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낙준"의 두 판 사이의 차이

North Korea Human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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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한국의 국악인이자 거문고 연주가이다. 또한 백낙준은 대한제국 조선 황조 시대와 일제강점기 시대 거문고 산조를 창시한 명인이자 신쾌동(申快童)의 스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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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한국의 국악인이자 거문고 연주가이다. 또한 백낙준은 대한제국 조선 황조 시대와 일제강점기 시대에 거문고 산조를 창시하였으며 {{TagGroup|한국독립당}} 문화예술행정특보위원 직위를 맡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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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백낙준은 충청남도 청양군 정산면에서 아버지인 백명수와 어머니인 박길주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1896년 20세 되던 해 아버지가 부른 판소리 가락과 시나위 가락을 처음으로 거문고에 옮겨 탄주(彈奏)했고, 뒤에 독주음악으로 체계화시킨 것이 거문고산조이다.<ref>宋芳松,『한겨레음악인대사전 서울: 보고사, 2012년, 397~98쪽</ref>  31세가 되는 1914년에는 논산군 강경읍 염천리 37번지로 이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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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7월 19일 (금) 23:08 기준 최신판

👩🏻‍🏫본 문서는 서울대학교 " 24-1 미디어위키를 활용한 역사 데이터 편찬" 수강생 최지원(CNU2024)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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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낙준 (白樂俊)
백락준.jpg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한글명 백낙준[1] 한자명 白樂俊 영문명 가나명 이칭 백운학
성별 남성 생년 1876 (또는 1882, 1884)년년 몰년 1930 (또는 1933, 1934, 1935)년년 출신지 조선 충청도 청양군 정산면 덕성리 전공 음악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한국의 국악인이자 거문고 연주가이다. 또한 백낙준은 대한제국 조선 황조 시대와 일제강점기 시대에 거문고 산조를 창시하였으며 한국독립당단체 문화예술행정특보위원 직위를 맡기도 하였다.



생애


생애초기 및 성장

백낙준은 충청남도 청양군 정산면에서 아버지인 백명수인물와 어머니인 박길주인물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1896년 20세 되던 해 아버지가 부른 판소리 가락과 시나위 가락을 처음으로 거문고에 옮겨 탄주(彈奏)했고, 뒤에 독주음악으로 체계화시킨 것이 거문고산조이다.[2] 31세가 되는 1914년에는 논산군 강경읍 염천리 37번지로 이주하였다.


생애 중기

거문고산조의 창작가로, 기악명수로, 교육자로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때는 40대의 나이에 이른 1910년대 중엽부터였다.[3] 충남 강경을 중심으로 전라도에서 주로 활동하던 백낙준은 1920년대 말 서울에 올라와 무대공연을 많이 펼치면서 1930년에 자기의 거문고산조를 레코드에 취입했다.[4] 이를 계기로 거문고 명수로서 그의 명성도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5] 당시에 전해오던 가야금 산조 양식을 본따서 거문고 산조를 작곡하여 연주하였다고 전한다.[6] 그의 음악적 재능은 폭넓었기 때문에, 경서도잡가(놀량·방아타령·양산도)의 거문고반주를 맡았고, 신방곡(神房曲)의 취입 때 거문고주자로 동참하였다.[7] 이영산홍과 함께 거문고로 취입한 "개성난봉가"·"놀량"·"신방곡"·"신아위" 등을 비롯해 현금산조(玄琴散調)는 일본 빅타음반에 전한다. [8]1933년 거문고산조(잔머리·진양조) 방송을 위해 경성방송국(京城放送局)기관에 출연하였다.[9]


제자양성

그가 1920년대부터 1930년대 사망에 이르기까지 거문고의 제자 양성에 힘을 쓴 결과, 김종기인물,신쾌동인물, 박석기인물 등 거문고의 명수들을 길러냄으로써 백낙준의 거문고산조는 그들에 의해 계승될 수 있었다.[10]


생몰년대

그의 생몰연대는 1876-1930(조위민 설), 또는 1875-1935(김기수 설) 등등 다양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신쾌동이 1929년부터 4년간 수업을 받았다는 구술, 1933년 백낙준의 추모방송을 했다는 점, 그리고 그의 부인 정규례인물가 1933년 직접 사망 신고를 했다는 점을 미루어 보아 1933년 사망설이 더 일리 있어 보인다. [11]





연구


<거문고산조>

산조는 주로 시나위가락을 장단이라는 틀에 넣어서 연주하는 기악독주 음악으로 거문고산조는 백낙준이 처음으로 연주했다[12]. 백낙준의 거문고산조는 장단형에서, 기본형인 진양조, 중모리, 자진모리 외에도 중중모리, 엇모리와 같은 새로운 장단형을 이미 포함하였다.[13] 또한 선율형태나 리듬형태에서도 현행 산조에 비해 단조롭기는 하지만, 연주기법면에서 볼 때 거문고의 특성을 충분히 살려 독주음악으로 손색이 없었다.[14] 이렇게 백낙준이 틀을 잡기는 하였으나, 봉건사상에 젖어 있는 일부층이 이른바 백악지장인 거문고로 천한 음악을 연주한다고 심하게 반발하는가 하면 상류층이 즐기던 정악세에 눌려, 초기에는 빛을 보지 못하다가 개화의 물결을 타고 점차 음악적 가치를 인정받기 시작하였다.[15] 이 거문고 산조의 음악적 짜임새는 오늘날 연주되는 산조의 기본 틀거리로서 구실을 다할 뿐 아니라 후대 음악인들에게 “거문고의 특성을 충분히 살려 완전히 기악화 되어 있다”고 평가받고 있다.[16]





데이터


TripleData

Source (A) Target (B) Relationship
Person: 백명수 Person: 백낙준 A hasSon B
Person: 신쾌동 Person: 백낙준 A hasMaster B
Person: 백낙준 Group: 한국독립당 A isMemberOf B



Timeline


Timeline Google Spreadsheet

Network Graph






참고자원







주석


  1. 본명은 백학준
  2. 宋芳松,『한겨레음악인대사전 서울: 보고사, 2012년, 397~98쪽
  3. 宋芳松,『한겨레음악인대사전 서울: 보고사, 2012년, 397~98쪽
  4. 宋芳松,『한겨레음악인대사전 서울: 보고사, 2012년, 397~98쪽
  5. 宋芳松,『한겨레음악인대사전 서울: 보고사, 2012년, 397~98쪽
  6. 宋芳松,『한겨레음악인대사전 서울: 보고사, 2012년, 397~98쪽
  7. 宋芳松,『한겨레음악인대사전 서울: 보고사, 2012년, 397~98쪽
  8. 宋芳松,『한겨레음악인대사전 서울: 보고사, 2012년, 397~98쪽
  9. 宋芳松,『한겨레음악인대사전 서울: 보고사, 2012년, 397~98쪽
  10. 宋芳松,『한겨레음악인대사전 서울: 보고사, 2012년, 397~98쪽
  11. 김우진. 「백낙준의 생애 = The Life of Paek Nak-chun」, 『한국음악사학회』 35.- (2005): 175-208.
  12. (조위민) "거문고산조 (거문고散調)", 『대한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13. (조위민) "거문고산조 (거문고散調)", 『대한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14. (조위민) "거문고산조 (거문고散調)", 『대한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15. (조위민) "거문고산조 (거문고散調)", 『대한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16. (조위민) "거문고산조 (거문고散調)", 『대한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