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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Korea Human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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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임종태, 「김용관의 발명학회와 1930년대 과학운동」, 『한국과학사학회지』 17권 2호,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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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임종태,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9936 김용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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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임종태, 「김용관의 발명학회와 1930년대 과학운동」, 『한국과학사학회지』 17권 2호,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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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황지나, 「과학조선건설부터 요업한국건설까지」, 전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25
  
2. 황지나, 「과학조선건설부터 요업한국건설까지」, 전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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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2월 10일 (수) 22:22 기준 최신판

👩🏻‍🏫본 문서는 서울대학교 "25-2 미디어위키를 활용한 역사 데이터 편찬" 수강생([[이수연[SNU2025]]])이 작성했습니다.





김용관(金容瓘)
김용관 선생.jpg
출처 :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한글명 김용관 한자명 金容瓘 영문명 가나명 이칭 장백산(長白山)
성별 남성 생년 1897년 4월 22일 (음. 1897년 3월 21일)년 몰년 1967년 9월 24일년 출신지 경성 창신동 출생 전공 요업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일제강점기 요업기술자, 과학기술 진흥 및 대중화에 힘쓴 사회운동가.[1]
1930년대 과학운동은 민족운동의 하나로, 과학지식의 보급과 사호의 과학화를 통하여 민족 공업의 진흥을 하려는 사회운동이었다. [2] 김용관인물은 과학운동을 주도해온 단체인 발명학회단체를 창립한 멤버로서 과학운동에 참여한 발명가 집단의 대변자였고, 조선물산장려회를 주도한 반제비타협적 조합주의자들의 산업진흥론과 근대화론의 소유자였으며, 나아가 그 이념을 과학기술의 차원에까지 발전시킨 인물이다.[3]


생애


학창시절

1897년 경성 창신동공간에서 태어난 김용관인물은 유기상(鍮器商)을 운영하는 아버지 김병수(金丙洙)인물의 삼 형제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4] 1906년 4월 소학교에 입학해 1910년 3월 관립어의동보통학교기관를 졸업했다.[5] [6]

1910년 4월 김용관인물은 관립한성고등학교기관(이하 한성고등학교)에 입학하여 2학년까지 수료를 하고 1912년 관립공업전습소기관 도기과에 들어갔다.(황지나, 앞의 논문, 17-18쪽) 관립공업전습소기관는 염직, 도기, 금공, 목공, 응용화학, 토목의 6개 학과가 설치된 일종의 직공학교로, 김용관은 도기과에서 이론과 실습교육을 받았다.[7] 1913년 12월 김용관인물은 관립공업전습소기관를 졸업한 뒤, 1914년 관립공업전습소기관 전공과생이 되었다. 전공과는 1908년에 설치된 것으로, 본과 졸업생 중 전공분야의 특정 기술을 1년간 더 강습받을 수 있는 과정이었다.[8] 1915년 '전문학교규칙'이 공포되며 관립공업전습소기관에 특별과가 설치되었으며, 1년 뒤 조선총독부기관로부터 예산을 확보하여 관립공업전습소기관 특별과는 폐지, 경성공업전문학교기관가 출범했다.(황지나, 앞의 논문, 24쪽) 김용관은 1915년 특별과로 진학하여 경성공전의 1회 입학생이 되었다.[9]

경성공업전문학교기관 우수 졸업생이었던 그는 조선총독부기관 관비유학생으로 선발되어 1918년 3월부터 도쿄고등공업학교기관 요업과의 선과생으로 입학하여 1년 과정을 다녔다.[10]


요업계 인재로의 성장

김용관인물은 도쿄고공기관 수료 직후 1919년 1월 경 가나자와 일본도기회사기관에 2-3개월 파견됐다.(황지나, 앞의 논문 29쪽) 그후 조국으로 귀국사건하여 191년 4월부터 12월까지 조선경질도기기관 부산 분공장에서 공장 건설에 관련된 기술 업무를 맡으며 조선인 기수로 근무으며,이후에는 조선총독부 중앙시험소기관에 취업했다.(황지나, 앞의 논문, 30-31쪽)


산업진흥론의 지속 추구

김용관인물은 단체(Group): 공업연구회단체와 단체(Group): 공우구락부단체를 계승하여 1924년 단체(Group): 발명학회단체를 창립하였고, 1927년에는 자신이 직접 연와제조공장을 경영하기도 하였다.[11] 1931년 3월에는 「동아일보」"致當秘訣"란에 "建築用의 煉瓦製造工業-小資本 組織에 對하야"원고라는 글을 7회에 걸쳐 연재하며 1927년이래 자신이 직접 연와 공장을 경영하면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벽돌의 제조공정에 관련된 경영 및 기술상의 문제를 상세히 정리하고, 연와제조공업에 참여할 이들을 위한 일종의 기술 및 경영 지침서를 제공하였다.[12] 이 글은 단지 유망한 사업을 알선하자는 뜻을 넘어 자신과 같은 이들이 가진 사업 경험을 공유함으로써 민족 공업화에 일조하려는 노력이었다. 또한 1930년대 김용관인물은 단체(Group): 물산장려회단체의 상무이사로서 주도적인 인물로서 활동하였다. 단체(Group): 물산장려회단체 기관지 「奬産」학술지에 "發明과 富强"원고이라는 글을 기고하여 물산장려운동이 추구하는 민족의 자립적 산업화를 이루기 위해서 발명 발견의 장려를 통해 선진국과 경쟁할 수 있는 기술력을 차츰 확보하도록 노력해야한다는 주장을 펼쳤다.[13] 1932년 6월 1일 김용관인물, 박길룡인물, 현득영인물 등이 박길룡 건축사무소공간에 모여 그동안 정회상태에 있던 단체(Group): 발명학회단체의 재건을 결의사건하고, 이듬해 학회의 기관지 「科學朝鮮」학술지창간호를 출간하였다.





연구


공우구락부

경성고공의 초기 졸업생들은 공업전습소의 공업진흥운동 전통을 계승하여, 3.1운동사건직후 문화운동이 한창이던 1920년 5월경 '工友俱樂部단체'라는 단체를 조직하였다.[14] 그 구성원과 조직형태에 대해서는 아직 알려진 바가 없지만, 같은 해 10월에 창간된 기관지 「工友」학술지의 필진으로 미루어 최종환인물, 주종의인물, 김대익인물, 유두환인물, 윤성순인물, 김용관인물 등이 참여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15] 이들이 공업구락부단체를 창립한 취지는 "공업을 장려발달시키고 이것으로 하여금 조선사회 모든 것의 기초를 삼아" 근대적 문화를 일으키자는 것으로서 당시 문화운동의 경향과 일치하였다. 이를 위해 공우구락부단체는 공업의 필요를 선전하는 강연회 등을 개최하기도 하였지만, 무엇보다도 자신들의 전문적 지식을 활용하는 데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16]


발명학회의 창립

김용관인물은 1924년 10월 경성고공기관과 관립공업전습소기관 동문(성홍석인물, 박장열인물, 박길룡인물, 현득영인물, 허환인물, 윤성순인물 등), 물산장려운동사건과 민립대학설립운동사건 등의 민족주의 운동에 참여했던 사회명사들 41명과 함께 발명학회단체를 창립하였다.[17] 발명학회단체는 1920년대 초반에 전개된 문화운동사건의 흐름 속에서 창립되었다. [18] 그 방향은 실력양성운동과 같았지만 활동방식에서는 특이한 면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주요 활동이 '발명특허수속 상담 및 대행', '공업관계의 자문' 등 그들의 전문적인 기술지식을 활용하는 데에 중점을 두었다.[19]

다만 이 학회는 창립 6개월만에 정회상태에 빠지게 되었는데, 김용관인물과 박길룡인물은 그 이유를 크게 두 가지를 들었다.[20] 첫째, 학회 간부와 회원들의 참여가 소원했다는 점인데, 실제로 학회의 설립과정부터 운영에 이르기까지 김용관인물 개인의 활동에만 의존하였다.[21] 둘째, 조금 더 근본적인 이유로, 사회적 여건의 미성숙함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22] 그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발명의 중요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높지 않았고, 학회가 지원하고자 했던 조선인 발명가 자체도 극히 적은 수만 존재하고 있었다.[23] 1930년대에 이르러 발명에 관해 관심이 점차 높아졌으며 1932년 6월 김용관인물의 개인의 노력에 의해 발명학회단체가 재건되었다.[24]

학회의 업무가 증가함에 따라 김용관인물 개인이 이 모든 것을 감당하기 힘들게 되어, 점차 이사회의 참여를 넓혀나가는 동시에, 1933년 6월 28일 이사회에서 기관지 「科學朝鮮」학술지의 발간을 담당할 기관으로 학회 산하에 科學朝鮮社단체를 설치하기로 하는 등 관련 인사를 더 영입하였다.[25] 발명학회단체는 경성고공기관 출신자들을 비롯하여 교육자, 학자, 문인, 언론인, 기독교 운동가, 기업가 등 당대 조선인 엘리트 전반을 포괄하는 단체로 변모하면서 '사회 전반의 과학화, 과학의 대중화'를 추구하게 되었다.[26]





데이터


TripleData

Source (A) Target (B) Relationship
Person: 김병수 Person: 김용관 A hasSon B
Person: 김용관 Institution: 관립어의동보통학교 A graduates B
Person: 김용관 Institution: 관립한성고등학교 A graduates B
Person: 김용관 Institution: 관립공업전습소 A graduates B
Person: 성홍석 Institution: 관립공업전습소 A graduates B
Person: 박길룡 Institution: 관립공업전습소 A graduates B
Person: 현득영 Institution: 관립공업전습소 A graduates B
Person: 김용관 Institution: 경성공업전문학교 A graduates B
Person: 성홍석 Institution: 경성공업전문학교 A graduates B
Person: 박길룡 Institution: 경성공업전문학교 A graduates B
Person: 현득영 Institution: 경성공업전문학교 A graduates B
Person: 김용관 Institution: 도쿄고등공업학교 A completes B
Person: 김용관 Institution: 가나자와 일본도기회사 A worksAt B
Person: 김용관 Institution: 조선경질도기 A worksAt B
Institution: 조선총독부 Institution: 중앙시험소 A isPartOf B
Institution: 조선총독부 Institution: 경성공업전문학교 A creates B
Institution: 조선총독부 Person: 김용관 A appointedAsGovernmentFundedStudent B
Person: 김용관 Group: 발명학회 A isMemberOf B
Person: 성홍석 Group: 발명학회 A isMemberOf B
Person: 박장열 Group: 발명학회 A isMemberOf B
Person: 박길룡 Group: 발명학회 A isMemberOf B
Person: 현득영 Group: 발명학회 A isMemberOf B
Person: 허환 Group: 발명학회 A isMemberOf B
Person: 윤성순 Group: 발명학회 A isMemberOf B
Person: 윤성순 Group: 공우구락부 A isMemberOf B
Person: 최종환 Group: 공우구락부 A isMemberOf B
Person: 주종의 Group: 공우구락부 A isMemberOf B
Person: 김대익 Group: 공우구락부 A isMemberOf B
Person: 유두환 Group: 공우구락부 A isMemberOf B
Person: 김용관 Group: 공우구락부 A isMemberOf B
Person: 김용관 Article: 建築用의_煉瓦製造工業-小資本_ 組織에_ 對하야 A writes B
Person: 김용관 Article: 發明과_富强 A writes B
Article: 建築用의_煉瓦製造工業-小資本_ 組織에_ 對하야 Journal: 공우 A isPartOf B
Article: 發明과_富强 Journal: 장산 A isPartOf B
Journal: 장산 Group: 물산장려회 A isPublishedBy B
Journal: 과학조선 Group: 발명학회 A isPublishedBy B
Journal: 공우 Group: 공우구락부 A isPublishedBy B



Timeline



상기 타임라인은 황지나, 「“과학조선 건설”부터 “요업한국 건설”까지」, 국내박사학위논문 전북대학교 대학원, 2025, 부록-송간(松澗) 김용관(金容瓘) 연보를 바탕으로 작성하였습니다.


Network Graph






참고자원


1. 임종태, "김용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임종태, 「김용관의 발명학회와 1930년대 과학운동」, 『한국과학사학회지』 17권 2호, 1995

3. 황지나, 「과학조선건설부터 요업한국건설까지」, 전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25






주석


  1. "김용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 임종태, 「김용관의 발명학회와 1930년대 과학운동」, 『한국과학사학회지』, 17권 2호, 1995, 95쪽
  3. 임종태, 앞의 논문, 92쪽
  4. 황지나,「과학조선건설부터 요업한국건설까지」, 전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25, 17쪽
  5. 황지나, 앞의 논문, 17쪽
  6. 갑오개혁 이후 반포된 '소학교령'에 따라 지금의 종로 6가에 양사동소학교기관, 명륜동3가에 양현동소학교기관가 개교했다. 김용관인물은 양사동소학교기관를 입학했을 것으로 보인다. 1906년 9월 '학부령'에 따라 소학교는 보통학교로 새칭되었고, 1907년 양사동소학교기관와 양현동소학교기관가 병합하여 김용관이 졸업한 관립어의동보통학교기관가 되었다.; 황지나, 앞의 논문, 17쪽
  7. 황지나, 앞의 논문, 18, 20쪽
  8. 황지나, 앞의 논문, 22-23쪽
  9. 황지나, 앞의 논문, 24쪽
  10. 황지나, 앞의 논문, 28쪽
  11. 임종태, 앞의 논문, 95-98쪽
  12. 임종태, 앞의 논문, 98쪽
  13. 임종태, 앞의 논문, 98쪽
  14. 임종태, 앞의 논문, 96쪽
  15. 임종태, 앞의 논문, 96쪽
  16. 임종태, 앞의 논문, 96쪽
  17. 임종태, 앞의 논문, 94쪽
  18. 임종태, 앞의 논문, 95쪽
  19. 임종태, 앞의 논문, 95쪽
  20. 임종태, 앞의 논문, 97쪽
  21. 임종태, 앞의 논문, 97쪽
  22. 임종태, 앞의 논문, 97쪽
  23. 임종태, 앞의 논문, 97쪽
  24. 임종태, 앞의 논문, 101-102쪽
  25. 임종태, 앞의 논문, 102-105쪽
  26. 임종태, 앞의 논문, 105-10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