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고대 산신의 성에 취하야"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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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2번= {{TagSpage|145-2}}古記錄의 傳하는 바에 依하면, 古代 半島의 住民은 많이 山谷 사이에 散居하였던 모양이다. 이것은 朝鮮과 같은 山岳國에 住居하는 種族의 未開時代에 있어 極히 當然한 事象이었다. 그러면 有史以前의 그들은 많은 或은 極히 原始的인 農耕도 하였을는지는 알 수 없으나, 主로는 射獵에 依하야 그 經濟生活 營爲하였을 것이다。果然 그러면 그들의 經濟生活에 가장 重要하였던 것은 實로 山岳的 環境이지 아니하였을 수 없다. 山岳은 그들의 衣食住 모든 것의 資料를 供給하는 者이었던 까닭이다. 따라서 山岳은 그들에 取하야 가장 直接的이요 또 가장 重大한 崇拜 對象이었을 것이다. 山神崇拜思想의 起源을, 山岳 그것이 幽玄神祕한 念을 生起하게 함에 求하고저 하는 從來의 心理說에 對하야 나는 그다지 贊意를 表하지 아니하는者의 한사람이다. 勿論 그러한 神祕觀念에 因하야 崇拜하게 된 境遇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境遇에 이것은 차라리 未開人의 異常事物 崇拜心理로서 解釋할 바이요, 그들이 日常으로 親接하고 또 그 環境中에서 生活하고 있는 普通의 山岳들은 그들에 取하야 決코 異常한 事物이 아니었으며, 따라서 神秘的 存在도 아니었을 것이다. 未開人의 神秘는 恒常 異常性이 거기에 伴隨됨을{{TagPage|146-1}} 要하였으므로써이다. 類달리 높고 幽玄한 山, 風雲을 일으키고 비를 내리는 山, 불을 吐하는 山, 害獸 毒虫이 많은 至極히 要險한 山, 異蹟을 가진 山 等等은, 그러한 諸般 異常性에 因하야 崇拜되었던 것일 터이다. 그러나 이러한 異常性을 가진 山만이 오직 崇拜 對象으로 되었으리라든지, 또는 이러한 異常性을 가진 山岳의 崇拜 思想이 漸次 遍典되어 모든 山岳이 崇拜되게 되었으리라든지, 그렇게 우리는 생각할 수 없다. 지금 나의 생각으로서는, 未開時代의 山岳崇拜思想의 起源은, 다른 許多한 境遇의 原始的 宗敎思想의 그것과 같이, 이것을 單一한 理由로 簡單히 그 모든 境遇를 說明하여 버리고저 하는 것은 頗히 無理이리라고 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極히 普通의 境遇에 있어, 朝鮮 古代의 未開住民이 가지었던, 그들의 周圍에 있는 何等의 異常性을 가지지 아니하였던 一般 山岳의 崇拜思想은, 前述한 바와 같이, 그 一般 山岳이 그들의 經濟生活과 가장 近密하고도 重大한 關係를 가지었던 바에 因하야 生起함이 아니었을가 한다. 그러나 이 問題에 就하여는 여러 가지로 異論도 있을 터이므로, 아직 宿題로 하야 後日의 熟考를 自期하는 바이나, 何如는 山岳 그것은 古代 朝鮮 住民의 生活과 極히 重要한 關係에 있었을 것을 여기에 重言하여 두고저 하는 바이다.  
 
|원문2번= {{TagSpage|145-2}}古記錄의 傳하는 바에 依하면, 古代 半島의 住民은 많이 山谷 사이에 散居하였던 모양이다. 이것은 朝鮮과 같은 山岳國에 住居하는 種族의 未開時代에 있어 極히 當然한 事象이었다. 그러면 有史以前의 그들은 많은 或은 極히 原始的인 農耕도 하였을는지는 알 수 없으나, 主로는 射獵에 依하야 그 經濟生活 營爲하였을 것이다。果然 그러면 그들의 經濟生活에 가장 重要하였던 것은 實로 山岳的 環境이지 아니하였을 수 없다. 山岳은 그들의 衣食住 모든 것의 資料를 供給하는 者이었던 까닭이다. 따라서 山岳은 그들에 取하야 가장 直接的이요 또 가장 重大한 崇拜 對象이었을 것이다. 山神崇拜思想의 起源을, 山岳 그것이 幽玄神祕한 念을 生起하게 함에 求하고저 하는 從來의 心理說에 對하야 나는 그다지 贊意를 表하지 아니하는者의 한사람이다. 勿論 그러한 神祕觀念에 因하야 崇拜하게 된 境遇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境遇에 이것은 차라리 未開人의 異常事物 崇拜心理로서 解釋할 바이요, 그들이 日常으로 親接하고 또 그 環境中에서 生活하고 있는 普通의 山岳들은 그들에 取하야 決코 異常한 事物이 아니었으며, 따라서 神秘的 存在도 아니었을 것이다. 未開人의 神秘는 恒常 異常性이 거기에 伴隨됨을{{TagPage|146-1}} 要하였으므로써이다. 類달리 높고 幽玄한 山, 風雲을 일으키고 비를 내리는 山, 불을 吐하는 山, 害獸 毒虫이 많은 至極히 要險한 山, 異蹟을 가진 山 等等은, 그러한 諸般 異常性에 因하야 崇拜되었던 것일 터이다. 그러나 이러한 異常性을 가진 山만이 오직 崇拜 對象으로 되었으리라든지, 또는 이러한 異常性을 가진 山岳의 崇拜 思想이 漸次 遍典되어 모든 山岳이 崇拜되게 되었으리라든지, 그렇게 우리는 생각할 수 없다. 지금 나의 생각으로서는, 未開時代의 山岳崇拜思想의 起源은, 다른 許多한 境遇의 原始的 宗敎思想의 그것과 같이, 이것을 單一한 理由로 簡單히 그 모든 境遇를 說明하여 버리고저 하는 것은 頗히 無理이리라고 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極히 普通의 境遇에 있어, 朝鮮 古代의 未開住民이 가지었던, 그들의 周圍에 있는 何等의 異常性을 가지지 아니하였던 一般 山岳의 崇拜思想은, 前述한 바와 같이, 그 一般 山岳이 그들의 經濟生活과 가장 近密하고도 重大한 關係를 가지었던 바에 因하야 生起함이 아니었을가 한다. 그러나 이 問題에 就하여는 여러 가지로 異論도 있을 터이므로, 아직 宿題로 하야 後日의 熟考를 自期하는 바이나, 何如는 山岳 그것은 古代 朝鮮 住民의 生活과 極히 重要한 關係에 있었을 것을 여기에 重言하여 두고저 하는 바이다.  
 
|원문3번= {{TagSpage|146-2}}그러면 朝鮮 古代의 山神 信仰은 果然 어떠하였든가, 記錄의 傳하는 바 없어 지금 그것을 알기는 매우 困難하나, 中古 以後의 諸種 文獻에 散見되는 山神에 關한 短片的 諸記錄에 據하야 多少間 그 古代의 面影을 推測할 수 없는 바는 아니다. 그러고 그 古代 面影의 하나인 山神의 性에 就하야 考論하고저 하는 것이 이 一論의 主旨이며, 論述의 便宜上 나는 現今 民俗上의 山神의 性으로부터 말하고저 한다.
 
|원문3번= {{TagSpage|146-2}}그러면 朝鮮 古代의 山神 信仰은 果然 어떠하였든가, 記錄의 傳하는 바 없어 지금 그것을 알기는 매우 困難하나, 中古 以後의 諸種 文獻에 散見되는 山神에 關한 短片的 諸記錄에 據하야 多少間 그 古代의 面影을 推測할 수 없는 바는 아니다. 그러고 그 古代 面影의 하나인 山神의 性에 就하야 考論하고저 하는 것이 이 一論의 主旨이며, 論述의 便宜上 나는 現今 民俗上의 山神의 性으로부터 말하고저 한다.
|원문4번= {{TagSpage|147-1}}現今 民俗上의 山神은 俗으로 山神靈 又는 山神, 山靈 等으로 稱謂되며, 繪畵, 彫刻上에서는 恒常 騎虎한 男性神으로 되어있으며 (畵는 主로 山神祠內 及 巫覡의 神房內에 奉置되어 있으나, 民間의 諸種 祀祠內 及 寺刹內에서 發見하는 境遇도 許多하다.) 普通으로는 白髮의 老人으로 表現되어 있으나, 附圖 第一에 보는 바와 같이 黑髥을 가진 境遇도 없지는 않다. 이 附圖 第一은 The Marquess Cnrzon of Kedleston, In the Diamond Mountains (The National Geographic Magazine, Vol. XLV. No. 3. Oct. 1924. p.358.)에서 取한 바이나, 筆者의 解題에는 ‘A buddha carving in a rock niche’ 라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無論 佛像이 아니요, 明白히 山神像인 것은 그 服裝이며, 容貌 及 그 가장 特徵되는 범을 곁에 가진 點 等에 依하야 判然하다. 이 岩凹彫像의 發見 場所에 就하야 筆者는 아무 말도 하지 아니하였으나, 아마 金剛山中의 어디일가 생각한다. 이렇게 岩壁에 山神像 彫刻하는 것은 極히 稀罕한 일로 나는 寡聞하야 아직 類를 例見聞하지 못하였다. 附圖 第二는 約十年前 내가 黃州邑 德日山의 山神堂 (黃州의 俗에 或은 이것을 「부근」 堂이라고도 하였으며, 이 부근은 文獻上에는 俗音을 따라 附根이라고도 보이고, 咸은 意味를 含하게 하야 府君이라고도 表現되어 있다) 內의 神畵中에서 그 一部를 撮影한 것으로 中央이 府君 即 附根神이요, 府君의 右에 騎虎한 白髮老人이 山神이다. 府君의 左는 俗에 山神阿只氏라고 하는 山神의 妻이며, 또 그 左의 素服한 婦人像은 府君 阿只氏라고 하였다. 이 外에도 三佛•七星神•藥師佛•應神 等의 神像이 걸려 있었다. 이렇게 山神이 騎虎男神으로 되어있고, 또 或은 虎 그것을 山神이라고 하는 思想은 虎를 山君이라고 하는 中國의 宗敎思想에서 나온 것이라고만 생각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차라리 이것은 虎를 山神{{TagPage|148-1}}이라고 하였던 朝鮮 固有의 宗敎思想의 開展된 것이라고 解釋하는 편이 有理할 줄 안다. 即 「三國志」 濊傳에 「祭虎以爲神」이라고 보이는 것은 今日 騎虎山神과 반듯이 歷史的 關係를 가지었던 까닭이므로써이다. 濊는 今日의 江原道 地方에 居住하였고, 江原道는 近年까지도 범나라이었고, 一般으로 생각되었던 것만치 半島 內의 가장 山岳地方이었으므로 그 地方에 古來로 虎 崇拜가 盛하였을 것은 疑心할 수 없으나, 이것은 濊族에 限한 바 아니요, 半島 全體의 普通的 信仰이었을 것이다. 그러고 또 범은 山神과 떠나서도 그 獰猛한 異常性에 因하야 崇拜의 對象이 될 必然性을 가진 動物이며, 또 그것이 山岳에 棲息하는 關係上, 一步를 展하야 山神으로도 崇拜될 可然性도 가진 動物이므로 이것은 虎山神 思想으로서 遺傳되고, 또 他方으로는 山 그것을 山神이라고 생각하던 原始 思想에서 山神을 人格神으로 한 思想이 發達되어 虎山神•人格山神 이 兩者가 合하면서 人格神 思想이 優勢한 境遇에는 虎는 오직 山神의 使者인 靈獸로 看做되며, 虎神思想이 優勢한 境遇에는 虎 即 山神으로 信仰되어 있는 것이 今日의 現象이 아닌가 한다. 이것은 마치 朝鮮의 龍神이 龍에 탄 女神(俗稱 아가씨)으로 表現되는 것과 그 軌를 같이하였다. 그리고 後世에 이르러서는 佛敎 及 道敎의 思想과도 關係를 맺게 되었으며 또 社會 經濟生活의 發展에 伴하야 山神信仰思想에도 여러 가지 複雜한 變展을 보게 되었으나, 그러한 問題에는 지금 言及하지 아니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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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4번= {{TagSpage|147}}現今 民俗上의 山神은 俗으로 山神靈 又는 山神, 山靈 等으로 稱謂되며, 繪畵, 彫刻上에서는 恒常 騎虎한 男性神으로 되어있으며 (畵는 主로 山神祠內 及 巫覡의 神房內에 奉置되어 있으나, 民間의 諸種 祀祠內 及 寺刹內에서 發見하는 境遇도 許多하다.) 普通으로는 白髮의 老人으로 表現되어 있으나, 附圖 第一에 보는 바와 같이 黑髥을 가진 境遇도 없지는 않다. 이 附圖 第一은 The Marquess Cnrzon of Kedleston, In the Diamond Mountains (The National Geographic Magazine, Vol. XLV. No. 3. Oct. 1924. p.358.)에서 取한 바이나, 筆者의 解題에는‘A buddha carving in a rock niche’라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無論 佛像이 아니요, 明白히 山神像인 것은 그 服裝이며, 容貌 及 그 가장 特徵되는 범을 곁에 가진 點 等에 依하야 判然하다. 이 岩凹彫像의 發見 場所에 就하야 筆者는 아무 말도 하지 아니하였으나, 아마 金剛山中의 어디일가 생각한다. 이렇게 岩壁에 山神像 彫刻하는 것은 極히 稀罕한 일로 나는 寡聞하야 아직 類를 例見聞하지 못하였다. 附圖 第二는 約十年前 내가 黃州邑 德日山의 山神堂 (黃州의 俗에 或은 이것을 「부근」 堂이라고도 하였으며, 이 부근은 文獻上에는 俗音을 따라 附根이라고도 보이고, 咸은 意味를 含하게 하야 府君이라고도 表現되어 있다) 內의 神畵中에서 그 一部를 撮影한 것으로 中央이 府君 即 附根神이요, 府君의 右에 騎虎한 白髮老人이 山神이다. 府君의 左는 俗에 山神阿只氏라고 하는 山神의 妻이며, 또 그 左의 素服한 婦人像은 府君 阿只氏라고 하였다. 이 外에도 三佛•七星神•藥師佛•應神 等의 神像이 걸려 있었다. 이렇게 山神이 騎虎男神으로 되어있고, 또 或은 虎 그것을 山神이라고 하는 思想은 虎를 山君이라고 하는 中國의 宗敎思想에서 나온 것이라고만 생각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차라리 이것은 虎를 山神{{TagPage|148-1}}이라고 하였던 朝鮮 固有의 宗敎思想의 開展된 것이라고 解釋하는 편이 有理할 줄 안다. 即 「三國志」 濊傳에 「祭虎以爲神」이라고 보이는 것은 今日 騎虎山神과 반듯이 歷史的 關係를 가지었던 까닭이므로써이다. 濊는 今日의 江原道 地方에 居住하였고, 江原道는 近年까지도 범나라이었고, 一般으로 생각되었던 것만치 半島 內의 가장 山岳地方이었으므로 그 地方에 古來로 虎 崇拜가 盛하였을 것은 疑心할 수 없으나, 이것은 濊族에 限한 바 아니요, 半島 全體의 普通的 信仰이었을 것이다. 그러고 또 범은 山神과 떠나서도 그 獰猛한 異常性에 因하야 崇拜의 對象이 될 必然性을 가진 動物이며, 또 그것이 山岳에 棲息하는 關係上, 一步를 展하야 山神으로도 崇拜될 可然性도 가진 動物이므로 이것은 虎山神 思想으로서 遺傳되고, 또 他方으로는 山 그것을 山神이라고 생각하던 原始 思想에서 山神을 人格神으로 한 思想이 發達되어 虎山神•人格山神 이 兩者가 合하면서 人格神 思想이 優勢한 境遇에는 虎는 오직 山神의 使者인 靈獸로 看做되며, 虎神思想이 優勢한 境遇에는 虎 即 山神으로 信仰되어 있는 것이 今日의 現象이 아닌가 한다. 이것은 마치 朝鮮의 龍神이 龍에 탄 女神(俗稱 아가씨)으로 表現되는 것과 그 軌를 같이하였다. 그리고 後世에 이르러서는 佛敎 及 道敎의 思想과도 關係를 맺게 되었으며 또 社會 經濟生活의 發展에 伴하야 山神信仰思想에도 여러 가지 複雜한 變展을 보게 되었으나, 그러한 問題에는 지금 言及하지 아니하려 한다.
 
|원문5번= {{TagSpage|148-2}}上述한 바와 같이 今日의 山神은 明白히 男性으로 되어있으나 (巫覡은 或 山神마누라라 云云하나, 그들은 男性神에게도 마누라라는 尊稱을 使用하므로, 마누라라는 말만으로서는 그 性을 區別하기 어렵다) 이것이 果然 古{{TagPage|150}}代 以來 信仰狀態이었는가? 古山名 及 古傳說上으로 考究하면, 古代의 山神은 今日과는 反對로 女性이었던 것을 推察할 수 있다. 먼저 古山名上으로부터 생각하여 보자. 「東國輿地勝覽」을 보면, 그 卷三 漢城府 山川條에 都城의 西에 母岳이란 것이 있어, 李朝의 太宗은 一時 이 母岳下에 卜都한 일이 있었으며, 同書 卷六 廣州牧 山川條에는 州南 三十里에 大母山이 있고, 同卷 十一 楊州牧 古跡條에는 洲西 五里에 大母山城이 있어 이것은 山名에서 나온 城名일씨 明白하며, 同卷 十二 江華 都護府 山川條에는 府南 三十里에 大母城山이 있고, 同卷 十四 淸風郡 山川條에는 郡四 十五里에 婦山이 있고, 同卷十六 鎭川縣 古跡條에는 縣東 六里에 大母山城이 있으며, 同卷 十七 公州 山川條에는 州北 十里에 母岳山이 있고, 同卷 二十  結城縣 祠廟條에는 母山堂이란 것이 있어 이것은 山名에서 얻은 神堂의 名稱일 것이며, 同卷  三四 金溝縣 山川條에는 縣東 二十五里에 母岳山이 있고, 同卷 沃溝縣 山川條에는 縣北 一里에 母山이 있어 鎭山으로 되어 있으며, 同卷 泰仁縣 山川條에는 縣東 三十里에 母岳山이 있고, 同卷 三六 靈光郡 山川條에는 郡南 二十里에 母岳山이 있고, 同卷 咸平縣 山川條에는 縣北 三十里에 母岳山이 있으며, 同卷 三九 淳昌郡 城郭條에는 郡西 四里에 大母山城이 있고, 同卷 四十 順天都護府 山川條에는 富有縣에 母后山이란 것이 있으며, 同卷 四十 同福縣 山川條에도 이 母后山이 보이며, 同卷 四一 平山都護府 古跡條에는 府南 七十里에 慈母山城이 있고, 同卷 四三 海州牧 山川條에는 州西 四里에 善女山이란 것이 있고, 同卷 五四 慈山郡 山川條에는 郡西 二十里에 慈母山이 있다. 이렇게 數多한 母岳•大母山•婦山•母岳山•母山•母后山•慈母山 等은 생각하건대 俗名의 意譯일 듯하며, 또는 그 俗名은 어미 山 또는 할미山 等이 아니었던가 한다. 어미 或은 아미{{TagPage|151-1}}라고 하던 名山을 母山•母岳 等으로 意譯하지 않고 그것을 音譯한 것으로 생각되는 것의 一例는 「東國輿地勝覽」 卷十一 積城縣 古跡條에 阿未城이라고 보이는 것으로, 이것은 阿未산의 城을 가르친 것이 아닌가 하며, 現今 大邱에 있는 峨嵋山이란 것도 俗名 애미山을 音譯할 時에 唐詩 中에서 有名한 山을 取來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렇게 許多한 母山•母岳에 對하야 父山 또는 父岳의 名은 殆無하야 「三國遺事」 卷五 仙桃聖母隨喜佛事의 條에 新羅의 五岳 中에 그 中央이 父岳이요 亦云 公山이란 것이 있을 뿐이나, 이것조차 支那의 五岳思想에서 作出된 것 같고, 民族思想이라고는 보기 어려우며, 「高麗史」 辛禑列傳 十四年 六月條에 禑가 男山에 올랐다 한 바이 있으나 이것은 極히 例外의 事에 屬할 바이다.
 
|원문5번= {{TagSpage|148-2}}上述한 바와 같이 今日의 山神은 明白히 男性으로 되어있으나 (巫覡은 或 山神마누라라 云云하나, 그들은 男性神에게도 마누라라는 尊稱을 使用하므로, 마누라라는 말만으로서는 그 性을 區別하기 어렵다) 이것이 果然 古{{TagPage|150}}代 以來 信仰狀態이었는가? 古山名 及 古傳說上으로 考究하면, 古代의 山神은 今日과는 反對로 女性이었던 것을 推察할 수 있다. 먼저 古山名上으로부터 생각하여 보자. 「東國輿地勝覽」을 보면, 그 卷三 漢城府 山川條에 都城의 西에 母岳이란 것이 있어, 李朝의 太宗은 一時 이 母岳下에 卜都한 일이 있었으며, 同書 卷六 廣州牧 山川條에는 州南 三十里에 大母山이 있고, 同卷 十一 楊州牧 古跡條에는 洲西 五里에 大母山城이 있어 이것은 山名에서 나온 城名일씨 明白하며, 同卷 十二 江華 都護府 山川條에는 府南 三十里에 大母城山이 있고, 同卷 十四 淸風郡 山川條에는 郡四 十五里에 婦山이 있고, 同卷十六 鎭川縣 古跡條에는 縣東 六里에 大母山城이 있으며, 同卷 十七 公州 山川條에는 州北 十里에 母岳山이 있고, 同卷 二十  結城縣 祠廟條에는 母山堂이란 것이 있어 이것은 山名에서 얻은 神堂의 名稱일 것이며, 同卷  三四 金溝縣 山川條에는 縣東 二十五里에 母岳山이 있고, 同卷 沃溝縣 山川條에는 縣北 一里에 母山이 있어 鎭山으로 되어 있으며, 同卷 泰仁縣 山川條에는 縣東 三十里에 母岳山이 있고, 同卷 三六 靈光郡 山川條에는 郡南 二十里에 母岳山이 있고, 同卷 咸平縣 山川條에는 縣北 三十里에 母岳山이 있으며, 同卷 三九 淳昌郡 城郭條에는 郡西 四里에 大母山城이 있고, 同卷 四十 順天都護府 山川條에는 富有縣에 母后山이란 것이 있으며, 同卷 四十 同福縣 山川條에도 이 母后山이 보이며, 同卷 四一 平山都護府 古跡條에는 府南 七十里에 慈母山城이 있고, 同卷 四三 海州牧 山川條에는 州西 四里에 善女山이란 것이 있고, 同卷 五四 慈山郡 山川條에는 郡西 二十里에 慈母山이 있다. 이렇게 數多한 母岳•大母山•婦山•母岳山•母山•母后山•慈母山 等은 생각하건대 俗名의 意譯일 듯하며, 또는 그 俗名은 어미 山 또는 할미山 等이 아니었던가 한다. 어미 或은 아미{{TagPage|151-1}}라고 하던 名山을 母山•母岳 等으로 意譯하지 않고 그것을 音譯한 것으로 생각되는 것의 一例는 「東國輿地勝覽」 卷十一 積城縣 古跡條에 阿未城이라고 보이는 것으로, 이것은 阿未산의 城을 가르친 것이 아닌가 하며, 現今 大邱에 있는 峨嵋山이란 것도 俗名 애미山을 音譯할 時에 唐詩 中에서 有名한 山을 取來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렇게 許多한 母山•母岳에 對하야 父山 또는 父岳의 名은 殆無하야 「三國遺事」 卷五 仙桃聖母隨喜佛事의 條에 新羅의 五岳 中에 그 中央이 父岳이요 亦云 公山이란 것이 있을 뿐이나, 이것조차 支那의 五岳思想에서 作出된 것 같고, 民族思想이라고는 보기 어려우며, 「高麗史」 辛禑列傳 十四年 六月條에 禑가 男山에 올랐다 한 바이 있으나 이것은 極히 例外의 事에 屬할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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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1월 28일 (화) 19:01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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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고대 산신의 성에 취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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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원제목 朝鮮 古代 山神의 性에 就하야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진단학보1 발행기관 진단학회
저자 손진태 역자 집필일자 게재연월 193411
시작쪽 145쪽 종료쪽 156쪽 전체쪽 012쪽 연재여부 범주 논문 분야 민속학



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내용을 입력합니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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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45-1序言──民俗上의 山神의 性──古山名 及 古傳說 上의 山神의 性──結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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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45-2古記錄의 傳하는 바에 依하면, 古代 半島의 住民은 많이 山谷 사이에 散居하였던 모양이다. 이것은 朝鮮과 같은 山岳國에 住居하는 種族의 未開時代에 있어 極히 當然한 事象이었다. 그러면 有史以前의 그들은 많은 或은 極히 原始的인 農耕도 하였을는지는 알 수 없으나, 主로는 射獵에 依하야 그 經濟生活 營爲하였을 것이다。果然 그러면 그들의 經濟生活에 가장 重要하였던 것은 實로 山岳的 環境이지 아니하였을 수 없다. 山岳은 그들의 衣食住 모든 것의 資料를 供給하는 者이었던 까닭이다. 따라서 山岳은 그들에 取하야 가장 直接的이요 또 가장 重大한 崇拜 對象이었을 것이다. 山神崇拜思想의 起源을, 山岳 그것이 幽玄神祕한 念을 生起하게 함에 求하고저 하는 從來의 心理說에 對하야 나는 그다지 贊意를 表하지 아니하는者의 한사람이다. 勿論 그러한 神祕觀念에 因하야 崇拜하게 된 境遇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境遇에 이것은 차라리 未開人의 異常事物 崇拜心理로서 解釋할 바이요, 그들이 日常으로 親接하고 또 그 環境中에서 生活하고 있는 普通의 山岳들은 그들에 取하야 決코 異常한 事物이 아니었으며, 따라서 神秘的 存在도 아니었을 것이다. 未開人의 神秘는 恒常 異常性이 거기에 伴隨됨을▶P146-1 要하였으므로써이다. 類달리 높고 幽玄한 山, 風雲을 일으키고 비를 내리는 山, 불을 吐하는 山, 害獸 毒虫이 많은 至極히 要險한 山, 異蹟을 가진 山 等等은, 그러한 諸般 異常性에 因하야 崇拜되었던 것일 터이다. 그러나 이러한 異常性을 가진 山만이 오직 崇拜 對象으로 되었으리라든지, 또는 이러한 異常性을 가진 山岳의 崇拜 思想이 漸次 遍典되어 모든 山岳이 崇拜되게 되었으리라든지, 그렇게 우리는 생각할 수 없다. 지금 나의 생각으로서는, 未開時代의 山岳崇拜思想의 起源은, 다른 許多한 境遇의 原始的 宗敎思想의 그것과 같이, 이것을 單一한 理由로 簡單히 그 모든 境遇를 說明하여 버리고저 하는 것은 頗히 無理이리라고 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極히 普通의 境遇에 있어, 朝鮮 古代의 未開住民이 가지었던, 그들의 周圍에 있는 何等의 異常性을 가지지 아니하였던 一般 山岳의 崇拜思想은, 前述한 바와 같이, 그 一般 山岳이 그들의 經濟生活과 가장 近密하고도 重大한 關係를 가지었던 바에 因하야 生起함이 아니었을가 한다. 그러나 이 問題에 就하여는 여러 가지로 異論도 있을 터이므로, 아직 宿題로 하야 後日의 熟考를 自期하는 바이나, 何如는 山岳 그것은 古代 朝鮮 住民의 生活과 極히 重要한 關係에 있었을 것을 여기에 重言하여 두고저 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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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46-2그러면 朝鮮 古代의 山神 信仰은 果然 어떠하였든가, 記錄의 傳하는 바 없어 지금 그것을 알기는 매우 困難하나, 中古 以後의 諸種 文獻에 散見되는 山神에 關한 短片的 諸記錄에 據하야 多少間 그 古代의 面影을 推測할 수 없는 바는 아니다. 그러고 그 古代 面影의 하나인 山神의 性에 就하야 考論하고저 하는 것이 이 一論의 主旨이며, 論述의 便宜上 나는 現今 民俗上의 山神의 性으로부터 말하고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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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47現今 民俗上의 山神은 俗으로 山神靈 又는 山神, 山靈 等으로 稱謂되며, 繪畵, 彫刻上에서는 恒常 騎虎한 男性神으로 되어있으며 (畵는 主로 山神祠內 及 巫覡의 神房內에 奉置되어 있으나, 民間의 諸種 祀祠內 及 寺刹內에서 發見하는 境遇도 許多하다.) 普通으로는 白髮의 老人으로 表現되어 있으나, 附圖 第一에 보는 바와 같이 黑髥을 가진 境遇도 없지는 않다. 이 附圖 第一은 The Marquess Cnrzon of Kedleston, In the Diamond Mountains (The National Geographic Magazine, Vol. XLV. No. 3. Oct. 1924. p.358.)에서 取한 바이나, 筆者의 解題에는‘A buddha carving in a rock niche’라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無論 佛像이 아니요, 明白히 山神像인 것은 그 服裝이며, 容貌 及 그 가장 特徵되는 범을 곁에 가진 點 等에 依하야 判然하다. 이 岩凹彫像의 發見 場所에 就하야 筆者는 아무 말도 하지 아니하였으나, 아마 金剛山中의 어디일가 생각한다. 이렇게 岩壁에 山神像 彫刻하는 것은 極히 稀罕한 일로 나는 寡聞하야 아직 類를 例見聞하지 못하였다. 附圖 第二는 約十年前 내가 黃州邑 德日山의 山神堂 (黃州의 俗에 或은 이것을 「부근」 堂이라고도 하였으며, 이 부근은 文獻上에는 俗音을 따라 附根이라고도 보이고, 咸은 意味를 含하게 하야 府君이라고도 表現되어 있다) 內의 神畵中에서 그 一部를 撮影한 것으로 中央이 府君 即 附根神이요, 府君의 右에 騎虎한 白髮老人이 山神이다. 府君의 左는 俗에 山神阿只氏라고 하는 山神의 妻이며, 또 그 左의 素服한 婦人像은 府君 阿只氏라고 하였다. 이 外에도 三佛•七星神•藥師佛•應神 等의 神像이 걸려 있었다. 이렇게 山神이 騎虎男神으로 되어있고, 또 或은 虎 그것을 山神이라고 하는 思想은 虎를 山君이라고 하는 中國의 宗敎思想에서 나온 것이라고만 생각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차라리 이것은 虎를 山神▶P148-1이라고 하였던 朝鮮 固有의 宗敎思想의 開展된 것이라고 解釋하는 편이 有理할 줄 안다. 即 「三國志」 濊傳에 「祭虎以爲神」이라고 보이는 것은 今日 騎虎山神과 반듯이 歷史的 關係를 가지었던 까닭이므로써이다. 濊는 今日의 江原道 地方에 居住하였고, 江原道는 近年까지도 범나라이었고, 一般으로 생각되었던 것만치 半島 內의 가장 山岳地方이었으므로 그 地方에 古來로 虎 崇拜가 盛하였을 것은 疑心할 수 없으나, 이것은 濊族에 限한 바 아니요, 半島 全體의 普通的 信仰이었을 것이다. 그러고 또 범은 山神과 떠나서도 그 獰猛한 異常性에 因하야 崇拜의 對象이 될 必然性을 가진 動物이며, 또 그것이 山岳에 棲息하는 關係上, 一步를 展하야 山神으로도 崇拜될 可然性도 가진 動物이므로 이것은 虎山神 思想으로서 遺傳되고, 또 他方으로는 山 그것을 山神이라고 생각하던 原始 思想에서 山神을 人格神으로 한 思想이 發達되어 虎山神•人格山神 이 兩者가 合하면서 人格神 思想이 優勢한 境遇에는 虎는 오직 山神의 使者인 靈獸로 看做되며, 虎神思想이 優勢한 境遇에는 虎 即 山神으로 信仰되어 있는 것이 今日의 現象이 아닌가 한다. 이것은 마치 朝鮮의 龍神이 龍에 탄 女神(俗稱 아가씨)으로 表現되는 것과 그 軌를 같이하였다. 그리고 後世에 이르러서는 佛敎 及 道敎의 思想과도 關係를 맺게 되었으며 또 社會 經濟生活의 發展에 伴하야 山神信仰思想에도 여러 가지 複雜한 變展을 보게 되었으나, 그러한 問題에는 지금 言及하지 아니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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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48-2上述한 바와 같이 今日의 山神은 明白히 男性으로 되어있으나 (巫覡은 或 山神마누라라 云云하나, 그들은 男性神에게도 마누라라는 尊稱을 使用하므로, 마누라라는 말만으로서는 그 性을 區別하기 어렵다) 이것이 果然 古▶P150代 以來 信仰狀態이었는가? 古山名 及 古傳說上으로 考究하면, 古代의 山神은 今日과는 反對로 女性이었던 것을 推察할 수 있다. 먼저 古山名上으로부터 생각하여 보자. 「東國輿地勝覽」을 보면, 그 卷三 漢城府 山川條에 都城의 西에 母岳이란 것이 있어, 李朝의 太宗은 一時 이 母岳下에 卜都한 일이 있었으며, 同書 卷六 廣州牧 山川條에는 州南 三十里에 大母山이 있고, 同卷 十一 楊州牧 古跡條에는 洲西 五里에 大母山城이 있어 이것은 山名에서 나온 城名일씨 明白하며, 同卷 十二 江華 都護府 山川條에는 府南 三十里에 大母城山이 있고, 同卷 十四 淸風郡 山川條에는 郡四 十五里에 婦山이 있고, 同卷十六 鎭川縣 古跡條에는 縣東 六里에 大母山城이 있으며, 同卷 十七 公州 山川條에는 州北 十里에 母岳山이 있고, 同卷 二十 結城縣 祠廟條에는 母山堂이란 것이 있어 이것은 山名에서 얻은 神堂의 名稱일 것이며, 同卷 三四 金溝縣 山川條에는 縣東 二十五里에 母岳山이 있고, 同卷 沃溝縣 山川條에는 縣北 一里에 母山이 있어 鎭山으로 되어 있으며, 同卷 泰仁縣 山川條에는 縣東 三十里에 母岳山이 있고, 同卷 三六 靈光郡 山川條에는 郡南 二十里에 母岳山이 있고, 同卷 咸平縣 山川條에는 縣北 三十里에 母岳山이 있으며, 同卷 三九 淳昌郡 城郭條에는 郡西 四里에 大母山城이 있고, 同卷 四十 順天都護府 山川條에는 富有縣에 母后山이란 것이 있으며, 同卷 四十 同福縣 山川條에도 이 母后山이 보이며, 同卷 四一 平山都護府 古跡條에는 府南 七十里에 慈母山城이 있고, 同卷 四三 海州牧 山川條에는 州西 四里에 善女山이란 것이 있고, 同卷 五四 慈山郡 山川條에는 郡西 二十里에 慈母山이 있다. 이렇게 數多한 母岳•大母山•婦山•母岳山•母山•母后山•慈母山 等은 생각하건대 俗名의 意譯일 듯하며, 또는 그 俗名은 어미 山 또는 할미山 等이 아니었던가 한다. 어미 或은 아미▶P151-1라고 하던 名山을 母山•母岳 等으로 意譯하지 않고 그것을 音譯한 것으로 생각되는 것의 一例는 「東國輿地勝覽」 卷十一 積城縣 古跡條에 阿未城이라고 보이는 것으로, 이것은 阿未산의 城을 가르친 것이 아닌가 하며, 現今 大邱에 있는 峨嵋山이란 것도 俗名 애미山을 音譯할 時에 唐詩 中에서 有名한 山을 取來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렇게 許多한 母山•母岳에 對하야 父山 또는 父岳의 名은 殆無하야 「三國遺事」 卷五 仙桃聖母隨喜佛事의 條에 新羅의 五岳 中에 그 中央이 父岳이요 亦云 公山이란 것이 있을 뿐이나, 이것조차 支那의 五岳思想에서 作出된 것 같고, 民族思想이라고는 보기 어려우며, 「高麗史」 辛禑列傳 十四年 六月條에 禑가 男山에 올랐다 한 바이 있으나 이것은 極히 例外의 事에 屬할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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