고고학 부문에서 가장 활발하고 치열한 토론이 전개되었던 토론과 논쟁의 시대라고 부를 수 있다.

1) 삼국 시대의 사회 경제 구조에 대한 문제 김광진 http://dh.aks.ac.kr/~nkh/wiki/index.php/%EA%B9%80%EA%B4%91%EC%A7%84. 과 도유호는 1950년대 중반, 조선 역사에서 노예제의 유무에 대하여 논쟁을 벌였던 당대의 대표적인 학자다. 둘은 삼국 시대 사회 경제 구조에 대해 상반된 태도를 보였다. 김광진 김광진, 「조선에 있어서의 봉건제도의 발생(상)」, 『력사과학』 8, 11~39, 1955. 은 조선 역사에서 노예제 사회의 존재를 부정하였으며, 도유호는 조선에도 노예제도가 있다고 반론을 제기하며 도유호, 「조선 력사상에는 과연 노예 사회는 없었는가 –김광진 동지의 부정론과 관련하여-」, 『력사과학』, 315~77, 1956. , 김광진이 내세운 주장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입장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도유호는 평가하였다. 이에 김광진 김광진, 「삼국 시대의 사회 – 경제 구성에 관한 몇 가지 문제에 대하여(상)」, 『력사과학』 5, 14, 1956. 은 다시 도유호가 자신에게 던진 비판적인 주장을 반박하며, 철기 사용에 관한 문제를 취급하면서 중국의 영향을 과대평가한 자신의 견해를 일부 시정하였지만 “조선에 노예 소유자적 구성이 성립되었다는 주장은 그 근거가 과학적으로 논증되지 않았다”는 그의 논점은 변함이 없었다. 이후 논쟁은 1956년 10월 31일부터 11월 2일까지 과학원 력사연구소 주최로 열린 토론회에서 조선 역사에서 노예제 사회의 존재 유무에 관한 주제로 열띤 논쟁이 이루어졌다. 토론회에서 삼국 시기의 노예제사회를 부정하는 입장(김광진, 전석담, 로정환, 김세익, 리청원, 채희국, 정찬영 등)과 노예제사회를 긍정하는 입장(도유호, 림건상, 리능식 ,백남운, 한길언, 강병도 등)이 열띤 발표와 토론을 펼쳤다. 비록 토록회에서 노예제사회의 유무에 대한 문제는 확정되지 못한 상태로 마감되었지만, 이번 기회를 통하여 “삼국 시기의 사회 구성을 해명하려면 이미 알려진 자료 이외에도 더욱 광범위한 문헌 자료들과 함께 고고학, 민속학, 언어학, 문학사적 자료들을 더욱 많이 탐구해야 하는 절실한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김석형, 「조선 력사 연구의 기초 축성을 위하여」, 『력사과학』 3, 9, 1957.

1956년 하반기에 이루어진 학술 토론회의 성과는 1958년에 『삼국 시기의 사회 경제 구성에 관한 토론회』(과학원출판사)라는 제목으로 간행되었다. 이 단행본에서 제기된 주요 문제에 대하여 력사연구소의 고대 및 중세사 연구실에서는 관계자들을 중심으로 10여 차례의 토론회를 가졌다. 그렇지만 노예제 사회의 존재 유무 문제를 해명하는데 직접 도움이 되는 구체적인 방안은 여전히 제시되지 못한 상태로 머물러 있었다. 이후 삼국 시대의 사회 경제 구조를 해명하는 과정에서 그것이 본질적으로 노예제인가 또는 봉건제인가라는 주제를 두고 시작된 논쟁의 초점은 1960년대로 접어들며, 림건상 림건상, 「김석형 동지의 론문 《3국의 계급 제 관계》에서 제기된 몇 가지 리론상 문제에 대한 의견」, 『력사과학』 1, 107~119, 1960. 과 김석형 김석형, 「조선 고대사 연구에서 제기되는 몇 가지 리론상 문제」, 『력사과학』, 3, 82~85, 1960. 이 삼국의 사회 경제 구조에 대하여 상반된 입장을 취하고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삼국 이전이 노예제사회였다”는 데에 기본적으로 합의를 보게 되었다. 따라서 이제 삼국 이전이 노예제 사회에 해당함을 본격적으로 연구하는 방향으로 시각이 전환되었다.

2) 고조선 문제 1960년대 초 북한의 역사학계에서는 고조선의 위치에 관한 논쟁이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연구자들은 ‘재만주설(在滿洲說)’과 ‘재평양설(在平壤說)’로 갈리게 되었다. 이후 약 10여 년간 토론을 거듭하면서, 1961년 김석형(金錫亨)을 비롯한 이지린(李趾麟)·임건상(林健相)·이상호·백남운(白南雲) 등 많은 문헌사가들이 ‘재만주설’에 동조하였다. 이에 대한 도유호를 비롯한 황철산(黃鐵山)·정찬영(鄭燦永)·황욱(黃澳) 등 고고학자들이 주장하는 ‘재평양설’은 점차 소수설로 전락하게 되었다. 1963년에 개최된 토론회에 이르러서는 도유호 등의 ‘재평양설’은 마침내 사라지게 되고, 고조선의 ‘재만주설’만이 남아 북한학계의 정설이 되었다. 이 사건으로 도유호는 북한학계에서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도유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3) 초기 금속문화의 기원 문제 초기 북한 선사 고고학의 가장 큰 과제는 일제강점기 고고학의 ‘극복’이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한반도에 청동기시대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금속병용기’에 대한 반론이었으며, 지탑리유적의 발굴 조사로 금석병용기의 본재가 부정된 후 더 이상 금석병용기는 언급되지 않는다. 이렇듯 일제강점기 고고학의 극복을 주장하였지만 문화 발전의 요인을 외래 요소에서 찾는 인식은 실상 일제강점기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신석기시대 말엽에 벌써 대륙쪽에서 내려 미는 청동기 문화의 영향이 적지 않게 미쳤던 것’이라고 하거나 도유호, 『조선원시고고학』. , 청동기시대에서 철기시대로의 이행을 ‘청동기시대 말엽에 쇠붙이를 사용하는 어떤 종족이 래주하였음을 암시하는 유물 출토 정형도 보이나 더 많은 경우는 재래의 주민이 그냥 철기시대로 넘어 갔음을 이야기한다’ 도유호, 『조선원시고고학』. 고 말하는 등 도유호는 문화전파론의 입장에서 외부 문화요소의 유입을 긍정하고 있다. 그러나 ‘과학적인 학문으로서의 고고학’을 추구한 그의 입장은 결국 그를 북한 고고학에서 축출되게 하는 이유가 되었다. 이기성, 「북한 청동기시대 고고학 연구 경향의 변호와 쟁점」, 『문화재』 53-3, 184~201, 2020.

4) 고구려 석실 봉토분의 기원 문제 1949년 황해도 안악의 고구려 벽화 무덤 발굴에 참여했던 도유호는 벽화 내용에 대한 설명과 무덤에 나타나는 ‘고임 천정’의 기원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소략하게 남겼다. 도유호, 「安岳의 高句麗 壁畫墳」, 『자연과학』 5, 29~37, 1949.

그는 고임 천정의 형태는 돌멘 및 고구려적석총과 연결될 가능성이 있고, 중앙아세아 지역에서도 분포하는데 두 지역 사이의 선후 관계는 앞으로 연구되어야 할 과제라고 말하였다. 채희국은 논문에서 고구려 석실봉토분에 대해 고구려의 독창적인 묘제로 보았다. 채희국, 「고구려 석실 봉토분의 기원에 대하여」, 『문화유산』 3, 5~28, 1959.
이에 더하여 “우리는 우선 문화 발전에 있어서 내재적인 요인과 외‘적인 영향을 변증법적인 통일 속에서 관찰하는 것이 가장 필요하며 이에 따라서 고구려에 있어서의 외래 문화의 영향 문제를 신중히 취급하여야 한다”고 말했다. 즉, 사회 변호와 발전은 외부적 요인보다 내부적 요인이라는 기본 골격에 근거를 두며 고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하지만 도유호는 채희국의 주장에 역사적 계기성과 상호 관련성을 도외시하였다고 지적하고, 석실의 천장은 서역 요소로, 서역의 영향이 고구려화됨으로써 고구려의 특징이 되었다고 보고, 고구려의 고분 문화가 서역과 무관치 않음을 주장했다. 도유호, 「고구려 석실 봉토분의 유래와 서역 문화의 영향」, 『문화유산』 4, 29~37, 1959.
이는 벽화분의 등장을 중국의 영향 일변도로 본 일제강점기의 해석에 서역 요소를 부각시킨 것이다.

채희국의 시각을 반박하는 도유호의 논문이 발표된 뒤, 고구려 석실 봉토분의 기원 문제에 대한 논쟁은 한동안 잠잠하였다. 그러나 1961년 유일사상 체계 수립을 위한 조치로써 주체적 방법론을 철저히 구현해야 하는 강령 지침을 계기로 입장의 변화가 있었다. 력사연구소, 1961, 「우리 당 제4차 대회가 제시한 과업 수행을 위한 력사학계 임무, 『력사과학』 6, 1~7, 1961.

주영헌 주영헌, 「고구려 봉토 무덤의 기원과 그 변천」, 『고고민속』 3, 7~18, 1963.

은 고구려 봉토무덤의 기원과 변천에서 돌각담무덤[고구려 적석총]과 봉토분은 선후 관계를 가지는 한편, 일정 기간 병존하였다고 설명하지만, 봉토분에서 중국 한나라나 서역의 요소가 보이는 것을 문화 교류의 현상으로 해석함으로써 묵방리식 변형고인돌에서 기원한 봉토분은 유구하고 고유한 전통을 계승, 발전함으로써 변화 발전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후 봉토분은 묵방리형 변형고인돌 및 돌각담무덤의 전통을 계승 발전시킨 것으로 해석되었고, 돌각담무덤에서 돌칸흙무덤으로 변화는 북한 학계의 정설로 자리하게 되었다. 강현숙, 「북한의 고구려 고고학 조사·연구의 성과 과제」, 『문화재』 53-1, 106~125, 2020.

결론적으로 고구려 봉토무덤의 기원과 관련된 주영헌의 고고학 분야 논문은 시대적 요구에 잘 부응하였다. 하지만 이에 반해 도유호와 같이 외래문화의 계기적인 역할, 곧 서역문화의 본질적인 영향이 고구려 고분 연구에서 매우 주요한 의의를 지닌다는 접근 방법은 더 이상 설 자리를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그 뒤 전주농 전주농, 「고구려 벽화 무덤의 시원에 대하여」, 『고고민속』 3, 57~61, 1964. 은 고구려 벽화무덤의 시원이 돌무덤에 있었다고 이야기했지만, 그도 역시 고구려의 벽화무덤이 독자적으로 발전하였다는 점에 관해서는 이론(異論)이 없었다. 한창균, 『하담 도유호 : 한국 고고학 첫 세대』, 혜안, 2017.



일본 경찰 기록의 이청원 파일

1930년 일본 도쿄로 건너가 막노동 등을 전전하다 공산주의를 접하고 노동운동에 가담했다. 전향서를 분석한 일본 검찰 보고서에 따르면, 보통학교 졸업 후 1930년 6월에 상경해 낫토 행상, 막노동, 고물상 등을 전전하다가 공산주의를 신봉하기에 이르러 1930년 말 간토 자유노동조합 신주쿠반에 가입하고 실천 운동의 첫걸음을 내딛었다.[46] 이미 1931년 2월에는 ‘요주의’ 인물로서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았다. 일본 경찰 문서에 따르면 1931년 2월 16일부터 ‘소재 불명’으로 당시 주소는 “淀橋町 柏木 三一六 新納隆輔方”(현 東京都 新宿区 北新宿)였다. 1931년 10월에 도쿄 부근에서 열린 ‘와타마사의 날(渡政デー)’ 데모에 참가했다가 고지마치 경찰서(麹町署)에 검속되기도 했다.[47] ‘와타마사의 날’은 1928년 경찰에 쫓기다 자결한 일본공산당 지도자 와타나베 마사노스케(渡邊政之輔)를 기념하는 날이다. 일본 경찰 문서에 따르면 다시 1932년 7월 31일부터 ‘소재 불명’으로 당시 주소는 “牛込区 加賀町 一ノ三 全栄変方”였다. 같은 문서에서는 직업 낫토 행상, 별명 이현규(李炫奎), 키 5척 3촌, 보통 몸집에 머리 길고 둥글고 흰 얼굴에 눈썹 짙으며, 공산주의자로서 다수의 투쟁 경력 있다고 파악했다.[48] 1934년 9월에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다. 당시 ‘공청 중앙부 조직’, ‘일본토목건축노동조합 도쿄지부 재건준비회 조사이(城西)지구’에서 활동하고 있었다.[49] ‘공청, 반제, 전협’ 소속 이청원은 1934년 12월 일본 검찰에서 기소유보 처분을 받았다.[50]
북한에서 작성한 이력서에 따르면 1930년 5월에 도쿄로 이주하여 토목건축 노동에 종사했다. 7월에 일본노동조합 전국협의회에 가입하고 일본토목건축노동조합 도쿄시 성서지구 위원을 맡아 11월까지 활동했다. 이어 일본 반제동맹 도쿄시 성서지구 위원을 1932년 11월까지 맡았다. 1931년 2월에는 일본 공산당에 가입했다. 1932년 12월부터 1933년 1월까지 일본 공산청년동맹 중앙위원회 조사자료부 지도원을 맡았다. 1933년 1월에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12월에 풀려났으나 고문으로 얻은 병 탓에 요양을 해야 했다. 1934년 5월부터 1937년 12월까지는 다시 토목건축 노동에 종사하면서 혁명 운동에 참가하고,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에 서서 저술 활동을 했다.[51]
일본 관헌 기록과 스스로 작성한 이력서는 상호 보완적이다. 반제동맹, 일본노동조합 전국협의회 등에서 활동한 기록은 이력서 쪽이 자세하다. 다만 관헌 기록에서 공산청년동맹 가입은 확인돼도 공산당 가입에 대한 언급은 없는데, 이력서에는 일본 공산당에 가입했다고 적었다. 어느 쪽이 사실인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검거 시기도 이력서는 1933년이고 일본 관헌 기록은 1934년으로 차이가 있다. 기소유보 처분은 통상 전향 의사를 밝힌 자에게 적용되었다.[52]이청원으로서는 이력서에 밝히기 싫은 사실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청원이 도일한 1930년 5월은, 1928년 코민테른 제6회 대회 이후 확립된 일국일당 원칙에 따라, 재일본 조선노동총동맹을 해체와 전협 즉 일본노동조합 전국협의회 가입이 결정된 이후였다.[53] 이청원이 전협과 일본토목건축노동조합 등에서 활동한 이유는 거기에 있었다. 한편 1933년 공산당 지도자 사노 마나부(佐野學)나베야마 사다치카(鍋山貞親)가 전향을 발표하자, 일본에서는 공산당이 실질적으로 궤멸에 이를 정도의 대량전향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 무렵 일본에서 활동한 조선인 사회주의자에 대한 일본 관헌의 조사를 보면, “한 사람의 전향자도 없고 오히려 內地人의 전향을 계급적 타락 내지 변절로 보면서 맹렬히 활동을 개시해 전향, 검거에 의해 조직 진영 내에 있어 內地人 구성분자의 감소에 반해서 조선인은 점차 조직 내에서 중요하게 되고 있다”는 내용이 보인다.[54] 이청원이 공산청년동맹 ‘중앙부 조직’ 등 일본 사회주의 운동의 중추에서 활약하게 된 시대적 배경을 이해할 수 있다.

유물론연구회에서 활동

이청원은 후일 작성한 전향서에서 “기소유예 처분 후는 실천 운동에서 손을 뗐지만, 유물론연구회, 조선고대사연구회 등에 관계”했다고 밝혔다. 전향서를 해설한 일본 검찰 보고서에서는 1935년 8월에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고 적었는데, 1934년 12월의 기소유보 처분과 어떤 관계인지는 명확하지 않다.[55] 1935년에 이청원은 유물론연구회 사회과학부 주최 연구회에서 「아시아적 생산양식과 조선 봉건 사회사」(3월 9일), 「조선 봉건 사회사」(5월 11일)를 발표했다.[56] 같은 내용을 기관지 『유물론연구』에 게재하기도 했다.
유물론연구회는 일본 프롤레타리아 문화 운동의 핵심적 단체였다. 이청원은 어떻게 유물론연구회와 인연을 맺게 되었을까. 1928년 결성된 나프(NAPF, 전일본무산자예술연맹→전일본무산자예술단체협의회)는 1930년을 전후한 일본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전성기를 이끌었는데, 1931년 11월 예술가의 공산주의화를 내걸고 코프(KOPF, 일본프롤레타리아문화연맹)로 개조된다. 카프 도쿄지부, 무산자사 등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재일조선인 문화 운동은 역시 코민테른의 일국일당 원칙에 따라 코프에 가입하여 코프 조선협의회를 결성하게 된다. 코프는 일본 프롤레타리아 문화 운동 최후의 빛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활동의 상당 부분이 조선협의회에 결집한 재일조선인에 의해 이루어졌다.[57]
코프 조선협의회는 기관지로 『우리동무』를 발간했는데, 이청원은 제3호(1933.1.1.)에 「新興? 「滿洲國」에 朝鮮農民의 生路, 民族改良主義策動을 粉碎하라!」를 투고했다. 재일조선인 문화 운동의 중심에는 이북만이 있었다. 나카노 시게하루가 쓴 시 「비내리는 품천역」(『改造』 1929.2.)에 부친 “이북만, 김호영에게 보낸다”에 나오는 인물이다. 이북만은 프롤테타리아과학연구소 조선위원회에서 활동했다. 유물론연구회는 탄압으로 활동이 어려워진 프롤레타리아과학연구소를 대체한 것으로 보통 받아들여진다. 이청원은 일본의 프롤레타리아 문화 운동과 재일조선인 문화 운동이 만나는 지점 가까이에 있던 셈이다. 이북만은 스스로 역사학자이기도 했다. 기소유보 처분을 받고 풀려난 이청원이 1935년 유물론연구회에서 활동하며 역사학 논문을 발표하게 된 데는 이와 같은 인연이 작용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청원은 『朝鮮社會史讀本』(1936)의 서문에서 책 출판을 도운 “黑田, 李北滿 및 戶坂潤, 朴容七” 등에게 감사의 뜻을 밝혔다. 도사카 준(戸坂潤)은 당대 일본을 대표하는 마르크스주의자이자 유물론연구회의 리더였다. 도사카는 유물론연구회 활동의 하나로서 이청원의 논문 발표를 든 바 있다.[58] ‘黑田’는 사회주의 활동가이자 역사학자인 구로다 젠지(黑田善次)를 가리킨다. 구로다 역시 유물론연구회에서 활동했다. 박용칠은 메이지대학에서 공부하던 조선인 유학생이다. 1936년 6월에 ‘朝鮮留學生硏學會’를 만드는 재동경 조선인 유학생 운동의 중심적 인물이었다.[59] 이청원의 역사학 연구는 이북만, 박용칠 등 재일조선인 문화운동과 도사카, 구로다 등 일본의 프롤레타리아 문화 운동의 접점에서 이루어졌음을 엿볼 수 있다.
이청원은 1936년 11월 구로다 젠지가 인민전선운동에 투신하기 위해 중국에 건너가는 것을 알고, 조선에 관한 자료로서 동양협회 발행 잡지를 건네고 그를 격려했다.[60] 1936년 12월 10일 재동경 조선유학생연학회에서 「조선경제의 현단계」라는 강연을 했다. 출석자는 140명이었다.[61] 1937년 5월부터 1938년 7월 사이에는 조선인 학생들에게 마르크스의 ‘지대론’ 등의 좌익 문헌을 읽도록 권하고, 조선 사회운동을 공산주의적 입장에서 해설하여 좌익의식을 높이려고 했다.[62]
후일 한국의 비전향 장기수가 되는 이인모는 1936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공업고등학교에서 유학을 했다. 이인모는 자서전에서 그 무렵 이청원의 도쿄 생활에 대해 적고 있다. 이인모는 이청원을 “외삼촌과 비슷한 연배의 고향 분”으로 언급했다. 이인모의 고향은 함경남도 풍산이다. 이인모에 따르면 이청원은 우에노(上野) 역 앞에서 구두닦이를 했는데 벌이가 좋아 가끔 용돈을 받아 썼다고 한다. 하루는 경시청 내선과의 고위층이 찾아와 “선생님이 이런 데서 구두닦이를 하면 우리가 마음이 놓이질 않습니다. 좋은 직업을 주선해 드릴 테니 제발 이 일을 그만두시는 게 어떻습니까?”라고 하는 걸 들었다고 적었다.[63]
이청원은 일본의 사회주의운동과 좌익 문화운동의 중심부에서 활동하면서, 한국과 일본의 미디어에 조선 역사에 관한 논문을 다수 발표했다. 그런 이청원을 조선인 일본 유학생들은 존경하면서 따랐고, 일본 경찰은 ‘조선인 공산주의운동의 거두’[64]로서 경계했다.

투옥과 전향

1938년 5월부터 이청원은 다시 잠적한다. 식민지 조선의 미디어에 대한 투고도 그 무렵에서 중단된다. 자서전에 따르면 1937년 12월에 검거되었다가, 1938년 2월에 풀려나 잠시 요양을 한 뒤, 1938년 5월부터 일본 나가노 현수력전기발전소 건설 공사에 종사했다고 한다. 1937년에 검거되었다는 기술은 다른 기록이나 정황에 비추어 사실이 아닌 것 같다. 다만 1938년 5월에 일본 나가노 현으로 갔다는 기술은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65]
일본 관헌 기록에 따르면 이청원은 1940년 5월 14일에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다. 경찰은 이청원을 ‘조선인 공산주의 운동의 거두’라고 불렀다.[66] 반파쇼전선 통일운동을 전개하고, 공산주의자 구로다 젠지 및 중국 인민전선파 銭厓, 玉道源 등과 연락하고, 조선인 좌익 그룹을 지도한 사실이 밝혀져 12월 3일에 검찰에 넘겨졌다.[67] 1941년 1월 27일에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다.[68]
그해 9월 27일에는 보석으로 풀려났다.[69] 12월 13일 제1심 재판에서 징역 2년의 실형(미결 100일 통산)이 언도되었다.[70] 1942년 9월 6일 상고를 취하함으로써 형이 확정되었다.[71]
중일전쟁기 내선일체가 선전되는 가운데 조선이라는 주체에 대한 관심이 폭발하는 역설이 벌어진다. 조선 연구에 대해 부정적이던 임화는 중일전쟁기에 들어서자 1930년대의 ‘고유한 문화 고전과 전통에 대한 관심’을 ‘이식성과 국제주의에 대한 반성’으로 재평가했다.[72] 임화는 1938년 가을 학예사를 창립하고 1939년 1월부터 ‘조선문고’를 간행한다. 임화는 1939년 가을부터 ‘신문학사’를 집필하는데, 일찍이 백남운이 제시한 내재적 모순의 발전을 중시하는 역사상이 뼈대를 이룬다.[73] 먼저 역사적 배경을 서술하는 「신문학의 태반」의 ‘물질적 배경’이라는 항목에서 ‘자주적 근대화 조건의 결여’를 설명하면서 “백남운, 이청원, 김광진, 김태준, 고 하야카와 지로, 모리타니 가쓰미, 이우진 씨 등의 조선사 과정에 관한 견해는 전연 상이하나 이 점에서는 모두 일치한다.”[74]고 밝혔다.
역시 카프 맹원 출신으로 임화와 쌍벽을 이룬 비평가이자 소설가였던 김남천도 중일전쟁기 조선의 현실에 착목했다. 1930년대 식민지 조선의 문화계를 강타한 아시아적 특수성, 조선적 특수성의 문제를 구체적 현실 속에서 살피고자 했다. 김남천은 장편 소설 『대하』(1939)의 창작 과정을 설명하면서, 참고한 서적으로서 “인정식 씨 저 『조선농촌기구의 분석』, 이청원 씨 저 『조선역사독본』, 동 씨 저 『조선독본』의 일부분, 백남운 씨 저 『조선사회경제사』의 일부분, 성천읍지 두 권”을 열거했다.[75]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의 조선 연구가 중일전쟁기 문학자의 조선이라는 주체에 대한 관심을 뒷받침했음을 엿볼 수 있다.
중일전쟁기 신문과 잡지에서는 일본이 제기한 동아협동체론에 고무 받아 식민지 조선의 지위 향상을 꾀하는 통제경제론민족협화론이 터져나왔다. 중일전쟁기 내선일체의 위협 속에 조선이라는 주체에 대한 관심이 폭발했다. 1930년대 중반 조선연구의 문제의식, 즉 민족문제와 계급문제에 대한 고민을 굴절된 형태로 계승한 셈이다. 중일전쟁기 조선이라는 주체에 착목한 임화나 김남천의 글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성과에 입각했다. 그러나 정작 이청원이나 백남운 등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는 감옥에 갇힌 상태였다. 백남운도 1938년 3월 체포되어 12월에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다. 중일전쟁기 이청원의 생각은 전향서를 통해서 엿볼 수 있다. ‘1941년도 사상특별연구원 판사 樋口勝 보고서’인 「좌익 전력자 전향문제에 대하여」에는 다른 일본인 전향자와 더불어 이청원이 ‘예심 판사에게 상신한 전향의 심경’을 분석하고 있다.
이청원은 전향서에서 통제경제를 옹호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총동원법령은 사유재산, 생산, 분배, 배급 등에 대해, 또한 자유주의적 경제기구에 대해 하나의 커다란 제약을 부여하는 동시에, 한편에서 새로운 건설적 태도, 경제 도덕의 건설을 목표로 한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사회적으로는 빈부의 균형화로 방향 지어진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내가 일찍이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총동원법령 제11조의 발동을 중심으로 하는 재계와 군부의 의지의 차이는 내게 군부의 초계급적 존재와 그 신체제에서 추진적 역할을 충분히 인식시켜 주었습니다.”[76] 일본의 전시 통제경제가 자유경제를 제약하는 상황, 특히 재계와 갈등하며 신체제를 추진하는 군부의 역할에 기대를 걸었다.
다음은 민족 문제에 대한 입장이다. 이청원은 중일전쟁에서 일본이 “지나 민족주의의 승인”한 점을 높게 평가하고 ‘우리 조선 민족’도 “동문동종이고 또한 도의성에 의해 표징되는 일본 국체를 신용하여 동양공동체를 보다 높은 수준으로 고도화하기 위해 이 공동체의 일 구성분의 역할을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이청원은 일본인의 토지 독점, 조선인 의무교육 결여, 일본으로의 도항 규제 등을 열거한 뒤 “일시동인이라는 아시아 민족의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데 왜 이러한 차별이 있는지는 이해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이러한 차별을 철폐하고 조선인에게 ‘문화와 빵’을 줌으로써 궁극적으로 ‘협화적 통일’을 이루자고 주장했다.[77]
1938년 가을 우한, 광둥을 점령한 뒤에도 중국 국민정부가 굴복하지 않자, 일본 정부는 화평을 통한 전쟁 종결을 모색하게 된다. 그 해 10월 일본 정부는 중국에 대해 ‘공동방공...’을 제안하는 이른바 동아신질서 성명을 발표했다. 중국의 민족주의를 인정하고 일본이 주도하고, 만주국, 중국이 참여하는 일종의 연방국가를 만들자는 제안이었다. 일본이 중국의 민족주의를 승인한 것을 평가하는 이청원의 주장은 명백하게 동아신질서론을 의식한 것이다. 이청원은 이를 ‘동양공동체’라고 받아들인 뒤 이를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일본, 만주국, 중국 외에 조선도 하나의 구성원으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고 밝혔다. 일본의 의도를 넘어서는 주장이었다. 이청원은 일제가 내세운 내선일체를 ‘차별로부터의 탈출’를 위한 기회로 삼고자 했다. 나아가 조선 민족의 말살이 아니라 조선이라는 주체를 ‘동양공동체’의 일원으로 세우려는 주장이었다.
일본 검찰은 이청원의 이러한 태도를 놓고, “총동원법령의 중요성을 그 빈부의 균형화라는 면에서 강조하거나 재계와 군부를 비교해서 후자의 초계급성 등을 운운하는 데 오히려 모든 것을 선과 악으로 구분하여 일단 계급적 입장으로 환원하여 판단하려는 습관 –그것은 일종의 좌익적인 상식이다- 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또한 “일시동인이나 협화적 통일이라는 것이 온갖 차별을 무시한 평면적 절대 평등의 의미로 받아들여져서는 안 되는 것은 새삼 말할 것도 없”다고 경계했다.[78] 일본 관헌은 조선인 전향자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이른바 전향 좌파와 일본 관헌 사이에는 미묘한 긴장 관계가 남아 있었다.
자서전에 따르면 이청원은 1944년 6월까지 도쿄의 도요타마(豊多摩)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출옥 후 반년 정도 도쿄에서 요양을 한 뒤 12월에 귀국했다. 자서전에 따르면 귀국 후에는 함경남도 단천군에서 농업에 종사하면서 부근 탄광 노동자들과 접촉했다고 한다. 1945년 5월에는 사회주의자 최익한(崔益翰)의 딸 최분경과 결혼했다.[79] 최익한과 이청원의 인연은 확실하지 않다. 최익한은 조선공산당 일본총국에서 활동하다 1928년 2월 체포되어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1935년 12월에 출옥한 후 조선일보, 동아일보에 관계하면서 정약용을 비롯한 한국사 관련 글을 발표했다. 같은 시기 이청원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한국사 논문을 다수 발표했으므로, 두 사람 사이에 교류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자서전에서는 “8·15 해방 직전에 정세를 알려고 서울시에 갔다가 8·15 해방을 맞이하였”다고 적었는데, 결혼 시점과 어떻게 연관이 되는지는 알기 어렵다.

북한에서의 활동과 숙청

해방 직후 이청원은 장안파 공산당에 참여했다. 장안파 공산당은 직접 사회주의 혁명을 주장해,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을 내건 박헌영 주도 재건파 공산당에 의해 트로츠키주의자로 비판받기도 했다. 이후 이청원은 북한 정권에 참여하여 1947년 2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가 설치한 조선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에 올랐다. 1947년에 이청원이 집필한 『조선근대사연구』는 러시아어, 중국어, 일본어 등으로 번역되어 건국 초기 북한 역사학을 대표하는 성과로 인정 받았다. 이청원은 과학원 역사연구소의 기관지인 『력사과학』 책임편집위원을 맡는 등 북한 역사학계를 주도하는 위치에서 활약했다. 다만, 1956년 8월 전원회의 사건 이후 연안파소련파에 대한 공격이 거세지면서, 이청원은 연안파 지도자인 최창익 일파로 몰렸다.
이청원은 1955년 가을에 『력사과학』 제9호와 제10호에 상하로 나누어 「반일 민족 해방 투쟁에 있어서의 프로레타리아트의 헤게모니를 위한 투쟁」이라는 논문을 발표하고, 같은 해 이를 엮어 『조선에 있어서 프로레타리아트의 헤게모니를 위한 투쟁』이라는 단행본을 출판했다. 이청원이 식민지기에 민족부르주아지에 대해 고립정책을 폈다고 서술한 데 대해, 김일성조국광복회에서 보듯 민족부르주아지와 연대하는 민족통일전선 정책을 폈기 때문에 애국적 역량을 모을 수 있었다면서, 이청원을 교조주의 혹은 형식주의라고 비판했다. 민족통일전선을 둘러싼 식민지기 이래의 대립이 이청원 숙청에까지 그림자를 드리운 셈이다. 가지무라 히데키는 이청원의 숙청을 놓고 “구래의 연구와 공화국 민중에게 필요한 자국사 상 사이에 어긋남이 생긴 것”[80]이라고 분석했다.

연구

내재적 발전론에서 아시아적 정체성론으로

기소유보 처분으로 풀려난 1934년 말부터 다시 잠적하게 되는 1938년 중반까지 조선 역사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 이때부터 본명 ‘李靑垣’ 대신 새롭게 ‘李淸源’을 필명으로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유물론연구』를 비롯한 일본 미디어에 투고했으나, 1935년 9월부터 조선의 신문과 잡지에 글을 실었다. 논문 발표 공간을 일본에서 조선으로 옮긴 이유는 확실치 않다.
첫 역사학 논문은 백남운의 『조선사회경제사』(1933)에 대한 서평이었다. 이청원은 아시아적 생산양식봉건제로 보고, 원시공산제 → 노예제(삼국시대) → 봉건제=아시아적 생산양식(통일신라~이조)이라는 시대구분을 제시했는데, 백남운의 역사상과 동일했다. 또한, 사노 마나부의 타율성론, 정체성론적 한국사 인식에 대한 백남운의 비판을 지지했다.[81]
이청원은 아시아적 생산양식은 독자적인 사회형태가 아니라 ‘봉건제도의 동양적 변형’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하야카와 지로(早川二郎), 모리타니 가쓰미(森谷克己), 아이카와 하루키(相川春喜), 히라노 요시타로(平野義太郎)에 대해 아시아적 생산양식을 하나의 사회구성체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사적 유물론과 모순된다고 비판했다.[82] 이청원은 마자르 학파를 ‘트로츠키주의적 편견’을 가졌다고 비판하고, 그 ‘정치적 결론’은 “동양에는 봉건주의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의 당면한 정치적 과정은 이른바 시민적인 그것이 아니라 노동자적인 그것이다”가 될 거라고 지적했다.[83] 중국에서 아시아적 생산양식론이 트로츠키주의로 받아들여지면서 반(反)봉건이라는 과제 즉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을 경시한다고 비판받은 상황을 의식한 언급이었다.
이청원은 한국사에서 ‘내재적 모순의 발전’을 중시했다. 19세기 말까지 아시아적 생산양식이 존속했다는 김광진의 이론을 비판하고, ‘내재적 모순의 발전’에 따라 조선 중기부터 봉건제 즉 아시아적 생산양식이 붕괴되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그 근거로서 제한적이나마 ‘매뉴팩처’가 존재한 점과 더불어 “상공업의 지방화, 보편화는 봉건제도의 붕괴와 자본주의 발생의 역사적 사회적인 결정적 요인”이었다고 설명했다.[84] 고대 사회에 대해서도 금속 사용은 중국에서 전해졌지만, “어디까지나 조선 원시 사회 생산력의 내적 필연에 바탕한 발전 그 자체여서 외부에서 전해졌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용한 것은 아니다.”라고 분석했다. [85] 또한, 모리타니 가쓰미(森谷克己)의 역사 인식을 봉건제 결여론이라고 지적하고 후쿠다 도쿠조(福田徳三)의 “낡은 교리를 노예적으로 복사했다”고 비판했다.[86]
한국사의 내재적 발전을 강조하던 이청원은 1936년 들어 아시아적 정체성론으로 전환한다. 먼저 봉건제 붕괴의 내재적 요인으로서 주목하던 상인자본에 대한 평가가 바뀌었다. 이청원은 상인자본과 고리대자본이 양반과 직접 결부되어, 박해를 받기는커녕 법규적 보호를 받았다고 비판적으로 바라봤다.[87] 이청원은 1936년 4월 『朝鮮社會史讀本』을 펴냈는데, 원시공산제→노예제(삼국시대~고려)→봉건제(이조)라는 새로운 시대구분을 제시했다.[88] 이 책의 특징은 고려까지를 노예제 사회로 보고, 아시아적 생산양식론에 대한 비판 없이 한국사를 정체성론적으로 이해한 데 있었다.
하타다 다카시(旗田巍)는 『歷史學硏究』에 쓴 서평을 통해 고려 노예제론의 논리적 모순을 지적하고 설명 부족을 비판했다.[89] 김우헌(金佑憲)은 『朝鮮中央日報』에 연재한 서평에서 고려 노예제론을 비판하고 이청원이 사용한 사료만 가지고도 이청원의 논리를 반박할 수 있다면서『조선사회사독본』의 모순을 지적했다. 상업 발달에 대한 평가를 둘러싸고도 “결코 상업 발달은 상층계급의 정언적・명령적 의도에 의해서만 발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체내에 이미 발달된 요소와 가능성을 품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라고 비판했다.[90]
이청원은 1934년 말에는 백남운의 조선사회경제사를 높게 평가한 것과 달리, 1937년 3월에는 “전형적인 로마 희랍적인 노예사회를 그대로 조선의 역사 발전 행정에 적합시켰다”는 점에서 ‘결정적인 구출할 수 없는 결점은 공식주의’라고 비판했다.[91] 백남운은 『朝鮮封建社會經濟史(上)』(1937) 서문에서 이청원의 고려 노예제론을 ‘소아병적 희화술(戱畵術)’이라고 비판했다.[92]
이청원은 1937년에 『조선사회사독본』에 근대사 부분을 추가하여 『조선역사독본』을 펴냈다. 여기서는 “이양선 출몰 이전 아직 자본가적 생산양식을 볼 수 없었던 우리 조선 사회는 한번 외국 자본주의의 강요적 개국에 부딪히자마자 그 봉건적 구성은 갑자기 취약하게도 와해되기 시작”했다는 주장을 폈다.[93] 백남운과 이청원 자신이 비판했던 “商業資本도 發生되지 못한 舊社會가 「異樣船」의 侵入으로 突然히 崩壞되엇다”는 김광진의 정체성론과 같은 입장이 되어 버렸다.
이청원의 한국사 연구가 내재적 모순의 발전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아시아적 특수성에 주목하는 쪽으로 전환하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이청원이 참가한 유물론연구회에는 아이카와 하루키(相川春喜), 하야카와 지로(早川二郎) 등 일본을 대표하는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들도 참가했다. 이들은 서구 사회와 다른 아시아 사회의 특수성, 정체성에 주목하는 강좌파 역사학자들이었다.
이청원이 『朝鮮社會史讀本』(1936) 서문에서 감사의 뜻을 밝혔고 또 개인적인 교류도 있었던 구로다 젠지는 사쿠 다쓰오(佐久達雄)라는 필명으로 『日本古代社會史』, 『東洋古代社會史』(모두 白揚社, 1934)를 펴낸 역사학자였다. 이청원을 유물론연구회로 이끈 고리로 판단되는 이북만은 「조선에서 토지소유형태의 변천」 등의 논문을 일본 좌파 역사학의 아성인 『歷史科學』에 세 차례나 게재한 사회경제사 연구자였다.[94] 그리고 구로다 젠지, 이북만의 역사상 역시 아시아적 정체성에 주목하는 것이었다.
이청원은 『朝鮮社會史讀本』(1936)의 서문에서 “여러 명의 공동연구 성과도 반영하여 고심을 거듭했으므로 충분히 계몽적 의의를 지닌다”고 밝혔다. 당초 이청원은 한국사의 내재적 발전에 관심을 가졌지만, 유물론연구회 등에서 일본 학자들과 교류하는 과정에서 한국사에 대한 정체성론적 인식을 받아들이게 된 것으로 판단된다.

『朝鮮社會史讀本』에 드러난 검열의 흔적

『朝鮮社會史讀本』은 1936년 4월에 발행되었는데, 불과 한 달 후인 5월에 ‘改訂’ 판이 나왔다. 선행연구에서는 그 이유에 대해 “발행 금지를 막기 위한 조치가 아니었을까”라고 추정했지만,[95]出版警察報』 1936년 5월호에 실린 「内地出版物取締狀況」을 통해 부분 ‘삭제 처분’을 받을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삭제 대상은 242쪽, 247쪽, 249쪽인데 모두 “내선융화 상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는 것”이 있다는 이유였다.[96]
삭제 대상으로 『出版警察報』에서 적시한 것은 242쪽의 “이 무렵 일본 거류민의 조선인에 대한 소치는 실로 극히 ××(참혹)하여 조선인이 빌린 돈이나 외상값을 내지 않을 때는 그 조선인의 문에 못 질을 했다. 그게 점점 할 수 없게 되자 이번에는 자기 집에 감옥을 만들어 조선인을 잡아 와 그 안에 넣고 가족이나 친구가 돈을 갚기를 기다려 비로소 풀어 줬다”라는 부분이다. 이렇게 242쪽에서는 ‘中井錦城’라는 일본인 관리의 ‘朝鮮回顧録’를 인용하여 한국병합 전에 벌어진 재조 일본인의 고압적인 행위를 고발하면서 “착착 식민지화에의 준비 공작을 진행해 갔다”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247~249쪽에서는 청일전쟁 발발과 동시에 일본군이 조선의 “왕궁을 포위하고 정치개혁을 요구”했다고 서술하고, 갑오개혁을 설명하면서 “大韓萬歲! 自由·平等·友愛!”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 이 ‘개혁’에 대한 동의는 그리고 협력은 조선 자신의 자본주의적 발전을 조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식민제도를 전제로 하여 그리고 그 발전적 완료를 위해 길을 깨끗이 하기 위해서였다”라고도 서술하였다. 여기서 ‘×××’는 ‘일본의’라고 판단된다. 또한, “일청전쟁의 참화가 한국의 자유, 평등, 우애라는 이름으로 전개되었다”는 표현도 사용했다.
삭제 처분은 발행일인 4월 5일에서 아흐레 지난 4월 14일에 내려졌다. 그렇다면 책이 이미 유포된 뒤의 삭제 처분은 어떻게 행해졌을까. 다음 달인 1936년 6월호 『出版警察報』에 실린 「差押其の他執行狀況」에 따르면 北海道에서 九州에 걸쳐 처분이 집행되어 약 20%의 ‘差押率’을 기록한 것이 확인된다. 경찰 측도 “다수 부현(府縣)의 집행이 우선 주목할 만하다”라고 실적을 평가했다.[97] 필자가 소장하고 있는 초판본(2011년 2월에 東京의 고서점에서 구입)은 241~242쪽과 247~250쪽이 잘려 나간 상태다. ‘삭제 처분’ 흔적으로 판단된다.

일본의 『朝鮮社會史讀本』 검열 양상(241~242쪽 잘려나감)

일본 전국 도서관을 중심으로 소장이 확인되는 초판본을 ‘전수 조사’한 결과 전체의 약 30%에서 해당 쪽이 잘려나가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조선사회사독본』은 초판이 내용 일부에 대해 ‘삭제 처분’을 받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개정판을 낸 것으로 판단된다.


『조선사회사독본』 초판 삭제 처분 실행 여부 ※ 1~19는 ‘ CiNii Books’에서 검색한 결과를 토대로 도시샤대학 도서관을 통해 전국 도서관에 조사를 의뢰한 결과이다.
번호 소장처 소장처상세 삭제상황 특이사항
1 BerlinStabi 미확인
2 九大
3 京大法 受入: 1936.12.8.
4 京大経 経済図 受入: 1936.12.8.
5 和光大
6 天津図 日本文庫 미확인
7 山口大 受入: 1936.6.20.
8 弘大 本館
9 東大文 韓国朝鮮 잘려나감 붉은 글자로 다음과 같은 기재. 240쪽 좌상에 ‘241 242’, 243쪽 우상에 ‘二頁抹消’, 249쪽 우상에 ‘247 248 抹消’. 249~250쪽은 잘려나가지 않았으나 목 부근에 두 곳 찢어져 있음.

受入: 2004.11.30.

10 法大 多図
11 滋県大① 受入: 2004.3.31.
12 滋県大② 잘려나감 受入: 2004.3.31.
13 神大社会
14 神市図 미확인
15 神戸市外大
16 立命館 잘려나감 241~242쪽은 잘려나간 내용을 손으로 다른 종이에 써서 붙임. 247~250쪽은 일단 잘려나간 쪽을 그대로 다시 붙임. ‘梗石韓吉彦蔵書之印’ 날인.
17 立大 잘려나감
18 静大
19 早大中央
20 서울대 心岳文庫
21 연세대 국학자료실 잘려나감
22 홍종욱 잘려나감 ‘難波所蔵’ ‘学書 号’ 날인.
23 미즈노 나오키 저자가 改造社에 보낸 증정본. 여러 곳에 저자에 의한 수정 흔적.

조선연구와 민족통일전선

1930년대 조선 연구 붐이 찾아왔다. 그 중심에는 안재홍, 정인보 등 민족주의자가 주도한 조선학 운동이 있었다. 1931년 5월에 ‘이충무공 유적 보존회’가 창립되었고, 1932년 5월에는 동아일보가 단군릉 수축을 위한 모금 운동을 벌였다. 1934년에는 정약용을 기리는 다산 서세 99주년 기념사업이 벌어졌다. 『조선사회경제사』(1933)를 통해 우리 역사에도 세계사의 보편적 발전법칙이 관철된다고 주장한 사회주의자 백남운도 1935년의 다산 서세 100주년 기념사업에 참가했다. 백남운은 1935년 7월 『동아일보』의 ‘정다산 서세 백년 기념’ 지면에 정인보, 현상윤과 함께 기고했고, 8월에는 『신조선』에 안재홍, 정인보, 백낙준 등과 함께 글을 실었다. 김태준은 1933년 10월에서 이듬해 3월까지 『조선일보』에 「조선가요개설」을 70회 이상 연재했고, 1935년 7월에는 『조선일보』 ‘다산 선생 백년제 특집’에 참가했다.
민족전통문화에 대한 강조는 1930년대 세계적인 현상이었다.[98] 소련에서는 10월 혁명 이래 러시아 민족주의는 위험한 것으로 여겨져 왔지만, 1930년대 들어 러시아의 전통과 문화에 대한 재평가가 일어났다. 1935년 코민테른 제7회 대회반파시즘인민전선이라는 새로운 전술을 채택했다. 반파시즘 인민전선론은 대중의 민족 감정, 민족주의를 인정하는 데서 출발했다. 1930년대 초반 찾아온 조선 연구열은 반파시즘 인민전선론 혹은 반제 민족통일전선론적 성격을 가졌다.[99] 식민지 조선의 사회운동은 1930년 전후에 정점을 맞은 뒤 침체에 빠졌다. 계급지상주의, 국제주의에 대한 비판 속에 조선이라는 주체가 새로운 저항의 근거로 떠오른 것이다. 백남운은 식민지 조선에서는 “민족적 대립과 자본주의적 대립이 거의 서로 일치한다”고 민족통일전선의 근거를 밝혔다.[100]
사회주의 운동 주류에서는 조선 연구를 비판적으로 보았다. 카프(KAPF)의 서기장을 지낸 바 있는 임화는 ‘조선학의 수립’, ‘조선문학의 재건’, ‘조선적 현실의 분석’ 등 말뿐인 ‘과학적 환상’이 ‘비관주의와 패퇴 정신’을 은폐한다고 지적하고, ‘모스크바에서 조선으로’라는 풍조 비판했다.[101] 김남천은 “이순신의 백골을 땅 속에서 들추어서 그것을 혀끝으로 핥는 사람, 단군을 백두산 밀림 속에서 찾아다가 사당간에 모시는 사람, 정다산을 하수구 속에서 찬양하는 사람” 등을 비판했다. 이순신, 단군, 정약용을 좇는 1930년대 조선 연구열을 비꼰 셈이다.[102] 프로핀테른 극동부에서 파견되어 비합법 공산주의 운동을 펼치고 있던 권영태(權榮台)경성제대 미야케 시카노스케(三宅鹿之助) 교수와의 협의에서, ‘사회민주주의’, ‘민족개량주의’와 더불어 백남운의 『朝鮮社會經濟史』를 들어 조선인 사이에 “이상한 충동을 일으킨다”고 비판했다.[103]
식민지 조선에서 민족통일전선에 대한 태도는 민족의 전통과 문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문제와 깊게 관련되어 있었다. 이청원은 1938년 5월 이후 다시 비합법 공산주의 활동에 종사하면서 「朝鮮革命論」을 집필했다.[104]「朝鮮革命論」에서는 “토착 부르주아 자신이 상업자본적 고리대적 흡혈귀적 존재로서 농촌에서 봉건적 제관계와 연결 결합되어 있다.”고 보았다. 반제 민족통일전선의 한 축이 되어야 할 건전한 민족부르주아지의 존재를 부정한 셈이다. 혁명운동을 통해 세워야 할 “정권의 성질은 당연히 소비에트적 형태의 노동자,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적 독재”라고 주장했다. 통일전선의 필요성도 언급하지만 “본문의 주지와 모순되는 혹덩어리 같은 것”[105]이었다.
이청원은 조선의 문화와 전통에 비관적이었다. 1936년 『조선사회사독본』 서문에서는 ‘조선학’을 ‘유교 훈화적, 정책적, 반봉건적’이라고 지칭하고, “그 공식의 천재는 ‘단군’을 분식하고 그 전체적인 영웅은 ‘이순신’의 옷을 빌려 입고, 그 재간 있는 사람들은 ‘정다산’의 가면을 쓰고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고 비판했다.[106] 1937년 11월 동아일보에 실은 글에서는 “지금 서구 천지에서는 문화전통의 옹호를 외치고 있지만 그와 사정이 다른 우리의 경우는 문화전통 옹호의 소리가 들려서는 안 된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우리가 옹호할 문화의 토대 즉 현실적 지반이 없기 때문이다. 이 땅에서는 이른바 위대한 발견은 없다. (중략) 우리는 부정하고 비판하고 극복할 문화전통밖에 없다.”고 밝혔다.[107] 1937년 11월 동아일보에 실은 글에서는 “지금 서구 천지에서는 문화전통의 옹호를 외치고 있지만 그와 사정이 다른 우리의 경우는 문화전통 옹호의 소리가 들려서는 안 된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우리가 옹호할 문화의 토대 즉 현실적 지반이 없기 때문이다. 이 땅에서는 이른바 위대한 발견은 없다. (중략) 우리는 부정하고 비판하고 극복할 문화전통밖에 없다.”고 밝혔다.[108]
조선의 문화와 전통에 대한 부정은 반제 민족통일전선의 부정과 연동했다. 이러한 이청원의 태도에 대해 민족주의자들 역시 거리를 두었다. ‘蓮湖亭人’이라는 이름으로 발표된 「文化領域에 顯現되는 惡質的 諸流에 抗하야」(『批判』, 1937.2.)라는 글에서는, 안재홍이 『신조선』을 편집하면서 사회주의자로서 조선학 운동을 강하게 비판하던 이청원, 한흥수 두 사람의 논문을 ‘보이콧트’했다고 고발했다.[109] ‘蓮湖亭人’이 누구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연호정(蓮湖亭)이 울진에 있는 정자임을 고려하면, 울진 출신의 사회주의자로서 조선 연구에도 깊이 가담한 최익한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최익한과 이청원의 인연을 보여주는 사례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북한에서의 연구

논점

세계사적 보편성은 선이고 아시아적 특수성은 악인가?

세계사적 보편성을 강조한 백남운아시아적 특수성을 주목한 이청원을 놓고 보면, 민족의 주체성을 강조한 백남운과 그렇지 못한 이청원이라는 판단을 내리기 쉽다. 그러나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백남운은 『조선사회경제사』(1933)와 달리 『조선봉건사회경제사』(1937)에서는 아시아적 특수성을 고려했다. 나아가 해방 직후인 1946년의 글에서는 원시공산사회와 고대사회 사이에 ‘초(初)계급사회’로서 아시아적 단계를 상정하고, 이후 아시아적 노예제, 아시아적 봉건제가 이어진다고 서술했다. 일찍이 자신이 비판했던 1930년대 일본 강좌파 역사학의 시대 구분을 수용한 셈이다. 다만 북한 정권에 참여한 후에는 고조선을 전형적 노예제 사회로 규정하는 등 사적 유물론의 기계적 적용으로 회귀했다. 신생 독립국의 국민사 서술이라는 시무에 쫓겨, 세계사적 보편성과 아시아적 특수성의 조화라는 과제는 중단된 것이다.
이청원의 한국사 연구는 백남운의 『조선사회경제사』(1933)를 높게 평가하는 등 내재적 발전의 모순을 중시하는 데서 출발했다. 그러나 일본의 좌파 역사학자들과 교류하는 가운데 점차 아시아적 특수성에 주목하게 되었고, 이렇게 변화된 역사상은 『조선사회사독본』(1936)에 담겼다. 이후 이청원과 백남운은 날 선 비판을 주고받았다. 백남운이 내재적 모순 발전에 의해 식민지 조선의 변혁이 가능할 것이라고 낙관했다면, 이청원은 아시아적 정체성을 직시하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해방 후 한국사 연구에서도 아시아적 특수성의 문제는 여전히 중요했다. 자칫 공식주의에 빠지기 쉬운 내재적 발전론에 대해 비판적 관점을 유지해 온 미야지마 히로시 님, 이영훈 님의 연구를 생각한다면, 세계사적 보편성은 선이고 아시아적 특수성은 악이라는 단순한 규정을 내리기는 어렵다.“일찍이 미야지마는 아시아적 생산양식론에 입각한 조선사의 시기 구분을 시도하여, 농업생산력의 발전을 기준으로 ‘이조기’를 ‘제3차 아시아적 생산양식’(宮嶋 1984b, 64)으로 규정한 바 있다. 나아가 소농사회론의 다른 한 사람의 유력한 논자인 이영훈은 미야지마의 주장을 발전시켜, 소농민 경영의 안정성에 바탕한 지주제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것을 중시하여 조선 후기 사회를 ‘제4차 아시아적 생산양식’으로 규정하였다(이영훈 1987, 93-94). 흥미로운 사실은 미야지마의 최근의 연구에서는 그간의 소농사회론의 연구 성과를 반영하여 스스로 ‘제3차 아시아적 생산양식’으로 규정했던, 보다 구체적으로는 이영훈에 의해 ‘제4차 아시아적 생산양식’으로 규정되었던 16세기 이후의 조선 사회를 ‘초기 근대’(宮嶋 2004, 180)라고 부르고 있는 점이다.” 홍종욱, 「내재적 발전론의 임계 –가지무라 히데키와 안병태의 역사학-」, 강원봉 외 편, 『가지무라 히데키의 내재적 발전론을 다시 읽는다』, 아연출판부, 2014, 98~99쪽.

제국의 사회주의자 이청원

이청원은 식민지 사회주의자라기보다 제국의 사회주의자였다. 정영환 님은 재일조선인 운동사를 설명하면서 1930~1955년을 “일본 공산당 입당기”라고 파악했다. 코민테른의 일국일당 원칙에 따라 재일조선인들은 1930년 무렵 조선인 독자 조직을 해체하고 일본인 사회운동에 합류했다. 바로 이청원이 걸었던 길이다. 1920~30년대 비식민화(decolonization)의 방향을 둘러싸고 제국 내 비식민화와 탈제국 비식민화가 길항했다. 전자가 동화(자치?)라면 후자는 독립(자치?)이었다. 이청원처럼 일본에 거주하며 일본인과 같은 조직에서 활동한 조선인들은 제국의 사회주의자였다. 일본인 프롤레타리아트와 조선인 프롤레타리아트가 연대하여 제국의 부르주아지에 맞서고자 한 이들에게, 식민지 조선의 민족부르주아지와의 연대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1945년 이후에도 미국의 일본 점령, 중국의 국공내전, 한국전쟁 등으로 국가와 민족의 경계는 유동적이었다. 1955년 재일조선인들은 북한의 해외공민이라면서 일본공산당을 탈퇴하여 총련 즉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를 결성했다. 도베 히데아키 님은 1955년의 변화를 ‘일본공산당의 국민화’라고 정의했다. 북한에서는 1956년 8월 전원회의 사건으로 소련계와 연안계가 권력에서 배제되었다. 동아시아 제국 질서의 해체와 국민국가 체제의 확립이 뚜렷해지는 가운데, 제국의 사회주의자 이청원의 역사 인식은 설 자리를 잃었다.

논저 목록

이청원 논저 목록
저자명 기사명 단행본
잡지명
권호 출판사 출판
일자
분류
李靑垣 외 今日朝鮮敎會의 發展에는 人物이냐? 金錢이냐?
: 紙上討論 續論
宗敎敎育 1(8) 朝鮮主日學校
聯合會
193008 雑誌
李靑垣 新興? 「滿洲國」에 朝鮮農民의 生路,
民族改良主義策動을 粉碎하라!
우리동무 3 193301 雑誌
李靑垣 日本에 잇서서의 經濟恐慌은 어듸로 가나 新階段 1(8) 朝鮮之光社 193305 雑誌
李靑垣 世界經濟恐慌과 國際經濟會議
-國際經濟會議는 무엇을 할까?-
新階段 1(9) 朝鮮之光社 193306 雑誌
李靑垣 資本主義 第三期와 石油
-石油을 支配하는 者는 世界을 支配한다-
大衆 1(3) 大衆科學
硏究社
193306 雑誌
李靑垣 朝鮮農業の根本問題 大衆經濟 193401 雑誌
李淸源 朝鮮に於ける小作農の狀態と
小作令の制定(資料)
經濟評論 1(3) 193411 雑誌
李淸源 「朝鮮社會經濟史」を讀む 唯物論硏究 26 193412 雑誌
李淸源 朝鮮に於ける階級分化に就いて 文化集團 3(2) 193502 雑誌
李淸源 アジア的生産樣式と朝鮮封建社會史 唯物論硏究 30 193504 雑誌
李淸源 「アジア的生産樣式」とは何か 生きた新聞 1(5) 193505 雑誌
李淸源 朝鮮封建社會史(二) 唯物論硏究 31 193505 雑誌
李淸源 朝鮮の火田民とは? 勞働雜誌 1(3) 193506 雑誌
李淸源 朝鮮社會經濟史の硏究について 社會 4(6) 193507 雑誌
李淸源 朝鮮原始氏族共産體硏究 東亞 8(7) 193507 雑誌
李淸源 亞細亞的生産樣式에 關하야 新東亞 47/5(9) 新東亞社 193509 雑誌
李淸源 震檀學報 第三卷을 읽고(上)(中)(三)(完) 東亞日報 193511
09석3,
12석3,
13석3,
14석3
雑誌
李淸源 朝鮮人思想에 잇어서의
「아세아的」形態에 (對하야)(一)-(五)
東亞日報 193511
30석3,
1201석3,
03석3,
04석3,
05석3
雑誌
李淸源 昨年朝鮮學界의 收穫과 趨勢一考(1)-(10) 朝鮮中央日報 193601
01(17),
12조(4),
14조(4),
15조(4),
16조(4),
18조(4),
21조(4),
22조(4),
23조(4),
24조(4)
雑誌
李淸源 昨年中 日本學界에 나타난
朝鮮에 關한 論著에 對하야(一)(二)(三)(完)
東亞日報 193601
01기10-1,
04기1-1,
05,
06
雑誌
李淸源 災害朝鮮의 救濟策/朝鮮은 災害의 땅!/
克服策의 再檢討, 自然의 暴威 征服은 무엇으로?
社會的 條件의 緩和는 어떠케?
//「問題는 本質把握 社會的條件 認識必要」
東亞日報 19360101기4 雑誌
李淸源 古典硏究의 方法論
-(먼저)文化遺産에 對한 批判的 態度-(1)(2)(3)
朝鮮日報 193601
03석(3),
06석(3),
07석(5)
雑誌
李淸源 現代文化에 對하야 朝鮮中央日報 19360206 雑誌
李淸源 時事小感
-두가지 問題에 對하야-(1)(2)(3)
朝鮮日報 193602
15석(5),
16석(6),
19석(5)
雑誌
李淸源 朝鮮原始社會硏究 批判 4(1/2) 批判社 193603 雑誌
李淸源 檀君神話에 對한 科學的 批判
-懷古的 文辭의 流行을 보고서-(一)(二)(完)
朝鮮中央日報 193603
05조(4),
193603
06조(4),
193603
07조(4)
雑誌
李淸源 朝鮮農業의 生産規模(一)(二)(三) 批判 4(3),
29,
35
批判社 193604,
06(부분결),
3702
雑誌
李淸源 朝鮮經濟의 特殊性
-現階段朝鮮經濟機構의 側面的硏究-
批判 4(8) 批判社 193610 雑誌
李淸源 「朝鮮의 얼」의 現代的 考察 批判 5(3) 批判社 193703 雑誌
李淸源 「人乃天主義」의 現代的 考察
-人乃天主義의 歷史的生成의 分析-
批判 5(3) 批判社 193703 雑誌
李淸源 文化의 特殊性과 一般性
-그(것의) 成立過程에 對한 解明-(1)(2)
朝鮮日報 193708
08석(5),
193708
10석(5)
雑誌
李淸源 朝鮮의 文化와 그 傳統(一)(二)(三) 東亞日報 193711
02조(4),
03조(4),
05조(4)
雑誌
李淸源 古代社會新羅의 花郞制度再批判(一)(二)(完) 東亞日報 193802
06조(4),
08조(4),
09조(4)
雑誌
李淸源 朝鮮에 잇서서의 封建的 構成의 成立過程(一)(二)
-高麗의 社會的 性格-
批判 6(5),
6(6)
批判社 193805
,06
雑誌
李淸源 朝鮮에 잇서서의 封建的 構成의 成立過程(三)
-(六)(完)-麗末의 社會的 性格-
批判 6(7),
6(8),
6(9),
6(11),
6(12)
批判社 193807,
08,
09,
11,
12
雑誌
리청원 력사 과학의 현상과 전망(1)-(4) 민주조선 194608
17,
20,
22,
24
雑誌
이청원 臨政의 貨幣政策 國民日報 194709
29-
1006
雑誌
이청원 臨政의 貨幣政策 國民日報 1947
1127
雑誌
리청원 10월 혁명의 동방 식민지 피압박 민족에 대한
영향과 조선 민족 해방 운동
인민 1951-9 1951 雑誌
이청원 김두봉론 조선인민보 194604
15
雑誌
李淸源 맑스와 民族問題
-그의 記念日을 맞이하야-(上)(下)
自由新聞 194605,
06
雑誌
李淸源 日本共産黨의 朝鮮人指導者 金天海論 新天地 1(6) 서울新聞社出版局 194607 雑誌
李淸源 變動되는 國際情勢와 朝鮮 新天地 1(7) 서울新聞社出版局 194608 雑誌
李淸源 파시즘이 乱舞하는 南朝鮮 朝蘇文化 2 조선노동당출판사 194609 雑誌
李淸源 解放第一年回顧 其四 朝鮮經濟의 動向 新世代 1(4) 서울타임스社 194609 雑誌
李淸源 朝鮮社會의 基底로서의 半封建的 農業關係 朝鮮經濟 1(5) 朝鮮經濟社 194609 雑誌
李淸源 朝鮮民族文化에 對하여 文化戰線 2 194611 雑誌
李淸源 民主主義와 靑年 民主主義
十二講
友印書館 19461115 雑誌
李淸源 農民戰爭으로서의 東學亂
-發生의 歷史的 條件-
朝蘇文化 3 194612 雑誌
李淸源 建國思相總動員運動의 社會的 根據 人民 2(1) 194701 雑誌
李淸源 十月革命은 全世界 勤勞人民들을 團合시켯다 朝蘇文化 8 194711 雑誌
李淸源 강화조약의 력사적 교훈과
체결 당시의 국내외 정세
歷史諸問題 1 朝鮮歷史
編纂委員會
194808 雑誌
李淸源 김일성장군 빨지산투쟁의 력사적 의의 歷史諸問題 2 朝鮮歷史
編纂委員會
194809 雑誌
李淸源 갑오농민전쟁의 성격과 그 력사적 의의 歷史諸問題 3 朝鮮歷史
編纂委員會
194810 雑誌
李淸源 二十世紀初 朝鮮의 對外關係와 國內情形 歷史諸問題 4 朝鮮歷史
編纂委員會
194811 雑誌
李淸源 在「辛未洋擾」時擊退江華島美帝侵略軍之
朝鮮人民英勇的鬪爭
新朝鮮 195106 雑誌
리청원 우리 조선 인민들은 어떠한 침략 세력에도 굴하지 않는다 로동신문 195203
01
雑誌
李淸源 一八七一年江華島抗美保衛戰 大公報(상해) 195207
23
雑誌
리청원 쓰딸린과 조선 인민의 반일 민족 해방 투쟁 인민 1953-4 1953 雑誌
리청원 임진 조국 전쟁에 있어서의
의병 투쟁과 곽 재우 장군
인민 1953-2 1953 雑誌
리청원 조선에 있어서 쁘롤레따리들의 계급 형성과 그 특징 학보 1 과학원 195309 雑誌
리청원 3.1운동과 조선민족해방운동 력사과학 1955(3) 195503 雑誌
李淸源 偉大的愛國者李舜臣將軍 新朝鮮 44 195503 雑誌
리청원 반일 민족 해방 투쟁에 있어서의
프로레타리아트의 헤게모니를 위한 투쟁 (상)(하)
력사과학 9/10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과학원
력사학
연구소
195509,
10
雑誌
李淸源,
陳文琴譯
朝鮮無産階級的
形成及其特點
歷史敎學 59 195511 雑誌
李淸源 朝鮮の民族ブルジョアジーの特質 朝鮮月報 4,5 195703,04 雑誌
李淸源 序文 朝鮮社會史讀本 白揚社 193604 単行本
李淸源 發行者序(序文은 중복) 朝鮮社會史讀本
改定版
白揚社 193605 単行本
李淸源 序文 朝鮮讀本-朝鮮の
社會とその政治・經濟生活-
學藝社 193610 単行本
李淸源 序に代へて 朝鮮歷史讀本 白揚社 193707 単行本
리청원 일본 침략자들을 반대한
임진 조국 전쟁
조선
로동당
출판사
1951 単行本
리청원 조선에 대한 미제의
침략과 죄악의 략사
조선
로동당
출판사
1951 単行本
이청원 조선력사교재 정치경제
아카데미
1951 単行本
李淸源 朝鮮近代史概要 外国文献
出版社
1952 単行本
Ли Чен Вон ; перевод с корейского А.М. Пака ; под редакцией и с предисловием М.П. Ким 서문 Очерки новой истории Кореи Москва : Изд\-во Иностранной литературы 1952 単行本
李淸源,
丁則良•
夏禹文
서문 朝鮮近代史 新華書店 1955 単行本
李淸源 著,
川久保公夫,
吳在陽
日本の読者のみなさまへ 朝鮮近代史 大月書店
<國民文庫>
1956 単行本
이청원 朝鮮近代史硏究 朝鮮歷史
編纂委員會
1947 単行本
리청원 미제의 조선 침략사 국립 출판사 195109
10
単行本
후보원사
리청원 저
조선에 있어서 프로레타리아트의
헤게모니를 위한 투쟁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과학원
1955 単行本
리청원 조선 민족 부르죠아지의 특질 조선에 있어서 프로레타리아트의 헤게모니를 위한 투쟁 1955 単行本
Ли Чен Вон ; перевод с корейского под редакцией Сон Дин Фа 서문 Имдинская отечественная война, 1592-98 г.г. Пхеньян : Типография издательства Новая Корея 19550128 単行本
리청원 임진조국전쟁
(一五九二-一五九八)
국립출판사 19550128 単行本
李淸源 서문 壬辰衛國戰爭(195501) 19550128 単行本
리청원 조선은 왜 과거 일제의
식민지로 되였었는가
조선
로동당
출판사
195512 単行本
리청원 조선민족해방운동에 있어서의
조국광복회의 역할
조선
로동당
출판사
1957 単行本

문헌 자료

  1. 『朝鮮社會史讀本』, 白揚社, 1936(미즈노 나오키(水野直樹) 소장본). 저자 이청원의 改造社 증정본 : 저자 서명 및 수정 흔적 있음.
  2. 『朝鮮社會史讀本』(白揚社, 1936)에 대한 검열 처분 : 「内地出版物取締狀況」, 『出版警察報』 93, 1936.6.
  3. 『朝鮮社會史讀本』(白揚社, 1936)에 대한 검열 처분 : 「差押其の他執行狀況」, 『出版警察報』 94, 1936.7.
  4. 일본의 『朝鮮社會史讀本』(白揚社, 1936) 검열 흔적(홍종욱 소장본) : 261~262쪽 잘려나감
  5. 조선의 『朝鮮社會史讀本』(白揚社, 1936) 검열 흔적(연세대 소장본) : 261~262쪽 잘려나감
  6. 『朝鮮社會史讀本』(白揚社, 1936)의 리쓰메이칸(立命館大學) 소장본 : 261~262쪽 잘려나간 부분을 손으로 다시 씀
  7. 일본 경찰이 이청원을 요주의·요시찰인물로 관리한 기록 : 「豊特高秘第1700號 要注意鮮人所在不明手配ノ件」(1932.6.24.)(長澤秀編, 『樺太警察部文書 戦前朝鮮人関係警察資料集Ⅰ』, 緑蔭書房, 2006)
  8. 이청원의 전향 기록 :「(十六)李靑垣事平昌秀吉の場合」, 『思想研究資料 特輯 第九十五号 左翼前歴者の転向問題に就て』, 司法省刑事局, 1943.8.(『社會問題資料叢書 第1輯』, 1972)
  9. 러시아 문서관 이청원 파일 : ① 이청원 사진1, ② 이청원 사진2, ③ 간부이력서, ④ 자서전 외 여러 문서 합철
  10.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과학원 력사연구소, 「서문」 『삼국 시기의 사회 경제 구성에 관한 토론집』, 과학원출판사, 1955. : 숙청 후 이청원 이름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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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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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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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동아일보』 1923년 5월 27일 8면, 「當選新時 가을저녁 咸興 都定浩」. 이 시는 都宥浩, 「시인 「꾀테」의 舊家를 찾고, 獨逸留學日記」(『東光』 26, 1931.10.4.)에 제목 없이 실려 있다.
  5. 한창균, 『한국 고고학 첫 세대 하담 도유호』, 혜담, 2017, 33쪽. 경성고등상업학교는 3년제였기 때문에, 휴학 기간을 포함하여, 그가 1928년 3월에 졸업한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그의 「이력서」에는 졸업 연도가 1929년 3월로 기재되어 있는데, 기록상의 착오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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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한창균, 『한국 고고학 첫 세대 하담 도유호』, 혜담, 2017, 34쪽.
  8. 한창균, 「도유호와 한흥수: 그들의 행적과 학술논쟁(1948~1950)」, 『한국고고학보』 87, 2013, 76~117쪽.
  9. 『동아일보』 1940년 1월 28일
  10. 한창균, 「도유호와 한흥수: 그들의 행적과 학술논쟁(1948~1950)」, 『한국고고학보』 87, 2013, 76~1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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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9. 도유호, 「先史學의 唯物史觀的 考察을 爲한 몇개의 基本問題(上)」, 『력사제문제』 15, 1950, 56-103쪽.
  40. 한흥수, 「朝鮮原始史硏究에 關한 考古學上諸問題」, 『력사제문제』 15, 1950, 4-55쪽.
  41. 도유호, 「先史學의 唯物史觀的 考察을 爲한 몇개의 基本問題(上)」, 『력사제문제』 15, 1950, 56-103쪽.
  42. 한흥수, 「朝鮮原始史硏究에 關한 考古學上諸問題」, 『력사제문제』 15, 1950, 4-55쪽.
  43. 도유호, 「先史學의 唯物史觀的 考察을 爲한 몇개의 基本問題(上)」, 『력사제문제』 15, 1950, 56-103쪽.
  44. 한흥수, 「朝鮮原始史硏究에 關한 考古學上諸問題」, 『력사제문제』 15, 4-55.
  45. 도유호, 「先史學의 唯物史觀的 考察을 爲한 몇개의 基本問題(下)」, 『력사제문제』 16, 1950, 22-45쪽.
  46. 「(十六)李靑垣事平昌秀吉の場合」, 195쪽.
  47. 「豊特高秘第2686號 要視察要注意鮮人並要視察臺湾人所在不明手配ニ関スル件」(1932.10.8.)(長澤秀編, 『樺太警察部文書 戦前朝鮮人関係警察資料集Ⅰ』, 緑蔭書房, 2006, 108쪽).
  48. 「豊特高秘第2686號 要視察要注意鮮人並要視察臺湾人所在不明手配ニ関スル件」(1932.10.8.)(長澤秀編, 『樺太警察部文書 戦前朝鮮人関係警察資料集Ⅰ』, 緑蔭書房, 2006, 108쪽).
  49. 內務省警保局, 『社会運動の状況』(1934)(朴慶植編, 『在日朝鮮人関係資料集成 第三巻』, 三一書房, 1976, 129~141쪽).
  50. 內務省警保局, 「在日朝鮮人運動日誌」(1934), 『特高月報』(朴慶植編, 『在日朝鮮人関係資料集成 第三巻』, 三一書房, 1976), 8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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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0. 「(十六)李靑垣事平昌秀吉の場合」, 195~196쪽.
  61. 內務省警保局, 「在日朝鮮人運動日誌」(1936), 『特高月報』(朴慶植編, 『在日朝鮮人関係資料集成 第三巻』, 三一書房, 1976, 8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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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3. 이인모 기록, 신준영 정리, 『전 인민군 종군기자수기 이인모』, 월간 말, 1992, 61~62쪽.
  64. 內務省警保局, 「在日朝鮮人運動日誌」(1940), 『特高月報』(朴慶植編, 『在日朝鮮人関係資料集成 第四卷』, 三一書房, 1976, 10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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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6. 內務省警保局, 「在日朝鮮人運動日誌」(1940), 『特高月報』(朴慶植編, 『在日朝鮮人関係資料集成 第四卷』, 三一書房, 1976, 1051쪽).
  67. 內務省警保局, 「在日朝鮮人運動日誌」(1940), 『特高月報』(朴慶植編, 『在日朝鮮人関係資料集成 第四卷』, 三一書房, 1976, 10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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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1. 內務省警保局, 「在日朝鮮人運動日誌」(1942), 『社会運動の状況』(朴慶植編, 『在日朝鮮人関係資料集成 第四卷』, 三一書房, 1976, 10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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