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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Korea Human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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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https://namu.wiki/w/%EA%B9%80%EC%A0%95%EA%B5%AC 김정구]", <html><online style="color:purple">『나무위키』<sup>online</sup></online></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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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김정구는 개신교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찬송가와 음악을 자연스레 접했으며, 1936년 경성에서 데뷔한 뒤 1939년 「눈물젖은 두만강」 의 대성공으로 국민적 가수로 자리 잡았다. 민요적 가창과 익살스러운 '만요(漫謠)' 스타일로 사랑받았고, 광복 이후에도 해외 동포 위문공연을 비롯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며 원로가수의 대표적 존재가 되었다. 1980년 대중가수 최초로 보관문화훈장을 받았고, 실향민의 한을 품은 그는 1985년 북한 공연까지 성사시키며 음악적·상징적 의미를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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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눈물젖은 두만강으로 유명한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가수. 작곡가 겸 가수인 맏형 김용환과 성악가인 누나 김안나 모두 음악인으로 활동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자연스럽게 음악을 접했다. 여러 곡으로 활동하게 되는데 그의 가창력과 노래들은 민요를 기반으로 해서 익살스러운 분위기가 많았다. 1980년 가요 가수로는 처음으로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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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2월 9일 (화) 15:34 기준 최신판

👩🏻‍🏫본 문서는 서울대학교 "25-2 미디어위키를 활용한 역사 데이터 편찬" 수강생(위키ID)이 작성했습니다.




김정구(金貞九)
김정구.jpeg
출처 : "김정구", 『나무위키』online,
 
한글명 김정구 한자명 金貞九 영문명 Kim Jeonggu 가나명 이칭
성별 남성 생년 1916년 몰년 1998년 출신지 함경남도 원산 전공 가수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눈물젖은 두만강으로 유명한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가수. 작곡가 겸 가수인 맏형 김용환과 성악가인 누나 김안나 모두 음악인으로 활동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자연스럽게 음악을 접했다. 여러 곡으로 활동하게 되는데 그의 가창력과 노래들은 민요를 기반으로 해서 익살스러운 분위기가 많았다. 1980년 가요 가수로는 처음으로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생애


어린시절 및 데뷔

개신교 집안이다 보니 어렸을 때부터 찬송가 등의 노래를 잘 접했다고 한다. 동경의 '중앙음악학교'를 졸업하고 교회에서 노래를 불렀다. 이의 노래를 들은 한양대학교 영화이론 교수의 권고로 김정구는 1936년 뉴코리아레코드에서 데뷔곡을 최선(崔仙)이라는 여가수와 듀엣으로 「삼번통 아가씨」 라는 노래를 취입했다. 하지만 김정구의 창법은 그의 형 김용환과 비슷하다고 해서 별로 인기를 집중시키지 못했다.


활동 및 대표곡

이후 오케레코드로 옮겨 <항구의 선술집>을 발표했다. 신보로 발표한 만요 같은 노래 <왕서방 연서>가 의외로 히트했다. 이 노래 일본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눈물젖은 두만강>이 대표곡이긴 하나 <눈물 젖은 두만강>이 민족 의식을 고취시킨다는 이유로 조선총독부에서 음반을 판매 금지하였다. 그럼에도 만요 가수로서의 재능이 두드러져 익살스러운 노래를 여러곡 히트시켰다. 계속해서 <앵화 폭풍>, <바다의 교향시>가 히트하기 시작했다. 1938년 만요 <총각 진정서> 등을 내놓았다. 김정구는 무대에서 만요가수로 인기 절정이었다.


해방 이후

김용환의 급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모든 책임을 진 김정구는 어린 조카들까지 돌보아야 하는 경제적 부담에 오직 무대 출연 수입으로 버티었다. 6.25 이후 그는 생활고에 시달리며 각 단체 쇼 무대에서 열심히 노래부르는 수입으로 사고로 크게 다친 누나 김안나까지 돌보았다. 월북 작가의 작품은 방송이나 무대에서 부를 수 없는 가요심의규정이 있기 때문에 그의 노래 밑천이 바닥이 났다.


제 2의 전성기

1960년대에 한국 방송 라디오 반공드라마인 《김삿갓 북한방랑기》 의 주제곡으로 <눈물 젖은 두만강> 이 쓰이면서 다시 주목을 받았다. 어린이·젊은이·늙은이 구별없이 이 노래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1980년에 대중가요 가수로는 처음으로 문화훈장 보관장을 수여받았다. 1982년 가요 기호 조사에서 1위는 단연 <눈물 젖은 두만강> 이었다. 예전에 가수 현인이 가요무대에서 말하기로는 김정구가 지나가면 사람들이 "눈물 젖은 두만강 지나간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대표곡


항구의 선술집

1937년에 발표. 뉴코리아레코드에서 데뷔한 김정구가 오케레코드로 옮겨 발표한 첫 번째 작품이다. 조선 악극단에 들어가 있는 곡으로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도는 사나이의 마음을 담아냈다. 역사적 비평이 필요한 부분으로 가사의 떠돈다는 말은 나라를 잃고 떠도는 것을 의미한다. 나라를 잃은 설움으로 술을 마시며 떠도는 모습이 아닐까 싶다.


눈물 젖은 두만강

1938년에 발표. 김정구의 대표작으로 식민지 대중의 비애를 잘 묘사한 작품이다. 분단 이후에는 실향의 아픔을 달래는 망향가로서의 의미로 아울러 가지게 되었다. 김정구가 대중음악 분야에서는 처음으로 문화훈장을 받는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곡이다. 현재는 김정구의 가장 유명한 곡이라고 한다면은 '눈물 젖은 두만강'이지만, 눈물젖은 두만강이 처음 나왔을 당시에는 큰 히트를 치지 못했다. 심지어 눈물젖은 두만강이 민족의식을 고취시킨다는 이유로 조선총독부에서 1943년에 눈물젖은 두만강을 수록한 음반을 판매 금지하였다. 1963년에 동명의 영화가 나오고, 1964년 KBS 라디오의 프로그램 《김삿갓 북한방랑기》의 배경음악으로 삽입되어 역주행하였다.


바다의 고향시

1938년에 발표. 바다를 소재로 한 밝고 건전하며 진취적인 생각을 품게 만든 노래이다. 일제강점기 시대에 나온 노래 답지 않게 경쾌하고 즐거우며 밝고 씩씩한 분위기의 노래로 일제 치하에서 억눌린 국민을 위로하는 노래로 크게 히트했다. '눈물 젖은 두만강'이 나라 잃은 슬픔의 정정한을 담은 곡인 반면 이 곡은 희망을 갖고 미래를 지향하는 젊은이의 꿈을 담고 있는 활기찬 곡으로 의미 있는 곡이다.





데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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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A) Target (B) Relationship
Person: 김정구 Person: 김용환 A hasSon B
Person: 김정구 Person: 김안나 A hasSon B
Person: 김정구 Institution: 중앙음악학교 A graduates B
Person: 김정구 Institution: 뉴코리아레코드 A worksAt B
Person: 김정구 Institution: 오케레코드 A worksAt B
Person: 홍길동 Group: ○○학회 A isMemberOf B
Book: ○○○ Person: 홍길동 A creator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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