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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1번= {{TagSpage|167-1}}「震檀」을 稱號로 한 本 學會 及 學報의 創立 創刊의 際에 當하야, 「震檀」이란 대체 무엇인가, 그 出處 意義 및 其他를 考察하여 봄은 決코 無意味한 일이 아닐 것이다. 더구나 그것이 一般 世人에게 널리 親熟하지 못한 窮僻한 嫌이 있음에 있어서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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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2번= {{TagSpage|167-2}}「震檀」이란 語가─勿論 吾人의 創造語가 아닌 以上、相當한 出處와 由來를 가지고 있는 것이어니와, 그것이─처음으로 보인 現傳한 文獻을 들면, 朝鮮 太宗 九年 權近(陽村)의 撰한 健元陵(太祖) 神道碑文을 推치 아니 할 수 없다. 거기에 即 이러한 一節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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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3번= {{TagSpage|167-3}}書雲觀舊藏秘記 有{{ruby|九變震檀之圖|●●●●●●}} 建木得子  {{ruby|朝鮮即震檀之說|●●●●●●●}} 出自數千載之前 由今乃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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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4번= {{TagSpage|167-3}}이것은 特히 實際의 碑文과 및 이를 轉載한 東文選(卷百 二十) 朝鮮金石總覽(卷下, 二○七號) 等에 依한 바이나, 但 (注意할 것은) 陽村集 及 東國輿地勝覽(楊州 健元陵 條) 所載의 同 碑文에는 이 境遇에 單히 「九變圖之局 十八子之說 自檀君之世而已有 歷數千載 由今乃驗」이라 하야, 前者와 異同詳略의 差가 있는 同時에 정작 重要한 「震檀」 二字가 여기에는 全혀 보여있지 않다. 實際의 碑文과 陽村集(乃至 勝覽) 所載의 同 碑文 사이에는 이 以外에도 이{{TagPage|168-1}}러한 異同詳略의 差가 있는 句節이 多少 있는데, 그 理由는 나의 考究한 바에 依하면, 後者 即 陽村集 及 勝覽(勝覽의것은 陽村集의 것을 轉載한 것인 듯) 所載의 碑文은 太祖 昇遐의 歲인 太宗 八年에 지은 撰者 當初의 作(草稿) 그대로의 것 같고, 前者 即 實際의 碑文 (乃至 東文選 等 所載의 碑文)은 刻石立碑의 年인 翌 九年 春에 字數 關係 및 其他의 事情으로 原文에 就하야 多少의 修正을 加하였던 것이 아닌가 한다. 勿論 위에 있는 一節만은 改修文이 原文보다 도리어 仔細한 듯한 感이 있지만, 其外의 것은 前者가 後者에 比하야 훨신 縮略되어 있어 더욱 그러하다고 생각된다. (雜誌 「朝鮮」(諺文)第百七十一號 所揭의 拙稿 「朝鮮 太祖의 開國과 當時의 圖讖說」 參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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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5번= {{TagSpage|168-2}}그리하여 吾人은 이 改修된 碑文에 依하여 비로소 「震檀」의 語를 보게 된 것이어니와, 다시 거기 依하면 「震檀」은 朝鮮의 謂로, 即 朝鮮의 別稱으로 當時 書雲觀(天文 地理 陰陽 測候을 司함) 所藏의 舊 秘記 中에 「九變震檀之圖」란 書가 있고, 또 거기에 建木得子의 讖說이 보여있다는 것이다. 「九變震檀之圖」는 勿論 今日에는 傳하여 오지 않는 冊이나, 이를 略稱하야 「九變圖」 或는 「九變圖局」이라고도 하는 것이니, 그 書名의 義는 震檀(朝鮮)의 版局이 아홉 번 變한다는─即 朝鮮의 王朝變革(立國建都)이 九回에 及한다는─것이며, 그 所謂 「建木得子」 即 「十八子」의 設은 李姓人이 九變圖中의 一人이 되어, 장차 立國建都하리라는 讖說로서 朝鮮 太祖 李氏의 得國이 이에 應하였다는 것이다. 「九變圖」에 關한 말은 龍飛御天歌 第十五章에도 보이어 그 注에 「九變圖局  {{ruby|神誌|●●}}所撰圖讖之名也 言東國 歷代定都 凡九變其局 並言本朝受命建都之事」라고 하였는데, 이에 依하면, 九變圖는 神誌란 사람의 所撰으로 傳稱한 것이 分明하며 또 (九變脚가 果然 神誌 所撰의 것인지? 다음에 말할 바와 같이 一 疑問이지만) 여기 所謂 神誌는{{TagPage|169-1}} 어떤 사람이냐 하면, 同書 第十六章 大注에 「高麗肅宗時 衛尉丞正金謂磾 上書謂遷都漢陽 用{{ruby|神誌|●●}}道詵圖讖也」라 한 神誌와 又其 小註에 「{{ruby|神誌|●●}} 檀君時人 世號{{ruby|神誌|●●}}仙人」(〿〿의 應製詩注에도 이와 같은 設이 있음)이라 한 神誌 其人에 틀림없으니, 前記 碑文中에 權近이 「九變圖之局 十八子之說 {{ruby|自檀君之世而已有|●●●●●●●●}}」(原文)라 或은 「朝鮮即震檀之說 {{ruby|出自數千載之前|●●●●●●●}}」(修正文)이라 함은 다 이와 같은─九變(震檀)圏의 撰者 神誌가 檀君時人이란─舊 傳說에 依하야 내린 말이었을 것이다. 神誌가 檀君 時代의 人物이라 함과, 朝鮮 即 震檀의 設 및 十八子의 說이, 檀君 時代로부터 이미 있었다고 함은 共히 元來 荒誕無稽의 說로, 거기에는 귀를 기울일 必要가 없지만, 高麗 肅宗時의 術士인 金謂磾가 南京建都를 請하는 上書 中에 神誌의 秘詞란 것을 引用한 것은 高麗史 同 人傳에 徵하야 더욱 分明한 事實인즉, 神誌는 적어도 高麗 肅宗 朝 以前의 人物이었던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고, 實相은 高麗 以前 혹은 高句麗 時代의 人으로 저 梁의 寶誌와 羅末의 道詵과 같이 陰陽圖讖에 神通하야 世號 神誌仙人이라고까지 일컬어졌던 것이 아닌가 한다. 但 그 所著라고 하는 神誌秘詞니 九變震檀之圖니 하는 讖書로 高麗時代 乃至 國初에 流行하던 것의 內容이 果然 神誌 所作에 係한 것인지? 이는 一大 疑問이다. 設令 그中에 神誌의 原作이 몇 部分 있다고 하더라도, 大部分는 後人의 追加 改造 潤色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마치 當時에 盛行하던 道詵의 種種의 秘記와 같이 其中에도 九變震檀之圖는 全部가 高麗人의 造作이 아닌가 하는 疑心을 가지고 있다. 거기에 보인 所謂 「建木得子」 即 「十八子」의 讖說은 그 起源이 支那에 있어서는 비록 六朝時代의 (위에 말한) 梁의 寶誌에서 始作되어 隋唐代에 盛行하던 說이지만, 半島에 있어서는 高麗 中葉에 비로소 盛行하야, (末葉에까지 미친 것인데) 特히 仁宗(高麗 第十七代) 初에{{TagPage|170-1}} 國舅 李資謙이 이 十八子讖에 依하야 不軌를 圖하려고까지 하였던 것은 著名한 事實이니, 이는 대개 九變(震檀)圖의 十八子識의 影響한 배라고 推測할 수 있슨즉, (前記 拙稿 「朝鮮 太祖의 開國과 當時의 圖讖說」을 參照함이 可함) 九變震檀之圖는 實相 그 李氏의 勃興(이 李氏의 渤其은 이미 文宗 順宗 時로부터였다) 初나 조금 그 前에 造作된 것일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에 對하여는 아직 더 考慮할 必要가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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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6번= {{TagSpage|170-2}}枝葉의 論이지만, 神誌秘詞에 關하여는 三國遺事(卷三)「寶藏奉老」의 條에 高句麗 大臣 蓋蘇文에 關한 注 가운대 「按{{ruby|神誌秘詞|●●●●}}序云 蘇文大英弘 序並注 則蘇文 乃職名 有文證 而傳云 文人蘇英弘序 未詳孰是」라고 한 一節이 보이는데, 여기에 所謂 神誌秘詞의 序와 注를 냈다는 蘇文大英弘이란 어떤 사람인지? 이것이 蘇文과 大英弘의 二人으로 解할 것인지, 或은 右 遺事의 設과 같이 蘇文은 人名이 아니라 官職名으로 볼는지 또 或은 그것이 右注 所引의 傳說같이 文人蘇英弘의 訛誤가 아닌지 共히 未詳하나, 蘇文을 官職名으로 解하는 것은 암만해도 알 수 없는 設 같고, 또 蘇文 大英弘을 二人으로 보는 것도 文勢上 우습고, 그렇다고 곧 이를 蘇文 大英弘으로 고쳐볼 수도 없는 것인즉, 이에 關하여는 아직 保留해둘 수밖에 別道理가 없으나, 大英弘이란 사람이 神誌秘詞와 關係가 있던 人物임은 再言을 不待할 것이며, 大英弘은 亦是 推測이지만, 高麗의 渤海 歸化人이나 乃至 그 子孫이 아니었든가 한다. 그러면 神誌秘詞란 書는 實相 이 序와 注를 냈다는 大英弘의 造作인지도 모르며, 더 한걸음 나아가, 九變震檀之圖도 그이의 손에 된 것일는지 모르겟다. 그러나 亦是 後考를 要할 問題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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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7번= {{TagSpage|171-1}}그런데 정작 震檀이란 원(元) 語義가 무엇이며, 또 그것이 어떻게 하야 朝鮮을 別稱하는 名詞가 되었는지 여기에 關하야 (다음에) 생각해 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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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8번= {TagSpage|171-2}}筆者는 「震檀」 二字를 碑文에서 볼 때 이미 直覺的으로 震檀은 即 震旦이리라 하는 생각을 가졌었지만, 이는 누구나 震旦을 記憶하는 이에게는 容易히 聯想될 것이다. 高麗史(券百二十三) 白勝賢傳 同人의 讖說 中에 「三韓變爲震旦大國來朝矣」라 한 것을 보면, 高麗 時代에는 震檀이라고 아니하고, 普通대로 震旦이라고 書稱하였던 것을 알 수 있으며, 同時에 國初 書雲觀 所藏의 舊(高麗) 秘記인 九變震檀之國의 震檀도 實相, 原書에는 震旦으로 되었었으리라고 推測된다. 그러면 저 碑文에는 웨 震旦을 震檀으로 고쳤느냐 하는 疑問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亦 是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바와 같이 朝鮮 太祖의 後諱가 旦이므로, 旦字를 避하기 爲하야 (碑文 撰者가) 비로소 檀字를 代用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近世朝鮮에서는 震旦을 或은 震朝로 書稱하는 이도 있었지만, 그 理由는 亦是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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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9번= {TagSpage|171-3}}震旦은 元來 「支那」(一云 脂那, 至那)란 말과 한가지 中國 指稱하는 梵語名에 對한 音譯으로 佛敎에 關한 典籍 中에 많이 보이는 이름이니, 그 音譯이 本是 一定하지 아니하야, 震旦 外에 眞旦 振旦 眞丹 旃丹 神丹 等의 譯稱이 있다. 그러나 震旦이라고 함이 가장 오래되고 널리 쓰는 말이다. 이 梵名의 譯은 이미 東晋時代 始作된 듯하니, 東晉世의 帛尸梨蜜多羅의 譯한 灌頂經(卷六)과, 같은 東晉世의 佛駄跋陀羅의 譯한 華嚴經(卷二十 九)과 또 大集經(卷四十 五) 等 書에 이미 震旦(成은 眞旦)의 名이 보여 있다. (支那 脂那 至那의 稱은 隋唐時代 그 用例를 보기{{TagPage|172-1}} 비롯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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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10번= {{TagSpage|172-2}}그러면 中國을 指稱하는 震旦의 원 語義가 무엇이냐 함이 問題인데, 여기에 對하여는 대개 設이 세 가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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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11번= {{TagSpage|172-3}}(一)은 日出地方說이니, 翻譯名義集 卷三(諸國篇) 震旦條에 引한 琳法師의 說에 「東方屬震  是日出之方 故云震旦」이라 함과 또 거기에 引用된 樓炭經에 「葱河以東 名爲震且 以日初出 耀於東隅 故得名也」라고 함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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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12번= {{TagSpage|172-4}}(二)는 思惟國說이니, 慧苑音義 卷下에 震旦에 對하야 「此翻爲思惟 以其國人多所思慮 多所制作 故以爲名 即今 漢國是也」라고 함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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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13번= {{TagSpage|172-5}}(三)은 秦地說이니, 이는 近來 東西 學者의 共唱하는 說로 震은 秦(Cin)의 轉音이요, 旦은 梵語 Sthana(住地의 義)의 對音으로 震旦은 Cinisthana(秦人의 住地)의 訛轉이라고 하는 說이다. 即 支那란 語의 由來와 같이 秦의 始皇帝가 海內를 一統하야 그 餘威가 外國에 미침으로부터 秦의 音을 特히 取한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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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14번= {{TagSpage|172-6}}右 三說 中 第一의 日出地方說은 단지 「震旦」이란 漢字에 拘泥된 誤解이므로 一顧의 價値가 없고, 第二의 思惟國說은 震旦의 音이 梵語 振多那 即 Cintana(思惟의 義)와 近似하므로 因하야 내린 淺見인즉, 亦是 取할 價値가 없으며, 오직 第三說인 秦人住地說은 가장 合理的이라 東西 學者 間에 널리 通行되는 說이므로, 나도 또한 이에 賛同하야 마지않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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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20일 (금) 14:30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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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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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원제목 震檀辨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1 발행기관 진단학회
저자 이병도 역자 집필일자 게재연월 1934년11월
시작쪽 167쪽 종료쪽 174쪽 전체쪽 008쪽 연재여부 단독 범주 논문 분야 역사



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내용을 입력합니다.@




본문




























筆者는 「震檀」 二字를 碑文에서 볼 때 이미 直覺的으로 震檀은 即 震旦이리라 하는 생각을 가졌었지만, 이는 누구나 震旦을 記憶하는 이에게는 容易히 聯想될 것이다. 高麗史(券百二十三) 白勝賢傳 同人의 讖說 中에 「三韓變爲震旦大國來朝矣」라 한 것을 보면, 高麗 時代에는 震檀이라고 아니하고, 普通대로 震旦이라고 書稱하였던 것을 알 수 있으며, 同時에 國初 書雲觀 所藏의 舊(高麗) 秘記인 九變震檀之國의 震檀도 實相, 原書에는 震旦으로 되었었으리라고 推測된다. 그러면 저 碑文에는 웨 震旦을 震檀으로 고쳤느냐 하는 疑問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亦 是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바와 같이 朝鮮 太祖의 後諱가 旦이므로, 旦字를 避하기 爲하야 (碑文 撰者가) 비로소 檀字를 代用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近世朝鮮에서는 震旦을 或은 震朝로 書稱하는 이도 있었지만, 그 理由는 亦是 마찬가지이다. |원문9번= {TagSpage|171-3}}震旦은 元來 「支那」(一云 脂那, 至那)란 말과 한가지 中國 指稱하는 梵語名에 對한 音譯으로 佛敎에 關한 典籍 中에 많이 보이는 이름이니, 그 音譯이 本是 一定하지 아니하야, 震旦 外에 眞旦 振旦 眞丹 旃丹 神丹 等의 譯稱이 있다. 그러나 震旦이라고 함이 가장 오래되고 널리 쓰는 말이다. 이 梵名의 譯은 이미 東晋時代 始作된 듯하니, 東晉世의 帛尸梨蜜多羅의 譯한 灌頂經(卷六)과, 같은 東晉世의 佛駄跋陀羅의 譯한 華嚴經(卷二十 九)과 또 大集經(卷四十 五) 等 書에 이미 震旦(成은 眞旦)의 名이 보여 있다. (支那 脂那 至那의 稱은 隋唐時代 그 用例를 보기▶P172-1 비롯한 것이다) |원문10번= 쪽수▶P172-2그러면 中國을 指稱하는 震旦의 원 語義가 무엇이냐 함이 問題인데, 여기에 對하여는 대개 設이 세 가지가 있다. |원문11번= 쪽수▶P172-3(一)은 日出地方說이니, 翻譯名義集 卷三(諸國篇) 震旦條에 引한 琳法師의 說에 「東方屬震 是日出之方 故云震旦」이라 함과 또 거기에 引用된 樓炭經에 「葱河以東 名爲震且 以日初出 耀於東隅 故得名也」라고 함이 그것이다. |원문12번= 쪽수▶P172-4(二)는 思惟國說이니, 慧苑音義 卷下에 震旦에 對하야 「此翻爲思惟 以其國人多所思慮 多所制作 故以爲名 即今 漢國是也」라고 함이 그것이다. |원문13번= 쪽수▶P172-5(三)은 秦地說이니, 이는 近來 東西 學者의 共唱하는 說로 震은 秦(Cin)의 轉音이요, 旦은 梵語 Sthana(住地의 義)의 對音으로 震旦은 Cinisthana(秦人의 住地)의 訛轉이라고 하는 說이다. 即 支那란 語의 由來와 같이 秦의 始皇帝가 海內를 一統하야 그 餘威가 外國에 미침으로부터 秦의 音을 特히 取한 것이라고 한다. |원문14번= 쪽수▶P172-6右 三說 中 第一의 日出地方說은 단지 「震旦」이란 漢字에 拘泥된 誤解이므로 一顧의 價値가 없고, 第二의 思惟國說은 震旦의 音이 梵語 振多那 即 Cintana(思惟의 義)와 近似하므로 因하야 내린 淺見인즉, 亦是 取할 價値가 없으며, 오직 第三說인 秦人住地說은 가장 合理的이라 東西 學者 間에 널리 通行되는 說이므로, 나도 또한 이에 賛同하야 마지않는 바이다. |원문15번= @ |원문16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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