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영"의 두 판 사이의 차이

North Korea Humanities

(TripleData)
 
(같은 사용자의 중간 판 하나는 보이지 않습니다)
81번째 줄: 81번째 줄:
 
!style="width:35%; background:#87CEFA; text-align: center; color:navy"|Source (A) !! style="width:35%; background:#87CEFA; text-align: center; color:navy"|Target (B) !! style="width:30%; background:#87CEFA; text-align: center; color:navy"|Relationship
 
!style="width:35%; background:#87CEFA; text-align: center; color:navy"|Source (A) !! style="width:35%; background:#87CEFA; text-align: center; color:navy"|Target (B) !! style="width:30%; background:#87CEFA; text-align: center; color:navy"|Relationship
 
|-
 
|-
| Person: 심완섭 || Person: 심영 || 심완섭 hasSon 심영
+
| Person: 심영 || Person: 박제행 || A master B
 
|-
 
|-
 
| Person: 심영 || Institution: 제2경성고등보통학교 || A graduates B
 
| Person: 심영 || Institution: 제2경성고등보통학교 || A graduates B
87번째 줄: 87번째 줄:
 
| Person: 심영 || Institution: 평양연극영화대학 || A worksAt B
 
| Person: 심영 || Institution: 평양연극영화대학 || A worksAt B
 
|-
 
|-
| Person: 심영 || Group: 토월회 || 심영 isMemberOf 토월회
+
| Person: 심영 || Group: 혁명극장 || A isMemberOf B
 
|-
 
|-
| Book: ○○○ || Person: || A creator B
+
| Person: 심영 || Group: 토월회 || A isMemberOf B
 
|-
 
|-
 +
 
|}
 
|}
 
<br/><br/>
 
<br/><br/>

2025년 12월 6일 (토) 01:34 기준 최신판

👩🏻‍🏫본 문서는 서울대학교 "25-2 미디어위키를 활용한 역사 데이터 편찬" 수강생(박대성(CNU2025))이 작성했습니다.




심영(沈影)
[[file:심영 심영.jpg|270px|thumb|center]]
출처 : 위키백과
 
한글명 심영 한자명 沈影 영문명 Sim Yeong 가나명 シム・ヨン 이칭 심재설 (沈載卨) (본명)
성별 생년 1911년 몰년 1971년 출신지 강원도 철원군 전공 경성제2고등보통학교 졸업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일제강점기에는 친일반민족행위자 광복 후에는 공산주의자 행보를 보이다가 북한으로 넘어간 배우이다.


생애


출생

1911년 철원군수로 재직하고 있던 아버지 심완섭의 아들로 철원에서 태어났다. 이후 성장은 서울에서 했으며 제2경성고등보통학교(現경복고등학교)를 다녔다. 그는 스스로 고향은 철원이 아닌 서울로 밝혔고 원적도 경성이라고 한다.


유년시절

학교의 승인없이 연극 활동과 사회 활동을 한 이유로 일본인 학생지도 교사에 의해 퇴학을 당했다. 퇴학을 당하고 박제행으로 부터 "배우만 되면 출세한다"는 자극을 받게 되어 배우의 길로 가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다시 복학하여 1930년에 졸업했다.또 다른 기록에서는 배제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학비난으로 인한 퇴학으로 토월회 연구생으로 입단해 배우로 활동하게 되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1929년 11월 14일 부터 16일까지 조선극장에서 토월회는 <<간난이의 설움>>을 공연했는데 심영은 이 작품으로 본격적인 무대에서의 데뷔를 하게되었다. 당시 평을 보면 대단히 긍정적인 평가를 받으며 성공을 했다. 1930년 1월 12일부터 16일까지 조선극장에서 공연된 창작극 <<남경의 거리>>에서 최초로 주인공을 맡게 되었다. 1933년 4월에 개봉한 <아름다운 희생>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영화로도 진출했다. 일제 시대의 지원병을 독려하는 국책 영화 <<그대의 나>>에 출연하고 일제의 정책을 장려하는 글도 발표하는 등 친일행적을 펼치기도 했다. 1939년에는 극단 고협의 대표로도 활동했다.


광복 이후

해방 이후 심영은 박제행 박영호 등 여러 연극계 사람들과 '혁명극장'을 창설하여 연극을 펼쳤다. 1946년 3월 조선연극동맹이 주관한 3.1기념 연극대회에 출연하던 중 권총을 가진 괴한에게 피습을 당하기도 했다. 괴한이 누구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후에 김두한이 1969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쐈다고 주장했다. 1947~1948년 사이에 좌익에 대한 탄압을 피해 월북하였다.


말년

월북 후 북한에서 첫 예술영화인 <내고향>에 출연했다. 이후 <향토를 지키는 사람들>, <정찰병>, <벗들이여 우리와 함께 가자>, <두만강> 등 다양한 북한의 예술영화에 출연했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예술영화촬영소 연기과장, 조선영화인동맹 위원장을 지니고 평양연극영화대학에서 교수직을 했다. 북한은 그의 공로를 인정을 하고 공훈배우칭호를 수여했다. 1971년 10월 24일 그는 지병으로 사망했다.





연구


커리어

1929년 연극 <간난이의 설움> 출연 이후 <춘향전>에서는 방자 역할로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에서는> 주인공인 홍도의 남편 역할을 맡았다. 1936년에 <춘향전>은 삼남 지방 순회공연을 다녀왔다. 영화로는 1932년 대경영화양행에서 제작한 <방아타령>에 참여한 이후로 1935년 금강시네마에서 제작한 <아름다운 희성> 1936년 청도영와사에서 제작한 <바다여 말하라>에서는 주연을 같은 해에 금강시네마에서 제작한 <은하에 흐르는 정열>에 참여했다. 1941년에 발매된 가수 박향림의 앨범 <걸작집>에 수록된 노래 메들리 〈코스모스 탄식, 쓸쓸한 여관방, 흐르는 남끝동>, <요즈음 다방, 맹서 한 토막, 청춘이별> 에서 대사 파트를 담당하기도 했다.


친일활동과 좌익활동

친일활동으로는 1941년 학도병을 주제로 한 일본영화 <그대와 나>에 출연한 이후로 1943년 친일 선전 영화인 <망루의 결사대>에서도 출연했다. 이후 몇몇 관변 영화에 참여하고 1943년 제 2회 연극경연대회에서 일어극 부문 개인 연기상을 수상했다. 이런 행적으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연극/영화 부문에 선정되었다가 기각되었다. 광복 이후 같은 혁명극장의 일원인 좌익 성향의 작가 박영호의 <님>의 공연에도 출연했다. 1947년에는 순회공연 중 대구에서 피습을 당하고 파업 선동 혐의로 경찰에 피검되는 등 여러 탄압이 심해지자 월북을 결심했다.





데이터


TripleData

Source (A) Target (B) Relationship
Person: 심영 Person: 박제행 A master B
Person: 심영 Institution: 제2경성고등보통학교 A graduates B
Person: 심영 Institution: 평양연극영화대학 A worksAt B
Person: 심영 Group: 혁명극장 A isMemberOf B
Person: 심영 Group: 토월회 A isMemberOf B



Timeline


  • [▶Time라인스프레드시트URL삽입 Timeline Google Spreadsheet]

▶Timeline임베딩

Network Graph






참고자원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