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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Korea Human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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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한국의 민속학·역사학 연구자로 일제강점기와 해방 공간에 민속과 민족사를 탐구한 민속·역사학자, 교육 관료로 한국사를 신민족주의사관에 입각하여 연구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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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일제강점기와 해방 공간에서 한국의 민속학·역사학을 탐구한 연구자이자 교육관료로, 한국사를 신민족주의사관에 입각하여 연구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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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1900년 12월 28일 경상남도 동래군 사하면 하단리(현 부산광역시 사하구 하단동)에서 {{TagPerson|손수인}}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5살 되던 해에 해일로 어머니를 여의고 가난에 쫓겨 생활 근거지를 옮기며 전전했다. 5살에 하단리를 떠나 12살까지 구포에서 생활했는데 양산군 좌이면 남창리(현 부산광역시 북구 구포동)였기 때문에 호를 남창(南滄)으로 썼다. 12살에 경성부로 올라왔다가 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평양에서 잡화상을 벌이기도 했다. 1919년 다시 구포에 왔다가 {{TagEvent|3.1}} 운동에 동참했는데 3월 29일 구포 장터에서 일어났던 독립 만세 운동에 앞장서다가 주동자로 잡혀 4개월 징역 언도를 받고 부산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러다 {{TagPerson|최규동}}의 도움으로 {{TagInstitution|중동학교}}에 입학했고 1921년 {{TagInstitution|중동학교}}를 15회로 졸업했다. <ref>(남근우)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0574 손진태]", (민속·인류, 인물,)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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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경상북도 성주군에 살던 {{TagPerson|이부자}}의 후원으로 도쿄에 건너가서 1924년 3월 {{TagInstitution|와세다 제1고등학원}}을 졸업하고 {{TagInstitution|와세다대학}} 사학과에 입학하여 1927년 졸업했다. 그 때의 지도교수가 {{TagPerson|니시무라 신지(西村眞次)}}로 일본사와 인류학이 전공이었는데 그의 영향을 받아 민속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20년대 중반 동경에서 {{TagPerson|방정환}} 선생과 함께 '{{TagGroup|색동회}}' 활동을 했다. {{TagInstitution|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는 1930년부터 {{TagInstitution|동양문고}}의 직원으로 근무를 했는데 이때 {{TagPerson|시라토리 구라키치(泊鳥庫吉)}}와 같은 학자들을 만났으며 이 기간 동안 {{TagInstitution|일본학사원}} 관비로 한국 전역을 답사하고 민속 조사를 했다. 1932년 {{TagPerson|정인섭}}, {{TagPerson|송석하}} 등과 '{{TagGroup|조선민속학회}}'를 결성했고 {{TagPerson|연영화}} 여사와 결혼했으며, 슬하에 장남 {{TagPerson|손대인}}과 차녀 {{TagPerson|손경수}}를 두었다. 1933년 {{TagPerson|이병도}}, {{TagPerson|조윤제}} 등과 함께 '{{TagGroup|진단학회}}'를 결성했고 청구학회에 대항했다. 1934년 영구 귀국한 이후부터 민속학 연구에서 차츰 한국사 연구로 그 관심이 바뀌어갔는데 {{TagInstitution|연희전문학교}}에 강사로 출강하여 동양문화사를 강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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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경상북도 성주군에 살던 {{TagPerson|이부자}}의 후원으로 도쿄에 건너가서 1924년 3월 {{TagInstitution|와세다 제1고등학원}}을 졸업하고 {{TagInstitution|와세다대학}} 사학과에 입학하여 1927년 졸업했다. 그 때의 지도교수가 {{TagPerson|니시무라 신지(西村眞次)}}로 일본사와 인류학이 전공이었는데 그의 영향을 받아 민속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20년대 중반 동경에서 {{TagPerson|방정환}} 선생과 함께 '{{TagGroup|색동회}}' 활동을 했다. {{TagInstitution|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는 1930년부터 {{TagInstitution|동양문고}}의 직원으로 근무를 했는데 이때 {{TagPerson|시라토리 구라키치(泊鳥庫吉)}}와 같은 학자들을 만났으며 이 기간 동안 {{TagInstitution|일본학사원}} 관비로 한국 전역을 답사하고 민속 조사를 했다. 1932년 {{TagPerson|정인섭}}, {{TagPerson|송석하}} 등과 '{{TagGroup|조선민속학회}}'를 결성했고 {{TagPerson|연영화}} 여사와 결혼했으며<ref>"[https://namu.wiki/w/%EC%86%90%EC%A7%84%ED%83%9C 손진태]", <html><online style="color:purple">『나무위키』<sup>online</sup></online></html>.</ref>, 슬하에 장남 {{TagPerson|손대인}}과 차녀 {{TagPerson|손경수}}를 두었다.<ref>(남근우)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0574 손진태 (孫晉泰)]", (민속·인류, 인물),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1933년 {{TagPerson|이병도}}, {{TagPerson|조윤제}} 등과 함께 '{{TagGroup|진단학회}}'를 결성했고 청구학회에 대항했다. 1934년 영구 귀국한 이후부터 민속학 연구에서 차츰 한국사 연구로 그 관심이 바뀌어갔는데 {{TagInstitution|연희전문학교}}에 강사로 출강하여 동양문화사를 강의했다.<ref>"[https://namu.wiki/w/%EC%86%90%EC%A7%84%ED%83%9C 손진태]", <html><online style="color:purple">『나무위키』<sup>online</sup></online></html>.</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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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1934년 9월 {{TagInstitution|보성전문학교}}가 안암동으로 옮기자 도서관 사서로 근무하면서 문명사를 강의하다가 1937년 도서관 건물이 완공되자 문명사를 강의하는 전임 강사와 함께 도서관장을 맡았다. 1939년 {{TagInstitution|보성전문학교}}에서 문명사를 강의하는 교수가 되었으며 도서관장도 계속 맡았다. 그가 도서관장을 맡으면서 전국 각지에서 수집한 민속학 자료들은 후일 고려대학교 박물관의 기반이 되었는데 오늘날에도 고려대학교 박물관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희귀한 민속 자료가 방대하게 보관되어 있는 것에 감탄한다고 한다. 1945년 광복을 맞을 때까지 8년 동안 {{TagInstitution|보성전문학교}}에서 문명사를 강의하는 교수 겸 도서관장을 맡고 있었으며 이때 가깝게 지내던 이가 {{TagPerson|안호상}} 교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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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광복 직후 경성대학 사학과 교수를 거쳐 1946년 {{TagInstitution|서울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임용되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나서 {{TagPerson|안호상}}이 초대 문교부 장관이 되자 그의 요청으로 {{TagInstitution|문교부}} 차관 겸 편수국장을 맡기도 했다. 1949년 9월 7일 {{TagInstitution|서울대학교}} 사범대 학장을 그만두었다가 1950년 5월 18일 {{TagInstitution|서울대학교}} 문리과대 학장을 맡았는데 문리과대 학장 재임시 {{TagEvent|6.25 전쟁}}이 발발하자 교직원들에게 밀린 4달치 월급을 나눠주다 시간을 놓쳐 한강을 넘지 못했다. 이후 삼각산에 숨어 있다가 {{TagEvent|9.28 서울 수복}} 직전에 발각되어 납북되었으며 이후의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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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광복 직후 경성대학 사학과 교수를 거쳐 1946년 {{TagInstitution|서울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임용되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나서 {{TagPerson|안호상}}이 초대 문교부 장관이 되자 그의 요청으로 {{TagInstitution|문교부}} 차관 겸 편수국장을 맡기도 했다. 1949년 9월 7일 {{TagInstitution|서울대학교}} 사범대 학장을 그만두었다가 1950년 5월 18일 {{TagInstitution|서울대학교}} 문리과대 학장을 맡았는데 문리과대 학장 재임시 {{TagEvent|6.25 전쟁}}이 발발하자 교직원들에게 밀린 4달치 월급을 나눠주다 시간을 놓쳐 한강을 넘지 못했다. 이후 삼각산에 숨어 있다가 {{TagEvent|9.28 서울 수복}} 직전에 발각되어 납북되었으며 이후의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ref>"[https://namu.wiki/w/%EC%86%90%EC%A7%84%ED%83%9C 손진태]", <html><online style="color:purple">『나무위키』<sup>online</sup></online></html>.</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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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1923년에 창립된 색동회와 시 동인지 『금성(金星)』의 핵심 멤버로 『어린이』와 『금성』에 ‘역사동화’를 비롯한 창작시, 번역시 등을 다수 발표했다. 그리고 1920년대 중반에 {{TagInstitution|와세다대학}}에서 역사학과 함께 인류학, 민속학을 본격적으로 수학하며 방학 때마다 조선의 농·산촌으로 민속 자료를 수집하였다. 동시에 {{TagInstitution|동양문고}}를 드나들며 조선의 민풍토속(民風土俗)에 관한 동양의 문헌 자료들을 수집, 정리하고 그 분석에 필요한 서양의 전문 서적들을 독파한다. 이러한 동서양의 문헌 섭렵과 현지 조사로 수집한 민속 자료를 바탕으로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중반에 걸쳐 한민족의 형성 과정과 민족문화의 기초 구성을 탐구하였다. 이에 혼합민족설을 전제로 조선 상고문화(上古文化)의 기원과 계통 및 변천 과정을 천착한다. 또한 1930년대에는 조선민속학회, 진단학회와 같은 학술 단체의 설립과 운영에도 힘을 쏟는다. 특히 후자의 경우 귀국 직후의 창립 총회에서 손진태는 {{TagPerson|김태준}}, {{TagPerson|이병도}}, {{TagPerson|이윤재}}, {{TagPerson|이희승}}, {{TagPerson|조윤재}}와 함께 ‘상무위원’으로 선임되어 줄곧 회무(會務)를 관장한다.
 
|내용= 1923년에 창립된 색동회와 시 동인지 『금성(金星)』의 핵심 멤버로 『어린이』와 『금성』에 ‘역사동화’를 비롯한 창작시, 번역시 등을 다수 발표했다. 그리고 1920년대 중반에 {{TagInstitution|와세다대학}}에서 역사학과 함께 인류학, 민속학을 본격적으로 수학하며 방학 때마다 조선의 농·산촌으로 민속 자료를 수집하였다. 동시에 {{TagInstitution|동양문고}}를 드나들며 조선의 민풍토속(民風土俗)에 관한 동양의 문헌 자료들을 수집, 정리하고 그 분석에 필요한 서양의 전문 서적들을 독파한다. 이러한 동서양의 문헌 섭렵과 현지 조사로 수집한 민속 자료를 바탕으로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중반에 걸쳐 한민족의 형성 과정과 민족문화의 기초 구성을 탐구하였다. 이에 혼합민족설을 전제로 조선 상고문화(上古文化)의 기원과 계통 및 변천 과정을 천착한다. 또한 1930년대에는 조선민속학회, 진단학회와 같은 학술 단체의 설립과 운영에도 힘을 쏟는다. 특히 후자의 경우 귀국 직후의 창립 총회에서 손진태는 {{TagPerson|김태준}}, {{TagPerson|이병도}}, {{TagPerson|이윤재}}, {{TagPerson|이희승}}, {{TagPerson|조윤재}}와 함께 ‘상무위원’으로 선임되어 줄곧 회무(會務)를 관장한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저술로 『조선신가유편』(1930)과 『조선민담집』(1930), 『조선민족설화의 연구』(1947), 『조선민족문화의 연구』(1948) 등을 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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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를 대표하는 저술로 『조선신가유편』(1930)과 『조선민담집』(1930), 『조선민족설화의 연구』(1947), 『조선민족문화의 연구』(1948) 등을 꼽을 수 있다.<ref>(남근우)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0574 손진태 (孫晉泰)]", (민속·인류, 인물),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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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광복 후에는 일제강점기에 발표한 조선민속학의 성과들을 매만져 단행본을 상재한다. 그리고 신민족주의 사관을 주창하며 우리 민족사에 관한 연구 성과들을 집성하고 역사 교과서를 저술한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TagInstitution|문교부}} 편수국장과 차관을 겸직하며 신민족주의 교육 정책의 입안과 실행을 주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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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광복 후에는 일제강점기에 발표한 조선민속학의 성과들을 매만져 단행본을 상재한다. 그리고 신민족주의 사관<ref>신민족주의 역사학은 민족주의 시각에서 사회경제사학을 종합한 진보적 민족주의 역사관이며, 부분적인 한계가 있더라도 해방 전후 좌우대립과 남북분단을 저지하려던 중간파의 정치 이념을 반영한 역사관으로서 높이 평가되었다. <br/> (이정선, 「[https://kiss-kstudy-com-ssl.eproxy.pusan.ac.kr/Detail/Ar?key=4057758 손진태의 조선 민족론과 신민족주의 역사서술]」, 『인문학술』11, 순천대학교 인문학술원, 2023, 129쪽.)</ref>을 주창하며 우리 민족사에 관한 연구 성과들을 집성하고 역사 교과서를 저술한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TagInstitution|문교부}} 편수국장과 차관을 겸직하며 신민족주의 교육 정책의 입안과 실행을 주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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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의 대표적 성과는 『조선민족사개론(상)』(1948)과 『국사대요』(1949)이다. 제목과 같이 우리 민족사를 개설하고 국사의 대강령을 논술한 내용이다.<ref>(남근우)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0574 손진태 (孫晉泰)]", (민속·인류, 인물),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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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선, 「[https://kiss-kstudy-com-ssl.eproxy.pusan.ac.kr/Detail/Ar?key=4057758 손진태의 조선 민족론과 신민족주의 역사서술]」, 『인문학술』11, 순천대학교 인문학술원, 2023, 127쪽~1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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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근우)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0574 손진태 (孫晉泰)]", (민속·인류, 인물),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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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namu.wiki/w/%EC%86%90%EC%A7%84%ED%83%9C 손진태]", <html><online style="color:purple">『나무위키』<sup>online</sup></online></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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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7월 30일 (화) 23:58 기준 최신판

👩🏻‍🏫본 문서는 서울대학교 " 24-1 미디어위키를 활용한 역사 데이터 편찬" 수강생 정혜연(PNU2024)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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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태(孫晉泰)
손진태.jpg
출처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한글명 손진태 한자명 孫晉泰 영문명 Son jin tae 가나명 이칭 남창(南滄)
성별 남성 생년 1900년 몰년 출신지 경상남도 동래군 사하면 하단리 전공 문학부 사학과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일제강점기와 해방 공간에서 한국의 민속학·역사학을 탐구한 연구자이자 교육관료로, 한국사를 신민족주의사관에 입각하여 연구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생애


어린 시절

1900년 12월 28일 경상남도 동래군 사하면 하단리(현 부산광역시 사하구 하단동)에서 손수인인물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5살 되던 해에 해일로 어머니를 여의고 가난에 쫓겨 생활 근거지를 옮기며 전전했다. 5살에 하단리를 떠나 12살까지 구포에서 생활했는데 양산군 좌이면 남창리(현 부산광역시 북구 구포동)였기 때문에 호를 남창(南滄)으로 썼다. 12살에 경성부로 올라왔다가 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평양에서 잡화상을 벌이기도 했다. 1919년 다시 구포에 왔다가 3.1사건 운동에 동참했는데 3월 29일 구포 장터에서 일어났던 독립 만세 운동에 앞장서다가 주동자로 잡혀 4개월 징역 언도를 받고 부산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러다 최규동인물의 도움으로 중동학교기관에 입학했고 1921년 중동학교기관를 15회로 졸업했다.[1]


일본 유학

경상북도 성주군에 살던 이부자인물의 후원으로 도쿄에 건너가서 1924년 3월 와세다 제1고등학원기관을 졸업하고 와세다대학기관 사학과에 입학하여 1927년 졸업했다. 그 때의 지도교수가 니시무라 신지(西村眞次)인물로 일본사와 인류학이 전공이었는데 그의 영향을 받아 민속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20년대 중반 동경에서 방정환인물 선생과 함께 '색동회단체' 활동을 했다. 와세다대학기관을 졸업하고는 1930년부터 동양문고기관의 직원으로 근무를 했는데 이때 시라토리 구라키치(泊鳥庫吉)인물와 같은 학자들을 만났으며 이 기간 동안 일본학사원기관 관비로 한국 전역을 답사하고 민속 조사를 했다. 1932년 정인섭인물, 송석하인물 등과 '조선민속학회단체'를 결성했고 연영화인물 여사와 결혼했으며[2], 슬하에 장남 손대인인물과 차녀 손경수인물를 두었다.[3] 1933년 이병도인물, 조윤제인물 등과 함께 '진단학회단체'를 결성했고 청구학회에 대항했다. 1934년 영구 귀국한 이후부터 민속학 연구에서 차츰 한국사 연구로 그 관심이 바뀌어갔는데 연희전문학교기관에 강사로 출강하여 동양문화사를 강의했다.[4]


일제강점기

1934년 9월 보성전문학교기관가 안암동으로 옮기자 도서관 사서로 근무하면서 문명사를 강의하다가 1937년 도서관 건물이 완공되자 문명사를 강의하는 전임 강사와 함께 도서관장을 맡았다. 1939년 보성전문학교기관에서 문명사를 강의하는 교수가 되었으며 도서관장도 계속 맡았다. 그가 도서관장을 맡으면서 전국 각지에서 수집한 민속학 자료들은 후일 고려대학교 박물관의 기반이 되었는데 오늘날에도 고려대학교 박물관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희귀한 민속 자료가 방대하게 보관되어 있는 것에 감탄한다고 한다. 1945년 광복을 맞을 때까지 8년 동안 보성전문학교기관에서 문명사를 강의하는 교수 겸 도서관장을 맡고 있었으며 이때 가깝게 지내던 이가 안호상인물 교수였다.[5]


광복 후

광복 직후 경성대학 사학과 교수를 거쳐 1946년 서울대학교기관 사학과 교수로 임용되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나서 안호상인물이 초대 문교부 장관이 되자 그의 요청으로 문교부기관 차관 겸 편수국장을 맡기도 했다. 1949년 9월 7일 서울대학교기관 사범대 학장을 그만두었다가 1950년 5월 18일 서울대학교기관 문리과대 학장을 맡았는데 문리과대 학장 재임시 6.25 전쟁사건이 발발하자 교직원들에게 밀린 4달치 월급을 나눠주다 시간을 놓쳐 한강을 넘지 못했다. 이후 삼각산에 숨어 있다가 9.28 서울 수복사건 직전에 발각되어 납북되었으며 이후의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6]





연구


일제강점기의 조선민속학

1923년에 창립된 색동회와 시 동인지 『금성(金星)』의 핵심 멤버로 『어린이』와 『금성』에 ‘역사동화’를 비롯한 창작시, 번역시 등을 다수 발표했다. 그리고 1920년대 중반에 와세다대학기관에서 역사학과 함께 인류학, 민속학을 본격적으로 수학하며 방학 때마다 조선의 농·산촌으로 민속 자료를 수집하였다. 동시에 동양문고기관를 드나들며 조선의 민풍토속(民風土俗)에 관한 동양의 문헌 자료들을 수집, 정리하고 그 분석에 필요한 서양의 전문 서적들을 독파한다. 이러한 동서양의 문헌 섭렵과 현지 조사로 수집한 민속 자료를 바탕으로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중반에 걸쳐 한민족의 형성 과정과 민족문화의 기초 구성을 탐구하였다. 이에 혼합민족설을 전제로 조선 상고문화(上古文化)의 기원과 계통 및 변천 과정을 천착한다. 또한 1930년대에는 조선민속학회, 진단학회와 같은 학술 단체의 설립과 운영에도 힘을 쏟는다. 특히 후자의 경우 귀국 직후의 창립 총회에서 손진태는 김태준인물, 이병도인물, 이윤재인물, 이희승인물, 조윤재인물와 함께 ‘상무위원’으로 선임되어 줄곧 회무(會務)를 관장한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저술로 『조선신가유편』(1930)과 『조선민담집』(1930), 『조선민족설화의 연구』(1947), 『조선민족문화의 연구』(1948) 등을 꼽을 수 있다.[7]


광복 후의 신민족주의사학

광복 후에는 일제강점기에 발표한 조선민속학의 성과들을 매만져 단행본을 상재한다. 그리고 신민족주의 사관[8]을 주창하며 우리 민족사에 관한 연구 성과들을 집성하고 역사 교과서를 저술한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문교부기관 편수국장과 차관을 겸직하며 신민족주의 교육 정책의 입안과 실행을 주도한다. 이 시기의 대표적 성과는 『조선민족사개론(상)』(1948)과 『국사대요』(1949)이다. 제목과 같이 우리 민족사를 개설하고 국사의 대강령을 논술한 내용이다.[9]





데이터


TripleData

Source (A) Target (B) Relationship
Person: 손진태 Institution: 중동학교 A graduates B
Person: 손진태 Institution: 와세다 제1고등학원 A graduates B
Person: 손진태 Institution: 와세다대학 A graduates B
Person: 손진태 Institution: 동양문고 A worksAt B
Person: 손진태 Institution: 연희전문학교 A worksAt B
Person: 손진태 Institution: 보성전문학교 A worksAt B
Person: 손진태 Institution: 경성대학 A worksAt B
Person: 손진태 Institution: 서울대학교 A worksAt B
Person: 손진태 Group: 색동회 A isMemberOf B
Person: 손진태 Group: 조선민속학회 A isMemberOf B
Person: 손진태 Group: 진단학회 A isMemberOf B
Person: 손진태 Person: 연영화 A hasSpouse B



Time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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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원







주석


  1. "손진태", 『나무위키』online.
  2. "손진태", 『나무위키』online.
  3. (남근우) "손진태 (孫晉泰)", (민속·인류, 인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4. "손진태", 『나무위키』online.
  5. "손진태", 『나무위키』online.
  6. "손진태", 『나무위키』online.
  7. (남근우) "손진태 (孫晉泰)", (민속·인류, 인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8. 신민족주의 역사학은 민족주의 시각에서 사회경제사학을 종합한 진보적 민족주의 역사관이며, 부분적인 한계가 있더라도 해방 전후 좌우대립과 남북분단을 저지하려던 중간파의 정치 이념을 반영한 역사관으로서 높이 평가되었다.
    (이정선, 「손진태의 조선 민족론과 신민족주의 역사서술」, 『인문학술』11, 순천대학교 인문학술원, 2023, 129쪽.)
  9. (남근우) "손진태 (孫晉泰)", (민속·인류, 인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