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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Korea Humanities

(출생 및 어린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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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윤대원,"[https://search.i815.or.kr/dictionary/detail.do?searchWord=&reSearchWord=&searchType=all&index=1&id=706 이유필(李裕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독립운동인명사전』<sup>online</sup></online></html>, 독립기념관.
 
|대표명= 이유필(李裕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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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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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평안도 의주목 주내방 서문동
 
|출신지= 평안도 의주목 주내방 서문동
|전공= 경성법학전문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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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 법학강습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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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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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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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1885년 평안북도 의주에서 태어나 법률강습소를 졸업한 후 평생을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07년 {{TagGroup|신민회}}에 참여한 후 1912년 {{TagEvent|105인 사건(百五人事件)}}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고, 1919년 {{TagEvent|3.1운동}}때 독립만세 시위를 주도하다가 상해로 망명하였다. <ref>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5441 이유필(李裕弼)]<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 같은 해 4월 {{TagInstitution|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해에 수립될 때 내무부비서국장을 역임하였다. <ref>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5441 이유필(李裕弼)]<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 1922년 10월에는 {{TagInstitution|한국노병회}}를 조직하여 이사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1926년 임시정부 국무원 겸 재무장이 되었고, 1932년에는 {{TagEvent|윤봉길 의거}}의 주모자로 잡혀 3년형을 선고받고 만기 출옥하였다.<ref>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5441 이유필(李裕弼)]<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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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1885년 평안북도 의주에서 태어나 법률강습소를 졸업한 후 평생을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07년 신민회에 참여한 후 1911년 안악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고, 1919년 3.1운동 때 독립만세 시위를 주도하다가 상해로 망명하였다.<ref> 이현희,"[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5441 이유필(李裕弼)]",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같은 해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해에 수립될 때 내무부비서국장을 역임하였다.<ref> 이현희,"[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5441 이유필(李裕弼)]"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1922년 10월에는 한국노병회를 조직하여 이사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1926년 임시정부 국무원 겸 재무장이 되었고, 1932년에는 윤봉길 의거의 주모자로 잡혀 3년형을 선고받고 만기 출옥하였다.<ref> 이현희,"[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5441 이유필(李裕弼)]",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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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및 어린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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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1885년 11월 28일 평안도 의주목 주내방 서문동(현 평안북도 의주군 의주읍) 아버지 이계초(李啓初)(혹은 이기초(李基初))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ref> [https://namu.wiki/w/%EC%9D%B4%EC%9C%A0%ED%95%84 이유필(李裕弼)]<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나무위키.</ref> 본관은 경주이며, 어려서 한학을 배웠고 1905년 을사늑약을 계기로 서울에 올라와 신학문을 익혔다. <ref> [https://search.i815.or.kr/dictionary/detail.do?searchWord=&reSearchWord=&searchType=all&index=1&id=706 이유필(李裕弼)]<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독립기념관.</ref> 이후 1906년 의주에 의주보민회를 창설하고, 대한자강회 의주지회 회원이 되어 계몽운동에 나섰다. <ref> [https://search.i815.or.kr/dictionary/detail.do?searchWord=&reSearchWord=&searchType=all&index=1&id=706 이유필(李裕弼)]<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독립기념관.</ref> 그러는 한편 서울에 올라와 사립 학교인 보광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배우고 경성법학전문학교의 전신인 법학강습소에서 법률을 공부하여 1908년 4월에는 보광학교를, 같은 해 7월에는 법률강습소를 졸업하였다. <ref> [https://search.i815.or.kr/dictionary/detail.do?searchWord=&reSearchWord=&searchType=all&index=1&id=706 이유필(李裕弼)]<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독립기념관.</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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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1885년 11월 28일 평안도 의주목 주내방 서문동(현 평안북도 의주군 의주읍) 아버지 {{TagPerson|이계초(李啓初)(혹은 이기초(李基初))}}의 장남으로 태어났다.<ref> "[https://namu.wiki/w/%EC%9D%B4%EC%9C%A0%ED%95%84 이유필(李裕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나무위키』<sup>online</sup></online></html>,나무위키.</ref> 본관은 경주이며, 어려서 한학을 배웠고 1905년 을사늑약을 계기로 서울에 올라와 신학문을 익혔다.<ref> 윤대원,"[https://search.i815.or.kr/dictionary/detail.do?searchWord=&reSearchWord=&searchType=all&index=1&id=706 이유필(李裕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독립운동인명사전』<sup>online</sup></online></html>, 독립기념관.</ref> 이후 1906년 의주에 의주보민회를 창설하고, 대한자강회 의주지회 회원이 되어 계몽운동에 나섰다.<ref> 윤대원,"[https://search.i815.or.kr/dictionary/detail.do?searchWord=&reSearchWord=&searchType=all&index=1&id=706 이유필(李裕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독립운동인명사전』<sup>online</sup></online></html>, 독립기념관.</ref> 그러는 한편 서울에 올라와 사립 학교인 보광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배우고 {{TagInstitution|법학강습소}}에서 법률을 공부하여 1908년 4월에는 {{TagInstitution|보광학교}}를, 같은 해 7월에는 {{TagInstitution|법학강습소}}를 졸업하였다.<ref> 윤대원,"[https://search.i815.or.kr/dictionary/detail.do?searchWord=&reSearchWord=&searchType=all&index=1&id=706 이유필(李裕弼)]",<html><online style="color:purple">『독립운동인명사전』<sup>online</sup></online></html>, 독립기념관.</ref>  다만 흥사단의 자료에 따르면 1917년에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고 하지만<ref>"[https://www.yka.or.kr/html/info/pds.asp?skey=&sword=&category=&size=10&page=20&no=17896 [웹진]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활동한 흥사단 인물 5_이유필]",자료실,<html><online style="color:purple">『흥사단』<sup>online</sup></online></html>,흥사단.</ref>, 1922년 법관양성소에서 경성법학전문학교로 개편되었기 때문에 독립기념관의 자료가 적절한 것으로 판단하여 법학강습소 졸업으로 표기한다.<ref> 이원호,"[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2561 경성법학전문학교(京城法學專門學校)]"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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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 - 신민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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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 - {{TagGroup|신민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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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상자|
|내용= 이유필은 1907년 안창호의 주도로 만들어진 항일단체인 {{TagGroup|신민회}}에 참여하였고, 1910년 2월에는 의주청년학우회가 설립한 야학강습소 명예교사로 활동하였다. <ref> [https://search.i815.or.kr/dictionary/detail.do?searchWord=&reSearchWord=&searchType=all&index=1&id=706 이유필(李裕弼)]<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독립기념관.</ref> 이후 1910년 일제가 조작한  안명근 사건, 일명 안악 사건으로 김홍량, 김구, 이승길 등과 함께 잡혀 1911년 7월에 원도안치처분(遠島安置處分)을 선고받아 전라남도 진도군에서 1년 간 유배되었다. <ref>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2233 105인 사건(百五人 事件)]<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 이는 한국민족대백과사전의 자료로, 독립운동관 자료에 따르면 안악 사건을 확장한 1911년의 105인 사건으로 1912년 전라남도 진도군에 유배되었다고 한다. <ref> [https://search.i815.or.kr/dictionary/detail.do?searchWord=&reSearchWord=&searchType=all&index=1&id=706 이유필(李裕弼)]<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독립기념관.</ref> 그러나 1913년 7월 1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105인 사건에 연루된 105명 중 99명을 무죄로 석방하고 윤치호, 양기탁, 안태국, 이승훈, 임치정, 옥관빈 6명에게만 징역 5~6년 형을 선고하였기 때문에 한국민족대백과사전의 설명을 참고하였다. <ref>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2233 105인 사건(百五人 事件)]<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 이후 1913년 4월 경성전수학교에 복학하여 이듬해 하급관료 채용 시험인 보통 문관시험에 합격하였고, 1915년 3월 경성전수학교를 졸업한 뒤 5월부터 평북 영변군 서기로 근무하다 이듬해 3월부터 고향인 의주군 서기로 근무했다. <ref> [https://search.i815.or.kr/dictionary/detail.do?searchWord=&reSearchWord=&searchType=all&index=1&id=706 이유필(李裕弼)]<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독립기념관.</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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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이유필은 1907년 안창호의 주도로 만들어진 항일단체인 {{TagGroup|신민회}}에 참여하였고, 1910년 2월에는 의주청년학우회가 설립한 야학강습소 명예교사로 활동하였다.<ref> 윤대원,"[https://search.i815.or.kr/dictionary/detail.do?searchWord=&reSearchWord=&searchType=all&index=1&id=706 이유필(李裕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독립운동인명사전』<sup>online</sup></online></html>, 독립기념관.</ref> 이후 1910년 일제가 조작한  안명근 사건, 일명 {{TagEvent|안악 사건}}으로 김홍량, 김구, 이승길 등과 함께 잡혀 1911년 7월에 원도안치처분(遠島安置處分)을 선고받아 전라남도 진도군에서 1년 간 유배되었다.<ref> 이현희,"[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2233 105인 사건(百五人 事件)]"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이는 한국민족대백과사전의 자료로, 독립운동관 자료에 따르면 안악 사건을 확장한 1911년의 105인 사건으로 1912년 전라남도 진도군에 유배되었다고 한다.<ref> 윤대원,"[https://search.i815.or.kr/dictionary/detail.do?searchWord=&reSearchWord=&searchType=all&index=1&id=706 이유필(李裕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독립운동인명사전』<sup>online</sup></online></html>, 독립기념관.</ref> 그러나 1913년 7월 1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105인 사건에 연루된 105명 중 99명을 무죄로 석방하고 윤치호, 양기탁, 안태국, 이승훈, 임치정, 옥관빈 6명에게만 징역 5~6년 형을 선고하였기 때문에 한국민족대백과사전의 설명을 참고하였다.<ref> 이현희,"[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2233 105인 사건(百五人 事件)]"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이후 1913년 4월 경성전수학교에 복학하여 이듬해 하급관료 채용 시험인 보통 문관시험에 합격하였고, 1915년 3월 경성전수학교를 졸업한 뒤 5월부터 평북 영변군 서기로 근무하다 이듬해 3월부터 고향인 의주군 서기로 근무했다.<ref> 윤대원,"[https://search.i815.or.kr/dictionary/detail.do?searchWord=&reSearchWord=&searchType=all&index=1&id=706 이유필(李裕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독립운동인명사전』<sup>online</sup></online></html>, 독립기념관.</ref> 한편 1915년 {{TagPerson|김경희}}와 결혼하였다.<ref>"[https://www.yka.or.kr/html/info/pds.asp?skey=&sword=&category=&size=10&page=20&no=17896 [웹진]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활동한 흥사단 인물 5_이유필]",자료실,<html><online style="color:purple">『흥사단』<sup>online</sup></online></html>,흥사단.</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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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 임시정부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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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 {{TagGroup|임시정부}}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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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하급 관리로 평범하게 살던 이유필은 1919년 {{TagEvent|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고향 의주에서 시위를 주도했다가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였고, 같은 해 8월 {{TagGroup|임시정부}} 내무부 비서국장에 임명되었고, 다음해 1920년 3월에는 평안도의원에 당선되어 임시의정원에서 독립전쟁을 위한 건의안을 제출하고 가결시키며 {{TagGroup|임시정부}}에서 활동을 이어나갔다.<ref> 윤대원,"[https://search.i815.or.kr/dictionary/detail.do?searchWord=&reSearchWord=&searchType=all&index=1&id=706 이유필(李裕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독립운동인명사전』<sup>online</sup></online></html>, 독립기념관.</ref>  1920년 3월에는 국내외 동포를 대상으로 선전사무를 집행하는 비밀기관인 지방선전부의 지방선전부부총판에 임명되었다.<ref> 윤대원,"[https://search.i815.or.kr/dictionary/detail.do?searchWord=&reSearchWord=&searchType=all&index=1&id=706 이유필(李裕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독립운동인명사전』<sup>online</sup></online></html>, 독립기념관.</ref>  1920년 8월에는 미국 상하원의 의원단을 찾아 안창호, 여운형 등과 함께 한국의 독립운동을 설명하고 지원을 요청했다.<ref> "[https://namu.wiki/w/%EC%9D%B4%EC%9C%A0%ED%95%84 이유필(李裕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나무위키』<sup>online</sup></online></html>,나무위키.</ref> 1921년 7월 재무부 재무차장 겸 임시공채국장에 임명되었고, 1922년 4월에는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임시의정원 부의장에 선출되었지만 1923년 1월 국민대표회의에서 개조파와 창조파의 갈등을 해결하지 못했다.<ref>『[https://search.i815.or.kr/dictionary/detail.do?searchWord=&reSearchWord=&searchType=all&index=1&id=706 이유필(李裕弼)]』 <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독립기념관.</ref> 국민대표회의의 갈등 이후 1924년 12월 박은식 주도의 과도내각의 내무총장에 임명되었고, 1925년 7월 이상룡 주도의 내각에서 국무원에 임명되었으며, 1926년 5월 독립운동촉진회를 조직하고 김규식 등과 함께 6.10 만세 운동에 관한 연설회를 개최하였다.<ref> 윤대원,"[https://search.i815.or.kr/dictionary/detail.do?searchWord=&reSearchWord=&searchType=all&index=1&id=706 이유필(李裕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독립운동인명사전』<sup>online</sup></online></html>, 독립기념관.</ref> 1926년 9월 홍진 주도의 내각의 국무원에 선출되었다가 12월 국무원에서 물러난 후 1927년 3월 한국유일독립당 상하이촉성회의 집행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930년 이동녕, 안창호 등과 {{TagGroup|임시정부}} 여당으로 {{TagGroup|한국독립당}}을 창당하고 이사 겸 총무주임에 선출되었다.<ref> 윤대원,"[https://search.i815.or.kr/dictionary/detail.do?searchWord=&reSearchWord=&searchType=all&index=1&id=706 이유필(李裕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독립운동인명사전』<sup>online</sup></online></html>, 독립기념관.</ref> 또한, 1926년 헌병에게 체포되었다가 풀려나며 밀정으로 의심받기도 했었다.<ref> "[https://namu.wiki/w/%EC%9D%B4%EC%9C%A0%ED%95%84 이유필(李裕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나무위키』<sup>online</sup></online></html>,나무위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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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 한국노병회 등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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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1922년 10월 김구, 여운형 등 7명과 함께 {{TagInstitution|한국노병회}} 발기인으로 참가하여 기초위원회에 선출되었고, 창립총회에서 이사 겸 경리부장에 선출된 후 1926년 4월, 1929년 5월, 1930년 2월 이사장에 선출되어 1933년 3월 일제에 체포될 때까지 이사장을 역임하였다.<ref> 윤대원,"[https://search.i815.or.kr/dictionary/detail.do?searchWord=&reSearchWord=&searchType=all&index=1&id=706 이유필(李裕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독립운동인명사전』<sup>online</sup></online></html>, 독립기념관.</ref>  {{TagGroup|한국노병회}}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능을 보완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로 이동건, 최천우 등 여러 독립운동가들이 군사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하거나 군자금을 주선하는 역할을 수행했으며 10년 간의 존속을 목표로 활동하였고 10년이 되는 1932년 자동해체하였다. <ref>이현희,"[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1110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그리고 이유필은 상하이 동포들과 활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1920년 12월 상하이 대한인거류민단 의사원에 당선되었고, 1923년 9월에는 상하이 대한교민단 단장과 인성학교 교장에 선임되어 1924년 3월까지 상하이 동포의 생활 개선과 동포 자제 교육에 힘썼고, 9월에는 대한교민단 의사원에 재선되어 회계검사원에 임명되었다.<ref> 윤대원,"[https://search.i815.or.kr/dictionary/detail.do?searchWord=&reSearchWord=&searchType=all&index=1&id=706 이유필(李裕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독립운동인명사전』<sup>online</sup></online></html>, 독립기념관.</ref> 1924년 교민단 주최로 3.1절 기념식을 하자 사회자를 맡아 무궁화를 선창했으며 {{TagInstitution|한국독립당}}의 기관지 상해한문 사장을 역임하였다. <ref> 이현희,"[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5441 이유필(李裕弼)]",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한편 1922년 9월에는 중한호조사 결성에 참여하고, 1923년 중한호조사 총회에서 한국 측 이사로 선출되며 중국과의 제휴에도 노력했다. <ref> 윤대원,"[https://search.i815.or.kr/dictionary/detail.do?searchWord=&reSearchWord=&searchType=all&index=1&id=706 이유필(李裕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독립운동인명사전』<sup>online</sup></online></html>, 독립기념관.</ref> 이외에도 1926년 1월 나창헌 등과 함께 의열투쟁을 목적으로 한 병인의용대 결성을 주도하였고, 1926년 7월 안창호 주도로 만들어진 임시정부경제후원회의 회계검사원으로도 활동하였다.<ref> 윤대원,"[https://search.i815.or.kr/dictionary/detail.do?searchWord=&reSearchWord=&searchType=all&index=1&id=706 이유필(李裕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독립운동인명사전』<sup>online</sup></online></html>, 독립기념관.</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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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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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와 194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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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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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1930년 병인의용대와 대한교민단의 의경대 등을 중심으로 한국의용군상하이 사령부 설치를 주도하였고, 1931년 7월 상하이 한인각단체연합회를 결성하여 만보산 사건의 진실을 알리는데 노력하였으며, 1932년 1월에는 김구, 김철과 대한교민단 정무위원에 선출되었다.<ref> 윤대원,"[https://search.i815.or.kr/dictionary/detail.do?searchWord=&reSearchWord=&searchType=all&index=1&id=706 이유필(李裕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독립운동인명사전』<sup>online</sup></online></html>, 독립기념관.</ref> 1932년 4월 29일 {{TagEvent|윤봉길 의거}} 직후 일본에 협조한 프랑스에 대해서 다양한 방법으로 항의하였고 10월 15일에는 이봉창 의사의 추도식을 주도하였다.<ref> 윤대원,"[https://search.i815.or.kr/dictionary/detail.do?searchWord=&reSearchWord=&searchType=all&index=1&id=706 이유필(李裕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독립운동인명사전』<sup>online</sup></online></html>, 독립기념관.</ref> 이후 1932년 11월에는 {{TagGroup|한국독립당}} 대표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결성하였으며,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국무원으로 선출되었으나 취소되었고, 1933년 3월 6일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재차 국무원에 선출되었으나 적에게 귀순한 증거가 있다는 이유로 파면되었다. <ref> 윤대원,"[https://search.i815.or.kr/dictionary/detail.do?searchWord=&reSearchWord=&searchType=all&index=1&id=706 이유필(李裕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독립운동인명사전』<sup>online</sup></online></html>, 독립기념관.</ref> 이후 1933년 3월 9일 상하이 주둔 일본군 헌병에 {{TagEvent|윤봉길 의거}} 관련자로 체포되어 12월 15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을 받고 1936년 3월 23일 반기 출옥하였다. <ref> 윤대원,"[https://search.i815.or.kr/dictionary/detail.do?searchWord=&reSearchWord=&searchType=all&index=1&id=706 이유필(李裕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독립운동인명사전』<sup>online</sup></online></html>, 독립기념관.</ref> 다만 {{TagGroup|임시정부}}의 거물임에도 불구하고 3년 형이 선고된 것을 이상하게 여긴 이들이 이유필이 변절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하여 이유필은 {{TagGroup|임시정부}}에서 제명되었다.<ref> "[https://namu.wiki/w/%EC%9D%B4%EC%9C%A0%ED%95%84 이유필(李裕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나무위키』<sup>online</sup></online></html>,나무위키.</ref> 그래서 임시정부 활동 대신 고향 유지들이 모은 자본금 50만원으로 대동산업주식회사를 설립해 1943년 사장으로 선임되었으나 경영난으로 문을 닫았고,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평북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었고 월남 도중 11월 28일 황해도 청단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ref> 윤대원,"[https://search.i815.or.kr/dictionary/detail.do?searchWord=&reSearchWord=&searchType=all&index=1&id=706 이유필(李裕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독립운동인명사전』<sup>online</sup></online></html>, 독립기념관.</ref> 1946년 11월 29일 오후 6시반 평안북도 도민회 주최로 영락교회에서 추도식이 거행되었다.<ref> "[https://namu.wiki/w/%EC%9D%B4%EC%9C%A0%ED%95%84 이유필(李裕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나무위키』<sup>online</sup></online></html>,나무위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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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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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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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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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이유필은 1919년 이후부터 {{TagInstitution|임시정부}}의 여러 요직을 차지하고 다양한 독립운동 활동을 했을 정도로 거물이었기 때문에, 1936년 3월 감옥생활을 마치고 나왔을 때 언론에서는 '상하이 독립운동의 거두의 출옥'이라는 제목으로 대서특필 하였지만, 해방 후 뚜렷한 활동을 하지 못하고 1945년 남한으로 내려오던 중 심장마비로 목숨을 잃어 남한에서 활동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무명의 독립운동가로 남게 되었다.<ref>허성호,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8/15/2009081500232.html 일제 극비문서로 친일 누명 벗은 춘산 이유필 선생]",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일보』<sup>online</sup></online></html>, 조선일보,작성일:2009년 8월 15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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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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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1933년 3월 9일 이유필은 중국 상하이에서 {{TagEvent|윤봉길 의거}}의 관련자로 일본 헌병에 강제 연행되었는데, 이는 중국 국적이었던 이유필을 체포했기 때문에 국제 관례상 국권침해로 일본은 '이유필 본인이 자수했다'는 악의적인 소문을 냈다. <ref> 허성호,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8/15/2009081500232.html 일제 극비문서로 친일 누명 벗은 춘산 이유필 선생]",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일보』<sup>online</sup></online></html>, 조선일보,작성일:2009년 8월 15일.</ref> 이후 이유필은 평안북도 경찰부로 이송된 후 다음달에 석방되었기 때문에 임시정부에서는 이유필이 석방된 이유가 변절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어 이유필은 결국 제명되었다.<ref>허성호,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8/15/2009081500232.html 일제 극비문서로 친일 누명 벗은 춘산 이유필 선생]",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일보』<sup>online</sup></online></html>, 조선일보,작성일:2009년 8월 15일.</ref>  그러나 이유필은 석방된 후 가택연금을 당했고, 4개월 뒤에 치안유지법 위반이라는 죄목으로 다시 체포되어 3년 동안 감옥살이를 했지만, 그것마저도 3년 밖에 살지 않았다는 점에서 모종의 타협이 있었을 것이라는 비난의 시각이 있었다.<ref>허성호,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8/15/2009081500232.html 일제 극비문서로 친일 누명 벗은 춘산 이유필 선생]",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일보』<sup>online</sup></online></html>, 조선일보,작성일:2009년 8월 15일.</ref> 이미 1926년 일본 헌병에 붙잡히고 풀려난 전적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소문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ref> "[https://namu.wiki/w/%EC%9D%B4%EC%9C%A0%ED%95%84 이유필(李裕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나무위키』<sup>online</sup></online></html>,나무위키.</ref> 이후 1990년대 초 일본 정부의 비밀문서에 '이유필을 처벌하는 것보다 차라리 석방하여 이를 이용하면 도리어 한국통치상 유리하다'는 문구가 알려지며 이유필의 친일 의혹이 해소되었으며, 3년 형도 결코 가벼운 형벌이 아니라는 것도 확인되었다.<ref>허성호,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8/15/2009081500232.html 일제 극비문서로 친일 누명 벗은 춘산 이유필 선생]",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일보』<sup>online</sup></online></html>, 조선일보,작성일:2009년 8월 15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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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의사와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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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윤봉길 의사의 거사 하루 전 윤봉길 의사는 이유필의 집에서 저녁을 먹고, 유서에서 이유필과의 친분을 거론할 정도로 친밀했는데, 이는 1931년 5월 윤봉길 의사가 {{TagInstitution|한국독립당}}의 당원으로 가입하며 당의 총무이사였던 이유필과 인연을 맺었기 때문이다.<ref>허성호,"[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8/14/2009081401323.html 애국지사 이유필 선생 아들과 윤봉길 의사 조카, 77년만의 첫 만남]"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일보』<sup>online</sup></online></html>, 조선일보,작성일:2009년 8월 15일.</ref>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훙커우공원에서 윤봉길 의사가 폭탄을 던지며 체포됐을 때 윤봉길 의사는 '이춘산'이라는 한국인에게 폭탄과 돈을 받았다고 나오는데 여기서 춘산이 이유필의 호일 정도로 윤봉길 의사의 의거에 이유필이 깊숙이 관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ref>허성호,"[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8/14/2009081401323.html 애국지사 이유필 선생 아들과 윤봉길 의사 조카, 77년만의 첫 만남]"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일보』<sup>online</sup></online></html>, 조선일보,작성일:2009년 8월 15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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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원호,"[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2561 경성법학전문학교(京城法學專門學校)]"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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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현희,"[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2233 105인 사건(百五人 事件)]"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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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현희,"[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1110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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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현희,"[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5441 이유필(李裕弼)]",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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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대원,"[https://search.i815.or.kr/dictionary/detail.do?searchWord=&reSearchWord=&searchType=all&index=1&id=706 이유필(李裕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독립운동인명사전』<sup>online</sup></online></html>, 독립기념관.
 +
*허성호,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8/15/2009081500232.html 일제 극비문서로 친일 누명 벗은 춘산 이유필 선생]",<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일보』<sup>online</sup></online></html>, 조선일보,작성일:2009년 8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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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성호,"[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8/14/2009081401323.html 애국지사 이유필 선생 아들과 윤봉길 의사 조카, 77년만의 첫 만남]",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일보』<sup>online</sup></online></html>, 조선일보,작성일:2009년 8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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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namu.wiki/w/%EC%9D%B4%EC%9C%A0%ED%95%84 이유필(李裕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나무위키』<sup>online</sup></online></html>,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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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yka.or.kr/html/info/pds.asp?skey=&sword=&category=&size=10&page=20&no=17896 [웹진]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활동한 흥사단 인물 5_이유필]",자료실,<html><online style="color:purple">『흥사단』<sup>online</sup></online></html>,흥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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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2월 4일 (목) 20:54 기준 최신판

👩🏻‍🏫본 문서는 서울대학교 "25-2 미디어위키를 활용한 역사 데이터 편찬" 수강생(정희원(SNU2025))이 작성했습니다.




이유필(李裕弼)
이유필.jpg
출처 : 윤대원,"이유필(李裕弼)", 『독립운동인명사전』online, 독립기념관.
 
한글명 이유필 한자명 李裕弼 영문명 Rey You-pil 가나명 이칭 우필(祐弼), 춘산(春山)
성별 생년 1885년 몰년 1945년 출신지 평안도 의주목 주내방 서문동 전공 법학강습소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1885년 평안북도 의주에서 태어나 법률강습소를 졸업한 후 평생을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07년 신민회에 참여한 후 1911년 안악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고, 1919년 3.1운동 때 독립만세 시위를 주도하다가 상해로 망명하였다.[1] 같은 해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해에 수립될 때 내무부비서국장을 역임하였다.[2] 1922년 10월에는 한국노병회를 조직하여 이사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1926년 임시정부 국무원 겸 재무장이 되었고, 1932년에는 윤봉길 의거의 주모자로 잡혀 3년형을 선고받고 만기 출옥하였다.[3]


생애


출생 및 어린시절

1885년 11월 28일 평안도 의주목 주내방 서문동(현 평안북도 의주군 의주읍) 아버지 이계초(李啓初)(혹은 이기초(李基初))인물의 장남으로 태어났다.[4] 본관은 경주이며, 어려서 한학을 배웠고 1905년 을사늑약을 계기로 서울에 올라와 신학문을 익혔다.[5] 이후 1906년 의주에 의주보민회를 창설하고, 대한자강회 의주지회 회원이 되어 계몽운동에 나섰다.[6] 그러는 한편 서울에 올라와 사립 학교인 보광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배우고 법학강습소기관에서 법률을 공부하여 1908년 4월에는 보광학교기관를, 같은 해 7월에는 법학강습소기관를 졸업하였다.[7] 다만 흥사단의 자료에 따르면 1917년에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고 하지만[8], 1922년 법관양성소에서 경성법학전문학교로 개편되었기 때문에 독립기념관의 자료가 적절한 것으로 판단하여 법학강습소 졸업으로 표기한다.[9]


1910년대 - 신민회단체

이유필은 1907년 안창호의 주도로 만들어진 항일단체인 신민회단체에 참여하였고, 1910년 2월에는 의주청년학우회가 설립한 야학강습소 명예교사로 활동하였다.[10] 이후 1910년 일제가 조작한 안명근 사건, 일명 안악 사건사건으로 김홍량, 김구, 이승길 등과 함께 잡혀 1911년 7월에 원도안치처분(遠島安置處分)을 선고받아 전라남도 진도군에서 1년 간 유배되었다.[11] 이는 한국민족대백과사전의 자료로, 독립운동관 자료에 따르면 안악 사건을 확장한 1911년의 105인 사건으로 1912년 전라남도 진도군에 유배되었다고 한다.[12] 그러나 1913년 7월 1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105인 사건에 연루된 105명 중 99명을 무죄로 석방하고 윤치호, 양기탁, 안태국, 이승훈, 임치정, 옥관빈 6명에게만 징역 5~6년 형을 선고하였기 때문에 한국민족대백과사전의 설명을 참고하였다.[13]이후 1913년 4월 경성전수학교에 복학하여 이듬해 하급관료 채용 시험인 보통 문관시험에 합격하였고, 1915년 3월 경성전수학교를 졸업한 뒤 5월부터 평북 영변군 서기로 근무하다 이듬해 3월부터 고향인 의주군 서기로 근무했다.[14] 한편 1915년 김경희인물와 결혼하였다.[15]


1920년대 - 임시정부단체 활동

하급 관리로 평범하게 살던 이유필은 1919년 만세운동사건이 일어나자 고향 의주에서 시위를 주도했다가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였고, 같은 해 8월 임시정부단체 내무부 비서국장에 임명되었고, 다음해 1920년 3월에는 평안도의원에 당선되어 임시의정원에서 독립전쟁을 위한 건의안을 제출하고 가결시키며 임시정부단체에서 활동을 이어나갔다.[16] 1920년 3월에는 국내외 동포를 대상으로 선전사무를 집행하는 비밀기관인 지방선전부의 지방선전부부총판에 임명되었다.[17] 1920년 8월에는 미국 상하원의 의원단을 찾아 안창호, 여운형 등과 함께 한국의 독립운동을 설명하고 지원을 요청했다.[18] 1921년 7월 재무부 재무차장 겸 임시공채국장에 임명되었고, 1922년 4월에는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임시의정원 부의장에 선출되었지만 1923년 1월 국민대표회의에서 개조파와 창조파의 갈등을 해결하지 못했다.[19] 국민대표회의의 갈등 이후 1924년 12월 박은식 주도의 과도내각의 내무총장에 임명되었고, 1925년 7월 이상룡 주도의 내각에서 국무원에 임명되었으며, 1926년 5월 독립운동촉진회를 조직하고 김규식 등과 함께 6.10 만세 운동에 관한 연설회를 개최하였다.[20] 1926년 9월 홍진 주도의 내각의 국무원에 선출되었다가 12월 국무원에서 물러난 후 1927년 3월 한국유일독립당 상하이촉성회의 집행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930년 이동녕, 안창호 등과 임시정부단체 여당으로 한국독립당단체을 창당하고 이사 겸 총무주임에 선출되었다.[21] 또한, 1926년 헌병에게 체포되었다가 풀려나며 밀정으로 의심받기도 했었다.[22]


1920년대 - 한국노병회 등 활동

1922년 10월 김구, 여운형 등 7명과 함께 한국노병회기관 발기인으로 참가하여 기초위원회에 선출되었고, 창립총회에서 이사 겸 경리부장에 선출된 후 1926년 4월, 1929년 5월, 1930년 2월 이사장에 선출되어 1933년 3월 일제에 체포될 때까지 이사장을 역임하였다.[23] 한국노병회단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능을 보완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로 이동건, 최천우 등 여러 독립운동가들이 군사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하거나 군자금을 주선하는 역할을 수행했으며 10년 간의 존속을 목표로 활동하였고 10년이 되는 1932년 자동해체하였다. [24] 그리고 이유필은 상하이 동포들과 활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1920년 12월 상하이 대한인거류민단 의사원에 당선되었고, 1923년 9월에는 상하이 대한교민단 단장과 인성학교 교장에 선임되어 1924년 3월까지 상하이 동포의 생활 개선과 동포 자제 교육에 힘썼고, 9월에는 대한교민단 의사원에 재선되어 회계검사원에 임명되었다.[25] 1924년 교민단 주최로 3.1절 기념식을 하자 사회자를 맡아 무궁화를 선창했으며 한국독립당기관의 기관지 상해한문 사장을 역임하였다. [26] 한편 1922년 9월에는 중한호조사 결성에 참여하고, 1923년 중한호조사 총회에서 한국 측 이사로 선출되며 중국과의 제휴에도 노력했다. [27] 이외에도 1926년 1월 나창헌 등과 함께 의열투쟁을 목적으로 한 병인의용대 결성을 주도하였고, 1926년 7월 안창호 주도로 만들어진 임시정부경제후원회의 회계검사원으로도 활동하였다.[28]


1930년대와 1940년대

1930년 병인의용대와 대한교민단의 의경대 등을 중심으로 한국의용군상하이 사령부 설치를 주도하였고, 1931년 7월 상하이 한인각단체연합회를 결성하여 만보산 사건의 진실을 알리는데 노력하였으며, 1932년 1월에는 김구, 김철과 대한교민단 정무위원에 선출되었다.[29]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거사건 직후 일본에 협조한 프랑스에 대해서 다양한 방법으로 항의하였고 10월 15일에는 이봉창 의사의 추도식을 주도하였다.[30] 이후 1932년 11월에는 한국독립당단체 대표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결성하였으며,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국무원으로 선출되었으나 취소되었고, 1933년 3월 6일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재차 국무원에 선출되었으나 적에게 귀순한 증거가 있다는 이유로 파면되었다. [31] 이후 1933년 3월 9일 상하이 주둔 일본군 헌병에 윤봉길 의거사건 관련자로 체포되어 12월 15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을 받고 1936년 3월 23일 반기 출옥하였다. [32] 다만 임시정부단체의 거물임에도 불구하고 3년 형이 선고된 것을 이상하게 여긴 이들이 이유필이 변절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하여 이유필은 임시정부단체에서 제명되었다.[33] 그래서 임시정부 활동 대신 고향 유지들이 모은 자본금 50만원으로 대동산업주식회사를 설립해 1943년 사장으로 선임되었으나 경영난으로 문을 닫았고,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평북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었고 월남 도중 11월 28일 황해도 청단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34] 1946년 11월 29일 오후 6시반 평안북도 도민회 주최로 영락교회에서 추도식이 거행되었다.[35]





연구


무명의 독립운동가

이유필은 1919년 이후부터 임시정부기관의 여러 요직을 차지하고 다양한 독립운동 활동을 했을 정도로 거물이었기 때문에, 1936년 3월 감옥생활을 마치고 나왔을 때 언론에서는 '상하이 독립운동의 거두의 출옥'이라는 제목으로 대서특필 하였지만, 해방 후 뚜렷한 활동을 하지 못하고 1945년 남한으로 내려오던 중 심장마비로 목숨을 잃어 남한에서 활동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무명의 독립운동가로 남게 되었다.[36]


억울한 친일 누명

1933년 3월 9일 이유필은 중국 상하이에서 윤봉길 의거사건의 관련자로 일본 헌병에 강제 연행되었는데, 이는 중국 국적이었던 이유필을 체포했기 때문에 국제 관례상 국권침해로 일본은 '이유필 본인이 자수했다'는 악의적인 소문을 냈다. [37] 이후 이유필은 평안북도 경찰부로 이송된 후 다음달에 석방되었기 때문에 임시정부에서는 이유필이 석방된 이유가 변절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어 이유필은 결국 제명되었다.[38] 그러나 이유필은 석방된 후 가택연금을 당했고, 4개월 뒤에 치안유지법 위반이라는 죄목으로 다시 체포되어 3년 동안 감옥살이를 했지만, 그것마저도 3년 밖에 살지 않았다는 점에서 모종의 타협이 있었을 것이라는 비난의 시각이 있었다.[39] 이미 1926년 일본 헌병에 붙잡히고 풀려난 전적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소문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40] 이후 1990년대 초 일본 정부의 비밀문서에 '이유필을 처벌하는 것보다 차라리 석방하여 이를 이용하면 도리어 한국통치상 유리하다'는 문구가 알려지며 이유필의 친일 의혹이 해소되었으며, 3년 형도 결코 가벼운 형벌이 아니라는 것도 확인되었다.[41]


윤봉길 의사와의 관계

윤봉길 의사의 거사 하루 전 윤봉길 의사는 이유필의 집에서 저녁을 먹고, 유서에서 이유필과의 친분을 거론할 정도로 친밀했는데, 이는 1931년 5월 윤봉길 의사가 한국독립당기관의 당원으로 가입하며 당의 총무이사였던 이유필과 인연을 맺었기 때문이다.[42]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훙커우공원에서 윤봉길 의사가 폭탄을 던지며 체포됐을 때 윤봉길 의사는 '이춘산'이라는 한국인에게 폭탄과 돈을 받았다고 나오는데 여기서 춘산이 이유필의 호일 정도로 윤봉길 의사의 의거에 이유필이 깊숙이 관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43]





데이터


Triple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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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son: 이유필 Person: 김경희 A hasSpouse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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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ent: 만세운동 Person: 이유필 A isRelatedTo B
Event: 윤봉길 의거 Person: 이유필 A isRelatedTo B



Timeline




Network Graph






참고자원







주석


  1. 이현희,"이유필(李裕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이현희,"이유필(李裕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이현희,"이유필(李裕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4. "이유필(李裕弼)", 『나무위키』online,나무위키.
  5. 윤대원,"이유필(李裕弼)", 『독립운동인명사전』online, 독립기념관.
  6. 윤대원,"이유필(李裕弼)", 『독립운동인명사전』online, 독립기념관.
  7. 윤대원,"이유필(李裕弼)",『독립운동인명사전』online, 독립기념관.
  8. "[웹진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활동한 흥사단 인물 5_이유필]",자료실,『흥사단』online,흥사단.
  9. 이원호,"경성법학전문학교(京城法學專門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한국학중앙연구원.
  10. 윤대원,"이유필(李裕弼)", 『독립운동인명사전』online, 독립기념관.
  11. 이현희,"105인 사건(百五人 事件)"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12. 윤대원,"이유필(李裕弼)", 『독립운동인명사전』online, 독립기념관.
  13. 이현희,"105인 사건(百五人 事件)"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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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윤대원,"이유필(李裕弼)", 『독립운동인명사전』online, 독립기념관.
  17. 윤대원,"이유필(李裕弼)", 『독립운동인명사전』online, 독립기념관.
  18. "이유필(李裕弼)", 『나무위키』online,나무위키.
  19. 이유필(李裕弼)online, 독립기념관.
  20. 윤대원,"이유필(李裕弼)", 『독립운동인명사전』online,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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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 "이유필(李裕弼)", 『나무위키』online,나무위키.
  23. 윤대원,"이유필(李裕弼)", 『독립운동인명사전』online, 독립기념관.
  24. 이현희,"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5. 윤대원,"이유필(李裕弼)", 『독립운동인명사전』online, 독립기념관.
  26. 이현희,"이유필(李裕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7. 윤대원,"이유필(李裕弼)", 『독립운동인명사전』online, 독립기념관.
  28. 윤대원,"이유필(李裕弼)", 『독립운동인명사전』online, 독립기념관.
  29. 윤대원,"이유필(李裕弼)", 『독립운동인명사전』online, 독립기념관.
  30. 윤대원,"이유필(李裕弼)", 『독립운동인명사전』online, 독립기념관.
  31. 윤대원,"이유필(李裕弼)", 『독립운동인명사전』online, 독립기념관.
  32. 윤대원,"이유필(李裕弼)", 『독립운동인명사전』online, 독립기념관.
  33. "이유필(李裕弼)", 『나무위키』online,나무위키.
  34. 윤대원,"이유필(李裕弼)", 『독립운동인명사전』online, 독립기념관.
  35. "이유필(李裕弼)", 『나무위키』online,나무위키.
  36. 허성호, "일제 극비문서로 친일 누명 벗은 춘산 이유필 선생", 『조선일보』online, 조선일보,작성일:2009년 8월 15일.
  37. 허성호, "일제 극비문서로 친일 누명 벗은 춘산 이유필 선생", 『조선일보』online, 조선일보,작성일:2009년 8월 15일.
  38. 허성호, "일제 극비문서로 친일 누명 벗은 춘산 이유필 선생", 『조선일보』online, 조선일보,작성일:2009년 8월 15일.
  39. 허성호, "일제 극비문서로 친일 누명 벗은 춘산 이유필 선생", 『조선일보』online, 조선일보,작성일:2009년 8월 15일.
  40. "이유필(李裕弼)", 『나무위키』online,나무위키.
  41. 허성호, "일제 극비문서로 친일 누명 벗은 춘산 이유필 선생", 『조선일보』online, 조선일보,작성일:2009년 8월 15일.
  42. 허성호,"애국지사 이유필 선생 아들과 윤봉길 의사 조카, 77년만의 첫 만남" 『조선일보』online, 조선일보,작성일:2009년 8월 15일.
  43. 허성호,"애국지사 이유필 선생 아들과 윤봉길 의사 조카, 77년만의 첫 만남" 『조선일보』online, 조선일보,작성일:2009년 8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