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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Korea Human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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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이유필은 1907년 안창호의 주도로 만들어진 항일단체인 {{TagGroup|신민회}}에 참여하였고, 1910년 2월에는 의주청년학우회가 설립한 야학강습소 명예교사로 활동하였다. <ref> 『[https://search.i815.or.kr/dictionary/detail.do?searchWord=&reSearchWord=&searchType=all&index=1&id=706 이유필(李裕弼)]』 <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독립기념관.</ref> 이후 1910년 일제가 조작한  안명근 사건, 일명 안악 사건으로 김홍량, 김구, 이승길 등과 함께 잡혀 1911년 7월에 원도안치처분(遠島安置處分)을 선고받아 전라남도 진도군에서 1년 간 유배되었다. <ref>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2233 105인 사건(百五人 事件)]』 <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 이는 한국민족대백과사전의 자료로, 독립운동관 자료에 따르면 안악 사건을 확장한 1911년의 105인 사건으로 1912년 전라남도 진도군에 유배되었다고 한다. <ref> 『[https://search.i815.or.kr/dictionary/detail.do?searchWord=&reSearchWord=&searchType=all&index=1&id=706 이유필(李裕弼)]』 <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독립기념관.</ref> 그러나 1913년 7월 1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105인 사건에 연루된 105명 중 99명을 무죄로 석방하고 윤치호, 양기탁, 안태국, 이승훈, 임치정, 옥관빈 6명에게만 징역 5~6년 형을 선고하였기 때문에 한국민족대백과사전의 설명을 참고하였다.  <ref>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2233 105인 사건(百五人 事件)]』 <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 이후 1913년 4월 경성전수학교에 복학하여 이듬해 하급관료 채용 시험인 보통 문관시험에 합격하였고, 1915년 3월 경성전수학교를 졸업한 뒤 5월부터 평북 영변군 서기로 근무하다 이듬해 3월부터 고향인 의주군 서기로 근무했다.  <ref> 『[https://search.i815.or.kr/dictionary/detail.do?searchWord=&reSearchWord=&searchType=all&index=1&id=706 이유필(李裕弼)]』 <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독립기념관.</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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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1월 29일 (토) 20:50 판

👩🏻‍🏫본 문서는 서울대학교 "25-2 미디어위키를 활용한 역사 데이터 편찬" 수강생(정희원(SNU2025))이 작성했습니다.




이유필(李裕弼)
출처 :
 
한글명 이유필 한자명 李裕弼 영문명 Rey You-pil 가나명 이칭 우필(祐弼), 춘산(春山)
성별 생년 1885년 몰년 1945년 출신지 평안도 의주목 주내방 서문동 전공 경성법학전문학교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1885년 평안북도 의주에서 태어나 법률강습소를 졸업한 후 평생을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07년 신민회단체에 참여한 후 1912년 105인 사건(百五人事件)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고, 1919년 3.1운동사건때 독립만세 시위를 주도하다가 상해로 망명하였다. [1] 같은 해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기관가 상해에 수립될 때 내무부비서국장을 역임하였다. [2] 1922년 10월에는 한국노병회기관를 조직하여 이사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1926년 임시정부 국무원 겸 재무장이 되었고, 1932년에는 윤봉길 의거사건의 주모자로 잡혀 3년형을 선고받고 만기 출옥하였다.[3]


생애


출생 및 어린시절

1885년 11월 28일 평안도 의주목 주내방 서문동(현 평안북도 의주군 의주읍) 아버지 이계초(李啓初)(혹은 이기초(李基初))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4] 본관은 경주이며, 어려서 한학을 배웠고 1905년 을사늑약을 계기로 서울에 올라와 신학문을 익혔다. [5] 이후 1906년 의주에 의주보민회를 창설하고, 대한자강회 의주지회 회원이 되어 계몽운동에 나섰다. [6] 그러는 한편 서울에 올라와 사립 학교인 보광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배우고 경성법학전문학교의 전신인 법학강습소에서 법률을 공부하여 1908년 4월에는 보광학교를, 같은 해 7월에는 법률강습소를 졸업하였다. [7]


1910년대 - 신민회

이유필은 1907년 안창호의 주도로 만들어진 항일단체인 신민회단체에 참여하였고, 1910년 2월에는 의주청년학우회가 설립한 야학강습소 명예교사로 활동하였다. [8] 이후 1910년 일제가 조작한 안명근 사건, 일명 안악 사건으로 김홍량, 김구, 이승길 등과 함께 잡혀 1911년 7월에 원도안치처분(遠島安置處分)을 선고받아 전라남도 진도군에서 1년 간 유배되었다. [9] 이는 한국민족대백과사전의 자료로, 독립운동관 자료에 따르면 안악 사건을 확장한 1911년의 105인 사건으로 1912년 전라남도 진도군에 유배되었다고 한다. [10] 그러나 1913년 7월 1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105인 사건에 연루된 105명 중 99명을 무죄로 석방하고 윤치호, 양기탁, 안태국, 이승훈, 임치정, 옥관빈 6명에게만 징역 5~6년 형을 선고하였기 때문에 한국민족대백과사전의 설명을 참고하였다. [11] 이후 1913년 4월 경성전수학교에 복학하여 이듬해 하급관료 채용 시험인 보통 문관시험에 합격하였고, 1915년 3월 경성전수학교를 졸업한 뒤 5월부터 평북 영변군 서기로 근무하다 이듬해 3월부터 고향인 의주군 서기로 근무했다. [12]


1920년대 - 임시정부 활동


제목4


제목5





연구


제목1


제목2


제목3





데이터


TripleData

Source (A) Target (B) Relationship
Person: 홍길동 Person: 홍아무개 A hasSon B
Person: 홍길동 Institution: ○○고등보통학교 A graduates B
Person: 홍길동 Institution: ○○대학교 A worksAt B
Person: 홍길동 Group: ○○학회 A isMemberOf B
Book: ○○○ Person: 홍길동 A creator B



Time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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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원







주석


  1. 이유필(李裕弼)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 이유필(李裕弼)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3. 이유필(李裕弼)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4. 이유필(李裕弼)online, 나무위키.
  5. 이유필(李裕弼)online, 독립기념관.
  6. 이유필(李裕弼)online, 독립기념관.
  7. 이유필(李裕弼)online, 독립기념관.
  8. 이유필(李裕弼)online, 독립기념관.
  9. 105인 사건(百五人 事件)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0. 이유필(李裕弼)online, 독립기념관.
  11. 105인 사건(百五人 事件)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2. 이유필(李裕弼)online, 독립기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