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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Korea Human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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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천관우는 해방 이후 조선일보 논설위원, 동아일보 주필, 한국신문편집인협회 부회장 등을 역임한 언론인으로 역사학자이다.<ref> 문창로, 「[https://www-dbpia-co-kr.libproxy.chungbuk.ac.kr/pdf/pdfView.do?nodeId=NODE01165778&width=958 천관우[千寬宇(1925∼1991)]의 사학(史學)과 고대사연구(古代史硏究)]」, 『한국고대사연구(韓國古代史硏究)』53, 2009.</ref> 1925년에 태어나 1991년에 사망했다. 1944년 경성제대에 입학하여 한국사를 전공하였다. 1951년 대한통신 기자로 언론계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여 한국일보와 조선일보, 동아일보의 편집국장과 주필 등을 역임하였다. 1971년 민주수호국민협의회와 1974년 민주회복국민회의의 공동대표로 반독재·민주화운동에 주력하였다.<ref> 문창로, 「[https://www-dbpia-co-kr.libproxy.chungbuk.ac.kr/pdf/pdfView.do?nodeId=NODE01165778&width=958 천관우[千寬宇(1925∼1991)]의 사학(史學)과 고대사연구(古代史硏究)]」, 『한국고대사연구(韓國古代史硏究)』53, 2009.</ref> 유신체제하에서 한국사의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여 고조선과 삼한, 가야를 중심으로 한국고대사 연구에 기여하였다.<ref> 문창로, 「[https://www-dbpia-co-kr.libproxy.chungbuk.ac.kr/pdf/pdfView.do?nodeId=NODE01165778&width=958 천관우[千寬宇(1925∼1991)]의 사학(史學)과 고대사연구(古代史硏究)]」, 『한국고대사연구(韓國古代史硏究)』53, 2009.</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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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5779 천관우 (千寬宇)]』 <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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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1225 한국사상사학회 (韓國思想史學會)]』 <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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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2월 8일 (월) 20:22 판

👩🏻‍🏫본 문서는 서울대학교 "25-2 미디어위키를 활용한 역사 데이터 편찬" 서은총(CBNU2025)이 작성했습니다.




한글명(한자명)
천관우.jpg
출처 : 김성후, 「"언론은 죽지 않으며 죽을수도 없어"... 천관우는 살아있다」, 『한국기자협회』online, 작성일: 2025년 08월 13일.
 
한글명 천관우 한자명 千寬宇 영문명 Cheon Gwan-woo 가나명 이칭 후석(後石)
성별 생년 1925년 몰년 1991년 출신지 충청북도 제천군 청풍면 읍리 전공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학과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천관우는 해방 이후 조선일보 논설위원, 동아일보 주필, 한국신문편집인협회 부회장 등을 역임한 언론인으로 역사학자이다.[1] 1925년에 태어나 1991년에 사망했다. 1944년 경성제대에 입학하여 한국사를 전공하였다. 1951년 대한통신 기자로 언론계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여 한국일보와 조선일보, 동아일보의 편집국장과 주필 등을 역임하였다. 1971년 민주수호국민협의회와 1974년 민주회복국민회의의 공동대표로 반독재·민주화운동에 주력하였다.[2] 유신체제하에서 한국사의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여 고조선과 삼한, 가야를 중심으로 한국고대사 연구에 기여하였다.[3]


생애


출생 및 대학시절

1925년 6월 2일 충청북도 제천군(현 제천시) 청풍면 읍리에서 아버지 천영석인물과 어머니 여흥 민씨 민수홍 사이의 2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이미 5살 때부터 글을 읽고 쓸 줄 알아서 천재로 동네에 소문이 자자했는데, 동아일보에서도 청풍보통학교 3학년 재학 당시 그를 취재하러 왔다고 한다. [4] 1937년 청주공립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였으며, 1944년 경성제대 예과 문과을유(인문계)에 입학하였다. 예과를 거쳐 이듬해 학부에 진입하면서 한국사를 전공했고, 이병도를 비롯한 손진태 · 이인영 · 유홍렬 등에게 직접 지도를 받았다. 1949년 서울대학교기관 문리과대학 사학과를 졸업하였다. 당초 한국사연구에 뜻을 두어 대학졸업논문으로 「반계유형원연구(磻溪柳馨遠硏究)」를 쓰고 사학과의 조수를 지냈다.



언론인으로서의 활동

6·25 전쟁으로 부산에 피난하여, 1951년 대한통신기관(大韓通信) 기자로 일하게 되면서부터 언론계에 투신하였다. 1952년 미국으로 건너가 약 1년간 미네소타대학기관 신문학과에서 수학하였다. 1954년 한국일보 논설위원에 발탁되었고, 1956년부터 약 3년간 조선일보 논설위원 및 편집국장으로 근무함으로써 언론인으로 본격적인 활약을 하였다.[5] 그 뒤 민국일보 편집국장, 서울일일신문 주필을 거쳐 1963년 동아일보기관 편집국장 · 주필로 활동하다가 1968년 『신동아(新東亞)』필화사건사건(筆禍事件)으로 그만두기까지 언론계의 중추적 구실을 하였다. 한국신문편집인협회기관(韓國新聞編輯人協會) 부회장에 선임되어 언론의 자유와 자율을 신장시키는 데 크게 기여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6]


민주화 운동 및 학문적 칩거

3선개헌을 계기로 박정희(朴正熙)정권의 독재정치가 가시화됨에 따라 반독재 · 민주화운동에 주력하였다. 1971년 민주수호국민협의회단체(民主守護國民協議會)의 창립과 동시에 공동대표로 추대되었고, 1974년 민주회복국민회의단체(民主回復國民會議)가 결성되자 공동대표로 피선되어 적극적인 활동을 벌였다.[7] 유신체제(維新體制) 아래 정부기관의 감시와 탄압으로 사회활동이 불가능한 상태에 놓이자, 집에 칩거하며 한국사의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였다. 언론활동을 하는 동안에도 주목되는 연구성과를 발표하여 왔으나, 약 10년간의 칩거생활 중에는 고조선(古朝鮮)과 삼한(三韓), 그리고 가야사(加耶史)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고대사의 연구에 주력해 많은 논문을 발표하였다.[8]


사회 활동 재개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대통령시해사건으로 정치적 여건이 바뀌자 사회활동을 재개하고, 여러 방면에서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우선, 국토통일원 고문으로 위촉되었다가 1981년 민족통일중앙협의회기관 의장의 직임을 맡아 남북통일의 정책방향과 민간운동에 간여했고, 뒤이어 1985년 국정자문위원에 위촉되었다.[9] 또한, 1981년 한국일보 상임고문이 되어 컬럼을 집필하는 등 언론활동을 펼쳤다. 그리고 건국대학교 대우교수, 인하대학교 객원교수로서 한국사를 가르쳤고, 국사편찬위원회 위원, 독립기념관 건립위원회 준비위원, 문화재위원회(현, 문화유산위원회) 위원 및 한국사상사학회단체(韓國思想史學會) 회장으로 학술 · 문화면에서 많은 활동을 하였다.[10]






연구


근세조선사연구서적(近世朝鮮史硏究)

역사학자 천관우가 자신이 발표한 근세 조선사 관계의 연구논문을 모아 엮은 학술서.[11] 저자가 1952년부터 1969년 사이 전문지·논문집 등에 발표했던 근세 조선사 관계의 연구논문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엮은 논저이다. 크게 3부로 나누어졌는데, 제1부는 조선 초기의 군사제도, 제2부는 조선 초기의 토지제도, 제3부는 조선 후기의 실학사상을 다루었다. 즉, 조선 초기의 제도사와 조선 후기의 사상사를 동시에 다루고 있다.[12]


한국사상사학회

1984년 한국사상을 연구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학술단체.[13] 이 학회는 1984년 7월 15일에 태동해 동년 10월 1일에 한국사상사학회창립취지문(韓國思想史學會創立趣旨文)을 창립발기인 일동의 이름으로 발표하였다.

발기인은 천관우(千寬宇)·박성봉(朴性鳳)·안병주(安炳周)·김영태(金煐泰)·이희덕(李熙德)·고익진(高翊晉)·윤사순(尹絲淳)·이장희(李章熙)·최병헌(崔柄憲)·유인희(柳仁熙)·정재호(鄭在晧) 등 58명의 국학연구자들로 구성되었다.[14]

창립취지문에서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이 학회는 우리의 사상사 연구는 지성적(知性的) 좌표를 확인하고, 외래 신사조를 슬기롭게 수용하는 적극적 작업이 되어야 하며, 나아가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이념적 갈등을 근원적으로 해결하는 응답이 될 수 있어야 할 것이라 하였다.





데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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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son: 천관우 Event: 『신동아(新東亞)』필화사건 A isRelatedTo B
Person: 천관우 Institution: 한국신문편집인협회 A isMemberOf B
Person: 천관우 Group: 민주수호국민협의회 A isMemberOf B
Person: 천관우 Group: 민주회복국민회의 A isMemberOf B
Person: 천관우 Institution: 민족통일중앙협의회 A isMemberOf B
Person: 천관우 Group: 한국사상사학회 A isMemberOf B
Book: 근세조선사연구 Person: 천관우 A creator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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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원


문창로, 「천관우[千寬宇(1925∼1991)의 사학(史學)과 고대사연구(古代史硏究)]」, 『한국고대사연구(韓國古代史硏究)』53, 2009.
'글씨 잘 쓰는 천관우(9세), 5세부터 독서 가능해'」, 『동아일보』, 1934.02.17. 06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online, 네이버.
천관우 (千寬宇)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근세조선사연구 (近世朝鮮史硏究)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사상사학회 (韓國思想史學會)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천관우online, 위키백과.






주석


  1. 문창로, 「천관우[千寬宇(1925∼1991)의 사학(史學)과 고대사연구(古代史硏究)]」, 『한국고대사연구(韓國古代史硏究)』53, 2009.
  2. 문창로, 「천관우[千寬宇(1925∼1991)의 사학(史學)과 고대사연구(古代史硏究)]」, 『한국고대사연구(韓國古代史硏究)』53, 2009.
  3. 문창로, 「천관우[千寬宇(1925∼1991)의 사학(史學)과 고대사연구(古代史硏究)]」, 『한국고대사연구(韓國古代史硏究)』53, 2009.
  4. '글씨 잘 쓰는 천관우(9세), 5세부터 독서 가능해'」, 『동아일보』, 1934.02.17. 06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online, 네이버.
  5. 천관우 (千寬宇)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6. 천관우 (千寬宇)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7. 천관우 (千寬宇)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8. 문창로, 「천관우[千寬宇(1925∼1991)의 사학(史學)과 고대사연구(古代史硏究)]」, 『한국고대사연구(韓國古代史硏究)』53, 2009.
  9. 천관우 (千寬宇)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0. 천관우 (千寬宇)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1. 근세조선사연구 (近世朝鮮史硏究)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2. 근세조선사연구 (近世朝鮮史硏究)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3. 한국사상사학회 (韓國思想史學會)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4. 한국사상사학회 (韓國思想史學會)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