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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1번=먼저 (燕秦(연진) 대의) 요동군의 外界(외계)에 대해 고찰함에 있어, **산해경**의 海內北經條(해내북경조)에 “朝鮮在列陽東, 海北山南, 列陽屬燕”라고 하는 일절이 있다. 이 문장은 때때로 사람들로 하여금 오독하게 하기로 저명한데, 句讀(구두)는 위와 같이 끊어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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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1번=먼저 (燕秦(연진) 대의) 요동군의 外界(외계)에 대해 고찰함에 있어, **산해경**의 海內北經條(해내북경조)에 “朝鮮在列陽東, 海北山南, 列陽屬燕”라고 하는 일절이 있다. 이 문장은 때때로 사람들로 하여금 오독하게 하기로 저명한데, 句讀(구두)는 위와 같이 끊어 읽어야 한다. 그렇다면 “조선은 열양의 동쪽에 있고, 바다의 북쪽, 산의 남쪽이며, 열양은 연에 속한다”라고 읽는 것이 올바르다. 東晋(동진)의 郭璞(곽박)은 이곳에 주를 하여 “朝鮮, 今樂浪縣(○樂浪郡(낙랑군)의 首縣(수현)이라는 뜻), 箕子所封也, 列亦水名也, 今在帶方, 帶方有列口縣”라고 하였는데 곽씨의 주를 기다릴 것도 없이, 열양은 列口(열구)와 마찬가지로 列水(열수)와 관계된 지명이고, 列口(열구)가 列水(열수)의 입구(하구)라는 뜻임에 대해, 列陽(열양)은 列水(열수)의 북쪽이라는 의미로 붙여진 것이다. 대개 산의 북쪽, 물의 남쪽은 음이라 하고, 물의 북쪽, 산의 남쪽을 양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곽씨가 열수를 “今在帶方”이라고 한 것은 열수의 下流域(하류역) 일부분이 당시의 대방군(지금의 황해도) 안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余(여)는 「眞番郡考(진번군고)」에서 列口(열구)(이전에는 낙랑군의 一縣(일현)이었지만, 후에는 대방군의 一縣(일현)이 되었다)를 대동강의 하류로 황해도의 서북쪽인 殷栗郡(은율군)(고구려시대의 栗口(율구)) 근처로 비정하였는데, 그것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고, 다음 列陽(열양)은-지금 언급한 바와 같이 列水(열수)의 북쪽이라는 뜻이기 때문에-대동강 이북의 땅, 특히 지금의 평양보다 북쪽의 땅을 그렇게 칭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즉 上下鄣(상하장)의 방어지대에 대하여 (燕(연)으로부터) 列陽(열양)의 새로운 명칭이 주어졌던 것은 아닐까. 여하튼 열양은 열수(대동강)로부터 북쪽의 땅에 대한 호칭이고, 조선(箕氏(기씨))은 상기와 같이 ‘列陽(열양)의 東(동)(정확하게는 南(남))에 있다’고 명기되어 있기 때문에 당시 조선의 중심지는 대동강 이남에 위치하고 있고, 강 즉 列水(열수)로써 燕(연)(및 秦(진))과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환언하면, 燕秦(연진)시대의 요동 외계는 이 列水(열수)임이 틀림없고 그보다 북쪽은 列陽(열양)에 속하고, 남쪽은 조선에 속했던 것이다. 이는 말할 필요도 없이 조선이 全燕(전연)에게 침략당하여 그 영토를 상당히 잃어버린 결과이고 그 이전의 조선 영토는 뒤에서 언급하겠지만 현저히 서방으로 진출하였으며, 그 수도도 처음은 열수의 북쪽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앞서 郭璞의 註(주)에 ‘朝鮮, 今樂浪縣’이라는 것은 물론 침략 후의 조선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그때의 조선 중심지를 곽씨는 낙랑군의 治縣(치현)인 朝鮮縣(조선현), 지금 평양의 對岸(대안)인 大同郡(대동군) 大同江面(대동강면) 土城里(토성리) 방면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이 곽씨설은 과연 확실한 근거 위에서 내려진 것일까, 혹은 단지 추측으로서의 언급인가, 그것은 상세하지는 않지만 매우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무릇 낙랑군의 조선현은 그 위치가 아마도 처음부터 지금의 토성리방면에 있었고, 위만조선의 도읍인 王險城(왕험성)(평양)과는 전혀 다른 곳이었다고 인정되지만, 특히 그곳을 朝鮮縣治(조선현치)로 했다는 것은 역시 그곳이 기씨조선(후기)의 중심지와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생각된다. 여하튼 조선현의 위치와 그 縣名(현명)으로부터 유추하여 지금의 토성리 부근이 기씨조선 후기의 중심지였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없다. 그래서 余(여)는 燕(연)의 침략 후에 있어서 조선의 중심지를 郭(곽)씨와 마찬가지로 낙랑군의 조선현치로 비정함과 함께 당시 조선의 세력은 겨우 江東(강동) 일대의 땅에 지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렇다면 “조선은 열양의 동쪽에 있고, 바다의 북쪽, 산의 남쪽이며, 열양은 연에 속한다”라고 읽는 것이 올바르다. 東晋(동진)의 郭璞(곽박)은 이곳에 주를 하여 “朝鮮, 今樂浪縣(○樂浪郡(낙랑군)의 首縣(수현)이라는 뜻), 箕子所封也, 列亦水名也, 今在帶方, 帶方有列口縣”라고 하였
 
는데 곽씨의 주를 기다릴 것도 없이, 열양은 列口(열구)와 마찬가지로 列水(열수)와 관계된 지명이고, 列口(열구)가 列水(열수)의 입구(하구)라는 뜻임에 대해, 列陽(열양)은 列水(열수)의 북쪽이라는 의미로 붙여진 것이다. 대개 산의 북쪽, 물의 남쪽은 음이라 하고, 물의 북쪽, 산의 남쪽을 양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곽씨가 열수를 “今在帶方”이라고 한 것은 열수의 下流域(하류역) 일부분이 당시의 대방군(지금의 황해도) 안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余(여)는 「眞番郡考(진번군고)」에서 列口(열구)(이전에는 낙랑군의 一縣(일현)이었지만, 후에는 대방군의 一縣(일현)이 되었다)를 대동강의 하류로 황해도의 서북쪽인 殷栗郡(은율군)(고구려시대의 栗口(율구)) 근처로 비정하였는데, 그것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고, 다음 列陽(열양)은-지금 언급한 바와 같이 列水(열수)의 북쪽이라는 뜻이기 때문에-대동강 이북의 땅, 특히 지금의 평양보다 북쪽의 땅을 그렇게 칭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즉 上下鄣(상하장)의 방어지대에 대하여 (燕(연)으로부터) 列陽(열양)의 새로운 명칭이 주어졌던 것은 아닐까. 여하튼 열양은 열수(대동강)로부터 북쪽의 땅에 대한 호칭이고, 조선(箕氏(기씨))은 상기와 같이 ‘列陽(열양)의 東(동)(정확하게는 南(남))에 있다’고 명기되어 있기 때문에 당시 조선의 중심지는 대동강 이남에 위치하고 있고, 강 즉 列水(열수)로써 燕(연)(및 秦(진))과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환언하
 
, 燕秦(연진)시대의 요동 외계는 이 列水(열수)임이 틀림없고 그보다 북쪽은 列陽(열양)에 속하고, 남쪽은 조선에 속했던 것이다. 이는 말할 필요도 없이 조선이 全燕(전연)에게 침략당하여 그 영토를 상당히 잃어버린 결과이고 그 이전의 조선 영토는 뒤에서 언급하겠지만 현저히 서방으로 진출하였으며, 그 수도도 처음은 열수의 북쪽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앞서 郭璞의 註(주)에 ‘朝鮮, 今樂浪縣’이라는 것은 물론 침략 후의 조선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그때의 조선 중심지를 곽씨는 낙랑군의 治縣(치현)인 朝鮮縣(조선현), 지금 평양의 對岸(대안)인 大同郡(대동군) 大同江面(대동강면) 土城里(토성리) 방면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이 곽씨설은 과연 확실한 근거 위에서 내려진 것일까, 혹은 단지 추측으로서의 언급인가, 그것은 상세하지는 않지만 매우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무릇 낙랑군의 조선현은 그 위치가 아마도 처음부터 지금의 토성리방면에 있었고, 위만조선의 도읍인 王險城(왕험성)(평양)과는 전혀 다른 곳이었다고 인정되지만, 특히 그곳을 朝鮮縣治(조선현치)로 했다는 것은 역시 그곳이 기씨조선(후기)의 중심지와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생각된다. 여하튼 조선현의 위치와 그 縣名(현명)으로부터 유추하여 지금의 토성리 부근이 기씨조선 후기의 중심지였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없다. 그래서 余(여)는 燕(연)의 침략 후에 있어서 조선의 중심지를 郭(곽)씨와 마찬가지로 낙랑군의 조선현치로 비정함과 함께 당시 조선의 세력은 겨우 江東(강동) 일대의 땅에 지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목차3해독문2번= 그렇다면, **산해경**의 앞서 인용한 “海北山南”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는 원래부터 막연한 말로써 학자들 사이에 다양한 설이 있는데, 余(여)가 보기에 “海北山南”은 단순히 朝鮮(조선) Proper만이 아니라 실은 그 남쪽의 眞番(진번)5)(혹은 당시 조선의 지배 하에 있었을 지도 모른다)까지도 포함시킨 말이었을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면 海北(해북)이란 진번(지금의 黃州(황주) 이남에 있어서 황해도 및 경기 일부)의 南海(남해)인 지금의 京畿灣(경기만)보다 북쪽 땅이고, 山南(산남)이란 즉 大同江(대동강) 上流域(상류역)에 있어서 묘향산맥보다 이남의 땅일 것으로 생각된다. 묘향산맥은 반도의 서북부를 동서로 횡단하는 산맥 중 가장 著大(저대)한 것으로 그 주봉을 이루는 묘향산은 높이 6,300척, 한편 태백산이라고도 하여 단군의 강림지로 전해지고 있는 옛날부터의 명산이다. 여말의 문호 목은 이색은 그의 「妙香山記(묘향산기)」6)에서 “香山, 在鴨綠水南岸.平壤府之北, 與遼陽爲界, 山之大莫之與比, 而長白之所分也”라고 언급하고, 그 산의 자연 지리적 중요성을 인정하고 있다. 요컨대 이 “海北山南”은 다소 정치적 구획을 초월하여 자연 지리적 구획에 의해 조선 진번을 한데 묶어 표현한 말일 것으로 생각된다.
 
|목차3해독문2번= 그렇다면, **산해경**의 앞서 인용한 “海北山南”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는 원래부터 막연한 말로써 학자들 사이에 다양한 설이 있는데, 余(여)가 보기에 “海北山南”은 단순히 朝鮮(조선) Proper만이 아니라 실은 그 남쪽의 眞番(진번)5)(혹은 당시 조선의 지배 하에 있었을 지도 모른다)까지도 포함시킨 말이었을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면 海北(해북)이란 진번(지금의 黃州(황주) 이남에 있어서 황해도 및 경기 일부)의 南海(남해)인 지금의 京畿灣(경기만)보다 북쪽 땅이고, 山南(산남)이란 즉 大同江(대동강) 上流域(상류역)에 있어서 묘향산맥보다 이남의 땅일 것으로 생각된다. 묘향산맥은 반도의 서북부를 동서로 횡단하는 산맥 중 가장 著大(저대)한 것으로 그 주봉을 이루는 묘향산은 높이 6,300척, 한편 태백산이라고도 하여 단군의 강림지로 전해지고 있는 옛날부터의 명산이다. 여말의 문호 목은 이색은 그의 「妙香山記(묘향산기)」6)에서 “香山, 在鴨綠水南岸.平壤府之北, 與遼陽爲界, 山之大莫之與比, 而長白之所分也”라고 언급하고, 그 산의 자연 지리적 중요성을 인정하고 있다. 요컨대 이 “海北山南”은 다소 정치적 구획을 초월하여 자연 지리적 구획에 의해 조선 진번을 한데 묶어 표현한 말일 것으로 생각된다.
  

2023년 11월 30일 (목) 14:07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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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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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원제목 浿水考 학술지 청구학총 수록권호 청구학총13 발행기관
저자 이병도 역자 집필일자 게재연월 1933년xx
시작쪽 종료쪽 전체쪽 연재여부 범주 분야



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내용을 입력합니다.






목차







본문


본문1: (1)


조선의 하천으로 일찍부터 支那人(지나인)에게 알려진 것은 즉 浿水(패수).列(洌)水(열(렬)수)의 二水(이수)이다. 浿水(패수)의 이름은 **史記(사기)** 朝鮮傳(조선전)에 처음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이어 **漢書(한서)** 朝鮮傳(조선전) 및 同地理志(동지리지)에 나오고 있는데(**한서** 조선전은 대개 **사기** 조선전의 轉載(전재)이고), 그 지리지에는 水名(수명)으로서의 浿水(패수) 이외에 또한 낙랑군의 속현으로써의 그것도 보인다. 縣名(현명)인 ‘浿水(패수)’는 말할 것도 없이 水名(수명) 그 자체를 답습한 것이다. 다음의 列水(열수)는 水名(수명)보다도 그 水名(수명)으로 인해 생겼다고 여겨지는 ‘列陽(열양)’ ‘列口(열구)’등의 지명이 한층 오래된 문헌에 나오고 있고 또한 저명하다. 즉 열수의 이름은 **한서** 지리지 및 楊子(양자) **方言(방언)** 등에 나타나는 데 반하여 ‘列陽(열양)’은 先秦(선진)시대의 저서라고 하는 **山海經(산해경)**에 보이고, ‘列口(열구)’는 **사기** 조선전에 이미 보이고 있다(**한서** 지리지에 列口(열구)는 낙랑군의 一縣名(일현명)으로 되어 있다). 列陽(열양). 列口(열구)에 관해서는 後節에서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列水(열수)의 이름이 지나인에게 알려지게 된 것은 꽤 오래전부터일 것으로 여겨진다.
쪽수▶P110-1조선의 하천으로 일찍부터 支那人에게 알려진 것은 즉 浿水․列(洌)水의 二水이다. 浿水의 이름은 󰡔史記󰡕 朝鮮傳에 처음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이어 󰡔漢書󰡕 朝鮮傳 및 同地理志에 나오고 있는데(󰡔한서󰡕 조선전은 대개 󰡔사기󰡕 조선전의 轉載이고), 그 지리지에는 水名으로서의 浿水이외에 또한 낙랑군의 속현으로써의 그것도 보인다. 縣名인 ‘浿水’는 말할 것도 없이 水名 그 자체를 답습한 것이다. 다음의 列水는 水名보다도 그 水名으로 인해 생겼다고 여겨지는 ‘列陽’ ‘列口’등의 지명이 한층 오래된 문헌에 나오고 있고 또한 저명하다. 즉 열수의 이름은 󰡔한서󰡕 지리지 및 楊子 󰡔方言󰡕 등에 나타나는 데 반하여 ‘列陽’은 先秦시대의 저서라고 하는 󰡔山海經󰡕에 보이고, ‘列口’는 󰡔사기󰡕 조선전에 이미 보이고 있다(󰡔한서󰡕 지리지에 列口는 낙랑군의 一縣名으로 되어 있다). 列陽․列口에 관해서는 後節에서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列水의 이름이 지나인에게 알려지게 된 것은 꽤 오래전부터일 것으로 여겨진다.
패수와 열수는 마치 兄弟川(형제천) 혹은 姉妹川(자매천)으로 일컬을 만한 관계에 있고, 전자는 특히 漢初(한초)의 조선 내지 낙랑군의 북경을 흐르는 國境河(국경하) 또는 郡境河(군경하)로써, 후자는 그 國中(국중)을 관류하는 國中河(국중하) 혹은 國內河(국내하)로써 각각 著聞(저문)되었고, 吾人(오인)이 그 중 하나를 이야기 하면 반드시 다른 것을 떠올렸다고 할 정도이다. 그 중에서도 패수는 國境河(국경하)였던 만큼, 그와 관련한 역사적 사실이 著大(저대)하였기 때문에 고금을 통해 학자들의 주의를 끈 하천이 되었다. 그리고 두 하천의 위치는 조선 낙랑의 강역을 생각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관계를 맺고 있는데, 이들이 지금의 무슨 무슨 川(천)에 해당하는가는 불명료하기 때문에 그 위치에 관하여 일찍부터 학자들 사이에 상당히 다양한 의논이 있었고 난문제의 하나로 여겨졌다. 지금까지 학계의 주목을 끈 주요한 학설을 들어 보면, 패수에는 大同江說(대동강설) ᆞ鴨綠江說(압록강설) ᆞ淸川江說(청천강설) 등이 있고, 열수에는 마찬가지로 대동강설 ᆞ한강설 ᆞ임진강설 등이 있다. 더욱이 이외에 양 하천을 마음대로 요동 방면의 어떤 하천으로 비정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은 일설로 들 필요도 없다.
쪽수▶P110-2 패수와 열수는 마치 兄弟川 혹은 姉妹川으로 일컬을 만한 관계에 있고, 전자는 특히 漢初의 조선 내지 낙랑군의 북▶P111-1경을 흐르는 國境河 또는 郡境河로써, 후자는 그 國中을 貫流하는 國中河 혹은 國內河로써 각각 著聞되었고, 吾人이 그 중 하나를 이야기 하면 반드시 다른 것을 떠올렸다고 할 정도이다. 그 중에서도 패수는 國境河였던 만큼, 그와 관련한 역사적 사실이 著大하였기 때문에 고금을 통해 학자들의 주의를 끈 하천이 되었다. 그리고 두 하천의 위치는 조선 낙랑의 강역을 생각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관계를 맺고 있는데, 이들이 지금의 무슨 무슨 川에 해당하는 가는 불명료하기 때문에 그 위치에 관하여 일찍부터 학자들 사이에 상당히 다양한 議論이 있었고 難問題의 하나로 여겨졌다. 지금까지 학계의 주목을 끈 주요한 학설을 들어 보면, 패수에는 大同江說ㆍ鴨綠江說ㆍ淸川江說 등이 있고, 열수에는 마찬가지로 대동강설ㆍ한강설ㆍ임진강설 등이 있다. 더욱이 이외에 兩河川을 마음대로 요동방면의 어떤 하천으로 비정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은 一說로 들 필요도 없다.
그런데 근래 대동강 유역에 있어서 낙랑군 시대의 유적유물의 발굴 발견에 의해 조선 낙랑의 중심 지역은 점점 확실성을 얻고 있으며, 특히 대동강하 유역인 龍岡郡(용강군)(海雲面(해운면) 雲坪洞(운평동))에서 故(고) 今西(금서) 박사가 발견한 한대1)의 秥蟬縣神祠碑(점제현신사비)는 이 주변이-그중에서도 군 서쪽의 漢瓦(한와)가 나온 於乙洞古城(어을동고성)이-**한서** 지리지에 보이는 낙랑군 점제현치의 소재지였음을 입증하는 유력한 자료가 되었고, 따라서 오랜 기간 학자들 사이에 문제가 되어 왔던 열수의 위치에 최후의 결정을 부여하였던 것이다. 열수는 **한서** 지리지, 樂浪郡(낙랑군) 呑列縣條(탄열현조)에 “分黎山, 列水所出, 西至秥蟬入海, 行八百二十里”라고 하였기 때문에 그것은 지금의 龍岡郡(용강군)(즉 秥蟬(점제))에 이르러 黃海(황해)로 들어가는 대동강임이 틀림없음이 판명되었다. 더욱이 이에 대해서는 故(고) 今西(금서) 박사의 「洌水考(열수고)」2)라는 상세한 논문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보는 것이 좋으나, 여하튼 구래의 列水(열수) 大同江說(대동강설)은 저 古碑(고비)의 발견에 의해 이제는 의심할 여지가 없어졌다. 단지 학자들 사이에 의연히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한대의 패수로 당시의 패수가 지금의 대동강이 아니었다는 것만은 앞의 사실로 명확하게 되었지만, 그렇다면 그것은 지금의 압록강이냐 청천강이냐가 의문이다. 그러나 패수 문제도 조만간 결정되어야 할 운명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되지만 현 학계는 이 문제에 대해 지나치게 침묵을 지키고 있다. 余(여)는 일찍이 「眞番郡考(진번군고)」3)를 草稿(초고)할 때 이 패수 문제를 언급하면서 약간 한마디를 덧붙인 적이 있고, 그리고 그에 관한 충분한 고증을 타일로 기약하였는데, 이번에는 조금 상세하게 卑見(비견)을 진술하여 삼가 제현의 교정을 바라고자 한다.
쪽수▶P111-2그런데 근래 대동강유역에 있어서 낙랑군시대의 유적유물의 발굴발견에 의해 조선 낙랑의 중심지역은 점점 확실성을 얻고 있으며, 특히 대동강하유역인 龍岡郡(海雲面 雲坪洞)에서 故 今西박사가 발견한 원문주1▶한대[1]의 秥蟬縣神祠碑는 이 주변이-그중에서도 郡 서쪽의 漢瓦가 나온 於乙洞古城이-󰡔한서󰡕 지리지에 보이는 낙랑군 점제현치의 소재지였음을 입증하는 유력한 자료가 되었고, 따라서 오랜 기간 학자들 사이에 문제가 되어 왔던 열수의 위치에 최후의 결정을 부여하였던 것이다. 열수는 󰡔한서󰡕 지리지, 樂浪郡 呑列縣條에 “分黎山, 列水所出, 西至秥蟬入海, 行八百二十里”라고 하였기 때문에 그것은 지금의 龍岡郡(즉 秥蟬)에 이르러 黃海로 들어가는 대동강임이 틀림없음이 판명되었다. 원문주2▶더욱이 이에 대해서는 故今西 박사의 「洌水考」[2] 라는 상세한 논문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보는 것이 좋으나, 여하튼 구래의 列水 大同江說은 저 古碑의 발견에 의해 이제는 의심할 여지가 없어졌다. 단지 학자들 사이에 의연히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한대의 패수로 당시의 패수가 지금의 대동강이 아니었다는 것만은 앞의 사실로 명확하게 되었지만, 그렇다면 그것은 지금의 압록강이냐 청천강이냐가 의문이다. 그러나 패수문제도 조만간 결정되어야 할 운명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되지만 현 학계는 이 문제에 대해 지나치게 침묵을 지키고 있다. 余는 일찍이 원문주3▶ 「眞番郡考」[3] 를 草稿할 때 이 패수 문제를 언급하면서 약간 한마디를 덧붙인 적이 있고, 그리고 그에 관한 충분한 고증을 他日로 기약하였는데, 이번에는 조금 상세하게 卑見을 진술하여 삼가 諸賢의 敎正을 바라고자 한다.




































본문2: (2)


그러면 패수문제를 해결하려 함에 있어서 제일 먼저 학자의 주의를 야기하고 해석을 요하는 곳은 **사기** 조선전의 다음 기사이다.
쪽수▶P112-2그러면 패수문제를 해결하려 함에 있어서 제일 먼저 학자의 주의를 야기하고 해석을 요하는 곳은 󰡔사기󰡕 조선전의 다음 기사이다.
(A)自始全燕時, 嘗略屬眞番朝鮮, 爲置吏築鄣塞, (B)秦滅燕, 屬遼東外徼, (C)漢興, 爲其遠難守, 復修遼東故塞, 至浿水爲界, 屬燕, (D)燕王盧綰反入匈奴, 滿亡命聚黨千餘人, 魋結蠻夷服而東走出塞, 渡浿水, 居秦故空地上下鄣, 稍役屬眞番朝鮮蠻夷及故燕齊亡命者, 王之, 都王險
쪽수▶P112-3(A)自始全燕時, 嘗略屬眞番朝鮮, 爲置吏築鄣塞, (B)秦滅燕, 屬遼東外徼, (C)漢興, 爲其遠難守, 復修遼東故塞, 至浿水爲界, 屬燕, (D)燕王盧綰反入匈奴, 滿亡命聚黨千餘人, 魋結蠻夷服而東走出塞, 渡浿水, 居秦故空地上下鄣, 稍役屬眞番朝鮮蠻夷及故燕齊亡命者, 王之, 都王險
위에서 余(여)가 부호를 매긴 것과 같이 이를 네 단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즉 A단은 戰國時代(전국시대)의 大燕(대연)이 일찍이 조선과 진번을 略屬(약속)하였고 그곳에 관리를 두어 鄣塞(장새)를 쌓았다고 하는 것, B단은 秦(진)이 燕(연)을 멸하고 그 영토를 점유하고 나서 진번과 조선을 요동의 외요에 직속시켰다고 하는 것, C단은 漢(한)이 秦(진)을 대신하여 일어나자 그곳(진번조선)이 멀고 지키기 어렵다는 이유로 다시 요동고새를 수리하고 물러나서 패수를 경계로 하였으며, 그 이남의 조선진번도 (명의상) 燕(연)에 속하게 하였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 D절은 漢(한)의 燕侯(연후) 盧綰(노관)이 漢(한)을 배반하고 흉노로 도망가자 燕人(연인) 滿(만)(**魏略(위략)**에는 衛滿(위만)으로 보인다)이라고 하는 자가 또한 망명하여 도당 천여인을 모아 蠻夷人(만이인)(조선인)의 풍모를 하고 東走(동주)하여 塞(새)를 나와 浿水(패수)를 건넜으며, 秦(진)의 故空地(고공지)였던 上鄣下鄣(상장하장)에 거하였고 그곳에서 진번조선인과 옛날 燕齊(연제)방면에서 망명해 온 자들을 점점 役屬(역속)하여 마침내 왕이 되어 王險(왕험)에 도읍하였다는 것이다.
쪽수▶P112-4위에서 余가 부호를 매긴 것과 같이 이를 네 단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즉 A단은 戰國時代의 大燕이 일찍이 조선과 ▶P113-1 진번을 略屬하였고 그곳에 관리를 두어 鄣塞를 쌓았다고 하는 것, B단은 秦이 燕을 멸하고 그 영토를 점유하고 나서 진번과 조선을 요동의 외요에 직속시켰다고 하는 것, C단은 漢이 秦을 대신하여 일어나자 그곳(진번조선)이 멀고 지키기 어렵다는 이유로 다시 요동고새를 수리하고 물러나서 패수를 경계로 하였으며, 그 이남의 조선진번도 (명의상)燕에 속하게 하였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 D절은 漢의 燕侯 盧綰이 漢을 배반하고 흉노로 도망가자 燕人 滿(󰡔魏略󰡕에는 衛滿으로 보인다)이라고 하는 자가 또한 망명하여 도당 천여인을 모아 蠻夷人(조선인)의 풍모를 하고 東走하여 塞를 나와 浿水를 건넜으며, 秦의 故空地였던 上鄣下鄣에 거하였고 그곳에서 진번조선인과 옛날 燕齊방면에서 망명해 온 자들을 점점 役屬하여 마침내 왕이 되어 王險에 도읍하였다는 것이다.
이들 **사기**의 기사는 즉 진번조선과 燕(연), 秦(진), 漢(한) 삼대의 역사지리적 관계와 위만조선의 입국 유래를 서술한 것이지만, 이곳에 이미 패수의 명칭이 나오고 있다. 패수가 요동과 조선(낙랑)의 경계가 되게 된 것은 漢初(한초)부터이고, 그보다 이전의 燕秦(연진) 시대에는 패수를 넘어 그 이남의 어떤 지점에서 조선과 경계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상기 C절에 “漢興, 爲其遠難守...至浿水爲界”라고 하였고, 또한 다음 D절중에 “滿...東走出塞, 渡浿水, 居秦故空地上下鄣云云”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추측할 수 있다. 이 秦(진)의 ‘故空地上下鄣’이라고 하는 것은 물론 패수 유역에서 그 이남의 어떤 지점에 이르는 사이에 두어졌던 상하 두 곳의 鄣塞(장새)로 해석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 그곳은 실로 燕(연)이 앞서 진번조선을 略屬(약속)하여 관리를 두어 鄣塞(장새)를 쌓았다고 하는 그 鄣塞(장새)임이 틀림없고, 秦代(진대)의 소위 遼東外徼(요동외요)(설명, 밑에 보인다)라는 것도 즉 그것을 가리키는 것일 것이다. 上下鄣(상하장) 사이를 특히 “故空地(고공지)”라고 한 것은 그곳이 원래 일종의 완충지대로 사람을 거주시키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外徼(외요)란 즉 外界(외계) 혹은 外塞(외새)의 뜻으로 故(고) 今西(금서) 박사는 이에 대하여 **史記(사기)** 司馬相如傳(사마상여전)의 “南至䍧牱江爲徼”라는 곳의 索隱注(색은주)에 “張揖云徼塞也, 以木柵水爲蠻夷界”라고 하는 것을 인용하여4) “外徼(외요)란 郡(군) 밖으로 나가 蠻夷(만이)와의 사이에 목책을 만들고 병사를 주둔시켜 蠻夷(만이)를 鎭撫(진무)하며 그 侵寇(침구)를 차단하는 塞(새)이다. 후대의 鳳凰城(봉황성)과 같이 이것과 비슷한 것일 것이다”고 해석하였는데, 매우 좋은 견해라고 생각한다. 여하튼 燕秦(연진)시대에 요동군과 조선국(箕氏(기씨)의 사이에는 일종의 완충지대(실은 조선의 침구를 차단하기 위한 방어지대)를 설치하여 그 일부분을 요동군의 內界(내계)로 하고 다른 한쪽을 外界(외계)로 한 것 같다. 이처럼 요동군과 조선군의 사이에 내외 二界(이계)가 있었다고 한다면, 그 내외 이계는 어디였을까? 이는 패수 문제를 해결함에 매우 중요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쪽수▶P113-2 이들 󰡔사기󰡕의 기사는 즉 진번․조선과 燕․秦․漢 三代의 역사지리적 관계와 위만조선의 立國由來를 서술한 것이지만, 이곳에 이미 패수의 명칭이 나오고 있다. 패수가 요동과 조선(낙랑)의 경계가 되게 된 것은 漢初부터이고, 그보다 이전의 燕秦時代에는 패수를 넘어 그 이남의 어떤 지점에서 조선과 경계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상기 C절에 “漢興, 爲其遠難守…至浿水爲界”라고 하였고, 또한 다음 D절중에 “滿…東走出塞, 渡浿水, 居秦故空地上下鄣云云”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추측할 수 있다. 이 秦의 ‘故空地上下鄣’이라고 하는 것은 물론 패수유역에서 그 이남의 어떤 지점에 이르는 사이에 두어졌던 상하 두 곳의 鄣塞로 해석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 그곳은 실로 燕이 앞서 진번조선을 略屬하여 관리를 두어 鄣塞를 쌓았다고 하는 그 鄣塞임이 틀림없고, 秦代의 소위 遼東外徼(설명, 밑에 보인다)라는 것도 즉 그것을 가리키는 것일 것이다. 上下鄣 사이를 특히 “故空地”라고 한 것은 그곳이 원래 일종의 완충지대로 사람을 거주시키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外徼란 즉 外界 혹은 外塞의 뜻으로 故今西박사는 이에 대하여 󰡔史記󰡕 司馬相如傳의 “南至䍧牱江爲徼”라는 곳의 索隱注에 “張揖云徼塞也, 以木柵水爲蠻夷界”라고 하는 것을 인용하여 「洌水考」(註152와 같음) “外徼란 郡 밖으로 나가 蠻夷와의 사이에 목책을 만들고 병사를 주둔시켜 蠻夷를 鎭撫하며 그 侵寇를 차단하는 塞이다. 후대의 鳳凰城과 같이 이것과 비슷한 것일 것이다”고 해석하였는데, 매우 좋은 견해라고 생각한다. 여하튼 燕秦時代에 요동군과 조선국(箕氏)의 사이에는 일종의 완충지대(실은 조선의 침구를 차단하기 위한 방어지대)를 설치하여 그 일부분을 요동군의 內界로 하고 다른 한쪽을 外界로 한 것 같다. 이처럼 요동군과 조선군의 사이에 內外 二界가 있었다고 한다면, 그 내외이계는 어디였을까? 이는 패수문제를 해결함에 매우 중요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본문3: (3)


먼저 (燕秦(연진) 대의) 요동군의 外界(외계)에 대해 고찰함에 있어, **산해경**의 海內北經條(해내북경조)에 “朝鮮在列陽東, 海北山南, 列陽屬燕”라고 하는 일절이 있다. 이 문장은 때때로 사람들로 하여금 오독하게 하기로 저명한데, 句讀(구두)는 위와 같이 끊어 읽어야 한다. 그렇다면 “조선은 열양의 동쪽에 있고, 바다의 북쪽, 산의 남쪽이며, 열양은 연에 속한다”라고 읽는 것이 올바르다. 東晋(동진)의 郭璞(곽박)은 이곳에 주를 하여 “朝鮮, 今樂浪縣(○樂浪郡(낙랑군)의 首縣(수현)이라는 뜻), 箕子所封也, 列亦水名也, 今在帶方, 帶方有列口縣”라고 하였는데 곽씨의 주를 기다릴 것도 없이, 열양은 列口(열구)와 마찬가지로 列水(열수)와 관계된 지명이고, 列口(열구)가 列水(열수)의 입구(하구)라는 뜻임에 대해, 列陽(열양)은 列水(열수)의 북쪽이라는 의미로 붙여진 것이다. 대개 산의 북쪽, 물의 남쪽은 음이라 하고, 물의 북쪽, 산의 남쪽을 양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곽씨가 열수를 “今在帶方”이라고 한 것은 열수의 下流域(하류역) 일부분이 당시의 대방군(지금의 황해도) 안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余(여)는 「眞番郡考(진번군고)」에서 列口(열구)(이전에는 낙랑군의 一縣(일현)이었지만, 후에는 대방군의 一縣(일현)이 되었다)를 대동강의 하류로 황해도의 서북쪽인 殷栗郡(은율군)(고구려시대의 栗口(율구)) 근처로 비정하였는데, 그것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고, 다음 列陽(열양)은-지금 언급한 바와 같이 列水(열수)의 북쪽이라는 뜻이기 때문에-대동강 이북의 땅, 특히 지금의 평양보다 북쪽의 땅을 그렇게 칭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즉 上下鄣(상하장)의 방어지대에 대하여 (燕(연)으로부터) 列陽(열양)의 새로운 명칭이 주어졌던 것은 아닐까. 여하튼 열양은 열수(대동강)로부터 북쪽의 땅에 대한 호칭이고, 조선(箕氏(기씨))은 상기와 같이 ‘列陽(열양)의 東(동)(정확하게는 南(남))에 있다’고 명기되어 있기 때문에 당시 조선의 중심지는 대동강 이남에 위치하고 있고, 강 즉 列水(열수)로써 燕(연)(및 秦(진))과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환언하면, 燕秦(연진)시대의 요동 외계는 이 列水(열수)임이 틀림없고 그보다 북쪽은 列陽(열양)에 속하고, 남쪽은 조선에 속했던 것이다. 이는 말할 필요도 없이 조선이 全燕(전연)에게 침략당하여 그 영토를 상당히 잃어버린 결과이고 그 이전의 조선 영토는 뒤에서 언급하겠지만 현저히 서방으로 진출하였으며, 그 수도도 처음은 열수의 북쪽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앞서 郭璞의 註(주)에 ‘朝鮮, 今樂浪縣’이라는 것은 물론 침략 후의 조선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그때의 조선 중심지를 곽씨는 낙랑군의 治縣(치현)인 朝鮮縣(조선현), 지금 평양의 對岸(대안)인 大同郡(대동군) 大同江面(대동강면) 土城里(토성리) 방면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이 곽씨설은 과연 확실한 근거 위에서 내려진 것일까, 혹은 단지 추측으로서의 언급인가, 그것은 상세하지는 않지만 매우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무릇 낙랑군의 조선현은 그 위치가 아마도 처음부터 지금의 토성리방면에 있었고, 위만조선의 도읍인 王險城(왕험성)(평양)과는 전혀 다른 곳이었다고 인정되지만, 특히 그곳을 朝鮮縣治(조선현치)로 했다는 것은 역시 그곳이 기씨조선(후기)의 중심지와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생각된다. 여하튼 조선현의 위치와 그 縣名(현명)으로부터 유추하여 지금의 토성리 부근이 기씨조선 후기의 중심지였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없다. 그래서 余(여)는 燕(연)의 침략 후에 있어서 조선의 중심지를 郭(곽)씨와 마찬가지로 낙랑군의 조선현치로 비정함과 함께 당시 조선의 세력은 겨우 江東(강동) 일대의 땅에 지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쪽수▶P114-2먼저 (燕秦代의)요동군의 外界에 대해 고찰함에 있어, 󰡔산해경󰡕의 海內北經條에 “朝鮮在列陽東, 海北山南, 列陽屬燕”라고 하는 일절이 있다. 이 문장은 때때로 사람들로 하여금 오독하게 하기로 저명한데, 句讀는 위와 같이 끊어 읽어야 한다. 그렇다면“조선은 열양의 동쪽에 있고, 바다의 북쪽, 산의 남쪽이며, 열양은 연에 속한다”라고 읽는 것이 올바르다. 東晋의 郭璞은 이곳에 주를 하여 “朝鮮, 今樂浪縣(○樂浪郡의 首縣이라는 뜻), 箕子所封也, 列亦水名也, 今在帶方, 帶方有列口縣”라고 하였는데 곽씨의 주를 기다릴 것도 없이, 열양은 列口와 마찬가지로 列水와 관계된 지명이고, 列口가 列水의 입구(河▶P115口)라는 뜻임에 대해, 列陽은 列水의 북쪽이라는 의미로 붙여진 것이다. 대개 산의 북쪽, 물의 남쪽은 陰이라 하고, 물의 북쪽, 산의 남쪽을 陽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곽씨가 열수를 “今在帶方”이라고 한 것은 열수의 下流域 일부분이 당시의 대방군(지금의 황해도) 안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余는 「眞番郡考」에서 列口(이전에는 낙랑군의 一縣이었지만, 후에는 대방군의 一縣이 되었다)를 대동강의 하류로 황해도의 서북쪽인 殷栗郡(고구려시대의 栗口) 근처로 비정하였는데, 그것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고, 다음 列陽은-지금 언급한 바와 같이 列水의 북쪽이라는 뜻이기 때문에-대동강 이북의 땅, 특히 지금의 평양보다 북쪽의 땅을 그렇게 칭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즉 上下鄣의 방어지대에 대하여 (燕으로부터)列陽의 새로운 명칭이 주어졌던 것은 아닐까. 여하튼 열양은 열수(대동강)로부터 북쪽의 땅에 대한 호칭이고, 조선(箕氏)은 上記와 같이 ‘列陽의 東(정확하게는 南)에 있다’고 명기되어 있기 때문에 당시 조선의 중심지는 대동강 이남에 위치하고 있고, 강 즉 列水로써 燕(및 秦)과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환언하면, 燕秦時代의 요동외계는 이 列水임이 틀림없고 그 보다 북쪽은 列陽에 속하고, 남쪽은 조선에 속했던 것이다. 이는 말할 필요도 없이 조선이 全燕에게 침략당하여 그 영토를 상당히 잃어버린 결과이고 그 이전의 조선 영토는 뒤에서 언급하겠지만 현저히 西方으로 진출하였으며, 그 수도도 처음은 열수의 북쪽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앞서 郭璞의 註에 ‘朝鮮, 今樂浪縣’이라는 것은 물론 침략후의 조선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그때의 조선 중심지를 곽씨는 낙랑군의 治縣인 朝鮮縣, 지금 평양의 對岸인 大同郡 大同江面 土城里 방면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이 곽씨설은 과연 확실한 근거 위에서 내려진 것일까, 혹은 단지 추측으로서의 언급인가, 그것은 상세하지는 않지만 매우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무릇 낙랑군의 조선현은 그 위▶P116-1치가 아마도 처음부터 지금의 토성리방면에 있었고, 위만조선의 도읍인 王險城(평양)과는 전혀 다른 곳이었다고 인정되지만, 특히 그곳을 朝鮮縣治로 했다는 것은 역시 그곳이 기씨조선(후기)의 중심지와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생각된다. 여하튼 조선현의 위치와 그 縣名으로부터 유추하여 지금의 토성리 부근이 기씨조선 후기의 중심지였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없다. 그래서 余는 燕의 침략 후에 있어서 조선의 중심지를 郭씨와 마찬가지로 낙랑군의 조선현치로 비정함과 함께 당시 조선의 세력은 겨우 江東 일대의 땅에 지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산해경**의 앞서 인용한 “海北山南”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는 원래부터 막연한 말로써 학자들 사이에 다양한 설이 있는데, 余(여)가 보기에 “海北山南”은 단순히 朝鮮(조선) Proper만이 아니라 실은 그 남쪽의 眞番(진번)5)(혹은 당시 조선의 지배 하에 있었을 지도 모른다)까지도 포함시킨 말이었을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면 海北(해북)이란 진번(지금의 黃州(황주) 이남에 있어서 황해도 및 경기 일부)의 南海(남해)인 지금의 京畿灣(경기만)보다 북쪽 땅이고, 山南(산남)이란 즉 大同江(대동강) 上流域(상류역)에 있어서 묘향산맥보다 이남의 땅일 것으로 생각된다. 묘향산맥은 반도의 서북부를 동서로 횡단하는 산맥 중 가장 著大(저대)한 것으로 그 주봉을 이루는 묘향산은 높이 6,300척, 한편 태백산이라고도 하여 단군의 강림지로 전해지고 있는 옛날부터의 명산이다. 여말의 문호 목은 이색은 그의 「妙香山記(묘향산기)」6)에서 “香山, 在鴨綠水南岸.平壤府之北, 與遼陽爲界, 山之大莫之與比, 而長白之所分也”라고 언급하고, 그 산의 자연 지리적 중요성을 인정하고 있다. 요컨대 이 “海北山南”은 다소 정치적 구획을 초월하여 자연 지리적 구획에 의해 조선 진번을 한데 묶어 표현한 말일 것으로 생각된다.
쪽수▶P116-2 그렇다면, 󰡔산해경󰡕의 앞서 인용한 “海北山南”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는 원래부터 막연한 말로써 학자들 사이에 다양한 설이 있는데, 余가 보기에 “海北山南”은 단순히 朝鮮 Proper만이 아니라 실은 그 남쪽의 원문주5▶ 眞番 [4](혹은 당시 조선의 지배하에 있었을 지도 모른다)까지도 포함시킨 말이었을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면 海北이란 진번(지금의 黃州 이남에 있어서 황해도 및 경기 일부)의 南海인 지금의 京畿灣보다 북쪽 땅이고, 山南이란 즉 大同江上流域에 있어서 묘향산맥보다 이남의 땅일 것으로 생각된다. 묘향산맥은 반도의 서북부를 동서로 횡단하는 산맥 중 가장 著大한 것으로 그 주봉을 이루는 묘향산은 높이 六千三百尺, 한편 태백산이라고도 하여 단군의 강림지로 전해지고 있는 옛날부터의 명산이다. 여말의 문호 목은 이색은 그의원문주6▶ 「妙香山記」 [5]에서 “香山, 在鴨綠水南岸․平壤府之北, 與遼陽爲界, 山之大莫之與比, 而長白之所分也”라고 언급하고, 그 산의 자연 지리적 중요성을 인정하고 있다. 요컨대 이 “海北山南”은 다소 정치적 구획을 초월하여 자연 지리적 구획에 의해 조선진번을 한데 묶어 표현한 말일 것으로 생각된다.



















본문4: (4)


테스트입니다
辰國은 저 朝鮮(樂浪) 眞番 臨屯의 諸部族과 한 가지 古代 半島內의
테스트입니다
一國으로 일찍이 中國에 알려진 著名한 나라이어니와, 辰國의 名이 文獻
테스트입니다
上에 나타나기는 이미 󰡔史記󰡕, 󰡔漢書󰡕의 朝鮮傳에서부터이다. 󰡔漢
테스트입니다
書󰡕 朝鮮傳은 말할 것도 없이 󰡔史記󰡕 朝鮮傳을 거의 그대로 轉載하다시피한
테스트입니다
것이지만, (간혹 거기에 修辭上의 異同과 添削이 있음은 別問題로 삼고

















본문5: (5)


테스트입니다
辰國은 저 朝鮮(樂浪) 眞番 臨屯의 諸部族과 한 가지 古代 半島內의
테스트입니다
一國으로 일찍이 中國에 알려진 著名한 나라이어니와, 辰國의 名이 文獻
테스트입니다
上에 나타나기는 이미 󰡔史記󰡕, 󰡔漢書󰡕의 朝鮮傳에서부터이다. 󰡔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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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 朝鮮傳은 말할 것도 없이 󰡔史記󰡕 朝鮮傳을 거의 그대로 轉載하다시피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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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지만, (간혹 거기에 修辭上의 異同과 添削이 있음은 別問題로 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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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 秥蟬縣 古碑 발견의 전말 및 비문에 관해서는 昭和 2년(1927) 3월 朝鮮總督府 발행의 古蹟調査特別報告第4 冊󰡔樂浪郡時代の遺蹟󰡕 本文을 참고하길 바란다.
  2. 京城帝國大學 法文學會 第2部 論文集 朝鮮支那文化の研究.
  3. 󰡔史學雜誌󰡕 第40編 第5號.
  4. 진번의 위치에 대해서는 졸고 「眞番郡考」(註 153과 같음)속에 상세히 이것을 언급해 두었다.
  5. 󰡔東國輿地勝覽󰡕(卷之54) 寧邊府 山川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