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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Korea Human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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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1918년 5월 5일 충청북도 보은군 회인면 중앙리에서 아버지 오학근(吳學根)과 어머니 한학수(韓學洙)[4] 사이의 4남 4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나이에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하였고, 7살이 되던 1924년, 오장환은 <회인공립보통학교>를 다니다가 1927년 경기도 안성군 읍내면 서리(현 안성시 서인동)으로 이주하면서 <안성공립보통학교>로 전학하였다. 1930년 졸업한 그는 이어서 중동학교 속성과에 입학하여 수료한 뒤 14살이 되던 1931년 4월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는데, 1933년 학교문예지 『휘문』 임시호에 시와 소설을 발표하면서 특히 『조선문학』1933년 11호에 시 <목욕간>을 발표하며 문단에 등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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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1918년 5월 5일 충청북도 보은군 회인면 중앙리에서 아버지 오학근(吳學根)과 어머니 한학수(韓學洙)사이의 4남 4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나이에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 하였고, 7살이 되던 1924년, 오장환은 회인공립보통학교를 다녔으며 1927년 경기도 안성군 읍내면 서리로 이주하면서 안성공립보통학교로 전학하였다. 1930년에 졸업한 그는 이어서 중동학교 속성과에 입학하여 수료한 뒤 14살이 되던 1931년 4월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는데, 1933년 학교문예지 『휘문』 임시호에 시와 소설을 발표하면서 <목욕간>을 발표하며 문단에 등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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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으로 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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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1935년 그는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자퇴하고, 일본으로 유학하여 치야마(智山)중학교에 전학하여 1936년 수료하였다. 본격적으로 《낭만》과 《시인부락》 동인으로 참여하였고, 동인들과 교류하며 동인지 제작을 주도 하면서 시작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37년에는 메이지대학 전문부 문예과 별과에 입학했으나 이듬해인 1938년 아버지가 별세하자 급하게 메이지대학을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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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1935년 그는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자퇴하고, 일본으로 유학하여 치야마중학교에 전학한 후 1936년 수료하였다. 본격적으로 《낭만》과 《시인부락》 동인으로 참여하였고, 여러 동인들과 교류하며 동인지 제작을 주도 하면서 시작 활동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1937년에는 메이지대학 전문부 문예과 별과에 입학했으나 이듬해인 1938년 아버지가 별세하자 급하게 메이지대학을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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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귀국 후에는 아버지의 유산으로 경기도 경성부 관훈정(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훈동)에 남만서방(南蠻書房)이라는 출판사 겸 서점을 개업하고 여러 문인들과 교류하기 시작했다. 1940년 중국 일대를 방랑하다가 경성부로 돌아와 돈암정(현 서울특별시 성북구 돈암동)으로 이주하여 살기도 했으며, 그해 다시 도쿄로 돌아가 1941년까지 사자업(寫字業)에 종사하며 가난한 생활을 지냈고 평소 술을 좋아하던 성품 탓에 신장이 늘 좋지 않았으며, 그 와중에 황달, 두통, 늑막염, 신장병 등의 질병을 얻었다. 그 뒤 투병생활 끝에 병상에서 8.15 광복을 맞았고, 곧 귀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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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귀국 후에는 아버지의 유산으로 경기도 경성부 관훈정에 남만서방이라는 출판사 겸 서점을 개업하고 여러 문인들과 교류하기 시작했다. 1940년 중국 일대를 방랑하다가 경성부로 돌아와 돈암정으로 이주하여 살기도 했으며, 그해 다시 도쿄로 돌아가 1941년까지 사자업에 종사하며 가난한 생활을 지냈고 평소 술을 좋아하던 성품 탓에 신장이 늘 좋지 않았으며, 그 와중에 황달, 두통, 늑막염, 신장병 등의 질병을 얻게 되었다. 그 뒤 투병생활 끝에 병상에서 8.15 광복을 맞았고, 곧 귀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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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이후의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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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귀국 후에는 1945년 10월 22일 인천에서 신예술가협회를 조직하였고, 1946년 임화, 김남천과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하여 활동하던 중 1946년 5월 동향사에서 번역시집인 《예세닌 시집》을, 같은 해 7월 정음사에서 세 번째 시집인 《병든 서울》을 발간하였다.1946년 12월 19일 장정인(張正仁)과 결혼하였다.1947년 1월 아문각에서 6편의 시를 추가한 《성벽》의 개정 증보판을, 같은 해 6월 헌문사에서 네 번째 시집 《나 사는 곳》을 출간하였다. 이후 그는 좌익 계통에서 사회 참여적인 활동을 지속하였다. 1947년 10월에서 1948년 2월 월북하여 남포병원에 입원했으며, 치료를 위해 소련 모스크바로 가서 볼킨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1949년 귀국한 그는 계속 투병생활을 이어나가다가 1951년 한국 전쟁 발발 이후 잠시 서울로 와 이전에 만났던 문인들과 교류 하였으며, 지병인 신장 결핵으로 끝내 별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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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귀국 후에는 1945년 10월 22일 인천에서 신예술가협회를 조직하였고, 1946년 임화, 김남천과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하여 활동하던 중 1946년 5월 동향사에서 번역시집인 《예세닌 시집》을, 같은 해 7월 정음사에서 세 번째 시집인 《병든 서울》을 발간하였다. 1946년 12월 19일 장정인(張正仁)과 결혼 하였으며 1947년 1월 아문각에서 6편의 시를 추가한 《성벽》의 개정 증보판을, 같은 해 6월 헌문사에서 네 번째 시집 《나 사는 곳》을 출간하였다. 이후 그는 좌익 계통에서 사회 참여적인 활동을 지속하였다. 1947년 10월에서 1948년 2월 월북하여 남포병원에 입원했으며, 치료를 위해 소련 모스크바로 가서 볼킨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1949년 귀국한 그는 계속 투병생활을 이어나가다가 1951년 한국 전쟁 발발 이후 잠시 서울로 와 이전에 만났던 문인들과 교류 하였으며, 지병인 신장 결핵으로 끝내 별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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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5월 31일 (금) 16:20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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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장환(吳章煥)
오장환.jpg.png
출처 : http://nks.ac.kr/Word/View.aspx?id=955
 
한글명 오장환 한자명 吳章煥 영문명 Oh Jang-hwan 가나명 이칭
성별 남성 생년 1918년 몰년 1951년 출신지 충청북도 보은군 전공 문예학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모더니즘, 서정성, 계급의식 등을 작품에 담았던 한국의 시인으로 서정주, 이용악과 함께 1930년대 시단의 3대 천재, 또는 삼재(三才)로 불렸다. 일제강점기 때 『성벽』, 『헌사』, 『나 사는 곳』 등을 저술 하였으며, 해방 이후 급격한 변화를 보이면서 현실 참여적인 시들을 창작하던 중 월북했다.


생애


어린시절

1918년 5월 5일 충청북도 보은군 회인면 중앙리에서 아버지 오학근(吳學根)과 어머니 한학수(韓學洙)사이의 4남 4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나이에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 하였고, 7살이 되던 1924년, 오장환은 회인공립보통학교를 다녔으며 1927년 경기도 안성군 읍내면 서리로 이주하면서 안성공립보통학교로 전학하였다. 1930년에 졸업한 그는 이어서 중동학교 속성과에 입학하여 수료한 뒤 14살이 되던 1931년 4월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는데, 1933년 학교문예지 『휘문』 임시호에 시와 소설을 발표하면서 <목욕간>을 발표하며 문단에 등단하였다.


일본으로 유학

1935년 그는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자퇴하고, 일본으로 유학하여 치야마중학교에 전학한 후 1936년 수료하였다. 본격적으로 《낭만》과 《시인부락》 동인으로 참여하였고, 여러 동인들과 교류하며 동인지 제작을 주도 하면서 시작 활동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1937년에는 메이지대학 전문부 문예과 별과에 입학했으나 이듬해인 1938년 아버지가 별세하자 급하게 메이지대학을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방랑 그리고 귀국

귀국 후에는 아버지의 유산으로 경기도 경성부 관훈정에 남만서방이라는 출판사 겸 서점을 개업하고 여러 문인들과 교류하기 시작했다. 1940년 중국 일대를 방랑하다가 경성부로 돌아와 돈암정으로 이주하여 살기도 했으며, 그해 다시 도쿄로 돌아가 1941년까지 사자업에 종사하며 가난한 생활을 지냈고 평소 술을 좋아하던 성품 탓에 신장이 늘 좋지 않았으며, 그 와중에 황달, 두통, 늑막염, 신장병 등의 질병을 얻게 되었다. 그 뒤 투병생활 끝에 병상에서 8.15 광복을 맞았고, 곧 귀국하였다.


광복 이후의 활동

귀국 후에는 1945년 10월 22일 인천에서 신예술가협회를 조직하였고, 1946년 임화, 김남천과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하여 활동하던 중 1946년 5월 동향사에서 번역시집인 《예세닌 시집》을, 같은 해 7월 정음사에서 세 번째 시집인 《병든 서울》을 발간하였다. 1946년 12월 19일 장정인(張正仁)과 결혼 하였으며 1947년 1월 아문각에서 6편의 시를 추가한 《성벽》의 개정 증보판을, 같은 해 6월 헌문사에서 네 번째 시집 《나 사는 곳》을 출간하였다. 이후 그는 좌익 계통에서 사회 참여적인 활동을 지속하였다. 1947년 10월에서 1948년 2월 월북하여 남포병원에 입원했으며, 치료를 위해 소련 모스크바로 가서 볼킨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1949년 귀국한 그는 계속 투병생활을 이어나가다가 1951년 한국 전쟁 발발 이후 잠시 서울로 와 이전에 만났던 문인들과 교류 하였으며, 지병인 신장 결핵으로 끝내 별세하였다.





연구


제목1


제목2


제목3





데이터


TripleData

Source (A) Target (B) Relationship
Person: 홍길동 Institution: ○○고등보통학교 A graduates B
Person: 홍길동 Institution: ○○대학교 A worksAt B
Person: 홍길동 Group: ○○학회 A isMemberOf B



Time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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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twork Graph






참고자원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