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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Korea Humanities

(불우한 초년)
(참고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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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우한 초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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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1903년 6월 9일 충청남도 공주에서 태어났다.<ref>『[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6231 이철 (李哲)]』<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 그는 19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친척 아저씨뻘 되는 이인규(李寅奎){{TagPerson|}}의 양자가 되었으며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연희전문학교 상과에 진학한다..<ref>『[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B2%A0_(1903%EB%85%84) 이철(1903년)]』<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위키백과.</ref> 가정 형편이 어려웠으나 양아버지 이인규의 전폭적인 후원 하에 연희전문학교 상과를 다니다가 윤심덕과 만나 친해졌고, 이어 나중에 자신의 매부가 된 김성흠을 만났다.<ref>『[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B2%A0_(1903%EB%85%84) 이철(1903년)]』<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위키백과.</ref>  연희전문을 중퇴한 뒤 악기를 다루는 취미를 살려 1924년부터는 영화관에서 색소폰과 트럼펫을 연주하는 악사로 근무했다.<ref>『[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B2%A0_(1903%EB%85%84) 이철(1903년)]』<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위키백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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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1903년 6월 9일 충청남도 공주에서 태어났다.<ref>『[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6231 이철 (李哲)]』<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 그는 19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친척 아저씨뻘 되는 이인규(李寅奎){{TagPerson|}}의 양자가 되었으며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연희전문학교 상과{{TagInstitution|}}에 진학한다..<ref>『[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B2%A0_(1903%EB%85%84) 이철(1903년)]』<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위키백과.</ref> 가정 형편이 어려웠으나 양아버지 이인규의 전폭적인 후원 하에 연희전문학교 상과를 다니다가 윤심덕과 만나 친해졌고, 이어 나중에 자신의 매부가 된 김성흠{{TagPerson|}}을 만났다.<ref>『[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B2%A0_(1903%EB%85%84) 이철(1903년)]』<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위키백과.</ref>  연희전문을 중퇴한 뒤 악기를 다루는 취미를 살려 1924년부터는 영화관에서 색소폰과 트럼펫을 연주하는 악사로 근무했다.<ref>『[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B2%A0_(1903%EB%85%84) 이철(1903년)]』<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위키백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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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륜과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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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이철은 연희전문학교 입학 직전에 같은 교회 신도로 현송자를 처음 만났다. <ref>『[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B2%A0_(1903%EB%85%84) 이철(1903년)]』<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위키백과.</ref> 현송자는 대한제국 고위 관료의 딸이자, 마지막 황제 순종의 황후를 배출한 사회적 영향력이 상당했던 윤씨 일족의 부인이었고, 빼어난 미모와 일본 유학 경험을 바탕으로 한 당시 사교계 유명 인사이기도 했다.<ref>『[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B2%A0_(1903%EB%85%84) 이철(1903년)]』<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위키백과.</ref> 두 사람의 은밀한 사랑은 1930년 들어 결국 세간에 알려지고 말았고, 이철과 현송자는 모두 교회와 학교에서 쫓겨나는 일생일대의 위기를 맞았다. <ref>『[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B2%A0_(1903%EB%85%84) 이철(1903년)]』<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위키백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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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현송자는 트로이카 라는 술집을 운영하다가 이철과 재혼하며 새 남편이 된 이철의 음악 사업을 적극 도왔다.<ref>『[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B2%A0_(1903%EB%85%84) 이철(1903년)]』<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위키백과.</ref>1933년 현송자의 도움으로 일본 데이지꾸(帝蓄)레코드사와 기술제휴를 맺고 오케이(OK)축음기상회 경성임시영업소 소장(지점장)을 차렸다.<ref>『[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6231 이철 (李哲)]』<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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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현송자는 트로이카 라는 술집을 운영하다가 이철과 재혼{{TagEvent|}}하며 새 남편이 된 이철의 음악 사업을 적극 도왔다.<ref>『[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B2%A0_(1903%EB%85%84) 이철(1903년)]』<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위키백과.</ref>1933년 현송자의 도움으로 일본 데이지꾸(帝蓄)레코드사{{TagInstitution|}}와 기술제휴를 맺고 오케이(OK)축음기상회 경성임시영업소{{TagInstitution|}} 소장(지점장)을 차렸다.<ref>『[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6231 이철 (李哲)]』<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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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사업과 생애 후반'''===
 
==='''음반사업과 생애 후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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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오케이축음기상회의 이름을 오케이레코드사로 바꾸었다.<ref>『[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6231 이철 (李哲)]』<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 음반은 일본에 가서 취입해야 하였지만, 음반기획과 발매를 도맡아 조선인 작곡가와 작사가를 발굴하고 고복수(高福壽)와 이난영(李蘭影)을 스카우트하는 등 사업수완을 보였다.<ref>『[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6231 이철 (李哲)]』<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  1932년 무렵부터 우리 음반을 내기 시작했는데, 1500으로 시작되는 번호로 400여 종, 12000으로 시작되는 번호로 400여 종, 20000으로 시작되는 번호로 200여 종 등 도합 1000여 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ref> 이동순, 「[https://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nNewsNumb=200307100072 그는 일제시대 최고의 조선 대중예술 흥행사이자 음반기획 제작자였다]」, <html><online style="color:purple">『월간조선』<sup>online</sup></online></html>, 조선일보, 작성일: 2003년 7월.</ref> 이철은 음반 발매 뿐 아니라 전속 예술인들을 공연에 활용할 수 있도록 조선악극단을 설립, 운영하여 한국 대중예술사 초창기에 연예 매니지먼트 측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ref>『[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B2%A0_(1903%EB%85%84) 이철(1903년)]』<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위키백과.</ref> 그러나 레코드 사업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오케이연주단 때문에 적자가 누적되며 본사 역할을 하던 데이지꾸(帝蓄)레코드사와 관계에 변화가 생겨 1937년 오케이레코드사의 명칭을 제국축음기주식회사 경성영업소로 바꾸고, 자신은 오케이레코드사 운영자 자리에서 물러났다.<ref>『[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6231 이철 (李哲)]』<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 사임 후 오케이레코드사 운영에 어느 정도 관여하다가 1938년 1월 조선연예주식회사를 설립한 후 공연기획에 주력하였다.<ref>『[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6231 이철 (李哲)]』<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  일제 강점기 말기에 태평양 전쟁 지원을 위해 가요계가 전시가요를 부르고 공연하면서 친일 활동을 했을 때, 오케레코드의 인기 가수들이 포함된 이철의 악단도 조선과 만주, 상하이 등지를 순회하며 인기를 끌었다.<ref>『[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B2%A0_(1903%EB%85%84) 이철(1903년)]』<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위키백과.</ref>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음악 부문에 포함되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ref>『[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B2%A0_(1903%EB%85%84) 이철(1903년)]』<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위키백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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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오케이축음기상회의 이름을 오케이레코드사로 바꾸었다.<ref>『[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6231 이철 (李哲)]』<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 음반은 일본에 가서 취입해야 하였지만, 음반기획과 발매를 도맡아 조선인 작곡가와 작사가를 발굴하고 고복수(高福壽)와 이난영(李蘭影)을 스카우트하는 등 사업수완을 보였다.<ref>『[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6231 이철 (李哲)]』<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  1932년 무렵부터 우리 음반{{TagWork|}}을 내기 시작했는데, 1500으로 시작되는 번호로 400여 종, 12000으로 시작되는 번호로 400여 종, 20000으로 시작되는 번호로 200여 종 등 도합 1000여 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ref> 이동순, 「[https://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nNewsNumb=200307100072 그는 일제시대 최고의 조선 대중예술 흥행사이자 음반기획 제작자였다]」, <html><online style="color:purple">『월간조선』<sup>online</sup></online></html>, 조선일보, 작성일: 2003년 7월.</ref> 이철은 음반 발매 뿐 아니라 전속 예술인들을 공연에 활용할 수 있도록 조선악극단{{TagGroup|}}을 설립, 운영하여 한국 대중예술사 초창기에 연예 매니지먼트 측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ref>『[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B2%A0_(1903%EB%85%84) 이철(1903년)]』<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위키백과.</ref> 그러나 레코드 사업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오케이연주단 때문에 적자가 누적되며 본사 역할을 하던 데이지꾸(帝蓄)레코드사와 관계에 변화가 생겨 1937년 오케이레코드사의 명칭을 제국축음기주식회사 경성영업소로 바꾸고, 자신은 오케이레코드사 운영자 자리에서 물러났다.<ref>『[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6231 이철 (李哲)]』<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 사임 후 오케이레코드사 운영에 어느 정도 관여하다가 1938년 1월 조선연예주식회사{{TagInstitution|}}를 설립한 후 공연기획에 주력하였다.<ref>『[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6231 이철 (李哲)]』<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  일제 강점기 말기에 태평양 전쟁 지원을 위해 가요계가 전시가요를 부르고 공연하면서 친일 활동을 했을 때, 오케레코드의 인기 가수들이 포함된 이철의 악단도 조선과 만주, 상하이 등지를 순회하며 인기를 끌었다.<ref>『[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B2%A0_(1903%EB%85%84) 이철(1903년)]』<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위키백과.</ref>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음악 부문에 포함되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ref>『[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B2%A0_(1903%EB%85%84) 이철(1903년)]』<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위키백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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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1938년 1월 조선연예주식회사를 설립한 후 공연기획에 주력하였다. <ref>『[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6231 이철 (李哲)]』<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오케이연주단을 확대하여 오케이그랜드쇼를 조직하였고 1939년 3월 일본 공연부터 조선악극단이라고 개명하였다. <ref>『[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6231 이철 (李哲)]』<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
 
|내용= 1938년 1월 조선연예주식회사를 설립한 후 공연기획에 주력하였다. <ref>『[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6231 이철 (李哲)]』<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오케이연주단을 확대하여 오케이그랜드쇼를 조직하였고 1939년 3월 일본 공연부터 조선악극단이라고 개명하였다. <ref>『[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6231 이철 (李哲)]』<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
 
1940년 4월 매일신보사 북경(뻬이징) 지국 초청으로 “반도애국호(半島愛國號)” 자금모집 공연과 “북지황군(北支皇軍)” 위문공연차 조선악극단원을 데리고 베이징 · 제남(지난) · 서주(수저우) 등지를 순회하는 공연을 총기획하고 연출하였다. <ref>『[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6231 이철 (李哲)]』<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 이를 계기로 중국 공연을 하면서 조선악극단은 조선 · 일본 · 만주 · 중국을 넘나드는 대형 공연단체로 성장하였다. <ref>『[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6231 이철 (李哲)]』<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
 
1940년 4월 매일신보사 북경(뻬이징) 지국 초청으로 “반도애국호(半島愛國號)” 자금모집 공연과 “북지황군(北支皇軍)” 위문공연차 조선악극단원을 데리고 베이징 · 제남(지난) · 서주(수저우) 등지를 순회하는 공연을 총기획하고 연출하였다. <ref>『[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6231 이철 (李哲)]』<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 이를 계기로 중국 공연을 하면서 조선악극단은 조선 · 일본 · 만주 · 중국을 넘나드는 대형 공연단체로 성장하였다. <ref>『[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6231 이철 (李哲)]』<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
1940년 9월 조선악극단과 별개로 대중예술 교육기관인 오케음악무용연구소를 설립하였다. <ref>『[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6231 이철 (李哲)]』<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 이 연구소는 3년제로 일본에서 활약하던 무용가 정지수(鄭志樹)를 초청하고, 김민자(金敏子) · 김형래(金炯來) 등 사범학교 교사들을 초빙하여 노래와 춤 · 연기 등 연예인을 양성하였는데 대표적으로 배출된 연예인으로 김백희(金白姬) · 백설희(白雪姬) · 주리(朱莉) 등이 있다.<ref>『[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6231 이철 (李哲)]』<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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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9월 조선악극단과 별개로 대중예술 교육기관인 오케음악무용연구소{{TagInstitution|}}를 설립하였다. <ref>『[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6231 이철 (李哲)]』<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 이 연구소는 3년제로 일본에서 활약하던 무용가 정지수(鄭志樹)를 초청하고, 김민자(金敏子) · 김형래(金炯來) 등 사범학교 교사들을 초빙하여 노래와 춤 · 연기 등 연예인을 양성하였는데 대표적으로 배출된 연예인으로 김백희(金白姬) · 백설희(白雪姬) · 주리(朱莉) 등이 있다.<ref>『[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6231 이철 (李哲)]』<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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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erson: 홍길동 || Person: 홍아무개 || A hasSon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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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erson: 이인규 || Person: 이철 || A hasSon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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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erson: 홍길동 || Institution: ○○고등보통학교 || A graduates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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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erson: 현송자 || Person: 이철 || A hasSpouse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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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erson: 홍길동 || Institution: ○○대학교 || A worksAt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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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erson: 현송자 || Person: 윤씨 일족 || A hasExSpouse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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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erson: 홍길동 || Group: ○○학회 || A isMemberOf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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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erson: 이철 || Institution: 연희전문학교 상과 || A takesCourseAt B (중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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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ook: ○○○ || Person: 홍길동 || A creator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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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erson: 이철 || Institution: 오케이(OK)축음기상회 경성임시영업소 || A worksAt B (소장)(193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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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nstitution: 오케이(OK)축음기상회 경성임시영업소 || Institution: 일본 데이지꾸(帝蓄)레코드사 || A isAdjunctTo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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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nstitution: 오케이(OK)축음기상회 경성임시영업소 || Institution: 오케이레코드사 || A isPredecessorOf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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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erson: 이철 || Group: 조선악극단 || A isMemberOf B (대표)(193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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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erson: 이철 || Institution: 조선연예주식회사 || A worksAt B (193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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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erson: 이철 || Institution: 오케음악무용연구소 || A worksAt B (194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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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line'''===
 
==='''Time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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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라인스프레드시트URL삽입 Timeline Google Spreadshe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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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docs.google.com/spreadsheets/d/1sdlEU9bEx4aaKpb8Xu6acyKOsi5L5veP2i7fFDqjZvA/edit?gid=0#gid=0 Timeline Google Spreadsheet]
▶Timeline임베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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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원'''==
 
=='''참고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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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6231 이철 (李哲)]』<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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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B2%A0_(1903%EB%85%84) 이철(1903년)]』<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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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순, 「[https://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nNewsNumb=200307100072 그는 일제시대 최고의 조선 대중예술 흥행사이자 음반기획 제작자였다]」, <html><online style="color:purple">『월간조선』<sup>online</sup></online></html>, 조선일보, 작성일: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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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2월 5일 (금) 16:22 기준 최신판

👩🏻‍🏫본 문서는 서울대학교 "25-2 미디어위키를 활용한 역사 데이터 편찬" 수강생(이돈빈(SNU2025))이 작성했습니다.




이철(李哲)
이철.JPG
출처 : 황현수, 「'저고리시스터'를 만든 이철」, 『한국일보』online, 작성일: 2024년 6월 5일.
 
한글명 이철 한자명 李哲 영문명 Lee Cheol 가나명 이칭 이억길(李億吉)
성별 남성 생년 1903년 몰년 1944년 출신지 충청남도 공주 전공 상과, 악기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일제강점기의 기업인, 음악가, 작사가, 작곡가, 색소포니스트 겸 트럼페터로, 한국 음반사업과 연예사업의 선구자이다.[1] 1933년 현송자의 도움으로 일본 데이지꾸레코드사와 기술제휴를 맺고 오케이(OK)축음기상회 경성임시영업소 소장(지점장)을 차렸다.[2] 1941년 전후해서 조선악극단, 오케이회사 사장으로 취임하였고, 1943년 신생극단 등을 조직해 영향력 있는 연예사업가가 되었다. [3]


생애


불우한 초년

1903년 6월 9일 충청남도 공주에서 태어났다.[4] 그는 19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친척 아저씨뻘 되는 이인규(李寅奎)인물의 양자가 되었으며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연희전문학교 상과기관에 진학한다..[5] 가정 형편이 어려웠으나 양아버지 이인규의 전폭적인 후원 하에 연희전문학교 상과를 다니다가 윤심덕과 만나 친해졌고, 이어 나중에 자신의 매부가 된 김성흠인물을 만났다.[6] 연희전문을 중퇴한 뒤 악기를 다루는 취미를 살려 1924년부터는 영화관에서 색소폰과 트럼펫을 연주하는 악사로 근무했다.[7]


불륜과 기회

이철은 연희전문학교기관 입학 직전에 같은 교회단체 신도로 현송자인물를 처음 만났다. [8] 현송자는 대한제국 고위 관료의 딸이자, 마지막 황제 순종의 황후를 배출한 사회적 영향력이 상당했던 윤씨 일족인물의 부인이었고, 빼어난 미모와 일본 유학 경험을 바탕으로 한 당시 사교계 유명 인사이기도 했다.[9] 두 사람의 은밀한 사랑은 1930년 들어 결국 세간에 알려지고 말았고, 이철과 현송자는 모두 교회와 학교에서 쫓겨나는 일생일대의 위기사건를 맞았다. [10] 그러나 현송자는 트로이카 라는 술집을 운영하다가 이철과 재혼사건하며 새 남편이 된 이철의 음악 사업을 적극 도왔다.[11]1933년 현송자의 도움으로 일본 데이지꾸(帝蓄)레코드사기관와 기술제휴를 맺고 오케이(OK)축음기상회 경성임시영업소기관 소장(지점장)을 차렸다.[12]


음반사업과 생애 후반

오케이축음기상회의 이름을 오케이레코드사로 바꾸었다.[13] 음반은 일본에 가서 취입해야 하였지만, 음반기획과 발매를 도맡아 조선인 작곡가와 작사가를 발굴하고 고복수(高福壽)와 이난영(李蘭影)을 스카우트하는 등 사업수완을 보였다.[14] 1932년 무렵부터 우리 음반작품을 내기 시작했는데, 1500으로 시작되는 번호로 400여 종, 12000으로 시작되는 번호로 400여 종, 20000으로 시작되는 번호로 200여 종 등 도합 1000여 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15] 이철은 음반 발매 뿐 아니라 전속 예술인들을 공연에 활용할 수 있도록 조선악극단단체을 설립, 운영하여 한국 대중예술사 초창기에 연예 매니지먼트 측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16] 그러나 레코드 사업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오케이연주단 때문에 적자가 누적되며 본사 역할을 하던 데이지꾸(帝蓄)레코드사와 관계에 변화가 생겨 1937년 오케이레코드사의 명칭을 제국축음기주식회사 경성영업소로 바꾸고, 자신은 오케이레코드사 운영자 자리에서 물러났다.[17] 사임 후 오케이레코드사 운영에 어느 정도 관여하다가 1938년 1월 조선연예주식회사기관를 설립한 후 공연기획에 주력하였다.[18] 일제 강점기 말기에 태평양 전쟁 지원을 위해 가요계가 전시가요를 부르고 공연하면서 친일 활동을 했을 때, 오케레코드의 인기 가수들이 포함된 이철의 악단도 조선과 만주, 상하이 등지를 순회하며 인기를 끌었다.[19]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음악 부문에 포함되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20]





연구


공연기획자로서의 이력

1938년 1월 조선연예주식회사를 설립한 후 공연기획에 주력하였다. [21]오케이연주단을 확대하여 오케이그랜드쇼를 조직하였고 1939년 3월 일본 공연부터 조선악극단이라고 개명하였다. [22]

1940년 4월 매일신보사 북경(뻬이징) 지국 초청으로 “반도애국호(半島愛國號)” 자금모집 공연과 “북지황군(北支皇軍)” 위문공연차 조선악극단원을 데리고 베이징 · 제남(지난) · 서주(수저우) 등지를 순회하는 공연을 총기획하고 연출하였다. [23] 이를 계기로 중국 공연을 하면서 조선악극단은 조선 · 일본 · 만주 · 중국을 넘나드는 대형 공연단체로 성장하였다. [24]

1940년 9월 조선악극단과 별개로 대중예술 교육기관인 오케음악무용연구소기관를 설립하였다. [25] 이 연구소는 3년제로 일본에서 활약하던 무용가 정지수(鄭志樹)를 초청하고, 김민자(金敏子) · 김형래(金炯來) 등 사범학교 교사들을 초빙하여 노래와 춤 · 연기 등 연예인을 양성하였는데 대표적으로 배출된 연예인으로 김백희(金白姬) · 백설희(白雪姬) · 주리(朱莉) 등이 있다.[26]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불린 이유

1941년 1월 26일 조선총독부의 통제를 받는 조선연예협회 결성식에서 회장으로 추대되었고, 같은 달 29일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에서 홍난파 · 박경호 등과 함께 문화위원으로 위촉되었다.[27] 2월 매일신보사 주최로 근로봉사문화인부대를 조직할 때 조선연예협회 대표자로 2월 8일부터 9일까지 부여신궁 조영공사(造營工事)에 참석하였고, 3월 경성 금천대(金千代)회관에서 열린 ‘8개 단체 간부는 말함-새로운 문화단체의 활동’ 좌담회에서 국어(일본어) 보급을 위해 국어극(일본극)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28] 5월 12일부터 16일까지 경성부민관에서 상연한 ‘내선일체’를 주제로 하는 무용극 「부여회상곡」을 총기획하였다. [29]이 무용극은 국민총력조선연맹이 주최하고 조선총독부가 후원한 것으로 당시 조선총독이었던 미나미 지로(南次郎)가 직접 휘호를 쓰고, 2만 2800원이라는 큰 돈이 지출된 거대 공연으로 일제의 전폭적 지지를 받은 공연이었다. [30] 1941년 9월 18일에는 만주사변 10주년 기념으로 ‘임전봉사대’ 복장을 하고 연예협회 회장으로 영화(대표 이서구), 연극(대표 안종화) 등 2개 협회장 및 회원 100여명과 조선신궁을 참배하고 본정(本町) · 종로 등지에서 ‘두채권(豆債券)’을 판매하였으며, 같은 달인 9월 조선임전보국단을 조직할 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31] 10월 매일신보사가 주최하고 조선연예협회와 조선악극단이 후원해 조직한 재선부대연예위문단의 공연기획을 하고 전국에 있는 군부대와 육군병원을 방문해 위문공연하였다. [32]1942년 8월 조선연예협회가 조선연극문화협회로 통합되면서 이동극단 제2대 대표로 올라 농 · 산 · 어촌 및 광산지대를 순회하면서 일본군 사기진작과 전력증강에 기여하는 공연활동을 지휘하였다.[33] 7월 경성부민관에서 열린 조선악극단의 공연에서 명랑극 「가미가제(神風)」를 총지휘하였고, 9월에는 경성 동양극장에서 군국시(軍國詩) 작품인 「장군병에 눈물있어」를 지휘하고 이외에도 「아편의 항구」 등의 다수의 공연을 총지휘하는 등 악극단 공연의 전성기를 구가하였다.[34]





데이터


TripleData

Source (A) Target (B) Relationship
Person: 이인규 Person: 이철 A hasSon B
Person: 현송자 Person: 이철 A hasSpouse B
Person: 현송자 Person: 윤씨 일족 A hasExSpouse B
Person: 이철 Institution: 연희전문학교 상과 A takesCourseAt B (중퇴)
Person: 이철 Institution: 오케이(OK)축음기상회 경성임시영업소 A worksAt B (소장)(1933년)
Institution: 오케이(OK)축음기상회 경성임시영업소 Institution: 일본 데이지꾸(帝蓄)레코드사 A isAdjunctTo B
Institution: 오케이(OK)축음기상회 경성임시영업소 Institution: 오케이레코드사 A isPredecessorOf B
Person: 이철 Group: 조선악극단 A isMemberOf B (대표)(1932년)
Person: 이철 Institution: 조선연예주식회사 A worksAt B (1938년)
Person: 이철 Institution: 오케음악무용연구소 A worksAt B (1940년)



Timeline




Network Graph






참고자원


이철 (李哲)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철(1903년)online, 위키백과

이동순, 「그는 일제시대 최고의 조선 대중예술 흥행사이자 음반기획 제작자였다」, 『월간조선』online, 조선일보, 작성일: 2003년 7월






주석


  1. 이철(1903년)online, 위키백과.
  2. 이철 (李哲)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3. 이철 (李哲)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4. 이철 (李哲)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5. 이철(1903년)online, 위키백과.
  6. 이철(1903년)online, 위키백과.
  7. 이철(1903년)online, 위키백과.
  8. 이철(1903년)online, 위키백과.
  9. 이철(1903년)online, 위키백과.
  10. 이철(1903년)online, 위키백과.
  11. 이철(1903년)online, 위키백과.
  12. 이철 (李哲)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3. 이철 (李哲)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4. 이철 (李哲)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5. 이동순, 「그는 일제시대 최고의 조선 대중예술 흥행사이자 음반기획 제작자였다」, 『월간조선』online, 조선일보, 작성일: 2003년 7월.
  16. 이철(1903년)online, 위키백과.
  17. 이철 (李哲)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8. 이철 (李哲)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 이철(1903년)online, 위키백과.
  20. 이철(1903년)online, 위키백과.
  21. 이철 (李哲)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2. 이철 (李哲)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3. 이철 (李哲)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4. 이철 (李哲)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5. 이철 (李哲)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6. 이철 (李哲)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7. 이철 (李哲)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8. 이철 (李哲)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9. 이철 (李哲)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30. 이철 (李哲)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31. 이철 (李哲)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32. 이철 (李哲)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33. 이철 (李哲)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34. 이철 (李哲)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