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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Korea Human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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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center><big>'''👩🏻‍🏫본 문서는 서울대학교 " [[:분류:2024-1 BigData(SNU)|24-1 미디어위키를 활용한 역사 데이터 편찬]]" 수강생 [[LAI(SNU2024)]]가 작성했습니다.'''</big></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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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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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중국 신문학 활동가, 역사학자, 고고학자, 정치가다. 궈모뤄의 일생에 여러 정권을 경험했다. 청나라 말기부터 북양정부, 중화민국 국민정부 시기를 걸쳐 중화인문공화국 설립 이후까지 이어졌다. 일본 유학 당시 신시(新詩)와 역사극 등 문예 창작을 시작하였으며 혁명 문학 단체 창조사(創造社)를 결성했다. 1927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한 뒤 국민정부에서 내린 지명 수배령으로 인해 일본 제국으로 망명했다. 망명하는 동안 마르크스-레닌주의 사상을 중국 고대 사회의 연구에 적용함으로써 유물사관을 중국에 처음 도입했다. 1938년 다시 상하이(上海)로 귀국하고 항일 사상을 선전하는 문화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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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중국 신문학 활동가, 역사학자, 고고학자, 정치가다. 궈모뤄의 일생에 여러 정권을 경험했다. 청나라 말기부터 북양정부, 중화민국 국민정부 시기를 걸쳐 중화인문공화국 설립 이후까지 이어졌다. 일본 유학 당시 신시(新詩)와 역사극 등 문예 창작을 시작하였으며 문학 단체 창조사(創造社)를 결성했다. 1927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했다. 같은 해에 국민정부의 박해를 피하기 위해 일본 제국으로 도망가서 10년 동안 망명 생활을 지냈다. 1938년 다시 상하이(上海)로 귀국하고 항일 사상을 선전하는 문화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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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기 및 청소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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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1897년 봄, 궈모뤄는 아버지에게 가숙(家塾)에 들어갈 의향을 전하며 {{TagPerson|[[심환장(沈煥章)]]}}에게 계몽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ref>黃淳浩,『郭沫若自敘』, 团结出版社,1996, 24쪽</ref> 가숙에서 《시경》, 《고문관지》 등 전통적인 공부는 물론, 신학 지식도 접하게 됐다.<ref>黃淳浩,『郭沫若自敘』, 团结出版社,1996, 71쪽</ref> 1905년, 쟈딩(嘉定)에 개설된 고등소학당에 들어가 1년 반만에 교과 과정을 마치고 쟈딩중학교로 진학했지만 1919년에 퇴학을 당했다. 다음 해에 청두(成都)의 한 중학교 {{TagInstitution|[[四川官立高等分設中學堂]]}}에 편입으로 들어갔다. 수학, 물리 등 신학 지식이 교과 과정을 통해 소개되었지만 교사들도 능통하지 못해서 궈모뤄가 신학에 대해 흥미가 없을뿐더러 학교 생활을 답답해하고 빨리 쓰촨에서 벗어날 생각만 가득했다. 이 이유로 청두의 고등학교에서 한 학기만 머문 뒤 톈진군의학교(天津軍醫學校)에 지원했다.<ref>黃淳浩,『郭沫若自敘』, 团结出版社,1996, 74-75쪽</ref> 그때의 궈모뤄는 쓰촨을 떠나는 것이 목적이고  의학을 공부할 마음은 없었다. 그래서 톈진에 도착한 후에 학교에 진학하지 않았고 첫째 형을 찾으러 베이징에 갔다.<ref>黃淳浩,『郭沫若自敘』, 团结出版社,1996, 76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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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1897년 봄, 궈모뤄는 아버지에게 가숙(家塾)에 들어갈 의향을 전하며 {{TagPerson|[[심환장(沈煥章)]]}}에게 계몽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ref>黃淳浩,『郭沫若自敘』, 团结出版社,1996, 24쪽</ref> 가숙에서 《시경》, 《고문관지》 등 전통적인 공부는 물론, 신학 지식도 접하게 됐다.<ref>黃淳浩,『郭沫若自敘』, 团结出版社,1996, 71쪽</ref> 1905년, 쟈딩(嘉定)에 개설된 고등소학당에 들어가 1년 반만에 교과 과정을 마치고 쟈딩중학교로 진학했지만 1919년에 퇴학을 당했다. 다음 해에 청두(成都)의 한 중학교 {{TagInstitution|[[四川官立高等分設中學堂]]}}에 편입으로 들어갔다. 수학, 물리 등 신학 지식이 교과 과정을 통해 소개되었지만 교사들도 능통하지 못해서 궈모뤄가 신학에 대해 흥미가 없을뿐더러 학교 생활을 답답해하고 빨리 쓰촨에서 벗어날 생각만 가득했다. 이 이유로 청두의 고등학교에서 한 학기만 머문 뒤 톈진군의학교(天津軍醫學校)에 지원했다. 그때의 궈모뤄는 쓰촨을 떠나는 것이 목적이고 의학을 공부할 마음은 없었다.<ref>黃淳浩,『郭沫若自敘』, 团结出版社,1996, 74-75쪽</ref> 그래서 톈진에 도착한 후에, 학교에 진학하지 않았고 첫째 형을 찾으러 베이징에 갔다.<ref>黃淳浩,『郭沫若自敘』,团结出版社,1996, 76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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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유학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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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궈모뤄는 첫째 형의 권유로 일본 유학을 결심했다. 1914년 중국을 떠나, 조선을 경유하고 도쿄에 도착했다.<ref>黃淳浩,『郭沫若自敘』, 团结出版社,1996, 76쪽</ref> 도쿄에서 반 년만에 {{TagInstitution|[[도쿄제일고등학교(東京第一高等學校)]]}}의 예과에 합격했다. 1915년에 {{TagInstitution|[[오카야마제육고등학교(岡山第六高等學校)]]}}에 합격하고 의학 공부를 시작했다. 1918년, 고등학교에서 졸업하고 {{TagInstitution|[[규슈제국대학(九州帝國大學)]]}}의학부에 입학했다.<ref>黃淳浩,『郭沫若自敘』, 团结出版社,1996, 77쪽</ref> 톈진군의학교 지원했던 시기와 달리 궈모뤄가 일본에 있는 동안 조국이 강해지기 위해 기술을 열심히 배우는 각오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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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궈모뤄는 첫째 형의 권유로 일본 유학을 결심했다. 1914년 중국을 떠나, 조선을 경유하고 도쿄에 도착했다.<ref>黃淳浩,『郭沫若自敘』, 团结出版社,1996, 76쪽</ref> 도쿄에서 반 년만에 {{TagInstitution|[[도쿄제일고등학교(東京第一高等學校)]]}}의 예과에 합격했다. 1915년에 {{TagInstitution|[[오카야마제육고등학교(岡山第六高等學校)]]}}에 합격하고 의학 공부를 시작했다. 1918년, 고등학교에서 졸업하고 {{TagInstitution|[[규슈제국대학(九州帝國大學)]]}}의학부에 입학했다. 톈진군의학교 지원했던 시기와 달리 궈모뤄가 일본에 있는 동안 조국이 강해질 수 있도록 기술을 열심히 배우고 나라에 기여하는 각오를 했다.<ref>黃淳浩,『郭沫若自敘』, 团结出版社,1996, 77쪽</ref> 그러나 17살에 병으로 인해 청력이 손해되고 임상의학에 큰 어려움을 느꼈다.<ref>黃淳浩,『郭沫若自敘』, 团结出版社,1996, 78쪽</ref> 1923년에 의학부를 졸업했지만 의사가 되지 않았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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궈모뤄가 일본 유학하는 동안 문예창작 활동을 적극적으로 했다. 주로 신시, 소설, 산문 등 여러가지 문학 장르를 창작하고 외국 문학 작품을 번역하기도 했다. 1921년 {{TagPerson|[[위다푸(郁達夫)]]}} 등 문인 친구와 같이 도쿄에서 혁명문학 단체 창조사를 결성하고 그 뒤로 여러 간행물을 발행했다.<ref>黃淳浩,『郭沫若自敘』, 团结出版社,1996, 139쪽</ref> 궈모뤄가 실제로 중국에 없었지만 그가 신문화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행했다. 그의 창작물들도 중국 문학의 현대화를 추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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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망명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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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궈모뤄가 1927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한 뒤 국민정부에서 내린 지명 수배령으로 인해 일본 제국으로 망명했다.<ref>崔力明, "[http://www.1937nanjing.org/kanzhanlishi/laobingkoushu/2021/0617/4814.html 郭沫若归国抗战始末]" <html><online style="color:purple">『南京民间抗日战争博物馆』<sup>online</sup></online></html>, 南京民间抗日战争博物馆, 작성일: 2024년 03월 20일.</ref> 망명하는 동안 마르크스-레닌주의 사상을 중국 고대 사회의 연구에 적용하는 시도를 했고{{TagBook|[[『중국고대사회연구(中國古代社會研究)』]]}}를 발표했다. 이 연구를 통해 유물사관을 중국에 처음 도입했다.<ref>谢保成, 「[https://www.gmw.cn/01gmrb/2007-11/29/content_703535.htm 郭沫若与《中国古代社会研究》]」, 『光明日报』, 2007년.11월.29일., <html><online style="color:purple">『光明网』<sup>online</sup></online></html>, 光明日报社.</ref> 그 외에도 갑골문, 금문 등 고문자학, 역사학 연구를 진행했다.<ref>郭桢, "[https://www.gov.cn/gjjg/2008-11/04/content_1139383.htm 郭沫若]" <html><online style="color:purple">『中国政府网』<sup>online</sup></online></html>, 中华人民共和国中央人民政府, 작성일: 2008년 11월 04일.</ref> 궈모뤄가 그의 역사학 저서들로 학술계에서 인정을 받아 영향력을 키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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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항일 전쟁 및 국공 내전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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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1937년 7월 중국 항일 전쟁이 벌어졌다. 국민정부에서 궈모뤄에 대한 지명 수배령이 취소된 뒤 궈모뤄가 다시 상하이로 돌아갔다. 궈모뤄의 공식적인 신분은 무소속 민주주의 활동가라고 하지만 실제로 귀국하자마자 바로 공산당의 조직 관계를 회복했다. 그가 1958년 다시 입당하기 전까지 계속 'K'라는 코드명을 쓰는 비밀 당원으로 활동했다.<ref>李斌,「[http://hrczh.cass.cn/ywdt_135233/zt/pplsxwzy/201907/t20190725_5603700.shtml 有关郭沫若的五个流言及真伪]」, 『中国文学批评』, 제2호, 2019년.07월.25일, <html><online style="color:purple">『中国历史研究网』<sup>online</sup></online></html>, 中国历史研究院.</ref> 1938년 궈모뤄가 {{TagInstitution|[[국민정부군사위원회정치부(國民政府軍事委員會政治部]])}}의 제3청 청장이 되고 항일 사상에 대한 선전 활동을 많이 주도했다.<ref>崔力明, "[http://www.1937nanjing.org/kanzhanlishi/laobingkoushu/2021/0617/4814.html 郭沫若归国抗战始末]" <html><online style="color:purple">『南京民间抗日战争博物馆』<sup>online</sup></online></html>, 南京民间抗日战争博物馆, 작성일: 2024년 03월 20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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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TagArticle|[[『목양애화(牧羊哀話)』]]}}는 궈모뤄가 발표한 첫 단편소설 작품이다. 『목양애화』는 궈모뤄가 일본 유학을 떠나는 도중에 조선을 경유하고 부산영사관에서 일주일 간 머문 경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이다. 당시 중국과 조선 양국 각각 일본에게 침략을 당했고 궈모뤄는 일본 침략자들의 핍박에 시달렸던 조선인들의 참혹한 모습을 목격하고 이들에 대한 동정과 지지, 조선이 겪었던 역사와 반일(反日)정서를 바탕으로 이 작품을 써 내려갔다.<ref>쑹원징(宋文靜), 「[https://www.ajunews.com/view/20160202162947302 중국의 위대한 문학가 궈모뤄와 조선의 인연]」, 『아주경제』, 2016년.02월.03일., <html><online style="color:purple">『아주경제』<sup>online</sup></online></html>, 아주경제.</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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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궈모뤄가 일본에서 유학하는 동안 다른 문학 창작활동을 하는 중국 유학생들을 친구로 사귀었다. 1921년 7월에 궈모뤄가 위다푸와 {{TagPerson|[[청팡우(成彷吾)]]}} 등 문인 친구와 함께 도쿄에서 회의를 하며 '창조'라는 명목으로 계간(季刊)을 발행할 계획을 세웠다.<ref>黃淳浩,『郭沫若自敘』, 团结出版社,1996, 139쪽</ref> 이때 혁명문학 단체 {{TagGroup|창조사}}가 결성했고 다음 해 5월에 계간인 {{TagJournal|[[창조(創造)]]}}의 창간호를 출간했다. 1923년 5월에 주간지인 {{TagJournal|[[창조주보(創造周報)]]}}, 7월에 일간지인 {{TagJournal|[[창조일(創造日)]]}}도 발행하기 시작했다.<ref>黃淳浩,『郭沫若自敘』, 团结出版社,1996, 142-145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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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저서『중국고대사회연구(中國古代社會研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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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1937년 8월 24일 일본 제국의 침략을 대변하기 위한 신문 {{TagJournal|[[『구망일보(救亡日報)』]]}}가 상하이에서 창간되었다. 『구망일보』는 명의상으로는 {{TagInstitution|[[상하이문화계구망협회(上海文化界救亡協會)]]}}의 기관지이나 실제로는 중국 공산당의 지도 하에 운영되었던 문화계 통일전선 신문이었다. 궈모뤄가 『구망일보』의 사장을 맡았으며, {{TagPerson|[[샤옌(夏衍)]]}}이 편집장을 담당했다. 창간 당시 국민당, 공산당 양당은 모두 인원을 신문사에 파견하였고 공동으로 경비를 충당했지만 후기에는 국민당 측의 인원들은 속속 철수하였고 신문 편집 활동은 공산당의 지도 하에 진행되었다.<ref>염인호, "[https://search.i815.or.kr/contents/Heje/NewsHeje.do?name= 구망일보 해제]",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sup>online</sup></online></html>, 독립기념관.</ref></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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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망일보』에는 조선과 관련된 기사가 많다. 궈모뤄는 조선의용대의 활동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이는 조선의용대가 『구망일보』를 선전하고 판매하는 협력관계로 발전하는 힘이 됐다. 특히 조선의용대의 활동 가운데 하나인 대민활동에 『구망일보』는 많은 지면을 할애하면서 한국독립운동의 현황과 식민지 조선의 실상을 알리는 데 주력했다.<ref>김주용,「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1042309402451562 중국 정치인이자 문학가 궈모뤄와 조선의용대]」, 『프레시안』, 2021년.04월.23일. <html><online style="color:purple">『프레시안』<sup>online</sup></online></html>, 프레시안.</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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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line임베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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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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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郭桢, "[https://www.gov.cn/gjjg/2008-11/04/content_1139383.htm 郭沫若]" <html><online style="color:purple">『中国政府网』<sup>online</sup></online></html>, 中华人民共和国中央人民政府, 작성일: 2008년 11월 0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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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용,「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1042309402451562 중국 정치인이자 문학가 궈모뤄와 조선의용대]」, 『프레시안』, 2021년.04월.23일. <html><online style="color:purple">『프레시안』<sup>online</sup></online></html>, 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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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斌, 「[http://hrczh.cass.cn/ywdt_135233/zt/pplsxwzy/201907/t20190725_5603700.shtml 有关郭沫若的五个流言及真伪]」, 『中国文学批评』, 제2호, 2019년.07월.25일, <html><online style="color:purple">『中国历史研究网』<sup>online</sup></online></html>, 中国历史研究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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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谢保成, 「[https://www.gmw.cn/01gmrb/2007-11/29/content_703535.htm 郭沫若与《中国古代社会研究》]」, 『光明日报』, 2007년.11월.29일., <html><online style="color:purple">『光明网』<sup>online</sup></online></html>, 光明日报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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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쑹원징(宋文靜), 「[https://www.ajunews.com/view/20160202162947302 중국의 위대한 문학가 궈모뤄와 조선의 인연]」, 『아주경제』, 2016년.02월.03일., <html><online style="color:purple">『아주경제』<sup>online</sup></online></html>, 아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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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인호, "[https://search.i815.or.kr/contents/Heje/NewsHeje.do?name= 구망일보 해제]",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sup>online</sup></online></html>,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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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力明, "[http://www.1937nanjing.org/kanzhanlishi/laobingkoushu/2021/0617/4814.html 郭沫若归国抗战始末]" <html><online style="color:purple">『南京民间抗日战争博物馆』<sup>online</sup></online></html>, 南京民间抗日战争博物馆, 작성일: 2024년 03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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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淳浩,『郭沫若自敘』, 团结出版社,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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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7월 19일 (금) 23:07 기준 최신판

👩🏻‍🏫본 문서는 서울대학교 " 24-1 미디어위키를 활용한 역사 데이터 편찬" 수강생 LAI(SNU2024)가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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궈모뤄(郭沫若)
궈모뤄.png
출처 : 바이두 백과
 
한글명 궈모뤄 한자명 郭沫若 영문명 Guo Moruo 가나명 이칭
성별 남성 생년 1892년 몰년 1978년 출신지 중국 쓰촨 전공 문학,역사학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중국 신문학 활동가, 역사학자, 고고학자, 정치가다. 궈모뤄의 일생에 여러 정권을 경험했다. 청나라 말기부터 북양정부, 중화민국 국민정부 시기를 걸쳐 중화인문공화국 설립 이후까지 이어졌다. 일본 유학 당시 신시(新詩)와 역사극 등 문예 창작을 시작하였으며 문학 단체 창조사(創造社)를 결성했다. 1927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했다. 같은 해에 국민정부의 박해를 피하기 위해 일본 제국으로 도망가서 10년 동안 망명 생활을 지냈다. 1938년 다시 상하이(上海)로 귀국하고 항일 사상을 선전하는 문화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생애


유년기 및 청소년기

1897년 봄, 궈모뤄는 아버지에게 가숙(家塾)에 들어갈 의향을 전하며 심환장(沈煥章)인물에게 계몽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1] 가숙에서 《시경》, 《고문관지》 등 전통적인 공부는 물론, 신학 지식도 접하게 됐다.[2] 1905년, 쟈딩(嘉定)에 개설된 고등소학당에 들어가 1년 반만에 교과 과정을 마치고 쟈딩중학교로 진학했지만 1919년에 퇴학을 당했다. 다음 해에 청두(成都)의 한 중학교 四川官立高等分設中學堂기관에 편입으로 들어갔다. 수학, 물리 등 신학 지식이 교과 과정을 통해 소개되었지만 교사들도 능통하지 못해서 궈모뤄가 신학에 대해 흥미가 없을뿐더러 학교 생활을 답답해하고 빨리 쓰촨에서 벗어날 생각만 가득했다. 이 이유로 청두의 고등학교에서 한 학기만 머문 뒤 톈진군의학교(天津軍醫學校)에 지원했다. 그때의 궈모뤄는 쓰촨을 떠나는 것이 목적이고 의학을 공부할 마음은 없었다.[3] 그래서 톈진에 도착한 후에, 학교에 진학하지 않았고 첫째 형을 찾으러 베이징에 갔다.[4]


일본 유학 시절

궈모뤄는 첫째 형의 권유로 일본 유학을 결심했다. 1914년 중국을 떠나, 조선을 경유하고 도쿄에 도착했다.[5] 도쿄에서 반 년만에 도쿄제일고등학교(東京第一高等學校)기관의 예과에 합격했다. 1915년에 오카야마제육고등학교(岡山第六高等學校)기관에 합격하고 의학 공부를 시작했다. 1918년, 고등학교에서 졸업하고 규슈제국대학(九州帝國大學)기관의학부에 입학했다. 톈진군의학교 지원했던 시기와 달리 궈모뤄가 일본에 있는 동안 조국이 강해질 수 있도록 기술을 열심히 배우고 나라에 기여하는 각오를 했다.[6] 그러나 17살에 병으로 인해 청력이 손해되고 임상의학에 큰 어려움을 느꼈다.[7] 1923년에 의학부를 졸업했지만 의사가 되지 않았다.
궈모뤄가 일본 유학하는 동안 문예창작 활동을 적극적으로 했다. 주로 신시, 소설, 산문 등 여러가지 문학 장르를 창작하고 외국 문학 작품을 번역하기도 했다. 1921년 위다푸(郁達夫)인물 등 문인 친구와 같이 도쿄에서 혁명문학 단체 창조사를 결성하고 그 뒤로 여러 간행물을 발행했다.[8] 궈모뤄가 실제로 중국에 없었지만 그가 신문화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행했다. 그의 창작물들도 중국 문학의 현대화를 추진했다.


일본 망명 생활

궈모뤄가 1927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한 뒤 국민정부에서 내린 지명 수배령으로 인해 일본 제국으로 망명했다.[9] 망명하는 동안 마르크스-레닌주의 사상을 중국 고대 사회의 연구에 적용하는 시도를 했고『중국고대사회연구(中國古代社會研究)』서적를 발표했다. 이 연구를 통해 유물사관을 중국에 처음 도입했다.[10] 그 외에도 갑골문, 금문 등 고문자학, 역사학 연구를 진행했다.[11] 궈모뤄가 그의 역사학 저서들로 학술계에서 인정을 받아 영향력을 키울 수 있었다.


중국 항일 전쟁 및 국공 내전 시기

1937년 7월 중국 항일 전쟁이 벌어졌다. 국민정부에서 궈모뤄에 대한 지명 수배령이 취소된 뒤 궈모뤄가 다시 상하이로 돌아갔다. 궈모뤄의 공식적인 신분은 무소속 민주주의 활동가라고 하지만 실제로 귀국하자마자 바로 공산당의 조직 관계를 회복했다. 그가 1958년 다시 입당하기 전까지 계속 'K'라는 코드명을 쓰는 비밀 당원으로 활동했다.[12] 1938년 궈모뤄가 국민정부군사위원회정치부(國民政府軍事委員會政治部)기관의 제3청 청장이 되고 항일 사상에 대한 선전 활동을 많이 주도했다.[13]





연구


소설 『목양애화(牧羊哀話)』

『목양애화(牧羊哀話)』원고는 궈모뤄가 발표한 첫 단편소설 작품이다. 『목양애화』는 궈모뤄가 일본 유학을 떠나는 도중에 조선을 경유하고 부산영사관에서 일주일 간 머문 경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이다. 당시 중국과 조선 양국 각각 일본에게 침략을 당했고 궈모뤄는 일본 침략자들의 핍박에 시달렸던 조선인들의 참혹한 모습을 목격하고 이들에 대한 동정과 지지, 조선이 겪었던 역사와 반일(反日)정서를 바탕으로 이 작품을 써 내려갔다.[14]


창조사(創造社) 설립

궈모뤄가 일본에서 유학하는 동안 다른 문학 창작활동을 하는 중국 유학생들을 친구로 사귀었다. 1921년 7월에 궈모뤄가 위다푸와 청팡우(成彷吾)인물 등 문인 친구와 함께 도쿄에서 회의를 하며 '창조'라는 명목으로 계간(季刊)을 발행할 계획을 세웠다.[15] 이때 혁명문학 단체 창조사단체가 결성했고 다음 해 5월에 계간인 창조(創造)학술지의 창간호를 출간했다. 1923년 5월에 주간지인 창조주보(創造周報)학술지, 7월에 일간지인 창조일(創造日)학술지도 발행하기 시작했다.[16]


『구망일보(救亡日報)』 발행

1937년 8월 24일 일본 제국의 침략을 대변하기 위한 신문 『구망일보(救亡日報)』학술지가 상하이에서 창간되었다. 『구망일보』는 명의상으로는 상하이문화계구망협회(上海文化界救亡協會)기관의 기관지이나 실제로는 중국 공산당의 지도 하에 운영되었던 문화계 통일전선 신문이었다. 궈모뤄가 『구망일보』의 사장을 맡았으며, 샤옌(夏衍)인물이 편집장을 담당했다. 창간 당시 국민당, 공산당 양당은 모두 인원을 신문사에 파견하였고 공동으로 경비를 충당했지만 후기에는 국민당 측의 인원들은 속속 철수하였고 신문 편집 활동은 공산당의 지도 하에 진행되었다.[17]
『구망일보』에는 조선과 관련된 기사가 많다. 궈모뤄는 조선의용대의 활동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이는 조선의용대가 『구망일보』를 선전하고 판매하는 협력관계로 발전하는 힘이 됐다. 특히 조선의용대의 활동 가운데 하나인 대민활동에 『구망일보』는 많은 지면을 할애하면서 한국독립운동의 현황과 식민지 조선의 실상을 알리는 데 주력했다.[18]





데이터


TripleData

Source (A) Target (B) Relationship
Person: 궈모뤄 Person: 심환장 A hasMaster B
Person: 궈모뤄 Institution: 四川官立高等分設中學堂 A graduates B
Person: 궈모뤄 Institution: 도쿄제일고등학교 A graduates B
Person: 궈모뤄 Institution: 오카야마제육고등학교 A graduates B
Person: 궈모뤄 Institution: 규슈제국대학 A graduates B
Person: 궈모뤄 Group: 창조사 A isMemberOf B
Person: 위다푸 Group: 창조사 A isMemberOf B
Person: 청팡우 Group: 창조사 A isMemberOf B
Journal: 창조 Group: 창조사 A Publisher B
Journal: 창조주보 Group: 창조사 A Publisher B
Journal: 창조일 Group: 창조사 A Publisher B
Person: 궈모뤄 Article: 『목양애화』 A isWriterOf B
Person: 궈모뤄 Book: 중국고대사회연구 A isWriterOf B
Person: 궈모뤄 Institution: 상하이문화계구망협회 A worksAt B
Person: 궈모뤄 Institution: 구망일보 편집위원회 A worksAt B
Person: 샤옌 Institution: 상하이문화계구망협회 A worksAt B
Person: 샤옌 Institution: 구망일보 편집위원회 A worksAt B
Institution: 구망일보 편집위원회 Institution: 상하이문화계구망협회 A isAdjunctTo B
Journal: 구망일보 Institution: 구망일보 편집위원회 A Publisher B
Institution: 국민정부군사위원회정치부 제3청 Institution: 국민정부군사위원회정치부 A isAdjunctTo B
Person: 궈모뤄 Institution: 국민정부군사위원회정치부 제3청 A worksAt B



Timeline




Network Graph






참고자원






주석


  1. 黃淳浩,『郭沫若自敘』, 团结出版社,1996, 24쪽
  2. 黃淳浩,『郭沫若自敘』, 团结出版社,1996, 71쪽
  3. 黃淳浩,『郭沫若自敘』, 团结出版社,1996, 74-75쪽
  4. 黃淳浩,『郭沫若自敘』,团结出版社,1996, 76쪽
  5. 黃淳浩,『郭沫若自敘』, 团结出版社,1996, 76쪽
  6. 黃淳浩,『郭沫若自敘』, 团结出版社,1996, 77쪽
  7. 黃淳浩,『郭沫若自敘』, 团结出版社,1996, 78쪽
  8. 黃淳浩,『郭沫若自敘』, 团结出版社,1996, 139쪽
  9. 崔力明, "郭沫若归国抗战始末" 『南京民间抗日战争博物馆』online, 南京民间抗日战争博物馆, 작성일: 2024년 03월 20일.
  10. 谢保成, 「郭沫若与《中国古代社会研究》」, 『光明日报』, 2007년.11월.29일., 『光明网』online, 光明日报社.
  11. 郭桢, "郭沫若" 『中国政府网』online, 中华人民共和国中央人民政府, 작성일: 2008년 11월 04일.
  12. 李斌,「有关郭沫若的五个流言及真伪」, 『中国文学批评』, 제2호, 2019년.07월.25일, 『中国历史研究网』online, 中国历史研究院.
  13. 崔力明, "郭沫若归国抗战始末" 『南京民间抗日战争博物馆』online, 南京民间抗日战争博物馆, 작성일: 2024년 03월 20일.
  14. 쑹원징(宋文靜), 「중국의 위대한 문학가 궈모뤄와 조선의 인연」, 『아주경제』, 2016년.02월.03일., 『아주경제』online, 아주경제.
  15. 黃淳浩,『郭沫若自敘』, 团结出版社,1996, 139쪽
  16. 黃淳浩,『郭沫若自敘』, 团结出版社,1996, 142-145쪽
  17. 염인호, "구망일보 해제",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online, 독립기념관.
  18. 김주용,「 중국 정치인이자 문학가 궈모뤄와 조선의용대」, 『프레시안』, 2021년.04월.23일. 『프레시안』online, 프레시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