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노"의 두 판 사이의 차이

North Korea Humanities

6번째 줄: 6번째 줄:
 
{{인물정보
 
{{인물정보
 
|사진= 김병로사진.png
 
|사진= 김병로사진.png
|사진출처= "[https://i.namu.wiki/i/Rc0j2PEiZpm_Ly2aUlk8ZcB7Si4HMEEythMmg4Hu7saZzRBeZUyxsz7iDZB4KZNTHAsRKSjKkPbNWtiiBJw1gs1X3ALOgRKERc-fpQgH5OlPvMuk735o9GzqBGadEmJOFwpYQwN_fr791-5_3t-9jA.webp 김병로사진]"
+
|사진출처= "[https://i.namu.wiki/i/Rc0j2PEiZpm_Ly2aUlk8ZcB7Si4HMEEythMmg4Hu7saZzRBeZUyxsz7iDZB4KZNTHAsRKSjKkPbNWtiiBJw1gs1X3ALOgRKERc-fpQgH5OlPvMuk735o9GzqBGadEmJOFwpYQwN_fr791-5_3t-9jA.webp 김병로사진]"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9206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대표명= 김병노(金炳魯)
 
|대표명= 김병노(金炳魯)
 
|한글명= 김병노
 
|한글명= 김병노

2025년 11월 26일 (수) 14:08 판

👩🏻‍🏫본 문서는 서울대학교 "25-2 미디어위키를 활용한 역사 데이터 편찬" 수강생(위키ID)이 작성했습니다.




김병노(金炳魯)
김병로사진.png
출처 : "김병로사진"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9206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글명 김병노 한자명 金炳魯 영문명 Kim Byung-ro 가나명 이칭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
성별 남자 생년 1888년년 몰년 1964년년 출신지 전라도 순창군 복흥면 하리 전공 성리학, 법학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법조인, 초대 대법원장이다.

초대 대법원장으로 사법부의 법적 기틀을 다지고, 법전편찬위원장으로서 민법·형법·형사소송법 등 기본 법률안을 기초하였다. 소신 있는 법관, 강직한 공인으로서 자세를 철저히 지켰으며, ‘법조인의 스승’, ‘사법부의 초석’으로 평가받고 있다.

일제강점기 치하에서 애산(愛山) 이인, 긍인(兢人) 허헌과 더불어 3인이라고[8] 불리며 민족, 인권 변호사로 유명세를 떨쳤다. 광복 이후에는 사법부의 기틀을 세우는 데 큰 공헌을 하였으며 대한민국 사법·법제·입법·법조윤리의 네 기둥이 전부 그로부터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법조계에서는 ‘사도법관’ 김홍섭 전 서울고등법원장, ‘검찰의 양심’ 최대교 전 서울고검장과 더불어 이른바 법조3성(聖)이라고 불리며 존경받고 있다.


생애


탄생부터 광복전

1888년 순창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가장으로서 전우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웠으며, 17세에는 최익현의 의병 부대에 가담해 항일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대, 메이지대, 주오대 등에서 법학을 공부했습니다. 실력을 인정받아 일본 변호사 시험을 준비했으나, 식민지 출신이라는 이유로 응시 자격을 박탈당하고 1915년 귀국했습니다.

귀국 후 교수 생활을 거쳐 잠시 판사로 일했으나 곧 사임하고 변호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수많은 독립운동 관련 사건을 무료로 변론하며 법정 투쟁을 벌였고, 허헌, 이인과 함께 '민권변호 삼총사' 혹은 '삼인(三仁)'이라 불렸습니다. 또한 신간회 활동과 광주학생항일운동 진상 조사 등 사회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일제의 탄압이 극심해진 1932년부터는 양주로 낙향하여 광복 때까지 13년간 농사를 지으며 은둔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창씨개명과 총독부의 배급을 모두 거부하며 끝까지 지조를 지켰습니다. 한편, 보성전문학교의 이사로서 김성수가 재단을 인수하도록 도와 훗날 고려대학교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광복후부터 초대대법원장

1945년 광복 직후 초기에는 건국준비위원회(건준)에 합류하려 했으나, 좌파(공산당 재건파)가 주도권을 잡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한국민주당(한민당) 창당에 참여하고 좌우합작운동을 지지했습니다. 미군정 사법부장 시절 강경한 토지개혁(무상분배)을 주장하여 한민당과 갈등을 빚었으나, 김성수의 설득으로 당적은 유지했습니다. 1948년 이승만 대통령의 견제에도 불구하고 국무회의 만장일치로 초대 대법원장에 임명되었습니다. 이승만에게 정치적 빚이 없었기에 소신 있는 판결과 사법부 독립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일본 법을 번역하는 수준을 넘어, 민법과 형법 등 대한민국의 독자적인 법전 편찬을 주도했습니다. 또한, 검사와 변호사가 마주 보고 앉도록 법정 좌석 배치를 변경하고, 구속 기간을 단축하는 등 인권 보호를 위한 제도를 마련했습니다. 반민특위 특별재판부장을 맡아 친일파 청산에 적극적이었으며, 6.25 전쟁 중 아내를 잃었음에도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할 만큼 인권을 중시했습니다.


말년까지

이승만 정권의 독재(부산정치파동 등)에 반발하며 사법부의 독립을 지켰습니다. 대통령이 판결을 비난하자 **"억울하면 절차를 밟아 항소하라"**고 일갈한 일화는 유명합니다. 1950년 골수암으로 한쪽 다리를 절단했고, 전쟁 통에 아내가 북한군에게 살해당하고 장남을 잃는 등 큰 개인적 아픔을 겪었습니다. 1957년 정년퇴임 후 1960년 총선에 출마했으나, 유학자적 선비 정신으로 선거 운동을 하지 않아 낙선했습니다. 5.16 군사정변 이후에는 박정희의 군정에 반대하며 야당 통합과 민주화 운동에 힘썼습니다. 1963년 건국공로훈장 단장을 수훈받았으며, 이듬해인 1964년 향년 75세로 서거하여 사회장으로 치러졌습니다.





연구


사법권 독립의 수호신과 이승만과의 대립

김병로를 상징하는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는 제왕적 권력을 휘두르던 이승만 대통령에 맞선 것이다. 건국 초기 혼란스러운 정국과 이승만 정권의 독재 시도(발췌 개헌, 사사오입 개헌 등) 속에서도 사법부가 흔들리지 않도록 막아주는 버팀목 역할을 했다. 그가 버티고 있었기에 소장파 판사들이 소신 판결을 내릴 수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사법부의 판결에 대해 불만을 표하며 압박하자, "이의가 있으면 항소하시오."라고 일갈한 사건은 대한민국 사법 역사상 가장 유명한 명언 중 하나로 꼽힌다. 대통령 앞에서도 굽히지 않는 대쪽 같은 태도 덕분에, 당시 행정부와 입법부조차도 김병로가 이끄는 사법부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대한민국 법체계의 독자적 기틀 마련

건국 당시 법이 없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일본법을 참고해야하는데, 단순히 일본 법을 베끼는 수준을 넘어, 대한민국의 현실과 인권 의식에 맞는 독자적인 법률을 만들고자 노력했다. 광복 직후 일본 법전을 그대로 번역해 쓰던 관행을 타파하고, 우리 실정에 맞는 민법과 형법을 제정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친족상속법의 유교적 관습과 근대법 정신 사이의 조화를 고민했다. 일제강점기의 악습을 철폐하기 위해 피의자 구속 기간을 경찰 20일에서 10일로 단축하고, 심급별 재판 기간을 제한하여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보장했다. 일제강점기에는 검사가 판사 옆(상석)에 앉아 피고인을 내려다보는 구조였으나, 김병로는 검사를 피고인/변호인과 마주 보는 자리로 끌어내려 '대등한 당사자 주의'를 시각적으로도 확립했다.


'가인(街人)'의 면모와 선비적 한계

창씨개명 거부, 일제 배급 거부 등 일제강점기부터 이어진 그의 꼿꼿한 성품은 광복 후에도 이어졌다. 6.25 전쟁 중 아내를 잃고 다리를 절단하는 비극 속에서도 국정(법전 편찬)을 우선시했다. 호인 '가인(거리의 사람)'처럼 소탈했으나, 정신적으로는 전우의 제자답게 깐깐한 선비 정신을 유지했다. 이는 도덕성을 중시하는 법조인으로서는 최고의 덕목이었다. 정계 복귀 후 선거 운동 과정에서 "어찌 선비가 표를 구걸하느냐"며 유세하지 않아 낙선한 일화는 그의 고지식한 면모를 보여준다. 현실 정치인으로서는 융통성이 부족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역설적으로 타협하지 않는 그의 인격을 증명하는 사례로 인용된다.





데이터


TripleData

Source (A) Target (B) Relationship
Person: 김상희 Person: 김병로 A hasSon B
Person: 김병로 Institution: 창흥학교 A graduates B
Person: 김병로 Institution: 일본메이지대학 A worksAt B
Person: 김병로 Group: 을사의병 A isMemberOf B
Person: 김병로 Group: 조선인 유학생 학우회 A isMemberOf B
Person: 김병로 Group: 신간회 A isMemberOf B



Timeline




Network Graph






참고자원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