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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Korea Human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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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center><big>'''👩🏻‍🏫본 문서는 서울대학교 " [[:분류:2024-1 BigData(SNU)|24-1 미디어위키를 활용한 역사 데이터 편찬]]" 수강생 [[정동은(JBNU2024)]]이 작성했습니다.'''</big></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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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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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1906년 5월 13일 서울특별시 구로구<ref>대한제국 한성부</ref>에서 출생했으며 아버지는 궁내부 제도국 참사관 {{TagPerson| [[유치형(兪致衡)|유치형(兪致衡)]]}}이다. 본관은 기계(杞溪), 호는 현민(玄民)이다. 서울 {{TagInstitution|[[재동공립보통학교|재동공립보통학교]]}}와 {{TagInstitution|[[경성고등보통학교|경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19년 성진순과 결혼하였다가 1926년 사별하였다. 1924년 {{TagInstitution|[[경성제국대학|경성제국대학]]}} 예과에 수석으로 입학한 후 경성제국대학 조선학생  모임인 {{TagGroup| [[문우회(文友會)|문우회(文友會)]]}}를 조직했다. 1926년 4월 동대학 법문학부에 입학한 후 1931년까지 좌익 모임인 {{TagGroup| [[경제연구회|경제연구회]]}}를 조직해서 활동했다. 1927년경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 1927년 5월 단편소설 「스리」를 『조선지광』에 발표하며 등단했다. 1928년 박복례와 재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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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1906년 5월 13일 {{TagLocation| 서울특별시 구로구}}<ref>대한제국 한성부</ref>에서 출생했으며 아버지는 궁내부 제도국 참사관 {{TagPerson| [[유치형(兪致衡)|유치형(兪致衡)]]}}이다. 본관은 기계(杞溪), 호는 현민(玄民)이다. {{TagInstitution|[[서울재동공립보통학교|서울재동공립보통학교]]}}와 {{TagInstitution|[[경성고등보통학교|경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19년 성진순과 결혼하였다가 1926년 사별하였다. 1924년 {{TagInstitution|[[경성제국대학|경성제국대학]]}} 예과에 수석으로 입학한 후 경성제국대학 조선학생  모임인 {{TagGroup| [[문우회(文友會)|문우회(文友會)]]}}를 조직했다. 1926년 4월 동대학 법문학부에 입학한 후 1931년까지 좌익 모임인 {{TagGroup| [[경제연구회|경제연구회]]}}를 조직해서 활동했다. 1927년경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 1927년 5월 단편소설 「[[스리|스리]]」를 『조선지광』에 발표하며 등단했다. 1928년 박복례와 재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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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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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1929년 3월 {{TagInstitution|[[경성제국대학|경성제국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후 1929년 4월부터 1933년 3월까지 동대학 법문학부 조수로 있으면서 예과에 강사로 나갔다. 1929년 조선졸업생 모임인 {{TagGroup| [[낙산구락부|낙산구락부]]}}를 조직하여 『신흥』을 발간했다. 1930년 만주를 여행한 후 「마적」, 「귀향」, 「송군 남매와 나」 등을 발표했다. 1931년 9월 경제연구회 구성원을 중심으로 조선사회사정연구소를 설립했다.<br/>1932년부터 보성전문학교에 법과 강사로 출강하였으며, 이후 국제법과 국제정치에 관한 논문을 여러 편 발표했다. 같은 해 5월을 전후하여 근로대중의 이익을 표방하는 극단 메가폰을 결성했다. 1933년 4월부터 {{TagInstitute| [[보성전문학교|보성전문학교]]}} 전임강사가 되었고, 1937년 교수가 되었다. 1933년 10월부터 『동아일보』 객원기자로 활동하면서 「김강사와 T교수」, 「창랑정기(滄浪亭記)」와 같은 단편소설을 발표했고, 1939년 『유진오 단편집』을 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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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1929년 3월 {{TagInstitution|[[경성제국대학|경성제국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후 1929년 4월부터 1933년 3월까지 동대학 법문학부 조수로 있으면서 예과에 강사로 나갔다. 1929년 조선졸업생 모임인 {{TagGroup| [[낙산구락부|낙산구락부]]}}를 조직하여 『[[신흥|신흥]]』을 발간했다. 1930년 만주를 여행한 후 「[[마적|마적]]」, 「[[귀향|귀향]]」, 「[[송군 남매와 나|송군 남매와 나]]」 등을 발표했다. 1931년 9월 경제연구회 구성원을 중심으로 {{TagInstitution[[조선사회사정연구소|조선사회사정연구소]]}}를 설립했다.<br/>1932년부터 {{TagInstitution| [[보성전문학교|보성전문학교]]}}에 법과 강사로 출강하였으며, 이후 국제법과 국제정치에 관한 논문을 여러 편 발표했다. 같은 해 5월을 전후하여 근로대중의 이익을 표방하는 극단 메가폰을 결성했다. 1933년 4월부터 [[보성전문학교|보성전문학교]] 전임강사가 되었고, 1937년 교수가 되었다. 1933년 10월부터 『동아일보』 객원기자로 활동하면서 「{{TagBook| [[김강사와 T교수|김강사와 T교수]]}}」, 「[[창랑정기(滄浪亭記)|창랑정기(滄浪亭記)]]」와 같은 단편소설을 발표했고, 1939년 『[[유진오 단편집|유진오 단편집]]』을 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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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활동에 가담'''===
 
==='''친일활동에 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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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1939년 7월 중일전쟁을 선전하는 「신질서 건설과 문학」(『삼천리』1939.7.)을 발표하면서 친일활동에 가담했으며, 10월 조선실업구락부에 입회했다. 같은 달 조선문인협회 발기인 간사로 참여해서, 11월 3일 조선문인협회가 주최한 ‘전선에 위문문, 위문대 보내기 행사’를 주도했다. 1940년 10월 12일 조선문인협회가 주최한 문사부대(文士部隊) 육군지원병훈련소 1일 입소에 참여한 후, 그 소감을 「일사분란의 훈련」(『삼천리』1940.12.)으로 실어 지원병훈련소를 선전했다. 같은 해 11월부터 12월까지 조선문인협회가 주최하는 시국강연회 연사로 평안도에 파견되어 ‘신체제와 국어보급’이라는 연제로 순회강연을 했고, 12월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와 선전부 위원에 선임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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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1939년 7월 {{TagEvent| [[중일전쟁|중일전쟁]]}}을 선전하는 「[[신질서 건설과 문학|신질서 건설과 문학]]」(『삼천리』1939.7.)을 발표하면서 친일활동에 가담했으며, 10월 {{TagInstitution| [[조선실업구락부|조선실업구락부]]}}에 입회했다. 같은 달 조선문인협회 발기인 간사로 참여해서, 11월 3일 조선문인협회가 주최한 ‘전선에 위문문, 위문대 보내기 행사’를 주도했다. 1940년 10월 12일 조선문인협회가 주최한 문사부대(文士部隊) 육군지원병훈련소 1일 입소에 참여한 후, 그 소감을 「[[일사분란의 훈련|일사분란의 그 훈련]]」(『삼천리』1940.12.)으로 실어 지원병훈련소를 선전했다. 같은 해 11월부터 12월까지 [[조선문인협회|조선문인협회]]가 주최하는 시국강연회 연사로 평안도에 파견되어 ‘신체제와 국어보급’이라는 연제로 순회강연을 했고, 12월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와 선전부 위원에 선임되었다.</br>
1941년 2월 제1회 조선예술상 문학부문 심의위원, 7월 조선문인협회가 주최한 용산 호국신사 어조영지(護國神社御造營地) 근로봉사, 10월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11월 국민총력조선연맹 주최 지원병 독려연설을 하였으며, 12월 경성방송국 제2방송(조선어방송)에서 시국작품을 낭독했다. 1942년 11월 도쿄에서 열린 제1회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참가했으며, 1944년까지 해마다 참석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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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2월 제1회 조선예술상 문학부문 심의위원, 7월 [[조선문인협회|조선문인협회]]가 주최한 용산 호국신사 어조영지(護國神社御造營地) 근로봉사, 10월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11월 국민총력조선연맹 주최 지원병 독려연설을 하였으며, 12월 경성방송국 제2방송(조선어방송)에서 시국작품을 낭독했다. 1942년 11월 도쿄에서 열린 제1회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참가했으며, 1944년까지 해마다 참석했다.</br>
1943년 2월 국민총력조선연맹 선전부가 주도한 국어문예작품 총독상 전형위원, 4월 조선문인보국회 상무이사로 위촉되었다. 같은 해 8월 1일에는 국민총력조선연맹이 주최한 징병제 실시 감사기념 ‘문예와 미술전’에서 육군특별지원병을 소재로 한 소설을 출품했고, 같은 달 4일에도 징병제 실시 감사 결의 선양 ‘낭독과 연극의 밤’에 참석했다. 1944년 1월 조선문인보국회에서 여는 출진학도 입영 환송에 참여했고, 6월 조선문인보국회 소설부 회장으로 선임되었으며, 8월 동단체가 주최한 문인대강연회에서 ‘우리가 반드시 이긴다’라는 연제로 강연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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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2월 국민총력조선연맹 선전부가 주도한 국어문예작품 총독상 전형위원, 4월 {{TagInstitution| [[조선문인보국회|조선문인보국회]]}} 상무이사로 위촉되었다. 같은 해 8월 1일에는 국민총력조선연맹이 주최한 징병제 실시 감사기념 ‘문예와 미술전’에서 육군특별지원병을 소재로 한 소설을 출품했고, 같은 달 4일에도 징병제 실시 감사 결의 선양 ‘낭독과 연극의 밤’에 참석했다. 1944년 1월 [[조선문인보국회|조선문인보국회]]에서 여는 출진학도 입영 환송에 참여했고, 6월 조선문인보국회 소설부 회장으로 선임되었으며, 8월 동단체가 주최한 문인대강연회에서 ‘우리가 반드시 이긴다’라는 연제로 강연했다.</br>
1945년 1월 대화동맹(大和同盟)의 처우감사총궐기 재성유지회동협회(在城有志會同協會) 운동준비원을 맡았으며, 3월 경성척식경제전문학교(구 보성전문학교)를 그만두고, 6월 조선언론보국회 평의원, 8월 조선문인보국회 평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거대한 융화」(『문학보국』1943.9.10.), 「병역은 힘이다」(『매일신보』1943.11.18.), 「우리가 반드시 이긴다」(『신시대』1944.9.) 등 다수의 글을 통해 징병제와 지원병을 독려하는 글을 발표하고 좌담 · 대담 · 강연 등 다양한 형태로 일제의 식민정책을 옹호하고 침략전쟁을 미화하는 활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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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월 대화동맹(大和同盟)의 처우감사총궐기 재성유지회동협회(在城有志會同協會) 운동준비원을 맡았으며, 3월 [[경성척식경제전문학교|경성척식경제전문학교]](구 보성전문학교)를 그만두고, 6월 조선언론보국회 평의원, 8월 [[조선문인보국회|조선문인보국회]] 평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거대한 융화|거대한 융화]]」(『문학보국』1943.9.10.), 「[[병역은 곧 힘이다|병역은 힘이다]]」(『매일신보』1943.11.18.), 「[[우리가 반드시 이긴다|우리가 반드시 이긴다]]」(『신시대』1944.9.) 등 다수의 글을 통해 징병제와 지원병을 독려하는 글을 발표하고 좌담 · 대담 · 강연 등 다양한 형태로 일제의 식민정책을 옹호하고 침략전쟁을 미화하는 활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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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직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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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상자|
|내용=해방 직후 1945년 8월 16일 임화의 부탁으로 문인들의 회합에 나갔다가 이태준 등의 항의로 쫓겨난 후 작가의 길을 접고, 교육자 · 법학자 · 정치가의 길로 나섰다. 경성대학 법문학부 교수와 보성전문학교 교수를 겸직하다가 고려대학교에 남아 법정대학장(1946∼1949) · 대학원장(1949∼1952) · 총장(1952∼1965)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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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해방 직후 1945년 8월 16일 {{TagPerson| [[임화|임화]]}}의 부탁으로 문인들의 회합에 나갔다가 {{TagPerson| [[이태준|이태준]]}} 등의 항의로 쫓겨난 후 작가의 길을 접고, 교육자 · 법학자 · 정치가의 길로 나섰다. 경성대학 법문학부 교수와 보성전문학교 교수를 겸직하다가 {{TagInstitution| [[고려대학교|고려대학교]]}}에 남아 법정대학장(1946∼1949) · 대학원장(1949∼1952) · 총장(1952∼1965)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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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의 초안 작성'''===
 
==='''헌법의 초안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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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상자|
|내용= 1945년 11월 학무국 산하 교육심의회의 고등교육분과위원회에서 대학령, 학위령 등 향후 대학교육의 근간이 되는 법령 초안을 작성했다. 1946년 변호사 시험위원에 위촉되었고, 1947년 6월 과도정부 사법부 산하 법전편찬위원회 위원(헌법분과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48년 6월 대한민국 헌법기초위원으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위한 제헌 헌법의 초안을 작성했다. 1948년 8월 초대정부에서 법제처장이 되어 1949년 3월까지 재임했다. 1949년 『헌법의 기초이론』(일조각), 『헌법해의(憲法解義)』(명세당)를 발간했다. 1949년 고등고시위원으로 위촉되어 1955년까지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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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1945년 11월 학무국 산하 교육심의회의 고등교육분과위원회에서 대학령, 학위령 등 향후 대학교육의 근간이 되는 법령 초안을 작성했다. 1946년 변호사 시험위원에 위촉되었고, 1947년 6월 과도정부 사법부 산하 법전편찬위원회 위원(헌법분과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48년 6월 대한민국 헌법기초위원으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위한 [[제헌 헌법|제헌 헌법]]의 초안을 작성했다. 1948년 8월 초대정부에서 법제처장이 되어 1949년 3월까지 재임했다. 1949년 『[[헌법의 기초이론|헌법의 기초이론]]』(일조각), 『[[헌법해의(憲法解義)|헌법해의(憲法解義)]]』(명세당)를 발간했다. 1949년 고등고시위원으로 위촉되어 1955년까지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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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총장 취임'''===
 
==='''고려대학교 총장 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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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상자|
|내용=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고려대학교 임시관리책임자, 중앙선거위원회 위원, 외교위원회 위원을 맡았다. 1951년 대한민국 교수단 단장, 부산 전시연합대학 총장(4∼8월), 고려대학교 총장서리로 활동했다. 같은 해 한일회담 대표로 위촉되어 7월부터 준비작업차 도일해서 10월부터 회담에 참여하였지만 1952년 5월 한일회담이 결렬되면서 귀국하였다. 같은 해 9월 고려대학교 총장에 취임했고, 미국 하버드대학교에 연구원으로 도미하였으며, 10월 UN 한국대표단 법률고문에 임명되었다. 1953년 대한국제법학회 회장에 선출되어 1968년까지 활동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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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1950년 {{TagEvent| [[한국전쟁|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고려대학교 임시관리책임자, 중앙선거위원회 위원, 외교위원회 위원을 맡았다. 1951년 대한민국 교수단 단장, 부산 전시연합대학 총장(4∼8월), [[고려대학교|고려대학교]] 총장서리로 활동했다. 같은 해 한일회담 대표로 위촉되어 7월부터 준비작업차 도일해서 10월부터 회담에 참여하였지만 1952년 5월 한일회담이 결렬되면서 귀국하였다. 같은 해 9월 고려대학교 총장에 취임했고, 미국 하버드대학교에 연구원으로 도미하였으며, 10월 UN 한국대표단 법률고문에 임명되었다. 1953년 대한국제법학회 회장에 선출되어 1968년까지 활동했다.</br>
 
1954년 대한민국학술원 회원과 대한교육심의위원회 위원, 1955년 서울하바드클럽 회장 · 대학조사위원회 위원 · 교육특별심의회 위원 및 부의장, 1956년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위원 및 부위원장 · 한국연구원 창립이사로 위촉되었다. 부인이었던 박복례가 사별<ref>사별한 년도는 확인하지 못하였다.</ref>하자 1956년에 이용재와 재혼하였다. 1957년 영국 정부가 초청하여 영국을 시찰했고, 한국공법위원회 회장과 한국법철학회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1954년 대한민국학술원 회원과 대한교육심의위원회 위원, 1955년 서울하바드클럽 회장 · 대학조사위원회 위원 · 교육특별심의회 위원 및 부의장, 1956년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위원 및 부위원장 · 한국연구원 창립이사로 위촉되었다. 부인이었던 박복례가 사별<ref>사별한 년도는 확인하지 못하였다.</ref>하자 1956년에 이용재와 재혼하였다. 1957년 영국 정부가 초청하여 영국을 시찰했고, 한국공법위원회 회장과 한국법철학회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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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대 국회의원 당선'''===
 
==='''7대 국회의원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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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1958년 서울특별시교육회 회장으로 임명되었고, 재일교포 북송반대 민간사절로 제네바 국제적십자사에 파견되었다. 같은 해 대한민국학술원 공로상을 받았고 한일회담 대표로 일본에 갔다. 1960년 9월 대한교육연합회 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10월 한일회담 수석대표로 임명되었다. 1961년 5 · 16 쿠데타로 한일회담을 중단하고 귀국해서 6월 국가재건국민운동 본부장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UN한국협회장에 선임되었다. 1962년 세계교육자대회에 참석했고 문화훈장(대한민국장)을 받았다. 1963년에 『젊은 세대에게 부치는 서(書)』(고려대학교출판부)를 출판했고, 1964년에는 1938년에 발표한 단편소설 「창랑정기(滄浪亭記)」 등을 묶어 소설집 『창랑정기』(정음사)를 출간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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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1958년 {{TagInstitution| [[서울특별시교육회|서울특별시교육회]]}} 회장으로 임명되었고, 재일교포 북송반대 민간사절로 제네바 국제적십자사에 파견되었다. 같은 해 대한민국학술원 공로상을 받았고 한일회담 대표로 일본에 갔다. 1960년 9월 [[대한교육연합회|대한교육연합회]] 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10월 한일회담 수석대표로 임명되었다. 1961년 [[5.16 군사정변|5.16 군사정변]]로 한일회담을 중단하고 귀국해서 6월 국가재건국민운동 본부장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UN한국협회장에 선임되었다. 1962년 세계교육자대회에 참석했고 문화훈장(대한민국장)을 받았다. 1963년에 『[[젊은 세대에게 부치는 서(書)|젊은 세대에게 부치는 서(書)]]』(고려대학교출판부)를 출판했고, 1964년에는 1938년에 발표한 단편소설 「[[창랑정기(滄浪亭記)|창랑정기(滄浪亭記)]]」 등을 묶어 소설집 『[[창랑정기(滄浪亭記)|창랑정기(滄浪亭記)]]』(정음사)를 출간했다.</br>
1965년 10월 고려대학교 총장을 임기만료로 사임하고 정치가의 길로 들어서 1966년 9월 민중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1967년 1월 민중당과 신한당이 합당한 신민당에서 윤보선을 대통령 후보로 하고 자신은 총재로 취임했으며, 7월 종로구 신민당 소속으로 7대 국회의원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70년 1월 뇌졸증으로 쓰러진 뒤 신민당 총재직을 사임했다. 1974년에는 민주회복 국민회의에 참가했다. 이후 그는 병석에 누웠지만 박정희 정권의 회유와 지지 요청을 여러 번 거절하였다. 1971년 종로구 국회의원직에서 물러난 뒤 사실상 정계은퇴를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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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10월 {{TagInstitution| [[고려대학교|고려대학교]]}} 총장을 임기만료로 사임하고 정치가의 길로 들어서 1966년 9월 민중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1967년 1월 민중당과 신한당이 합당한 신민당에서 {{TagPerson| [[윤보선|윤보선]]}}을 대통령 후보로 하고 자신은 총재로 취임했으며, 7월 종로구 신민당 소속으로 7대 국회의원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70년 1월 뇌졸증으로 쓰러진 뒤 신민당 총재직을 사임했다. 1974년에는 민주회복 국민회의에 참가했다. 이후 그는 병석에 누웠지만 {{TagPerson| [[박정희|박정희]]}} 정권의 회유와 지지 요청을 여러 번 거절하였다. 1971년 종로구 국회의원직에서 물러난 뒤 사실상 정계은퇴를 하였다.</br>
1974년 11월 민주회복국민회의 발족에 참여하여 12월 고문에 추대되었다. 1980년 2월 국토통일고문회의 고문과 국정자문위원에 위촉되었고, 1981년부터 대한민국학술원 원로회원(헌법)이 되었다. 정치활동을 하는 동안 『구름 위의 만상(萬想)』(일조각, 1966), 「편편야화(片片夜話)」(『동아일보』1974.3.1.∼5.16.), 『젊은 날의 자화상』(박영사, 1976), 『양호기(養虎記)-보전 · 고대 35년의 회고』(고대출판부, 1977), 『젊음이 깃칠 때』(휘문출판사, 1978), 『다시 창랑정에서』(창미사, 1985) 등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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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11월 민주회복국민회의 발족에 참여하여 12월 고문에 추대되었다. 1980년 2월 국토통일고문회의 고문과 국정자문위원에 위촉되었고, 1981년부터 대한민국학술원 원로회원(헌법)이 되었다. 정치활동을 하는 동안 『[[구름 위의 만상(萬想)|구름 위의 만상(萬想)]]』(일조각, 1966), 「[[편편야화(片片夜話)|편편야화(片片夜話)]]」(『동아일보』1974.3.1.∼5.16.), 『[[젊은 날의 자화상|젊은 날의 자화상]]』(박영사, 1976), 『[[양호기(養虎記)-보전 · 고대 35년의 회고|양호기(養虎記)-보전 · 고대 35년의 회고]]』(고대출판부, 1977), 『[[젊음이 깃칠 때|젊음이 깃칠 때]]』(휘문출판사, 1978), 『[[다시 창랑정에서|다시 창랑정에서]]』(창미사, 1985) 등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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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1987년 8월 30일 사망했을 당시 고려대학교에서 빈소를 마련해 그의 추모식을 거행했다. 그러나 당시 고려대학교 내 일부 교수와 학생들이 “고려대가 친일행위자나 국정자문위원의 빈소가 될 수 없다!”며 철거를 주장해 이른바 ‘현민 빈소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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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선정되었다. 2002년 공개된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에도 들어 있으며, 1944년 《신시대》에 실은 〈우리가 반드시 승리한다〉 등 총 8편의 친일 작품명이 공개되었다.[17] 2005년 고려대학교 교내 단체인 일제잔재청산위원회가 발표한 '고려대 100년 속의 일제잔재 1차 인물' 10인 명단에 포함되었으며[18]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그에 반해 2008년 8월, 학술지 ‘한국사 시민강좌’ 하반기호(43호)에서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특집 - 대한민국을 세운 사람들’ 을 선발, 건국의 기초를 다진 32명을 선정할 때 법률, 경제 부문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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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선정되었다. 2002년 공개된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에도 들어 있으며, 1944년 《신시대》에 실은 〈[[우리가 반드시 승리한다|우리가 반드시 승리한다]]〉 등 총 8편의 친일 작품명이 공개되었다. 2005년 고려대학교 교내 단체인 일제잔재청산위원회가 발표한 '고려대 100년 속의 일제잔재 1차 인물' 10인 명단에 포함되었으며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br>그에 반해 2008년 8월, 학술지 ‘{{TagJournal| [[한국사 시민강좌|한국사 시민강좌]]}}’ 하반기호(43호)에서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특집 - 대한민국을 세운 사람들’ 을 선발, 건국의 기초를 다진 32명을 선정할 때 법률, 경제 부문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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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은희,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1860 유진오(兪鎭午)],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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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용옥, [https://theme.archives.go.kr/next/nationalArchives/yujino.do 제1호 유진호 제헌헌법 초고], <html><online style="color:purple">『소중한 기록유산 국가지정기록물』<sup>online</sup></online></html>,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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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진, [https://www.grandculture.net/guro/toc/GC03000603 유진오], <html><online style="color:purple"> 디지털구로문화대전 <sup>online</sup></online></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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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7월 19일 (금) 23:29 기준 최신판

👩🏻‍🏫본 문서는 서울대학교 " 24-1 미디어위키를 활용한 역사 데이터 편찬" 수강생 정동은(JBNU2024)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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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오 (兪鎭午)
유진오.jpg
출처 : 유진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글명 유진오 한자명 兪鎭午 영문명 가나명 이칭 현민(玄民)
성별 남성 생년 1906년 몰년 1987년 출신지 서울 전공 법학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대한민국 해방 이후의 법학자, 소설가, 교육자, 초대 법제처장,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대한민국 제헌 헌법의 초안을 기초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생애


어린시절

1906년 5월 13일 서울특별시 구로구공간[1]에서 출생했으며 아버지는 궁내부 제도국 참사관 유치형(兪致衡)인물이다. 본관은 기계(杞溪), 호는 현민(玄民)이다. 서울재동공립보통학교기관경성고등보통학교기관를 졸업했다. 1919년 성진순과 결혼하였다가 1926년 사별하였다. 1924년 경성제국대학기관 예과에 수석으로 입학한 후 경성제국대학 조선학생 모임인 문우회(文友會)단체를 조직했다. 1926년 4월 동대학 법문학부에 입학한 후 1931년까지 좌익 모임인 경제연구회단체를 조직해서 활동했다. 1927년경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 1927년 5월 단편소설 「스리」를 『조선지광』에 발표하며 등단했다. 1928년 박복례와 재혼하였다.


졸업 후

1929년 3월 경성제국대학기관을 수석으로 졸업한 후 1929년 4월부터 1933년 3월까지 동대학 법문학부 조수로 있으면서 예과에 강사로 나갔다. 1929년 조선졸업생 모임인 낙산구락부단체를 조직하여 『신흥』을 발간했다. 1930년 만주를 여행한 후 「마적」, 「귀향」, 「송군 남매와 나」 등을 발표했다. 1931년 9월 경제연구회 구성원을 중심으로 {{TagInstitution조선사회사정연구소}}를 설립했다.
1932년부터 보성전문학교기관에 법과 강사로 출강하였으며, 이후 국제법과 국제정치에 관한 논문을 여러 편 발표했다. 같은 해 5월을 전후하여 근로대중의 이익을 표방하는 극단 메가폰을 결성했다. 1933년 4월부터 보성전문학교 전임강사가 되었고, 1937년 교수가 되었다. 1933년 10월부터 『동아일보』 객원기자로 활동하면서 「 김강사와 T교수서적」, 「창랑정기(滄浪亭記)」와 같은 단편소설을 발표했고, 1939년 『유진오 단편집』을 간행했다.


친일활동에 가담

1939년 7월 중일전쟁사건을 선전하는 「신질서 건설과 문학」(『삼천리』1939.7.)을 발표하면서 친일활동에 가담했으며, 10월 조선실업구락부기관에 입회했다. 같은 달 조선문인협회 발기인 간사로 참여해서, 11월 3일 조선문인협회가 주최한 ‘전선에 위문문, 위문대 보내기 행사’를 주도했다. 1940년 10월 12일 조선문인협회가 주최한 문사부대(文士部隊) 육군지원병훈련소 1일 입소에 참여한 후, 그 소감을 「일사분란의 그 훈련」(『삼천리』1940.12.)으로 실어 지원병훈련소를 선전했다. 같은 해 11월부터 12월까지 조선문인협회가 주최하는 시국강연회 연사로 평안도에 파견되어 ‘신체제와 국어보급’이라는 연제로 순회강연을 했고, 12월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와 선전부 위원에 선임되었다.

1941년 2월 제1회 조선예술상 문학부문 심의위원, 7월 조선문인협회가 주최한 용산 호국신사 어조영지(護國神社御造營地) 근로봉사, 10월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11월 국민총력조선연맹 주최 지원병 독려연설을 하였으며, 12월 경성방송국 제2방송(조선어방송)에서 시국작품을 낭독했다. 1942년 11월 도쿄에서 열린 제1회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참가했으며, 1944년까지 해마다 참석했다.
1943년 2월 국민총력조선연맹 선전부가 주도한 국어문예작품 총독상 전형위원, 4월 조선문인보국회기관 상무이사로 위촉되었다. 같은 해 8월 1일에는 국민총력조선연맹이 주최한 징병제 실시 감사기념 ‘문예와 미술전’에서 육군특별지원병을 소재로 한 소설을 출품했고, 같은 달 4일에도 징병제 실시 감사 결의 선양 ‘낭독과 연극의 밤’에 참석했다. 1944년 1월 조선문인보국회에서 여는 출진학도 입영 환송에 참여했고, 6월 조선문인보국회 소설부 회장으로 선임되었으며, 8월 동단체가 주최한 문인대강연회에서 ‘우리가 반드시 이긴다’라는 연제로 강연했다.

1945년 1월 대화동맹(大和同盟)의 처우감사총궐기 재성유지회동협회(在城有志會同協會) 운동준비원을 맡았으며, 3월 경성척식경제전문학교(구 보성전문학교)를 그만두고, 6월 조선언론보국회 평의원, 8월 조선문인보국회 평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거대한 융화」(『문학보국』1943.9.10.), 「병역은 곧 힘이다」(『매일신보』1943.11.18.), 「우리가 반드시 이긴다」(『신시대』1944.9.) 등 다수의 글을 통해 징병제와 지원병을 독려하는 글을 발표하고 좌담 · 대담 · 강연 등 다양한 형태로 일제의 식민정책을 옹호하고 침략전쟁을 미화하는 활동을 했다.


해방 직후

해방 직후 1945년 8월 16일 임화인물의 부탁으로 문인들의 회합에 나갔다가 이태준인물 등의 항의로 쫓겨난 후 작가의 길을 접고, 교육자 · 법학자 · 정치가의 길로 나섰다. 경성대학 법문학부 교수와 보성전문학교 교수를 겸직하다가 고려대학교기관에 남아 법정대학장(1946∼1949) · 대학원장(1949∼1952) · 총장(1952∼1965)을 역임하였다.


헌법의 초안 작성

1945년 11월 학무국 산하 교육심의회의 고등교육분과위원회에서 대학령, 학위령 등 향후 대학교육의 근간이 되는 법령 초안을 작성했다. 1946년 변호사 시험위원에 위촉되었고, 1947년 6월 과도정부 사법부 산하 법전편찬위원회 위원(헌법분과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48년 6월 대한민국 헌법기초위원으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위한 제헌 헌법의 초안을 작성했다. 1948년 8월 초대정부에서 법제처장이 되어 1949년 3월까지 재임했다. 1949년 『헌법의 기초이론』(일조각), 『헌법해의(憲法解義)』(명세당)를 발간했다. 1949년 고등고시위원으로 위촉되어 1955년까지 역임했다.


고려대학교 총장 취임

1950년 한국전쟁사건이 발발한 후 고려대학교 임시관리책임자, 중앙선거위원회 위원, 외교위원회 위원을 맡았다. 1951년 대한민국 교수단 단장, 부산 전시연합대학 총장(4∼8월), 고려대학교 총장서리로 활동했다. 같은 해 한일회담 대표로 위촉되어 7월부터 준비작업차 도일해서 10월부터 회담에 참여하였지만 1952년 5월 한일회담이 결렬되면서 귀국하였다. 같은 해 9월 고려대학교 총장에 취임했고, 미국 하버드대학교에 연구원으로 도미하였으며, 10월 UN 한국대표단 법률고문에 임명되었다. 1953년 대한국제법학회 회장에 선출되어 1968년까지 활동했다.
1954년 대한민국학술원 회원과 대한교육심의위원회 위원, 1955년 서울하바드클럽 회장 · 대학조사위원회 위원 · 교육특별심의회 위원 및 부의장, 1956년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위원 및 부위원장 · 한국연구원 창립이사로 위촉되었다. 부인이었던 박복례가 사별[2]하자 1956년에 이용재와 재혼하였다. 1957년 영국 정부가 초청하여 영국을 시찰했고, 한국공법위원회 회장과 한국법철학회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7대 국회의원 당선

1958년 서울특별시교육회기관 회장으로 임명되었고, 재일교포 북송반대 민간사절로 제네바 국제적십자사에 파견되었다. 같은 해 대한민국학술원 공로상을 받았고 한일회담 대표로 일본에 갔다. 1960년 9월 대한교육연합회 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10월 한일회담 수석대표로 임명되었다. 1961년 5.16 군사정변로 한일회담을 중단하고 귀국해서 6월 국가재건국민운동 본부장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UN한국협회장에 선임되었다. 1962년 세계교육자대회에 참석했고 문화훈장(대한민국장)을 받았다. 1963년에 『젊은 세대에게 부치는 서(書)』(고려대학교출판부)를 출판했고, 1964년에는 1938년에 발표한 단편소설 「창랑정기(滄浪亭記)」 등을 묶어 소설집 『창랑정기(滄浪亭記)』(정음사)를 출간했다.

1965년 10월 고려대학교기관 총장을 임기만료로 사임하고 정치가의 길로 들어서 1966년 9월 민중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1967년 1월 민중당과 신한당이 합당한 신민당에서 윤보선인물을 대통령 후보로 하고 자신은 총재로 취임했으며, 7월 종로구 신민당 소속으로 7대 국회의원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70년 1월 뇌졸증으로 쓰러진 뒤 신민당 총재직을 사임했다. 1974년에는 민주회복 국민회의에 참가했다. 이후 그는 병석에 누웠지만 박정희인물 정권의 회유와 지지 요청을 여러 번 거절하였다. 1971년 종로구 국회의원직에서 물러난 뒤 사실상 정계은퇴를 하였다.

1974년 11월 민주회복국민회의 발족에 참여하여 12월 고문에 추대되었다. 1980년 2월 국토통일고문회의 고문과 국정자문위원에 위촉되었고, 1981년부터 대한민국학술원 원로회원(헌법)이 되었다. 정치활동을 하는 동안 『구름 위의 만상(萬想)』(일조각, 1966), 「편편야화(片片夜話)」(『동아일보』1974.3.1.∼5.16.), 『젊은 날의 자화상』(박영사, 1976), 『양호기(養虎記)-보전 · 고대 35년의 회고』(고대출판부, 1977), 『젊음이 깃칠 때』(휘문출판사, 1978), 『다시 창랑정에서』(창미사, 1985) 등을 발표했다.


사망

1983년 12월 뇌현전증으로 쓰러져 입원했다. 이후 1983년부터 투병하다가 1987년 8월 30일에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사망했다. 사망 당시 그의 나이 향년 82세였다.


사후

1987년 8월 30일 사망했을 당시 고려대학교에서 빈소를 마련해 그의 추모식을 거행했다. 그러나 당시 고려대학교 내 일부 교수와 학생들이 “고려대가 친일행위자나 국정자문위원의 빈소가 될 수 없다!”며 철거를 주장해 이른바 ‘ 현민 빈소 사건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선정되었다. 2002년 공개된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에도 들어 있으며, 1944년 《신시대》에 실은 〈우리가 반드시 승리한다〉 등 총 8편의 친일 작품명이 공개되었다. 2005년 고려대학교 교내 단체인 일제잔재청산위원회가 발표한 '고려대 100년 속의 일제잔재 1차 인물' 10인 명단에 포함되었으며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그에 반해 2008년 8월, 학술지 ‘ 한국사 시민강좌학술지’ 하반기호(43호)에서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특집 - 대한민국을 세운 사람들’ 을 선발, 건국의 기초를 다진 32명을 선정할 때 법률, 경제 부문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





연구


저술 및 작품


제1호 유진오 제헌헌법 초고

유진오는 1947년 가을부터 남조선과도정부 사법부 조선법전편찬위원회의 헌법기초분과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본격적으로 헌법을 집필했다. 제1회 초고의 조문 끝에는 유진오가 참조한 각국 헌법안이 있는데, 독일 바이마르 헌법, 미국 오스트리아, 일본(대일본제국헌법과 일본국헌법), 중화민국, 필리핀, 프랑스, 프로이센 헌법 등이다.





논저 목록

[3]

연번 논문명 학술지&출판사 간행연월일
A001 스리 조선지광 1927.
A002 신흥 - 1929.
A003 미적 - 1930.
A004 귀향 - 1930.
A005 송군 남매와 나 - 1930.
A006 김강사와 T교수 신동아 1935.
A007 창랑정기(滄浪亭記) 동아일보 1938.
A008 신질서 건설과 문학 삼천리 1939.
A009 일사분란의 그 훈련 삼천리 1940.
A010 거대한 융화 문학보국 1943.
A011 병역은 곧 힘이다 매일신보 1943.
A012 우리가 반드시 이긴다 신시대 1944.
A013 헌법의 기초이론 일조각 1949.
A014 헌법해의(憲法解義) 명세당 1949.
A015 젊은 세대에게 부치는 서(書) 고려대학교출판부 1963.
A016 창랑정기(滄浪亭記) 정음사 1964.
A017 구름위의 만상(萬想) 일조각 1966.
A018 편편야화(片片夜話) 동아일보 1974.
A019 젊은 날의 자화상 박영사 1976.
A020 양호기(養虎記)-보전 · 고대 35년의 회고 고대출판부 1977.
A021 젊음이 깃칠 때 휘문출판사 1978.
A022 다시 창랑정에서 창미사 1985.





데이터


Triple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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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son: 유치형 Person: 유진오 A hasSon B
Person: 유진오 Institution: 서울재동공립보통학교 A gradutes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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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son: 유진오 Book: 김강사와 T교수 A creator B
Person: 유진오 Institution: 고려대학교 A worksAt B



Timeline





Network Graph






참고자원







주석


  1. 대한제국 한성부
  2. 사별한 년도는 확인하지 못하였다.
  3. 이 부분은 참고자료에 나와있는 논저를 정리한 것으로, 확인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