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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Korea Human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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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1월 30일 (일) 06:45 기준 최신판

👩🏻‍🏫본 문서는 서울대학교 "25-2 미디어위키를 활용한 역사 데이터 편찬" 수강생김명승(PNU2025)이 작성했습니다.




나운규(羅雲奎)
나운규.jpg
출처 : 위키백과, 「나운규」, online,
 
한글명 나운규 한자명 羅雲奎 영문명 Na Woon-gyu 가나명 이칭 춘사(春史)
성별 생년 1902년 몰년 1937년 출신지 함경북도 회령 전공 연희전문학교 문과 (중퇴)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일제강점기 조선 영화계를 대표하는 영화배우이자 영화감독, 각본가이다. 1926년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감독 및 주연을 맡은 영화 아리랑서적을 발표하여 조선 영화의 수준을 단숨에 끌어올린 '민족 영화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호는 춘사(春史)이다. 36년이라는 짧은 생애 동안 약 30여 편의 영화 제작에 참여하며 식민지 조선인들의 억눌린 울분과 민족적 애환을 스크린에 담아냈다. 기존의 신파극조 영화에서 탈피하여 리얼리즘에 입각한 연기와 몽타주 기법 등 선진적인 영화 기술을 도입함으로써 한국 영화사의 결정적인 전환점을 마련한 인물이다.


생애


출생과 항일 독립운동 투신

1902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구한말 군관 출신인 아버지 나형권의 3남 3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1] 회령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간도에 있는 명동중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일제의 간섭으로 학교가 폐쇄되자 고향으로 돌아와야 했다.[2] 청소년기부터 민족의식에 눈을 뜬 그는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하였고, 이후 독립군 단체인 '도판부'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3] 그는 회령과 간도를 오가며 독립군 자금을 모금하고 통신망을 가설하거나, 독립군이 사용할 지하시설을 구축하는 등 적극적인 항일 운동을 전개했다. [4]1921년 독립운동의 뜻을 품고 서울로 올라와 연희전문학교기관 문과에 입학하였으나, 곧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청진 형무소로 이송되었다.[5] 그는 '보안법 위반' 혐의로 1년 6개월간 옥고를 치렀으며, 이때 감옥에서 만난 독립투사들로부터 많은 사상적 영향을 받음과 동시에 훗날 그의 영화 세계를 관통하는 저항 정신의 뿌리를 형성하게 되었다.[6]


영화계 입문과 아리랑의 신화

출소 후 1924년 부산에 설립된 한국 최초의 영화 제작사 조선키네마기관 주식회사가 연구생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지원하여 영화계에 발을 들였다.[7] 처음에는 단역 배우나 스태프로 활동하며 밑바닥 생활을 경험했으나, 안종화 감독의 소개로 윤백남인물 감독의 《운영전》(1925)에 비중 있는 조연으로 출연하며 연기력을 인정받기 시작했다.[8] 특유의 카리스마와 강렬한 표정 연기는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았고, 이규환 감독의 《농중조》에 출연하며 배우로서의 입지를 다졌다.[9] 1926년, 그는 마침내 자신이 직접 구상한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감독, 주연, 각본을 모두 도맡은 영화 아리랑서적을 제작하였다.[10] 서울 단성사에서 개봉된 이 영화는 식민지 조선의 암울한 현실을 미치광이 청년의 시선으로 그려내어 관객들의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영화의 주제가인 민요 '아리랑'을 관객들이 눈물을 흘리며 합창할 정도로 영화는 거대한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으며, 나운규는 단숨에 조선 최고의 스타이자 영화 작가로 급부상하였다.[11]


나운규 프로덕션의 도전과 좌절

아리랑서적의 성공 이후 1927년 조선키네마를 떠나 자신의 호를 딴 나운규프로덕션단체을 설립하며 독립적인 영화 제작에 나섰다. 창립 작품으로 《옥녀》를 내놓았고, 이어 《사나이》, 《사랑을 찾아서》 등 민족주의적 색채가 짙은 영화들을 연이어 제작했다. 특히 《사랑을 찾아서》는 두만강을 건너는 유랑민들의 비극을 다룬 대작으로, 원래 제목은 《두만강을 건너서》였으나 일제의 검열로 제목이 변경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 자본의 압박, 조선 총독부의 검열 강화, 그리고 열악한 제작 환경으로 인한 자금난이 겹치면서 나운규 프로덕션은 경영 위기에 봉착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30년대 들어 무성 영화 시대가 저물고 발성 영화(토키) 시대가 도래하면서 기술적, 자본적 한계에 부딪힌 나운규는 슬럼프에 빠지게 되었다.


마지막 불꽃과 요절

경영난으로 프로덕션을 해체한 후 그는 여러 영화사를 전전하며 배우와 감독으로 활동을 이어갔다. 이 시기 그는 폐결핵을 앓으며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다. 1937년, 그는 소설가 이태준인물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한 발성 영화 《오몽녀》를 연출하여 평단의 호평을 받으며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는 듯했다. 《오몽녀》는 향토적인 서정성과 인간 본연의 욕망을 탁월하게 묘사하여 나운규 영화 예술의 성숙기를 보여준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오랫동안 그를 괴롭혀온 폐결핵과 과로가 겹치면서 병세가 위독해졌고, 결국 《오몽녀》가 개봉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37년 8월 9일, 36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장례는 수많은 인파가 운집한 가운데 사회장으로 치러졌으며, 그의 죽음은 조선 영화계의 큰 별이 진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연구


민족주의 리얼리즘의 구현

나운규의 영화 세계를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는 '저항적 민족주의'와 '리얼리즘'이다. [12] 대표작 아리랑서적에서 그가 연기한 주인공 '영진'은 3.1 운동의 충격으로 미치광이가 된 인물이다. 이는 일제 치하에서 제정신으로는 살 수 없는 식민지 지식인의 고뇌를 상징하는 동시에, 미치광이의 행동을 빌려 검열을 피하면서 일제를 비판하려는 고도의 장치였다. 영진이 낫을 휘둘러 악덕 지주와 일본 앞잡이를 응징하는 장면은 당시 억눌려 있던 조선 민중들에게 엄청난 카타르시스를 제공했다. 나운규는 단순한 오락 영화가 주류를 이루던 시절,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민족의 현실을 고발하고 민중을 계몽하고자 했다. 그의 작품들은 화려한 세트보다는 초가집, 들판 등 조선의 실제 풍경을 배경으로 삼아 당대 민중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포착해냈다.


영화 기법의 혁신과 몽타주

나운규는 정규 영화 교육을 받지는 않았으나, 찰리 채플린의 영화나 미국 서부 영화 등을 보며 독학으로 영화 문법을 익혔다. 그는 당시 조선 영화계에서는 생소했던 '몽타주(Montage)' 기법을 과감하게 도입했다.[13] 서로 다른 쇼트들을 연결하여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편집 기술을 활용해 긴박감을 조성하거나 인물의 심리를 효과적으로 묘사했다. 또한, 기존의 과장된 신파조 연기를 지양하고, 역동적이고 사실적인 연기 스타일을 확립하여 한국 영화 연기의 수준을 한 단계 높였다. 비록 현재 그의 작품 대부분이 필름 유실로 전해지지 않아 영상으로 직접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남아 있는 스틸 사진과 당시의 시나리오, 신문 기사 등을 통해 그의 연출력이 얼마나 혁신적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14]


춘사 나운규의 유산

나운규는 한국 영화사에서 작가주의적 태도를 견지한 최초의 영화인으로 꼽힌다. 그는 시나리오 집필부터 감독, 주연, 편집까지 영화 제작의 전 과정을 주도하며 자신만의 독창적인 예술 세계를 구축했다.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90년 한국영화감독협회는 그의 호를 딴 '춘사영화예술상'(현 춘사국제영화제)을 제정하여 매년 시상하고 있다.[15] 또한 한국영상자료원 내 '한국영화박물관' 등에서는 나운규와 아리랑서적을 한국 영화의 시작점으로 보고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나운규가 심어놓은 민족 영화의 정신과 리얼리즘의 전통은 후대 영화인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으며, 오늘날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한국 영화의 뿌리가 되었다.[16]





데이터


TripleData

Source (A) Target (B) Relationship
Person: 나운규 Institution: 연희전문학교 A takesCourseAt B
Person: 나운규 Institution: 조선키네마 A worksFor B
Person: 나운규 Book: 아리랑 A directorOf B
Person: 나운규 Group: 나운규프로덕션 A founderOf B
Place: 단성사 Book: 아리랑 A premiereLocationOf B
Person: 윤백남 Person: 나운규 A colleagueOf B



Timeline




Network Graph






참고자원







주석


  1. 나운규 (羅雲奎)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 나운규 (羅雲奎)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3. 나운규 (羅雲奎)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4. 나운규 (羅雲奎)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5. 나운규 (羅雲奎)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6. 나운규 (羅雲奎)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7. 나운규 (羅雲奎)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8. 이순진『최무룡 감독의 <나운규 일생>(1966)online,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2012-03-12 .
  9. 김종원『잃어버린 영화를 찾아서전설이 된 한국영화 1online,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2011-01-07.
  10. 김종원『잃어버린 영화를 찾아서전설이 된 한국영화 1online,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2011-01-07.
  11. 나운규 (羅雲奎)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2. 정종화『<아리랑>과 나운규의 신화를 묻다online,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2016-10-27.
  13. 김종원『잃어버린 영화를 찾아서전설이 된 한국영화 1online,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2011-01-07.
  14. 조선 영화의 패러다임을 바꾼 “아리랑(1926)” 필름의 행방online, VISLA MAGAZINE 2023-05-02
  15. 춘사국제영화제 (춘사영화제)online,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16. 아리랑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