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가의 태생"의 두 판 사이의 차이

North Korea Humanities

잔글 (문자열 찾아 바꾸기 - "http://dh.aks.ac.kr" 문자열을 "https://dh.aks.ac.kr" 문자열로)
 
(사용자 3명의 중간 판 59개는 보이지 않습니다)
1번째 줄: 1번째 줄:
 
__NOTOC__
 
__NOTOC__
 
<font face="함초롬돋움">
 
<font face="함초롬돋움">
{{버튼클릭|[[:분류:ArticleJD|진단학보 원고(Article) 목록으로 이동하기]]}}  {{버튼클릭|[[XML 문서 다운받기]]}}
+
{{버튼클릭|[[:분류:ArticleJD|진단학보 원고(Article) 목록으로 이동하기]]}}  {{버튼클릭|[https://dh.aks.ac.kr/~nkh/xml/jd/JDA193411056.xml XML 문서 보기]}}
 
<br/><br/>
 
<br/><br/>
 
{{원고정보JD
 
{{원고정보JD
9번째 줄: 9번째 줄:
 
|원제목= 朝鮮 詩歌의 胎生
 
|원제목= 朝鮮 詩歌의 胎生
 
|학술지= [[진단학보]]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진단학보1]]
+
|수록권호= [[진단학보 1]]
 
|발행기관= [[진단학회]]
 
|발행기관= [[진단학회]]
 
|저자= [[조윤제]]
 
|저자= [[조윤제]]
 
|역자=  
 
|역자=  
 
|집필일자=  
 
|집필일자=  
|게재연월= 193411
+
|게재연월= 1934년11월
|시작쪽= 56
+
|시작쪽= 056
|종료쪽= 85
+
|종료쪽= 085
|전체쪽= 30
+
|전체쪽= 030
 
|범주= 논문
 
|범주= 논문
 
|분야= 문학
 
|분야= 문학
25번째 줄: 25번째 줄:
 
----
 
----
 
{{해제
 
{{해제
|내용=내용을 입력합니다.@
+
|내용=조윤제의 「조선 시가의 태생」은 『진단학보』 1권(1934.11.)에 실린 글이다. 이 글은 1장 "서언", 2장 "원시 시가의 내포", 3장 "조선 원시 시가에 관한 문헌", 4장 "그 문헌의 해석", 5장 "원시 종교와 시가", 6장 "결언"으로 구성된다. 1장에서는 향가 발생 이전 조선시가의 첫 단계에 대한 검토 필요성을 요청한다. 2장에서는 원시 시가를 아직 음악 및 무용과 결합한 ballad dance로 제시한다. 제3장과 제4장에서는 문헌 검토를 바탕으로 가무가 수반되는 종교 의식을 제천 및 제신양식, 기도 및 주원(呪願), 장의로 구분한다. 제5장에서는 원시시가의 주술적 성격을 통해 문학과 종교의 관계를 논의한다. 이 글은 종교에 관한 에밀 뒤르켐, 빌헬름 분트의 논의, 일본 고대사 및 가요에 관한 쓰다 소키치, 니시무라 신지의 논의, 삼국시대에 대한 백남운의 논의를 두루 참조하면서 논지를 전개하고 있다.
 
}}
 
}}
 
{{상단이동|페이지={{PAGENAME}}}}
 
{{상단이동|페이지={{PAGENAME}}}}
32번째 줄: 32번째 줄:
 
----
 
----
 
{{목차
 
{{목차
|목차1=[[{{FULLPAGENAMEE}}#본문1: 제목@|제목@]]
+
|목차1=[[{{FULLPAGENAMEE}}#본문1: 서언|서언]]
|목차2=[[{{FULLPAGENAMEE}}#본문2: 제목@|제목@]]
+
|목차2=[[{{FULLPAGENAMEE}}#본문2: 원시 시가의 내포|원시 시가의 내포]]
|목차3=[[{{FULLPAGENAMEE}}#본문3: 제목@|제목@]]
+
|목차3=[[{{FULLPAGENAMEE}}#본문3: 조선 원시 시가에 관한 문헌|조선 원시 시가에 관한 문헌]]
|목차4=[[{{FULLPAGENAMEE}}#본문4: 제목@|제목@]]
+
|목차4=[[{{FULLPAGENAMEE}}#본문4: 그 문헌의 해석|그 문헌의 해석]]
|목차5=[[{{FULLPAGENAMEE}}#본문5: 제목@|제목@]]
+
|목차5=[[{{FULLPAGENAMEE}}#본문5: 원시 종교와 시가|원시 종교와 시가]]
 +
|목차6=[[{{FULLPAGENAMEE}}#본문6: 결언|결언]]
 
}}
 
}}
 
<br/><br/>
 
<br/><br/>
43번째 줄: 44번째 줄:
 
=='''본문'''==
 
=='''본문'''==
 
----
 
----
==='''본문1: 제목@'''===
+
==='''본문1: 서언'''===
 
----
 
----
 
{{Layout1
 
{{Layout1
|목차1원문1번= @
+
|목차1원문1번= {{TagSpage|56}}鄕歌는 오늘에 遺存한 朝鮮의 最古 詩歌라 하여도 過言이라 할 수 없다. 그러나 그 鄕歌란 것은 잘 考察하여 보면 비록 몇 首 되지 못하지마는, 形式이 아주 整齊되어 있어 이를 後世의 詩歌와도 比較하여볼 때, 한 規律에 整理되어 있는 定型詩 같이도 보인다. 世界 一般 文學史上의 詩歌 發達의 經路를 볼 때, 所謂 定型詩까지에 發達함에는 長久한 歷史의 背景을 가지는 듯하니, 일로 보면 鄕歌는 朝鮮의 最古 遺存 詩歌라고는 할 수 있을지언정,{{TagPage|57-1}}朝鮮의 最初 詩歌라고는 할 수 없다. 文獻에도 그 內容은 傳하지 못하지마는, 이름만이라도 鄕歌 以前에 兜率歌 詞腦歌 等의 歌名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니까, 더욱이 말할 것도 없다.
|목차1원문2번= @
+
|목차1원문2번= {{TagSpage|57-2}}또 兜率歌, 詞腦歌라 할지라도, 이것이 最初의 詩歌라고는 아직 할 수 없다. 왜 그러냐 하면 詩歌의 정말 最初는 極端이 말하면 거의 人間史의 最初와도 同一히 論하지 않으면 안 되겠지마는, 그렇지 안다 하더라도 詩歌는 自然人의 呼訴에 벌서 始作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起源的 發達은 極히 遙遠한 것이 되어 兜率歌、詞惱歌 等은 그에 比하면 헐신 後代의 產品이라 하여야 될 것이다. 元體 詩歌에 對하야 이름이 붙는 것만도 한 가지 後產의 證據가 되는 것이니, 아무 形式的 規定이 없었다 한다면 다른 것과 區別할 이름은 不必要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와 같은 것은 지금 이 硏究에는 直接 關係가 되지 않은만치 훨신 발달한 詩歌고, 그보다는 차라리 더 素樸한 原始 詩歌가 硏究의 對象이 될 것이다. 漠然히 原始 詩歌라 할지라도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極히 抽象的 그 起源에까지 遡上하는 것도 또한 無意味한 것이니까, 多少는 時代가 늘어지는 嫌이 있다 하드라도 具體的으로 事實을 잡을 수 있을 만한 程度에 이르지 않으면 研究의 價値가 되지 않을 것이다.
|목차1원문3번= @
+
|목차1원문3번= {{TagSpage|57-3}}여기서 말할 것도 實로 거기서부터라야 될 것이다. 여기에 내가 朝鮮 詩歌의 起源이라 하지 아니하고 「朝鮮詩歌의 胎生」이라 한 것도 卽 그러한 意味에서 나온 것이니 나는 이 小論으로 朝鮮 詩歌의 부터 發達해온 바의 淵源을 보살필가 한다.
|목차1원문4번= @
 
|목차1원문5번= @
 
  
|목차1해독문1번= @
+
|목차1해독문1번= 향가는 오늘에 유존(遺存)한 조선의 최고(最古) 시가라 하여도 과언이라 할 수 없다. 그러나 그 향가란 것은 잘 고찰하여 보면 비록 몇 수 되지 못하지마는, 형식이 아주 정제되어 있어 이를 후세의 시가와도 비교하여 볼 때, 한 규율에 정리되어 있는 정형시 같이도 보인다. 세계 일반 문학사상의 시가 발달의 경로를 볼 때, 소위 정형시까지에 발달함에는 장구한 역사의 배경을 가지는 듯하니, 일로 보면 향가는 조선의 최고 유존 시가라고는 할 수 있을지언정, 조선의 최초 시가라고는 할 수 없다. 문헌에도 그 내용은 전하지 못하지만은, 이름만이라도 향가 이전에 도솔가(兜率歌), 사뇌가(詞腦歌) 등의 가명(歌名)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니까, 더욱이 말할 것도 없다.
|목차1해독문2번= @
+
|목차1해독문2번= 또 도솔가(兜率歌), 사뇌가(詞腦歌)라 할지라도, 이것이 최초의 시가라고는 아직 할 수 없다. 왜 그러냐 하면 시가의 정말 최초는 극단이 말하면 거의 인간사의 최초와도 동일히 논하지 않으면 안 되겠지만은, 그렇지 안다 하더라도 시가는 자연인의 호소에 벌서 시작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기원적 발달은 극히 요원한 것이 되어 도솔가(兜率歌), 사뇌가(詞腦歌) 등은 그에 비하면 훨씬 후대의 산품이라 하여야 될 것이다. 원체 시가에 대하야 이름이 붙는 것만도 한 가지 후산(後產)의 증거가 되는 것이니, 아무 형식적 규정이 없었다 한다면 다른 것과 구별할 이름은 불필요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와 같은 것은 지금 이 연구에는 직접 관계가 되지 않은만치 훨씬 발달한 시가고, 그보다는 차라리 더 소박한 원시 시가가 연구의 대상이 될 것이다. 막연히 원시 시가라 할지라도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극히 추상적 그 기원에까지 소상(遡上)하는 것도 또한 무의미한 것이니까, 다소는 시대가 늘어지는 혐이 있다 하드라도 구체적으로 사실을 잡을 수 있을 만한 정도에 이르지 않으면 연구의 가치가 되지 않을 것이다.
|목차1해독문3번= @
+
|목차1해독문3번= 여기서 말할 것도 실로 거기서부터라야 될 것이다. 여기에 내가 조선 시가의 기원이라 하지 아니하고 「조선시가의 태생」이라 한 것도 즉 그러한 의미에서 나온 것이니 나는 이 소론으로 조선 시가의 부터 발달해 온 바의 연원을 보살필까 한다.
|목차1해독문4번= @
 
|목차1해독문5번= @
 
 
}}
 
}}
 
{{상단이동|페이지={{PAGENAME}}}}
 
{{상단이동|페이지={{PAGENAME}}}}
  
==='''본문2: 제목@'''===
+
==='''본문2: 원시 시가의 내포'''===
 
----
 
----
 
{{Layout2
 
{{Layout2
|목차2원문1번= @
+
|목차2원문1번= {{TagSpage|58-1}}詩歌는 自然의 呼訴에 그 萠芽를 트고 있으나, 이것이 具體的으로 들어나기는 原始 民謠인 Ballad dance다. 所謂 Ballad dance라는 事實은 原始的인 音樂、詩歌、舞踊의 結合을 意味하는 것이니, 詩歌의 源泉은 여기 있다고 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다. 이 三者에 對하여서는 그 어느 것이 더 起源的인가를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 論難이 있어, 彧은 詩歌를 다른 二者보다 最初 것이라 하는 이도 있고, 彧은 舞踊을 그라 하는 이도 있지마는, 一般은 以上 三者의 結合體인 Ballad dance가 가장 原始的이라 하는 듯하다.
|목차2원문2번= @
+
|목차2원문2번= {{TagSpage|58-2}}即 原始 詩歌는 아직 分化하지 않은 音樂、舞踊과의 結合 藝術로서, 一一의 作品에는 다 音樂的、舞踊的 要素를 具有하고 있다. 그로오제도 {{TagRef|1}}「原始 民族의 舞踊, 詩歌 及 音樂은 自然히는 一致되어 있고, 다만 人爲的 抽象的으로 볼 때에만 分離할 수 있다. 따라서 萬若 우리가 이들 原始的 藝術의 各個 狀勢와 效果를 正確히 理解하고 評價하려면, 우리는 그들이 各各 獨立하여있들 않고 極히 密接한 有機的 結合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늘 留意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다」<ref>안등홍 역 「藝術の始原」 364頁(安藤弘 譯 「藝術の始原」 三六四頁)</ref>라고 말하였다. 그러면 三者 即 詩歌, 音樂, 舞踊은 原始時代에 있어서 如何한 關係와 結合 程度에 있는가. 그로오제는 다시 詩와 音樂과의 關係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모든 原始的 敍情詩人이 同時에 作曲者일 것, 모든 原始的 詩는 다만 그것이 詩的 作品이 될 뿐 아니라, 또한 音樂的 作品일 것은 우리들이 말해 온 바다. 詩人에 對하여는 詩歌의 文句가 그 自體의 意味를 가지고 있겠지마는, 그러나 다른 사람{{TagPage|59-1}}에 있어서는 흔히 文句는 單純한 旋律의 支持者 됨에 지나지 못한다. 事實 우리도 亦是 詩歌의 形式때문에 그 內容을 거침없이 犧牲하여 버리는 일이 있다. 아이야아는 「많은 오오스토리아人은 그 自身의 鄕土에서 부르는 諸多의 詩歌 意味를 充分히 說明하지 못한다. 그와 같이 그들이 붙이는 說明이 極히 不完全하다는 것은 詩歌의 內容보다 綴音의 長短에 一層 重要視한 結果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하였다. 또 다른 著者는 {{TagRef|2}}「모든 코로 보리의 詩歌에 있어서 리듬을 變更하고 또 保全하기 爲하야 分明히 無意味한 것을 부르는 만큼 그들은 語句를 反覆하고 또 換置한다」라 記述하였다. 形式에 한 興味가 민콤비에서도 이에 미치지 않을만치 重要한 것이 된다. …中略… 이와 같이 우리는 最低級의 文明에 있는 敍情詩는 主로 音樂的 性質을 가지고 있고, 詩的 意味는 다만 第二次的으로 가짐에 不過한다는 結論에 達하지 않을 수 없다」<ref>동상 321-323頁(同 上 三二一─三二三頁)</ref>라고. 即 原始時代의 詩歌와 音樂은 이를 最低級 文化民族의 例를 볼 때, 온전히 分離할 수 없음을 說破하였다.
|목차2원문3번= @
+
|목차2원문3번= {{TagSpage|59-2}}다음은 舞踊과의 關係를 생각하여 보자. 舞踊은 原始人 生活의 重要한 表現이 되는 것이니, 그들은 잘 노래 부름과 同時에 잘 舞踊한다 할 것이다. 오늘의 未開人에서 例를 들어볼지라도, 그들은 實로 舞踊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한다. 그들의 舞踊으로서 有名한 것은 오스토라리아人의 코로보리다. 이것은 果實의 成熟, 牡蠣을 採撈하럴 때, 靑年의 入社式, 友族과의 會合, 戰鬪에 進發할 때, 많은 狩獵을 하였을 때, 舉行되는 것인데, 墺洲 全土에 퍼저 있어, 여러 사람의 旅行社에 記述되어 있으나, 大概는 類似한 것이니까, 一一이 列舉하기를 廢하고, 여기서는 그들 여러 가지를 綜合하야 紹介한 亦是 그로오제의 글을 一部分 引用하야 詩歌와 舞踊과의 關係를 보기로 하겠{{TagPage|60-1}}다. 그로오제는 먼저 大綱 이 舞踊의 始作될 때까지의 準備를 말하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TagRef|3}}「그리하야 코로보리는 始作되었다. 拍子가 正確히 保有됨은 놀랄 만하다. 노래와 運動이 다 같이 불리고 또 된다. 舞踊者들은 가장 잘 訓練된 바레에 一座와 같이 몰려서 움즉인다. 그들은 때로는 옆으로 뛰고, 때로는 前進하며, 一二步를 退却도 하야 모든 있을 만한 수탄 態度를 다하야 運動한다. 또 그들은 팔을 돌리기도 하고, 그 발을 굴르면서 몸을 폈다가 꾸부리었다가 한다. 指導者도 亦是 쉬지 않고 活動한다. 即 그는 그의 몽둥이로 拍子를 짚음과 同時에 一步 앞으로 一步 뒤로 움즉이면서 소리 높이 或은 고요히 늘 獨特한 鼻音의 노래를 노래 부른다. 또 그는 暫時도 한 곳에서 있지 않는다. 或은 舞踊者를 向하기도 하고, 或은 全力을 다하야 소리치는 女子 편을 向하기도 한다. 舞踊者들은 漸漸 더 興奮하여진다. 拍子木은 더 빨라지고, 運動은 더 빨라지며, 또 活潑하여진다. 舞踊者들은 그 몸을 疑心시러울만치 높이 地上을 뛰며 最後의 날카로운 高喊을 마치 한입에서 나온 듯이 一齊히 외친다. 조금 뒤에는 그들이 나오듯이 突然히 숲속으로 숨어 들어가고 場所는 暫時間 空虛한 체로 되어 있다. (下略)」<ref>동상 262-263頁(同 上 二六二─二六三頁)</ref>. 以上과 같은 舞踊이 하룻밤에 數次를 繼續한다. 그리고 이것은 夜間, 흔히 月夜에 施行되는데, 사람이 많은 때에는 一團 三四百名이 된 때도 있다 한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것을 宗敎的 祭儀로 보는 이도 있는 듯하나, 그는 여하튼 이로 因하야 그들이 얼마나 舞踊을 좋아하며 또 詩歌와 並行되는 것을 앎에 足할 듯하다.
|목차2원문4번= @
+
|목차2원문4번= {{TagSpage|60-2}}以上은 未開人間에서 아직 行하고 있는 實例로 詩歌, 音樂, 舞踊 三者의 互相的 關係를 본 것이니, 일부러 멀{{TagPage|61-1}}리 그들에 求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러한 關係는 가직히 우리들의 日常 生活中에서도 얻어볼 수 있는 것이다. 첫재 現在의 우리들에 心中의 感情이 激되면 激 될수록, 以上 三者의 分化한 發表를 滿足하지 않고, 가끔 原始的인 全身的 發現을 하게 되는 것은 누구나 다 經驗하고 있는 바이거니와, 그 外에 詩歌를 表示하는 言語中에서도 原始時代에는 三者가 不可分離의 狀態에 있었음을 말하여주는 것이 있는 듯하니, 朝鮮는 詩歌를 表示하는 대 漢語 系統語를 빼고는 實로 「노래」라는 한 말로 써 나왔다. 「노래」라는 말은 이를 語原的으로 쓰면 「놀애」라 되어 애는 날애, 돌애, 막애, 갈애 等에 보이는 바와 같이 動詞가 名詞格으로 變할 때 받는 接尾語이고, 그 基本 觀念은 「놀」에 있는 것이나, 「놀」의 觀念은 여러 가지로 解釋할 수 있으니, 첫재 우리들의 머리에 가장 敏速히 聯想되는 것은 遊興, 戱樂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놀애」는 「놀이」, 「놀음」이라는 말과도 直接 關係가 있게 된다. 即 「놀애」、「놀이」、「놀음」은 다 「놀」 一語의 發展인데 抽象的 性質的 表示語가 되어서는 「놀애」가 되고, 「놀」의 具體的 行動的 表示語가 되어서는 「놀이」 惑은 「놀음」으로 된 것을 斟酌할 수 있다. 그러므로 「놀애」라는 말의 根本 觀念을 的確히 把握할려면 그 具體的 表語인 「놀이」, 「놀음」의 觀念을 밝힘이 가장 速試일가 한다.
|목차2원문5번= @
+
|목차2원문5번= {{TagSpage|61-2}}「놀이」, 「놀음」은 遊興、戱樂、宴饗 等을 意味한 말인데 산두(山臺)놀이, 대감놀이, 端午놀이, 秋夕놀이, 꽃놀이, 뱃놀이, 紅同知놀음、員놀음, 豊年놀음 等 이들 實例를 보면 잘 그 內容을 알듯이 一種의 音樂이라면 音樂이라 할 수 있고, 一種의 舞踊이라면 舞踊이라 할 수 있고, 또 一種의 歌謠라면 歌謠라 할 수 있으며, 이들을 綜合한 一種 演劇이라면 演劇이라도 할 수 있어, 그들 어떤 것에는 充分히 內容을 分化할 수 없을, 마치 코로보리를{{TagPage|62-1}} 對하는 感이 있다. 即 詩歌, 音樂, 舞踊이 分化되지 못한 原始時代 詩歌 狀態를 여기에서 볼 수 없는가 하는 感을 얻는다. 그러면 이들 具體的 行動의 名詞 「놀이」, 「놀음」에 對한 抽象的 性質의 名詞 「놀애」 亦是 그와 같은 內容를 包含하고 있을 것은 容易히 進斷이 될 바와 같이 「노래」는 아직 音樂、舞踊과 分化하지 않은 時代의 詩歌에 寄與한 名稱이 오늘에 남아온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
|목차2원문6번= {{TagSpage|62-2}}以上으로 原始詩歌의 形態는 거의 闡明이 되었을 바와 같이 오늘날의 最低級 文化를 所有하고 있는 民族 사이의 行事, 或은 現在 우리의 一面的 表現形式으로 보든지, 또는 지금 아직 使用하여 오는 詩歌 表示語 語源的 解釋으로 보든지, 모두 詩歌, 音樂, 舞踊 三者가 極히 密接한 關係에 融合되어 그로오제의 結論을 演繹的으로 說明할 수 있었는 듯한데, 詩經 大序에는 이 三者의 關係를 理論的으로 說明하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목차2원문7번= {{TagSpage|62-3}}詩者、志之所之也、在心爲志、發言爲詩、情動於中、而形於言、言之不足、故嗟歎之、嗟歎之不足、故永歌之、永歌之不足、不知手之舞之足之蹈之也
 +
|목차2원문8번= {{TagSpage|62-4}}土居 敎授는 이 글을 評하야 {{TagRef|4}}「全身的 表情에 音樂과 詩歌의 合體한 것이 分離하고, 그것이 각각 獨立하야 다시 言語에서 思想이 獨立하게 된 過程을 꺼꾸루 내다본 것이 아닌가」<ref>토거광지 저 「문학서설」 제2판. 38道(土居光知 著 「文學序說」 第二版. 三八道.)</ref> 한 것은 多少 現代的 說明의 色彩를 띤 것이나, 要컨대 詩經의 說明은 原始時代의 詩歌 形態를 心理的으로 說明한대 對하야 注目의 價値가 있을 듯하다.
 +
|목차2원문9번= {{TagSpage|62-5}}그러면 우리는 原始 詩歌에 對하야 自然 다음과 같은 態度를 取하게 될 것이다. 即 詩歌를 音樂、舞踊과 分離할 수 없고, 舞樂도 詩歌 同樣으로 取扱하게 될 것이니, 結局은 이 三者의 綜合的 硏究를 하게 되어, 問題는 그中{{TagPage|63-1}}에서 如何히 詩歌라는 것을 獨立的으로 내다본다 하는 것이나, 이것은 다른 二者와 分化되지 않은 以上, 온전히 不可能한 일이고, 다만 抽象的으로만이 認識할 수 있는 것이다. 또 原始 詩歌에는 그까지 具體的으로 分離하러 할 必要도 없다. 왜 그러냐 하면, 分化하지 않은 以前의 狀態 그것이 우리들 目的의 對象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本論에 있어서도 實로 그러한 態度로서 論述을 進展시키려 한다.
  
|목차2해독문1번= @
+
|목차2해독문1번= 시가는 자연의 호소에 그 맹아를 트고 있으나, 이것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기는 원시 민요인 Ballad dance다. 소위 Ballad dance라는 사실은 원시적인 음악, 시가, 무용의 결합을 의미하는 것이니, 시가의 원천은 여기 있다고 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다. 이 삼자에 대하여서는 그 어느 것이 더 기원적인가를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 논란이 있어, 혹은 시가를 다른 이자보다 최초의 것이라 하는 이도 있고, 혹은 무용을 그라 하는 이도 있지만은, 일반은 이상 삼자의 결합체인 Ballad dance가 가장 원시적이라 하는 듯하다.
|목차2해독문2번= @
+
|목차2해독문2번= 즉 원시 시가는 아직 분화하지 않은 음악, 무용과의 결합 예술로서, 일일의 작품에는 다 음악적, 무용적 요소를 구유하고 있다. {{TagPerson|[[그로오제]]}}도 「원시 민족의 무용, 시가 급 음악은 자연히는 일치되어 있고, 다만 인위적 추상적으로 볼 때에만 분리할 수 있다. 따라서 만약 우리가 이들 원시적 예술의 각개 상세와 효과를 정확히 이해하고 평가하려면, 우리는 그들이 각각 독립하여 있들 않고 극히 밀접한 유기적 결합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늘 유의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면 삼자 즉 시가, 음악, 무용은 원시시대에 있어서 여하한 관계와 결합 정도에 있는가. {{TagPerson|[[그로오제]]}}는 다시 시와 음악과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모든 원시적 서정시인이 동시에 작곡자일 것, 모든 원시적 시는 다만 그것이 시적 작품이 될 뿐 아니라, 또한 음악적 작품일 것은 우리들이 말해 온 바다. 시인에 대하여는 시가의 문구가 그 자체의 의미를 가지고 있겠지만은, 그러나 다른 사람에 있어서는 흔히 문구는 단순한 선율의 지지자 됨에 지나지 못한다. 사실 우리도 역시 시가의 형식 때문에 그 내용을 거침없이 희생하여 버리는 일이 있다. {{TagPerson|[[아이야아]]}}는 「많은 오오스토리아인은 그 자신의 향토에서 부르는 제다의 시가 의미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그와 같이 그들이 붙이는 설명이 극히 불완전하다는 것은 시가의 내용보다 철음(綴音)의 장단에 일층 중요시한 결과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하였다. 또 다른 저자는 「모든 코로보리의 시가에 있어서 리듬을 변경하고 또 보전하기 위하야 분명히 무의미한 것을 부르는 만큼 그들은 어구를 반복하고 또 환치한다」라 기술하였다. 형식에 한 흥미가 민콤비에서도 이에 미치지 않을만치 중요한 것이 된다. …중략…… 이와 같이 우리는 최저급의 문명에 있는 서정시는 주로 음악적 성질을 가지고 있고, 시적 의미는 다만 제이차적으로 가짐에 불과한다는 결론에 달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즉 원시시대의 시가와 음악은 이를 최저급 문화민족의 예를 볼 때, 온전히 분리할 수 없음을 설파하였다.
|목차2해독문3번= @
+
|목차2해독문3번= 다음은 무용과의 관계를 생각하여 보자. 무용은 원시인 생활의 중요한 표현이 되는 것이니, 그들은 잘 노래 부름과 동시에 잘 무용한다 할 것이다. 오늘의 미개인에서 예를 들어볼지라도, 그들은 실로 무용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한다. 그들의 무용으로서 유명한 것은 오스토라리아人의 코로보리다. 이것은 과실의 성숙, 모려(牡蠣)를 채로(採撈)할 때, 청년의 입사식, 우족과의 회합, 전투에 진발할 때, 많은 수렵을 하였을 때, 거행되는 것인데, 오주(墺洲) 전토에 퍼져 있어, 여러 사람의 여행사에 기술되어 있으나, 대개는 유사한 것이니까, 일일이 열거하기를 폐하고, 여기서는 그들 여러 가지를 종합하여 소개한 역시 {{TagPerson|[[그로오제]]}}의 글을 일부분 인용하여 시가와 무용과의 관계를 보기로 하겠다. {{TagPerson|[[그로오제]]}}는 먼저 대강 이 무용의 시작될 때까지의 준비를 말하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리하야 코로보리는 시작되었다. 박자가 정확히 보유됨은 놀랄 만하다. 노래와 운동이 다 같이 불리고 또 된다. 무용자들은 가장 잘 훈련된 바레에 일좌와 같이 몰려서 움직인다. 그들은 때로는 옆으로 뛰고, 때로는 전진하며, 일이보를 퇴각도 하야 모든 있을 만한 숱한 태도를 다하여 운동한다. 또 그들은 팔을 돌리기도 하고, 그 발을 구르면서 몸을 폈다가 꾸부리었다가 한다. 지도자도 역시 쉬지 않고 활동한다. 즉 그는 그의 몽둥이로 박자를 짚음과 동시에 일보 앞으로 일보 뒤로 움직이면서 소리 높이 혹은 고요히 늘 독특한 비음의 노래를 노래 부른다. 또 그는 잠시도 한 곳에서 있지 않는다. 혹은 무용자를 향하기도 하고, 혹은 전력을 다하여 소리치는 여자 편을 향하기도 한다. 무용자들은 점점 더 흥분하여진다. 박자목은 더 빨라지고, 운동은 더 빨라지며, 또 활발하여진다. 무용자들은 그 몸을 의심스러울만치 높이 지상을 뛰며 최후의 날카로운 고함을 마치 한입에서 나온 듯이 일제히 외친다. 조금 뒤에는 그들이 나오듯이 돌연히 숲속으로 숨어 들어가고 장소는 잠시간 공허한 체로 되어 있다. (하략)」. 이상과 같은 무용이 하룻밤에 수차를 계속한다. 그리고 이것은 야간, 흔히 월야에 시행되는데, 사람이 많은 때에는 일단 삼사백 명이 된 때도 있다 한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것을 종교적 제의로 보는 이도 있는 듯하나, 그는 여하튼 이로 인하여 그들이 얼마나 무용을 좋아하며 또 시가와 병행되는 것을 앎에 족할 듯하다.
|목차2해독문4번= @
+
|목차2해독문4번= 이상은 미개인간에서 아직 행하고 있는 실례로 시가, 음악, 무용 삼자의 호상적 관계를 본 것이니, 일부러 멀리 그들에 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러한 관계는 가까이 우리들의 일상 생활 중에서도 얻어볼 수 있는 것이다. 첫째 현재의 우리들에 심중의 감정이 격되면 격 될수록, 이상 삼자의 분화한 발표를 만족하지 않고, 가끔 원시적인 전신적 발현을 하게 되는 것은 누구나 다 경험하고 있는 바이거니와, 그 외에 시가를 표시하는 언어 중에서도 원시시대에는 삼자가 불가분리의 상태에 있었음을 말하여주는 것이 있는 듯하니, 조선은 시가를 표시하는 데 한어 계통어를 빼고는 실로 「노래」라는 한 말로 써 나왔다. 「노래」라는 말은 이를 어원적으로 쓰면 「놀애」라 되어 애는 날애, 돌애, 막애, 갈애 등에 보이는 바와 같이 동사가 명사격으로 변할 때 받는 접미어이고, 그 기본 관념은 「놀」에 있는 것이나, 「놀」의 관념은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으니, 첫째 우리들의 머리에 가장 민속(敏速)히 연상되는 것은 유흥, 희락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놀애」는 「놀이」, 「놀음」이라는 말과도 직접 관계가 있게 된다. 즉 「놀애」, 「놀이」, 「놀음」은 다 「놀」 일어의 발전인데 추상적 성질적 표시어가 되어서는 「놀애」가 되고, 「놀」의 구체적 행동적 표시어가 되어서는 「놀이」 혹은 「놀음」으로 된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놀애」라는 말의 근본 관념을 적확히 파악하려면 그 구체적 표어인 「놀이」, 「놀음」의 관념을 밝힘이 가장 속시(速試)일까 한다.
|목차2해독문5번= @
+
|목차2해독문5번= 「놀이」, 「놀음」은 유흥, 희락, 연향 등을 의미한 말인데 산두(山臺)놀이, 대감놀이, 단오놀이, 추석놀이, 꽃놀이, 뱃놀이, 홍동지놀음, 원놀음, 풍년놀음 등 이들 실례를 보면 잘 그 내용을 알듯이 일종의 음악이라면 음악이라 할 수 있고, 일종의 무용이라면 무용이라 할 수 있고, 또 일종의 가요라면 가요라 할 수 있으며, 이들을 종합한 일종 연극이라면 연극이라도 할 수 있어, 그들 어떤 것에는 충분히 내용을 분화할 수 없을, 마치 코로보리를 대하는 감이 있다. 즉 시가, 음악, 무용이 분화되지 못한 원시시대 시가 상태를 여기에서 볼 수 없는가 하는 감을 얻는다. 그러면 이들 구체적 행동의 명사 「놀이」, 「놀음」에 대한 추상적 성질의 명사 「놀애」 역시 그와 같은 내용를 포함하고 있을 것은 용이히 진단이 될 바와 같이 「노래」는 아직 음악, 무용과 분화하지 않은 시대의 시가에 기여한 명칭이 오늘에 남아온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
|목차2해독문6번= 이상으로 원시 시가의 형태는 거의 천명이 되었을 바와 같이 오늘날의 최저급 문화를 소유하고 있는 민족 사이의 행사, 혹은 현재 우리의 일면적 표현형식으로 보든지, 또는 지금 아직 사용하여 오는 시가 표시어 어원적 해석으로 보든지, 모두 시가, 음악, 무용 삼자가 극히 밀접한 관계에 융합되어 {{TagPerson|[[그로오제]]}}의 결론을 연역적으로 설명할 수 있었는 듯한데, 시경 대서에는 이 삼자의 관계를 이론적으로 설명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목차2해독문7번= 詩者、志之所之也、在心爲志、發言爲詩、情動於中、而形於言、言之不足、故嗟歎之、嗟歎之不足、故永歌之、永歌之不足、不知手之舞之足之蹈之也
 +
|목차2해독문8번= {{TagPerson|[[土居光知|토거(土居) 교수]]}}는 이 글을 평하여 「전신적 표정에 음악과 시가의 합체한 것이 분리하고, 그것이 각각 독립하여 다시 언어에서 사상이 독립하게 된 과정을 거꾸로 내다본 것이 아닌가」 한 것은 다소 현대적 설명의 색채를 띤 것이나, 요컨대 시경의 설명은 원시시대의 시가 형태를 심리적으로 설명한 데 대하여 주목의 가치가 있을 듯하다.
 +
|목차2해독문9번=  그러면 우리는 원시 시가에 대하여 자연 다음과 같은 태도를 취하게 될 것이다. 즉 시가를 음악, 무용과 분리할 수 없고, 무악도 시가 동양으로 취급하게 될 것이니, 결국은 이 삼자의 종합적 연구를 하게 되어, 문제는 그중에서 여하히 시가라는 것을 독립적으로 내다본다 하는 것이나, 이것은 다른 이자와 분화되지 않은 이상, 온전히 불가능한 일이고, 다만 추상적으로만이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또 원시 시가에는 그까지 구체적으로 분리하려 할 필요도 없다. 왜 그러냐 하면, 분화하지 않은 이전의 상태 그것이 우리들 목적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론에 있어서도 실로 그러한 태도로서 논술을 진전시키려 한다.
 
}}
 
}}
 
{{상단이동|페이지={{PAGENAME}}}}
 
{{상단이동|페이지={{PAGENAME}}}}
  
==='''본문3: 제목@'''===
+
==='''본문3: 조선 원시 시가에 관한 문헌'''===
 
----
 
----
 
{{Layout3
 
{{Layout3
|목차3원문1번= @
+
|목차3원문1번={{TagSpage|63-2}}朝鮮 原始 詩歌에 關한 朝鮮편의 不幸히 많이 傳를 못 하였고, 겨우 隣邦 支那편에서 얼마끔 얻어볼 수 있는 것은 一種 奇蹟이라 할 수 있겠다. 後漢書 東夷傳에
|목차3원문2번= @
+
|목차3원문2번={{TagSpage|63-3}}夏后氏太康失德、夷人始畔、自少康己後、世服王化、家賓於王門、獻其樂舞
|목차3원문3번= @
+
|목차3원문3번={{TagSpage|63-4}}라 한 것이 글자대로 보아서는 支那에 알리게 된 東方樂舞의 最初일 것 같으나, 첫재 時代에 있어 信用하기 어렵고, 또 그 所謂 「夷人」의 指稱도 좀 漠然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同傳中에 「東夷率皆土署, 喜飮酒歌舞」라 한 것은 東夷人의 舞樂을 好하는 特性에 對하야 注意한 古來 支那人의 傳評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 東夷라 하는 것은 반듯이 朝鮮{{TagPage|64-1}}만을 指示한 것은 아니다. 널리 말하면 오늘에 滿洲, 日本이 다 이 稱號에 쓸어갈 것이니까, 이로서 朝鮮에 當한 것이라 할 수는 없지마는, 「喜歌舞」란 말은 뒤에 보아도 알 바와 같이 거의 常習的으로 支那人이 朝鮮에 對하야 쓰는 文字이니까, 敢히 朝鮮을 말한 것이리라 하여도 可할 듯한데, 魏志를 爲始하야 여러 史料 文獻에 朝鮮 方面의 記錄이 散在하여 있으나, 이것을 史料別로 하면 도리어 繁雜한 듯하니, 以下 地方別로 이를 整理하여 보자.
|목차3원문4번= @
+
|목차3원문4번={{TagSpage|64-2}}夫餘. 夫餘는 지금 滿洲의 新京, 吉林地方에 있던 民族으로 直接 우리 朝鮮과는 關係가 멀지 모르겠지마는, 後世 北部朝鮮의 覇權을 잡은 高句麗가 그 一部族이라고도 생각되니까, 間接으로 朝鮮內地 文化에 影響한 바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文化史上 朝鮮內에 編入하야 說明의 便宜를 얻고저 하나, 魏志 東夷傳에는 그들에 詩歌 生活를 다음과 같이 記錄하였다.
|목차3원문5번= @
+
|목차3원문5번={{TagSpage|64-3}}以殷正月祭天, 國中大會, 連日飮食歌舞, 名日迎鼓, 是時斷形獄, 解囚徒 ……(中略)……有軍事亦祭天, 殺生觀蹄, 以占其告凶
 +
|목차3원문6번={{TagSpage|64-4}}後漢書 東夷傳에도 殷 正月이 臘月로 되어있는 以外에는 大綱 同樣 意味읫 것이 씨어 있는데, 일로서 夫餘의 詩歌 生活은 두 가지 다른 性質의 것이 있는 것을 알겠다. 即 하나는 殷 正月(臘月)에 國中 例年行事로서 祭天儀典에 行하게 되는 歌舞요 또 하나는 非常的 行事로서 軍事가 있을 때에 歌舞를 演行하야 祭天의 儀를 올리는 것이다.
 +
|목차3원문7번={{TagSpage|64-5}}高句麗. 高句麗는 北部朝鮮에 地盤을 가지고 있어, 支那와 直接 隣接한 關係上 比較的 일부러 支那의 影響{{TagPage|65-1}}을 받았으리라 믿는다. 魏志 東夷傳에 「漢時賜鼓吹技人」이라 하였고, 後漢書에는 漢武帝時에 「賜鼓吹技人」이라 한 것으로 보면, 무슨 形式으로나마 支那樂이 朝鮮에 輸入되어 本國 歌樂에 影響을 주었을 것도 노상 못 믿을 일은 아닐 것 같다. 以上 記錄과 같이 國家對國家 關係에 歌舞音樂이 流傳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民間的으로 그러한 事實이 있었으리라는 것은 地理的 關係로 보아서 구태여 臆測은 되지 않으리라 한다. 그러나 이 支那樂 傳來 云云은 文化가 比較的 發達한 後代의 일이겠는데, 同 後漢書 東夷傳에는 그보다 더 原始的이고 또 固有의 詩歌的 生活을 記錄한 듯한 것이 있으니 即
 +
|목차3원문8번={{TagSpage|65-2}}其俗淫, 皆潔淨自喜, 暮夜輒男女羣聚倡樂, 好祠鬼神社稷零星, 常十月祭天, 大會, 名曰東盟, 其國東有大穴, 號襚神, 亦常十月迎而祭之, 云云
 +
|목차3원문9번={{TagSpage|65-3}}이다. 魏志 東夷傳에서도 뜸뜸이 以上과 같은 記錄을 주어모을 수 있다. 即
 +
|목차3원문10번={{TagSpage|65-4}}北民喜歌舞, 國中邑落, 暮夜男女羣聚, 相就歌戱……中略……以十月祭天, 國中大會, 名曰東盟……中略……其國東有大穴, 名隧穴, 十月國中大會, 迎隧神, 還於國東上祭之, 置木隧神御坐
 +
|목차3원문11번={{TagSpage|65-5}}라 한 것이다. 이는 要컨대 高句麗에는 每年 十月에 東盟이라는 하늘에 받드는 祭儀와 國家之神인 隧神에 받드는 祭儀와 兩大 祭儀가 있었는데, 이때에는 國中 大會가 열리어 暮夜에 男女가 群聚하야 相就歌戱를 하였으나, 이것이 全民族的 祭儀임에 따라 一二日에 마치는 것이 아니고 數日間에 亘하야 行하였으므로 其民 喜歌舞라 이를 만큼 極히 盛大하였었다는 것이 되겠다.
 +
|목차3원문12번={{TagSpage|66-1}}高句麗의 詩歌生活에 對한 記錄은 以上의 것 以外에 隋書 東夷傳에 또 하나 있는 것을 보겠다. 即
 +
|목차3원문13번={{TagSpage|66-2}}死者殯於屋內, 經三年, 擇吉日而葬, 居父母及夫之喪, 服皆三年, 兄弟三月, 初終哭泣, 葬則鼓舞作樂以送之, 埋訖、悉取死者生時服翫車馬, 置於墓側, 會葬者, 爭取而去
 +
|목차3원문14번={{TagSpage|66-3}}라는 것이니, 送死之時에 鼓舞作樂을 한다는 것이다. 父母 及 夫의 服은 三年이고 兄弟之服은 二月 云은 支那禮의 影響은 입은 듯하지마는、鼓舞作樂이란 것은 그러한 影響을 받지 않은 훨신 以前의 遺産이라 하겠다.
 +
|목차3원문15번={{TagSpage|66-4}}濊. 濊는 지금 江原道 地方에 있어, 北은 高句麗, 沃沮, 南은 辰韓에 接하고, 東은 大海에 臨하야 立國한 것인데, 所謂 史籍에 濊貊이라 하는 것이다. 그의 詩歌的 生活울 記錄한 것으로는 魏志 及 後漢書 東夷傳에
 +
|목차3원문16번={{TagSpage|66-5}}常用十月祭天, 晝夜飮酒歌儛, 名之儛天
 +
|목차3원문17번={{TagSpage|66-6}}이라는 것이 있다. 簡單한 記錄이나 高句麗의 東盟과 同樣 性質의 것이란 것은 쉽게 想像할 수 있다.
 +
|목차3원문18번={{TagSpage|66-7}}韓. 여기 韓이라 한 것은 辰韓, 弁韓, 馬韓을 한대 부른 것인데, 夫餘, 高句麗, 濊 等의 北方民族에 對하야 南方民族이라고도 할 수 있다. 後世的 發展은 드디어 朝鮮半島를 統一하야 現 朝鮮民族의 中樞가 될 民族이다. 따라서 그들의 文化 乃至 詩歌的 生活도 直接 오늘에 미친바 影響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辰, 弁, 馬 三韓은 다 各其 境界를 지어 獨立的 國家를 세웠으니까, 嚴密히 말하면 그들의 各各 生活은 또한 다를 點이 있었을지 모르지마는, 北方對南方과 같이 그다지 甚한 差異가 없고, 大體에 있어 大同小異의 格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詩歌 方面에 對한 記錄으로는 魏志 東夷傳에
 +
|목차3원문19번={{TagSpage|67-1}}常以五月下種訖, 祭鬼神, 群聚歌舞飮酒, 晝夜無休, 其舞數十人俱起相隨, 蹋地低昻, 手足相應, 節奏有似鐸舞, 十月農功畢, 亦復如之, 云云
 +
|목차3원문20번={{TagSpage|67-2}}이라 하였고, 後漢書 東夷傳에도 大綱 同樣의 것을 말하였다. 이것은 馬韓에 對한 記錄으로 되어었지마는, 이 記錄만으로 보면 農業에 關係한 歌舞라 볼 수 있는데, 南部朝鮮은 特히 馬韓이라 할 것 없이 全體的으로 農業이 發達하였으니까, 그러한 歌舞는 馬韓만이 가젔을 것이 아니고, 三韓이 共通히 가지었을 것인 듯하다. 即 後漢書 東夷傳의 辰韓에 對한 記錄
 +
|목차3원문21번={{TagSpage|67-3}}俗喜歌舞飮酒鼓瑟
 +
|목차3원문22번={{TagSpage|67-4}}이라 한 것도 具體的으로 펴어 말하면, 亦是 馬韓의 그것과 같은 事實을 말하는 것이 되지 않을가 한다. 大體로 三韓과 支那와의 交通을 생각하여 보면, 地理的 環境은 自然 馬韓이 앞서 열리고 辰韓과 弁韓은 그에 떨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後代의 記錄으로 볼지라도 鼎立하야 各其 支那에 交涉하게 될 때 新羅가 가장 뒤떨어져 百濟의 紹介에 依하야 遣唐使를 보냈다. 따라서 훨신 上代에 있어서야 馬韓보다 辰, 弁韓에 彼土人의 見聞이 넉넉히 미치지 못하였을 것은 容易히 想像을 許諾할 수 있으니、馬韓의 歌舞에 對한 記錄은 이것을 三韓 全體의 代表的 記錄이라 보아두는 것도 過差 없으리라 믿는다.
 +
|목차3원문23번={{TagSpage|67-5}}駕洛. 다음은 南部朝鮮의 一角에 있어 三韓 以外의 地域을 割據한 駕洛國의 文獻을 하나 들 수 있는데, 三國遺事 駕洛國記에 다음과 같은 滋味있는 記錄을 볼 수 있다.
 +
|목차3원문24번={{TagSpage|68-1}}屬後漢世祖光武帝建武十八年壬寅三月禊洛之日, 所居北龜旨, 有殊常聲氣呼喚, 衆庶二三百人集會於此, 有如人音, 隱其形而發其音曰, 此有人否, 九干等云, 吾徒在, 又曰, 吾所在爲何, 對云龜旨也, 又曰, 皇天所以命我者, 御是處, 惟新家邦, 爲君后, 爲茲故降矣, 你等須掘峯頂撮土, 歌之云, 龜何龜何, 首其現也, 若不現也, 播灼而喫也, 以之蹈舞, 則是迎大王, 歡喜踴躍之也, 九干等如其言, 咸忻而歌舞, 未幾仰而觀之, 唯紫繩自天垂而着地, 尋繩之下, 乃見紅幅裏金合子, 開而視之, 有黃金卵六, 圓如日者, 衆人悉皆驚喜, 俱伸百拜, 云云
 +
|목차3원문25번={{TagSpage|68-2}}이것은 駕洛國 肇創 當時의 傳說에 나오는 말이니, 原始時代人의 詩歌的 生活을 窺察함에는 가장 重要한 文獻이라 하겠고, 또 時代는 多少 뒤떨어질지언정, 朝鮮內의 記錄이란 點으로 보아 信을 둘 만한 點이 充分히 있을 듯하다. 外人의 記錄 더욱이 詩歌와 같은 內面的 生活의 記錄이란 것은 흔히 皮相的 記錄에 마치고 그 內面까지 들어가 主觀을 건드리기가 極히 困難하다. 또 그들은 그만한 責任을 갖지 않는다. 다만 들은 바의 風評이라든지, 或은 보는 바의 그 狀態를 記述하면 그들의 일을 마친다. 그러나 國內人의 記錄은 그렇케 할 수 없다. 風評 이라 할지라도 比較的 確實한 것을 들을 수 있고, 보는 것도 내 自身에 訴喚하야 眞實히 볼 수 있다. 따라서 그 記述은 어느 程度까지 內容的이라 할 수 있으니, 駕洛國記의 文獻은 玉中佳玉이라 하겠다.
  
|목차3해독문1번= @
+
|목차3해독문1번= 조선 원시 시가에 관한 조선편의 불행히 많이 전(傳)을 못 하였고, 겨우 인방 지나(支那)편에서 얼마끔 얻어볼 수 있는 것은 일종 기적이라 할 수 있겠다. {{TagBook|[[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에
|목차3해독문2번= @
+
|목차3해독문2번= 夏后氏太康失德、夷人始畔、自少康己後、世服王化、家賓於王門、獻其樂舞
|목차3해독문3번= @
+
|목차3해독문3번= 라 한 것이 글자대로 보아서는 지나에 알리게 된 동방 악무의 최초일 것 같으나, 첫째 시대에 있어 신용하기 어렵고, 또 그 소위 「이인(夷人)」의 지칭도 좀 막연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동전(同傳) 중에 「東夷率皆土署, 喜飮酒歌舞」라 한 것은 동이인의 무악을 호(好)하는 특성에 대하여 주의한 고래 지나인의 전평(傳評)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 동이라 하는 것은 반듯이 조선만을 지시한 것은 아니다. 널리 말하면 오늘에 만주, 일본이 다 이 칭호에 쓸어갈 것이니까, 이로써 조선에 당한 것이라 할 수는 없지마는, 「희가무(喜歌舞)」란 말은 뒤에 보아도 알 바와 같이 거의 상습적으로 지나인이 조선에 대하여 쓰는 문자이니까, 감히 조선을 말한 것이리라 하여도 가할 듯한데, {{TagBook|[[위지(魏志)]]}}를 위시하야 여러 사료 문헌에 조선 방면의 기록이 산재하여 있으나, 이것을 사료별로 하면 도리어 번잡한 듯하니, 이하 지방별로 이를 정리하여 보자.
|목차3해독문4번= @
+
|목차3해독문4번= 부여. 부여는 지금 만주의 신경, 길림 지방에 있던 민족으로 직접 우리 조선과는 관계가 멀지 모르겠지만은, 후세 북부 조선의 패권을 잡은 고구려가 그 일부족이라고도 생각되니까, 간접으로 조선 내지 문화에 영향한 바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문화사상 조선 내에 편입하야 설명의 편의를 얻고자 하나, {{TagBook|[[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에는 그들에 시가 생활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목차3해독문5번= @
+
|목차3해독문5번= 以殷正月祭天, 國中大會, 連日飮食歌舞, 名日迎鼓, 是時斷形獄, 解囚徒, ……(中略)……有軍事亦祭天, 殺生觀蹄, 以占其告凶
 +
|목차3해독문6번= {{TagBook|[[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에도 은(殷) 정월(正月)이 납월(臘月)로 되어 있는 이외에는 대강 동양 의미의 것이 써 있는데, 이로써 부여의 시가 생활은 두 가지 다른 성질의 것이 있는 것을 알겠다. 즉 하나는 은(殷) 정월(납월(正月(臘月))에 국중 연례행사로서 제천의전(祭天儀典)에 행하게 되는 가무요 또 하나는 비상적 행사로서 군사가 있을 때에 가무를 연행하여 제천의 의를 올리는 것이다.
 +
|목차3해독문7번= 고구려. 고구려는 북부 조선에 지반을 가지고 있어, 지나와 직접 인접한 관계상 비교적 일부러 지나의 영향을 받았으리라 믿는다. {{TagBook|[[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에 「漢時賜鼓吹技人」이라 하였고, {{TagBook|[[후한서(後漢書)]]}}에는 한무제(漢武帝) 시에 「賜鼓吹技人」이라 한 것으로 보면, 무슨 형식으로나마 지나악(支那樂)이 조선에 수입되어 본국 가락에 영향을 주었을 것도 노상 못 믿을 일은 아닐 것 같다. 이상 기록과 같이 국가 대 국가 관계에 가무음악이 유전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민간적으로 그러한 사실이 있었으리라는 것은 지리적 관계로 보아서 구태여 억측은 되지 않으리라 한다. 그러나 이 지나악(支那樂) 전래(傳來) 운운은 문화가 비교적 발달한 후대의 일이겠는데, 동 {{TagBook|[[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에는 그보다 더 원시적이고 또 고유의 시가적 생활을 기록한 듯한 것이 있으니 즉
 +
|목차3해독문8번= 其俗淫, 皆潔淨自喜, 暮夜輒男女羣聚倡樂, 好祠鬼神社稷零星, 常十月祭天, 大會, 名曰東盟, 其國東有大穴, 號襚神, 亦常十月迎而祭之, 云云
 +
|목차3해독문9번= 이다. {{TagBook|[[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에서도 뜸뜸이 이상과 같은 기록을 주어모을 수 있다. 즉
 +
|목차3해독문10번= 北民喜歌舞, 國中邑落, 暮夜男女羣聚, 相就歌戱……中略……以十月祭天, 國中大會, 名曰東盟……中略……其國東有大穴, 名隧穴, 十月國中大會, 迎隧神, 還於國東上祭之, 置木隧神御坐
 +
|목차3해독문11번= 라 한 것이다. 이는 요컨대 고구려에는 매년 10월에 동맹이라는 하늘에 받드는 제의와 국가지신인 수신(隧神)에 받드는 제의와 양대 제의가 있었는데, 이때에는 국중 대회가 열리어 모야(暮夜)에 남녀가 군취(羣聚)하여 (상취가희)相就歌戱를 하였으나, 이것이 전민족적 제의임에 따라 일이일에 마치는 것이 아니고 수일간에 긍하야 행하였으므로 기민(其民) 희가무(喜歌舞)라 이를 만큼 극히 성대하였었다는 것이 되겠다.
 +
|목차3해독문12번= 고구려의 시가 생활에 대한 기록은 이상의 것 이외에 {{TagBook|[[수서(隋書)]]}} 동이전(東夷傳)에 또 하나 있는 것을 보겠다. 즉
 +
|목차3해독문13번= 死者殯於屋內, 經三年, 擇吉日而葬, 居父母及夫之喪, 服皆三年, 兄弟三月, 初終哭泣, 葬則鼓舞作樂以送之, 埋訖, 悉取死者生時服翫車馬, 置於墓側, 會葬者, 爭取而去
 +
|목차3해독문14번= 라는 것이니, 송사지시(送死之時)에 고무작악(鼓舞作樂)을 한다는 것이다. 부모(父母) 급 부(夫)의 복(服)은 삼 년이고 형제지복(兄弟之服)은 2월 운은 지나(支那) 예(禮)의 영향을 입은 듯하지만은, 고무작악(鼓舞作樂)이란 것은 그러한 영향을 받지 않은 훨씬 이전의 유산이라 하겠다. 
 +
|목차3해독문15번= 예(濊). 예(濊)는 지금 강원도 지방에 있어, 북은 고구려, 옥저, 남은 진한에 접하고, 동은 대해에 임하야 입국한 것인데, 소위 사적에 예맥(濊貊)이라 하는 것이다. 그의 시가적 생활을 기록한 것으로는 {{TagBook|[[위지(魏志)]]}} 급 {{TagBook|[[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에
 +
|목차3해독문16번= 常用十月祭天, 晝夜飮酒歌儛, 名之儛天
 +
|목차3해독문17번= 이라는 것이 있다. 간단한 기록이나 고구려의 동맹과 동양 성질의 것이란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
|목차3해독문18번= 한(韓). 여기 한(韓)이라 한 것은 진한, 변한, 마한을 한데 부른 것인데, 부여, 고구려, 예 등의 북방 민족에 대하여 남방 민족이라고도 할 수 있다. 후세적 발전은 드디어 조선 반도를 통일하여 현 조선 민족의 중추가 될 민족이다. 따라서 그들의 문화 내지 시가적 생활도 직접 오늘에 미친 바 영향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진, 변, 마 삼한은 다 각기 경계를 지어 독립적 국가를 세웠으니까, 엄밀히 말하면 그들의 각각 생활은 또한 다를 점이 있었을지 모르지만은, 북방 대 남방과 같이 그다지 심한 차이가 없고, 대체에 있어 대동소이의 격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시가 방면에 대한 기록으로는 {{TagBook|[[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에
 +
|목차3해독문19번= 常以五月下種訖, 祭鬼神, 群聚歌舞飮酒, 晝夜無休, 其舞數十人俱起相隨, 蹋地低昻, 手足相應, 節奏有似鐸舞, 十月農功畢, 亦復如之, 云云
 +
|목차3해독문20번= 이라 하였고, {{TagBook|[[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에도 대강 동양의 것을 말하였다. 이것은 마한에 대한 기록으로 되어었지만은, 이 기록만으로 보면 농업에 관계한 가무라 볼 수 있는데, 남부 조선은 특히 마한이라 할 것 없이 전체적으로 농업이 발달하였으니까, 그러한 가무는 마한만이 가졌을 것이 아니고, 삼한이 공통히 가지었을 것인 듯하다. 즉 {{TagBook|[[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의 진한에 대한 기록
 +
|목차3해독문21번= 俗喜歌舞飮酒鼓瑟
 +
|목차3해독문22번= 이라 한 것도 구체적으로 펴 말하면, 역시 마한의 그것과 같은 사실을 말하는 것이 되지 않을까 한다. 대체로 삼한과 지나와의 교통을 생각하여 보면, 지리적 환경은 자연 마한이 앞서 열리고 진한과 변한은 그에 떨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후대의 기록으로 볼지라도 정립(鼎立)하야 각기 지나에 교섭하게 될 때 신라가 가장 뒤떨어져 백제의 소개에 의하여 견당사(遣唐使)를 보냈다. 따라서 훨씬 상대에 있어서야 마한보다 진, 변한에 피토인(彼土人)의 견문이 넉넉히 미치지 못하였을 것은 용이히 상상을 허락할 수 있으니, 마한의 가무에 대한 기록은 이것을 삼한 전체의 대표적 기록이라 보아두는 것도 과차(過差) 없으리라 믿는다.
 +
|목차3해독문23번= 가락. 다음은 남부 조선의 일각에 있어 삼한 이외의 지역을 할거한 가락국의 문헌을 하나 들 수 있는데, {{TagBook|[[삼국유사(三國遺事)]]}} 가락국기(駕洛國記)에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기록을 볼 수 있다.
 +
|목차3해독문24번= 屬後漢世祖光武帝建武十八年壬寅三月禊洛之日, 所居北龜旨, 有殊常聲氣呼喚, 衆庶二三百人集會於此, 有如人音, 隱其形而發其音曰, 此有人否, 九干等云, 吾徒在, 又日, 吾所在爲何, 對云龜旨也, 又曰, 皇天所以命我者, 御是處, 惟新家邦, 爲君后, 爲茲故降矣, 你等須掘峯頂撮土, 歌之云, 龜何龜何, 首其現也, 若不現也, 播灼而喫也, 以之蹈舞, 則是迎大王, 歡喜踴躍之也, 九干等如其言, 咸忻而歌舞, 未幾仰而觀之, 唯紫繩自天垂而着地, 尋繩之下, 乃見紅幅裏金合子, 開而視之, 有黃金卵六, 圓如日者, 衆人悉皆驚喜, 俱伸百拜, 云云
 +
|목차3해독문25번= 이것은 가락국 조창(肇創) 당시의 전설에 나오는 말이니, 원시시대인의 시가적 생활을 규찰(窺察)함에는 가장 중요한 문헌이라 하겠고, 또 시대는 다소 뒤떨어질지언정, 조선 내의 기록이란 점으로 보아 신(信)을 둘 만한 점이 충분히 있을 듯하다. 외인의 기록 더욱이 시가와 같은 내면적 생활의 기록이란 것은 흔히 피상적 기록에 마치고 그 내면까지 들어가 주관을 건드리기가 극히 곤란하다. 또 그들은 그만한 책임을 갖지 않는다. 다만 들은 바의 풍평(風評)이라든지, 혹은 보는 바의 그 상태를 기술하면 그들의 일을 마친다. 그러나 국내인의 기록은 그렇게 할 수 없다. 풍평이라 할지라도 비교적 확실한 것을 들을 수 있고, 보는 것도 내 자신에 소환하야 진실히 볼 수 있다. 따라서 그 기술은 어느 정도까지 내용적이라 할 수 있으니, 가락국기의 문헌은 옥중가옥(玉中佳玉)이라 하겠다.
 
}}
 
}}
 
{{상단이동|페이지={{PAGENAME}}}}
 
{{상단이동|페이지={{PAGENAME}}}}
  
==='''본문4: 제목@'''===
+
==='''본문4: 그 문헌의 해석'''===
 
----
 
----
 
{{Layout4
 
{{Layout4
|목차4원문1번= @
+
|목차4원문1번={{TagSpage|68-3}}以上으로 上古 朝鮮에 關한 詩歌生活 方面의 記錄은 大綱 涉取되었을 듯싶다. 그러나 이것은 있는 그대로의 記{{TagPage|69-1}}錄에 지나지 못하는, 말하자면 우리들 詩歌 硏究의 一 材料로서 單純한 事實을 羅列한대 지나지 못한다. 우리는 다시 이들 材料를 有機的으로 綜合하야 그中에 흐르는 精神을 把握하지 않으면 안 되겠으나, 于先 以上 亂雜한 事實的 記錄을 한군데 一括하야 본다면 結局은 左記 三個條에 몰아넣을 수 있을 듯하다.
|목차4원문2번= @
+
|목차4원문2번={{TagSpage|69-2}}1, 定期 或은 非常時의 國民的 大祭天、祭神儀典에 行하는 歌舞(夫餘의 迎鼓, 高句麗의 東盟, 隧神祭、濊의 儛天, 三韓의 農業歌舞, 高句麗의 祝戰歌舞)
|목차4원문3번= @
+
|목차4원문3번={{TagSpage|69-3}}2, 祈禱, 呪願에 行하는 歌舞, (駕洛의 迎王歌舞)
|목차4원문4번= @
+
|목차4원문4번={{TagSpage|69-4}}3, 葬儀에 行하는 歌舞、(高句麗의 送死歌舞)
|목차4원문5번= @
+
|목차4원문5번={{TagSpage|69-5}}그런데 이 三個條란 것도 다시 한번 通覽하면, 그기는 實로 祭典 即 神의 觀念이 一貫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夫餘의 迎鼓와 祝戰、高句麗의 東臨, 濊의 儛天, 三韓의 農歌는 文字上에 나타난 事實이니까 말할 것도 없지마는, 駕洛의 祈願歌舞도 神을 奉事하는 觀念이 있고 高句麗의 葬儀歌舞란 것도 亡人의 靈魂 即 아니미슴의 思想이 있는 것이니, 異常하기도 그 思想觀念이 一貫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歌舞와 神과의 관계가 이와 같이도 깊은 것이 있다 한다면, 後日 우리 詩歌 硏究의 主觀點도 果然 어디 두어야 될 것도 얼마큼 想像이 될 듯싶다. 그러면 앞에 摘出한 文獻은 어떻게 解釋할 것인가. 以上 三個條를 各個別로 그 性質을 밝히어 우리 詩歌이 原始 形態를 덧보아 보자.
 +
|목차4원문6번={{TagSpage|69-6}}一, 첫재 夫餘에는 (殷正月)臘月, 高句麗와 濊에는 十月, 三韓에는 五月, 十月이라는 定한 時期에 祭天、祭神{{TagPage|70}}의 儀典이 行하게 되었음을 알겠으며, 다시 高句麗에 依하면 그때에 國中大會가 열린다는 것도 알겠다. 夫餘, 濊, 三韓에는 國中大會란 말은 없지마는, 夫餘에「大會連日」이란 大會는 다같이 國中人會란 意味로 解釋될 듯하며, 또 臟와 三韓도 비록 그 말은 없을지언정, 그러한 大會가 있었을 것도 想像되는데, 大體로 이것은 무엇을 말함인가. 國中大會가 열리어, 盛大한 儀典이 舉行되었다니, 그 儀典은 勿論 宗敎적일 것은 말할 것 없는데, 듈켄이 오스토라리아의 社會生活을 披瀝한 말은 이것을 가장 明確히 說明한 말이 되지 않을가 한다. 即 그는 曰, {{TagRef|5}}「오스토라리아의 모든 社會生活은 相異한 二形相을 交代로 經過한다. 어느 때는 人口는 小集團에 分散하야 各各 獨立的으로 自己의 職務에 從事된다. 이때에는 各家族은 狩獵을 한다든지 漁撈를 한다든지, 一言으로 말하면 自己로 될 수 있는 手段을 다하야 不可缺할 食料를 얻기에 努力한다. 어떤 때에는 이와 反對로 人口는 一定의 地點에 數日에서 數月에 미치는 時日間을 集中 或은 凝集한다. 이 集中은 民族 또는 部族의 一部가 會合에 召集될 때 일어난다. 그리고 이때에는 宗敎的 祭儀를 祝賀하든지 或은 民族學에서 常套語로 부르는 코로보리가 열린다」<ref>고야법인 일역 「宗敎生活の原初形態」 353頁(古野法人 日譯 「宗敎生活の原初形態」 三五三頁.)</ref>라고. 그리고 듈켄은 前者를 凡俗의 世界, 後者를 神聖한 世界라 불러 神聖한 世界에서는 {{TagRef|6}}「사람은 自己를 普通時와 달리 생각하고 活動하는 一種 外的 力能에 支配되고 指導되고 있는 것을 깨달아 當然히도 벌서 自身이 아니라는 感銘을 받는다. 그에는 全혀 새로운 存在로 된 듯이 생각된다. 그가 두른 異常한 裝飾, 顏面을 덮은 여러 가지 假面은 이 內的 變形을 具體的으로 抽出하였을 뿐 아니라, 그것은 이것을 決定하는 대도 貢獻한다. 더욱이 같은 때에 그들 同類는 다 같은 樣式에 變貌할 줄 생각하고, 또 그들의 憾情을 叫呼와 所作과 態度에 依하야 澤{{TagPage|71-1}}出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마치 通常 살고 있는 것과는 全然 다른 特別의 世界, 그를 몰아 轉生하게 한 예외적 强力으로 包圍된 環境中에 實際로 移動된 듯이 經過한다」<ref>동상 358頁(向上 三五八頁).</ref>고 하였다.
 +
|목차4원문7번={{TagSpage|71-2}}우리 扶餘, 高句蹤, 濊, 三韓에 있어서 迎鼓니 東盟이니 儛天이니 하야 열리는 國中大會란 것은 또한 오스토라리아의 氏族 또는 部族大會와 같이, 그때 그들이 神聖한 世界의 生活을 할 때가 아니든가 한다. 또 이러한 國民的 大會는 다만 平和時의 定例로만 開催되는 것이 아니고, 高句麗 例로 보면 軍事的 非常時에도 同樣의 大會가 있었는 듯하다. 軍事라 하면 原始時代는 一氏族, 部族의 存亡에 關한 重大事다. 農事의 下種秋收와 同樣 或은 그 以上의 重要事인지도 모를 것이다. 이러한 때에 全民族이 一處에 會合하야 大事를 結하는 것은 當然한 일이니, 홀로 高句麗만이 그 必要를 느낀 것이 아니고, 夫餘 濊 三韓에 있어서도 亦是 이와 같은 非常時의 大會가 있어, 앞에와 같은 神聖한 世界의 生活를 經驗하였을 것이다. 그리하야 그 生活의 表現으로 夫餘에서는 連日 飮酒 歌舞를 하고, 또 이때는 刑獄을 斷하고 囚徒를 解하였고, 高句麗에서는 國中 邑落이 晝夜에 男女가 羣聚하야 相就할 歌戱하였고, 濊에서는 晝夜 飮酒 歌舞하였고, 韓에서는 晝夜 酒食하였는 것이니, 제절로 그 意味는 解釋될 듯하다. 即 이러한 것은 全民族 또는 部族의 會合으로 그들을 狂愚하게 하도록 刺戟하는 異常한 威力에 觸感하야 平常時의 自己 存在를 잊어버리고, 全然 別世界에 導入하게 되었고, 또 그러한 激昂한 社會的 環境이 必然的으로 그들에 宗敎的 觀念을 生하게 하야, 祭天 祭典의 儀典을 行하게 한 것이니, 이것도 오스토라리아의 그와 다름이 없으리라 하겠다. 따라서 여기에 行하게 된 歌舞란 것은 그러한 神聖한 世界의 生活 即 宗敎的 生活의 發露로 表{{TagPage|72-1}}現된 것임을 알겠다.
 +
|목차4원문8번={{TagSpage|72-2}}이로서 第一個條에 關한 文獻의 梗概的 說明은 되었을 줄 믿으나, 다음은 그 祭儀와 그에 附隨한 歌舞은 如何한 關係에 施行되었는가 하는 問題다. 祭儀는 祭儀대로 嚴肅히 舉行되고, 歌舞는 그 餘興으로 施行되었든가, 或은 祭儀와 歌舞가 同時에 施行되었든가가 問題된다. 下種期, 秋收期니 飮酒 歌舞니, 한 것으로 보면, 農業이 相當히 發達한 時代였는 듯하니, 前者리라 想像되지 않지도 않는다. 그러나 記錄에 나타난 表面的 解釋이 그렇다 하더라도, 다시 그 以前의 狀態를 생각해 볼 必要도 있는데, 오늘날의 低級文化民族間에 施行되는 祭儀、歌舞는 가끔 後者의 形態를 取하게 되는 것도 注意할 點이 아닌가 한다. 叅考로 그 一例를 들어보면, 듈켄은 其著에 우울룽과蛇祭의 場面를 紹介한 것이 있다. 그에 曰 {{TagRef|7}}「와아라뭉가 族으로 가장 重要한 宗敎的 盛儀의 하나는 우올룽과蛇에 關한 것인데, 그는 數日間 展開되는 祭儀의 連鎻다. 四日째에 우리들이 記하려는 祭儀가 일어났다……中略……밤 十時인가 十一時쯤 해서 울루루와 긴짓리는 곳 其 場面에 나와서 地上에 앉아서 노래부르기를 시작한다. 그들은 明瞭히 다 非常한 興奮狀態이였다. 그 밤에 조금 늦어저서 울루루族은 그들 妻를 데려다가 긴짓리族에 주면, 後者는 그들 계집과 關係를 한다. 그때 祭儀에 對한 일은 모두 仔細히 說明을 듣고 있는 最近에 入信된 젊은 者를 데리고 온다. 그래서 아침 二時까지 歌謠는 間斷없이 繼續된다. 이때 實로 野蠻的 狂愚의 光榮이 展開된다. 四方에서 미치는 火光은 四邊의 暗闇中에 두렷이 護漠本의 白色을 描出하고 있을 때, 울루루族은 土塚 옆에 나날이 跪坐하였다가, 다시 일어나 合同의 運動으로 그 周圍를 돈다. 조금 아래로 나와서는 손을{{TagPage|73-1}} 무릎에 얹고 跪坐하기를 자주 한다. 그와 同時에 그들은 몸을 右로 或은 左로 기울이며, 이러한 運動을 할 때마다 Yrrsh! Yrrsh! Yrrsh라는 무서운 叫聲, 眞實한 咆吼를 낸다. 그래도 긴짓리族은 많은 興奮된 狀態에서 부우메랑그를 두드리고, 더욱이 酋長은 그들보다 훨신 더 날뛴다. 울루루族의 行列은 二回 그 土塚을 돌면, 그들은 跪坐의 姿態를 고치고 앉아서 또 노래 부른다. 때로는 노래가 낮아지고, 달아서 급작히 꽥 지른다. 밤이 동트게 되면 모두 일어나서 亂舞를 한다. 꺼졌던 불은 다시 켜지고 울루루族은 긴짓리族에 열리어 憤然히 푸매랑그, 槍棒를 가지고 土塚을 擊襲하면, 그는 數分間에 粉碎되고 만다. 불은 꺼져버리고 거기는 깊은 沈默이 支配한다」<ref>동상 356-357頁(同上 三五六─三五七頁).</ref>라고.
 +
|목차4원문9번={{TagSpage|73-2}}여기 보면 祭儀와 歌舞는 密接한 關係를 가지고 不可分離의 狀態에 있는 듯하야, 말은 祭儀라 하지마는, 事實 行하고 있는 것은 歌舞가 아닌가 疑心할 만치 兩者가 同時에 施行되는것을 알겠다. 迎鼓, 東盟, 儛天 等도 또한 그런 것이 아니든가. 더욱이 夫餘 같은 대서는 大會連日, 飮酒 歌舞라 하였으니, 祭儀나 歌舞가 同時에 連日 繼續하였다는 말이 되지 않을가. 濊에도 晝夜 飮酒 歌舞란 것은 다만 一晝夜에 限한 行事가 아니었을 듯하고 高句麗 亦是 暮夜에 男女 羣聚하야 相就歌舞하였다니, 우올룽과蛇祭와 같이 晝夜에 祭儀가 열리며, 同時에 男女 羣聚하야 歌舞가 行한 것이 아닐가 한다. 그렇다 할 수 있다면 夫餘, 高句麗, 濊, 韓의 歌舞는 더욱 祭儀 即 宗敎와 密接한 關係、 거의 그와 不分離할만치 깊은 因緣이 있었으리라고도 想像이 된다. 北史 高句麗傳에는 高句麗의 歌舞를
 +
|목차4원문10번={{TagSpage|73-3}}風俗尙淫, 不以爲愧, 俗多遊女, 夫無常人, 夜則男女羣聚而戱, 無有貴賤之節
 +
|목차4원문11번={{TagSpage|74-1}}이라 하야 單純한 遊樂的 歌舞와 같이 본 것은 그 本來의 精神을 充分히 傳하지 못하였다 하겠고, 白南雲 氏는 또 이 北史의 文句를 그냥 信用하야 {{TagRef|8}}「그 遊女가 많은 것은 奴隷制度의 産物인데, 今日 妓女의 先驅者다. 그리하야 職業的 技藝로서 舞踊을 한 것이나, 이와 別달리 夜間에 貴賤의 格式에서 解放한 男女의 羣聚的 舞踊이 있었다는 것이다」<ref>「조선사회경제사」 239─24頁.(「朝鮮社會經濟史」 二三九─二四頁).</ref>라 한 것은 宗敎的 觀念을 너무 等閑한 것이 아니라면, 훨신 後代의 狀態를 말한 것이리라 한다.
 +
|목차4원문12번={{TagSpage|74-2}}二, 다음 駕洛國記의 文獻은 이것을 平易히 말해보면, 駕洛 諸國에는 처음에 이를 統轄하는 君主가 없고, 九干이 있어서 그 部族을 引率하고 있다가, 어느 해 全氏族의 總集合日인 三月에 全氏族이 한대 모이어서 君主 推戴의 議論이 일어나 首露王을 推戴하는데, 그때에 天地神明에 盟誓하는 祭儀가 舉行되어 歌舞音樂이 일어났다는 것이 되겠다. 여기에 三月 稧洛之日이란 것은 夫餘의 迎鼓, 高句耀의 東盟과 같이 例年의 國中大會 即 그들이 神聖한 世界의 生活를 經營할 時期인 듯하고, 有如人音하야 隱其形而發其音 云云이라든지, 儞 等은 須堀峯頂撮土하면 歌之 云云이란 것은 祭儀와 推戴의 行事일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불렀다는 노래
 +
|목차4원문13번={{TagSpage|74-3}}龜何龜何、首其現也、若不現也、燔均而喫也
 +
|목차4원문14번={{TagSpage|74-4}}는 是迎大王이니 歡喜踴躍하라 하야 부른 것이나, 그 內容은 歡喜하야 唱하였다 하기보다 너무 殺性스러워 차라리 呪文이라 하여 可하겠고, 또 君主를 얻기 爲한 手段으로 부른 것이니, 祈禱의 形式을 取하여야 될 것이다. {{TagRef|9}}분트는 祈禱의 가장 原始的의 것은 呪願이라 하였고,<ref>영역 “Element of Folk-psychology” p.427(英譯 “Element of Folk-psychology”p.427).</ref> 타일라는 其著 「原始文化」 原始人의 祈禱는 인제든지 메스메리슴的 呪念的이라 하였으나, 이 呪的祈禱는 그 性質이 精靈에 對하야 命令的 或은 畏壓的이라는 것이니, 駕洛의{{TagPage|75-1}} 이 노래는 可히 이 呪念的 祈禱가 아니든가. {{TagRef|10}}呪文이나 祈禱는 畢竟 宗敎 感情의 表出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나, 宗敬 感情이 外部에 나타나는 대는 두 方面이 있어 하나는 身體的 表出이니, 仰天, 合掌, 跪坐, 舞踊이 그것이고, 다른 하나는 言語的 表出이니, 呪願, 祈禱도 이에 屬하는 것으로 野蠻 未開時代에는 이를 韻律的으로 發表하야 詩歌를 形成한다 하니,<ref>이등견일 저 「종교심리학」 514─515頁(伊藤堅逸 著 「宗敎心理學」 五一四─五一五頁).</ref>駕洛의 前記 文獻은 이 宗敎 感情의 表出狀態를 記錄한 것이 아닐가 한다. 即 「龜何龜何, 首其現也, 若不現也, 燔灼而喫也」는 言語的 表出의 呪願으로서 自然 詩歌의 體가 되어 나타난 것이고, 歡喜踊躍하야 蹈舞한 것은 그 自體的 表出이 아닐가 한다. 그렇다면 駕洛의 歌舞도 畢竟 宗教的 歌舞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
|목차4원문15번={{TagSpage|75-2}}三, 끝으로 高句麗의 葬式 歌舞에 對하야 解釋 試驗하여보자. 原文에 「葬則鼓儛作樂以送之」라 한 것을 文字 그대로 읽고, 우리들의 感情으로 解釋하면 얼마의 疑心이 없지 않다. 即 死라는 것은 슬픈 것이요, 儛樂은 기쁜 것인데, 어째 이 兩極端이 一時에 並行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太古時代에는 아무 矛盾도 없이 施行된 듯한 痕迹이 있으니 三國志 魏志 倭人傳에
 +
|목차4원문16번={{TagSpage|75-3}}始死 停喪十餘日、當時不食肉, 喪主哭泣、他人就歌舞飮酒
 +
|목차4원문17번={{TagSpage|75-4}}라 하였고, 日本書紀 允恭天皇 四十二年에
 +
|목차4원문18번={{TagSpage|75-5}}春正月乙亥朔戊子, 天皇崩, 時年若干, 於是新羅王聞天皇崩, 驚愁之, 貢上調船八十艘 及種種樂人八十, 是泊對馬而大哭, 到筑紫亦大哭, 泊于難波津, 則皆素服, 悉捧御調、且張種種樂器、自難波至于京、或哭泣或歌儛, 遂參會於殯宮也
 +
|목차4원문19번={{TagSpage|76-1}}라 한 것이 있다. 이로 보면 歌舞로써 死者를 보내는 風俗은 高句麗만이 아니고, 널리 原始時代에는 있었던 事實인 듯하다. 그러면 原始人이 死와 歌舞에 對한 觀念은 우리들이 그에 對하는 것과는 다른 삶이 있든가. {{TagRef|11}}아니미슴說에 依하면, 死란 것은 긴 睡眠과 다름이 없고, 靈魂이 肉體를 떠나서 彼世에 旅行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하며, 또 未開民族은 死者를 生存하여 있는 人間과 같이 愛敬追慕하는 外에 또 特히 死者인 故로 恐怖嫌忌하는 일이 많다 한다.<ref>우야원공 저 「종교민족학」 293頁(宇野圓空 著 「宗敎民族學」 二九三頁).</ref> 여기서 死者에 對하야 여러가지 宗敎的 儀式이 舉行되는 것이나, 葬式時의 歌舞 그 儀式의 一部라 한다면, 떠나려는 靈魂을 本身에 불러들일 目的으로, 或은 떠나는 靈魂을 慰勞도 하며 또 鎭攘하기 爲하야 行한 것이 아닐가. 土居光知 氏가 葬禮와 歌垣과의 關係를 말하야 {{TagRef|12}}「親賴하던 者가 죽었을 때 그 魂을 誘戾하기 爲하여는 人生의 가장 기뻐하는 것과 故人의 가장 愛好하는 것을 所作事로 表現한다면 希望을 達할지도 모를 것이다……또 故人이 한 훌륭한 行爲 柩前에서 되푸리하여 보는 것도 가는 사람이나 남은 사람 雙方의 慰勞가 된다」<ref>「문학서설」 20頁(「文學序說」 二○頁).</ref>라 한 것은 結局 이 意味를 말한 것인 듯하니, 高句麗의 葬儀歌도 亦是 그와 같이 解釋할 수 있을 듯하다. 文面에 나타난 記錄만으로 본다면 오늘날에도 볼 수 있는 所謂 喪輿노래와 같이도 解釋되지 않는 바는 아니나, 그러나 이것은 훨신 後代의 狀態고, 그 原始的 狀態는 依然히 宗敎的인 葬儀歌舞이었을 것은 거의 疑心하지 않아도 좋을 듯하다. 그리하야 그의 後世的 狀態가 記錄되어 葬儀歌舞의 文獻으로 남게 된 것일 것이다. X X
 +
|목차4원문20번={{TagSpage|76-2}}以上과 같이 解釋하여오고 보니, 朝鮮 原始 詩歌에 關한 文獻은 十中十 이것을 宗敎的이라 解釋할 수 있게 되었{{TagPage|77-1}}다. 詩歌의 胎生은 반듯이 宗敎的이랄 것도 없는데, 오늘날 남은 그 文獻은 異常하기로 그렇게 解釋된다 하는 것은 單純한 偶然之事라 하여 버리기는 어렵다는 暗示를 받는 듯하다. 그러면 大體로 原始 宗敎와 詩歌와는 어떠한 關係가 있는가를 생각해볼 必要를 느낀다. 다음 이 方面에 一覽하여 우리 詩歌의 根據를 確實히 하자.
  
|목차4해독문1번= @
+
|목차4해독문1번= 이상으로 상고 조선에 관한 시가 생활 방면의 기록은 대강 섭취되었을 듯싶다. 그러나 이것은 있는 그대로의 기록에 지나지 못하는, 말하자면 우리들 시가 연구의 일 재료로서 단순한 사실을 나열한 데 지나지 못한다. 우리는 다시 이들 재료를 유기적으로 종합하야 그중에 흐르는 정신을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되겠으나, 우선 이상 난잡한 사실적 기록을 한군데 일괄하여 본다면 결국은 좌기 3개조에 몰아넣을 수 있을 듯하다.
|목차4해독문2번= @
+
|목차4해독문2번= 1, 정기 혹은 비상시의 국민적 대제천(大祭天). 제신의전(祭神儀典)에 행하는 가무(부여의 영고(迎鼓), 고구려의 동맹(東盟), 수신제(隧神祭), 예(濊)의 무천(儛天), 삼한의 농업가무(農業歌舞), 고구려의 축전가무(祝戰歌舞))
|목차4해독문3번= @
+
|목차4해독문3번= 2, 기도, 주원(呪願)에 행하는 가무, (가락의 영왕가무(迎王歌舞))
|목차4해독문4번= @
+
|목차4해독문4번= 3, 장의에 행하는 가무, (고구려의 송사가무(送死歌舞))
|목차4해독문5번= @
+
|목차4해독문5번= 그런데 이 3개조란 것도 다시 한번 통람하면, 그것은 실로 제전 즉 신의 관념이 일관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부여의 영고(迎鼓)와 축전(祝戰), 고구려의 동맹(東臨), 예(濊)의 무천(儛天), 삼한의 농가는 문자상에 나타난 사실이니까 말할 것도 없지만은, 가락의 기원가무(祈願歌舞)도 신을 봉사하는 관념이 있고 고구려의 장의가무(葬儀歌舞)란 것도 망인의 영혼 즉 아니미즘의 사상이 있는 것이니, 이상하게도 그 사상관념이 일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가무와 신과의 관계가 이와 같이도 깊은 것이 있다 한다면, 후일 우리 시가 연구의 주관점도 과연 어디 두어야 될 것도 얼마큼 상상이 될 듯싶다. 그러면 앞에 적출한 문헌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이상 3개조를 각개별로 그 성질을 밝히어 우리 시가의 원시 형태를 덧보아 보자.
 +
|목차4해독문6번= 일, 첫째 부여에는 (은(殷) 정월(正月))납월(臘月), 고구려와 예(濊)에는 10월, 삼한에는 5월, 10월이라는 정한 시기에 제신, 제신의 의전이 행하게 되었음을 알겠으며, 다시 고구려에 의하면 그때에 국중대회가 열린다는 것도 알겠다. 부여, 예(濊), 삼한에는 국중대회란 말은 없지만은, 부여에 「大會連日」이란 대회는 다같이 국중인회란 의미로 해석될 듯하며, 또 예(臟)와 삼한도 비록 그 말은 없을지언정, 그러한 대회가 있었을 것도 상상되는데, 대체로 이것은 무엇을 말함인가. 국중대회가 열리어, 성대한 의전이 거행되었다니, 그 의전은 물론 종교적일 것은 말할 것 없는데, {{TagPerson|[[듈켄]]}}이 오스토라리아의 사회생활을 피력한 말은 이것을 가장 명확히 설명한 말이 되지 않을까 한다. 즉 그는 왈,「오스토라리아의 모든 사회생활은 상이한 이형상을 교대로 경과한다. 어느 때는 인구는 소집단에 분산하야 각각 독립적으로 자기의 직무에 종사된다. 이때에는 각 가족은 수렵을 한다든지 어로를 한다든지, 일언으로 말하면 자기로 될 수 있는 수단을 다하야 불가결할 식료를 얻기에 노력한다. 어떤 때에는 이와 반대로 인구는 일정의 지점에 수일에서 수월에 미치는 시일간을 집중 혹은 응집한다. 이 집중은 민족 또는 부족의 일부가 회합에 소집될 때 일어난다. 그리고 이때에는 종교적 제의를 축하하든지 혹은 민족학에서 상투어로 부르는 코로보리가 열린다」라고. 그리고 {{TagPerson|[[듈켄]]}}은 전자를 범속의 세계, 후자를 신성한 세계라 불러 신성한 세계에서는 「사람은 자기를 보통 시와 달리 생각하고 활동하는 일종 외적 역능에 지배되고 지도되고 있는 것을 깨달아 당연히도 벌서 자신이 아니라는 감명을 받는다. 그에는 전혀 새로운 존재로 된 듯이 생각된다. 그가 두른 이상한 장식, 안면을 덮은 여러 가지 가면은 이 내적 변형을 구체적으로 추출하였을 뿐 아니라, 그것은 이것을 결정하는 데도 공헌한다. 더욱이 같은 때에 그들 동류는 다 같은 양식에 변모할 줄 생각하고, 또 그들의 감정을 규호(叫呼)와 소작(所作)과 태도에 의하야 택출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마치 통상 살고 있는 것과는 전연 다른 특별의 세계, 그를 몰아 전생하게 한 예외적 강력으로 포위된 환경 중에 실제로 이동된 듯이 경과한다」고 하였다.
 +
|목차4해독문7번= 우리 부여, 고구려, 예(濊), 삼한에 있어서 영고(迎鼓)니 동맹(東盟)이니 무천(儛天)이니 하여 열리는 국중대회란 것은 또한 오스토라리아의 씨족 또는 부족 대회와 같이, 그때 그들이 신성한 세계의 생활을 할 때가 아니든가 한다. 또 이러한 국민적 대회는 다만 평화 시의 정례로만 개최되는 것이 아니고, 고구려 예로 보면 군사적 비상시에도 동양의 대회가 있었는 듯하다. 군사라 하면 원시시대는 일씨족, 부족의 존망에 관한 중대사다. 농사의 하종추수(下種秋收)와 동양 혹은 그 이상의 중요사인지도 모를 것이다. 이러한 때에 전민족이 일처에 회합하야 대사를 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 홀로 고구려만이 그 필요를 느낀 것이 아니고, 부여 예(濊) 삼한에 있어서도 역시 이와 같은 비상시의 대회가 있어, 앞에와 같은 신성한 세계의 생활을 경험하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 생활의 표현으로 부여에서는 연일 음주 가무를 하고, 또 이때는 형옥(刑獄)을 단(斷)하고 수도(囚徒)를 해(解)하였고, 고구려에서는 국중 읍락이 주야에 남녀가 군취(羣聚)하여 상취가희(相就歌戱)하였고, 예(濊)에서는 주야 음주 가무하였고, 한에서는 주야 주식하였는 것이니, 저절로 그 의미는 해석될 듯하다. 즉 이러한 것은 전민족 또는 부족의 회합으로 그들을 광우(狂愚)하게 하도록 자극하는 이상한 위력에 촉감(觸感)하여 평상시의 자기 존재를 잊어버리고, 전연 별세계에 도입하게 되었고, 또 그러한 격앙한 사회적 환경이 필연적으로 그들에 종교적 관념을 생(生)하게 하여, 제천 제전의 의전을 행하게 한 것이니, 이것도 오스토라리아의 그와 다름이 없으리라 하겠다. 따라서 여기에 행하게 된 가무란 것은 그러한 신성한 세계의 생활 즉 종교적 생활의 발로로 표현된 것임을 알겠다.
 +
|목차4해독문8번= 이로써 제1개조에 관한 문헌의 경개(梗概)적 설명은 되었을 줄 믿으나, 다음은 그 제의와 그에 부수한 가무는 여하한 관계에 시행되었는가 하는 문제다. 제의는 제의대로 엄숙히 거행되고, 가무는 그 여흥으로 시행되었든가, 혹은 제의와 가무가 동시에 시행되었든가가 문제된다. 하종기, 추수기니 음주 가무니, 한 것으로 보면, 농업이 상당히 발달한 시대였는 듯하니, 전자리라 상상되지 않지도 않는다. 그러나 기록에 나타난 표면적 해석이 그렇다 하더라도, 다시 그 이전의 상태를 생각해 볼 필요도 있는데, 오늘날의 저급문화 민족 간에 시행되는 제의, 가무는 가끔 후자의 형태를 취하게 되는 것도 주의할 점이 아닌가 한다. 참고로 그 일례를 들어보면, {{TagPerson|[[듈켄]]}}은 기저(其著)에 우울룽과사제(蛇祭)의 장면를 소개한 것이 있다. 그에 왈(曰) 「와아라뭉가 족으로 가장 중요한 종교적 성의(盛儀)의 하나는 우올룽과사(蛇)에 관한 것인데, 그는 수일간 전개되는 제의의 연쇄다. 사 일째에 우리들이 기(記)하려는 제의가 일어났다……중략……밤 10시인가 11시쯤 해서 울루루와 긴짓리는 기(其) 장면에 나와서 지상에 앉아서 노래부르기를 시작한다. 그들은 명료히 다 비상한 흥분상태이었다. 그 밤에 조금 늦어져서 울루루족은 그들 처를 데려다가 긴짓리족에 주면, 후자는 그들 계집과 관계를 한다. 그때 제의에 대한 일은 모두 자세히 설명을 듣고 있는 최근에 입신된 젊은 자를 데리고 온다. 그래서 아침 2시까지 가요는 간단없이 계속된다. 이때 실로 야만적 광우(狂愚)의 광영(光榮)이 전개된다. 사방에서 미치는 화광은 사변의 암암(暗闇) 중에 뚜렷이 호막본(護漠本)의 백색을 묘출하고 있을 때, 울루루족은 토총(土塚) 옆에 나날이 궤좌(跪坐)하였다가, 다시 일어나 합동의 운동으로 그 주위를 돈다. 조금 아래로 나와서는 손을 무릎에 얹고 궤좌(跪坐)하기를 자주 한다. 그와 동시에 그들은 몸을 우로 혹은 좌로 기울이며, 이러한 운동을 할 때마다 Yrrsh! Yrrsh! Yrrsh라는 무서운 규성(叫聲), 진실한 포후(咆吼)를 낸다. 그래도 긴짓리족은 많은 흥분된 상태에서 부우메랑그를 두드리고, 더욱이 추장은 그들보다 훨씬 더 날뛴다. 울루루족의 행렬은 2회 그 토총(土塚)을 돌면, 그들은 궤좌(跪坐)의 자태를 고치고 앉아서 또 노래 부른다. 때로는 노래가 낮아지고, 달아서 급작히 꽥 지른다. 밤이 동트게 되면 모두 일어나서 난무(亂舞)를 한다. 꺼졌던 불은 다시 켜지고 울루루족은 긴짓리족에 열리어 분연히 푸매랑그, 창봉(槍棒)을 가지고 토총(土塚)을 격습하면, 그는 수분간에 분쇄되고 만다. 불은 꺼져버리고 거기는 깊은 침묵이 지배한다」라고.
 +
|목차4해독문9번= 여기 보면 제의와 가무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불가분리의 상태에 있는 듯하여, 말은 제의라 하지마는, 사실 행하고 있는 것은 가무가 아닌가 의심할 만치 양자가 동시에 시행되는 것을 알겠다. 영고(迎鼓), 동맹(東盟), 무천(儛天) 등도 또한 그런 것이 아니든가. 더욱이 부여 같은 데서는 대회연일, 음주 가무라 하였으니, 제의나 가무가 동시에 연일 계속하였다는 말이 되지 않을까. 예(濊)에도 주야 음주 가무란 것은 다만 일주야에 한한 행사가 아니었을 듯하고 고구려 역시 모야(暮夜)에 남녀 군취(羣聚)하여 상취가무(相就歌舞)하였다니, 우올룽과사제(蛇祭)와 같이 주야에 제의가 열리며, 동시에 남녀 군취(羣聚)하야 가무가 행한 것이 아닐까 한다. 그렇다 할 수 있다면 부여, 고구려, 예(濊), 한의 가무는 더욱 제의 즉 종교와 밀접한 관계, 거의 그와 불가분리할 만치 깊은 인연이 있었으리라고도 상상이 된다. {{TagBook|[[북사(北史)]]}} 고구려전(高句麗傳)에는 고구려의 가무를
 +
|목차4해독문10번= 風俗尙淫, 不以爲愧, 俗多遊女, 夫無常人, 夜則男女羣聚而戱, 無有貴賤之節
 +
|목차4해독문11번= 이라 하여 단순한 유락적 가무와 같이 본 것은 그 본래의 정신을 충분히 전하지 못하였다 하겠고, {{TagPerson|[[백남운(白南雲)]]}} 씨는 또 이 {{TagBook|[[북사(北史)]]}}의 문구를 그냥 신용하여 「그 유녀(遊女)가 많은 것은 노예제도의 산물인데, 금일 유녀의 선구자다. 그리하여 직업적 기예로서 무용을 한 것이나, 이와 별달리 야간에 귀천의 격식에서 해방한 남녀의 군취(羣聚)적 무용이 있었다는 것이다」라 한 것은 종교적 관념을 너무 등한한 것이 아니라면, 훨씬 후대의 상태를 말한 것이리라 한다.
 +
|목차4해독문12번= 이, 다음 가락국기(駕洛國記)의 문헌은 이것을 평이히 말해보면, 가락 제국에는 처음에 이를 통할하는 군주가 없고, 구간(九干)이 있어서 그 부족을 인솔하고 있다가, 어느 해 전씨족의 총집합일인 3월에 전씨족이 한데 모이어서 군주 추대의 의론이 일어나 수로왕을 추대하는데, 그때에 천지신명에 맹서하는 제의가 거행되어 가무음악이 일어났다는 것이 되겠다. 여기에 3월 계락지일(계洛之日)이란 것은 부여의 영고(迎鼓), 고구려의 동맹(東盟)과 같이 예년의 국중대회 즉 그들이 신성한 세계의 생활을 경영할 시기인 듯하고, 우여인음(有如人音)하여 은기형이발기음(隱其形而發其音) 운운(云云)이라든지, 이(儞) 등은 수굴봉정촬토(須堀峯頂撮土)하면 가지(歌之) 운운(云云)이란 것은 제의와 추대의 행사일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불렀다는 노래
 +
|목차4해독문13번= 龜何龜何、首其現也、若不現也、燔均而喫也
 +
|목차4해독문14번= 는 시영대왕(是迎大王)이니 환희용약(歡喜踴躍)하라 하여 부른 것이나, 그 내용은 환희하야 창(唱)하였다 하기보다 너무 살성(殺性)스러워 차라리 주문(呪文)이라 하여 가(可)하겠고, 또 군주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부른 것이니, 기도의 형식을 취하여야 될 것이다. {{TagPerson|[[분트]]}}는 기도의 가장 원시적의 것은 주원(呪願)이라 하였고, {{TagPerson|[[타일라]]}}는 기저(其著) 「원시문화」 원시인의 기도는 인제든지 메스메리즘적 주념적이라 하였으나, 이 주적 기도는 그 성질이 정령에 대하여 명령적 혹은 외압적이라는 것이니, 가락의의 이 노래는 가히 이 주념적 기도가 아니든가. 주문이나 기도는 필경 종교 감정의 표출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나, 종경 감정이 외부에 나타나는 데는 두 방면이 있어 하나는 신체적 표출이니, 앙천(仰天), 합장(合掌), 궤좌(跪坐), 무용(舞踊)이 그것이고, 다른 하나는 언어적 표출이니, 주원(呪願), 기도도 이에 속하는 것으로 야만 미개시대에는 이를 운율적으로 발표하여 시가를 형성한다 하니, 가락의 전기 문헌은 이 종교 감정의 표출상태를 기록한 것이 아닐까 한다. 즉 「구하구하(龜何龜何), 수기현야(首其現也), 약불현야(若不現也), 번작이끽야(燔灼而喫也)」는 언어적 표출의 주원으로서 자연 시가의 체가 되어 나타난 것이고, 환희용약(歡喜踴躍)하야 도무(蹈舞)한 것은 그 자체적 표출이 아닐까 한다. 그렇다면 가락의 가무도 필경 종교적 가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
|목차4해독문15번= 삼, 끝으로 고구려의 장식(葬式) 가무에 대하야 해석 시험하여보자. 원문에 「장칙고무작악이송지(葬則鼓儛作樂以送之)」라 한 것을 문자 그대로 읽고, 우리들의 감정으로 해석하면 얼마의 의심이 없지 않다. 즉 사(死)라는 것은 슬픈 것이요, 무악은 기쁜 것인데, 어째 이 양극단이 일시에 병행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태고시대에는 아무 모순도 없이 시행된 듯한 흔적이 있으니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왜인전(倭人傳)에
 +
|목차4해독문16번= 始死 停喪十餘日, 當時不食肉, 喪主哭泣, 他人就歌舞飮酒
 +
|목차4해독문17번= 라 하였고, 일본서기(日本書紀) 윤공천황(允恭天皇) 42년에
 +
|목차4해독문18번= 春正月乙亥朔戊子, 天皇崩, 時年若干, 於是新羅王聞天皇崩, 驚愁之, 貢上調船八十艘, 及種種樂人八十, 是泊對馬而大哭, 到筑紫亦大哭, 泊于難波津, 則皆素服, 悉捧御調、且張種種樂器, 自難波至于京, 或哭泣或歌儛, 遂參會於殯宮也
 +
|목차4해독문19번= 라 한 것이 있다. 이로 보면 가무로써 사자를 보내는 풍속은 고구려만이 아니고, 널리 원시시대에는 있었던 사실인 듯하다. 그러면 원시인의 사(死)와 가무에 대한 관념은 우리들이 그에 대하는 것과는 다른 삶이 있든가. 아니미즘설에 의하면, 사(死)란 것은 긴 수면과 다름이 없고, 영혼이 육체를 떠나서 피세에 여행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하며, 또 미개민족은 사자를 생존하여 있는 인간과 같이 애경추모(愛敬追慕)하는 외에 또 특히 사자인 고로 공포혐기(恐怖嫌忌)하는 일이 많다 한다. 여기서 사자에 대하야 여러 가지 종교적 의식이 거행되는 것이나, 장식(葬式) 시의 가무 그 의식의 일부라 한다면, 떠나려는 영혼을 본신(本身)에 불러들일 목적으로, 혹은 떠나는 영혼을 위로도 하며 또 진양(鎭攘)하기 위하여 행한 것이 아닐까. {{TagPerson|[[土居光知|토거광지(土居光知)]]}} 씨가 장례와 가원(歌垣)과의 關係를 말하야 「친뢰(親賴)하던 자가 죽었을 때 그 혼을 유려(誘戾)하기 위하여는 인생의 가장 기뻐하는 것과 고인의 가장 애호하는 것을 소작사(所作事)로 표현한다면 희망을 달할지도 모를 것이다……또 고인이 한 훌륭한 행위 구전(柩前)에서 되풀이하여 보는 것도 가는 사람이나 남은 사람 쌍방의 위로가 된다」라 한 것은 결국 이 의미를 말한 것인 듯하니, 고구려의 장의가(葬儀歌)도 역시 그와 같이 해석할 수 있을 듯하다. 문면에 나타난 기록만으로 본다면 오늘날에도 볼 수 있는 소위 상여 노래와 같이도 해석되지 않는 바는 아니나, 그러나 이것은 훨신 후대의 상태고, 그 원시적 상태는 의연히 종교적인 장의가무(葬儀歌舞)이었을 것은 거의 의심하지 않아도 좋을 듯하다. 그리하여 그의 후세적 상태가 기록되어 장의가무(葬儀歌舞)의 문헌으로 남게 된 것일 것이다. X X
 +
|목차4해독문20번= 이상과 같이 해석하여 오고 보니, 조선 원시 시가에 관한 문헌은 십중십 이것을 종교적이라 해석할 수 있게 되었다. 시가의 태생은 반드시 종교적이랄 것도 없는데, 오늘날 남은 그 문헌은 이상하기로 그렇게 해석된다 하는 것은 단순한 우연지사라 하여 버리기는 어렵다는 암시를 받는 듯하다. 그러면 대체로 원시 종교와 시가와는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를 생각해볼 필요를 느낀다. 다음 이 방면에 일람하여 우리 시가의 근거를 확실히 하자.
 
}}
 
}}
 
{{상단이동|페이지={{PAGENAME}}}}
 
{{상단이동|페이지={{PAGENAME}}}}
  
==='''본문5: 제목@'''===
+
==='''본문5: 원시 종교와 시가'''===
 
----
 
----
 
{{Layout5
 
{{Layout5
|목차5원문1번= @
+
|목차5원문1번= {{TagSpage|77-2}}宗敎의 發生問題에 對하여는 區區의 學說이 있어 到底히 우리들 門外漢의 評判할 바가 되지 못하나, 大體에 있어 呪術이 宗敎的 現象의 原始的 形態라 함에는 그다지 틀림이 없는 듯하다. 呪術에도 意識現象의 心的 態度가 있는 同時에 身體的 態度의 儀禮가 있어 비로소 宗敎生活을 成就할 수 있는 것이나, 心的 態度인 그 內容 生活은{{TagPage|78}} 그만두고라도, 그의 外面 表出인 儀禮 方面에는 우리들 詩歌와 密接한 關係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TagRef|13}}분트도 詩歌의 姉妹인 原始人 舞踊의 動機를 單純히 音樂을 爲한 것도 아니고, 或은 다시 眞實한 目的이 있었는 것도 아니고, 最初는 呪의 目的을 가진 것이라 하였다<ref>상전방리 저 「ヴントの民族心理學」 134頁(桑田芳離 著 「ヴントの民族心理學」 一三四頁).</ref> 한 것으로 보면, 心理學上으로도 이것이 說明이 되는 듯하나, 詩歌의 動機가 呪의 目的이라 하지 못한다 하고도 詩歌가 呪術의 目的으로 쓰인 것은 事實인 듯하다. 駕洛國歌 「龜何讓何。首其現也、若不現也、播灼而喫也」는 首露王을 맞기 爲한 呪願歌라는 것은 벌서 앞에서도 말한 바이나, 日本 天照大神의 天岩戶隱避 傳說에 對하야 津田左右吉氏는 滋味있는 解說을 하였다. 그 傳說은 周知하는 바와 같이 天照大神이 그 御弟되는 素盞嗚尊의 騒亂을 싫어서 天岩戶에 숨어버리자, 갑작이 日光이 없어지며 暗黑天地가 되었으므로 여러 神들이 크게 混惑하야 天岩戶 앞에 모이어 議論한 結果, 歌舞 音樂을 하였더니 大神이 어쩐 일인고 하고 문을 조그만치 열고 내다보려 할 때, 그中 힘많은 神이 문을 열어잿치고 大神을 끄내니, 日光이 다시 빛나 光明한 天地가 되었다는 것이나, 津田氏의 解釋은 이러하다. {{TagRef|14}}「天照大神의 天戶隱避의 이야기는 日蝕의 現象과 그때에 行한 呪術에 關한 神話라고 解釋할 수 있다. 即 日神이 突然히 岩戶에 隱避하였기 때문에 世上이 暗黑하였다는 것은 日蝕의 現象을 神話化한 것이고, 그때 素盞嗚尊은 太陽에 危害를 加한 데몬이다. 그래서 長嗚鳥를 울린 것도, 天細女命이 熱中하야 舞踊한 것도 其他 모든 神이 소리를 내어 노래부른 것도 太陽의 出現을 促進하려는 magic이었었다 생각할 수 있다」<ref>「神代史の研究」 191-192頁(「神代史の研究」 一九一─一九二頁).</ref>라고. 即 日本에 있어서 天岩戶의 歌舞도 呪的 目的에 施行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목차5원문2번= @
+
|목차5원문2번= {{TagSpage|79}}이 밖에도 이와 같은 實例는 原始文化 中에서 얼마든지 들 수 있다. 服始宗敎의 儀禮에 不可缺할 地位에 있을 것은 이로서 斟酌할 수 있으며, 또 그것의 具體的 狀態에 對하여는 오스토라리아의 코로보리와 우울룽과蛇祭에서 본 바와 같으나, 西村眞次氏가 原始時代이 詩歌와 宗敎와의 關係를 하야 {{TagRef|15}}「如上의 軍歌, 狩獵歌、葬式歌 等의 內容을 劍討하여 보면, 모두 欲求한 것이 根抵를 삼고 있다. 그리고 그들 歌謠의 演奏는 우리들 間에 보듯이 單純한 藝術로서, 乃至 娛樂으로서 行한 것이 아니고, 모두 呪的 宗敎的 儀式이 相伴한 것이다. 아니 歌謠에 呪的 宗敎的 儀式이 相伴한 것이 아니라, 呪的 宗敎的 儀式에 歌謠가 相伴한 것이다. 타일라도 指摘한 바와 같이 舞踊은 近代人에는 單只 娛樂으로밖에 보이지 않지마는, 文化程度가 低級한 民衆 사이에는 十分의 熱氣과 氣高한 意義가 있다. 舞踊과 같이 歌謠도 또 娛樂이 아니고, 흔히는 마직과 宗敎과의 儀典에 相伴한 原始民衆의 集團的 欲望의 表現이었다」<ref>「日本歌謠の原始形に關すろ 二三 考察」(「國語と國文學」 제5권 제10호)(「日本歌謠の原始形に關すろ 二三 考察」(「國語と國文學」 第五卷 第十號)).</ref>라 한 것은 注意를 要할 만한 말인 듯하다. 그러면 웨 原始宗敎에는 그 儀式에 詩歌가 반 듯이 相伴되는가. 코로보리에 본 바와 같이 이름은 宗敎 儀式이라 하였지마는, 이를 딴 方面으로 본다면 歌舞의 演奏라고 이르고 싶었거니와, 駕洛의 龜旨舞歌와 日本의 天岩戶歌舞도 그 具體的 狀態는 알 수 없지마는, 亦是 코로보리의 그를 想像할 수 있으리라 하였는데, 儀式 그것이 歌舞로 終始한다면, 歌舞 그것이 儀式이 되고, 따라서 歌舞 그것에 呪力을 認證하지 않았는가. 타일라가 말한 바와 같이 文化程度가 低級한 民衆 사이의 歌舞는 十分의 熱情과 氣高한 意義가 있다 한다면, 그것에 어떤 「힘」을 賦與하였다고도 생각할 수 있을 듯하다. 日本의 大岩戶歌舞라든지, 駕洛의 龜旨歌舞라든지는 確實히 그렇게 解釋할 수 있을 듯하다. 即 前者는 歌舞의 힘으로 太{{TagPage|80-1}}陽을 危害케 하는 데몬을 驅逐할려는 것이고, 後者는 歌舞의 힘을 빌어 國王을 推戒한 形式이 되겠다. 朝鮮 古代 文獻에는 이와 같은 思想의 發現인 듯한 것을 許多히 볼 수 있다. 三國遺事에서 二三 그 예를 들어보자.
|목차5원문3번= @
+
|목차5원문3번= {{TagSpage|80-2}}}聖德王代 純貞公이 江陵太守가 되어 赴任하던 途中, 臨海한 亭子에서 晝膳하던 차에 忽然히 海龍이 夫人을 掠攬하야 바다로 들어가버렸다. 公이 顚倒避地하였으나 束手無策이러니, 한 老人이 나타나 말하기를 故人의 말에 衆口가 鑠金을 한다 하니, 即今 海中傍生이 어찌 衆口를 두너워하지 아니하겠느냐, 作歌唱之하며 작지로 岸邊을 두드리면 可히 夫人을 보리라 하였다. 公이 그 말을 듣고, {{TagRef|16}}海歌詞<ref>해가사(海歌詞)는 「구호구호출수로(龜乎龜乎出水路), 약인부여죄하극(掠人婦女罪何極), 여약패역불출헌(汝若悖逆不出獻), 입망포약번지끽(入網浦掠燔之喫)」라 하는 것인데, 가락 양가와 많은 공통점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주술적 시가로서 보통 널리 쓰이던 것인 듯하다. 또다시 졸고 「조선시가의 원시형」(조선어문 제7호)을 참조하여 줌을 바란다.(海歌詞는 「龜乎龜乎出水路, 掠人婦女罪何極, 汝若悖逆不出獻, 入網浦掠燔之喫」라 하는 것인데, 駕洛兩歌와 많은 共通点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呪術的 詩歌로서 普通 널리 쓰이던 것인 듯하다. 또다시 拙稿 「朝鮮詩歌의原始形」(朝鮮語文 第七號)을 叅照하야줌을 바란다).</ref>을 지어 여러 사람이 불렀더니, 果然 海龍이 夫人을 데리고 나왔다. {{TagRef|17}}夫人의 姿容이 絶代하야 그後 深山大澤을 지날 때마다 屢次 神物의 掠攬을 當한 일이 있었으나, 그때마다 이 海歌詞 읊으면 禍를 免할 수가 있었다.<ref>삼국유사 권 제2 수로부인(三國遺事 卷第二 水路夫人).</ref>
|목차5원문4번= @
+
|목차5원문4번= {{TagSpage|80-3}}{{TagRef|18}}眞平王代에 第五 居烈郎、第六 實處郎, 第七 寶同郎 等 三花之徒가 楓岳을 遊覽하였더니 慧星이 大星을 犯心하였으므로 不吉한가 하야 行脚을 罷意코저 하였다. 그때에 融天師가 慧星歌을 지어 부르니, 星怪가 即滅하고 日本兵이 還國하야, 도리어 福慶을 이루어 大王이 歡喜하시어서 郞徒를 楓岳에 遊覽보내었다.<ref>동상 권 제5 융천사 혜성가(同上 卷第五 融天師 慧星歌).</ref>
|목차5원문5번= @
+
|목차5원문5번= {{TagSpage|80-4}}{{TagRef|19}}景德王 十九年 庚子 四月 朔에 天空에 二日이 나타나서 旬日을 두고 滅하지 않은 怪變이 있었다. 日官이 말하기를 緣僧을 請하야 散花功德을 하면 可禳하리라 하였으므로, 朝天殿이 壇을 清潔히 하고 靑陽樓에 駕幸하시어서, 緣僧을 바라던 차에 月明師가 앞을 지났다. 곧 불러서 日官이 하던 말대로 請하니, 明이 臣僧은 다만 國由의 徒에 屬하야 鄕歌는 解하지마는, 聲梵은 神通을 못하다 하였다. 王이 旣爲 緣僧을 만난 바에야 鄕歌도 可하다 하였으{{TagPage|81-1}}므로, 明이 兜率歌를 지어 읊으니 日怪가 即滅하였다.<ref>동상 권 제5 월명사 도솔가(同上 卷第五 月明師 兜率歌).</ref>
 +
|목차5원문6번= {{TagSpage|81-2}}지금 여기에 든 例들은 그中 二三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나, 모두 그 思想을 露骨的으로 나타낸 것이라 하겠다. 後二者는 아직 거기 佛敎의 功德이라는 宗敎意識에 숨길 수 있는 듯하지마는, 前一者 海歌詞에 이르러서는 아무 숨길대도 없이 海歌詞 그것만으로 能히 훌륭한 「힘」을 發揮하고 있다. 老人의 獻言에도 單純히 衆口가 能히 海中傍生을 威脅할 수 있으니 作歌唱之하라 하였고, 事實 그대로 海歌詞를 읊으니, 海龍이 데리고 나와서 바치었을 뿐 아니라, 其後 屢次 같은 効果를 얻은 것은 다른 아무 外部的 힘을 빌린 것도 아니고, 오로지 詩歌 自身의 힘으로 願望을 達할 수 있었다. 이것 要컨대 詩歌에 어떤 呪力이 있었다 認定한 것을 朝鮮편의 文獻으로도 볼 수 있다는 一 傍證의 材料가 되겠으나, 大體로 詩歌라는 것은 人間 赤誠이 具體的으로 밖에 表現된 것이다. 古人도 至誠이면 感天이라 이른 바와 같이 一點 邪心이 없고, 정말 至誠이라 한다면 어떤 것을 움즉일 만한 힘이 있기도 可宜다. 詩歌는 實로 그러한 部門을 所有하고 있으니까, 文化가 低級한 民族이 그에 對한 것은 一種 存在의 힘을 認定하였다는 것은 구태어 無理한 事實도 아닐 것이다. {{TagRef|20}}僧 一然이 鄕歌는 往往 天地鬼神을 感動시킨다 한 것도<ref>동상(同上).</ref> 또한 詩歌에 呪力을 認定한 말이라 解釋된다.
 +
|목차5원문7번= {{TagSpage|81-3}}이와 같이 詩歌에 呪力이 있었다는 것은 곧 詩歌 自身이 벌서 宗敎的이라는 것이 되나, 이 呪力的인 原始 詩歌가 呪術的 原始 宗敎와 結合하야 그 儀禮에 使用된 것은 極히 自然스러운 일일 것 같다. 그리하야 詩歌와 宗敎는 그 原始時代에 있어서 거의 分離할 수 없이 密接한 關係를 갖지 않았든가 한다.
  
|목차5해독문1번= @
+
|목차5해독문1번= 종교의 발생 문제에 대하여는 구구의 학설이 있어 도저히 우리들 문외한의 평판(評判)할 바가 되지 못하나, 대체에 있어 주술이 종교적 현상의 원시적 형태라 함에는 그다지 틀림이 없는 듯하다. 주술에도 의지현상(意識現象)의 심적 태도가 있는 동시에 신체적 태도의 의예가 있어 비로소 종교생활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이나, 심적 태도인 그 내용 생활은 그만두고라도, 그의 외면 표출인 의례 방면에는 우리들 시가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TagPerson|[[분트]]}}도 시가의 자매인 원시인 무용의 동기를 단순히 음악을 위한 것도 아니고, 혹은 다시 진실한 목적이 있었는 것도 아니고, 최초는 주(呪)의 목적을 가진 것이라 하였다 한 것으로 보면, 심리학상으로도 이것이 설명이 되는 듯하나, 시가의 동기가 주(呪)의 목적이라 하지 못한다 하고도 시가가 주술의 목적으로 쓰인 것은 사실인 듯하다. 가락국가 「구하구하(龜何讓何)、수기현야(首其現也)、약불현야(若不現也)、번작이끽야(播灼而喫也)」는 수로왕을 맞기 위한 주원가(呪願歌)라는 것은 벌서 앞에서도 말한 바이나, 일본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천암호은피(天岩戶隱避) 전설에 대하여 {{TagPerson|[[진전좌우길(津田左右吉)]]}} 씨는 재미있는 해설을 하였다. 그 전설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천조대신(天照大神)이 그 어제 되는 소잔오존(素盞嗚尊)의 소란(騒亂)을 싫어서 천암호(天岩戶)에 숨어버리자, 갑자기 일광이 없어지며 암흑천지가 되었으므로 여러 신들이 크게 혼혹(混惑)하여 천암호(天岩戶) 앞에 모이어 의논한 결과, 가무, 음악을 하였더니 대신이 어쩐 일인고 하고 문을 조그만치 열고 내다보려 할 때, 그중 힘많은 신이 문을 열어젖히고 대신을 꺼내니, 일광이 다시 빛나 광명한 천지가 되었다는 것이나, 진전(津田) 씨의 해석은 이러하다.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천호은피(天戶隱避)의 이야기는 일식의 현상과 그때에 행한 주술에 관한 신화라고 해석할 수 있다. 즉 일신이 돌연히 천호(岩戶)에 은피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암흑하였다는 것은 일식의 현상을 신화화한 것이고, 그때 소잔오존(素盞嗚尊)은 태양에 위해를 가한 데몬이다. 그래서 장명조(長鳴鳥)를 울린 것도, 천세여명(天細女命)이 열중하여 무용한 것도 기타 모든 신이 소리를 내어 노래 부른 것도 태양의 출현을 촉진하려는 magic이었었다 생각할 수 있다」라고. 즉 일본에 있어서 천암호(天岩戶)의 가무도 주적 목적에 시행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목차5해독문2번= @
+
|목차5해독문2번= 이 밖에도 이와 같은 실례는 원시문화 중에서 얼마든지 들 수 있다. 원시 종교의 의례에 불가결할 지위에 있을 것은 이로서 짐작할 수 있으며, 또 그것의 구체적 상태에 대하여는 오스토라리아의 코로보리와 우울룽과사제(蛇祭)에서 본 바와 같으나, {{TagPerson|[[서촌진차(西村眞次)]]}} 씨가 원시시대의 시가와 종교와의 관계를 하여 「여상의 군가, 수렵가, 장식가 등의 내용을 검토하여 보면, 모두 욕구한 것이 근저를 삼고 있다. 그리고 그들 가요의 연주는 우리들 간에 보듯이 단순한 예술로서, 내지 오락으로서 행한 것이 아니고, 모두 주적 종교적 의식이 상반한 것이다. 아니 가요에 주적 종교적 의식이 상반한 것이 아니라, 주적 종교적 의식에 가요가 상반한 것이다. 타일라도 지적한 바와 같이 무용은 근대인에는 단지 오락으로밖에 보이지 않지만은, 문화 정도가 저급한 민중 사이에는 십분의 열기와 기고한 의의가 있다. 무용과 같이 가요도 또 오락이 아니고, 흔히는 마직과 종교과의 의전에 상반한 원시민중의 집단적 욕망의 표현이었다」라 한 것은 주의를 요할 만한 말인 듯하다. 그러면 왜 원시 종교에는 그 의식에 시가가 반드시 상반되는가. 코로보리에 본 바와 같이 이름은 종교 의식이라 하였지만은, 이를 딴 방면으로 본다면 가무의 연주라고 이르고 싶었거니와, 가락의 구지무가(龜旨舞歌)와 일본의 천암호가무(天岩戶歌舞)도 그 구체적 상태는 알 수 없지만은, 역시 코로보리의 그를 상상할 수 있으리라 하였는데, 의식 그것이 가무로 종시한다면, 가무 그것이 의식이 되고, 따라서 가무 그것에 주력(呪力)을 인증하지 않았는가. 타일라가 말한 바와 같이 문화 정도가 저급한 민중 사이의 가무는 십분의 열정과 기고한 의의가 있다 한다면, 그것에 어떤 「힘」을 부여하였다고도 생각할 수 있을 듯하다. 일본의 천암호가무(大岩戶歌舞)라든지, 가락의 구지가무(龜旨歌舞)라든지는 확실히 그렇게 해석할 수 있을 듯하다. 즉 전자는 가무의 힘으로 태양을 위해케 하는 데몬을 구축하려는 것이고, 후자는 가무의 힘을 빌어 국왕을 추계한 형식이 되겠다. 조선 고대 문헌에는 이와 같은 사상의 발현인 듯한 것을 허다히 볼 수 있다. 삼국유사에서 이삼 그 예를 들어보자.
|목차5해독문3번= @
+
|목차5해독문3번= 성덕왕대(聖德王代) 순정공(純貞公)이 강릉(江陵) 태수(太守)가 되어 부임하던 도중, 임해한 정자에서 주선(晝膳)하던 차에 홀연히 해룡이 부인을 약람(掠攬)하야 바다로 들어가 버렸다. 공이 진도피지(顚倒避地)하였으나 속수무책이러니, 한 노인이 나타나 말하기를 고인의 말에 중구(衆口)가 삭금(鑠金)을 한다 하니, 즉 금(今) 해중방생(海中傍生)이 어찌 중구(衆口)를 두려워하지 아니하겠느냐, 작가창지(作歌唱之)하며 작지로 안변(岸邊)을 두드리면 가히 부인을 보리라 하였다. 공이 그 말을 듣고, 해가사(海歌詞)를 지어 여러 사람이 불렀더니, 과연 해룡이 부인을 데리고 나왔다. 부인의 자용이 절대하야 그 후 심산대택(深山大澤)을 지날 때마다 누차 신물의 약람(掠攬)을 당한 일이 있었으나, 그때마다 이 해가사(海歌詞)를 읊으면 화를 면할 수가 있었다.
|목차5해독문4번= @
+
|목차5해독문4번= 진평왕대(眞平王代)에 제5 거열랑(居烈郎), 제6 실처랑(實處郎), 제7 보동랑(寶同郎) 등 삼화지도(三花之徒)가 풍악을 유람하였더니, 혜성이 대성을 범심(犯心)하였으므로 불길한가 하여 행각을 파의(罷意)코자 하였다. 그때에 융천사(融天師)가 혜성가(慧星歌)를 지어 부르니, 성괴(星怪)가 즉멸하고 일본병이 환국하여, 도리어 복경(福慶)을 이루어 대왕이 환희하시어서 낭도(郞徒)를 풍악에 유람 보내었다.
|목차5해독문5번= @
+
|목차5해독문5번= 경덕왕(景德王) 19년 경자(庚子) 4월 삭(朔)에 천공에 2일이 나타나서 순일을 두고 멸하지 않은 괴변이 있었다. 일관(日官)이 말하기를 연승(緣僧)을 청(請)하여 산화공덕(散花功德)을 하면 가양(可禳)하리라 하였으므로, 조천전(朝天殿)이 단(壇)을 청결히 하고 청양루(靑陽樓)에 가행(駕幸)하시어서, 연승(緣僧)을 바라던 차에 월명사(月明師)가 앞을 지났다. 곧 불러서 일관이 하던 말대로 청하니, 명(明)이 신승(臣僧)은 다만 국유의 도에 속하야 향가는 해(解)하지만은, 성범(聲梵)은 신통을 못 한다 하였다. 왕이 기위(旣爲) 연승(緣僧)을 만난 바에야 향가도 가(可)하다 하였으므로, 명(明)이 도솔가(兜率歌)를 지어 읊으니 일괴(日怪)가 즉멸하였다.
 +
|목차5해독문6번= 지금 여기에 든 예들은 그중 이삼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나, 모두 그 사상을 노골적으로 나타낸 것이라 하겠다. 후이자는 아직 거기 불교의 공덕이라는 종교 의식에 숨길 수 있는 듯하지만은, 전일자 해가사(海歌詞)에 이르러서는 아무 숨길 데도 없이 해가사(海歌詞) 그것만으로 능히 훌륭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노인의 헌언(獻言)에도 단순히 중구가 능히 해중방생(海中傍生)을 위협할 수 있으니 작가창지(作歌唱之)하라 하였고, 사실 그대로 해가사(海歌詞)를 읊으니, 해룡이 데리고 나와서 바치었을 뿐 아니라, 기후(其後) 누차 같은 효과를 얻은 것은 다른 아무 외부적 힘을 빌린 것도 아니고, 오로지 시가 자신의 힘으로 원망을 달할 수 있었다. 이것 요컨대 시가에 어떤 주력이 있었다 인정한 것을 조선편의 문헌으로도 볼 수 있다는 일 방증의 재료가 되겠으나, 대체로 시가라는 것은 인간 적성(赤誠)이 구체적으로 밖에 표현된 것이다. 고인도 지성이면 감천이라 이른 바와 같이 일점 사심이 없고, 정말 지성이라 한다면 어떤 것을 움직일 만한 힘이 있기도 가의(可宜)다. 시가는 실로 그러한 부문을 소유하고 있으니까, 문화가 저급한 민족이 그에 대한 것은 일종 존재의 힘을 인정하였다는 것은 구태어 무리한 사실도 아닐 것이다. 승 {{TagPerson|[[일연]]}}이 향가는 왕왕 천지귀신을 감동시킨다 한 것도 또한 시가에 주력을 인정한 말이라 해석된다.
 +
|목차5해독문7번= 이와 같이 시가에 주력이 있었다는 것은 곧 시가 자신이 벌서 종교적이라는 것이 되나, 이 주력적인 원시 시가가 주술적 원시 종교와 결합하여 그 의례에 사용된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일 것 같다. 그리하여 시가와 종교는 그 원시시대에 있어서 거의 분리할 수 없이 밀접한 관계를 갖지 않았든가 한다.
 +
}}
 +
{{상단이동|페이지={{PAGENAME}}}}
 +
 
 +
==='''본문6: 결언'''===
 +
----
 +
{{Layout6
 +
|목차6원문1번= {{TagSpage|82-1}}詩歌에 呪力이 있어 宗敎의 儀禮中에 使用되어 그와 굳은 結束이 있다 한다면, 앞에서 解釋된 古文獻의 事實은 單純한 偶然이 아닌 것을 알겠다. 또 이것은 우리의 朝鮮 詩歌의 胎生에도 어떠한 目標를 주는 듯한 感이 있으니, 朝鮮 詩歌는 그가 남긴 文獻이 가르친 바와 같이 宗敎에서 胎生하였는가? 그러나 여기에서 한번 다시 詩歌 發生에 對하야 생각해 보건대, 詩는 반듯이 宗敎에서 發生하였다고도 할 수 없다. 차라리 가장 最初의 詩歌란 것은 그야말로 自然人의 突發的 感情語가 아니든가. 五十嵐力氏가 말한 바와 같이 기쁘다, 슬프다, 속상한다, 부끄럽다{{TagPage|83-1}} 싫다라는 請이, 기침과 재채기가 自然이 나오듯이 咄嗟할 때에 自然이 發하는 {{TagRef|21}}情趣語<ref>「國歌の胎生及び發達」 137頁(「國歌の胎生及び發達」 一三七頁).</ref> 或은 原隨園氏의 말한바 現實生活에 對한 {{TagRef|22}}感激語<ref>「キリシャ史研究」 2頁(「キリシャ史研究」 二頁).</ref>가 곧 시가가 아니든가도 싶다. {{TagRef|23}}尾上八郎가 말한 바와 같이 男女 相愛의 情調가 높아지자, 咨嗟, 詠嘆의 소리 自身이 一種의 律格을 生하야 드디어 簡單한 最初의 詩歌가 되었는지도 모른다.<ref>「일본문학신사」 24頁(「日本文學新史」 二四頁).</ref> 或은 이와 全然 다른 立場에서 본다면, {{TagRef|24}}듈켐이 이른 바와 같이 集合的 感情은 合奏와 統一된 運動을 지켜서만 이른바와 같이 集合的으로 表現되는 것이니까, 그 所作과 呌聲은 自然이 律動的으로 되어 거기에서 歌謠와 舞踊이 發生한다고도<ref>고야청인 역 「宗教生活の原初形態」 354-355頁(古野清人 譯 「宗教生活の原初形態」 三五四─三五五頁).</ref> 할 수 있다.
 +
|목차6원문2번= {{TagSpage|83-2}}要컨대 立場에 따라 如何히도 解釋이 되는 것이 詩歌의 發生說이라는 것이 되다, 구태어 一을 認定하고 他를 拒擊할 必要도 없을 듯하다. 其實은 이들을 다 容認하여 完全한 設明이 되지 않을가 하나, 이것도 一種 文化的 産物이라 하여 보면, 原始時代의 文化는 모두 宗敎 中에 混融되어 있는 것이니까, 詩歌도 그中에 混融되었었다 하겠다. 宇野圓空氏는 其 著에서 모든 {{TagRef|25}}「舞踊의 根源이 單純히 遊戱行動과 模倣本能이라 할 수 없는 同時에, 宗敎的 舞踊이라 할지라도 반듯이 神聖한 存在의 模倣이라든가, 實利的인 共感呪術로서 發生한 것이 아니고, 어느 것이든지 다 表出 及 表現의 行爲로서 主要의 意味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認定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다만 娛樂으로 行하던 舞踊이 傳統에 依한 社會的 强制와 目的의 轉換을 爲하야 宗敎的 行事가 되었다든지, 宗敎的 舞踊이 單純한 娛樂으로 行하게 되었다든지, 相互間에 所謂 文化的 轉位가, 嚴肅한 義務的 祭儀가 다만 歡樂의 祭儀로 變化하는 一 中心이 되어 있다는 것은 祭儀의 다른 重要 要素인 饗宴과 같이 舞踊 自身의 性質로도 잊어버려선 안 될 傾向이다!」<ref>「종교민족학」 476-477頁(「宗教民族學」 四七六─四七七頁).</ref>라 하고, 다시 詩歌에 對하여 {{TagRef|26}}「實際로 그것이 가끔 宗敎와 娛樂의 사이를 動搖, 來往하고 있는{{TagPage|84-1}} 것은 舞踊과 다름이 없다」<ref>동상 478頁(同上 四七八頁).</ref> 하였으나, 詩歌는 그 發生 動機만을 말하면, 個人的 立場에서, 或은 民樂的 立場에서 이를 볼 수도 있지마는, 그 發展 過程에는 娛樂的으로, 或은 宗敎的으로 될 수 있는 同時에, 雙方은 서로 늘 動搖來往하야, 娛樂的 詩歌가 宗敎的 詩歌로 된 때도 있고, 宗敎的 詩歌가 娛樂的 詩歌로 된 때도 있듯이 兩者間에는 充分한 妥協性이 있었는 듯하다. 그리고 原始時代의 生活中心은 늘 宗敎에 있을만치, 詩歌라 할지라도 完全히 宗敎를 벗어나서 그 發達은 볼 수 없을 것이다.
 +
|목차6원문3번= {{TagSpage|84-2}}그렇다면 詩歌는 그 發生 動機 如何를 不問하고 宗敎와 깊은 因緣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朝鮮 詩歌에서도 또 한 一樣으로 論할 수 있는 問題니, 그 發生 動機는 個人的 或은 民衆的으로 볼 수 있다 하고도, 詩歌로서의 發展 過程은 文獻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宗敎와 因緣을 끊을 수 없었는 듯하다. 그리하여 朝鮮 詩歌는 駕洛國歌와 같이 呪願의 呪歌로서, 또는 每年 定期로 열리는 國民的 大祭儀의 歌舞로서 發達의 端을 열어 그 가운대서 漸漸 詩歌다운 詩歌가 胚胎, 成長하였으리라 하겠다. 또 그와 同時에, 或은 그와 並行하야 娛樂的 詩歌 即 藝術的 詩歌가 發達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宗敎的 詩歌와 머지않은 因緣에 아니 發達하였으리라 想象되고, 文獻을 通하여서만은 朝鮮 詩歌는 大綱 宗敎에서 胎生하였으리라는 結論을 얻을 수 있겠다.
 +
|목차6원문4번= {{TagSpage|84-3}}以上 多少 速斷의 弊를 不免할지 모르나, 이렁저렁 結論까지 끌어나왔다. 여기서 다시 앞에서 말하여 온 바를 回顧하면 詩歌의 胎生이라 하였건마는, 結局은 朝鮮 原始 詩歌와 宗敎와의 關係를 본 바에 지나지 못하였다.이 外에도 民族學的으로, 社會學的으로, 或은 心理學的으로 研究할 部分도 있을 듯하다. 그러나 지금은 그까지 널리{{TagPage|85}} 미치지 못하고 이 論述을 마치련다.
 +
 
 +
|목차6해독문1번= 시가에 주력이 있어 종교의 의례 중에 사용되어 그와 굳은 결속이 있다 한다면, 앞에서 해석된 고문헌의 사실은 단순한 우연이 아닌 것을 알겠다. 또 이것은 우리의 조선 시가의 태생에도 어떠한 목표를 주는 듯한 감이 있으니, 조선 시가는 그가 남긴 문헌이 가르친 바와 같이 종교에서 태생하였는가? 그러나 여기에서 한번 다시 시가 발생에 대하여 생각해 보건대, 시는 반듯이 종교에서 발생하였다고도 할 수 없다. 차라리 가장 최초의 시가란 것은 그야말로 자연인의 돌발적 감정어가 아니든가. {{TagPerson|[[오십남력(五十嵐力)]]}} 씨가 말한 바와 같이 기쁘다, 슬프다, 속상한다, 부끄럽다, 싫다라는 청이, 기침과 재채기가 자연이 나오듯이 돌차(咄嗟)할 때에 자연이 발하는 정취어(情趣語) 혹은 {{TagPerson|[[원수원(原隨園)]]}} 씨의 말한바 현실생활에 대한 감격어가 곧 시가가 아니든가도 싶다. {{TagPerson|[[미상팔랑(尾上八郎)]]}}이 말한 바와 같이 남녀 상애(相愛)의 정조가 높아지자, 자차(咨嗟), 영탄(詠嘆)의 소리 자신이 일종의 율격을 생(生)하여 드디어 간단한 최초의 시가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이와 전연 다른 입장에서 본다면, {{TagPerson|[[듈켄]]}}이 이른 바와 같이 집합적 감정은 합주와 통일된 운동을 지켜서만 이른 바와 같이 집합적으로 표현되는 것이니까, 그 소작(所作)과 규성(呌聲)은 자연이 율동적으로 되어 거기에서 가요와 무용이 발생한다고도 할 수 있다.
 +
|목차6해독문2번= 요컨대 입장에 따라 여하히도 해석이 되는 것이 시가의 발생설이라는 것이 된다. 구태어 일을 인정하고 타를 거격(拒擊)할 필요도 없을 듯하다. 기실은 이들을 다 용인하여 완전한 설명이 되지 않을까 하나, 이것도 일종 문화적 산물이라 하여 보면, 원시시대의 문화는 모두 종교 중에 혼융되어 있는 것이니까, 시가도 그중에 혼융되었었다 하겠다. {{TagPerson|[[우야원공(宇野圓空)]]}} 씨는 기저(其著)에서 모든 「무용의 근원이 단순히 유희행동과 모방본능이라 할 수 없는 동시에, 종교적 무용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신성한 존재의 모방이라든가, 실리적인 공감주술로서 발생한 것이 아니고, 어느 것이든지 다 표출 급 표현의 행위로서 주요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다만 오락으로 행하던 무용이 전통에 의한 사회적 강제와 목적의 전환을 위하여 종교적 행사가 되었다든지, 종교적 무용이 단순한 오락으로 행하게 되었다든지, 상호간에 소위 문화적 전위가, 엄숙한 의무적 제의가 다만 환락의 제의로 변화하는 일 중심이 되어 있다는 것은 제의의 다른 중요 요소인 향연과 같이 무용 자신의 성질로도 잊어버려선 안 될 경향이다!」라 하고, 다시 시가에 대하여 「실제로 그것이 가끔 종교와 오락의 사이를 동요, 내왕하고 있는 것은 무용과 다름이 없다」 하였으나, 시가는 그 발생 동기만을 말하면, 개인적 입장에서, 혹은 민락적 입장에서 이를 볼 수도 있지만은, 그 발전 과정에는 오락적으로, 혹은 종교적으로 될 수 있는 동시에, 쌍방은 서로 늘 동요내왕하야, 오락적 시가가 종교적 시가로 된 때도 있고, 종교적 시가가 오락적 시가로 된 때도 있듯이 양자간에는 충분한 타협성이 있었는 듯하다. 그리고 원시시대의 생활 중심은 늘 종교에 있을 만치, 시가라 할지라도 완전히 종교를 벗어나서 그 발달은 볼 수 없을 것이다.
 +
|목차6해독문3번= 그렇다면 시가는 그 발생 동기 여하를 불문하고 종교와 깊은 인연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 시가에서도 또 한 일양으로 논할 수 있는 문제니, 그 발생 동기는 개인적 혹은 민중적으로 볼 수 있다 하고도, 시가로서의 발전 과정은 문헌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종교와 인연을 끊을 수 없었는 듯하다. 그리하여 조선 시가는 가락국가와 같이 주원의 주가로서, 또는 매년 정기로 열리는 국민적 대제의의 가무로서 발달의 단을 열어 그 가운데서 점점 시가다운 시가가 배태, 성장하였으리라 하겠다. 또 그와 동시에, 혹은 그와 병행하여 오락적 시가 즉 예술적 시가가 발달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종교적 시가와 머지않은 인연에 아니 발달하였으리라 상상되고, 문헌을 통하여서만은 조선 시가는 대강 종교에서 태생하였으리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겠다.
 +
|목차6해독문4번= 이상 다소 속단의 폐를 불면할지 모르나, 이렁저렁 결론까지 끌어나왔다. 여기서 다시 앞에서 말하여 온 바를 회고하면 시가의 태생이라 하였건만은, 결국은 조선 원시 시가와 종교와의 관계를 본 바에 지나지 못하였다. 이 외에도 민족학적으로, 사회학적으로, 혹은 심리학적으로 연구할 부분도 있을 듯하다. 그러나 지금은 그까지 널리 미치지 못하고 이 논술을 마치련다.
 
}}
 
}}
 
{{상단이동|페이지={{PAGENAME}}}}
 
{{상단이동|페이지={{PAGENAME}}}}
132번째 줄: 226번째 줄:
 
==='''TripleData'''===
 
==='''TripleData'''===
 
<font face="함초롬돋움">
 
<font face="함초롬돋움">
{{SemanticNetworkRDF | db=s_jisun | project=jdTest | key={{FULLPAGENAMEE}}  }}
+
{{SemanticNetworkRDF | db=s_jisun | project=JD2| key={{FULLPAGENAMEE}}  }}
 
{{상단이동|페이지={{PAGENAME}}}}
 
{{상단이동|페이지={{PAGENAME}}}}
  
 
==='''Data Network'''===
 
==='''Data Network'''===
 
----
 
----
{{SemanticNetwork | db=s_jisun | project=jdTest | key={{FULLPAGENAMEE}} }}
+
{{SemanticNetwork | db=s_jisun | project=JD2| key={{FULLPAGENAMEE}} }}
 
{{상단이동|페이지={{PAGENAME}}}}
 
{{상단이동|페이지={{PAGENAME}}}}
 
<br/><br/>
 
<br/><br/>

2024년 3월 17일 (일) 18:30 기준 최신판

진단학보 원고(Article) 목록으로 이동하기 XML 문서 보기

조선 시가의 태생
Icon article.png
출처 :
 
원제목 朝鮮 詩歌의 胎生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진단학보 1 발행기관 진단학회
저자 조윤제 역자 집필일자 게재연월 1934년11월
시작쪽 056쪽 종료쪽 085쪽 전체쪽 030쪽 연재여부 범주 논문 분야 문학



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조윤제의 「조선 시가의 태생」은 『진단학보』 1권(1934.11.)에 실린 글이다. 이 글은 1장 "서언", 2장 "원시 시가의 내포", 3장 "조선 원시 시가에 관한 문헌", 4장 "그 문헌의 해석", 5장 "원시 종교와 시가", 6장 "결언"으로 구성된다. 1장에서는 향가 발생 이전 조선시가의 첫 단계에 대한 검토 필요성을 요청한다. 2장에서는 원시 시가를 아직 음악 및 무용과 결합한 ballad dance로 제시한다. 제3장과 제4장에서는 문헌 검토를 바탕으로 가무가 수반되는 종교 의식을 제천 및 제신양식, 기도 및 주원(呪願), 장의로 구분한다. 제5장에서는 원시시가의 주술적 성격을 통해 문학과 종교의 관계를 논의한다. 이 글은 종교에 관한 에밀 뒤르켐, 빌헬름 분트의 논의, 일본 고대사 및 가요에 관한 쓰다 소키치, 니시무라 신지의 논의, 삼국시대에 대한 백남운의 논의를 두루 참조하면서 논지를 전개하고 있다.




목차







본문


본문1: 서언


향가는 오늘에 유존(遺存)한 조선의 최고(最古) 시가라 하여도 과언이라 할 수 없다. 그러나 그 향가란 것은 잘 고찰하여 보면 비록 몇 수 되지 못하지마는, 형식이 아주 정제되어 있어 이를 후세의 시가와도 비교하여 볼 때, 한 규율에 정리되어 있는 정형시 같이도 보인다. 세계 일반 문학사상의 시가 발달의 경로를 볼 때, 소위 정형시까지에 발달함에는 장구한 역사의 배경을 가지는 듯하니, 일로 보면 향가는 조선의 최고 유존 시가라고는 할 수 있을지언정, 조선의 최초 시가라고는 할 수 없다. 문헌에도 그 내용은 전하지 못하지만은, 이름만이라도 향가 이전에 도솔가(兜率歌), 사뇌가(詞腦歌) 등의 가명(歌名)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니까, 더욱이 말할 것도 없다.
쪽수▶P56鄕歌는 오늘에 遺存한 朝鮮의 最古 詩歌라 하여도 過言이라 할 수 없다. 그러나 그 鄕歌란 것은 잘 考察하여 보면 비록 몇 首 되지 못하지마는, 形式이 아주 整齊되어 있어 이를 後世의 詩歌와도 比較하여볼 때, 한 規律에 整理되어 있는 定型詩 같이도 보인다. 世界 一般 文學史上의 詩歌 發達의 經路를 볼 때, 所謂 定型詩까지에 發達함에는 長久한 歷史의 背景을 가지는 듯하니, 일로 보면 鄕歌는 朝鮮의 最古 遺存 詩歌라고는 할 수 있을지언정,▶P57-1朝鮮의 最初 詩歌라고는 할 수 없다. 文獻에도 그 內容은 傳하지 못하지마는, 이름만이라도 鄕歌 以前에 兜率歌 詞腦歌 等의 歌名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니까, 더욱이 말할 것도 없다.
또 도솔가(兜率歌), 사뇌가(詞腦歌)라 할지라도, 이것이 최초의 시가라고는 아직 할 수 없다. 왜 그러냐 하면 시가의 정말 최초는 극단이 말하면 거의 인간사의 최초와도 동일히 논하지 않으면 안 되겠지만은, 그렇지 안다 하더라도 시가는 자연인의 호소에 벌서 시작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기원적 발달은 극히 요원한 것이 되어 도솔가(兜率歌), 사뇌가(詞腦歌) 등은 그에 비하면 훨씬 후대의 산품이라 하여야 될 것이다. 원체 시가에 대하야 이름이 붙는 것만도 한 가지 후산(後產)의 증거가 되는 것이니, 아무 형식적 규정이 없었다 한다면 다른 것과 구별할 이름은 불필요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와 같은 것은 지금 이 연구에는 직접 관계가 되지 않은만치 훨씬 발달한 시가고, 그보다는 차라리 더 소박한 원시 시가가 연구의 대상이 될 것이다. 막연히 원시 시가라 할지라도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극히 추상적 그 기원에까지 소상(遡上)하는 것도 또한 무의미한 것이니까, 다소는 시대가 늘어지는 혐이 있다 하드라도 구체적으로 사실을 잡을 수 있을 만한 정도에 이르지 않으면 연구의 가치가 되지 않을 것이다.
쪽수▶P57-2또 兜率歌, 詞腦歌라 할지라도, 이것이 最初의 詩歌라고는 아직 할 수 없다. 왜 그러냐 하면 詩歌의 정말 最初는 極端이 말하면 거의 人間史의 最初와도 同一히 論하지 않으면 안 되겠지마는, 그렇지 안다 하더라도 詩歌는 自然人의 呼訴에 벌서 始作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起源的 發達은 極히 遙遠한 것이 되어 兜率歌、詞惱歌 等은 그에 比하면 헐신 後代의 產品이라 하여야 될 것이다. 元體 詩歌에 對하야 이름이 붙는 것만도 한 가지 後產의 證據가 되는 것이니, 아무 形式的 規定이 없었다 한다면 다른 것과 區別할 이름은 不必要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와 같은 것은 지금 이 硏究에는 直接 關係가 되지 않은만치 훨신 발달한 詩歌고, 그보다는 차라리 더 素樸한 原始 詩歌가 硏究의 對象이 될 것이다. 漠然히 原始 詩歌라 할지라도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極히 抽象的 그 起源에까지 遡上하는 것도 또한 無意味한 것이니까, 多少는 時代가 늘어지는 嫌이 있다 하드라도 具體的으로 事實을 잡을 수 있을 만한 程度에 이르지 않으면 研究의 價値가 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말할 것도 실로 거기서부터라야 될 것이다. 여기에 내가 조선 시가의 기원이라 하지 아니하고 「조선시가의 태생」이라 한 것도 즉 그러한 의미에서 나온 것이니 나는 이 소론으로 조선 시가의 부터 발달해 온 바의 연원을 보살필까 한다.
쪽수▶P57-3여기서 말할 것도 實로 거기서부터라야 될 것이다. 여기에 내가 朝鮮 詩歌의 起源이라 하지 아니하고 「朝鮮詩歌의 胎生」이라 한 것도 卽 그러한 意味에서 나온 것이니 나는 이 小論으로 朝鮮 詩歌의 부터 發達해온 바의 淵源을 보살필가 한다.




































본문2: 원시 시가의 내포


시가는 자연의 호소에 그 맹아를 트고 있으나, 이것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기는 원시 민요인 Ballad dance다. 소위 Ballad dance라는 사실은 원시적인 음악, 시가, 무용의 결합을 의미하는 것이니, 시가의 원천은 여기 있다고 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다. 이 삼자에 대하여서는 그 어느 것이 더 기원적인가를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 논란이 있어, 혹은 시가를 다른 이자보다 최초의 것이라 하는 이도 있고, 혹은 무용을 그라 하는 이도 있지만은, 일반은 이상 삼자의 결합체인 Ballad dance가 가장 원시적이라 하는 듯하다.
쪽수▶P58-1詩歌는 自然의 呼訴에 그 萠芽를 트고 있으나, 이것이 具體的으로 들어나기는 原始 民謠인 Ballad dance다. 所謂 Ballad dance라는 事實은 原始的인 音樂、詩歌、舞踊의 結合을 意味하는 것이니, 詩歌의 源泉은 여기 있다고 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다. 이 三者에 對하여서는 그 어느 것이 더 起源的인가를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 論難이 있어, 彧은 詩歌를 다른 二者보다 最初 것이라 하는 이도 있고, 彧은 舞踊을 그라 하는 이도 있지마는, 一般은 以上 三者의 結合體인 Ballad dance가 가장 原始的이라 하는 듯하다.
즉 원시 시가는 아직 분화하지 않은 음악, 무용과의 결합 예술로서, 일일의 작품에는 다 음악적, 무용적 요소를 구유하고 있다. 그로오제인물도 「원시 민족의 무용, 시가 급 음악은 자연히는 일치되어 있고, 다만 인위적 추상적으로 볼 때에만 분리할 수 있다. 따라서 만약 우리가 이들 원시적 예술의 각개 상세와 효과를 정확히 이해하고 평가하려면, 우리는 그들이 각각 독립하여 있들 않고 극히 밀접한 유기적 결합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늘 유의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면 삼자 즉 시가, 음악, 무용은 원시시대에 있어서 여하한 관계와 결합 정도에 있는가. 그로오제인물는 다시 시와 음악과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모든 원시적 서정시인이 동시에 작곡자일 것, 모든 원시적 시는 다만 그것이 시적 작품이 될 뿐 아니라, 또한 음악적 작품일 것은 우리들이 말해 온 바다. 시인에 대하여는 시가의 문구가 그 자체의 의미를 가지고 있겠지만은, 그러나 다른 사람에 있어서는 흔히 문구는 단순한 선율의 지지자 됨에 지나지 못한다. 사실 우리도 역시 시가의 형식 때문에 그 내용을 거침없이 희생하여 버리는 일이 있다. 아이야아인물는 「많은 오오스토리아인은 그 자신의 향토에서 부르는 제다의 시가 의미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그와 같이 그들이 붙이는 설명이 극히 불완전하다는 것은 시가의 내용보다 철음(綴音)의 장단에 일층 중요시한 결과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하였다. 또 다른 저자는 「모든 코로보리의 시가에 있어서 리듬을 변경하고 또 보전하기 위하야 분명히 무의미한 것을 부르는 만큼 그들은 어구를 반복하고 또 환치한다」라 기술하였다. 형식에 한 흥미가 민콤비에서도 이에 미치지 않을만치 중요한 것이 된다. …중략…… 이와 같이 우리는 최저급의 문명에 있는 서정시는 주로 음악적 성질을 가지고 있고, 시적 의미는 다만 제이차적으로 가짐에 불과한다는 결론에 달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즉 원시시대의 시가와 음악은 이를 최저급 문화민족의 예를 볼 때, 온전히 분리할 수 없음을 설파하였다.
쪽수▶P58-2即 原始 詩歌는 아직 分化하지 않은 音樂、舞踊과의 結合 藝術로서, 一一의 作品에는 다 音樂的、舞踊的 要素를 具有하고 있다. 그로오제도 원문주1▶「原始 民族의 舞踊, 詩歌 及 音樂은 自然히는 一致되어 있고, 다만 人爲的 抽象的으로 볼 때에만 分離할 수 있다. 따라서 萬若 우리가 이들 原始的 藝術의 各個 狀勢와 效果를 正確히 理解하고 評價하려면, 우리는 그들이 各各 獨立하여있들 않고 極히 密接한 有機的 結合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늘 留意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다」[1]라고 말하였다. 그러면 三者 即 詩歌, 音樂, 舞踊은 原始時代에 있어서 如何한 關係와 結合 程度에 있는가. 그로오제는 다시 詩와 音樂과의 關係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모든 原始的 敍情詩人이 同時에 作曲者일 것, 모든 原始的 詩는 다만 그것이 詩的 作品이 될 뿐 아니라, 또한 音樂的 作品일 것은 우리들이 말해 온 바다. 詩人에 對하여는 詩歌의 文句가 그 自體의 意味를 가지고 있겠지마는, 그러나 다른 사람▶P59-1에 있어서는 흔히 文句는 單純한 旋律의 支持者 됨에 지나지 못한다. 事實 우리도 亦是 詩歌의 形式때문에 그 內容을 거침없이 犧牲하여 버리는 일이 있다. 아이야아는 「많은 오오스토리아人은 그 自身의 鄕土에서 부르는 諸多의 詩歌 意味를 充分히 說明하지 못한다. 그와 같이 그들이 붙이는 說明이 極히 不完全하다는 것은 詩歌의 內容보다 綴音의 長短에 一層 重要視한 結果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하였다. 또 다른 著者는 원문주2▶「모든 코로 보리의 詩歌에 있어서 리듬을 變更하고 또 保全하기 爲하야 分明히 無意味한 것을 부르는 만큼 그들은 語句를 反覆하고 또 換置한다」라 記述하였다. 形式에 한 興味가 민콤비에서도 이에 미치지 않을만치 重要한 것이 된다. …中略… 이와 같이 우리는 最低級의 文明에 있는 敍情詩는 主로 音樂的 性質을 가지고 있고, 詩的 意味는 다만 第二次的으로 가짐에 不過한다는 結論에 達하지 않을 수 없다」[2]라고. 即 原始時代의 詩歌와 音樂은 이를 最低級 文化民族의 例를 볼 때, 온전히 分離할 수 없음을 說破하였다.
다음은 무용과의 관계를 생각하여 보자. 무용은 원시인 생활의 중요한 표현이 되는 것이니, 그들은 잘 노래 부름과 동시에 잘 무용한다 할 것이다. 오늘의 미개인에서 예를 들어볼지라도, 그들은 실로 무용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한다. 그들의 무용으로서 유명한 것은 오스토라리아人의 코로보리다. 이것은 과실의 성숙, 모려(牡蠣)를 채로(採撈)할 때, 청년의 입사식, 우족과의 회합, 전투에 진발할 때, 많은 수렵을 하였을 때, 거행되는 것인데, 오주(墺洲) 전토에 퍼져 있어, 여러 사람의 여행사에 기술되어 있으나, 대개는 유사한 것이니까, 일일이 열거하기를 폐하고, 여기서는 그들 여러 가지를 종합하여 소개한 역시 그로오제인물의 글을 일부분 인용하여 시가와 무용과의 관계를 보기로 하겠다. 그로오제인물는 먼저 대강 이 무용의 시작될 때까지의 준비를 말하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리하야 코로보리는 시작되었다. 박자가 정확히 보유됨은 놀랄 만하다. 노래와 운동이 다 같이 불리고 또 된다. 무용자들은 가장 잘 훈련된 바레에 일좌와 같이 몰려서 움직인다. 그들은 때로는 옆으로 뛰고, 때로는 전진하며, 일이보를 퇴각도 하야 모든 있을 만한 숱한 태도를 다하여 운동한다. 또 그들은 팔을 돌리기도 하고, 그 발을 구르면서 몸을 폈다가 꾸부리었다가 한다. 지도자도 역시 쉬지 않고 활동한다. 즉 그는 그의 몽둥이로 박자를 짚음과 동시에 일보 앞으로 일보 뒤로 움직이면서 소리 높이 혹은 고요히 늘 독특한 비음의 노래를 노래 부른다. 또 그는 잠시도 한 곳에서 있지 않는다. 혹은 무용자를 향하기도 하고, 혹은 전력을 다하여 소리치는 여자 편을 향하기도 한다. 무용자들은 점점 더 흥분하여진다. 박자목은 더 빨라지고, 운동은 더 빨라지며, 또 활발하여진다. 무용자들은 그 몸을 의심스러울만치 높이 지상을 뛰며 최후의 날카로운 고함을 마치 한입에서 나온 듯이 일제히 외친다. 조금 뒤에는 그들이 나오듯이 돌연히 숲속으로 숨어 들어가고 장소는 잠시간 공허한 체로 되어 있다. (하략)」. 이상과 같은 무용이 하룻밤에 수차를 계속한다. 그리고 이것은 야간, 흔히 월야에 시행되는데, 사람이 많은 때에는 일단 삼사백 명이 된 때도 있다 한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것을 종교적 제의로 보는 이도 있는 듯하나, 그는 여하튼 이로 인하여 그들이 얼마나 무용을 좋아하며 또 시가와 병행되는 것을 앎에 족할 듯하다.
쪽수▶P59-2다음은 舞踊과의 關係를 생각하여 보자. 舞踊은 原始人 生活의 重要한 表現이 되는 것이니, 그들은 잘 노래 부름과 同時에 잘 舞踊한다 할 것이다. 오늘의 未開人에서 例를 들어볼지라도, 그들은 實로 舞踊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한다. 그들의 舞踊으로서 有名한 것은 오스토라리아人의 코로보리다. 이것은 果實의 成熟, 牡蠣을 採撈하럴 때, 靑年의 入社式, 友族과의 會合, 戰鬪에 進發할 때, 많은 狩獵을 하였을 때, 舉行되는 것인데, 墺洲 全土에 퍼저 있어, 여러 사람의 旅行社에 記述되어 있으나, 大概는 類似한 것이니까, 一一이 列舉하기를 廢하고, 여기서는 그들 여러 가지를 綜合하야 紹介한 亦是 그로오제의 글을 一部分 引用하야 詩歌와 舞踊과의 關係를 보기로 하겠▶P60-1다. 그로오제는 먼저 大綱 이 舞踊의 始作될 때까지의 準備를 말하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원문주3▶「그리하야 코로보리는 始作되었다. 拍子가 正確히 保有됨은 놀랄 만하다. 노래와 運動이 다 같이 불리고 또 된다. 舞踊者들은 가장 잘 訓練된 바레에 一座와 같이 몰려서 움즉인다. 그들은 때로는 옆으로 뛰고, 때로는 前進하며, 一二步를 退却도 하야 모든 있을 만한 수탄 態度를 다하야 運動한다. 또 그들은 팔을 돌리기도 하고, 그 발을 굴르면서 몸을 폈다가 꾸부리었다가 한다. 指導者도 亦是 쉬지 않고 活動한다. 即 그는 그의 몽둥이로 拍子를 짚음과 同時에 一步 앞으로 一步 뒤로 움즉이면서 소리 높이 或은 고요히 늘 獨特한 鼻音의 노래를 노래 부른다. 또 그는 暫時도 한 곳에서 있지 않는다. 或은 舞踊者를 向하기도 하고, 或은 全力을 다하야 소리치는 女子 편을 向하기도 한다. 舞踊者들은 漸漸 더 興奮하여진다. 拍子木은 더 빨라지고, 運動은 더 빨라지며, 또 活潑하여진다. 舞踊者들은 그 몸을 疑心시러울만치 높이 地上을 뛰며 最後의 날카로운 高喊을 마치 한입에서 나온 듯이 一齊히 외친다. 조금 뒤에는 그들이 나오듯이 突然히 숲속으로 숨어 들어가고 場所는 暫時間 空虛한 체로 되어 있다. (下略)」[3]. 以上과 같은 舞踊이 하룻밤에 數次를 繼續한다. 그리고 이것은 夜間, 흔히 月夜에 施行되는데, 사람이 많은 때에는 一團 三四百名이 된 때도 있다 한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것을 宗敎的 祭儀로 보는 이도 있는 듯하나, 그는 여하튼 이로 因하야 그들이 얼마나 舞踊을 좋아하며 또 詩歌와 並行되는 것을 앎에 足할 듯하다.
이상은 미개인간에서 아직 행하고 있는 실례로 시가, 음악, 무용 삼자의 호상적 관계를 본 것이니, 일부러 멀리 그들에 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러한 관계는 가까이 우리들의 일상 생활 중에서도 얻어볼 수 있는 것이다. 첫째 현재의 우리들에 심중의 감정이 격되면 격 될수록, 이상 삼자의 분화한 발표를 만족하지 않고, 가끔 원시적인 전신적 발현을 하게 되는 것은 누구나 다 경험하고 있는 바이거니와, 그 외에 시가를 표시하는 언어 중에서도 원시시대에는 삼자가 불가분리의 상태에 있었음을 말하여주는 것이 있는 듯하니, 조선은 시가를 표시하는 데 한어 계통어를 빼고는 실로 「노래」라는 한 말로 써 나왔다. 「노래」라는 말은 이를 어원적으로 쓰면 「놀애」라 되어 애는 날애, 돌애, 막애, 갈애 등에 보이는 바와 같이 동사가 명사격으로 변할 때 받는 접미어이고, 그 기본 관념은 「놀」에 있는 것이나, 「놀」의 관념은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으니, 첫째 우리들의 머리에 가장 민속(敏速)히 연상되는 것은 유흥, 희락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놀애」는 「놀이」, 「놀음」이라는 말과도 직접 관계가 있게 된다. 즉 「놀애」, 「놀이」, 「놀음」은 다 「놀」 일어의 발전인데 추상적 성질적 표시어가 되어서는 「놀애」가 되고, 「놀」의 구체적 행동적 표시어가 되어서는 「놀이」 혹은 「놀음」으로 된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놀애」라는 말의 근본 관념을 적확히 파악하려면 그 구체적 표어인 「놀이」, 「놀음」의 관념을 밝힘이 가장 속시(速試)일까 한다.
쪽수▶P60-2以上은 未開人間에서 아직 行하고 있는 實例로 詩歌, 音樂, 舞踊 三者의 互相的 關係를 본 것이니, 일부러 멀▶P61-1리 그들에 求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러한 關係는 가직히 우리들의 日常 生活中에서도 얻어볼 수 있는 것이다. 첫재 現在의 우리들에 心中의 感情이 激되면 激 될수록, 以上 三者의 分化한 發表를 滿足하지 않고, 가끔 原始的인 全身的 發現을 하게 되는 것은 누구나 다 經驗하고 있는 바이거니와, 그 外에 詩歌를 表示하는 言語中에서도 原始時代에는 三者가 不可分離의 狀態에 있었음을 말하여주는 것이 있는 듯하니, 朝鮮는 詩歌를 表示하는 대 漢語 系統語를 빼고는 實로 「노래」라는 한 말로 써 나왔다. 「노래」라는 말은 이를 語原的으로 쓰면 「놀애」라 되어 애는 날애, 돌애, 막애, 갈애 等에 보이는 바와 같이 動詞가 名詞格으로 變할 때 받는 接尾語이고, 그 基本 觀念은 「놀」에 있는 것이나, 「놀」의 觀念은 여러 가지로 解釋할 수 있으니, 첫재 우리들의 머리에 가장 敏速히 聯想되는 것은 遊興, 戱樂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놀애」는 「놀이」, 「놀음」이라는 말과도 直接 關係가 있게 된다. 即 「놀애」、「놀이」、「놀음」은 다 「놀」 一語의 發展인데 抽象的 性質的 表示語가 되어서는 「놀애」가 되고, 「놀」의 具體的 行動的 表示語가 되어서는 「놀이」 惑은 「놀음」으로 된 것을 斟酌할 수 있다. 그러므로 「놀애」라는 말의 根本 觀念을 的確히 把握할려면 그 具體的 表語인 「놀이」, 「놀음」의 觀念을 밝힘이 가장 速試일가 한다.
「놀이」, 「놀음」은 유흥, 희락, 연향 등을 의미한 말인데 산두(山臺)놀이, 대감놀이, 단오놀이, 추석놀이, 꽃놀이, 뱃놀이, 홍동지놀음, 원놀음, 풍년놀음 등 이들 실례를 보면 잘 그 내용을 알듯이 일종의 음악이라면 음악이라 할 수 있고, 일종의 무용이라면 무용이라 할 수 있고, 또 일종의 가요라면 가요라 할 수 있으며, 이들을 종합한 일종 연극이라면 연극이라도 할 수 있어, 그들 어떤 것에는 충분히 내용을 분화할 수 없을, 마치 코로보리를 대하는 감이 있다. 즉 시가, 음악, 무용이 분화되지 못한 원시시대 시가 상태를 여기에서 볼 수 없는가 하는 감을 얻는다. 그러면 이들 구체적 행동의 명사 「놀이」, 「놀음」에 대한 추상적 성질의 명사 「놀애」 역시 그와 같은 내용를 포함하고 있을 것은 용이히 진단이 될 바와 같이 「노래」는 아직 음악, 무용과 분화하지 않은 시대의 시가에 기여한 명칭이 오늘에 남아온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쪽수▶P61-2「놀이」, 「놀음」은 遊興、戱樂、宴饗 等을 意味한 말인데 산두(山臺)놀이, 대감놀이, 端午놀이, 秋夕놀이, 꽃놀이, 뱃놀이, 紅同知놀음、員놀음, 豊年놀음 等 이들 實例를 보면 잘 그 內容을 알듯이 一種의 音樂이라면 音樂이라 할 수 있고, 一種의 舞踊이라면 舞踊이라 할 수 있고, 또 一種의 歌謠라면 歌謠라 할 수 있으며, 이들을 綜合한 一種 演劇이라면 演劇이라도 할 수 있어, 그들 어떤 것에는 充分히 內容을 分化할 수 없을, 마치 코로보리를▶P62-1 對하는 感이 있다. 即 詩歌, 音樂, 舞踊이 分化되지 못한 原始時代 詩歌 狀態를 여기에서 볼 수 없는가 하는 感을 얻는다. 그러면 이들 具體的 行動의 名詞 「놀이」, 「놀음」에 對한 抽象的 性質의 名詞 「놀애」 亦是 그와 같은 內容를 包含하고 있을 것은 容易히 進斷이 될 바와 같이 「노래」는 아직 音樂、舞踊과 分化하지 않은 時代의 詩歌에 寄與한 名稱이 오늘에 남아온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상으로 원시 시가의 형태는 거의 천명이 되었을 바와 같이 오늘날의 최저급 문화를 소유하고 있는 민족 사이의 행사, 혹은 현재 우리의 일면적 표현형식으로 보든지, 또는 지금 아직 사용하여 오는 시가 표시어 어원적 해석으로 보든지, 모두 시가, 음악, 무용 삼자가 극히 밀접한 관계에 융합되어 그로오제인물의 결론을 연역적으로 설명할 수 있었는 듯한데, 시경 대서에는 이 삼자의 관계를 이론적으로 설명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쪽수▶P62-2以上으로 原始詩歌의 形態는 거의 闡明이 되었을 바와 같이 오늘날의 最低級 文化를 所有하고 있는 民族 사이의 行事, 或은 現在 우리의 一面的 表現形式으로 보든지, 또는 지금 아직 使用하여 오는 詩歌 表示語 語源的 解釋으로 보든지, 모두 詩歌, 音樂, 舞踊 三者가 極히 密接한 關係에 融合되어 그로오제의 結論을 演繹的으로 說明할 수 있었는 듯한데, 詩經 大序에는 이 三者의 關係를 理論的으로 說明하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詩者、志之所之也、在心爲志、發言爲詩、情動於中、而形於言、言之不足、故嗟歎之、嗟歎之不足、故永歌之、永歌之不足、不知手之舞之足之蹈之也
쪽수▶P62-3詩者、志之所之也、在心爲志、發言爲詩、情動於中、而形於言、言之不足、故嗟歎之、嗟歎之不足、故永歌之、永歌之不足、不知手之舞之足之蹈之也
토거(土居) 교수인물는 이 글을 평하여 「전신적 표정에 음악과 시가의 합체한 것이 분리하고, 그것이 각각 독립하여 다시 언어에서 사상이 독립하게 된 과정을 거꾸로 내다본 것이 아닌가」 한 것은 다소 현대적 설명의 색채를 띤 것이나, 요컨대 시경의 설명은 원시시대의 시가 형태를 심리적으로 설명한 데 대하여 주목의 가치가 있을 듯하다.
쪽수▶P62-4土居 敎授는 이 글을 評하야 원문주4▶「全身的 表情에 音樂과 詩歌의 合體한 것이 分離하고, 그것이 각각 獨立하야 다시 言語에서 思想이 獨立하게 된 過程을 꺼꾸루 내다본 것이 아닌가」[4] 한 것은 多少 現代的 說明의 色彩를 띤 것이나, 要컨대 詩經의 說明은 原始時代의 詩歌 形態를 心理的으로 說明한대 對하야 注目의 價値가 있을 듯하다.
그러면 우리는 원시 시가에 대하여 자연 다음과 같은 태도를 취하게 될 것이다. 즉 시가를 음악, 무용과 분리할 수 없고, 무악도 시가 동양으로 취급하게 될 것이니, 결국은 이 삼자의 종합적 연구를 하게 되어, 문제는 그중에서 여하히 시가라는 것을 독립적으로 내다본다 하는 것이나, 이것은 다른 이자와 분화되지 않은 이상, 온전히 불가능한 일이고, 다만 추상적으로만이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또 원시 시가에는 그까지 구체적으로 분리하려 할 필요도 없다. 왜 그러냐 하면, 분화하지 않은 이전의 상태 그것이 우리들 목적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론에 있어서도 실로 그러한 태도로서 논술을 진전시키려 한다.
쪽수▶P62-5그러면 우리는 原始 詩歌에 對하야 自然 다음과 같은 態度를 取하게 될 것이다. 即 詩歌를 音樂、舞踊과 分離할 수 없고, 舞樂도 詩歌 同樣으로 取扱하게 될 것이니, 結局은 이 三者의 綜合的 硏究를 하게 되어, 問題는 그中▶P63-1에서 如何히 詩歌라는 것을 獨立的으로 내다본다 하는 것이나, 이것은 다른 二者와 分化되지 않은 以上, 온전히 不可能한 일이고, 다만 抽象的으로만이 認識할 수 있는 것이다. 또 原始 詩歌에는 그까지 具體的으로 分離하러 할 必要도 없다. 왜 그러냐 하면, 分化하지 않은 以前의 狀態 그것이 우리들 目的의 對象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本論에 있어서도 實로 그러한 態度로서 論述을 進展시키려 한다.




















본문3: 조선 원시 시가에 관한 문헌


조선 원시 시가에 관한 조선편의 불행히 많이 전(傳)을 못 하였고, 겨우 인방 지나(支那)편에서 얼마끔 얻어볼 수 있는 것은 일종 기적이라 할 수 있겠다. 후한서(後漢書)서적 동이전(東夷傳)에
쪽수▶P63-2朝鮮 原始 詩歌에 關한 朝鮮편의 不幸히 많이 傳를 못 하였고, 겨우 隣邦 支那편에서 얼마끔 얻어볼 수 있는 것은 一種 奇蹟이라 할 수 있겠다. 後漢書 東夷傳에
夏后氏太康失德、夷人始畔、自少康己後、世服王化、家賓於王門、獻其樂舞
쪽수▶P63-3夏后氏太康失德、夷人始畔、自少康己後、世服王化、家賓於王門、獻其樂舞
라 한 것이 글자대로 보아서는 지나에 알리게 된 동방 악무의 최초일 것 같으나, 첫째 시대에 있어 신용하기 어렵고, 또 그 소위 「이인(夷人)」의 지칭도 좀 막연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동전(同傳) 중에 「東夷率皆土署, 喜飮酒歌舞」라 한 것은 동이인의 무악을 호(好)하는 특성에 대하여 주의한 고래 지나인의 전평(傳評)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 동이라 하는 것은 반듯이 조선만을 지시한 것은 아니다. 널리 말하면 오늘에 만주, 일본이 다 이 칭호에 쓸어갈 것이니까, 이로써 조선에 당한 것이라 할 수는 없지마는, 「희가무(喜歌舞)」란 말은 뒤에 보아도 알 바와 같이 거의 상습적으로 지나인이 조선에 대하여 쓰는 문자이니까, 감히 조선을 말한 것이리라 하여도 가할 듯한데, 위지(魏志)서적를 위시하야 여러 사료 문헌에 조선 방면의 기록이 산재하여 있으나, 이것을 사료별로 하면 도리어 번잡한 듯하니, 이하 지방별로 이를 정리하여 보자.
쪽수▶P63-4라 한 것이 글자대로 보아서는 支那에 알리게 된 東方樂舞의 最初일 것 같으나, 첫재 時代에 있어 信用하기 어렵고, 또 그 所謂 「夷人」의 指稱도 좀 漠然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同傳中에 「東夷率皆土署, 喜飮酒歌舞」라 한 것은 東夷人의 舞樂을 好하는 特性에 對하야 注意한 古來 支那人의 傳評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 東夷라 하는 것은 반듯이 朝鮮▶P64-1만을 指示한 것은 아니다. 널리 말하면 오늘에 滿洲, 日本이 다 이 稱號에 쓸어갈 것이니까, 이로서 朝鮮에 當한 것이라 할 수는 없지마는, 「喜歌舞」란 말은 뒤에 보아도 알 바와 같이 거의 常習的으로 支那人이 朝鮮에 對하야 쓰는 文字이니까, 敢히 朝鮮을 말한 것이리라 하여도 可할 듯한데, 魏志를 爲始하야 여러 史料 文獻에 朝鮮 方面의 記錄이 散在하여 있으나, 이것을 史料別로 하면 도리어 繁雜한 듯하니, 以下 地方別로 이를 整理하여 보자.
부여. 부여는 지금 만주의 신경, 길림 지방에 있던 민족으로 직접 우리 조선과는 관계가 멀지 모르겠지만은, 후세 북부 조선의 패권을 잡은 고구려가 그 일부족이라고도 생각되니까, 간접으로 조선 내지 문화에 영향한 바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문화사상 조선 내에 편입하야 설명의 편의를 얻고자 하나, 위지(魏志)서적 동이전(東夷傳)에는 그들에 시가 생활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쪽수▶P64-2夫餘. 夫餘는 지금 滿洲의 新京, 吉林地方에 있던 民族으로 直接 우리 朝鮮과는 關係가 멀지 모르겠지마는, 後世 北部朝鮮의 覇權을 잡은 高句麗가 그 一部族이라고도 생각되니까, 間接으로 朝鮮內地 文化에 影響한 바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文化史上 朝鮮內에 編入하야 說明의 便宜를 얻고저 하나, 魏志 東夷傳에는 그들에 詩歌 生活를 다음과 같이 記錄하였다.
以殷正月祭天, 國中大會, 連日飮食歌舞, 名日迎鼓, 是時斷形獄, 解囚徒, ……(中略)……有軍事亦祭天, 殺生觀蹄, 以占其告凶
쪽수▶P64-3以殷正月祭天, 國中大會, 連日飮食歌舞, 名日迎鼓, 是時斷形獄, 解囚徒 ……(中略)……有軍事亦祭天, 殺生觀蹄, 以占其告凶
후한서(後漢書)서적 동이전(東夷傳)에도 은(殷) 정월(正月)이 납월(臘月)로 되어 있는 이외에는 대강 동양 의미의 것이 써 있는데, 이로써 부여의 시가 생활은 두 가지 다른 성질의 것이 있는 것을 알겠다. 즉 하나는 은(殷) 정월(납월(正月(臘月))에 국중 연례행사로서 제천의전(祭天儀典)에 행하게 되는 가무요 또 하나는 비상적 행사로서 군사가 있을 때에 가무를 연행하여 제천의 의를 올리는 것이다.
쪽수▶P64-4後漢書 東夷傳에도 殷 正月이 臘月로 되어있는 以外에는 大綱 同樣 意味읫 것이 씨어 있는데, 일로서 夫餘의 詩歌 生活은 두 가지 다른 性質의 것이 있는 것을 알겠다. 即 하나는 殷 正月(臘月)에 國中 例年行事로서 祭天儀典에 行하게 되는 歌舞요 또 하나는 非常的 行事로서 軍事가 있을 때에 歌舞를 演行하야 祭天의 儀를 올리는 것이다.
고구려. 고구려는 북부 조선에 지반을 가지고 있어, 지나와 직접 인접한 관계상 비교적 일부러 지나의 영향을 받았으리라 믿는다. 위지(魏志)서적 동이전(東夷傳)에 「漢時賜鼓吹技人」이라 하였고, 후한서(後漢書)서적에는 한무제(漢武帝) 시에 「賜鼓吹技人」이라 한 것으로 보면, 무슨 형식으로나마 지나악(支那樂)이 조선에 수입되어 본국 가락에 영향을 주었을 것도 노상 못 믿을 일은 아닐 것 같다. 이상 기록과 같이 국가 대 국가 관계에 가무음악이 유전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민간적으로 그러한 사실이 있었으리라는 것은 지리적 관계로 보아서 구태여 억측은 되지 않으리라 한다. 그러나 이 지나악(支那樂) 전래(傳來) 운운은 문화가 비교적 발달한 후대의 일이겠는데, 동 후한서(後漢書)서적 동이전(東夷傳)에는 그보다 더 원시적이고 또 고유의 시가적 생활을 기록한 듯한 것이 있으니 즉
쪽수▶P64-5高句麗. 高句麗는 北部朝鮮에 地盤을 가지고 있어, 支那와 直接 隣接한 關係上 比較的 일부러 支那의 影響▶P65-1을 받았으리라 믿는다. 魏志 東夷傳에 「漢時賜鼓吹技人」이라 하였고, 後漢書에는 漢武帝時에 「賜鼓吹技人」이라 한 것으로 보면, 무슨 形式으로나마 支那樂이 朝鮮에 輸入되어 本國 歌樂에 影響을 주었을 것도 노상 못 믿을 일은 아닐 것 같다. 以上 記錄과 같이 國家對國家 關係에 歌舞音樂이 流傳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民間的으로 그러한 事實이 있었으리라는 것은 地理的 關係로 보아서 구태여 臆測은 되지 않으리라 한다. 그러나 이 支那樂 傳來 云云은 文化가 比較的 發達한 後代의 일이겠는데, 同 後漢書 東夷傳에는 그보다 더 原始的이고 또 固有의 詩歌的 生活을 記錄한 듯한 것이 있으니 即
其俗淫, 皆潔淨自喜, 暮夜輒男女羣聚倡樂, 好祠鬼神社稷零星, 常十月祭天, 大會, 名曰東盟, 其國東有大穴, 號襚神, 亦常十月迎而祭之, 云云
쪽수▶P65-2其俗淫, 皆潔淨自喜, 暮夜輒男女羣聚倡樂, 好祠鬼神社稷零星, 常十月祭天, 大會, 名曰東盟, 其國東有大穴, 號襚神, 亦常十月迎而祭之, 云云
이다. 위지(魏志)서적 동이전(東夷傳)에서도 뜸뜸이 이상과 같은 기록을 주어모을 수 있다. 즉
쪽수▶P65-3이다. 魏志 東夷傳에서도 뜸뜸이 以上과 같은 記錄을 주어모을 수 있다. 即
北民喜歌舞, 國中邑落, 暮夜男女羣聚, 相就歌戱……中略……以十月祭天, 國中大會, 名曰東盟……中略……其國東有大穴, 名隧穴, 十月國中大會, 迎隧神, 還於國東上祭之, 置木隧神御坐
쪽수▶P65-4北民喜歌舞, 國中邑落, 暮夜男女羣聚, 相就歌戱……中略……以十月祭天, 國中大會, 名曰東盟……中略……其國東有大穴, 名隧穴, 十月國中大會, 迎隧神, 還於國東上祭之, 置木隧神御坐
라 한 것이다. 이는 요컨대 고구려에는 매년 10월에 동맹이라는 하늘에 받드는 제의와 국가지신인 수신(隧神)에 받드는 제의와 양대 제의가 있었는데, 이때에는 국중 대회가 열리어 모야(暮夜)에 남녀가 군취(羣聚)하여 (상취가희)相就歌戱를 하였으나, 이것이 전민족적 제의임에 따라 일이일에 마치는 것이 아니고 수일간에 긍하야 행하였으므로 기민(其民) 희가무(喜歌舞)라 이를 만큼 극히 성대하였었다는 것이 되겠다.
쪽수▶P65-5라 한 것이다. 이는 要컨대 高句麗에는 每年 十月에 東盟이라는 하늘에 받드는 祭儀와 國家之神인 隧神에 받드는 祭儀와 兩大 祭儀가 있었는데, 이때에는 國中 大會가 열리어 暮夜에 男女가 群聚하야 相就歌戱를 하였으나, 이것이 全民族的 祭儀임에 따라 一二日에 마치는 것이 아니고 數日間에 亘하야 行하였으므로 其民 喜歌舞라 이를 만큼 極히 盛大하였었다는 것이 되겠다.
고구려의 시가 생활에 대한 기록은 이상의 것 이외에 수서(隋書)서적 동이전(東夷傳)에 또 하나 있는 것을 보겠다. 즉
쪽수▶P66-1高句麗의 詩歌生活에 對한 記錄은 以上의 것 以外에 隋書 東夷傳에 또 하나 있는 것을 보겠다. 即
死者殯於屋內, 經三年, 擇吉日而葬, 居父母及夫之喪, 服皆三年, 兄弟三月, 初終哭泣, 葬則鼓舞作樂以送之, 埋訖, 悉取死者生時服翫車馬, 置於墓側, 會葬者, 爭取而去
쪽수▶P66-2死者殯於屋內, 經三年, 擇吉日而葬, 居父母及夫之喪, 服皆三年, 兄弟三月, 初終哭泣, 葬則鼓舞作樂以送之, 埋訖、悉取死者生時服翫車馬, 置於墓側, 會葬者, 爭取而去
라는 것이니, 송사지시(送死之時)에 고무작악(鼓舞作樂)을 한다는 것이다. 부모(父母) 급 부(夫)의 복(服)은 삼 년이고 형제지복(兄弟之服)은 2월 운은 지나(支那) 예(禮)의 영향을 입은 듯하지만은, 고무작악(鼓舞作樂)이란 것은 그러한 영향을 받지 않은 훨씬 이전의 유산이라 하겠다.
쪽수▶P66-3라는 것이니, 送死之時에 鼓舞作樂을 한다는 것이다. 父母 及 夫의 服은 三年이고 兄弟之服은 二月 云은 支那禮의 影響은 입은 듯하지마는、鼓舞作樂이란 것은 그러한 影響을 받지 않은 훨신 以前의 遺産이라 하겠다.
예(濊). 예(濊)는 지금 강원도 지방에 있어, 북은 고구려, 옥저, 남은 진한에 접하고, 동은 대해에 임하야 입국한 것인데, 소위 사적에 예맥(濊貊)이라 하는 것이다. 그의 시가적 생활을 기록한 것으로는 위지(魏志)서적후한서(後漢書)서적 동이전(東夷傳)에
쪽수▶P66-4濊. 濊는 지금 江原道 地方에 있어, 北은 高句麗, 沃沮, 南은 辰韓에 接하고, 東은 大海에 臨하야 立國한 것인데, 所謂 史籍에 濊貊이라 하는 것이다. 그의 詩歌的 生活울 記錄한 것으로는 魏志 及 後漢書 東夷傳에
常用十月祭天, 晝夜飮酒歌儛, 名之儛天
쪽수▶P66-5常用十月祭天, 晝夜飮酒歌儛, 名之儛天
이라는 것이 있다. 간단한 기록이나 고구려의 동맹과 동양 성질의 것이란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쪽수▶P66-6이라는 것이 있다. 簡單한 記錄이나 高句麗의 東盟과 同樣 性質의 것이란 것은 쉽게 想像할 수 있다.
한(韓). 여기 한(韓)이라 한 것은 진한, 변한, 마한을 한데 부른 것인데, 부여, 고구려, 예 등의 북방 민족에 대하여 남방 민족이라고도 할 수 있다. 후세적 발전은 드디어 조선 반도를 통일하여 현 조선 민족의 중추가 될 민족이다. 따라서 그들의 문화 내지 시가적 생활도 직접 오늘에 미친 바 영향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진, 변, 마 삼한은 다 각기 경계를 지어 독립적 국가를 세웠으니까, 엄밀히 말하면 그들의 각각 생활은 또한 다를 점이 있었을지 모르지만은, 북방 대 남방과 같이 그다지 심한 차이가 없고, 대체에 있어 대동소이의 격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시가 방면에 대한 기록으로는 위지(魏志)서적 동이전(東夷傳)에
쪽수▶P66-7韓. 여기 韓이라 한 것은 辰韓, 弁韓, 馬韓을 한대 부른 것인데, 夫餘, 高句麗, 濊 等의 北方民族에 對하야 南方民族이라고도 할 수 있다. 後世的 發展은 드디어 朝鮮半島를 統一하야 現 朝鮮民族의 中樞가 될 民族이다. 따라서 그들의 文化 乃至 詩歌的 生活도 直接 오늘에 미친바 影響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辰, 弁, 馬 三韓은 다 各其 境界를 지어 獨立的 國家를 세웠으니까, 嚴密히 말하면 그들의 各各 生活은 또한 다를 點이 있었을지 모르지마는, 北方對南方과 같이 그다지 甚한 差異가 없고, 大體에 있어 大同小異의 格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詩歌 方面에 對한 記錄으로는 魏志 東夷傳에
常以五月下種訖, 祭鬼神, 群聚歌舞飮酒, 晝夜無休, 其舞數十人俱起相隨, 蹋地低昻, 手足相應, 節奏有似鐸舞, 十月農功畢, 亦復如之, 云云
쪽수▶P67-1常以五月下種訖, 祭鬼神, 群聚歌舞飮酒, 晝夜無休, 其舞數十人俱起相隨, 蹋地低昻, 手足相應, 節奏有似鐸舞, 十月農功畢, 亦復如之, 云云
이라 하였고, 후한서(後漢書)서적 동이전(東夷傳)에도 대강 동양의 것을 말하였다. 이것은 마한에 대한 기록으로 되어었지만은, 이 기록만으로 보면 농업에 관계한 가무라 볼 수 있는데, 남부 조선은 특히 마한이라 할 것 없이 전체적으로 농업이 발달하였으니까, 그러한 가무는 마한만이 가졌을 것이 아니고, 삼한이 공통히 가지었을 것인 듯하다. 즉 후한서(後漢書)서적 동이전(東夷傳)의 진한에 대한 기록
쪽수▶P67-2이라 하였고, 後漢書 東夷傳에도 大綱 同樣의 것을 말하였다. 이것은 馬韓에 對한 記錄으로 되어었지마는, 이 記錄만으로 보면 農業에 關係한 歌舞라 볼 수 있는데, 南部朝鮮은 特히 馬韓이라 할 것 없이 全體的으로 農業이 發達하였으니까, 그러한 歌舞는 馬韓만이 가젔을 것이 아니고, 三韓이 共通히 가지었을 것인 듯하다. 即 後漢書 東夷傳의 辰韓에 對한 記錄
俗喜歌舞飮酒鼓瑟
쪽수▶P67-3俗喜歌舞飮酒鼓瑟
이라 한 것도 구체적으로 펴 말하면, 역시 마한의 그것과 같은 사실을 말하는 것이 되지 않을까 한다. 대체로 삼한과 지나와의 교통을 생각하여 보면, 지리적 환경은 자연 마한이 앞서 열리고 진한과 변한은 그에 떨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후대의 기록으로 볼지라도 정립(鼎立)하야 각기 지나에 교섭하게 될 때 신라가 가장 뒤떨어져 백제의 소개에 의하여 견당사(遣唐使)를 보냈다. 따라서 훨씬 상대에 있어서야 마한보다 진, 변한에 피토인(彼土人)의 견문이 넉넉히 미치지 못하였을 것은 용이히 상상을 허락할 수 있으니, 마한의 가무에 대한 기록은 이것을 삼한 전체의 대표적 기록이라 보아두는 것도 과차(過差) 없으리라 믿는다.
쪽수▶P67-4이라 한 것도 具體的으로 펴어 말하면, 亦是 馬韓의 그것과 같은 事實을 말하는 것이 되지 않을가 한다. 大體로 三韓과 支那와의 交通을 생각하여 보면, 地理的 環境은 自然 馬韓이 앞서 열리고 辰韓과 弁韓은 그에 떨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後代의 記錄으로 볼지라도 鼎立하야 各其 支那에 交涉하게 될 때 新羅가 가장 뒤떨어져 百濟의 紹介에 依하야 遣唐使를 보냈다. 따라서 훨신 上代에 있어서야 馬韓보다 辰, 弁韓에 彼土人의 見聞이 넉넉히 미치지 못하였을 것은 容易히 想像을 許諾할 수 있으니、馬韓의 歌舞에 對한 記錄은 이것을 三韓 全體의 代表的 記錄이라 보아두는 것도 過差 없으리라 믿는다.
가락. 다음은 남부 조선의 일각에 있어 삼한 이외의 지역을 할거한 가락국의 문헌을 하나 들 수 있는데, 삼국유사(三國遺事)서적 가락국기(駕洛國記)에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기록을 볼 수 있다.
쪽수▶P67-5駕洛. 다음은 南部朝鮮의 一角에 있어 三韓 以外의 地域을 割據한 駕洛國의 文獻을 하나 들 수 있는데, 三國遺事 駕洛國記에 다음과 같은 滋味있는 記錄을 볼 수 있다.
屬後漢世祖光武帝建武十八年壬寅三月禊洛之日, 所居北龜旨, 有殊常聲氣呼喚, 衆庶二三百人集會於此, 有如人音, 隱其形而發其音曰, 此有人否, 九干等云, 吾徒在, 又日, 吾所在爲何, 對云龜旨也, 又曰, 皇天所以命我者, 御是處, 惟新家邦, 爲君后, 爲茲故降矣, 你等須掘峯頂撮土, 歌之云, 龜何龜何, 首其現也, 若不現也, 播灼而喫也, 以之蹈舞, 則是迎大王, 歡喜踴躍之也, 九干等如其言, 咸忻而歌舞, 未幾仰而觀之, 唯紫繩自天垂而着地, 尋繩之下, 乃見紅幅裏金合子, 開而視之, 有黃金卵六, 圓如日者, 衆人悉皆驚喜, 俱伸百拜, 云云
쪽수▶P68-1屬後漢世祖光武帝建武十八年壬寅三月禊洛之日, 所居北龜旨, 有殊常聲氣呼喚, 衆庶二三百人集會於此, 有如人音, 隱其形而發其音曰, 此有人否, 九干等云, 吾徒在, 又曰, 吾所在爲何, 對云龜旨也, 又曰, 皇天所以命我者, 御是處, 惟新家邦, 爲君后, 爲茲故降矣, 你等須掘峯頂撮土, 歌之云, 龜何龜何, 首其現也, 若不現也, 播灼而喫也, 以之蹈舞, 則是迎大王, 歡喜踴躍之也, 九干等如其言, 咸忻而歌舞, 未幾仰而觀之, 唯紫繩自天垂而着地, 尋繩之下, 乃見紅幅裏金合子, 開而視之, 有黃金卵六, 圓如日者, 衆人悉皆驚喜, 俱伸百拜, 云云
이것은 가락국 조창(肇創) 당시의 전설에 나오는 말이니, 원시시대인의 시가적 생활을 규찰(窺察)함에는 가장 중요한 문헌이라 하겠고, 또 시대는 다소 뒤떨어질지언정, 조선 내의 기록이란 점으로 보아 신(信)을 둘 만한 점이 충분히 있을 듯하다. 외인의 기록 더욱이 시가와 같은 내면적 생활의 기록이란 것은 흔히 피상적 기록에 마치고 그 내면까지 들어가 주관을 건드리기가 극히 곤란하다. 또 그들은 그만한 책임을 갖지 않는다. 다만 들은 바의 풍평(風評)이라든지, 혹은 보는 바의 그 상태를 기술하면 그들의 일을 마친다. 그러나 국내인의 기록은 그렇게 할 수 없다. 풍평이라 할지라도 비교적 확실한 것을 들을 수 있고, 보는 것도 내 자신에 소환하야 진실히 볼 수 있다. 따라서 그 기술은 어느 정도까지 내용적이라 할 수 있으니, 가락국기의 문헌은 옥중가옥(玉中佳玉)이라 하겠다.
쪽수▶P68-2이것은 駕洛國 肇創 當時의 傳說에 나오는 말이니, 原始時代人의 詩歌的 生活을 窺察함에는 가장 重要한 文獻이라 하겠고, 또 時代는 多少 뒤떨어질지언정, 朝鮮內의 記錄이란 點으로 보아 信을 둘 만한 點이 充分히 있을 듯하다. 外人의 記錄 더욱이 詩歌와 같은 內面的 生活의 記錄이란 것은 흔히 皮相的 記錄에 마치고 그 內面까지 들어가 主觀을 건드리기가 極히 困難하다. 또 그들은 그만한 責任을 갖지 않는다. 다만 들은 바의 風評이라든지, 或은 보는 바의 그 狀態를 記述하면 그들의 일을 마친다. 그러나 國內人의 記錄은 그렇케 할 수 없다. 風評 이라 할지라도 比較的 確實한 것을 들을 수 있고, 보는 것도 내 自身에 訴喚하야 眞實히 볼 수 있다. 따라서 그 記述은 어느 程度까지 內容的이라 할 수 있으니, 駕洛國記의 文獻은 玉中佳玉이라 하겠다.







본문4: 그 문헌의 해석


이상으로 상고 조선에 관한 시가 생활 방면의 기록은 대강 섭취되었을 듯싶다. 그러나 이것은 있는 그대로의 기록에 지나지 못하는, 말하자면 우리들 시가 연구의 일 재료로서 단순한 사실을 나열한 데 지나지 못한다. 우리는 다시 이들 재료를 유기적으로 종합하야 그중에 흐르는 정신을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되겠으나, 우선 이상 난잡한 사실적 기록을 한군데 일괄하여 본다면 결국은 좌기 3개조에 몰아넣을 수 있을 듯하다.
쪽수▶P68-3以上으로 上古 朝鮮에 關한 詩歌生活 方面의 記錄은 大綱 涉取되었을 듯싶다. 그러나 이것은 있는 그대로의 記▶P69-1錄에 지나지 못하는, 말하자면 우리들 詩歌 硏究의 一 材料로서 單純한 事實을 羅列한대 지나지 못한다. 우리는 다시 이들 材料를 有機的으로 綜合하야 그中에 흐르는 精神을 把握하지 않으면 안 되겠으나, 于先 以上 亂雜한 事實的 記錄을 한군데 一括하야 본다면 結局은 左記 三個條에 몰아넣을 수 있을 듯하다.
1, 정기 혹은 비상시의 국민적 대제천(大祭天). 제신의전(祭神儀典)에 행하는 가무(부여의 영고(迎鼓), 고구려의 동맹(東盟), 수신제(隧神祭), 예(濊)의 무천(儛天), 삼한의 농업가무(農業歌舞), 고구려의 축전가무(祝戰歌舞))
쪽수▶P69-21, 定期 或은 非常時의 國民的 大祭天、祭神儀典에 行하는 歌舞(夫餘의 迎鼓, 高句麗의 東盟, 隧神祭、濊의 儛天, 三韓의 農業歌舞, 高句麗의 祝戰歌舞)
2, 기도, 주원(呪願)에 행하는 가무, (가락의 영왕가무(迎王歌舞))
쪽수▶P69-32, 祈禱, 呪願에 行하는 歌舞, (駕洛의 迎王歌舞)
3, 장의에 행하는 가무, (고구려의 송사가무(送死歌舞))
쪽수▶P69-43, 葬儀에 行하는 歌舞、(高句麗의 送死歌舞)
그런데 이 3개조란 것도 다시 한번 통람하면, 그것은 실로 제전 즉 신의 관념이 일관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부여의 영고(迎鼓)와 축전(祝戰), 고구려의 동맹(東臨), 예(濊)의 무천(儛天), 삼한의 농가는 문자상에 나타난 사실이니까 말할 것도 없지만은, 가락의 기원가무(祈願歌舞)도 신을 봉사하는 관념이 있고 고구려의 장의가무(葬儀歌舞)란 것도 망인의 영혼 즉 아니미즘의 사상이 있는 것이니, 이상하게도 그 사상관념이 일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가무와 신과의 관계가 이와 같이도 깊은 것이 있다 한다면, 후일 우리 시가 연구의 주관점도 과연 어디 두어야 될 것도 얼마큼 상상이 될 듯싶다. 그러면 앞에 적출한 문헌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이상 3개조를 각개별로 그 성질을 밝히어 우리 시가의 원시 형태를 덧보아 보자.
쪽수▶P69-5그런데 이 三個條란 것도 다시 한번 通覽하면, 그기는 實로 祭典 即 神의 觀念이 一貫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夫餘의 迎鼓와 祝戰、高句麗의 東臨, 濊의 儛天, 三韓의 農歌는 文字上에 나타난 事實이니까 말할 것도 없지마는, 駕洛의 祈願歌舞도 神을 奉事하는 觀念이 있고 高句麗의 葬儀歌舞란 것도 亡人의 靈魂 即 아니미슴의 思想이 있는 것이니, 異常하기도 그 思想觀念이 一貫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歌舞와 神과의 관계가 이와 같이도 깊은 것이 있다 한다면, 後日 우리 詩歌 硏究의 主觀點도 果然 어디 두어야 될 것도 얼마큼 想像이 될 듯싶다. 그러면 앞에 摘出한 文獻은 어떻게 解釋할 것인가. 以上 三個條를 各個別로 그 性質을 밝히어 우리 詩歌이 原始 形態를 덧보아 보자.
일, 첫째 부여에는 (은(殷) 정월(正月))납월(臘月), 고구려와 예(濊)에는 10월, 삼한에는 5월, 10월이라는 정한 시기에 제신, 제신의 의전이 행하게 되었음을 알겠으며, 다시 고구려에 의하면 그때에 국중대회가 열린다는 것도 알겠다. 부여, 예(濊), 삼한에는 국중대회란 말은 없지만은, 부여에 「大會連日」이란 대회는 다같이 국중인회란 의미로 해석될 듯하며, 또 예(臟)와 삼한도 비록 그 말은 없을지언정, 그러한 대회가 있었을 것도 상상되는데, 대체로 이것은 무엇을 말함인가. 국중대회가 열리어, 성대한 의전이 거행되었다니, 그 의전은 물론 종교적일 것은 말할 것 없는데, 듈켄인물이 오스토라리아의 사회생활을 피력한 말은 이것을 가장 명확히 설명한 말이 되지 않을까 한다. 즉 그는 왈,「오스토라리아의 모든 사회생활은 상이한 이형상을 교대로 경과한다. 어느 때는 인구는 소집단에 분산하야 각각 독립적으로 자기의 직무에 종사된다. 이때에는 각 가족은 수렵을 한다든지 어로를 한다든지, 일언으로 말하면 자기로 될 수 있는 수단을 다하야 불가결할 식료를 얻기에 노력한다. 어떤 때에는 이와 반대로 인구는 일정의 지점에 수일에서 수월에 미치는 시일간을 집중 혹은 응집한다. 이 집중은 민족 또는 부족의 일부가 회합에 소집될 때 일어난다. 그리고 이때에는 종교적 제의를 축하하든지 혹은 민족학에서 상투어로 부르는 코로보리가 열린다」라고. 그리고 듈켄인물은 전자를 범속의 세계, 후자를 신성한 세계라 불러 신성한 세계에서는 「사람은 자기를 보통 시와 달리 생각하고 활동하는 일종 외적 역능에 지배되고 지도되고 있는 것을 깨달아 당연히도 벌서 자신이 아니라는 감명을 받는다. 그에는 전혀 새로운 존재로 된 듯이 생각된다. 그가 두른 이상한 장식, 안면을 덮은 여러 가지 가면은 이 내적 변형을 구체적으로 추출하였을 뿐 아니라, 그것은 이것을 결정하는 데도 공헌한다. 더욱이 같은 때에 그들 동류는 다 같은 양식에 변모할 줄 생각하고, 또 그들의 감정을 규호(叫呼)와 소작(所作)과 태도에 의하야 택출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마치 통상 살고 있는 것과는 전연 다른 특별의 세계, 그를 몰아 전생하게 한 예외적 강력으로 포위된 환경 중에 실제로 이동된 듯이 경과한다」고 하였다.
쪽수▶P69-6一, 첫재 夫餘에는 (殷正月)臘月, 高句麗와 濊에는 十月, 三韓에는 五月, 十月이라는 定한 時期에 祭天、祭神▶P70의 儀典이 行하게 되었음을 알겠으며, 다시 高句麗에 依하면 그때에 國中大會가 열린다는 것도 알겠다. 夫餘, 濊, 三韓에는 國中大會란 말은 없지마는, 夫餘에「大會連日」이란 大會는 다같이 國中人會란 意味로 解釋될 듯하며, 또 臟와 三韓도 비록 그 말은 없을지언정, 그러한 大會가 있었을 것도 想像되는데, 大體로 이것은 무엇을 말함인가. 國中大會가 열리어, 盛大한 儀典이 舉行되었다니, 그 儀典은 勿論 宗敎적일 것은 말할 것 없는데, 듈켄이 오스토라리아의 社會生活을 披瀝한 말은 이것을 가장 明確히 說明한 말이 되지 않을가 한다. 即 그는 曰, 원문주5▶「오스토라리아의 모든 社會生活은 相異한 二形相을 交代로 經過한다. 어느 때는 人口는 小集團에 分散하야 各各 獨立的으로 自己의 職務에 從事된다. 이때에는 各家族은 狩獵을 한다든지 漁撈를 한다든지, 一言으로 말하면 自己로 될 수 있는 手段을 다하야 不可缺할 食料를 얻기에 努力한다. 어떤 때에는 이와 反對로 人口는 一定의 地點에 數日에서 數月에 미치는 時日間을 集中 或은 凝集한다. 이 集中은 民族 또는 部族의 一部가 會合에 召集될 때 일어난다. 그리고 이때에는 宗敎的 祭儀를 祝賀하든지 或은 民族學에서 常套語로 부르는 코로보리가 열린다」[5]라고. 그리고 듈켄은 前者를 凡俗의 世界, 後者를 神聖한 世界라 불러 神聖한 世界에서는 원문주6▶「사람은 自己를 普通時와 달리 생각하고 活動하는 一種 外的 力能에 支配되고 指導되고 있는 것을 깨달아 當然히도 벌서 自身이 아니라는 感銘을 받는다. 그에는 全혀 새로운 存在로 된 듯이 생각된다. 그가 두른 異常한 裝飾, 顏面을 덮은 여러 가지 假面은 이 內的 變形을 具體的으로 抽出하였을 뿐 아니라, 그것은 이것을 決定하는 대도 貢獻한다. 더욱이 같은 때에 그들 同類는 다 같은 樣式에 變貌할 줄 생각하고, 또 그들의 憾情을 叫呼와 所作과 態度에 依하야 澤▶P71-1出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마치 通常 살고 있는 것과는 全然 다른 特別의 世界, 그를 몰아 轉生하게 한 예외적 强力으로 包圍된 環境中에 實際로 移動된 듯이 經過한다」[6]고 하였다.
우리 부여, 고구려, 예(濊), 삼한에 있어서 영고(迎鼓)니 동맹(東盟)이니 무천(儛天)이니 하여 열리는 국중대회란 것은 또한 오스토라리아의 씨족 또는 부족 대회와 같이, 그때 그들이 신성한 세계의 생활을 할 때가 아니든가 한다. 또 이러한 국민적 대회는 다만 평화 시의 정례로만 개최되는 것이 아니고, 고구려 예로 보면 군사적 비상시에도 동양의 대회가 있었는 듯하다. 군사라 하면 원시시대는 일씨족, 부족의 존망에 관한 중대사다. 농사의 하종추수(下種秋收)와 동양 혹은 그 이상의 중요사인지도 모를 것이다. 이러한 때에 전민족이 일처에 회합하야 대사를 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 홀로 고구려만이 그 필요를 느낀 것이 아니고, 부여 예(濊) 삼한에 있어서도 역시 이와 같은 비상시의 대회가 있어, 앞에와 같은 신성한 세계의 생활을 경험하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 생활의 표현으로 부여에서는 연일 음주 가무를 하고, 또 이때는 형옥(刑獄)을 단(斷)하고 수도(囚徒)를 해(解)하였고, 고구려에서는 국중 읍락이 주야에 남녀가 군취(羣聚)하여 상취가희(相就歌戱)하였고, 예(濊)에서는 주야 음주 가무하였고, 한에서는 주야 주식하였는 것이니, 저절로 그 의미는 해석될 듯하다. 즉 이러한 것은 전민족 또는 부족의 회합으로 그들을 광우(狂愚)하게 하도록 자극하는 이상한 위력에 촉감(觸感)하여 평상시의 자기 존재를 잊어버리고, 전연 별세계에 도입하게 되었고, 또 그러한 격앙한 사회적 환경이 필연적으로 그들에 종교적 관념을 생(生)하게 하여, 제천 제전의 의전을 행하게 한 것이니, 이것도 오스토라리아의 그와 다름이 없으리라 하겠다. 따라서 여기에 행하게 된 가무란 것은 그러한 신성한 세계의 생활 즉 종교적 생활의 발로로 표현된 것임을 알겠다.
쪽수▶P71-2우리 扶餘, 高句蹤, 濊, 三韓에 있어서 迎鼓니 東盟이니 儛天이니 하야 열리는 國中大會란 것은 또한 오스토라리아의 氏族 또는 部族大會와 같이, 그때 그들이 神聖한 世界의 生活을 할 때가 아니든가 한다. 또 이러한 國民的 大會는 다만 平和時의 定例로만 開催되는 것이 아니고, 高句麗 例로 보면 軍事的 非常時에도 同樣의 大會가 있었는 듯하다. 軍事라 하면 原始時代는 一氏族, 部族의 存亡에 關한 重大事다. 農事의 下種秋收와 同樣 或은 그 以上의 重要事인지도 모를 것이다. 이러한 때에 全民族이 一處에 會合하야 大事를 結하는 것은 當然한 일이니, 홀로 高句麗만이 그 必要를 느낀 것이 아니고, 夫餘 濊 三韓에 있어서도 亦是 이와 같은 非常時의 大會가 있어, 앞에와 같은 神聖한 世界의 生活를 經驗하였을 것이다. 그리하야 그 生活의 表現으로 夫餘에서는 連日 飮酒 歌舞를 하고, 또 이때는 刑獄을 斷하고 囚徒를 解하였고, 高句麗에서는 國中 邑落이 晝夜에 男女가 羣聚하야 相就할 歌戱하였고, 濊에서는 晝夜 飮酒 歌舞하였고, 韓에서는 晝夜 酒食하였는 것이니, 제절로 그 意味는 解釋될 듯하다. 即 이러한 것은 全民族 또는 部族의 會合으로 그들을 狂愚하게 하도록 刺戟하는 異常한 威力에 觸感하야 平常時의 自己 存在를 잊어버리고, 全然 別世界에 導入하게 되었고, 또 그러한 激昂한 社會的 環境이 必然的으로 그들에 宗敎的 觀念을 生하게 하야, 祭天 祭典의 儀典을 行하게 한 것이니, 이것도 오스토라리아의 그와 다름이 없으리라 하겠다. 따라서 여기에 行하게 된 歌舞란 것은 그러한 神聖한 世界의 生活 即 宗敎的 生活의 發露로 表▶P72-1現된 것임을 알겠다.
이로써 제1개조에 관한 문헌의 경개(梗概)적 설명은 되었을 줄 믿으나, 다음은 그 제의와 그에 부수한 가무는 여하한 관계에 시행되었는가 하는 문제다. 제의는 제의대로 엄숙히 거행되고, 가무는 그 여흥으로 시행되었든가, 혹은 제의와 가무가 동시에 시행되었든가가 문제된다. 하종기, 추수기니 음주 가무니, 한 것으로 보면, 농업이 상당히 발달한 시대였는 듯하니, 전자리라 상상되지 않지도 않는다. 그러나 기록에 나타난 표면적 해석이 그렇다 하더라도, 다시 그 이전의 상태를 생각해 볼 필요도 있는데, 오늘날의 저급문화 민족 간에 시행되는 제의, 가무는 가끔 후자의 형태를 취하게 되는 것도 주의할 점이 아닌가 한다. 참고로 그 일례를 들어보면, 듈켄인물은 기저(其著)에 우울룽과사제(蛇祭)의 장면를 소개한 것이 있다. 그에 왈(曰) 「와아라뭉가 족으로 가장 중요한 종교적 성의(盛儀)의 하나는 우올룽과사(蛇)에 관한 것인데, 그는 수일간 전개되는 제의의 연쇄다. 사 일째에 우리들이 기(記)하려는 제의가 일어났다……중략……밤 10시인가 11시쯤 해서 울루루와 긴짓리는 기(其) 장면에 나와서 지상에 앉아서 노래부르기를 시작한다. 그들은 명료히 다 비상한 흥분상태이었다. 그 밤에 조금 늦어져서 울루루족은 그들 처를 데려다가 긴짓리족에 주면, 후자는 그들 계집과 관계를 한다. 그때 제의에 대한 일은 모두 자세히 설명을 듣고 있는 최근에 입신된 젊은 자를 데리고 온다. 그래서 아침 2시까지 가요는 간단없이 계속된다. 이때 실로 야만적 광우(狂愚)의 광영(光榮)이 전개된다. 사방에서 미치는 화광은 사변의 암암(暗闇) 중에 뚜렷이 호막본(護漠本)의 백색을 묘출하고 있을 때, 울루루족은 토총(土塚) 옆에 나날이 궤좌(跪坐)하였다가, 다시 일어나 합동의 운동으로 그 주위를 돈다. 조금 아래로 나와서는 손을 무릎에 얹고 궤좌(跪坐)하기를 자주 한다. 그와 동시에 그들은 몸을 우로 혹은 좌로 기울이며, 이러한 운동을 할 때마다 Yrrsh! Yrrsh! Yrrsh라는 무서운 규성(叫聲), 진실한 포후(咆吼)를 낸다. 그래도 긴짓리족은 많은 흥분된 상태에서 부우메랑그를 두드리고, 더욱이 추장은 그들보다 훨씬 더 날뛴다. 울루루족의 행렬은 2회 그 토총(土塚)을 돌면, 그들은 궤좌(跪坐)의 자태를 고치고 앉아서 또 노래 부른다. 때로는 노래가 낮아지고, 달아서 급작히 꽥 지른다. 밤이 동트게 되면 모두 일어나서 난무(亂舞)를 한다. 꺼졌던 불은 다시 켜지고 울루루족은 긴짓리족에 열리어 분연히 푸매랑그, 창봉(槍棒)을 가지고 토총(土塚)을 격습하면, 그는 수분간에 분쇄되고 만다. 불은 꺼져버리고 거기는 깊은 침묵이 지배한다」라고.
쪽수▶P72-2이로서 第一個條에 關한 文獻의 梗概的 說明은 되었을 줄 믿으나, 다음은 그 祭儀와 그에 附隨한 歌舞은 如何한 關係에 施行되었는가 하는 問題다. 祭儀는 祭儀대로 嚴肅히 舉行되고, 歌舞는 그 餘興으로 施行되었든가, 或은 祭儀와 歌舞가 同時에 施行되었든가가 問題된다. 下種期, 秋收期니 飮酒 歌舞니, 한 것으로 보면, 農業이 相當히 發達한 時代였는 듯하니, 前者리라 想像되지 않지도 않는다. 그러나 記錄에 나타난 表面的 解釋이 그렇다 하더라도, 다시 그 以前의 狀態를 생각해 볼 必要도 있는데, 오늘날의 低級文化民族間에 施行되는 祭儀、歌舞는 가끔 後者의 形態를 取하게 되는 것도 注意할 點이 아닌가 한다. 叅考로 그 一例를 들어보면, 듈켄은 其著에 우울룽과蛇祭의 場面를 紹介한 것이 있다. 그에 曰 원문주7▶「와아라뭉가 族으로 가장 重要한 宗敎的 盛儀의 하나는 우올룽과蛇에 關한 것인데, 그는 數日間 展開되는 祭儀의 連鎻다. 四日째에 우리들이 記하려는 祭儀가 일어났다……中略……밤 十時인가 十一時쯤 해서 울루루와 긴짓리는 곳 其 場面에 나와서 地上에 앉아서 노래부르기를 시작한다. 그들은 明瞭히 다 非常한 興奮狀態이였다. 그 밤에 조금 늦어저서 울루루族은 그들 妻를 데려다가 긴짓리族에 주면, 後者는 그들 계집과 關係를 한다. 그때 祭儀에 對한 일은 모두 仔細히 說明을 듣고 있는 最近에 入信된 젊은 者를 데리고 온다. 그래서 아침 二時까지 歌謠는 間斷없이 繼續된다. 이때 實로 野蠻的 狂愚의 光榮이 展開된다. 四方에서 미치는 火光은 四邊의 暗闇中에 두렷이 護漠本의 白色을 描出하고 있을 때, 울루루族은 土塚 옆에 나날이 跪坐하였다가, 다시 일어나 合同의 運動으로 그 周圍를 돈다. 조금 아래로 나와서는 손을▶P73-1 무릎에 얹고 跪坐하기를 자주 한다. 그와 同時에 그들은 몸을 右로 或은 左로 기울이며, 이러한 運動을 할 때마다 Yrrsh! Yrrsh! Yrrsh라는 무서운 叫聲, 眞實한 咆吼를 낸다. 그래도 긴짓리族은 많은 興奮된 狀態에서 부우메랑그를 두드리고, 더욱이 酋長은 그들보다 훨신 더 날뛴다. 울루루族의 行列은 二回 그 土塚을 돌면, 그들은 跪坐의 姿態를 고치고 앉아서 또 노래 부른다. 때로는 노래가 낮아지고, 달아서 급작히 꽥 지른다. 밤이 동트게 되면 모두 일어나서 亂舞를 한다. 꺼졌던 불은 다시 켜지고 울루루族은 긴짓리族에 열리어 憤然히 푸매랑그, 槍棒를 가지고 土塚을 擊襲하면, 그는 數分間에 粉碎되고 만다. 불은 꺼져버리고 거기는 깊은 沈默이 支配한다」[7]라고.
여기 보면 제의와 가무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불가분리의 상태에 있는 듯하여, 말은 제의라 하지마는, 사실 행하고 있는 것은 가무가 아닌가 의심할 만치 양자가 동시에 시행되는 것을 알겠다. 영고(迎鼓), 동맹(東盟), 무천(儛天) 등도 또한 그런 것이 아니든가. 더욱이 부여 같은 데서는 대회연일, 음주 가무라 하였으니, 제의나 가무가 동시에 연일 계속하였다는 말이 되지 않을까. 예(濊)에도 주야 음주 가무란 것은 다만 일주야에 한한 행사가 아니었을 듯하고 고구려 역시 모야(暮夜)에 남녀 군취(羣聚)하여 상취가무(相就歌舞)하였다니, 우올룽과사제(蛇祭)와 같이 주야에 제의가 열리며, 동시에 남녀 군취(羣聚)하야 가무가 행한 것이 아닐까 한다. 그렇다 할 수 있다면 부여, 고구려, 예(濊), 한의 가무는 더욱 제의 즉 종교와 밀접한 관계, 거의 그와 불가분리할 만치 깊은 인연이 있었으리라고도 상상이 된다. 북사(北史)서적 고구려전(高句麗傳)에는 고구려의 가무를
쪽수▶P73-2여기 보면 祭儀와 歌舞는 密接한 關係를 가지고 不可分離의 狀態에 있는 듯하야, 말은 祭儀라 하지마는, 事實 行하고 있는 것은 歌舞가 아닌가 疑心할 만치 兩者가 同時에 施行되는것을 알겠다. 迎鼓, 東盟, 儛天 等도 또한 그런 것이 아니든가. 더욱이 夫餘 같은 대서는 大會連日, 飮酒 歌舞라 하였으니, 祭儀나 歌舞가 同時에 連日 繼續하였다는 말이 되지 않을가. 濊에도 晝夜 飮酒 歌舞란 것은 다만 一晝夜에 限한 行事가 아니었을 듯하고 高句麗 亦是 暮夜에 男女 羣聚하야 相就歌舞하였다니, 우올룽과蛇祭와 같이 晝夜에 祭儀가 열리며, 同時에 男女 羣聚하야 歌舞가 行한 것이 아닐가 한다. 그렇다 할 수 있다면 夫餘, 高句麗, 濊, 韓의 歌舞는 더욱 祭儀 即 宗敎와 密接한 關係、 거의 그와 不分離할만치 깊은 因緣이 있었으리라고도 想像이 된다. 北史 高句麗傳에는 高句麗의 歌舞를
風俗尙淫, 不以爲愧, 俗多遊女, 夫無常人, 夜則男女羣聚而戱, 無有貴賤之節
쪽수▶P73-3風俗尙淫, 不以爲愧, 俗多遊女, 夫無常人, 夜則男女羣聚而戱, 無有貴賤之節
이라 하여 단순한 유락적 가무와 같이 본 것은 그 본래의 정신을 충분히 전하지 못하였다 하겠고, 백남운(白南雲)인물 씨는 또 이 북사(北史)서적의 문구를 그냥 신용하여 「그 유녀(遊女)가 많은 것은 노예제도의 산물인데, 금일 유녀의 선구자다. 그리하여 직업적 기예로서 무용을 한 것이나, 이와 별달리 야간에 귀천의 격식에서 해방한 남녀의 군취(羣聚)적 무용이 있었다는 것이다」라 한 것은 종교적 관념을 너무 등한한 것이 아니라면, 훨씬 후대의 상태를 말한 것이리라 한다.
쪽수▶P74-1이라 하야 單純한 遊樂的 歌舞와 같이 본 것은 그 本來의 精神을 充分히 傳하지 못하였다 하겠고, 白南雲 氏는 또 이 北史의 文句를 그냥 信用하야 원문주8▶「그 遊女가 많은 것은 奴隷制度의 産物인데, 今日 妓女의 先驅者다. 그리하야 職業的 技藝로서 舞踊을 한 것이나, 이와 別달리 夜間에 貴賤의 格式에서 解放한 男女의 羣聚的 舞踊이 있었다는 것이다」[8]라 한 것은 宗敎的 觀念을 너무 等閑한 것이 아니라면, 훨신 後代의 狀態를 말한 것이리라 한다.
이, 다음 가락국기(駕洛國記)의 문헌은 이것을 평이히 말해보면, 가락 제국에는 처음에 이를 통할하는 군주가 없고, 구간(九干)이 있어서 그 부족을 인솔하고 있다가, 어느 해 전씨족의 총집합일인 3월에 전씨족이 한데 모이어서 군주 추대의 의론이 일어나 수로왕을 추대하는데, 그때에 천지신명에 맹서하는 제의가 거행되어 가무음악이 일어났다는 것이 되겠다. 여기에 3월 계락지일(계洛之日)이란 것은 부여의 영고(迎鼓), 고구려의 동맹(東盟)과 같이 예년의 국중대회 즉 그들이 신성한 세계의 생활을 경영할 시기인 듯하고, 우여인음(有如人音)하여 은기형이발기음(隱其形而發其音) 운운(云云)이라든지, 이(儞) 등은 수굴봉정촬토(須堀峯頂撮土)하면 가지(歌之) 운운(云云)이란 것은 제의와 추대의 행사일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불렀다는 노래
쪽수▶P74-2二, 다음 駕洛國記의 文獻은 이것을 平易히 말해보면, 駕洛 諸國에는 처음에 이를 統轄하는 君主가 없고, 九干이 있어서 그 部族을 引率하고 있다가, 어느 해 全氏族의 總集合日인 三月에 全氏族이 한대 모이어서 君主 推戴의 議論이 일어나 首露王을 推戴하는데, 그때에 天地神明에 盟誓하는 祭儀가 舉行되어 歌舞音樂이 일어났다는 것이 되겠다. 여기에 三月 稧洛之日이란 것은 夫餘의 迎鼓, 高句耀의 東盟과 같이 例年의 國中大會 即 그들이 神聖한 世界의 生活를 經營할 時期인 듯하고, 有如人音하야 隱其形而發其音 云云이라든지, 儞 等은 須堀峯頂撮土하면 歌之 云云이란 것은 祭儀와 推戴의 行事일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불렀다는 노래
龜何龜何、首其現也、若不現也、燔均而喫也
쪽수▶P74-3龜何龜何、首其現也、若不現也、燔均而喫也
는 시영대왕(是迎大王)이니 환희용약(歡喜踴躍)하라 하여 부른 것이나, 그 내용은 환희하야 창(唱)하였다 하기보다 너무 살성(殺性)스러워 차라리 주문(呪文)이라 하여 가(可)하겠고, 또 군주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부른 것이니, 기도의 형식을 취하여야 될 것이다. 분트인물는 기도의 가장 원시적의 것은 주원(呪願)이라 하였고, 타일라인물는 기저(其著) 「원시문화」 원시인의 기도는 인제든지 메스메리즘적 주념적이라 하였으나, 이 주적 기도는 그 성질이 정령에 대하여 명령적 혹은 외압적이라는 것이니, 가락의의 이 노래는 가히 이 주념적 기도가 아니든가. 주문이나 기도는 필경 종교 감정의 표출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나, 종경 감정이 외부에 나타나는 데는 두 방면이 있어 하나는 신체적 표출이니, 앙천(仰天), 합장(合掌), 궤좌(跪坐), 무용(舞踊)이 그것이고, 다른 하나는 언어적 표출이니, 주원(呪願), 기도도 이에 속하는 것으로 야만 미개시대에는 이를 운율적으로 발표하여 시가를 형성한다 하니, 가락의 전기 문헌은 이 종교 감정의 표출상태를 기록한 것이 아닐까 한다. 즉 「구하구하(龜何龜何), 수기현야(首其現也), 약불현야(若不現也), 번작이끽야(燔灼而喫也)」는 언어적 표출의 주원으로서 자연 시가의 체가 되어 나타난 것이고, 환희용약(歡喜踴躍)하야 도무(蹈舞)한 것은 그 자체적 표출이 아닐까 한다. 그렇다면 가락의 가무도 필경 종교적 가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쪽수▶P74-4는 是迎大王이니 歡喜踴躍하라 하야 부른 것이나, 그 內容은 歡喜하야 唱하였다 하기보다 너무 殺性스러워 차라리 呪文이라 하여 可하겠고, 또 君主를 얻기 爲한 手段으로 부른 것이니, 祈禱의 形式을 取하여야 될 것이다. 원문주9▶분트는 祈禱의 가장 原始的의 것은 呪願이라 하였고,[9] 타일라는 其著 「原始文化」 原始人의 祈禱는 인제든지 메스메리슴的 呪念的이라 하였으나, 이 呪的祈禱는 그 性質이 精靈에 對하야 命令的 或은 畏壓的이라는 것이니, 駕洛의▶P75-1 이 노래는 可히 이 呪念的 祈禱가 아니든가. 원문주10▶呪文이나 祈禱는 畢竟 宗敎 感情의 表出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나, 宗敬 感情이 外部에 나타나는 대는 두 方面이 있어 하나는 身體的 表出이니, 仰天, 合掌, 跪坐, 舞踊이 그것이고, 다른 하나는 言語的 表出이니, 呪願, 祈禱도 이에 屬하는 것으로 野蠻 未開時代에는 이를 韻律的으로 發表하야 詩歌를 形成한다 하니,[10]駕洛의 前記 文獻은 이 宗敎 感情의 表出狀態를 記錄한 것이 아닐가 한다. 即 「龜何龜何, 首其現也, 若不現也, 燔灼而喫也」는 言語的 表出의 呪願으로서 自然 詩歌의 體가 되어 나타난 것이고, 歡喜踊躍하야 蹈舞한 것은 그 自體的 表出이 아닐가 한다. 그렇다면 駕洛의 歌舞도 畢竟 宗教的 歌舞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삼, 끝으로 고구려의 장식(葬式) 가무에 대하야 해석 시험하여보자. 원문에 「장칙고무작악이송지(葬則鼓儛作樂以送之)」라 한 것을 문자 그대로 읽고, 우리들의 감정으로 해석하면 얼마의 의심이 없지 않다. 즉 사(死)라는 것은 슬픈 것이요, 무악은 기쁜 것인데, 어째 이 양극단이 일시에 병행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태고시대에는 아무 모순도 없이 시행된 듯한 흔적이 있으니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왜인전(倭人傳)에
쪽수▶P75-2三, 끝으로 高句麗의 葬式 歌舞에 對하야 解釋 試驗하여보자. 原文에 「葬則鼓儛作樂以送之」라 한 것을 文字 그대로 읽고, 우리들의 感情으로 解釋하면 얼마의 疑心이 없지 않다. 即 死라는 것은 슬픈 것이요, 儛樂은 기쁜 것인데, 어째 이 兩極端이 一時에 並行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太古時代에는 아무 矛盾도 없이 施行된 듯한 痕迹이 있으니 三國志 魏志 倭人傳에
始死 停喪十餘日, 當時不食肉, 喪主哭泣, 他人就歌舞飮酒
쪽수▶P75-3始死 停喪十餘日、當時不食肉, 喪主哭泣、他人就歌舞飮酒
라 하였고, 일본서기(日本書紀) 윤공천황(允恭天皇) 42년에
쪽수▶P75-4라 하였고, 日本書紀 允恭天皇 四十二年에
春正月乙亥朔戊子, 天皇崩, 時年若干, 於是新羅王聞天皇崩, 驚愁之, 貢上調船八十艘, 及種種樂人八十, 是泊對馬而大哭, 到筑紫亦大哭, 泊于難波津, 則皆素服, 悉捧御調、且張種種樂器, 自難波至于京, 或哭泣或歌儛, 遂參會於殯宮也
쪽수▶P75-5春正月乙亥朔戊子, 天皇崩, 時年若干, 於是新羅王聞天皇崩, 驚愁之, 貢上調船八十艘 及種種樂人八十, 是泊對馬而大哭, 到筑紫亦大哭, 泊于難波津, 則皆素服, 悉捧御調、且張種種樂器、自難波至于京、或哭泣或歌儛, 遂參會於殯宮也
라 한 것이 있다. 이로 보면 가무로써 사자를 보내는 풍속은 고구려만이 아니고, 널리 원시시대에는 있었던 사실인 듯하다. 그러면 원시인의 사(死)와 가무에 대한 관념은 우리들이 그에 대하는 것과는 다른 삶이 있든가. 아니미즘설에 의하면, 사(死)란 것은 긴 수면과 다름이 없고, 영혼이 육체를 떠나서 피세에 여행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하며, 또 미개민족은 사자를 생존하여 있는 인간과 같이 애경추모(愛敬追慕)하는 외에 또 특히 사자인 고로 공포혐기(恐怖嫌忌)하는 일이 많다 한다. 여기서 사자에 대하야 여러 가지 종교적 의식이 거행되는 것이나, 장식(葬式) 시의 가무 그 의식의 일부라 한다면, 떠나려는 영혼을 본신(本身)에 불러들일 목적으로, 혹은 떠나는 영혼을 위로도 하며 또 진양(鎭攘)하기 위하여 행한 것이 아닐까. 토거광지(土居光知)인물 씨가 장례와 가원(歌垣)과의 關係를 말하야 「친뢰(親賴)하던 자가 죽었을 때 그 혼을 유려(誘戾)하기 위하여는 인생의 가장 기뻐하는 것과 고인의 가장 애호하는 것을 소작사(所作事)로 표현한다면 희망을 달할지도 모를 것이다……또 고인이 한 훌륭한 행위 구전(柩前)에서 되풀이하여 보는 것도 가는 사람이나 남은 사람 쌍방의 위로가 된다」라 한 것은 결국 이 의미를 말한 것인 듯하니, 고구려의 장의가(葬儀歌)도 역시 그와 같이 해석할 수 있을 듯하다. 문면에 나타난 기록만으로 본다면 오늘날에도 볼 수 있는 소위 상여 노래와 같이도 해석되지 않는 바는 아니나, 그러나 이것은 훨신 후대의 상태고, 그 원시적 상태는 의연히 종교적인 장의가무(葬儀歌舞)이었을 것은 거의 의심하지 않아도 좋을 듯하다. 그리하여 그의 후세적 상태가 기록되어 장의가무(葬儀歌舞)의 문헌으로 남게 된 것일 것이다. X X
쪽수▶P76-1라 한 것이 있다. 이로 보면 歌舞로써 死者를 보내는 風俗은 高句麗만이 아니고, 널리 原始時代에는 있었던 事實인 듯하다. 그러면 原始人이 死와 歌舞에 對한 觀念은 우리들이 그에 對하는 것과는 다른 삶이 있든가. 원문주11▶아니미슴說에 依하면, 死란 것은 긴 睡眠과 다름이 없고, 靈魂이 肉體를 떠나서 彼世에 旅行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하며, 또 未開民族은 死者를 生存하여 있는 人間과 같이 愛敬追慕하는 外에 또 特히 死者인 故로 恐怖嫌忌하는 일이 많다 한다.[11] 여기서 死者에 對하야 여러가지 宗敎的 儀式이 舉行되는 것이나, 葬式時의 歌舞 그 儀式의 一部라 한다면, 떠나려는 靈魂을 本身에 불러들일 目的으로, 或은 떠나는 靈魂을 慰勞도 하며 또 鎭攘하기 爲하야 行한 것이 아닐가. 土居光知 氏가 葬禮와 歌垣과의 關係를 말하야 원문주12▶「親賴하던 者가 죽었을 때 그 魂을 誘戾하기 爲하여는 人生의 가장 기뻐하는 것과 故人의 가장 愛好하는 것을 所作事로 表現한다면 希望을 達할지도 모를 것이다……또 故人이 한 훌륭한 行爲 柩前에서 되푸리하여 보는 것도 가는 사람이나 남은 사람 雙方의 慰勞가 된다」[12]라 한 것은 結局 이 意味를 말한 것인 듯하니, 高句麗의 葬儀歌도 亦是 그와 같이 解釋할 수 있을 듯하다. 文面에 나타난 記錄만으로 본다면 오늘날에도 볼 수 있는 所謂 喪輿노래와 같이도 解釋되지 않는 바는 아니나, 그러나 이것은 훨신 後代의 狀態고, 그 原始的 狀態는 依然히 宗敎的인 葬儀歌舞이었을 것은 거의 疑心하지 않아도 좋을 듯하다. 그리하야 그의 後世的 狀態가 記錄되어 葬儀歌舞의 文獻으로 남게 된 것일 것이다. X X
이상과 같이 해석하여 오고 보니, 조선 원시 시가에 관한 문헌은 십중십 이것을 종교적이라 해석할 수 있게 되었다. 시가의 태생은 반드시 종교적이랄 것도 없는데, 오늘날 남은 그 문헌은 이상하기로 그렇게 해석된다 하는 것은 단순한 우연지사라 하여 버리기는 어렵다는 암시를 받는 듯하다. 그러면 대체로 원시 종교와 시가와는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를 생각해볼 필요를 느낀다. 다음 이 방면에 일람하여 우리 시가의 근거를 확실히 하자.
쪽수▶P76-2以上과 같이 解釋하여오고 보니, 朝鮮 原始 詩歌에 關한 文獻은 十中十 이것을 宗敎的이라 解釋할 수 있게 되었▶P77-1다. 詩歌의 胎生은 반듯이 宗敎的이랄 것도 없는데, 오늘날 남은 그 文獻은 異常하기로 그렇게 解釋된다 하는 것은 單純한 偶然之事라 하여 버리기는 어렵다는 暗示를 받는 듯하다. 그러면 大體로 原始 宗敎와 詩歌와는 어떠한 關係가 있는가를 생각해볼 必要를 느낀다. 다음 이 方面에 一覽하여 우리 詩歌의 根據를 確實히 하자.










본문5: 원시 종교와 시가


종교의 발생 문제에 대하여는 구구의 학설이 있어 도저히 우리들 문외한의 평판(評判)할 바가 되지 못하나, 대체에 있어 주술이 종교적 현상의 원시적 형태라 함에는 그다지 틀림이 없는 듯하다. 주술에도 의지현상(意識現象)의 심적 태도가 있는 동시에 신체적 태도의 의예가 있어 비로소 종교생활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이나, 심적 태도인 그 내용 생활은 그만두고라도, 그의 외면 표출인 의례 방면에는 우리들 시가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분트인물도 시가의 자매인 원시인 무용의 동기를 단순히 음악을 위한 것도 아니고, 혹은 다시 진실한 목적이 있었는 것도 아니고, 최초는 주(呪)의 목적을 가진 것이라 하였다 한 것으로 보면, 심리학상으로도 이것이 설명이 되는 듯하나, 시가의 동기가 주(呪)의 목적이라 하지 못한다 하고도 시가가 주술의 목적으로 쓰인 것은 사실인 듯하다. 가락국가 「구하구하(龜何讓何)、수기현야(首其現也)、약불현야(若不現也)、번작이끽야(播灼而喫也)」는 수로왕을 맞기 위한 주원가(呪願歌)라는 것은 벌서 앞에서도 말한 바이나, 일본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천암호은피(天岩戶隱避) 전설에 대하여 진전좌우길(津田左右吉)인물 씨는 재미있는 해설을 하였다. 그 전설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천조대신(天照大神)이 그 어제 되는 소잔오존(素盞嗚尊)의 소란(騒亂)을 싫어서 천암호(天岩戶)에 숨어버리자, 갑자기 일광이 없어지며 암흑천지가 되었으므로 여러 신들이 크게 혼혹(混惑)하여 천암호(天岩戶) 앞에 모이어 의논한 결과, 가무, 음악을 하였더니 대신이 어쩐 일인고 하고 문을 조그만치 열고 내다보려 할 때, 그중 힘많은 신이 문을 열어젖히고 대신을 꺼내니, 일광이 다시 빛나 광명한 천지가 되었다는 것이나, 진전(津田) 씨의 해석은 이러하다.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천호은피(天戶隱避)의 이야기는 일식의 현상과 그때에 행한 주술에 관한 신화라고 해석할 수 있다. 즉 일신이 돌연히 천호(岩戶)에 은피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암흑하였다는 것은 일식의 현상을 신화화한 것이고, 그때 소잔오존(素盞嗚尊)은 태양에 위해를 가한 데몬이다. 그래서 장명조(長鳴鳥)를 울린 것도, 천세여명(天細女命)이 열중하여 무용한 것도 기타 모든 신이 소리를 내어 노래 부른 것도 태양의 출현을 촉진하려는 magic이었었다 생각할 수 있다」라고. 즉 일본에 있어서 천암호(天岩戶)의 가무도 주적 목적에 시행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쪽수▶P77-2宗敎의 發生問題에 對하여는 區區의 學說이 있어 到底히 우리들 門外漢의 評判할 바가 되지 못하나, 大體에 있어 呪術이 宗敎的 現象의 原始的 形態라 함에는 그다지 틀림이 없는 듯하다. 呪術에도 意識現象의 心的 態度가 있는 同時에 身體的 態度의 儀禮가 있어 비로소 宗敎生活을 成就할 수 있는 것이나, 心的 態度인 그 內容 生活은▶P78 그만두고라도, 그의 外面 表出인 儀禮 方面에는 우리들 詩歌와 密接한 關係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원문주13▶분트도 詩歌의 姉妹인 原始人 舞踊의 動機를 單純히 音樂을 爲한 것도 아니고, 或은 다시 眞實한 目的이 있었는 것도 아니고, 最初는 呪의 目的을 가진 것이라 하였다[13] 한 것으로 보면, 心理學上으로도 이것이 說明이 되는 듯하나, 詩歌의 動機가 呪의 目的이라 하지 못한다 하고도 詩歌가 呪術의 目的으로 쓰인 것은 事實인 듯하다. 駕洛國歌 「龜何讓何。首其現也、若不現也、播灼而喫也」는 首露王을 맞기 爲한 呪願歌라는 것은 벌서 앞에서도 말한 바이나, 日本 天照大神의 天岩戶隱避 傳說에 對하야 津田左右吉氏는 滋味있는 解說을 하였다. 그 傳說은 周知하는 바와 같이 天照大神이 그 御弟되는 素盞嗚尊의 騒亂을 싫어서 天岩戶에 숨어버리자, 갑작이 日光이 없어지며 暗黑天地가 되었으므로 여러 神들이 크게 混惑하야 天岩戶 앞에 모이어 議論한 結果, 歌舞 音樂을 하였더니 大神이 어쩐 일인고 하고 문을 조그만치 열고 내다보려 할 때, 그中 힘많은 神이 문을 열어잿치고 大神을 끄내니, 日光이 다시 빛나 光明한 天地가 되었다는 것이나, 津田氏의 解釋은 이러하다. 원문주14▶「天照大神의 天戶隱避의 이야기는 日蝕의 現象과 그때에 行한 呪術에 關한 神話라고 解釋할 수 있다. 即 日神이 突然히 岩戶에 隱避하였기 때문에 世上이 暗黑하였다는 것은 日蝕의 現象을 神話化한 것이고, 그때 素盞嗚尊은 太陽에 危害를 加한 데몬이다. 그래서 長嗚鳥를 울린 것도, 天細女命이 熱中하야 舞踊한 것도 其他 모든 神이 소리를 내어 노래부른 것도 太陽의 出現을 促進하려는 magic이었었다 생각할 수 있다」[14]라고. 即 日本에 있어서 天岩戶의 歌舞도 呪的 目的에 施行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밖에도 이와 같은 실례는 원시문화 중에서 얼마든지 들 수 있다. 원시 종교의 의례에 불가결할 지위에 있을 것은 이로서 짐작할 수 있으며, 또 그것의 구체적 상태에 대하여는 오스토라리아의 코로보리와 우울룽과사제(蛇祭)에서 본 바와 같으나, 서촌진차(西村眞次)인물 씨가 원시시대의 시가와 종교와의 관계를 하여 「여상의 군가, 수렵가, 장식가 등의 내용을 검토하여 보면, 모두 욕구한 것이 근저를 삼고 있다. 그리고 그들 가요의 연주는 우리들 간에 보듯이 단순한 예술로서, 내지 오락으로서 행한 것이 아니고, 모두 주적 종교적 의식이 상반한 것이다. 아니 가요에 주적 종교적 의식이 상반한 것이 아니라, 주적 종교적 의식에 가요가 상반한 것이다. 타일라도 지적한 바와 같이 무용은 근대인에는 단지 오락으로밖에 보이지 않지만은, 문화 정도가 저급한 민중 사이에는 십분의 열기와 기고한 의의가 있다. 무용과 같이 가요도 또 오락이 아니고, 흔히는 마직과 종교과의 의전에 상반한 원시민중의 집단적 욕망의 표현이었다」라 한 것은 주의를 요할 만한 말인 듯하다. 그러면 왜 원시 종교에는 그 의식에 시가가 반드시 상반되는가. 코로보리에 본 바와 같이 이름은 종교 의식이라 하였지만은, 이를 딴 방면으로 본다면 가무의 연주라고 이르고 싶었거니와, 가락의 구지무가(龜旨舞歌)와 일본의 천암호가무(天岩戶歌舞)도 그 구체적 상태는 알 수 없지만은, 역시 코로보리의 그를 상상할 수 있으리라 하였는데, 의식 그것이 가무로 종시한다면, 가무 그것이 의식이 되고, 따라서 가무 그것에 주력(呪力)을 인증하지 않았는가. 타일라가 말한 바와 같이 문화 정도가 저급한 민중 사이의 가무는 십분의 열정과 기고한 의의가 있다 한다면, 그것에 어떤 「힘」을 부여하였다고도 생각할 수 있을 듯하다. 일본의 천암호가무(大岩戶歌舞)라든지, 가락의 구지가무(龜旨歌舞)라든지는 확실히 그렇게 해석할 수 있을 듯하다. 즉 전자는 가무의 힘으로 태양을 위해케 하는 데몬을 구축하려는 것이고, 후자는 가무의 힘을 빌어 국왕을 추계한 형식이 되겠다. 조선 고대 문헌에는 이와 같은 사상의 발현인 듯한 것을 허다히 볼 수 있다. 삼국유사에서 이삼 그 예를 들어보자.
쪽수▶P79이 밖에도 이와 같은 實例는 原始文化 中에서 얼마든지 들 수 있다. 服始宗敎의 儀禮에 不可缺할 地位에 있을 것은 이로서 斟酌할 수 있으며, 또 그것의 具體的 狀態에 對하여는 오스토라리아의 코로보리와 우울룽과蛇祭에서 본 바와 같으나, 西村眞次氏가 原始時代이 詩歌와 宗敎와의 關係를 하야 원문주15▶「如上의 軍歌, 狩獵歌、葬式歌 等의 內容을 劍討하여 보면, 모두 欲求한 것이 根抵를 삼고 있다. 그리고 그들 歌謠의 演奏는 우리들 間에 보듯이 單純한 藝術로서, 乃至 娛樂으로서 行한 것이 아니고, 모두 呪的 宗敎的 儀式이 相伴한 것이다. 아니 歌謠에 呪的 宗敎的 儀式이 相伴한 것이 아니라, 呪的 宗敎的 儀式에 歌謠가 相伴한 것이다. 타일라도 指摘한 바와 같이 舞踊은 近代人에는 單只 娛樂으로밖에 보이지 않지마는, 文化程度가 低級한 民衆 사이에는 十分의 熱氣과 氣高한 意義가 있다. 舞踊과 같이 歌謠도 또 娛樂이 아니고, 흔히는 마직과 宗敎과의 儀典에 相伴한 原始民衆의 集團的 欲望의 表現이었다」[15]라 한 것은 注意를 要할 만한 말인 듯하다. 그러면 웨 原始宗敎에는 그 儀式에 詩歌가 반 듯이 相伴되는가. 코로보리에 본 바와 같이 이름은 宗敎 儀式이라 하였지마는, 이를 딴 方面으로 본다면 歌舞의 演奏라고 이르고 싶었거니와, 駕洛의 龜旨舞歌와 日本의 天岩戶歌舞도 그 具體的 狀態는 알 수 없지마는, 亦是 코로보리의 그를 想像할 수 있으리라 하였는데, 儀式 그것이 歌舞로 終始한다면, 歌舞 그것이 儀式이 되고, 따라서 歌舞 그것에 呪力을 認證하지 않았는가. 타일라가 말한 바와 같이 文化程度가 低級한 民衆 사이의 歌舞는 十分의 熱情과 氣高한 意義가 있다 한다면, 그것에 어떤 「힘」을 賦與하였다고도 생각할 수 있을 듯하다. 日本의 大岩戶歌舞라든지, 駕洛의 龜旨歌舞라든지는 確實히 그렇게 解釋할 수 있을 듯하다. 即 前者는 歌舞의 힘으로 太▶P80-1陽을 危害케 하는 데몬을 驅逐할려는 것이고, 後者는 歌舞의 힘을 빌어 國王을 推戒한 形式이 되겠다. 朝鮮 古代 文獻에는 이와 같은 思想의 發現인 듯한 것을 許多히 볼 수 있다. 三國遺事에서 二三 그 예를 들어보자.
성덕왕대(聖德王代) 순정공(純貞公)이 강릉(江陵) 태수(太守)가 되어 부임하던 도중, 임해한 정자에서 주선(晝膳)하던 차에 홀연히 해룡이 부인을 약람(掠攬)하야 바다로 들어가 버렸다. 공이 진도피지(顚倒避地)하였으나 속수무책이러니, 한 노인이 나타나 말하기를 고인의 말에 중구(衆口)가 삭금(鑠金)을 한다 하니, 즉 금(今) 해중방생(海中傍生)이 어찌 중구(衆口)를 두려워하지 아니하겠느냐, 작가창지(作歌唱之)하며 작지로 안변(岸邊)을 두드리면 가히 부인을 보리라 하였다. 공이 그 말을 듣고, 해가사(海歌詞)를 지어 여러 사람이 불렀더니, 과연 해룡이 부인을 데리고 나왔다. 부인의 자용이 절대하야 그 후 심산대택(深山大澤)을 지날 때마다 누차 신물의 약람(掠攬)을 당한 일이 있었으나, 그때마다 이 해가사(海歌詞)를 읊으면 화를 면할 수가 있었다.
쪽수▶P80-2}聖德王代 純貞公이 江陵太守가 되어 赴任하던 途中, 臨海한 亭子에서 晝膳하던 차에 忽然히 海龍이 夫人을 掠攬하야 바다로 들어가버렸다. 公이 顚倒避地하였으나 束手無策이러니, 한 老人이 나타나 말하기를 故人의 말에 衆口가 鑠金을 한다 하니, 即今 海中傍生이 어찌 衆口를 두너워하지 아니하겠느냐, 作歌唱之하며 작지로 岸邊을 두드리면 可히 夫人을 보리라 하였다. 公이 그 말을 듣고, 원문주16▶海歌詞[16]을 지어 여러 사람이 불렀더니, 果然 海龍이 夫人을 데리고 나왔다. 원문주17▶夫人의 姿容이 絶代하야 그後 深山大澤을 지날 때마다 屢次 神物의 掠攬을 當한 일이 있었으나, 그때마다 이 海歌詞 읊으면 禍를 免할 수가 있었다.[17]
진평왕대(眞平王代)에 제5 거열랑(居烈郎), 제6 실처랑(實處郎), 제7 보동랑(寶同郎) 등 삼화지도(三花之徒)가 풍악을 유람하였더니, 혜성이 대성을 범심(犯心)하였으므로 불길한가 하여 행각을 파의(罷意)코자 하였다. 그때에 융천사(融天師)가 혜성가(慧星歌)를 지어 부르니, 성괴(星怪)가 즉멸하고 일본병이 환국하여, 도리어 복경(福慶)을 이루어 대왕이 환희하시어서 낭도(郞徒)를 풍악에 유람 보내었다.
쪽수▶P80-3원문주18▶眞平王代에 第五 居烈郎、第六 實處郎, 第七 寶同郎 等 三花之徒가 楓岳을 遊覽하였더니 慧星이 大星을 犯心하였으므로 不吉한가 하야 行脚을 罷意코저 하였다. 그때에 融天師가 慧星歌을 지어 부르니, 星怪가 即滅하고 日本兵이 還國하야, 도리어 福慶을 이루어 大王이 歡喜하시어서 郞徒를 楓岳에 遊覽보내었다.[18]
경덕왕(景德王) 19년 경자(庚子) 4월 삭(朔)에 천공에 2일이 나타나서 순일을 두고 멸하지 않은 괴변이 있었다. 일관(日官)이 말하기를 연승(緣僧)을 청(請)하여 산화공덕(散花功德)을 하면 가양(可禳)하리라 하였으므로, 조천전(朝天殿)이 단(壇)을 청결히 하고 청양루(靑陽樓)에 가행(駕幸)하시어서, 연승(緣僧)을 바라던 차에 월명사(月明師)가 앞을 지났다. 곧 불러서 일관이 하던 말대로 청하니, 명(明)이 신승(臣僧)은 다만 국유의 도에 속하야 향가는 해(解)하지만은, 성범(聲梵)은 신통을 못 한다 하였다. 왕이 기위(旣爲) 연승(緣僧)을 만난 바에야 향가도 가(可)하다 하였으므로, 명(明)이 도솔가(兜率歌)를 지어 읊으니 일괴(日怪)가 즉멸하였다.
쪽수▶P80-4원문주19▶景德王 十九年 庚子 四月 朔에 天空에 二日이 나타나서 旬日을 두고 滅하지 않은 怪變이 있었다. 日官이 말하기를 緣僧을 請하야 散花功德을 하면 可禳하리라 하였으므로, 朝天殿이 壇을 清潔히 하고 靑陽樓에 駕幸하시어서, 緣僧을 바라던 차에 月明師가 앞을 지났다. 곧 불러서 日官이 하던 말대로 請하니, 明이 臣僧은 다만 國由의 徒에 屬하야 鄕歌는 解하지마는, 聲梵은 神通을 못하다 하였다. 王이 旣爲 緣僧을 만난 바에야 鄕歌도 可하다 하였으▶P81-1므로, 明이 兜率歌를 지어 읊으니 日怪가 即滅하였다.[19]
지금 여기에 든 예들은 그중 이삼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나, 모두 그 사상을 노골적으로 나타낸 것이라 하겠다. 후이자는 아직 거기 불교의 공덕이라는 종교 의식에 숨길 수 있는 듯하지만은, 전일자 해가사(海歌詞)에 이르러서는 아무 숨길 데도 없이 해가사(海歌詞) 그것만으로 능히 훌륭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노인의 헌언(獻言)에도 단순히 중구가 능히 해중방생(海中傍生)을 위협할 수 있으니 작가창지(作歌唱之)하라 하였고, 사실 그대로 해가사(海歌詞)를 읊으니, 해룡이 데리고 나와서 바치었을 뿐 아니라, 기후(其後) 누차 같은 효과를 얻은 것은 다른 아무 외부적 힘을 빌린 것도 아니고, 오로지 시가 자신의 힘으로 원망을 달할 수 있었다. 이것 요컨대 시가에 어떤 주력이 있었다 인정한 것을 조선편의 문헌으로도 볼 수 있다는 일 방증의 재료가 되겠으나, 대체로 시가라는 것은 인간 적성(赤誠)이 구체적으로 밖에 표현된 것이다. 고인도 지성이면 감천이라 이른 바와 같이 일점 사심이 없고, 정말 지성이라 한다면 어떤 것을 움직일 만한 힘이 있기도 가의(可宜)다. 시가는 실로 그러한 부문을 소유하고 있으니까, 문화가 저급한 민족이 그에 대한 것은 일종 존재의 힘을 인정하였다는 것은 구태어 무리한 사실도 아닐 것이다. 승 일연인물이 향가는 왕왕 천지귀신을 감동시킨다 한 것도 또한 시가에 주력을 인정한 말이라 해석된다.
쪽수▶P81-2지금 여기에 든 例들은 그中 二三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나, 모두 그 思想을 露骨的으로 나타낸 것이라 하겠다. 後二者는 아직 거기 佛敎의 功德이라는 宗敎意識에 숨길 수 있는 듯하지마는, 前一者 海歌詞에 이르러서는 아무 숨길대도 없이 海歌詞 그것만으로 能히 훌륭한 「힘」을 發揮하고 있다. 老人의 獻言에도 單純히 衆口가 能히 海中傍生을 威脅할 수 있으니 作歌唱之하라 하였고, 事實 그대로 海歌詞를 읊으니, 海龍이 데리고 나와서 바치었을 뿐 아니라, 其後 屢次 같은 効果를 얻은 것은 다른 아무 外部的 힘을 빌린 것도 아니고, 오로지 詩歌 自身의 힘으로 願望을 達할 수 있었다. 이것 要컨대 詩歌에 어떤 呪力이 있었다 認定한 것을 朝鮮편의 文獻으로도 볼 수 있다는 一 傍證의 材料가 되겠으나, 大體로 詩歌라는 것은 人間 赤誠이 具體的으로 밖에 表現된 것이다. 古人도 至誠이면 感天이라 이른 바와 같이 一點 邪心이 없고, 정말 至誠이라 한다면 어떤 것을 움즉일 만한 힘이 있기도 可宜다. 詩歌는 實로 그러한 部門을 所有하고 있으니까, 文化가 低級한 民族이 그에 對한 것은 一種 存在의 힘을 認定하였다는 것은 구태어 無理한 事實도 아닐 것이다. 원문주20▶僧 一然이 鄕歌는 往往 天地鬼神을 感動시킨다 한 것도[20] 또한 詩歌에 呪力을 認定한 말이라 解釋된다.
이와 같이 시가에 주력이 있었다는 것은 곧 시가 자신이 벌서 종교적이라는 것이 되나, 이 주력적인 원시 시가가 주술적 원시 종교와 결합하여 그 의례에 사용된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일 것 같다. 그리하여 시가와 종교는 그 원시시대에 있어서 거의 분리할 수 없이 밀접한 관계를 갖지 않았든가 한다.
쪽수▶P81-3이와 같이 詩歌에 呪力이 있었다는 것은 곧 詩歌 自身이 벌서 宗敎的이라는 것이 되나, 이 呪力的인 原始 詩歌가 呪術的 原始 宗敎와 結合하야 그 儀禮에 使用된 것은 極히 自然스러운 일일 것 같다. 그리하야 詩歌와 宗敎는 그 原始時代에 있어서 거의 分離할 수 없이 密接한 關係를 갖지 않았든가 한다.
















본문6: 결언


시가에 주력이 있어 종교의 의례 중에 사용되어 그와 굳은 결속이 있다 한다면, 앞에서 해석된 고문헌의 사실은 단순한 우연이 아닌 것을 알겠다. 또 이것은 우리의 조선 시가의 태생에도 어떠한 목표를 주는 듯한 감이 있으니, 조선 시가는 그가 남긴 문헌이 가르친 바와 같이 종교에서 태생하였는가? 그러나 여기에서 한번 다시 시가 발생에 대하여 생각해 보건대, 시는 반듯이 종교에서 발생하였다고도 할 수 없다. 차라리 가장 최초의 시가란 것은 그야말로 자연인의 돌발적 감정어가 아니든가. 오십남력(五十嵐力)인물 씨가 말한 바와 같이 기쁘다, 슬프다, 속상한다, 부끄럽다, 싫다라는 청이, 기침과 재채기가 자연이 나오듯이 돌차(咄嗟)할 때에 자연이 발하는 정취어(情趣語) 혹은 원수원(原隨園)인물 씨의 말한바 현실생활에 대한 감격어가 곧 시가가 아니든가도 싶다. 미상팔랑(尾上八郎)인물이 말한 바와 같이 남녀 상애(相愛)의 정조가 높아지자, 자차(咨嗟), 영탄(詠嘆)의 소리 자신이 일종의 율격을 생(生)하여 드디어 간단한 최초의 시가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이와 전연 다른 입장에서 본다면, 듈켄인물이 이른 바와 같이 집합적 감정은 합주와 통일된 운동을 지켜서만 이른 바와 같이 집합적으로 표현되는 것이니까, 그 소작(所作)과 규성(呌聲)은 자연이 율동적으로 되어 거기에서 가요와 무용이 발생한다고도 할 수 있다.
쪽수▶P82-1詩歌에 呪力이 있어 宗敎의 儀禮中에 使用되어 그와 굳은 結束이 있다 한다면, 앞에서 解釋된 古文獻의 事實은 單純한 偶然이 아닌 것을 알겠다. 또 이것은 우리의 朝鮮 詩歌의 胎生에도 어떠한 目標를 주는 듯한 感이 있으니, 朝鮮 詩歌는 그가 남긴 文獻이 가르친 바와 같이 宗敎에서 胎生하였는가? 그러나 여기에서 한번 다시 詩歌 發生에 對하야 생각해 보건대, 詩는 반듯이 宗敎에서 發生하였다고도 할 수 없다. 차라리 가장 最初의 詩歌란 것은 그야말로 自然人의 突發的 感情語가 아니든가. 五十嵐力氏가 말한 바와 같이 기쁘다, 슬프다, 속상한다, 부끄럽다▶P83-1 싫다라는 請이, 기침과 재채기가 自然이 나오듯이 咄嗟할 때에 自然이 發하는 원문주21▶情趣語[21] 或은 原隨園氏의 말한바 現實生活에 對한 원문주22▶感激語[22]가 곧 시가가 아니든가도 싶다. 원문주23▶尾上八郎가 말한 바와 같이 男女 相愛의 情調가 높아지자, 咨嗟, 詠嘆의 소리 自身이 一種의 律格을 生하야 드디어 簡單한 最初의 詩歌가 되었는지도 모른다.[23] 或은 이와 全然 다른 立場에서 본다면, 원문주24▶듈켐이 이른 바와 같이 集合的 感情은 合奏와 統一된 運動을 지켜서만 이른바와 같이 集合的으로 表現되는 것이니까, 그 所作과 呌聲은 自然이 律動的으로 되어 거기에서 歌謠와 舞踊이 發生한다고도[24] 할 수 있다.
요컨대 입장에 따라 여하히도 해석이 되는 것이 시가의 발생설이라는 것이 된다. 구태어 일을 인정하고 타를 거격(拒擊)할 필요도 없을 듯하다. 기실은 이들을 다 용인하여 완전한 설명이 되지 않을까 하나, 이것도 일종 문화적 산물이라 하여 보면, 원시시대의 문화는 모두 종교 중에 혼융되어 있는 것이니까, 시가도 그중에 혼융되었었다 하겠다. 우야원공(宇野圓空)인물 씨는 기저(其著)에서 모든 「무용의 근원이 단순히 유희행동과 모방본능이라 할 수 없는 동시에, 종교적 무용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신성한 존재의 모방이라든가, 실리적인 공감주술로서 발생한 것이 아니고, 어느 것이든지 다 표출 급 표현의 행위로서 주요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다만 오락으로 행하던 무용이 전통에 의한 사회적 강제와 목적의 전환을 위하여 종교적 행사가 되었다든지, 종교적 무용이 단순한 오락으로 행하게 되었다든지, 상호간에 소위 문화적 전위가, 엄숙한 의무적 제의가 다만 환락의 제의로 변화하는 일 중심이 되어 있다는 것은 제의의 다른 중요 요소인 향연과 같이 무용 자신의 성질로도 잊어버려선 안 될 경향이다!」라 하고, 다시 시가에 대하여 「실제로 그것이 가끔 종교와 오락의 사이를 동요, 내왕하고 있는 것은 무용과 다름이 없다」 하였으나, 시가는 그 발생 동기만을 말하면, 개인적 입장에서, 혹은 민락적 입장에서 이를 볼 수도 있지만은, 그 발전 과정에는 오락적으로, 혹은 종교적으로 될 수 있는 동시에, 쌍방은 서로 늘 동요내왕하야, 오락적 시가가 종교적 시가로 된 때도 있고, 종교적 시가가 오락적 시가로 된 때도 있듯이 양자간에는 충분한 타협성이 있었는 듯하다. 그리고 원시시대의 생활 중심은 늘 종교에 있을 만치, 시가라 할지라도 완전히 종교를 벗어나서 그 발달은 볼 수 없을 것이다.
쪽수▶P83-2要컨대 立場에 따라 如何히도 解釋이 되는 것이 詩歌의 發生說이라는 것이 되다, 구태어 一을 認定하고 他를 拒擊할 必要도 없을 듯하다. 其實은 이들을 다 容認하여 完全한 設明이 되지 않을가 하나, 이것도 一種 文化的 産物이라 하여 보면, 原始時代의 文化는 모두 宗敎 中에 混融되어 있는 것이니까, 詩歌도 그中에 混融되었었다 하겠다. 宇野圓空氏는 其 著에서 모든 원문주25▶「舞踊의 根源이 單純히 遊戱行動과 模倣本能이라 할 수 없는 同時에, 宗敎的 舞踊이라 할지라도 반듯이 神聖한 存在의 模倣이라든가, 實利的인 共感呪術로서 發生한 것이 아니고, 어느 것이든지 다 表出 及 表現의 行爲로서 主要의 意味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認定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다만 娛樂으로 行하던 舞踊이 傳統에 依한 社會的 强制와 目的의 轉換을 爲하야 宗敎的 行事가 되었다든지, 宗敎的 舞踊이 單純한 娛樂으로 行하게 되었다든지, 相互間에 所謂 文化的 轉位가, 嚴肅한 義務的 祭儀가 다만 歡樂의 祭儀로 變化하는 一 中心이 되어 있다는 것은 祭儀의 다른 重要 要素인 饗宴과 같이 舞踊 自身의 性質로도 잊어버려선 안 될 傾向이다!」[25]라 하고, 다시 詩歌에 對하여 원문주26▶「實際로 그것이 가끔 宗敎와 娛樂의 사이를 動搖, 來往하고 있는▶P84-1 것은 舞踊과 다름이 없다」[26] 하였으나, 詩歌는 그 發生 動機만을 말하면, 個人的 立場에서, 或은 民樂的 立場에서 이를 볼 수도 있지마는, 그 發展 過程에는 娛樂的으로, 或은 宗敎的으로 될 수 있는 同時에, 雙方은 서로 늘 動搖來往하야, 娛樂的 詩歌가 宗敎的 詩歌로 된 때도 있고, 宗敎的 詩歌가 娛樂的 詩歌로 된 때도 있듯이 兩者間에는 充分한 妥協性이 있었는 듯하다. 그리고 原始時代의 生活中心은 늘 宗敎에 있을만치, 詩歌라 할지라도 完全히 宗敎를 벗어나서 그 發達은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시가는 그 발생 동기 여하를 불문하고 종교와 깊은 인연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 시가에서도 또 한 일양으로 논할 수 있는 문제니, 그 발생 동기는 개인적 혹은 민중적으로 볼 수 있다 하고도, 시가로서의 발전 과정은 문헌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종교와 인연을 끊을 수 없었는 듯하다. 그리하여 조선 시가는 가락국가와 같이 주원의 주가로서, 또는 매년 정기로 열리는 국민적 대제의의 가무로서 발달의 단을 열어 그 가운데서 점점 시가다운 시가가 배태, 성장하였으리라 하겠다. 또 그와 동시에, 혹은 그와 병행하여 오락적 시가 즉 예술적 시가가 발달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종교적 시가와 머지않은 인연에 아니 발달하였으리라 상상되고, 문헌을 통하여서만은 조선 시가는 대강 종교에서 태생하였으리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겠다.
쪽수▶P84-2그렇다면 詩歌는 그 發生 動機 如何를 不問하고 宗敎와 깊은 因緣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朝鮮 詩歌에서도 또 한 一樣으로 論할 수 있는 問題니, 그 發生 動機는 個人的 或은 民衆的으로 볼 수 있다 하고도, 詩歌로서의 發展 過程은 文獻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宗敎와 因緣을 끊을 수 없었는 듯하다. 그리하여 朝鮮 詩歌는 駕洛國歌와 같이 呪願의 呪歌로서, 또는 每年 定期로 열리는 國民的 大祭儀의 歌舞로서 發達의 端을 열어 그 가운대서 漸漸 詩歌다운 詩歌가 胚胎, 成長하였으리라 하겠다. 또 그와 同時에, 或은 그와 並行하야 娛樂的 詩歌 即 藝術的 詩歌가 發達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宗敎的 詩歌와 머지않은 因緣에 아니 發達하였으리라 想象되고, 文獻을 通하여서만은 朝鮮 詩歌는 大綱 宗敎에서 胎生하였으리라는 結論을 얻을 수 있겠다.
이상 다소 속단의 폐를 불면할지 모르나, 이렁저렁 결론까지 끌어나왔다. 여기서 다시 앞에서 말하여 온 바를 회고하면 시가의 태생이라 하였건만은, 결국은 조선 원시 시가와 종교와의 관계를 본 바에 지나지 못하였다. 이 외에도 민족학적으로, 사회학적으로, 혹은 심리학적으로 연구할 부분도 있을 듯하다. 그러나 지금은 그까지 널리 미치지 못하고 이 논술을 마치련다.
쪽수▶P84-3以上 多少 速斷의 弊를 不免할지 모르나, 이렁저렁 結論까지 끌어나왔다. 여기서 다시 앞에서 말하여 온 바를 回顧하면 詩歌의 胎生이라 하였건마는, 結局은 朝鮮 原始 詩歌와 宗敎와의 關係를 본 바에 지나지 못하였다.이 外에도 民族學的으로, 社會學的으로, 或은 心理學的으로 研究할 部分도 있을 듯하다. 그러나 지금은 그까지 널리▶P85 미치지 못하고 이 論述을 마치련다.


















데이터


TripleData




Data Network






주석


  1. 안등홍 역 「藝術の始原」 364頁(安藤弘 譯 「藝術の始原」 三六四頁)
  2. 동상 321-323頁(同 上 三二一─三二三頁)
  3. 동상 262-263頁(同 上 二六二─二六三頁)
  4. 토거광지 저 「문학서설」 제2판. 38道(土居光知 著 「文學序說」 第二版. 三八道.)
  5. 고야법인 일역 「宗敎生活の原初形態」 353頁(古野法人 日譯 「宗敎生活の原初形態」 三五三頁.)
  6. 동상 358頁(向上 三五八頁).
  7. 동상 356-357頁(同上 三五六─三五七頁).
  8. 「조선사회경제사」 239─24頁.(「朝鮮社會經濟史」 二三九─二四頁).
  9. 영역 “Element of Folk-psychology” p.427(英譯 “Element of Folk-psychology”p.427).
  10. 이등견일 저 「종교심리학」 514─515頁(伊藤堅逸 著 「宗敎心理學」 五一四─五一五頁).
  11. 우야원공 저 「종교민족학」 293頁(宇野圓空 著 「宗敎民族學」 二九三頁).
  12. 「문학서설」 20頁(「文學序說」 二○頁).
  13. 상전방리 저 「ヴントの民族心理學」 134頁(桑田芳離 著 「ヴントの民族心理學」 一三四頁).
  14. 「神代史の研究」 191-192頁(「神代史の研究」 一九一─一九二頁).
  15. 「日本歌謠の原始形に關すろ 二三 考察」(「國語と國文學」 제5권 제10호)(「日本歌謠の原始形に關すろ 二三 考察」(「國語と國文學」 第五卷 第十號)).
  16. 해가사(海歌詞)는 「구호구호출수로(龜乎龜乎出水路), 약인부여죄하극(掠人婦女罪何極), 여약패역불출헌(汝若悖逆不出獻), 입망포약번지끽(入網浦掠燔之喫)」라 하는 것인데, 가락 양가와 많은 공통점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주술적 시가로서 보통 널리 쓰이던 것인 듯하다. 또다시 졸고 「조선시가의 원시형」(조선어문 제7호)을 참조하여 줌을 바란다.(海歌詞는 「龜乎龜乎出水路, 掠人婦女罪何極, 汝若悖逆不出獻, 入網浦掠燔之喫」라 하는 것인데, 駕洛兩歌와 많은 共通点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呪術的 詩歌로서 普通 널리 쓰이던 것인 듯하다. 또다시 拙稿 「朝鮮詩歌의原始形」(朝鮮語文 第七號)을 叅照하야줌을 바란다).
  17. 삼국유사 권 제2 수로부인(三國遺事 卷第二 水路夫人).
  18. 동상 권 제5 융천사 혜성가(同上 卷第五 融天師 慧星歌).
  19. 동상 권 제5 월명사 도솔가(同上 卷第五 月明師 兜率歌).
  20. 동상(同上).
  21. 「國歌の胎生及び發達」 137頁(「國歌の胎生及び發達」 一三七頁).
  22. 「キリシャ史研究」 2頁(「キリシャ史研究」 二頁).
  23. 「일본문학신사」 24頁(「日本文學新史」 二四頁).
  24. 고야청인 역 「宗教生活の原初形態」 354-355頁(古野清人 譯 「宗教生活の原初形態」 三五四─三五五頁).
  25. 「종교민족학」 476-477頁(「宗教民族學」 四七六─四七七頁).
  26. 동상 478頁(同上 四七八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