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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Korea Humanities

(출생과 성장 (1912~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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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이인성(李仁星, 1912년~1950년)은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한국의 서양화가이다.<ref>『[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5613 이인성]』<html><online style="color:blue"><sup>online</sup></online></html>,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 가난한 가정 형편으로 정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으나, 천재성을 바탕으로 18세에 <조선미술전람회>(이하 <선전>이라 함)에 최연소로 입선하고, 24세에는 창덕궁상을 수상하며 화단의 정점에 올랐다.<ref>『[https://www.kculture.or.kr/brd/board/252/L/menu/464?brdType=R&thisPage=13&bbIdx=8580&rootCate=&searchField=&searchText=&recordCnt=10 이인성]』<html><online style="color:blue"><sup>online</sup></online></html>, 전통문화포털.</ref> 대표작으로는「가을 어느 날」,「경주의 산곡에서」등이 있으며, 해방 후 이화여자대학교 강사 및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심사위원으로서 활동하였다.<ref>『[https://www.kculture.or.kr/brd/board/252/L/menu/464?brdType=R&thisPage=13&bbIdx=8580&rootCate=&searchField=&searchText=&recordCnt=10 이인성]』<html><online style="color:blue"><sup>online</sup></online></html>, 전통문화포털.</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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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이인성은 1912년 8월 18일 대구시 태평로3가 57번지에서 태어났다.<ref>『[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5613 이인성]』<html><online style="color:blue"><sup>online</sup></online></html>,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 수창공립보통학교{{TagInstitution|}}에 입학하여 1928년 졸업하고, <세계아동예술전람회>에서 특선을 수상하였다.<ref>『[https://daeguartmuseum.or.kr/index.do?menu_id=00000765 이인성]』<html><online style="color:blue"><sup>online</sup></online></html>, 대구미술관.</ref> 좋지 않은 가정 형편으로 상급 학교에 진학하지 못했으나, 서동진{{TagPerson|}}이 운영하던 디자인 인쇄 사무실인 <대구미술사>에서 일하며 수채화의 세계에 입문하였다.<ref>『[https://www.kculture.or.kr/brd/board/252/L/menu/464?brdType=R&thisPage=13&bbIdx=8580&rootCate=&searchField=&searchText=&recordCnt=10 이인성]』<html><online style="color:blue"><sup>online</sup></online></html>, 전통문화포털.</ref> 1929년 18세의 나이로 스승 서동진과 함께 <선전>에 입선하며 화단에 등단하였다.<ref>『[https://www.kculture.or.kr/brd/board/252/L/menu/464?brdType=R&thisPage=13&bbIdx=8580&rootCate=&searchField=&searchText=&recordCnt=10 이인성]』<html><online style="color:blue"><sup>online</sup></online></html>, 전통문화포털.</ref> 당시 입선작은 수채화 「그늘」{{TagWork|}}이었다.<ref>『[https://daeguartmuseum.or.kr/index.do?menu_id=00000765 이인성]』<html><online style="color:blue"><sup>online</sup></online></html>, 대구미술관.</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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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미술사에서의 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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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이인성은 1930년대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마라톤의 손기정, 무용의 최승희와 함께 조선을 대표하는 세 명의 인물로 거론될 만큼 명성이 높았다.<ref>김인혜, 「[https://www.chosun.com/national/weekend/2023/03/04/WJVJVAYJMRH33LIIANYXBF74NU/ 시대가 외면했던 38세 요절 화가… "누가 천재를 쏘았는가?"]」,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일보』<sup>online</sup></online></html>, 조선일보사, 작성일: 2023년 03월 04일.</ref> 그의 불투명 수채화의 극히 과감한 표현 처리와 특출한 기량 발휘는, 우리나라에서 수채화의 본질적 묘미와 높은 차원의 표현성을 처음 제시한 것으로써 높이 평가되고 있다.<ref>『[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5613 이인성]』<html><online style="color:blue"><sup>online</sup></online></html>,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 그가 조선총독부가 주도한 관전인 조선미술전람회와 일본의 제국미술전람회 위주로 활동했다는 비판적인 시선을 받기도 했으나, 이는 식민지 시대의 가난한 화가가 생존하고 자신을 증명하기 위한 유일한 통로였다는 옹호론도 존재한다.<ref>김인혜, 「[https://www.chosun.com/national/weekend/2023/03/04/WJVJVAYJMRH33LIIANYXBF74NU/ 시대가 외면했던 38세 요절 화가… "누가 천재를 쏘았는가?"]」,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일보』<sup>online</sup></online></html>, 조선일보사, 작성일: 2023년 03월 04일.</ref> 오늘날에는 그를 기리는 '이인성 미술상'이 제정되는 등 한국 근대미술사에 선명한 족적을 남긴 화가로 기억되고 있다.<ref>『[https://www.kculture.or.kr/brd/board/252/L/menu/464?brdType=R&thisPage=13&bbIdx=8580&rootCate=&searchField=&searchText=&recordCnt=10 이인성]』 <html><online style="color:blue"><sup>online</sup></online></html>, 전통문화포털.</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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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2월 10일 (수) 20:20 판

👩🏻‍🏫본 문서는 서울대학교 "25-2 미디어위키를 활용한 역사 데이터 편찬" 수강생(김나연(SNU2025))이 작성했습니다.




이인성(李仁星)
이인성2.jpg
출처 : 이인성online, 전통문화포털.
 
한글명 이인성 한자명 李仁星 영문명 Lee In-sung 가나명 이칭 아소(我笑)
성별 남성 생년 1912년 몰년 1950년 출신지 대구 전공 서양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이인성(李仁星, 1912년~1950년)은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한국의 서양화가이다.[1] 가난한 가정 형편으로 정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으나, 천재성을 바탕으로 18세에 <조선미술전람회>(이하 <선전>이라 함)에 최연소로 입선하고, 24세에는 창덕궁상을 수상하며 화단의 정점에 올랐다.[2] 대표작으로는「가을 어느 날」,「경주의 산곡에서」등이 있으며, 해방 후 이화여자대학교 강사 및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심사위원으로서 활동하였다.[3]


생애


출생과 성장 (1912~1930)

이인성은 1912년 8월 18일 대구시 태평로3가 57번지에서 태어났다.[4] 수창공립보통학교기관에 입학하여 1928년 졸업하고, <세계아동예술전람회>에서 특선을 수상하였다.[5] 좋지 않은 가정 형편으로 상급 학교에 진학하지 못했으나, 서동진인물이 운영하던 디자인 인쇄 사무실인 <대구미술사>에서 일하며 수채화의 세계에 입문하였다.[6] 1929년 18세의 나이로 스승 서동진과 함께 <선전>에 입선하며 화단에 등단하였다.[7] 당시 입선작은 수채화 「그늘」작품이었다.[8]


일본 유학 시절과 전성기 (1931~1935)

1931년 수채화 「세모가경」작품으로 또 한 번 선전에서 특선에 올랐고, 이로 인해 일본인 교장 시라카 주키치인물의 후원으로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났다.[9] 유학 초기에는 '오사마 상회'라는 크레용 회사에서 일하며 고학했으나,곧 크레용 회사 사장의 지원을 받아 태평양미술학교기관에 입학해 미술 수업을 받았다.[10] 도쿄에 있는 4년 동안 인상주의, 후기 인상주의 등 서구의 화풍을 섭렵하고 실험하면서 기량을 급격히 발전시켰다.[11] 1932년부터 1935년 사이 <선전> 특선은 물론 <제전>, <광풍회전>, <전일본수채화전> 등에도 연이어 입상하며 명성을 펼쳤다.[12] 특히 1934년에는 「가을 어느 날」작품로 <선전> 특선을,1935년에는 「경주의 산곡에서」작품로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수상하며 24세의 나이에 조선 화단의 정점에 섰다.[13]


대구에서의 활동 (1936~1944)

1935년 도쿄 유학생활을 마감하고 한국으로 귀국하였고, 결혼을 하며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하면서 미술운동을 전개했다.[14] 귀국 후 1937년, <선전>에서 추천작가에 선정되었다.[15] 1938년에는 대구 남산병원 3층에 '이인성 양화연구소'를 개설하여 후진 양성에 힘썼다. 1939년에는 대구 아카데미극장 옆 골목에 '아르스(ARS)'라는 다방을 얻어 예술가들의 문화사랑방으로 운영하였다.[16] 한때 다방에 걸려있던 작품이 상을 받지 못했다고 오해한 팬에 의해 작품이 훼손되는 사건도 발생했다.[17][18]


해방 이후와 최후 (1945~1950)

1945년 해방 후 서울 아현동으로 거처를 옮겨 이화여자고등학교기관 미술교사 및 이화여자대학교기관 서양화부 강사로 출강하면서, 국화회(國畵會) 회화연구소기관를 세워 <이인성 양화전>을 개최하기도 했다.[19] 1949년 창설된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의 심사위원으로 위축되어 활동하였다. 그러나 한국전쟁 도중이던 1950년 11월 4일, 술을 마시고 귀가하던 중에 경찰과 언쟁이 생겨, 경찰이 발사한 총탄에 맞아 사망하였다.[20] 공포탄으로 쏜 게 실탄이 들어 있어 오발 사고가 났다.[21] 죽음 이후 <이인성문화재단>이 설립되고, '이인성미술상'이 제정되는 등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22]





연구


서양 화풍의 수용과 독자적 양식

이인성은 일본 유학 시절 인상파, 후기 인상파, 야수파 등 서구의 다양한 근대 미술 양식을 섭렵하고 실험하였다.[23] 그는 단순히 눈에 보이는 대상을 그리는 것을 넘어서, 화사한 색채와 자유로운 선을 사용하여 현실 너머의 아름다운 '별세계'를 연출해내는 능력을 보여주었다.[24] 유화와 수채화 모두에서 탁월한 기량을 발휘하였다. [25]


'향토색'의 구현과 한국적 서정

이인성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는 '향토색(鄕土色)'이다.[26] 그는 서양의 인상주의나 후기 인상주의 화풍을 발전시켜 향토적인 서정주의의 한 전형을 이루었다.[27] 특히 대표작인 「가을 어느 날」작품과 「경주의 산곡에서」작품는 낭만과 허무가 공존하는 조선의 자연과 풍토를 은유적이고 상징적으로 표현하였다.[28] 또한 1934년작 「아리랑 고개」작품는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에 대한 오마주로서, 식민지 조선인의 울분을 풍경 속에 녹여낸 작품이다.[29] 그의 작품들은 단순히 평면적이고 장식적인 화면 구성을 넘어 원초적인 생명성을 추구하였으며, 단순한 인상적 풍경이 아닌 민족의 삶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구상화하였다.[30]


한국 근대미술사에서의 위상

이인성은 1930년대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마라톤의 손기정, 무용의 최승희와 함께 조선을 대표하는 세 명의 인물로 거론될 만큼 명성이 높았다.[31] 그의 불투명 수채화의 극히 과감한 표현 처리와 특출한 기량 발휘는, 우리나라에서 수채화의 본질적 묘미와 높은 차원의 표현성을 처음 제시한 것으로써 높이 평가되고 있다.[32] 그가 조선총독부가 주도한 관전인 조선미술전람회와 일본의 제국미술전람회 위주로 활동했다는 비판적인 시선을 받기도 했으나, 이는 식민지 시대의 가난한 화가가 생존하고 자신을 증명하기 위한 유일한 통로였다는 옹호론도 존재한다.[33] 오늘날에는 그를 기리는 '이인성 미술상'이 제정되는 등 한국 근대미술사에 선명한 족적을 남긴 화가로 기억되고 있다.[34]





데이터


TripleData

Source (A) Target (B) Relationship
Person: 이인성 Institution: 수창공립보통학교 A graduates B
Person: 이인성 Person: 서동진 A hasMaster B
Person: 이인성 Work: 그늘 A creator B
Person: 이인성 Work: 세모가경 A creator B
Person: 이인성 Person: 시라카 주키치 A hasMaster B
Person: 이인성 Institution: 태평양미술학교 A graduates B
Person: 이인성 Work: 가을 어느 날 A creator B
Person: 이인성 Work: 경주의 산곡에서 A creator B
Person: 이인성 Institution: 이화여자고등학교 A worksAt B
Person: 이인성 Institution: 이화여자대학교 A worksAt B
Person: 이인성 Work: 아리랑 고개 A creator B



Timeline


Network Graph






참고자원







주석


  1. 이인성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2. 이인성online, 전통문화포털.
  3. 이인성online, 전통문화포털.
  4. 이인성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5. 이인성online, 대구미술관.
  6. 이인성online, 전통문화포털.
  7. 이인성online, 전통문화포털.
  8. 이인성online, 대구미술관.
  9. 이인성online, 전통문화포털.
  10. 이인성online, 전통문화포털.
  11. 이인성online, 전통문화포털.
  12. 이인성online, 전통문화포털.
  13. 이인성online, 대구미술관.
  14. 이인성online, 전통문화포털.
  15. 이인성online, 대구미술관.
  16. 이인성online, 전통문화포털.
  17. 이인성online, 전통문화포털.
  18. 이인성이 <선전>에서 수상소식을 전해 주지 않자 활약이 부진한 것으로 오해하고 작업을 독려하고자 저지른 일이었다. 하지만 이때 이인성은 <선전>의 추천작가에 올라 상을 받을 자격이 없는 상황이었다.
  19. 이인성online, 전통문화포털.
  20. 이인성online, 전통문화포털.
  21. 김인혜, 「시대가 외면했던 38세 요절 화가… "누가 천재를 쏘았는가?"」, 『조선일보』online, 조선일보사, 작성일: 2023년 03월 04일.
  22. 이인성online, 전통문화포털.
  23. 이인성online, 전통문화포털.
  24. 김인혜, 「시대가 외면했던 38세 요절 화가… "누가 천재를 쏘았는가?"」, 『조선일보』online, 조선일보사, 작성일: 2023년 03월 04일.
  25. 이인성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6. 이인성online, 대구미술관.
  27. 이인성online, 전통문화포털.
  28. 김인혜, 「시대가 외면했던 38세 요절 화가… "누가 천재를 쏘았는가?"」, 『조선일보』online, 조선일보사, 작성일: 2023년 03월 04일.
  29. 김인혜, 「시대가 외면했던 38세 요절 화가… "누가 천재를 쏘았는가?"」, 『조선일보』online, 조선일보사, 작성일: 2023년 03월 04일.
  30. 이인성online, 전통문화포털.
  31. 김인혜, 「시대가 외면했던 38세 요절 화가… "누가 천재를 쏘았는가?"」, 『조선일보』online, 조선일보사, 작성일: 2023년 03월 04일.
  32. 이인성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33. 김인혜, 「시대가 외면했던 38세 요절 화가… "누가 천재를 쏘았는가?"」, 『조선일보』online, 조선일보사, 작성일: 2023년 03월 04일.
  34. 이인성online, 전통문화포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