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령출"의 두 판 사이의 차이

North Korea Humanities

(TripleData)
 
(사용자 2명의 중간 판 2개는 보이지 않습니다)
1번째 줄: 1번째 줄:
 +
{{글상자|
 +
|내용=<center><big>'''👩🏻‍🏫본 문서는 서울대학교 " [[:분류:2024-1 BigData(SNU)|24-1 미디어위키를 활용한 역사 데이터 편찬]]" 수강생 [[박정현(SNU2024)]]이 작성했습니다.'''</big></center>
 +
}}
 
<font face="함초롬돋움">{{버튼클릭|[[:분류:Person|인물(Person) 목록으로 이동하기]]}}
 
<font face="함초롬돋움">{{버튼클릭|[[:분류:Person|인물(Person) 목록으로 이동하기]]}}
 
----
 
----
39번째 줄: 42번째 줄:
 
==='''월북 생활'''===
 
==='''월북 생활'''===
 
{{글상자|  
 
{{글상자|  
|내용= 그는 해방후 1948년에 월북하여 많은 활동들을 펼쳤다. 그는 친일과 북한을 미화하는 내용의 희극을 많이 남긴 것으로 유명하며, 극작가로는 1944년 <승리에의 길>이라는 이름의 각본을 썼다.<ref>[http://www.nks.ac.kr/Word/View.aspx?id=1976= 조령출 (Cho Ryongchul)], 『20세기북한예술문화사전』<html><online style="color:purple">, 북한대학원대학교. </ref> 그는 해방 이후 좌익 진영인 조선연극건설본부 극작부 집행위원, 조선연극동맹 부위원장을 맡았고, 1946~1947년에는 각각 제1회, 제2회 ‘3·1기념 연극대회’ 참가작 「독립군」(나웅 연출), 「위대한 사랑」(안영일 연출)을 공연했다.<ref>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4685= 조명암 (趙鳴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ml><online style="color:purple">, 한국학중앙연구원.<sup>online</sup></online></html>, 光明日报社.</ref> 그는 1993년 사망할 때까지 국립예술극장, 조선작가동맹 작가, 국립영화문화창작사 주필, 국립민족예술극장 총장, 교육문화성 부상, 조선문학예술총동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등으로 활동했으며, 김일성상, 조국통일상 등을 받았다. <ref>조정훈, [https://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6117 '신라의 달밤' 월북작가 조령출.."민족이 아는 작가"], 『북한소식』,  2016.04.05. <html><online style="color:purple">『통일뉴스』<sup>online</sup></online></html>, 통일뉴스.</ref>
+
|내용= 그는 해방후 1948년에 월북하여 많은 활동들을 펼쳤다. 그는 친일과 북한을 미화하는 내용의 희극을 많이 남긴 것으로 유명하며, 극작가로는 1944년 <승리에의 길>이라는 이름의 각본을 썼다.<ref>[http://www.nks.ac.kr/Word/View.aspx?id=1976= 조령출 (Cho Ryongchul)], 『20세기북한예술문화사전』<html><online style="color:purple">, 북한대학원대학교. </ref> 그는 해방 이후 좌익 진영인 조선연극건설본부 극작부 집행위원, 조선연극동맹 부위원장을 맡았고, 1946~1947년에는 각각 제1회, 제2회 ‘3·1기념 연극대회’ 참가작 「독립군」(나웅 연출), 「위대한 사랑」(안영일 연출)을 공연했다.<ref>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4685= 조명암 (趙鳴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ml><online style="color:purple">, 한국학중앙연구원.<sup>online</sup></online></html>, 光明日报社.</ref> 그는 1993년 사망할 때까지 국립예술극장, {{TagGroup|[[조선작가동맹]]}} 작가, 국립영화문화창작사 주필, 국립민족예술극장 총장, 교육문화성 부상, {{TagGroup|[[조선문학예술총동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등으로 활동했으며, 김일성상, 조국통일상 등을 받았다. <ref>조정훈, [https://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6117 '신라의 달밤' 월북작가 조령출.."민족이 아는 작가"], 『북한소식』,  2016.04.05. <html><online style="color:purple">『통일뉴스』<sup>online</sup></online></html>, 통일뉴스.</ref>
 
}}
 
}}
  

2024년 7월 18일 (목) 14:56 기준 최신판

👩🏻‍🏫본 문서는 서울대학교 " 24-1 미디어위키를 활용한 역사 데이터 편찬" 수강생 박정현(SNU2024)이 작성했습니다.


인물(Person) 목록으로 이동하기



조령출(趙靈出)
조령출.png
출처 : [1]
 
한글명 조령출 한자명 趙靈出 영문명 Cho Ryongchul 가나명 이칭
성별 남성 생년 1913년 몰년 1993년 출신지 충청남도 아산 전공 문학(불문학)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대중가요 작사가, 시인, 희곡작가로 활동한 조령출은 1948년 월북 이후 북조선연극동맹의 핵심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국립영화문학창작사 주필, 국립민족예술극장 총장, 교육문화성 부상, 조선문학예술총동맹 부위원장 등을 역임하면서 북한 문학예술 형성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생애


유년기 및 청소년기

충청남도 아산군에서 출생했고, 4세 때 부모와 함께 서울로 이주하여 서당 수준의 보통학교를 다녔다.[1] 1922년 부친의 죽음 이후, 모친과 함께 함경도 안변 에 위치한 석왕사기관에 의탁하여, 석왕사 보통학교기관를 다녔으며, 1924년 건봉사기관로 출가하여‘중련’(重連)이란 법명을 받았다. 1930년 건봉사 장학생으로 서울의 보성고등보통학교기관에 입학했다. 1934년 동아일보기관 신춘문예 ‘신시’ 부문에 「동방의 태양을 쏘라」, ‘유행가’ 부문에 「서울노래」가 가작 당선되며 문단 및 연예계에 데뷔했다.[2]


일본 유학 시절

1935년 보성고등보통학교기관를 졸업하고, 1938년와세다대학기관 문학부(불문학 전공)에 1941년에 졸업했다.[3] 그는 유학 중에도 계속 대중가요 가사를 발표하였는데, 오케 음반, 포리돌, 콜롬비아, 태평 음반 등에 조명암(趙鳴岩), 김운탄(金雲灘), 이가실(李嘉實), 김다인(金茶人) 등의 필명을 두루 사용하며, 본격적인 대중가요 작사가로 활동하게 된다.[4] 1941년에는 악극 「추석제」를 공연했고, 「아들의 혈서」, 「지원병의 어머니」 등 친일 내용이 담긴 군국가요를 작사했으며, 이후 학도병 지원을 옹호하는 희곡을 공연하기도 하였다.[5]


월북 생활

그는 해방후 1948년에 월북하여 많은 활동들을 펼쳤다. 그는 친일과 북한을 미화하는 내용의 희극을 많이 남긴 것으로 유명하며, 극작가로는 1944년 <승리에의 길>이라는 이름의 각본을 썼다.[6] 그는 해방 이후 좌익 진영인 조선연극건설본부 극작부 집행위원, 조선연극동맹 부위원장을 맡았고, 1946~1947년에는 각각 제1회, 제2회 ‘3·1기념 연극대회’ 참가작 「독립군」(나웅 연출), 「위대한 사랑」(안영일 연출)을 공연했다.[7] 그는 1993년 사망할 때까지 국립예술극장, 조선작가동맹단체 작가, 국립영화문화창작사 주필, 국립민족예술극장 총장, 교육문화성 부상, 조선문학예술총동맹단체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등으로 활동했으며, 김일성상, 조국통일상 등을 받았다. [8]





연구


대중가요 작사가로 활동

조령출이 본격적인 대중가요 작사가로 활동하게 된 것은 OK레코드사의 이철(沈煥章)인물 사장을 만나면서부터였다. 그는 오케 음반, 포리돌, 콜롬비아, 태평 음반 등에 조명암(趙鳴岩), 김운탄(金雲灘), 이가실(李嘉實), 김다인(金茶人) 등의 필명을 두루 사용했다. 1930년대부터 1940년대에 작사한 대표적인 대중가요는 「알뜰한 당신」, 「선창」, 「낙화유수」, 「서귀포 칠십리」, 「진주라 천리길」, 「고구려 애상곡」, 「울며 헤진 부산항」, 「어머님 전상서」, 「꿈꾸는 백마강」 등이 있다.[9]


친일 노래 작사

1942년 조선의 지원병이 전쟁터에 나가서 천황의 적자로 목숨을 바친다는 노래인 <아들의 혈서>가 오케(OKEH)레코드사에서 출반되었다. 이외에도 <결사대의 아내>, <혈서지현>, <2500만의 감격> 등을 작사하였다. 극작가로 1944년 <승리에의 길>이라는 친일 연극의 각본을 썼다.[10]


「영광스러운 우리 조국」공연 주도

조령출은 좌익 진영인 조선연극건설본부 극작부 집행위원, 조선연극동맹 부위원장을 맡으며, 1960년에는 작가, 작곡, 안무, 연출, 지휘, 무대미술 등 50여 명의 창조집단과 3천 명의 출연진이 만든 음악무용서사시 「영광스러운 우리 조국」 공연을 주도했고, 이 서사시는 집체창작 혁명가극의 모태가 되었다. [11]





데이터


TripleData

Source (A) Target (B) Relationship
Person: 조령출 Person: 이철 A hasMaster B
Person: 조령출 Institution: 석왕사 보통학교 A graduates B
Person: 조령출 Institution: 보성고등보통학교 A graduates B
Person: 조령출 Institution: 와세다대학 A graduates B
Person: 조령출 Institution: 석왕사 A worksAt B
Person: 조령출 Institution: 건봉사 A worksAt B
Person: 조령출 Group: 조선작가동맹 A isMemberOf B
Person: 조령출 Group: 조선문학예술총동맹 A isMemberOf B



Timeline





Network Graph






참고자원







주석


  1. 조명암 (趙鳴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online, 光明日报社.
  2. 조명암 (趙鳴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online, 光明日报社.
  3. 조명암 (趙鳴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online, 光明日报社.
  4. 조명암 (趙鳴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online, 光明日报社.
  5. 조명암 (趙鳴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online, 光明日报社.
  6. 조령출 (Cho Ryongchul), 『20세기북한예술문화사전』, 북한대학원대학교.
  7. [[#cite_ref-7|↑]]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4685= 조명암 (趙鳴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online, 光明日报社.
  8. 조정훈, '신라의 달밤' 월북작가 조령출.."민족이 아는 작가", 『북한소식』, 2016.04.05. 『통일뉴스』online, 통일뉴스.
  9. 조명암 (趙鳴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online, 光明日报社.
  10. 조령출 (Cho Ryongchul), 『20세기북한예술문화사전』, 북한대학원대학교.
  11. [[#cite_ref-11|↑]]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4685= 조명암 (趙鳴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online, 光明日报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