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문종왕과 장원정 창구"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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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원문1번= {{TagSpage|148-1}}高麗의 文宗(第十日代)은 第六代 成宗과 한가지, 아니 그 以上으로 太祖의 遣業을 守成한 英明의 主로서, 在位 三十七年間 內로 民政에 힘쓰고 官制를 革整하고 人才를 登用하고 儒佛을 崇獎하야 治績이 크게 늘어나고, 또한 外로 宋遼各國과의 交通도 頻數하야 諸般 文物에 있어 進步 發達을 致한―말하자면 高麗의 文化는 이때에 이르러 最高의 域에 達한 觀이 있거니와, 同時代의 思想 及 信仰의 一特徵을 지어가지고 있든 地理圖讖의 說도 一般 文運의 進展과 步調를 같이하여 이때에 相當한 거름을 것고 있었으며 따라 種種의 秘記 圖書를 利用 혹은 造作하는 이 方面의 專門家들이 出하야 各各 奇異한 言說로 宸聰을 어지럽게 한 일이 있었다. 崔滋의 補閑集(卷上)을 보면 文宗朝의 儒臣 李顗에 關한 記事에 「初顗在諫垣 時 陰陽者流 各執圖讖 互言裨補 上間之 顗封曰 陰陽本乎大易 易不言地理裨補 後世詭誕者曲論之 以至成 文字 惑衆人 況圖讚荒虛怖妄 一無可取 上心然之」라고 한 것이 있다. 顗는 곧 文宗의 后父인 李子淵의 第三子요 睿宗朝의 有名한 淸平山人 李資玄의 父로 儒佛에 兼通한 學者이었고 文宗 二十三年에 그가 春州(今春川) 道監倉使로 있었을 때에 同州 淸平山의 勝境을 사랑하여 普賢院(後에 其子 賽玄이 그곳에 隱居하야 文殊院이라 改稱함)이란 寺院을 둔 일도 있거니와(金石總覽上, 春川文殊院重條碑) 右記事에 보이는 事實은 勿論 文宗 時代에 屬한 것일지며 同{{TagPage|149-1}}時에 「上」이라 한 것은 文宗을 指稱한 말일 것이니, 이는 그때의 陰陽圖讖家들의 活躍이 어떠하였든 거와 또 그들에 對한―李顗와 같은―儒者들의 態度가 어떠하였든 것을 보여주는 자못 貴重한 史料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但 거기 李顗의 地理圖讖誕妄說에 對하야 「上心然之」라고 한 것은 王의 그 當時의(一時的) 氣分과 態度를 表現한 말에 不過한 것이요 決코 王의 終始一貫한 心理의 表示는 아니다. 文宗은 思想 信仰의 人으로 太祖 및 其他의 王과 같이 浮屠陰陽地理圖讚의 說을 惑信함이 尋常치 아니하였든 所以다. 睿宗朝의 名臣 吳延寵의 睿宗을 諫하는 말 가운데 「以文宗明睿猶惑術數」라고 (麗史 吳延寵傳)함과 같이, 文宗은 英明의 主로써 非科學的 非實利的 術數(地理圖讖)思想의 支配를 받는 님금의 하나이다(文宗의 法力 地力에 對한 信念은 太祖 以來의 傳統的 思想이라고 할 수 있지만, 또한 當時 浮屠陰陽家의 說에 刺戟 影響된 바도 만헛든 것이다) 法力에 依하야 國家의 福利를 增進하려 하야 同王 十年에 城南 德水縣의 地(今開豐郡 進鳳面 興旺里)를 卜하야 興王寺란 大伽藍을 創起한 것은 著名한 事實이지만, 또한 一方으로(圖讖說에 依하야) 旺盛한 地力을 빌어 國家의 基業을 延長하려 하야 處處에 地를 相卜하야 新離京 新離宮을 經營하고 때를 따라 巡住를 行한 일이 있었다. 本稿에 말하려는 餅岳의 長源亭을 비롯하야 南京(今京城)의 設置 及 其新宮, 西京(今平壤)의 西京畿 設置 및 그 左右闕은 다 文宗王 時에 된 延基京闕로서 以後 歷代 諸王의 이 方面에의 建闕·巡住·其他 施設의 先驅를 지었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文宗의 南京宮 西京畿 及 西京 左右闕에 就하여는 이미 他稿에 詳述한 바가 있음으로 여기에는 再論치 아니하고 오즉 長源亭에 就하야 創構의 事情 및 그 地理 遺址 等에 對하야 調査 考察한 바를 論述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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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해독문1번= 고려의 {{TagPerson|[[문종]]}}(제11대)은 제6대 {{TagPerson|[[성종]]}}과 한가지, 아니 그 이상으로 {{TagPerson|[[태조]]}}의 유업을 수성한 영민하고 총명한 임금으로서, 재위 37년간 안으로 민정에 힘쓰고 관제를 혁정(革整)하고 인재를 등용하고 유불을 숭장하여 치적이 크게 늘어나고, 또한 바깥으로 송(宋), 요(遼) 각국과의 교통도 빈삭(頻數)하여 제반 문물에 있어 진보 발달을 이룬―말하자면 고려의 문화는 이때 이르러 최고의 수준에 이른 관(觀)이 있거니와, 동시대의 사상 및 신앙의 일 특징을 지어가지고 있던 지리도참의 설도 일반 문운(文運)의 진전과 보조를 같이하여 이때 상당한 걸음을 걷고 있었으며 따라 종종의 비기 도서를 이용 혹은 조작하는 이 방면의 전문가들이 나타나 각각 기이한 언설로 신총(宸聰)을 어지럽게 한 일이 있었다. {{TagPerson|[[최자]]}}(崔滋)의 {{TagBook|[[보한집(補閑集)]]}}(상권)을 보면 {{TagPerson|[[문종]]}}조의 유신 {{TagPerson|[[이의]]}}(李顗)에 관한 기사에 <cite no="01">"初顗在諫垣 時 陰陽者流 各執圖讖 互言裨補 上間之 顗封曰 陰陽本乎大易 易不言地理裨補 後世詭誕者曲論之 以至成 文字 惑衆人 況圖讚荒虛怖妄 一無可取 上心然之”</cite>라고 한 것이 있다. 의(顗)는 곧 {{TagPerson|[[문종]]}}의 왕후 아버지인 {{TagPerson|[[이자연(李子淵)]]}}의 세 번째 아들이요 {{TagPerson|[[예종]]}}조의 유명한 청평산인(淸平山人) {{TagPerson|[[이자현(李資玄)]]}}의 아버지로 유불에 겸통한 학자였고 {{TagPerson|[[문종]]}} 23년에 그가 춘주(지금의 춘천) 도(道) 감창사(監倉使)로 있었을 때에 같은 주 청평산의 승경(勝境)을 사랑하여 {{TagLocation|[[보현원(普賢院)]]}}(훗날 그 아들 새현(賽玄)이 그곳에 은거하여 문주원(文殊院)이라 개칭함)이란 사원을 둔 일도 있거니와<sup>{{TagBook|[[금석총람]]}} 상, 춘주 문주원 중조비(重條碑)</sup> 위 기사에 보이는 사실은 물론 {{TagPerson|[[문종]]}} 시대에 속한 것일지며 동시에 ‘상(上)’이라 한 것은 {{TagPerson|[[문종]]}}을 지칭한 말일 것이니, 이는 그때의 음양도참가들의 활약이 어떠하였던 것과 또 그들에 대한―이의와 같은―유자(儒者)들의 태도가 어떠하였던 것을 보여주는 자못 귀중한 사료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단 거기 이의의 지리도참 탄망설(誕妄說)에 대하여 <cite no="02">“上心然之”</cite>라고 한 것은 왕의 그 당시의(일시적) 기분과 태도를 표현한 말에 불과한 것이요 결코 왕의 종시일관한 심리의 표시는 아니다. {{TagPerson|[[문종]]}}은 사상 신앙의 사람으로 {{TagPerson|[[태조]]}} 및 다른 왕과 같이 부도음양 지리도참의 설을 혹신함이 심상치 아니하였던 까닭이다. {{TagPerson|[[예종]]}}조의 명신(名臣) {{TagPerson|[[오연총(吳延寵)]]}}의 {{TagPerson|[[예종]]}}을 간(諫)하는 말 가운데 <cite no="03">“以文宗明睿猶惑術數”</cite>라고({{TagBook|[[여사(麗史)]]}} 오연총전) 함과 같이, {{TagPerson|[[문종]]}}은 영민하고 총명한 군주로서 비과학적 비실리적 술수(지리도참)사상의 지배를 받는 임금의 하나이다( {{TagPerson|[[문종]]}}의 법력 지력에 대한 신념은  {{TagPerson|[[태조]]}} 이래의 전통적 사상이라고 할 수 있지만, 또한 당시 부도음양가의 설에 자극 영향된 바도 많았던 것이다) 법력에 의하여 국가의 복리를 증진하려 하여 같은 왕 10년에 성남 덕수현(德水縣)의 땅<sup>지금의 개풍군 진봉면 흥왕리</sup>를 복(卜)하여 흥왕사(興王寺)란 대가람(大伽藍)을 창기한 것은 저명한 사실이지만, 또한 일방으로(도참설에 의하여) 왕성한 지력을 빌어 국가의 기업(基業)을 연장하려 하여 곳곳에 땅을 상복(相卜)하여 신이경(新離京), 신이궁(新離宮)을 경영하고 때를 따라 순주(巡住)를 행한 일이 있었다. 이 글에서 말하려는 {{TagLocation|[[병악(餅岳)]]}}의 {{TagLocation|[[장원정(長源亭)]]}}을 비롯하여 {{TagLocation|[[남경]]}}(지금의 {{TagLocation|[[경성]]}})의 설치 및 그 신궁, {{TagLocation|[[서경]]}}(지금의 {{TagLocation|[[평양]]}})의 서경기(西京畿) 설치 및 그 좌우 궐(闕)은 다  {{TagPerson|[[문종]]}}왕 때에 된 연기경궐(延基京闕)로서 이후 역대 모든 왕의 이 방면에의 건궐(建闕)·순주(巡住)·기타 시설의 선구를 지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TagPerson|[[문종]]}}의 남경궁 서경기 및 서경 좌우 궐에 대하여는 이미 다른 글에 상술한 바가 있으므로 여기에는 다시 논의하지 아니하고 오직 장원정에 대하여 창구의 사정 및 그 지리 유지(遺址) 등에 대하여 조사 고찰한 바를 논술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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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1번= {{TagSpage|149-2}}長源亭의 創構에 關하여는 高麗史 文宗世家 十年條 끝{{TagPage|150-1}}에는 單히 「是歲作長源亭於西江餅岳之南」이라고만 쓰여 있으나, 同史 地理志一, 貞州(海豊郡)條를 보면 「有白馬山·長源亭」이란 句節 下에 다음의 記載가 分註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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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2번= {{TagSpage|150-2}}<blockquote no="01">道詵松嶽明堂記云 西江邊 有君子御馬明堂之地 自太祖統一丙申之歲至百二十年 就此創構 國業延長 文宗命太史令金宗允等相地 構之於西江餅嶽之南</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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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원문3번= {{TagSpage|150-3}}이에 依하면 長源亭의 創構는 文宗十年―바루 興王寺 始役의 歲에 道詵 松嶽明堂記란 秘記의 所說에 依하야 緣起된 것을 알 수 있으니 다시 仔細히 말하면 그 秘記에 西江(今禮成江)邊에 「君子御馬」 形의 明堂地가 있으니 太祖의 半島統一의 歲인 丙申(太祖 即位 十九年 西紀後 九三六年)으로부터 二回甲 即 百二十年 되는 丙申歲(文宗 十年, 西紀後 一〇五六年)에 이르러 이곳에 離宮을 創起하면 國業이 延長하리라는 說에 因하야, 文宗은 그 指示한 年數에 應하야 十年에 太史令 金宗允 等을 命하야 地를 相擇케 하야 西江 즉금의 禮成江邊에 있는 餅岳南에 長源亭을 創構하였다는 것이다. 所謂 道詵松嶽明堂記는 勿論 當時 世間에 流行하든  東方秘記 中의 하나이었을 것이나, 그것이 果然 表示한 바와 같이 羅末의 浮屠陰陽家 道詵의 所著인가는 一大 疑問이다. 道詵의 名을 冠한 秘記類는 後에도 자조 出來하지만 元來 秘記 讖書 따위의 書에는 그 方面 혹은 그 方面 關係의 名人의 이름을 假借하야 붙이는 것이 普通인즉, 그 眞正한 著作者를 아지 못함이 도리어 當然한 일이다. 그러므로 此書로 말하더라도 標榜은 비록 羅末 道詵의 所著와 같이 하였지만, 실상은 何時 何人에 依하야 著作된 書인지 알 道理가 없는 것이다. 但 文宗 以前에 된 것인 듯함은 거의 無疑하나 右 秘記 中 「自太祖統一丙申之歲至百二十年云云」의 說은 特히 文宗 時代와 相關됨이 큼으로 此 句節만은 當時의 圖讖家에 依하야 添加 敷演된 것인 듯하다. 一步를 내켜 생각하면 그것은 이때 相地의 命을 받든 太史令(天文 地理 曆數 測候 等을 掌함) 金宗允 等의 所爲인지도 모르며, 또 그 相地의 命이 있게 된 것은 역시 그들의 前{{TagPage|151-1}}記 松嶽明堂記의 文을 익글어 新離宮의 創建을 奏請하였던 까닭이 아닌가 한다. 그러라고 하면 이 奏請과 相地의 命은 이해(十年) {{ruby|어느 달|●●●}}의 일이었는지? 이에 關한 分明한 記載가 없음으로 確實히는 알 수 없으나, 高麗史 文宗 世家 十年 九月條에 王의 群臣에게 下한 制에 「近覽{{ruby|日官所奏|●●●●}} 數有天變 此蓋寡人德薄 政令不一所致也 鰓鰓以懼 夙夜未遑 自今月 避正殿 減常膳 庶答天譴 凡百卿士 各愼爾位 直言予過無所隱 」이란 것이 있음을 보면 여기 「日官」은 역시 太史令 金宗允 等의 謂인 듯하며―그 所奏의 天變이 어떠한 것들인지는 (天文五行兩志俱不見) 具體的 記載가 없어 仔細치 못하나―日官들이 天變을 奏上할 때에 避凶就吉 裨補延基의 意味로 그러한 相地創宮의 奏請을 하고 文宗은 因하야 一方으로 如上의 責己求言의 制를 下하는 同時에 他方으로 相地의 命을 내리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어떠튼 이때의 天變과 新宮 經營과는 아무 關係가 없다고 할 수 없으며, 이 推理가 許容된다면 相地의 奏請과 王命은 이해 九月에 있었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건 그러타 하고 金宗允 等의 相地의 結果는 西江 餅岳南의 地를 秘記의 所謂 「君子御馬明堂之地」로 認定하야 마침내 그곳에 長源亭이란 小離宮을 創構하게 되였거니와, 亭의 建創은 이와 같이 全혀 圖讖說에 좇아 그곳의 地力을 빌어 國業을 時間的으로 無窮히 延長하려는 祈願에 不過함이었다. 「長源」이란 亭名도 畢竟 그러한 祈願의 意味에서 命名된 것일 것이다. 亭의 建創後 王의 幸住를 試하야, 記錄上으로는 同王 十四年 二月、十七年 十月、二十一年 三月、二十三年 五月、三十五年 三月 等 五回의 行幸이 보이나 그것은 記錄의 不備인 듯하고 實際에는 그 以上의 回數가 있었으리라고 믿는다. 二十三年 五月 幸住 時에는 亭下淵 中에서 瑞文의 검을 얻어 王은 일로써 文臣에게 命하야 (祝賀의 뜻으로) 謌詩를 製進하게 하였다 한다.(文宗世家二十三年五月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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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1번= 장원정의 창구에 관하여는 {{TagBook|[[고려사]]}} 문종세가(文宗世家) 10조 끝에는 오직 <cite no="04">“是歲作長源亭於西江餅岳之南”</cite>이라고만 쓰여 있으나, {{TagBook|[[고려사|같은 책]]}} 지리지 1(地理志 1), 정주(해풍군)조를 보면 <cite no="05">“有白馬山·長源亭”</cite>이란 구절 아래에 다음의 기재(記載)가 분주(分註)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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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2번= <blockquote no="01">道詵松嶽明堂記云 西江邊 有君子御馬明堂之地 自太祖統一丙申之歲至百二十年 就此創構 國業延長 文宗命太史令金宗允等相地 構之於西江餅嶽之南</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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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2해독문3번= 이에 의하면 장원정의 창구는 {{TagPerson|[[문종]]}} 10년―바로 흥왕사 시역(始役)의 해에 {{TagPerson|[[도선]]}}(道詵) {{TagBook|[[송악명당기]]}}(松嶽明堂記)란 비기의 설에 의하여 연기(緣起)된 것을 알 수 있으니 다시 자세히 말하면 그 비기에 서강(지금의 예성강)변에 ‘군자어마(君子御馬)’ 형의 명당지가 있으니 {{TagPerson|[[태조]]}}의 반도 통일의 해인 병신<sup>{{TagPerson|[[태조]]}} 즉위 19년 서기 후 936년</sup>으로부터 2회갑 즉 120년 되는 병신세<sup>{{TagPerson|[[문종]]}} 10년, 서기 후 1056년</sup>에 이르러 이곳에 이궁(離宮)을 창기하면 국업이 연장하리라는 설에 인하여, {{TagPerson|[[문종]]}}은 그 지시한 년수에 맞춰 10년에 태사령(太史令) {{TagPerson|[[김종윤(金宗允)]]}} 등을 명하여 땅을 상택(相擇)케 하여 서강 지금의 예성강변에 있는 병악(餅岳) 남쪽에 장원정을 창구하였다는 것이다. 소위 {{TagPerson|[[도선]]}} {{TagBook|[[송악명당기]]}}는 물론 당시 세간에 유행하든 동방비기 중의 하나였을 것이나, 그것이 과연 표시한 바와 같이 나말의 부도음양가 {{TagPerson|[[도선]]}}의 저술인가는 일대 의문이다. 도선의 이름을 쓴 비기 류는 뒤에도 자조 나타나지만 원래 비기 참서 따위의 책에는 그 방면 혹은 그 방면 관계의 유명인의 이름을 가차(假借)하여 붙이는 것이 보통인즉, 그 진정한 저작자를 알지 못함이 도리어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이 책으로 말하더라도 표방(標榜)은 비록 나말 {{TagPerson|[[도선]]}}의 저술과 같이 하였지만, 실상은 어떤 때 어떤 사람에 의하여 저작된 책인지 알 도리가 없는 것이다. 단 {{TagPerson|[[문종]]}} 이전에 된 것인 듯함은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으나 위의 비기 중 <cite no="06">“自太祖統一丙申之歲至百二十年云云”</cite>의 설은 특히 {{TagPerson|[[문종]]}} 시대와 상관됨이 큼으로 이 구절만은 당시의 도참가에 의하여 첨가 부연된 것인 듯하다. 일보를 내켜 생각하면 그것은 이때 상지(相地)의 명을 받던 태사령<sup>천문, 지리, 역수, 측후 등을 관장함</sup> {{TagPerson|[[김종윤]]}} 등이 한 일인지도 모르며, 또 그 상지의 명이 있게 된 것은 역시 그들의 앞서 말한 {{TagBook|[[송악명당기]]}}의 글을 이끌어 신이궁의 창건을 주청(奏請)하였던 까닭이 아닌가 한다. 그렇다고 하면 이 주청과 상지의 명은 이해(10년) {{ruby|어느 달|●●●}}의 일이었는지? 이에 관한 분명한 기재가 없음으로 확실히는 알 수 없으나, {{TagBook|[[고려사]]}} 문종세가 10년 9월조에 왕의 군신에게 내린 제(制)에 <cite no="07">“近覽{{ruby|日官所奏|●●●●}} 數有天變 此蓋寡人德薄 政令不一所致也 鰓鰓以懼 夙夜未遑 自今月 避正殿 減常膳 庶答天譴 凡百卿士 各愼爾位 直言予過無所隱”</cite>이란 것이 있음을 보면 여기 ‘일관(日官)’은 역시 태사령 {{TagPerson|[[김종윤]]}} 등의 가리킴인 듯하며―그 소주(所奏)의 천변(天變)이 어떠한 것들인지는 (天文五行兩志俱不見) 구체적 기재가 없어 자세치 못하나―일관들이 천변을 주상(奏上)할 때에 피흉취길(避凶就吉) 비보연기(裨補延基)의 의미로 그러한 상지 창궁의 주청을 하고 {{TagPerson|[[문종]]}}은 그리하여 일방으로 위와 같은 책기구언(責己求言)의 제(制)를 내리는 동시에 타방으로 상지의 명을 내리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어떻든 이때의 천변과 신궁 경영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할 수 없으며, 이 추리가 허용된다면 상지의 주청과 왕명은 이해 9월에 있었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건 그렇다 하고 {{TagPerson|[[김종윤]]}} 등의 상지의 결과는 서강 병악 남쪽의 땅을 비기의 소위 <cite no="08">“君子御馬明堂之地”</cite>로 인정하여 마침내 그곳에 장원정이란 소이궁(小離宮)을 창구하게 되었거니와, 정의 건창은 이와 같이 전혀 도참설에 좇아 그곳의 지력을 빌어 국업을 시간적으로 무궁히 연장하려는 기원에 불과함이었다. ‘장원(長源)’이란 정의 이름도 필경 그러한 기원의 의미에서 명명된 것일 것이다. 정의 건창 후 왕의 행주(幸住)를 실시하여, 기록상으로는 {{TagPerson|[[문종|같은 왕]]}} 14년 2월, 17년 10월, 21년 3월, 23년 5월, 35년 3월 등 5회의 행행(行幸)이 보이나 그것은 기록의 불비인 듯하고 실제에는 그 이상의 횟수가 있었으리라고 믿는다. 23년 5월 행주(幸住) 시에는 정하연(亭下淵) 가운데에서 서문(瑞文)의 검을 얻어 왕은 이로써 문신에게 명하여(축하의 뜻으로) 가시(謌詩)를 지어 올리도록 하게 했다 한다.(문종세가 23년 5월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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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1번= {{TagSpage|152-1}}그러면 餅岳 及 長源亭의 所在는 지금의 어느 곳이며? 이를 包含한 一帶의 風水的 地理는 어떠한가?를 다음에 論究하려 한다. 兩者의 所在가 西江(今의 禮成江 下流)邊인 舊 海豊郡(朝鮮時代의 豊德郡) 內에 屬함은 上引한 麗史 地理志文에 보이는 바와 같거니와 이것만으로는 좀 漠然하야 그 分明한 所在를 찾기 어렵고, 東國輿地勝覽(卷十三) 豊德郡 古跡條를 보면 거기에는 「長源亭在郡西二十五里」라 하고 그 밑에 麗志의(前揭한) 註記와 같은 文이 連續되여 있다. 但 山川條에는 餅岳의 記事가 보여있지 아니하나 그것은 長源亭의 位置로써 짐작할 수 있으니, 兩者의 所在는 舊豊德邑인 現名 開豐郡 大聖面 豐德里에서 西편 二十五里 附近에 求하지 않으면 아니 되겠다. 陸地測量部의 五萬分之一地圖에 依하야 이 距里에 相當한 곳의 高山을 求하면 開豐郡 光德面 高尺里 西쪽에 高一一七, 〇米突 되는 山이 있는데 이름은 적혀있지 아니하나 이를 古山子 金正浩의 大東輿地圖 및 그 靑邱線表圖에 對照하여 보면 御屏山임을 알겠고, 또 거기서 南쪽 漢江 下流에 直面한 柳井洞에는 殿座山이란 高七六米突 되는 小山이 있다. 餅岳은 이 方面의 著名한 山임으로 그것이 지금의 御屛山에 틀림없음을 容易히 알 수 있고 同時에 「御屛」은 餅岳의 後名인것이 無疑하다. 「御屛」의 名이 어느 때에 餅岳에 代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이름이 地家書에서 나온것만은 分明하니 重鐫官版(明板) 地理天機會元이란 地家總書 中에 所收된 泄天機砂格(宋人廖瑀 著)에 「{{ruby|御屛|●●}}本是品字土」란 말과 九星正變龍格歌(同上)에 「品字方峯號{{ruby|御屛|●●}}」이란 말이 보인다. 即 品字形의 山을 御屛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餅岳은 그 形體가 品字와 같고 또 餅과 屛이 音相同함으로 後世에 御屛山이란 이름을 얻게 된 것이 아닌가. 나는 이 一帶의 地理的 形勢와 長源亭의 遺址를 實地로 視察하기 僞하여 年前에 數回의 踏査를 行한 일이 있었다. 里人은 지금도 그 山을 御屛山이라고 부르거니와、이를 前面(南)에서 바{{TagPage|153-1}}라 볼 때는 多少 品字形에 가까워 御屛이란 이름을 얻음에 그러할 듯도 하며 그 秀麗壯重한 품은 周圍 諸山에 빼(抜)여 있다. 다시 側面에서 이를 보면 連峯이 偃仰崛伏하야 蘇東坡의 所謂 「橫看成嶺側成峯·遠近高低各不同」(蘇文忠公詩集 卷二十三, 題西林壁)의 形態를 지어가지고 있으며 또 地理(風水)家의 所謂 「頭有高低皆可貴」의 天馬體(瘳瑀의 「泄天機砂格」 參照)를 이루어 있다(附圖第一參照). 松嶽明堂記의 「君子御馬明堂」이란 것은 대개 이 側面에서 본 天馬體를 容形한 말인 것 같고 後世에 御屛山의 名을 얻은 것은 前面에서 본 形態에서 말미암은 것 같으니 風水家란 대개 自己의 보는 바에 따라 種種의 物形을 山水에 附會함이 普通이다. 山腹에 발(足)을 멈추어 周圍의 遠景을 삺이면 西에는 禮成江이 흘러 漢江 下流에 들어가고 東에는 역시 漢江과 通하는 黃江浦가 노여있고 南으로는 茫茫한 平野와 廣闊한 漢江을 隔하야 江華島의 群峯을 對하여 있으며 다시 此山(御屛山)의 左右 支勢를 삺여보면 그 {{ruby|右邊一支|●●●●}}는 西南으로 다라나 早發洞 長秋洞의 田陌을 穿渡하야 彎弓의 形을 作하면서 漸起漸高의 勢로 堂頭浦의 山(高二九、三米)을 일으키어 江流를 逆하였고 {{ruby|左邊一支|●●●●}}는 充實한 氣勢로 東南으로 다라나 德峴里 龍山洞 黃江里를 지나 다시 西折하야 柳井洞의 殿座山(高七六米)을 일으키는 同時에 北으로 本山을 回顧하는, 風水家의 所謂 「回龍顧祖」의 格을 지어있다(地圖參照). 長源亭의 遺址는 御屛山 下에서는 求하지 못하고 同山 左支의 終點이라고 할 만한, 이 殿座山麓에서 發見하게 되였으니 이곳은 麗史의 「構之於西江餅岳之南」이란 것과 輿地勝覽(卷十三)의 「長源亭在郡(豐德)西二十五里」란 것에 相當하며 더욱 「殿座」란 山名과 勝覽(卷十三) 同郡 祠廟條에 「朱雀神堂 俗稱{{ruby|堂頭山在古長源亭西南二里海邊|●●●●●●●●●●●●●●}}」이라 함에 依하야 分明하다(地圖恭照). 堂頭浦山上에는 지금에도 神堂이 있어 때때로 무당들에 依하야 祈禱祝祭를 行하거니와 그곳을 昔日에 {{ruby|朱雀神堂|●●●●}}이라 한 것은 同山의 位置가 長源</br>{{TagPage|154-1}}[[파일:이병도_장원정-1.png|섬네일|가운데|餅岳 及 長源亭 附近圖]]</br>亭 西南에 當하야 朱雀山(南山)의 任務를 대신하였든 所以인가 한다.(附圖第三參照) 이 堂頭山이야말로 長源亭의 風水地理上 重要한 地位를 가지고 있는 곳이니, 殿座山이 비록 御屛山(餅岳)에서 分來하야 回龍顧祖의 勢를 지었을</br>[[파일:이병도_장원정-6.png|섬네일|가운데|第一圖 殿座山上에서 멀리 御屛山을 望함]]</br>[[파일:이병도_장원정-3.png|섬네일|가운데|第二圖 長源亭址의 一部]]</br>[[파일:이병도_장원정-4.png|섬네일|가운데|第三圖 殿座山上에서 멀리 堂頭山을 望함]]</br>[[파일:이병도_장원정-5.png|섬네일|가운데|第四圖 長源亭址 左側 土城의 一部]]</br>{{TagPage|155-1}}지라도 만일 明堂을 懐抱하고 江流를 逆止하는 듯한 堂頭山의 崛起가 없었드러면 이곳의 風水地理는 大缺陷을 生하야 無用의 것이 되고 말 것이다. 長源亭 相地의 命을 받은 太史令 金宗允 等이 明堂을 殿座山麓에 求한 意義의 一端을 이에 依하야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곳은 비단 風水地理上으로서뿐만 아니라 自然의 風景上으로도 한 Chosen된 곳이라고 볼 수 있으니, 眼前에 흘르는 汪洋한 江流와 이우를 通하야 오리락 나리락 하는 點點한 帆船과 또 對岸에 솟은 江華의 여러 峯巒은 모다 詩的이요 그림(畵)이다. 相地者의 考慮가 이 點에도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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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2번= {{TagSpage|155-2}}宮址는 殿座山 南麓에 있어 壬坐 丙向의 三四層臺만은 認할 수 있으나 臺形이 원악 陵夷하야 昔日의 面貌를 如實히 알기는 어렵게 되었으며 臺上에는 林木이 參差하고 壘壘한 墳塚과 古瓦의 破片이 여긔 저긔 散在하야 滄桑의 變을 말하고 있다(附圖第二參照). 睿宗 仁宗 時의 文臣 鄭知常의 有名한 長源亭詩에 「岧嶢雙闕枕江濱」(見下)이라 한 것을 보면 殿閣이 左右두 편에 나란이 있었던 모양이며, 지금 陵夷해진 臺地로 보더라도 東西의 幅이 比較的 넓은것은 그 까닭인가 한다. 宮臺를 中心으로 하야 周圍에 둘럿든 土城의 形跡은 오히려 옛그림자를 傅하여주니(附圖第四參照) 東西의 直徑은 約二百米突가량이나 된다. 殿座山頂에도 楕圓形의 土壘가 둘려있는데 이것은 後世의 所築으로, 居民들은 이르되 지나간 甲午 東學亂 時의 民堡舊址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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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3번= {{TagSpage|155-3}}長源亭詩(輿地勝覽卷十三所收)<br/>別館逢人擬謫仙 上樓同望晚江船 吟搜好景勞詩筆 笑得歡情付醉筵 紅葉黃花當此日 綠楊芳草憶前年 只將親意忘時態 忍抱狂吟繼雅篇 薄暮汀邊明蟹火 夕陽村外起人煙 溟濛海氣風驅去 月上秋霄照碧天 (高麗 睿宗和郭輿詩)<br/>{{TagPage|156-1}}輦路東風我獨先 馬頭春色入江天 日暄野壠新年草 水繞離宮薄暮烟 微雨鳥聲挑菜地 綠波人語釣魚船 嗚鑾已近芳菲促 不待清明必賜筳 (郭輿詩)<br/>枕海樓臺倚半空 分明畫出水精宮 天垂日月簷楹外 池注湖山几席中 玉燕低飛紅杏雨 金鶯靜囀綠楊風 鑾輿早晚來停蹕 試問前村雪鬢翁 (金克己詩)<br/>岧嶢雙闕枕江濱 清夜都無一點塞 風送客帆雲片片 露凝宮瓦玉鱗鱗 綠楊閉戸八九屋 明月捲簾三四人 縹渺蓬萊在何許 夢蘭黃鳥轉青春 (鄭知常詩)<br/>玉漏丁東月掛空 一天春興牧丹風 小堂捲箔春波綠 人在蓬萊縹渺中 (同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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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1번= 그러면 병악 및 장원정의 소재는 지금의 어느 곳이며? 이를 포함한 일대의 풍수적 지리는 어떠한가?를 다음에 논구하려 한다. 양자의 소재가 {{TagLocation|[[서강]]}}(지금의 {{TagLocation|[[예성강]]}} 하류)변인 옛 {{TagLocation|[[해풍군]]}}(조선시대의 {{TagLocation|[[풍덕군]]}}) 안에 속함은 앞서 인용한 {{TagBook|[[고려사|여사]]}} 지리지문에 보이는 바와 같거니와 이것만으로는 좀 막연하여 그 분명한 소재를 찾기 어렵고, {{TagBook|[[동국여지승람]]}}(13권) 풍덕군 고적조를 보면 거기에는 <cite no="09">“長源亭在郡西二十五里”</cite>라 하고 그 밑에 {{TagBook|[[동국여지승람|여지]]}}(麗志)의(앞의 책) 주기(註記)와 같은 글이 연속되어 있다. 단 산천조에는 병악의 기사가 보이지 아니하나 그것은 장원정의 위치로써 짐작할 수 있으니, 양자의 소재는 옛 풍덕읍인 지금 이름 개풍군 대성면 풍덕리에서 서쪽 25리 부근에서 구하지 않으면 아니 되겠다. 육지측량부의 5만분의 1 지도에 의하여 이 거리에 상당한 곳의 고산을 구하면 개풍군 광덕면 고척리 서쪽에 높이 1170미터 되는 산이 있는데 이름은 적혀있지 아니하나 이를 고산자(古山子) {{TagPerson|[[김정호]]}}의 대동여지도 및 그 청구선표도에 대조하여 보면 {{TagLocation|[[어병산(御屏山)]]}}임을 알겠고, 또 거기서 쪽 한강 하류에 직면한 유정동(柳井洞)에는 {{TagLocation|[[전좌산(殿座山)]]}}이란 높이 76미터 되는 작은 산이 있다. 병악은 이 방면의 저명한 산이므로 그것이 지금의 어병산에 틀림없음을 쉽게 알 수 있고 동시에 ‘어병’은 병악의 후명(後名)인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어병’의 이름이 어느 때에 병악을 대신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이름이 지가서에서 나온 것만은 분명하니 중전관판(重鐫官版)(명판(明板)) {{TagBook|[[지리천기회원(地理天機會元)]]}}이란 지가총서 가운데 소수(所收)된 {{TagBook|[[실천기사격]]}}(泄天機砂格)(송나라 사람 {{TagPerson|[[료우]]}}(廖瑀) 지음)에 <cite no="10">“{{ruby|御屛|●●}}本是品字土”</cite>란 말과 구성정변용격가(九星正變龍格歌)(같은 책)에 <cite no="11">“品字方峯號{{ruby|御屛|●●}}”</cite>이란 말이 보인다. 즉 품자(品字) 형의 산을 어병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병악은 그 형체가 품자와 같고 또 병(餅)과 병(屛)이 음이 상동함으로 후세에 어병산이란 이름을 얻게 된 것이 아닌가. 나는 이 일대의 지리적 형세와 장원정의 유지를 실지로 시찰하기 위하여 연전에 수회의 답사를 행한 일이 있었다. 리 사람은 지금도 그 산을 어병산이라고 부르거니와, 이를 전면(남쪽)에서 바라볼 때는 다소 품자 형에 가까워 어병이란 이름을 얻음에 그러할 듯도 하며 그 수려 장중한 품은 주위 다른 산에 빼(抜)여 있다. 다시 측면에서 이를 보면 연봉(連峯)이 언앙굴복(偃仰崛伏)하여 {{TagPerson|[[소동파]]}}의 소위 <cite no="12">“橫看成嶺側成峯·遠近高低各不同”</cite>({{TagBook|[[소문충공시집]]}}(蘇文忠公詩集) 23권, 제서림벽(題西林壁))의 형태를 지어가지고 있으며 또 지리(풍수)가의 소위 <cite no="13">“頭有高低皆可貴”</cite>의 천마체({{TagPerson|[[료우]]}}(廖瑀)의 「{{TagBook|[[실천기사격]]}}」 참조)를 이루어 있다(부도 제1 참조). {{TagBook|[[송악명당기]]}}의 <cite no="14">“君子御馬明堂”</cite>이란 것은 대개 이 측면에서 본 천마체를 형용하는 말인 것 같고 후세에 어병산의 이름을 얻은 것은 전면에서 본 형태에서 말미암은 것 같으니 풍수가란 대개 자기의 보는 바에 따라 종종의 물형을 산수에 붙이는 것이 보통이다. 산복(山腹)에 발(足)을 멈추어 주위의 원경을 살피면 서쪽에는 예성강이 흘러 한강 하류에 들어가고 동쪽에는 역시 한강과 통하는 황강포(黃江浦)가 놓여 있고 남쪽으로는 망망한 평야와 광활한 한강을 격하여 {{TagLocation|[[강화도]]}}의 군봉(群峯)을 대하여 있으며 다시 이 산(어병산)의 좌우 지세를 살펴보면 그 {{ruby|우변 한 줄기|●●●●●}}는 서남쪽으로 달아나 조발동 장추동의 밭길을 천도(穿渡)하여 잡아당긴 활의 모양을 만들면서 점기점고(漸起漸高)의 세로 당두포(堂頭浦)의 산(높이 293미터)을 일으키어 강류를 거슬렀고 {{ruby|좌변 한 줄기|●●●●●}}는 충실한 기세로 동남쪽으로 달아나 덕현리 용산동 황강리를 지나 다시 서쪽으로 꺾어 유정동의 전좌산(높이 76미터)을 일으키는 동시에 북쪽으로 본산을 돌아다보는, 풍수가의 소위 ‘回龍顧祖’의 격을 지어있다(지도 참조). 장원정의 유지는 어병산 아래에서는 구하지 못하고 같은 왼쪽 줄기의 종점이라고 할 만한, 이 전좌산 기슭에서 발견하게 되었으니 이곳은 {{TagBook|[[고려사|여사]]}}의 <cite no="15">“構之於西江餅岳之南”</cite>이란 것과 {{TagBook|[[동국여지승람|여지승람]]}}(권13)의 <cite no="16">“長源亭在郡(豐德)西二十五里”</cite>란 것에 상당하며 더욱 ‘전좌’란 산 이름과 승람(권13) 같은 군 사묘조에 <cite no="17">“朱雀神堂 俗稱{{ruby|堂頭山在古長源亭西南二里海邊|●●●●●●●●●●●●●●}}”</cite>이라 함에 의하여 분명하다(지도 참조). 당두포 산 위에는 지금에도 신당이 있어 때때로 무당들에 의하여 기도 축제를 행하거니와 그곳을 옛날에 {{ruby|주작신당|●●●●}}(朱雀神堂)이라 한 것은 같은 산의 위치가 장원</br>[[파일:이병도_장원정-1.png|섬네일|가운데|병악 및 장원정 부근도]]</br>정 서남쪽에 당하여 주작산(남산)의 임무를 대신하였던 까닭인가 한다.(부도 제3 참조) 이 {{TagLocation|[[당두산]]}}이야말로 장원정의 풍수지리상 중요한 지위를 가지고 있는 곳이니, 전좌산이 비록 어병산(병악)에서 갈라져 나와 회룡고조(回龍顧祖)의 세를 지었을</br>[[파일:이병도_장원정-6.png|섬네일|가운데|제1도 전좌산 위에서 멀리 어병산을 바라봄]]</br>[[파일:이병도_장원정-3.png|섬네일|가운데|제2도 장원정지의 일부]]</br>[[파일:이병도_장원정-4.png|섬네일|가운데|제3도 전좌산 위에서 멀리 당두산을 바라봄]]</br>[[파일:이병도_장원정-5.png|섬네일|가운데|제4도 장원정지 좌측 토성의 일부]]</br>지라도 만일 명당을 회포(懐抱)하고 강류를 역지(逆止)하는 듯한 당두산의 굴기(崛起)가 없었더라면 이곳의 풍수지리는 큰 결함이 생겨 무용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장원정 상지의 명을 받은 태사령 {{TagPerson|[[김종윤]]}} 등이 명당을 전좌산 기슭에 구한 의의의 일단을 이에 의하여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곳은 비단 풍수지리상으로서뿐만 아니라 자연의 풍경상으로도 한 Chosen된 곳이라고 볼 수 있으니, 눈앞에 흐르는 왕양(汪洋)한 강류와 이우를 통하여 오르락내리락하는 점점한 범선과 또 대안(對岸)에 솟은 강화(江華)의 여러 봉만(峯巒)은 모두 시적이요 그림(畵)이다. 상지자의 고려가 이 점에도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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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2번= 궁터는 전좌산 남쪽 기슭에 있어 임좌병향(壬坐丙向)의 3, 4층대만은 알 수 있으나 대의 모양이 워낙 능이(陵夷)하여 옛날의 면모를 여실히 알기는 어렵게 되었으며 대 위에는 임목(林木)이 들쭉날쭉하고 누누한 분총(墳塚)과 고와(古瓦)의 파편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 창상(滄桑)의 변화를 말하고 있다(부도 제2 참조). {{TagPerson|[[예종]]}}, {{TagPerson|[[인종]]}} 때의 문신 {{TagPerson|[[정지상]]}}의 유명한 장원정 시(詩)에 <cite no="18">“岧嶢雙闕枕江濱”</cite>(아래를 보라)이라 한 것을 보면 전각이 오른쪽 왼쪽 두 편에 나란히 있었던 모양이며, 지금 능이해진 대지(臺地)로 보더라도 동서의 폭이 비교적 넓은 것은 그 까닭인가 한다. 궁대를 중심으로 하여 주위에 둘렀던 토성의 형적은 오히려 옛 그림자를 부하여 주니(부도 제4 참조) 동서의 직경은 약 200미터가량이나 된다. 전좌산 꼭대기에도 타원형의 토루(土壘)가 둘러 있는데 이것은 후세에 쌓아 올린 것으로, 거민(居民)들은 이르되 지나간 갑오 동학란 때의 민보(民堡) 옛 터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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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3번= 장원정 시({{TagBook|[[동국여지승람|여지승람]]}} 권13에서)<br/>別館逢人擬謫仙 上樓同望晚江船 吟搜好景勞詩筆 笑得歡情付醉筵 紅葉黃花當此日 綠楊芳草憶前年 只將親意忘時態 忍抱狂吟繼雅篇 薄暮汀邊明蟹火 夕陽村外起人煙 溟濛海氣風驅去 月上秋霄照碧天 (고려 예종 화 {{TagPerson|[[곽여]]}} 시)<br/>輦路東風我獨先 馬頭春色入江天 日暄野壠新年草 水繞離宮薄暮烟 微雨鳥聲挑菜地 綠波人語釣魚船 嗚鑾已近芳菲促 不待清明必賜筳 ({{TagPerson|[[곽여]]}} 시)<br/>枕海樓臺倚半空 分明畫出水精宮 天垂日月簷楹外 池注湖山几席中 玉燕低飛紅杏雨 金鶯靜囀綠楊風 鑾輿早晚來停蹕 試問前村雪鬢翁 ({{TagPerson|[[김극기]]}} 시)<br/>岧嶢雙闕枕江濱 清夜都無一點塞 風送客帆雲片片 露凝宮瓦玉鱗鱗 綠楊閉戸八九屋 明月捲簾三四人 縹渺蓬萊在何許 夢蘭黃鳥轉青春 ({{TagPerson|[[정지상]]}} 시)<br/>玉漏丁東月掛空 一天春興牧丹風 小堂捲箔春波綠 人在蓬萊縹渺中 (같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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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27일 (일) 17:41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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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문종왕과 장원정 창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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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원제목 高麗 文宗王과 長源亭 創構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6 발행기관 진단학회
저자 이병도 역자 집필일자 게재연월 1936년11월
시작쪽 148쪽 종료쪽 156쪽 전체쪽 009쪽 연재여부 단독 범주 논문 분야 역사학



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내용을 입력합니다.@




목차















본문


본문1: 1


고려의 문종인물(제11대)은 제6대 성종인물과 한가지, 아니 그 이상으로 태조인물의 유업을 수성한 영민하고 총명한 임금으로서, 재위 37년간 안으로 민정에 힘쓰고 관제를 혁정(革整)하고 인재를 등용하고 유불을 숭장하여 치적이 크게 늘어나고, 또한 바깥으로 송(宋), 요(遼) 각국과의 교통도 빈삭(頻數)하여 제반 문물에 있어 진보 발달을 이룬―말하자면 고려의 문화는 이때 이르러 최고의 수준에 이른 관(觀)이 있거니와, 동시대의 사상 및 신앙의 일 특징을 지어가지고 있던 지리도참의 설도 일반 문운(文運)의 진전과 보조를 같이하여 이때 상당한 걸음을 걷고 있었으며 따라 종종의 비기 도서를 이용 혹은 조작하는 이 방면의 전문가들이 나타나 각각 기이한 언설로 신총(宸聰)을 어지럽게 한 일이 있었다. 최자인물(崔滋)의 보한집(補閑集)서적(상권)을 보면 문종인물조의 유신 이의인물(李顗)에 관한 기사에 "初顗在諫垣 時 陰陽者流 各執圖讖 互言裨補 上間之 顗封曰 陰陽本乎大易 易不言地理裨補 後世詭誕者曲論之 以至成 文字 惑衆人 況圖讚荒虛怖妄 一無可取 上心然之”라고 한 것이 있다. 의(顗)는 곧 문종인물의 왕후 아버지인 이자연(李子淵)인물의 세 번째 아들이요 예종인물조의 유명한 청평산인(淸平山人) 이자현(李資玄)인물의 아버지로 유불에 겸통한 학자였고 문종인물 23년에 그가 춘주(지금의 춘천) 도(道) 감창사(監倉使)로 있었을 때에 같은 주 청평산의 승경(勝境)을 사랑하여 보현원(普賢院)공간(훗날 그 아들 새현(賽玄)이 그곳에 은거하여 문주원(文殊院)이라 개칭함)이란 사원을 둔 일도 있거니와금석총람서적 상, 춘주 문주원 중조비(重條碑) 위 기사에 보이는 사실은 물론 문종인물 시대에 속한 것일지며 동시에 ‘상(上)’이라 한 것은 문종인물을 지칭한 말일 것이니, 이는 그때의 음양도참가들의 활약이 어떠하였던 것과 또 그들에 대한―이의와 같은―유자(儒者)들의 태도가 어떠하였던 것을 보여주는 자못 귀중한 사료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단 거기 이의의 지리도참 탄망설(誕妄說)에 대하여 “上心然之”라고 한 것은 왕의 그 당시의(일시적) 기분과 태도를 표현한 말에 불과한 것이요 결코 왕의 종시일관한 심리의 표시는 아니다. 문종인물은 사상 신앙의 사람으로 태조인물 및 다른 왕과 같이 부도음양 지리도참의 설을 혹신함이 심상치 아니하였던 까닭이다. 예종인물조의 명신(名臣) 오연총(吳延寵)인물예종인물을 간(諫)하는 말 가운데 “以文宗明睿猶惑術數”라고(여사(麗史)서적 오연총전) 함과 같이, 문종인물은 영민하고 총명한 군주로서 비과학적 비실리적 술수(지리도참)사상의 지배를 받는 임금의 하나이다( 문종인물의 법력 지력에 대한 신념은 태조인물 이래의 전통적 사상이라고 할 수 있지만, 또한 당시 부도음양가의 설에 자극 영향된 바도 많았던 것이다) 법력에 의하여 국가의 복리를 증진하려 하여 같은 왕 10년에 성남 덕수현(德水縣)의 땅지금의 개풍군 진봉면 흥왕리를 복(卜)하여 흥왕사(興王寺)란 대가람(大伽藍)을 창기한 것은 저명한 사실이지만, 또한 일방으로(도참설에 의하여) 왕성한 지력을 빌어 국가의 기업(基業)을 연장하려 하여 곳곳에 땅을 상복(相卜)하여 신이경(新離京), 신이궁(新離宮)을 경영하고 때를 따라 순주(巡住)를 행한 일이 있었다. 이 글에서 말하려는 병악(餅岳)공간장원정(長源亭)공간을 비롯하여 남경공간(지금의 경성공간)의 설치 및 그 신궁, 서경공간(지금의 평양공간)의 서경기(西京畿) 설치 및 그 좌우 궐(闕)은 다 문종인물왕 때에 된 연기경궐(延基京闕)로서 이후 역대 모든 왕의 이 방면에의 건궐(建闕)·순주(巡住)·기타 시설의 선구를 지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문종인물의 남경궁 서경기 및 서경 좌우 궐에 대하여는 이미 다른 글에 상술한 바가 있으므로 여기에는 다시 논의하지 아니하고 오직 장원정에 대하여 창구의 사정 및 그 지리 유지(遺址) 등에 대하여 조사 고찰한 바를 논술하려 한다.
쪽수▶P148-1高麗의 文宗(第十日代)은 第六代 成宗과 한가지, 아니 그 以上으로 太祖의 遣業을 守成한 英明의 主로서, 在位 三十七年間 內로 民政에 힘쓰고 官制를 革整하고 人才를 登用하고 儒佛을 崇獎하야 治績이 크게 늘어나고, 또한 外로 宋遼各國과의 交通도 頻數하야 諸般 文物에 있어 進步 發達을 致한―말하자면 高麗의 文化는 이때에 이르러 最高의 域에 達한 觀이 있거니와, 同時代의 思想 及 信仰의 一特徵을 지어가지고 있든 地理圖讖의 說도 一般 文運의 進展과 步調를 같이하여 이때에 相當한 거름을 것고 있었으며 따라 種種의 秘記 圖書를 利用 혹은 造作하는 이 方面의 專門家들이 出하야 各各 奇異한 言說로 宸聰을 어지럽게 한 일이 있었다. 崔滋의 補閑集(卷上)을 보면 文宗朝의 儒臣 李顗에 關한 記事에 「初顗在諫垣 時 陰陽者流 各執圖讖 互言裨補 上間之 顗封曰 陰陽本乎大易 易不言地理裨補 後世詭誕者曲論之 以至成 文字 惑衆人 況圖讚荒虛怖妄 一無可取 上心然之」라고 한 것이 있다. 顗는 곧 文宗의 后父인 李子淵의 第三子요 睿宗朝의 有名한 淸平山人 李資玄의 父로 儒佛에 兼通한 學者이었고 文宗 二十三年에 그가 春州(今春川) 道監倉使로 있었을 때에 同州 淸平山의 勝境을 사랑하여 普賢院(後에 其子 賽玄이 그곳에 隱居하야 文殊院이라 改稱함)이란 寺院을 둔 일도 있거니와(金石總覽上, 春川文殊院重條碑) 右記事에 보이는 事實은 勿論 文宗 時代에 屬한 것일지며 同▶P149-1時에 「上」이라 한 것은 文宗을 指稱한 말일 것이니, 이는 그때의 陰陽圖讖家들의 活躍이 어떠하였든 거와 또 그들에 對한―李顗와 같은―儒者들의 態度가 어떠하였든 것을 보여주는 자못 貴重한 史料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但 거기 李顗의 地理圖讖誕妄說에 對하야 「上心然之」라고 한 것은 王의 그 當時의(一時的) 氣分과 態度를 表現한 말에 不過한 것이요 決코 王의 終始一貫한 心理의 表示는 아니다. 文宗은 思想 信仰의 人으로 太祖 및 其他의 王과 같이 浮屠陰陽地理圖讚의 說을 惑信함이 尋常치 아니하였든 所以다. 睿宗朝의 名臣 吳延寵의 睿宗을 諫하는 말 가운데 「以文宗明睿猶惑術數」라고 (麗史 吳延寵傳)함과 같이, 文宗은 英明의 主로써 非科學的 非實利的 術數(地理圖讖)思想의 支配를 받는 님금의 하나이다(文宗의 法力 地力에 對한 信念은 太祖 以來의 傳統的 思想이라고 할 수 있지만, 또한 當時 浮屠陰陽家의 說에 刺戟 影響된 바도 만헛든 것이다) 法力에 依하야 國家의 福利를 增進하려 하야 同王 十年에 城南 德水縣의 地(今開豐郡 進鳳面 興旺里)를 卜하야 興王寺란 大伽藍을 創起한 것은 著名한 事實이지만, 또한 一方으로(圖讖說에 依하야) 旺盛한 地力을 빌어 國家의 基業을 延長하려 하야 處處에 地를 相卜하야 新離京 新離宮을 經營하고 때를 따라 巡住를 行한 일이 있었다. 本稿에 말하려는 餅岳의 長源亭을 비롯하야 南京(今京城)의 設置 及 其新宮, 西京(今平壤)의 西京畿 設置 및 그 左右闕은 다 文宗王 時에 된 延基京闕로서 以後 歷代 諸王의 이 方面에의 建闕·巡住·其他 施設의 先驅를 지었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文宗의 南京宮 西京畿 及 西京 左右闕에 就하여는 이미 他稿에 詳述한 바가 있음으로 여기에는 再論치 아니하고 오즉 長源亭에 就하야 創構의 事情 및 그 地理 遺址 等에 對하야 調査 考察한 바를 論述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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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정의 창구에 관하여는 고려사서적 문종세가(文宗世家) 10조 끝에는 오직 “是歲作長源亭於西江餅岳之南”이라고만 쓰여 있으나, 같은 책서적 지리지 1(地理志 1), 정주(해풍군)조를 보면 “有白馬山·長源亭”이란 구절 아래에 다음의 기재(記載)가 분주(分註)되어 있다.
쪽수▶P149-2長源亭의 創構에 關하여는 高麗史 文宗世家 十年條 끝▶P150-1에는 單히 「是歲作長源亭於西江餅岳之南」이라고만 쓰여 있으나, 同史 地理志一, 貞州(海豊郡)條를 보면 「有白馬山·長源亭」이란 句節 下에 다음의 記載가 分註되어 있다

道詵松嶽明堂記云 西江邊 有君子御馬明堂之地 自太祖統一丙申之歲至百二十年 就此創構 國業延長 文宗命太史令金宗允等相地 構之於西江餅嶽之南

쪽수▶P150-2

道詵松嶽明堂記云 西江邊 有君子御馬明堂之地 自太祖統一丙申之歲至百二十年 就此創構 國業延長 文宗命太史令金宗允等相地 構之於西江餅嶽之南

이에 의하면 장원정의 창구는 문종인물 10년―바로 흥왕사 시역(始役)의 해에 도선인물(道詵) 송악명당기서적(松嶽明堂記)란 비기의 설에 의하여 연기(緣起)된 것을 알 수 있으니 다시 자세히 말하면 그 비기에 서강(지금의 예성강)변에 ‘군자어마(君子御馬)’ 형의 명당지가 있으니 태조인물의 반도 통일의 해인 병신태조인물 즉위 19년 서기 후 936년으로부터 2회갑 즉 120년 되는 병신세문종인물 10년, 서기 후 1056년에 이르러 이곳에 이궁(離宮)을 창기하면 국업이 연장하리라는 설에 인하여, 문종인물은 그 지시한 년수에 맞춰 10년에 태사령(太史令) 김종윤(金宗允)인물 등을 명하여 땅을 상택(相擇)케 하여 서강 지금의 예성강변에 있는 병악(餅岳) 남쪽에 장원정을 창구하였다는 것이다. 소위 도선인물 송악명당기서적는 물론 당시 세간에 유행하든 동방비기 중의 하나였을 것이나, 그것이 과연 표시한 바와 같이 나말의 부도음양가 도선인물의 저술인가는 일대 의문이다. 도선의 이름을 쓴 비기 류는 뒤에도 자조 나타나지만 원래 비기 참서 따위의 책에는 그 방면 혹은 그 방면 관계의 유명인의 이름을 가차(假借)하여 붙이는 것이 보통인즉, 그 진정한 저작자를 알지 못함이 도리어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이 책으로 말하더라도 표방(標榜)은 비록 나말 도선인물의 저술과 같이 하였지만, 실상은 어떤 때 어떤 사람에 의하여 저작된 책인지 알 도리가 없는 것이다. 단 문종인물 이전에 된 것인 듯함은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으나 위의 비기 중 “自太祖統一丙申之歲至百二十年云云”의 설은 특히 문종인물 시대와 상관됨이 큼으로 이 구절만은 당시의 도참가에 의하여 첨가 부연된 것인 듯하다. 일보를 내켜 생각하면 그것은 이때 상지(相地)의 명을 받던 태사령천문, 지리, 역수, 측후 등을 관장함 김종윤인물 등이 한 일인지도 모르며, 또 그 상지의 명이 있게 된 것은 역시 그들의 앞서 말한 송악명당기서적의 글을 이끌어 신이궁의 창건을 주청(奏請)하였던 까닭이 아닌가 한다. 그렇다고 하면 이 주청과 상지의 명은 이해(10년) 어느 달(●●●)의 일이었는지? 이에 관한 분명한 기재가 없음으로 확실히는 알 수 없으나, 고려사서적 문종세가 10년 9월조에 왕의 군신에게 내린 제(制)에 “近覽日官所奏(●●●●) 數有天變 此蓋寡人德薄 政令不一所致也 鰓鰓以懼 夙夜未遑 自今月 避正殿 減常膳 庶答天譴 凡百卿士 各愼爾位 直言予過無所隱”이란 것이 있음을 보면 여기 ‘일관(日官)’은 역시 태사령 김종윤인물 등의 가리킴인 듯하며―그 소주(所奏)의 천변(天變)이 어떠한 것들인지는 (天文五行兩志俱不見) 구체적 기재가 없어 자세치 못하나―일관들이 천변을 주상(奏上)할 때에 피흉취길(避凶就吉) 비보연기(裨補延基)의 의미로 그러한 상지 창궁의 주청을 하고 문종인물은 그리하여 일방으로 위와 같은 책기구언(責己求言)의 제(制)를 내리는 동시에 타방으로 상지의 명을 내리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어떻든 이때의 천변과 신궁 경영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할 수 없으며, 이 추리가 허용된다면 상지의 주청과 왕명은 이해 9월에 있었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건 그렇다 하고 김종윤인물 등의 상지의 결과는 서강 병악 남쪽의 땅을 비기의 소위 “君子御馬明堂之地”로 인정하여 마침내 그곳에 장원정이란 소이궁(小離宮)을 창구하게 되었거니와, 정의 건창은 이와 같이 전혀 도참설에 좇아 그곳의 지력을 빌어 국업을 시간적으로 무궁히 연장하려는 기원에 불과함이었다. ‘장원(長源)’이란 정의 이름도 필경 그러한 기원의 의미에서 명명된 것일 것이다. 정의 건창 후 왕의 행주(幸住)를 실시하여, 기록상으로는 같은 왕인물 14년 2월, 17년 10월, 21년 3월, 23년 5월, 35년 3월 등 5회의 행행(行幸)이 보이나 그것은 기록의 불비인 듯하고 실제에는 그 이상의 횟수가 있었으리라고 믿는다. 23년 5월 행주(幸住) 시에는 정하연(亭下淵) 가운데에서 서문(瑞文)의 검을 얻어 왕은 이로써 문신에게 명하여(축하의 뜻으로) 가시(謌詩)를 지어 올리도록 하게 했다 한다.(문종세가 23년 5월조)
쪽수▶P150-3이에 依하면 長源亭의 創構는 文宗十年―바루 興王寺 始役의 歲에 道詵 松嶽明堂記란 秘記의 所說에 依하야 緣起된 것을 알 수 있으니 다시 仔細히 말하면 그 秘記에 西江(今禮成江)邊에 「君子御馬」 形의 明堂地가 있으니 太祖의 半島統一의 歲인 丙申(太祖 即位 十九年 西紀後 九三六年)으로부터 二回甲 即 百二十年 되는 丙申歲(文宗 十年, 西紀後 一〇五六年)에 이르러 이곳에 離宮을 創起하면 國業이 延長하리라는 說에 因하야, 文宗은 그 指示한 年數에 應하야 十年에 太史令 金宗允 等을 命하야 地를 相擇케 하야 西江 즉금의 禮成江邊에 있는 餅岳南에 長源亭을 創構하였다는 것이다. 所謂 道詵松嶽明堂記는 勿論 當時 世間에 流行하든 東方秘記 中의 하나이었을 것이나, 그것이 果然 表示한 바와 같이 羅末의 浮屠陰陽家 道詵의 所著인가는 一大 疑問이다. 道詵의 名을 冠한 秘記類는 後에도 자조 出來하지만 元來 秘記 讖書 따위의 書에는 그 方面 혹은 그 方面 關係의 名人의 이름을 假借하야 붙이는 것이 普通인즉, 그 眞正한 著作者를 아지 못함이 도리어 當然한 일이다. 그러므로 此書로 말하더라도 標榜은 비록 羅末 道詵의 所著와 같이 하였지만, 실상은 何時 何人에 依하야 著作된 書인지 알 道理가 없는 것이다. 但 文宗 以前에 된 것인 듯함은 거의 無疑하나 右 秘記 中 「自太祖統一丙申之歲至百二十年云云」의 說은 特히 文宗 時代와 相關됨이 큼으로 此 句節만은 當時의 圖讖家에 依하야 添加 敷演된 것인 듯하다. 一步를 내켜 생각하면 그것은 이때 相地의 命을 받든 太史令(天文 地理 曆數 測候 等을 掌함) 金宗允 等의 所爲인지도 모르며, 또 그 相地의 命이 있게 된 것은 역시 그들의 前▶P151-1記 松嶽明堂記의 文을 익글어 新離宮의 創建을 奏請하였던 까닭이 아닌가 한다. 그러라고 하면 이 奏請과 相地의 命은 이해(十年) 어느 달(●●●)의 일이었는지? 이에 關한 分明한 記載가 없음으로 確實히는 알 수 없으나, 高麗史 文宗 世家 十年 九月條에 王의 群臣에게 下한 制에 「近覽日官所奏(●●●●) 數有天變 此蓋寡人德薄 政令不一所致也 鰓鰓以懼 夙夜未遑 自今月 避正殿 減常膳 庶答天譴 凡百卿士 各愼爾位 直言予過無所隱 」이란 것이 있음을 보면 여기 「日官」은 역시 太史令 金宗允 等의 謂인 듯하며―그 所奏의 天變이 어떠한 것들인지는 (天文五行兩志俱不見) 具體的 記載가 없어 仔細치 못하나―日官들이 天變을 奏上할 때에 避凶就吉 裨補延基의 意味로 그러한 相地創宮의 奏請을 하고 文宗은 因하야 一方으로 如上의 責己求言의 制를 下하는 同時에 他方으로 相地의 命을 내리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어떠튼 이때의 天變과 新宮 經營과는 아무 關係가 없다고 할 수 없으며, 이 推理가 許容된다면 相地의 奏請과 王命은 이해 九月에 있었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건 그러타 하고 金宗允 等의 相地의 結果는 西江 餅岳南의 地를 秘記의 所謂 「君子御馬明堂之地」로 認定하야 마침내 그곳에 長源亭이란 小離宮을 創構하게 되였거니와, 亭의 建創은 이와 같이 全혀 圖讖說에 좇아 그곳의 地力을 빌어 國業을 時間的으로 無窮히 延長하려는 祈願에 不過함이었다. 「長源」이란 亭名도 畢竟 그러한 祈願의 意味에서 命名된 것일 것이다. 亭의 建創後 王의 幸住를 試하야, 記錄上으로는 同王 十四年 二月、十七年 十月、二十一年 三月、二十三年 五月、三十五年 三月 等 五回의 行幸이 보이나 그것은 記錄의 不備인 듯하고 實際에는 그 以上의 回數가 있었으리라고 믿는다. 二十三年 五月 幸住 時에는 亭下淵 中에서 瑞文의 검을 얻어 王은 일로써 文臣에게 命하야 (祝賀의 뜻으로) 謌詩를 製進하게 하였다 한다.(文宗世家二十三年五月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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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병악 및 장원정의 소재는 지금의 어느 곳이며? 이를 포함한 일대의 풍수적 지리는 어떠한가?를 다음에 논구하려 한다. 양자의 소재가 서강공간(지금의 예성강공간 하류)변인 옛 해풍군공간(조선시대의 풍덕군공간) 안에 속함은 앞서 인용한 여사서적 지리지문에 보이는 바와 같거니와 이것만으로는 좀 막연하여 그 분명한 소재를 찾기 어렵고, 동국여지승람서적(13권) 풍덕군 고적조를 보면 거기에는 “長源亭在郡西二十五里”라 하고 그 밑에 여지서적(麗志)의(앞의 책) 주기(註記)와 같은 글이 연속되어 있다. 단 산천조에는 병악의 기사가 보이지 아니하나 그것은 장원정의 위치로써 짐작할 수 있으니, 양자의 소재는 옛 풍덕읍인 지금 이름 개풍군 대성면 풍덕리에서 서쪽 25리 부근에서 구하지 않으면 아니 되겠다. 육지측량부의 5만분의 1 지도에 의하여 이 거리에 상당한 곳의 고산을 구하면 개풍군 광덕면 고척리 서쪽에 높이 1170미터 되는 산이 있는데 이름은 적혀있지 아니하나 이를 고산자(古山子) 김정호인물의 대동여지도 및 그 청구선표도에 대조하여 보면 어병산(御屏山)공간임을 알겠고, 또 거기서 쪽 한강 하류에 직면한 유정동(柳井洞)에는 전좌산(殿座山)공간이란 높이 76미터 되는 작은 산이 있다. 병악은 이 방면의 저명한 산이므로 그것이 지금의 어병산에 틀림없음을 쉽게 알 수 있고 동시에 ‘어병’은 병악의 후명(後名)인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어병’의 이름이 어느 때에 병악을 대신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이름이 지가서에서 나온 것만은 분명하니 중전관판(重鐫官版)(명판(明板)) 지리천기회원(地理天機會元)서적이란 지가총서 가운데 소수(所收)된 실천기사격서적(泄天機砂格)(송나라 사람 료우인물(廖瑀) 지음)에 御屛(●●)本是品字土”란 말과 구성정변용격가(九星正變龍格歌)(같은 책)에 “品字方峯號御屛(●●)이란 말이 보인다. 즉 품자(品字) 형의 산을 어병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병악은 그 형체가 품자와 같고 또 병(餅)과 병(屛)이 음이 상동함으로 후세에 어병산이란 이름을 얻게 된 것이 아닌가. 나는 이 일대의 지리적 형세와 장원정의 유지를 실지로 시찰하기 위하여 연전에 수회의 답사를 행한 일이 있었다. 리 사람은 지금도 그 산을 어병산이라고 부르거니와, 이를 전면(남쪽)에서 바라볼 때는 다소 품자 형에 가까워 어병이란 이름을 얻음에 그러할 듯도 하며 그 수려 장중한 품은 주위 다른 산에 빼(抜)여 있다. 다시 측면에서 이를 보면 연봉(連峯)이 언앙굴복(偃仰崛伏)하여 소동파인물의 소위 “橫看成嶺側成峯·遠近高低各不同”(소문충공시집서적(蘇文忠公詩集) 23권, 제서림벽(題西林壁))의 형태를 지어가지고 있으며 또 지리(풍수)가의 소위 “頭有高低皆可貴”의 천마체(료우인물(廖瑀)의 「실천기사격서적」 참조)를 이루어 있다(부도 제1 참조). 송악명당기서적“君子御馬明堂”이란 것은 대개 이 측면에서 본 천마체를 형용하는 말인 것 같고 후세에 어병산의 이름을 얻은 것은 전면에서 본 형태에서 말미암은 것 같으니 풍수가란 대개 자기의 보는 바에 따라 종종의 물형을 산수에 붙이는 것이 보통이다. 산복(山腹)에 발(足)을 멈추어 주위의 원경을 살피면 서쪽에는 예성강이 흘러 한강 하류에 들어가고 동쪽에는 역시 한강과 통하는 황강포(黃江浦)가 놓여 있고 남쪽으로는 망망한 평야와 광활한 한강을 격하여 강화도공간의 군봉(群峯)을 대하여 있으며 다시 이 산(어병산)의 좌우 지세를 살펴보면 그 우변 한 줄기(●●●●●)는 서남쪽으로 달아나 조발동 장추동의 밭길을 천도(穿渡)하여 잡아당긴 활의 모양을 만들면서 점기점고(漸起漸高)의 세로 당두포(堂頭浦)의 산(높이 293미터)을 일으키어 강류를 거슬렀고 좌변 한 줄기(●●●●●)는 충실한 기세로 동남쪽으로 달아나 덕현리 용산동 황강리를 지나 다시 서쪽으로 꺾어 유정동의 전좌산(높이 76미터)을 일으키는 동시에 북쪽으로 본산을 돌아다보는, 풍수가의 소위 ‘回龍顧祖’의 격을 지어있다(지도 참조). 장원정의 유지는 어병산 아래에서는 구하지 못하고 같은 왼쪽 줄기의 종점이라고 할 만한, 이 전좌산 기슭에서 발견하게 되었으니 이곳은 여사서적“構之於西江餅岳之南”이란 것과 여지승람서적(권13)의 “長源亭在郡(豐德)西二十五里”란 것에 상당하며 더욱 ‘전좌’란 산 이름과 승람(권13) 같은 군 사묘조에 “朱雀神堂 俗稱堂頭山在古長源亭西南二里海邊(●●●●●●●●●●●●●●)이라 함에 의하여 분명하다(지도 참조). 당두포 산 위에는 지금에도 신당이 있어 때때로 무당들에 의하여 기도 축제를 행하거니와 그곳을 옛날에 주작신당(●●●●)(朱雀神堂)이라 한 것은 같은 산의 위치가 장원
병악 및 장원정 부근도

정 서남쪽에 당하여 주작산(남산)의 임무를 대신하였던 까닭인가 한다.(부도 제3 참조) 이 당두산공간이야말로 장원정의 풍수지리상 중요한 지위를 가지고 있는 곳이니, 전좌산이 비록 어병산(병악)에서 갈라져 나와 회룡고조(回龍顧祖)의 세를 지었을
제1도 전좌산 위에서 멀리 어병산을 바라봄

제2도 장원정지의 일부

제3도 전좌산 위에서 멀리 당두산을 바라봄

제4도 장원정지 좌측 토성의 일부

지라도 만일 명당을 회포(懐抱)하고 강류를 역지(逆止)하는 듯한 당두산의 굴기(崛起)가 없었더라면 이곳의 풍수지리는 큰 결함이 생겨 무용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장원정 상지의 명을 받은 태사령 김종윤인물 등이 명당을 전좌산 기슭에 구한 의의의 일단을 이에 의하여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곳은 비단 풍수지리상으로서뿐만 아니라 자연의 풍경상으로도 한 Chosen된 곳이라고 볼 수 있으니, 눈앞에 흐르는 왕양(汪洋)한 강류와 이우를 통하여 오르락내리락하는 점점한 범선과 또 대안(對岸)에 솟은 강화(江華)의 여러 봉만(峯巒)은 모두 시적이요 그림(畵)이다. 상지자의 고려가 이 점에도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쪽수▶P152-1그러면 餅岳 及 長源亭의 所在는 지금의 어느 곳이며? 이를 包含한 一帶의 風水的 地理는 어떠한가?를 다음에 論究하려 한다. 兩者의 所在가 西江(今의 禮成江 下流)邊인 舊 海豊郡(朝鮮時代의 豊德郡) 內에 屬함은 上引한 麗史 地理志文에 보이는 바와 같거니와 이것만으로는 좀 漠然하야 그 分明한 所在를 찾기 어렵고, 東國輿地勝覽(卷十三) 豊德郡 古跡條를 보면 거기에는 「長源亭在郡西二十五里」라 하고 그 밑에 麗志의(前揭한) 註記와 같은 文이 連續되여 있다. 但 山川條에는 餅岳의 記事가 보여있지 아니하나 그것은 長源亭의 位置로써 짐작할 수 있으니, 兩者의 所在는 舊豊德邑인 現名 開豐郡 大聖面 豐德里에서 西편 二十五里 附近에 求하지 않으면 아니 되겠다. 陸地測量部의 五萬分之一地圖에 依하야 이 距里에 相當한 곳의 高山을 求하면 開豐郡 光德面 高尺里 西쪽에 高一一七, 〇米突 되는 山이 있는데 이름은 적혀있지 아니하나 이를 古山子 金正浩의 大東輿地圖 및 그 靑邱線表圖에 對照하여 보면 御屏山임을 알겠고, 또 거기서 南쪽 漢江 下流에 直面한 柳井洞에는 殿座山이란 高七六米突 되는 小山이 있다. 餅岳은 이 方面의 著名한 山임으로 그것이 지금의 御屛山에 틀림없음을 容易히 알 수 있고 同時에 「御屛」은 餅岳의 後名인것이 無疑하다. 「御屛」의 名이 어느 때에 餅岳에 代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이름이 地家書에서 나온것만은 分明하니 重鐫官版(明板) 地理天機會元이란 地家總書 中에 所收된 泄天機砂格(宋人廖瑀 著)에 「御屛(●●)本是品字土」란 말과 九星正變龍格歌(同上)에 「品字方峯號御屛(●●)」이란 말이 보인다. 即 品字形의 山을 御屛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餅岳은 그 形體가 品字와 같고 또 餅과 屛이 音相同함으로 後世에 御屛山이란 이름을 얻게 된 것이 아닌가. 나는 이 一帶의 地理的 形勢와 長源亭의 遺址를 實地로 視察하기 僞하여 年前에 數回의 踏査를 行한 일이 있었다. 里人은 지금도 그 山을 御屛山이라고 부르거니와、이를 前面(南)에서 바▶P153-1라 볼 때는 多少 品字形에 가까워 御屛이란 이름을 얻음에 그러할 듯도 하며 그 秀麗壯重한 품은 周圍 諸山에 빼(抜)여 있다. 다시 側面에서 이를 보면 連峯이 偃仰崛伏하야 蘇東坡의 所謂 「橫看成嶺側成峯·遠近高低各不同」(蘇文忠公詩集 卷二十三, 題西林壁)의 形態를 지어가지고 있으며 또 地理(風水)家의 所謂 「頭有高低皆可貴」의 天馬體(瘳瑀의 「泄天機砂格」 參照)를 이루어 있다(附圖第一參照). 松嶽明堂記의 「君子御馬明堂」이란 것은 대개 이 側面에서 본 天馬體를 容形한 말인 것 같고 後世에 御屛山의 名을 얻은 것은 前面에서 본 形態에서 말미암은 것 같으니 風水家란 대개 自己의 보는 바에 따라 種種의 物形을 山水에 附會함이 普通이다. 山腹에 발(足)을 멈추어 周圍의 遠景을 삺이면 西에는 禮成江이 흘러 漢江 下流에 들어가고 東에는 역시 漢江과 通하는 黃江浦가 노여있고 南으로는 茫茫한 平野와 廣闊한 漢江을 隔하야 江華島의 群峯을 對하여 있으며 다시 此山(御屛山)의 左右 支勢를 삺여보면 그 右邊一支(●●●●)는 西南으로 다라나 早發洞 長秋洞의 田陌을 穿渡하야 彎弓의 形을 作하면서 漸起漸高의 勢로 堂頭浦의 山(高二九、三米)을 일으키어 江流를 逆하였고 左邊一支(●●●●)는 充實한 氣勢로 東南으로 다라나 德峴里 龍山洞 黃江里를 지나 다시 西折하야 柳井洞의 殿座山(高七六米)을 일으키는 同時에 北으로 本山을 回顧하는, 風水家의 所謂 「回龍顧祖」의 格을 지어있다(地圖參照). 長源亭의 遺址는 御屛山 下에서는 求하지 못하고 同山 左支의 終點이라고 할 만한, 이 殿座山麓에서 發見하게 되였으니 이곳은 麗史의 「構之於西江餅岳之南」이란 것과 輿地勝覽(卷十三)의 「長源亭在郡(豐德)西二十五里」란 것에 相當하며 더욱 「殿座」란 山名과 勝覽(卷十三) 同郡 祠廟條에 「朱雀神堂 俗稱堂頭山在古長源亭西南二里海邊(●●●●●●●●●●●●●●)」이라 함에 依하야 分明하다(地圖恭照). 堂頭浦山上에는 지금에도 神堂이 있어 때때로 무당들에 依하야 祈禱祝祭를 行하거니와 그곳을 昔日에 朱雀神堂(●●●●)이라 한 것은 同山의 位置가 長源
▶P154-1
餅岳 及 長源亭 附近圖

亭 西南에 當하야 朱雀山(南山)의 任務를 대신하였든 所以인가 한다.(附圖第三參照) 이 堂頭山이야말로 長源亭의 風水地理上 重要한 地位를 가지고 있는 곳이니, 殿座山이 비록 御屛山(餅岳)에서 分來하야 回龍顧祖의 勢를 지었을
第一圖 殿座山上에서 멀리 御屛山을 望함

第二圖 長源亭址의 一部

第三圖 殿座山上에서 멀리 堂頭山을 望함

第四圖 長源亭址 左側 土城의 一部

▶P155-1지라도 만일 明堂을 懐抱하고 江流를 逆止하는 듯한 堂頭山의 崛起가 없었드러면 이곳의 風水地理는 大缺陷을 生하야 無用의 것이 되고 말 것이다. 長源亭 相地의 命을 받은 太史令 金宗允 等이 明堂을 殿座山麓에 求한 意義의 一端을 이에 依하야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곳은 비단 風水地理上으로서뿐만 아니라 自然의 風景上으로도 한 Chosen된 곳이라고 볼 수 있으니, 眼前에 흘르는 汪洋한 江流와 이우를 通하야 오리락 나리락 하는 點點한 帆船과 또 對岸에 솟은 江華의 여러 峯巒은 모다 詩的이요 그림(畵)이다. 相地者의 考慮가 이 點에도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궁터는 전좌산 남쪽 기슭에 있어 임좌병향(壬坐丙向)의 3, 4층대만은 알 수 있으나 대의 모양이 워낙 능이(陵夷)하여 옛날의 면모를 여실히 알기는 어렵게 되었으며 대 위에는 임목(林木)이 들쭉날쭉하고 누누한 분총(墳塚)과 고와(古瓦)의 파편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 창상(滄桑)의 변화를 말하고 있다(부도 제2 참조). 예종인물, 인종인물 때의 문신 정지상인물의 유명한 장원정 시(詩)에 “岧嶢雙闕枕江濱”(아래를 보라)이라 한 것을 보면 전각이 오른쪽 왼쪽 두 편에 나란히 있었던 모양이며, 지금 능이해진 대지(臺地)로 보더라도 동서의 폭이 비교적 넓은 것은 그 까닭인가 한다. 궁대를 중심으로 하여 주위에 둘렀던 토성의 형적은 오히려 옛 그림자를 부하여 주니(부도 제4 참조) 동서의 직경은 약 200미터가량이나 된다. 전좌산 꼭대기에도 타원형의 토루(土壘)가 둘러 있는데 이것은 후세에 쌓아 올린 것으로, 거민(居民)들은 이르되 지나간 갑오 동학란 때의 민보(民堡) 옛 터라고 한다.
쪽수▶P155-2宮址는 殿座山 南麓에 있어 壬坐 丙向의 三四層臺만은 認할 수 있으나 臺形이 원악 陵夷하야 昔日의 面貌를 如實히 알기는 어렵게 되었으며 臺上에는 林木이 參差하고 壘壘한 墳塚과 古瓦의 破片이 여긔 저긔 散在하야 滄桑의 變을 말하고 있다(附圖第二參照). 睿宗 仁宗 時의 文臣 鄭知常의 有名한 長源亭詩에 「岧嶢雙闕枕江濱」(見下)이라 한 것을 보면 殿閣이 左右두 편에 나란이 있었던 모양이며, 지금 陵夷해진 臺地로 보더라도 東西의 幅이 比較的 넓은것은 그 까닭인가 한다. 宮臺를 中心으로 하야 周圍에 둘럿든 土城의 形跡은 오히려 옛그림자를 傅하여주니(附圖第四參照) 東西의 直徑은 約二百米突가량이나 된다. 殿座山頂에도 楕圓形의 土壘가 둘려있는데 이것은 後世의 所築으로, 居民들은 이르되 지나간 甲午 東學亂 時의 民堡舊址라고 한다.
장원정 시(여지승람서적 권13에서)
別館逢人擬謫仙 上樓同望晚江船 吟搜好景勞詩筆 笑得歡情付醉筵 紅葉黃花當此日 綠楊芳草憶前年 只將親意忘時態 忍抱狂吟繼雅篇 薄暮汀邊明蟹火 夕陽村外起人煙 溟濛海氣風驅去 月上秋霄照碧天 (고려 예종 화 곽여인물 시)
輦路東風我獨先 馬頭春色入江天 日暄野壠新年草 水繞離宮薄暮烟 微雨鳥聲挑菜地 綠波人語釣魚船 嗚鑾已近芳菲促 不待清明必賜筳 (곽여인물 시)
枕海樓臺倚半空 分明畫出水精宮 天垂日月簷楹外 池注湖山几席中 玉燕低飛紅杏雨 金鶯靜囀綠楊風 鑾輿早晚來停蹕 試問前村雪鬢翁 (김극기인물 시)
岧嶢雙闕枕江濱 清夜都無一點塞 風送客帆雲片片 露凝宮瓦玉鱗鱗 綠楊閉戸八九屋 明月捲簾三四人 縹渺蓬萊在何許 夢蘭黃鳥轉青春 (정지상인물 시)
玉漏丁東月掛空 一天春興牧丹風 小堂捲箔春波綠 人在蓬萊縹渺中 (같은 글)
쪽수▶P155-3長源亭詩(輿地勝覽卷十三所收)
別館逢人擬謫仙 上樓同望晚江船 吟搜好景勞詩筆 笑得歡情付醉筵 紅葉黃花當此日 綠楊芳草憶前年 只將親意忘時態 忍抱狂吟繼雅篇 薄暮汀邊明蟹火 夕陽村外起人煙 溟濛海氣風驅去 月上秋霄照碧天 (高麗 睿宗和郭輿詩)
▶P156-1輦路東風我獨先 馬頭春色入江天 日暄野壠新年草 水繞離宮薄暮烟 微雨鳥聲挑菜地 綠波人語釣魚船 嗚鑾已近芳菲促 不待清明必賜筳 (郭輿詩)
枕海樓臺倚半空 分明畫出水精宮 天垂日月簷楹外 池注湖山几席中 玉燕低飛紅杏雨 金鶯靜囀綠楊風 鑾輿早晚來停蹕 試問前村雪鬢翁 (金克己詩)
岧嶢雙闕枕江濱 清夜都無一點塞 風送客帆雲片片 露凝宮瓦玉鱗鱗 綠楊閉戸八九屋 明月捲簾三四人 縹渺蓬萊在何許 夢蘭黃鳥轉青春 (鄭知常詩)
玉漏丁東月掛空 一天春興牧丹風 小堂捲箔春波綠 人在蓬萊縹渺中 (同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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