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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Korea Human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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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현, 「[[https://www.yna.co.kr/view/AKR20180328075700005 일제강점기 개성 신문 '고려시보' 원본 이미지 공개된다]]」, 2018년.3월.28일. <html><online style="color:purple">『연합뉴스』<sup>online</sup></online></html>,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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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기,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4620 진단학회 (震檀學會)]",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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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7월 31일 (수) 00:01 기준 최신판

👩🏻‍🏫본 문서는 서울대학교 " 24-1 미디어위키를 활용한 역사 데이터 편찬" 수강생 홍유경(KNU2024)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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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근(李瑄根)
이선근 사진.jpg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글명 이선근 한자명 李瑄根 영문명 Ri Sen-kon 가나명 이칭 하성(霞城)
성별 생년 1905년 몰년 1983년 출신지 경기도 개풍 전공 와세다대학 사학과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해방 이후 동국대학교 총장,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초대 원장 등을 역임한 교육자. 언론인, 역사학자.
일생 동안 한국근대사에 관하여 집중적으로 연구하여 20여 권의 저서와 500여 편의 논문을 남겼다 [1]


생애


학창시절

1905년 5월 11일 부유한 가정에서 출생했으며, 1917년 아버지가 설립한 쌍빈의숙(雙斌義塾)기관을 나와 1922년에 휘문고등보통학교기관를 졸업하였다. 1919년 3·1독립운동사건에 참가하였다가 붙잡혀 심한 고문을 당하였으나 미성년으로 기소만은 면하였다. [2]


일본 유학

와세다 대학교기관 사학과에에 입학하여 전진한인물, 이하윤인물 등과 함께 비밀결사 '한빛회단체'를 결성하여, 외국문화연구회단체·협동조합체단체·신간회단체 동경지회의 간부직을 맡았다. 1929년 대학을 나온 이후 귀국하여 첫 직장으로 조선일보기관에 입사하였다.[3]


귀국 후 교사생활 그리고 만주로 이동

조선일보기관에서 정치부장·편집국장을 역임하였고, 같은 해경신고등보통학교기관와 1931년 송도고등보통학교기관에서 교편을 잡기도 하였다. 그 뒤 1932년 고려시보사(高麗時報社)서적를 주간, 1934년 한성도서주식회사기관의 상무, 1937년에는 만주로 가서 만몽산업주식회사(滿蒙産業株式會社)기관의 상무·전무, 안가농장개척사무소(安家農場開拓事務所)기관의 소장 등을 역임하며 대규모 농장을 운영하기도 했고, 일본이 세운 괴뢰정권인 만주국협화회(滿洲國)協和會)단체의 위원을 지내기도 했다. 특히 1934년에는 일제의 식민사관에 따른 한국 역사 서술에 반대하며 진단학회(震檀學會)단체 발기인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1942년 오상현 대동농사학교(吾常縣大東農士學校)기관 교장을 거쳐, 1945년 8월 건국준비위원단체이 되었다.[4]


해방 이후

1945년 9월 귀국하여 조선청년동맹기관 위원장, 조선청년당단체 최고위원을 거쳐, 1946년 반탁학생총연맹단체 고문, 한성일보사기관 주필, 1947년 대동청년당준비위단체 부위원장·부단장 겸 훈련원장, 기관지 대동시보사(大同時報社)기관 부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1947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기관 주임교수로 부임하여 학생처장을 역임했고, 특히 1948년에는 ‘화랑’과 ‘화랑도’를 대한민국 건국 정신의 기반으로 제시한 『花郞道硏究』서적를 펴내기도 했다. 1949년에는 서울대 법과대학기관 학장서리를 역임하였다.[5]


6·25전쟁 이후

1950년 2월 국방부 정훈국장이 되었다가 6·25전쟁이 발발하자 육군본부 정훈감, 대학학도의용대 총지휘관을 거치면서 정훈에 크게 공헌하였다. 1952년 준장으로 예편하여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기관로 복직하였다. 1953년 서울대학교기관에서 『조선근세사연구(朝鮮最近世史硏究)』서적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54년 문교부장관이 되어 국사편찬위원회기관를 설치, 위원장을 겸하면서 조선왕조실록서적 영인작업을 개척하여 학계와 문화계에 크게 공헌하였다. 그 뒤 1956년 동아대학교기관 교수, 1957년 성균관대학교기관 총장, 1957년 이후 한국사립대학연합회기관 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미국 및 서구 각국, 동남아시아 및 대만의 교육제도를 시찰하기도 하였다. 1962년 경희대학교기관 교수·대학원장, 1969년 대한민국 문화재위원장, 1969년 영남대학교기관 총장, 1972년 문화재보호협회기관 회장, 1974년 동국대학교 총장기관, 1978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기관 초대 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1954년 서울대학교기관에서 문학박사, 1968년 대만 중화학술원기관에서 명예법학박사, 1970년 경희대학교기관에서 명예문학박사, 1971년 미국 인디애나주 볼 스테이트대학(Ball State大學)기관에서 명예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83년 1월 9일 숙환으로 사망했으며, 동작동국립서울현충원공간에 묻혔다.[6]





연구


고려시보

고려시보.jpg

사진출처= 연합뉴스

고려시보(高麗時報)는 1933년 4월 15일 경기도 개성에서 발간된 지방신문으로 일제에 의해 강제폐간된 1941년 4월 16일까지 거의 매월 2회 발간되었다. 당시에 유명했던 중앙일간지에 버금가는, 개성과 그 근교일대는 물론 황해도 등까지도 널리 보급되었던 신문이다. [7]
해방 이후 속간돼 한국전쟁 전까지 기사와 논설을 통해 개성 지역의 사회상을 알렸다. [8]


진단학회

1934년 한국인 학자들이 조선총독부 또는 일본인 학자들이 주도하는 관변적 연구풍토에서 벗어나 한국 및 인근지역의 문화를 한국인의 주체적 관점에서 해석하는 연구풍토를 구축하기 위해 만든 학회로서, 이들 중 일부는 일제의 식민사관과 관변적 학풍을 탈피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으나, 일제강점기는 물론 해방 이후 현재까지 대학 강단을 중심으로 넓은 인맥을 유지하고 그 학술적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1934년 5월 7일 창립 당시 한국문화에 대한 연구의 주도권은 일본인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연구성과의 대부분은 일본인에 의해 일본어로 발표되었다. 연구자료도 대부분 일본인들에 의해 독점되었다. 또한 연구의 많은 경우가 식민사관에 따라 기술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러한 현실에서 한국인 학자들의 민족적 자긍심은 찾기 어려웠다. 그리하여 한국문화의 개척 · 발전 · 향상을 위해 노력한다는 취지에서 일단의 학자들이 이 학회의 창립을 결의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9]


데이터


TripleData

Source (A) Target (B) Relationship
Person: 이선근 Institution: 와세다 대학교 A graduates B
Person: 이선근 Institution: 조선일보 A worksAt B
Person: 이선근 Institution: 동국대학교 A worksAt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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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son: 이은상 Article: 고려시보사 A isWriterOf B
Person: 이은상 Book : 조선근세사연구 A creator B
Person: 이은상 Book : 화랑도연구 A creator B



Timeline

Network Graph


Visualization





참고자원


오세창, "이선근(李瑄根)",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선근online, 위키백과

박상현, 「[일제강점기 개성 신문 '고려시보' 원본 이미지 공개된다]」, 2018년.3월.28일. 『연합뉴스』online, 연합뉴스

홍승기, "진단학회 (震檀學會)",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