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준"의 두 판 사이의 차이

North Korea Humanities

(논저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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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center><big>'''👩🏻‍🏫본 문서는 서울대학교 " [[:분류:2024-1 BigData(SNU)|24-1 미디어위키를 활용한 역사 데이터 편찬]]" 수강생 [[김명진(SNU2024)]]이 작성했습니다.<br/>"논저 목록"은 [[김진규]] 작성(22.10.01)'''</big></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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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 김용준(金瑢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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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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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북한에서 평양미술대학 교수 등을 역임하였으며, 『조선미술대요』 등을 저술한 화가 · 미술인이다.<ref>이구열,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9971 김용준 (金瑢俊)]"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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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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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 시절과 동경미술학교 재학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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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김용준은 1907년 2월 경북 선산 고려의원 가난한 가정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으며, 부친으로부터 천자문을 배웠다.<ref>조정훈, "[https://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0111 월북 조선화 대가, 김용준의 예술세계: '조선화에 애국의 마음을 담다' <통일신보>]" 『통일뉴스』, 2014.12.15, 통일뉴스</ref> 중고등학교 시절은 서울에서 보냈다.<ref>이구열,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9971 김용준 (金瑢俊)]"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ref> 1915년 서울중앙중학교에 다니면서 화가 이종우에게 수학한 뒤 1924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건설이냐? 파괴냐?〉로 입선하면서 화단에 데뷔했다. 1918년,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며, 그 당시 "미술에 남다른 취미와 소질이 있었으며, 미술가가 되려는 꿈을 안고 있었다"고 신문이 전했다.<ref>조정훈, "[https://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0111 월북 조선화 대가, 김용준의 예술세계: '조선화에 애국의 마음을 담다' <통일신보>]" 『통일뉴스』, 2014.12.15, 통일뉴스</ref> 고등학교 졸업 이후 일본으로 유학하여 1926년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유학하여<ref>"[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C%9A%A9%EC%A4%80_(1904%EB%85%84) 김용준 (1904년)]" 『위키백과』, 2024.05.04.</ref> 1931년에 오지호(吳之湖)와 동기생으로 졸업하였다.<ref>이구열,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9971 김용준 (金瑢俊)]"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일본 유학 시기, 같은 도쿄 유학생이던 동갑의 이태준을 만나 평생 동안 교유했다.<ref>"[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C%9A%A9%EC%A4%80_(1904%EB%85%84) 김용준 (1904년)]" 『위키백과』, 2024.05.04.</ref> 김용준은 동경미술학교 졸업작품으로 '자화상'(1931)을 출품하여 많은 주목을 받았다. 흰색 저고리에 조끼를 받쳐입은 작품인 '자화상'에 대해 신문은 "민족정신이 매우 강하였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고 평가했다.<ref>조정훈, "[https://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0111 월북 조선화 대가, 김용준의 예술세계: '조선화에 애국의 마음을 담다' <통일신보>]" 『통일뉴스』, 2014.12.15, 통일뉴스</ref> 근원, 선부, 검려, 우산, 노시산방주인 등 김용준의 여러 호 중에서 근원이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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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미술학교 졸업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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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김용준은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한 이후 1928년, 다시 조선으로 귀국했다. 귀국한 후로는 서울에서 모교인 서울 중앙중학교와 보성중학교에서 미술 교사로 재직하면서<ref>정형렬, "[https://www.newsquest.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2664 [정형렬의 북한미술 산책] 김용준의 '화훼도'... 색채주의 조선화 화법의 모드로 변신]" 『New Quest』, 2023.01.03, 넥스터스미디어 주식회사</ref> 길진섭과 함께 1934년 목일회를 창립하는 등 활발히 활동했다.<ref>"[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C%9A%A9%EC%A4%80_(1904%EB%85%84) 김용준 (1904년)]" 『위키백과』, 2024.05.04.</ref> 1934년 일제가 '서화협회'를 없애기 위해 '조선미술전람회'를 만들자 이를 거부하고 '목일회' 조직에 동참한 것이다. 그리고 이와 함께 서양유화를 버리고 동양화에 뛰어들었다. 신문은 "일본에 가서 몇년 동안 유화수업을 하고 온 그로서 이러한 용단을 내린다는 것은 전공을 바꾸는 실무적인 문제가 아니었다"며 "그 밑바탕에는 그의 사상미학관에서의 근본적인 변화가 있었다"고 해석했다<ref>정형렬, "[https://www.newsquest.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2664 [정형렬의 북한미술 산책] 김용준의 '화훼도'... 색채주의 조선화 화법의 모드로 변신]" 『New Quest』, 2023.01.03, 넥스터스미디어 주식회사</ref>서양화를 전공했던 그의 경력과 달리, 그는 민족사회의 서화협회전람회에만 몇 번 참가했을 뿐 서양화가로서의 작품활동을 지속하지 않았다.<ref>이구열,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9971 김용준 (金瑢俊)]"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ref> 그 이유는 무엇일까? 도쿄미술학교의 서양화과 졸업 무렵, 김용준의 동양화에 대한 하대와 서양화가로서의 근거 없는 우월감은 조선시대 3대 화가인 오원 장승업의 기명절지도의 일격으로 무너지고 만다. 항아리의 입을 둥글게 그리지 않고 극단의 삼각으로 그려버린 오원의 패기에 입을 다물지 못했고, 해부해놓은 생선의 육질이 마치 살아 있는 듯한 생동감을 주는 그 강렬한 느낌 앞에서 전율했다고 한다. 이 때의 충격은 그가 후일 동양화와 동양화이론으로 관심을 선회한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고 술회한다. 김용준이 남종문인화풍의 추사를 얼마나 흠모했던지 “추사라면 표구소까지 뒤지고 다니며 그의 글씨의 외경 앞에서 떠날 줄 모르고 연필로 자형을 뜨는 김용준의 모습은 거의 종교적인 경건함을 풍기고 있다”고 그의 친구 소설가 이태준은 증언한다.<ref>조정훈, "[https://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0111 월북 조선화 대가, 김용준의 예술세계: '조선화에 애국의 마음을 담다' <통일신보>]" 『통일뉴스』, 2014.12.15, 통일뉴스</ref> 1938년 무렵부터는 전통적인 수묵화에 손대기 시작하였으나 뚜렷한 면모는 아니었다. 반면, 신문·잡지에 미술평과 미술관계 시론(時論) 등을 기고하면서 평론가로서 활약하였다.<ref>이구열,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9971 김용준 (金瑢俊)]"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ref>  그는 작품 활동 뿐 아니라 미술사 연구와 미술 평론계에서도 선구자 격의 위치를 차지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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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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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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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1945년 광복 후에는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부 창설에 참여하여<ref>이구열,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9971 김용준 (金瑢俊)]"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ref> 교수로 재직하며<ref>"[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C%9A%A9%EC%A4%80_(1904%EB%85%84) 김용준 (1904년)]" 『위키백과』, 2024.05.04.</ref> 전통회화의 이론 강의를 맡다가, 동국대학교로 교직을 옮겼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공산체제에 영합하여 좌익색을 드러내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을 접수하여 학장이 되는 등 몇 달간 맹활약하였고, 9·28서울수복 때에 월북하였다.<ref>이구열,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9971 김용준 (金瑢俊)]"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ref> 1948년 그의 호를 딴 수필집인 『근원수필』을 출간하기도 했다.<ref>"[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C%9A%A9%EC%A4%80_(1904%EB%85%84) 김용준 (1904년)]" 『위키백과』, 2024.05.04.</ref> 뒤이어 1년 뒤인 1949년, 한국미술사를 통시적으로 정리한 『조선미술대요』를 저술하여 큰 호평을 받았다. 북한의 무소속 대변지인 주간 <통일신보>는 이러한 김용준의 행보를 두고 "그는 전통회화인 조선화의 표현기교를 현대적으로 발전시키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조선미술역사를 파고들었고 재치가 넘쳐나는 화조화와 산수풍경화의 유산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평가했다.<ref>조정훈, "[https://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0111 월북 조선화 대가, 김용준의 예술세계: '조선화에 애국의 마음을 담다' <통일신보>]" 『통일뉴스』, 2014.12.15, 통일뉴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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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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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김용준은 1950년 9월 28일 국군의 서울 수복으로 북한의 전선이 후퇴하면서 함께 월북을 단행했다. 전통적인 모더니즘 계열에서 정지용, 이태준과 궤를 같이 하면서 광복 전·후로 좌익 예술계와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던 김용준의 월북 동기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학생으로 국대안 파동 때 미 군정과 충돌해 수감되었다가 풀려난 김진항의 추대로 한국 전쟁 중 얼떨결에 학장이 되었다가 월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설과, 공산주의자였던 부인의 권유로 함께 북으로 갔다는 설이 있다. 월북한 후에는 조선미술가동맹과 조선건축가동맹에 참가했으며 평양미술대학의 강좌장이 되었다. 정확한 연도가 파악되지 않으나 김용준은 월북 직후부터 조선미술가동맹의 위원을 역임했으며, 조선미술가동맹 조선화분과가 신설된 이후 1959년까지 위원장을 역임했다. 그는 1955년 『단원 김홍도』를 집필했으며, 1958년 『고구려 고분벽화 연구』 등을 집필하는가 하면, 1958년 중국을 방문한 이후 평양 국립중앙미술박물관에서 개인전인 《중국 방문 귀환전》을 개최했다. 1960년 이후부터는 북한 내부에서 조선화의 방향을 '채색화'로 집약되자, 그는 위상을 잃어갔고, 『조선미술』에 <채색화 기법>을 연재했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성혜랑이 2000년에 출간한 《등나무집》에서 자살이라고 기록하고 있다.성혜랑과 김용준은 이웃에 살고 있었는데, 1967년 김용준이 김일성의 사진이 들어 있는 신문을 그대로 밖에 버린 사실이 드러나 큰 처벌을 받을 위기에 놓이자 자결했다는 것이다. 성혜랑의 증언 외에 이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다른 근거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ref>"[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C%9A%A9%EC%A4%80_(1904%EB%85%84) 김용준 (1904년)]" 『위키백과』, 2024.05.04.</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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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1950년대 후반기 작품 가운데 대표작은 ‘제6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서 금메달을 수상한 <춤>(1957), <묘향산>(1957), ‘공화국창건 10주년 경축 국가미술전람회’ 2등 수상작 <강냉이>(1958) 등이다. 미술사가로서 김용준은 북한 화단의 전통 계승에 대한 논쟁에서 문인·수묵화에 대한 우월성과 계승의 당위성을 주장하여 조선화 성립 과정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문인화의 사의적(寫意的, 사물의 형태보다 내용이나 정신에 치중하여 그리는) 표현을 사실 묘사의 높은 단계로 제시하여 사물의 진실성을 고양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김용준의 수묵화론은 조선화의 태동기라고 할 수 있는 1960년대 초까지 화단의 주류적 입장에 위치하였으나, 이후 이어지는 전통에 대한 논쟁에서 김용준의 견해는 복고주의로 비판받게 된다. 김용준은 평양미술대학 교수로서 북한 화단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조선미술사』, 『조선화기법』(1959), 『조선화채색법』(1962), 『단원 김홍도』를 집필하였다. 미술교육사업의 성과를 인정받아 1962년 예술학 부교수 학직을 수여받았다. 이외 여러 직책을 맡았으며 미술작품창작과 교수교양사업의 공로로 표창장을 수여받았다.<ref>조대안, "[https://www.yonginilbo.co.kr/news/articleView.html?idxno=94545 용인일보 소장 :한국근대문학, 초간본으로 만나다《11》근원수필 - 김용준]" 『용인일보』, 2023.02.02, 용인일보</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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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원수필(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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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근원수필』은 한국화가·미술평론가·미술사학자·수필가로서 6·25전쟁 때 월북해 1967년 사망한 근원(近園) 김용준(金瑢俊)이 1948년에 출간한 수필집이다. 총 30편의 수필이 들어 있는데, 「매화」, 「검려지기(黔驢之技)」, 「두꺼비 연적(硯滴)을 산 이야기」, 「추사(秋史) 글씨」, 「노시산방기(老柿山房記)」, 「원수원(袁隨園)과 정판교(鄭板橋)와 빙허(憑虛)와 나와」, 「승가사(僧伽寺)의 두 고적(古蹟)」 등 30편의 수필이 실려 있다.『근원수필』에는 당시의 사상 체계를 꿰뚫어 보면서도 옛것에 대한 애정을 유지하였던 김용준의 문(文)·사(史)·철(哲)이 잘 녹아 있으며, 예스럽고 담박하면서도 격조 높은 언어 구사로 글쓰기의 전형을 보여 주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또한『근원수필』은 한국 현대 수필의 근원으로 일컬어지며, 수필 문장의 진정한 맛이 무엇인가를 보여 준 작품이란 평가를 받는다. 현재도 『근원수필』은 ‘문학과 비(非)문학의 장르 구분을 넘어 광복 전후 남겨진 문장 가운데 가장 순도 높은 글’, ‘한국 수필 문학의 백미’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한국 수필 문학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ref>오미환, "[https://m.hankookilbo.com/News/Read/200703142380676844 [우리 시대의 명저 50] <11> 김용준 ‘조선미술대요']" 『한국일보』, 2007.03.14, 한국일보</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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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미술대요(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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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조선미술대요』에서는 멀리 석기시대부터 삼국, 통일신라, 고려, 조선시대까지 시대별 우리나라 미술의 성격과 특징을 건축ㆍ조각ㆍ서화ㆍ공예의 순서로 짚고 있다. 김용준 당대인 일제시대와 해방 직후의 미술도 간략하게나마 다루고 있다.‘패기로 일관된 고구려 미술, 웅혼하고 비약적인 신라의 미술, 화려하고 명랑한 백제의 미술, 그 모든 요소를 종합한 황금시대 통일신라의 미술, 섬약하나마 우미하고 애련하나마 미의 전당에서 떠날 날이 없었던 고려의 미술, 실질적이고 현실적이며 소박하고도 묵중하며 평민적인 조선의 유교미술’이라는 서술은 우리 미술의 시대별 특징을 제대로 추려낸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의 학문적 성과와 한계에 대해서는 2004년 인물미술사학회(회장 윤범모)가 연 근원 김용준 탄생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 박은순 덕성여대 교수가 발표한 바 있다. 한국미술의 성격과 특징을 긍정적ㆍ적극적으로 해석한 점, 우리 문화와 미술의 형성 과정에 외국과의 교류를 인정하고 그 양상을 비교하는 비교미술사학적 방법을 택한 것, 구수하면서도 느긋하고 정감어린 문체로 이후 이동주 최순우 유홍준 등으로 이어지는 수殼?미술사 서술 방식의 원형을 제시한 점도 성과라고 평가했다. 반면 기후나 지리, 풍토를 미술의 특징과 결부하는 전형성, 일제 관학이 펴낸 자료 <고적도보> 를 1차 자료로 쓴 점, 조선시대 미술을 소홀히 다룬 점 등은 시대적 한계를 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ref>조대안, "[https://www.yonginilbo.co.kr/news/articleView.html?idxno=94545 용인일보 소장 :한국근대문학, 초간본으로 만나다《11》근원수필 - 김용준]" 『용인일보』, 2023.02.02, 용인일보</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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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 김홍도(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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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김용준은『단원 김홍도』를 통해 15개의 작품에 대한 상세한 해설을 제시하였다. 『단원 김홍도』에서 주목할만한 점은 <투견도>와 관련된 김용준의 서술이다. 기존에 김홍도의 작품으로 인정되지 않았던 <투견도>에 대해 김용준은 김홍도의 작품으로 비정하면서 이를 18세기 경 확산되었던 외래화풍의 영향으로 제작된 그림으로 규정하였다. 또한 김홍도의 생년에 대해서는 비록 후에 김홍도의 생년이 수정되었지만, 그는 1760년으로 비정하면서 김홍도의 예술성에 주목해 천재화가임을 확신했다. 그 뿐만이 아니라 김용준은 김홍도의 풍속도와 신선도에서 확인한 인물표현 방식을 회화 창작에도 적극 적용했다. 1950년대 중반 이후 천리마시대에 필요한 ‘인물형상의 전형성’이라는 개념이 미술계에 쟁점으로 부각되었을 때 유화 분야에서는 그 인물형상의 모델과 지침을 소련미술에서 찾았다. 반면 조선화 분야에서는 조선 후기 풍속도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해 인물 형상의 조형적 특징을 김홍도를 비롯한 조선시대의 인물화에서 찾으려고 했다. 김용준이 1950년대 중반에 발표한 김홍도에 관한 글들이 바로 그 노력의 산물이다.<ref>"김미정, 「김용준 저 『단원 김홍도』해제: 고독한 천재의 눈에 비친 사실주의 화가 김홍도」, 『근대서지』, 근대서지학회, 2020, pp. 588-589.</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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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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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yle="width:35%; background:#87CEFA; text-align: center; color:navy"|Source (A) !! style="width:35%; background:#87CEFA; text-align: center; color:navy"|Target (B) !! style="width:30%; background:#87CEFA; text-align: center; color:navy"|Relationsh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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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erson: 김용준 || Institution: 중앙고등보통학교 || A graduates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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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erson: 김용준 || Book: 『조선화채색법』 || A creator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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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erson: 김용준 || Book: 『단원김홍도』 || A creator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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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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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7월 18일 (목) 14:55 기준 최신판

👩🏻‍🏫본 문서는 서울대학교 " 24-1 미디어위키를 활용한 역사 데이터 편찬" 수강생 김명진(SNU2024)이 작성했습니다.
"논저 목록"은 김진규 작성(22.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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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준(金瑢俊)
그림을 보고 있는 김용준.jpg
출처 : http://nks.ac.kr/Word/View.aspx?id=2477
 
한글명 김용준 한자명 金瑢俊 영문명 KIM YONG CHUN 가나명 이칭 근원(近園)
성별 남성 생년 1904년 몰년 1967년 출신지 대구 전공 서양화과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북한에서 평양미술대학 교수 등을 역임하였으며, 『조선미술대요』 등을 저술한 화가 · 미술인이다.[1]


생애



유년 시절과 동경미술학교 재학 시기


김용준은 1907년 2월 경북 선산 고려의원 가난한 가정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으며, 부친으로부터 천자문을 배웠다.[2] 중고등학교 시절은 서울에서 보냈다.[3] 1915년 서울중앙중학교에 다니면서 화가 이종우에게 수학한 뒤 1924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건설이냐? 파괴냐?〉로 입선하면서 화단에 데뷔했다. 1918년,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며, 그 당시 "미술에 남다른 취미와 소질이 있었으며, 미술가가 되려는 꿈을 안고 있었다"고 신문이 전했다.[4] 고등학교 졸업 이후 일본으로 유학하여 1926년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유학하여[5] 1931년에 오지호(吳之湖)와 동기생으로 졸업하였다.[6] 일본 유학 시기, 같은 도쿄 유학생이던 동갑의 이태준을 만나 평생 동안 교유했다.[7] 김용준은 동경미술학교 졸업작품으로 '자화상'(1931)을 출품하여 많은 주목을 받았다. 흰색 저고리에 조끼를 받쳐입은 작품인 '자화상'에 대해 신문은 "민족정신이 매우 강하였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고 평가했다.[8] 근원, 선부, 검려, 우산, 노시산방주인 등 김용준의 여러 호 중에서 근원이 대표적이다.


동경미술학교 졸업 이후


김용준은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한 이후 1928년, 다시 조선으로 귀국했다. 귀국한 후로는 서울에서 모교인 서울 중앙중학교와 보성중학교에서 미술 교사로 재직하면서[9] 길진섭과 함께 1934년 목일회를 창립하는 등 활발히 활동했다.[10] 1934년 일제가 '서화협회'를 없애기 위해 '조선미술전람회'를 만들자 이를 거부하고 '목일회' 조직에 동참한 것이다. 그리고 이와 함께 서양유화를 버리고 동양화에 뛰어들었다. 신문은 "일본에 가서 몇년 동안 유화수업을 하고 온 그로서 이러한 용단을 내린다는 것은 전공을 바꾸는 실무적인 문제가 아니었다"며 "그 밑바탕에는 그의 사상미학관에서의 근본적인 변화가 있었다"고 해석했다[11]서양화를 전공했던 그의 경력과 달리, 그는 민족사회의 서화협회전람회에만 몇 번 참가했을 뿐 서양화가로서의 작품활동을 지속하지 않았다.[12] 그 이유는 무엇일까? 도쿄미술학교의 서양화과 졸업 무렵, 김용준의 동양화에 대한 하대와 서양화가로서의 근거 없는 우월감은 조선시대 3대 화가인 오원 장승업의 기명절지도의 일격으로 무너지고 만다. 항아리의 입을 둥글게 그리지 않고 극단의 삼각으로 그려버린 오원의 패기에 입을 다물지 못했고, 해부해놓은 생선의 육질이 마치 살아 있는 듯한 생동감을 주는 그 강렬한 느낌 앞에서 전율했다고 한다. 이 때의 충격은 그가 후일 동양화와 동양화이론으로 관심을 선회한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고 술회한다. 김용준이 남종문인화풍의 추사를 얼마나 흠모했던지 “추사라면 표구소까지 뒤지고 다니며 그의 글씨의 외경 앞에서 떠날 줄 모르고 연필로 자형을 뜨는 김용준의 모습은 거의 종교적인 경건함을 풍기고 있다”고 그의 친구 소설가 이태준은 증언한다.[13] 1938년 무렵부터는 전통적인 수묵화에 손대기 시작하였으나 뚜렷한 면모는 아니었다. 반면, 신문·잡지에 미술평과 미술관계 시론(時論) 등을 기고하면서 평론가로서 활약하였다.[14] 그는 작품 활동 뿐 아니라 미술사 연구와 미술 평론계에서도 선구자 격의 위치를 차지한 인물이다.


광복 이후


1945년 광복 후에는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부 창설에 참여하여[15] 교수로 재직하며[16] 전통회화의 이론 강의를 맡다가, 동국대학교로 교직을 옮겼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공산체제에 영합하여 좌익색을 드러내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을 접수하여 학장이 되는 등 몇 달간 맹활약하였고, 9·28서울수복 때에 월북하였다.[17] 1948년 그의 호를 딴 수필집인 『근원수필』을 출간하기도 했다.[18] 뒤이어 1년 뒤인 1949년, 한국미술사를 통시적으로 정리한 『조선미술대요』를 저술하여 큰 호평을 받았다. 북한의 무소속 대변지인 주간 <통일신보>는 이러한 김용준의 행보를 두고 "그는 전통회화인 조선화의 표현기교를 현대적으로 발전시키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조선미술역사를 파고들었고 재치가 넘쳐나는 화조화와 산수풍경화의 유산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평가했다.[19]


월북 이후


김용준은 1950년 9월 28일 국군의 서울 수복으로 북한의 전선이 후퇴하면서 함께 월북을 단행했다. 전통적인 모더니즘 계열에서 정지용, 이태준과 궤를 같이 하면서 광복 전·후로 좌익 예술계와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던 김용준의 월북 동기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학생으로 국대안 파동 때 미 군정과 충돌해 수감되었다가 풀려난 김진항의 추대로 한국 전쟁 중 얼떨결에 학장이 되었다가 월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설과, 공산주의자였던 부인의 권유로 함께 북으로 갔다는 설이 있다. 월북한 후에는 조선미술가동맹과 조선건축가동맹에 참가했으며 평양미술대학의 강좌장이 되었다. 정확한 연도가 파악되지 않으나 김용준은 월북 직후부터 조선미술가동맹의 위원을 역임했으며, 조선미술가동맹 조선화분과가 신설된 이후 1959년까지 위원장을 역임했다. 그는 1955년 『단원 김홍도』를 집필했으며, 1958년 『고구려 고분벽화 연구』 등을 집필하는가 하면, 1958년 중국을 방문한 이후 평양 국립중앙미술박물관에서 개인전인 《중국 방문 귀환전》을 개최했다. 1960년 이후부터는 북한 내부에서 조선화의 방향을 '채색화'로 집약되자, 그는 위상을 잃어갔고, 『조선미술』에 <채색화 기법>을 연재했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성혜랑이 2000년에 출간한 《등나무집》에서 자살이라고 기록하고 있다.성혜랑과 김용준은 이웃에 살고 있었는데, 1967년 김용준이 김일성의 사진이 들어 있는 신문을 그대로 밖에 버린 사실이 드러나 큰 처벌을 받을 위기에 놓이자 자결했다는 것이다. 성혜랑의 증언 외에 이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다른 근거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20]
1950년대 후반기 작품 가운데 대표작은 ‘제6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서 금메달을 수상한 <춤>(1957), <묘향산>(1957), ‘공화국창건 10주년 경축 국가미술전람회’ 2등 수상작 <강냉이>(1958) 등이다. 미술사가로서 김용준은 북한 화단의 전통 계승에 대한 논쟁에서 문인·수묵화에 대한 우월성과 계승의 당위성을 주장하여 조선화 성립 과정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문인화의 사의적(寫意的, 사물의 형태보다 내용이나 정신에 치중하여 그리는) 표현을 사실 묘사의 높은 단계로 제시하여 사물의 진실성을 고양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김용준의 수묵화론은 조선화의 태동기라고 할 수 있는 1960년대 초까지 화단의 주류적 입장에 위치하였으나, 이후 이어지는 전통에 대한 논쟁에서 김용준의 견해는 복고주의로 비판받게 된다. 김용준은 평양미술대학 교수로서 북한 화단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조선미술사』, 『조선화기법』(1959), 『조선화채색법』(1962), 『단원 김홍도』를 집필하였다. 미술교육사업의 성과를 인정받아 1962년 예술학 부교수 학직을 수여받았다. 이외 여러 직책을 맡았으며 미술작품창작과 교수교양사업의 공로로 표창장을 수여받았다.[21]





연구


논저 목록

저자명 기사명 단행본/잡지명 권호 출판사 출판일자 분류
김용준 조선화의 표현 형식과 그 취제 내용에 대하여 력사과학 2 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5502 잡지
김용준 18세기의 선진적 사실주의 화가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 (그의 탄생 195주년을 맞이하면서) 력사과학 4 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5504 잡지

근원수필(1948)

『근원수필』은 한국화가·미술평론가·미술사학자·수필가로서 6·25전쟁 때 월북해 1967년 사망한 근원(近園) 김용준(金瑢俊)이 1948년에 출간한 수필집이다. 총 30편의 수필이 들어 있는데, 「매화」, 「검려지기(黔驢之技)」, 「두꺼비 연적(硯滴)을 산 이야기」, 「추사(秋史) 글씨」, 「노시산방기(老柿山房記)」, 「원수원(袁隨園)과 정판교(鄭板橋)와 빙허(憑虛)와 나와」, 「승가사(僧伽寺)의 두 고적(古蹟)」 등 30편의 수필이 실려 있다.『근원수필』에는 당시의 사상 체계를 꿰뚫어 보면서도 옛것에 대한 애정을 유지하였던 김용준의 문(文)·사(史)·철(哲)이 잘 녹아 있으며, 예스럽고 담박하면서도 격조 높은 언어 구사로 글쓰기의 전형을 보여 주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또한『근원수필』은 한국 현대 수필의 근원으로 일컬어지며, 수필 문장의 진정한 맛이 무엇인가를 보여 준 작품이란 평가를 받는다. 현재도 『근원수필』은 ‘문학과 비(非)문학의 장르 구분을 넘어 광복 전후 남겨진 문장 가운데 가장 순도 높은 글’, ‘한국 수필 문학의 백미’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한국 수필 문학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22]


조선미술대요(1949)

『조선미술대요』에서는 멀리 석기시대부터 삼국, 통일신라, 고려, 조선시대까지 시대별 우리나라 미술의 성격과 특징을 건축ㆍ조각ㆍ서화ㆍ공예의 순서로 짚고 있다. 김용준 당대인 일제시대와 해방 직후의 미술도 간략하게나마 다루고 있다.‘패기로 일관된 고구려 미술, 웅혼하고 비약적인 신라의 미술, 화려하고 명랑한 백제의 미술, 그 모든 요소를 종합한 황금시대 통일신라의 미술, 섬약하나마 우미하고 애련하나마 미의 전당에서 떠날 날이 없었던 고려의 미술, 실질적이고 현실적이며 소박하고도 묵중하며 평민적인 조선의 유교미술’이라는 서술은 우리 미술의 시대별 특징을 제대로 추려낸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의 학문적 성과와 한계에 대해서는 2004년 인물미술사학회(회장 윤범모)가 연 근원 김용준 탄생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 박은순 덕성여대 교수가 발표한 바 있다. 한국미술의 성격과 특징을 긍정적ㆍ적극적으로 해석한 점, 우리 문화와 미술의 형성 과정에 외국과의 교류를 인정하고 그 양상을 비교하는 비교미술사학적 방법을 택한 것, 구수하면서도 느긋하고 정감어린 문체로 이후 이동주 최순우 유홍준 등으로 이어지는 수殼?미술사 서술 방식의 원형을 제시한 점도 성과라고 평가했다. 반면 기후나 지리, 풍토를 미술의 특징과 결부하는 전형성, 일제 관학이 펴낸 자료 <고적도보> 를 1차 자료로 쓴 점, 조선시대 미술을 소홀히 다룬 점 등은 시대적 한계를 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23]


단원 김홍도(1955)

김용준은『단원 김홍도』를 통해 15개의 작품에 대한 상세한 해설을 제시하였다. 『단원 김홍도』에서 주목할만한 점은 <투견도>와 관련된 김용준의 서술이다. 기존에 김홍도의 작품으로 인정되지 않았던 <투견도>에 대해 김용준은 김홍도의 작품으로 비정하면서 이를 18세기 경 확산되었던 외래화풍의 영향으로 제작된 그림으로 규정하였다. 또한 김홍도의 생년에 대해서는 비록 후에 김홍도의 생년이 수정되었지만, 그는 1760년으로 비정하면서 김홍도의 예술성에 주목해 천재화가임을 확신했다. 그 뿐만이 아니라 김용준은 김홍도의 풍속도와 신선도에서 확인한 인물표현 방식을 회화 창작에도 적극 적용했다. 1950년대 중반 이후 천리마시대에 필요한 ‘인물형상의 전형성’이라는 개념이 미술계에 쟁점으로 부각되었을 때 유화 분야에서는 그 인물형상의 모델과 지침을 소련미술에서 찾았다. 반면 조선화 분야에서는 조선 후기 풍속도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해 인물 형상의 조형적 특징을 김홍도를 비롯한 조선시대의 인물화에서 찾으려고 했다. 김용준이 1950년대 중반에 발표한 김홍도에 관한 글들이 바로 그 노력의 산물이다.[24]





데이터


TripleData

Source (A) Target (B) Relationship
Person: 김용준 Institution: 서울중앙중학교 A graduates B
Person: 김용준 Institution: 중앙고등보통학교 A graduates B
Person: 김용준 Institution: 동경미술학교 A graduates B
Person: 김용준 Group: 목일회 A isMemberOf B
Person: 김용준 Institution: 서울대학교 동양화과 A worksAt B
Person: 김용준 Institution: 동국대학교 A worksAt B
Person: 김용준 Institution: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A worksAt B
Person: 김용준 Institution: 평양미술대학 A worksAt B
Person: 김용준 Group: 조선미술가동맹 A isMemberOf B
Person: 김용준 Group: 조선건축가동맹 A isMemberOf B
Person: 김용준 Group: 과학원고고학연구소 A isMemberOf B
Person: 김용준 Book: 『근원수필』 A creator B
Person: 김용준 Book: 『조선미술대요』 A creator B
Person: 김용준 Book: 『조선미술사』 A creator B
Person: 김용준 Book: 『조선화기법』 A creator B
Person: 김용준 Book: 『조선화채색법』 A creator B
Person: 김용준 Book: 『단원김홍도』 A creator B



Timeline



Network Graph






참고자원



1. 이구열, "김용준 (金瑢俊)"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 "김용준 (1904년)" 『위키백과』, 2024.05.04.
3. 조정훈, "월북 조선화 대가, 김용준의 예술세계: '조선화에 애국의 마음을 담다' <통일신보>" 『통일뉴스』, 2014.12.15, 통일뉴스
4. 정형렬, "[정형렬의 북한미술 산책 김용준의 '화훼도'... 색채주의 조선화 화법의 모드로 변신]" 『New Quest』, 2023.01.03, 넥스터스미디어 주식회사
5. 조대안, "용인일보 소장 :한국근대문학, 초간본으로 만나다《11》근원수필 - 김용준" 『용인일보』, 2023.02.02, 용인일보"
6. 오미환, "[우리 시대의 명저 50 <11> 김용준 ‘조선미술대요']" 『한국일보』, 2007.03.14, 한국일보
7. 김미정, 「김용준 저 『단원 김홍도』해제: 고독한 천재의 눈에 비친 사실주의 화가 김홍도」, 『근대서지』, 근대서지학회






주석


  1. 이구열, "김용준 (金瑢俊)"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 조정훈, "월북 조선화 대가, 김용준의 예술세계: '조선화에 애국의 마음을 담다' <통일신보>" 『통일뉴스』, 2014.12.15, 통일뉴스
  3. 이구열, "김용준 (金瑢俊)"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4. 조정훈, "월북 조선화 대가, 김용준의 예술세계: '조선화에 애국의 마음을 담다' <통일신보>" 『통일뉴스』, 2014.12.15, 통일뉴스
  5. "김용준 (1904년)" 『위키백과』, 2024.05.04.
  6. 이구열, "김용준 (金瑢俊)"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7. "김용준 (1904년)" 『위키백과』, 2024.05.04.
  8. 조정훈, "월북 조선화 대가, 김용준의 예술세계: '조선화에 애국의 마음을 담다' <통일신보>" 『통일뉴스』, 2014.12.15, 통일뉴스
  9. 정형렬, "[정형렬의 북한미술 산책 김용준의 '화훼도'... 색채주의 조선화 화법의 모드로 변신]" 『New Quest』, 2023.01.03, 넥스터스미디어 주식회사
  10. "김용준 (1904년)" 『위키백과』, 2024.05.04.
  11. 정형렬, "[정형렬의 북한미술 산책 김용준의 '화훼도'... 색채주의 조선화 화법의 모드로 변신]" 『New Quest』, 2023.01.03, 넥스터스미디어 주식회사
  12. 이구열, "김용준 (金瑢俊)"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13. 조정훈, "월북 조선화 대가, 김용준의 예술세계: '조선화에 애국의 마음을 담다' <통일신보>" 『통일뉴스』, 2014.12.15, 통일뉴스
  14. 이구열, "김용준 (金瑢俊)"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15. 이구열, "김용준 (金瑢俊)"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16. "김용준 (1904년)" 『위키백과』, 2024.05.04.
  17. 이구열, "김용준 (金瑢俊)"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18. "김용준 (1904년)" 『위키백과』, 2024.05.04.
  19. 조정훈, "월북 조선화 대가, 김용준의 예술세계: '조선화에 애국의 마음을 담다' <통일신보>" 『통일뉴스』, 2014.12.15, 통일뉴스
  20. "김용준 (1904년)" 『위키백과』, 2024.05.04.
  21. 조대안, "용인일보 소장 :한국근대문학, 초간본으로 만나다《11》근원수필 - 김용준" 『용인일보』, 2023.02.02, 용인일보
  22. 오미환, "[우리 시대의 명저 50 <11> 김용준 ‘조선미술대요']" 『한국일보』, 2007.03.14, 한국일보
  23. 조대안, "용인일보 소장 :한국근대문학, 초간본으로 만나다《11》근원수필 - 김용준" 『용인일보』, 2023.02.02, 용인일보
  24. "김미정, 「김용준 저 『단원 김홍도』해제: 고독한 천재의 눈에 비친 사실주의 화가 김홍도」, 『근대서지』, 근대서지학회, 2020, pp. 588-5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